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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제주 해군기지 건설 계획은 매우 충격적" | - 노암 촘스키 2011-05-30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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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제주 해군기지 건설 계획은 매우 충격적"
[오마이뉴스] 2011년 05월 30일(월) 오후 02:24



세계적인 석학 놈 촘스키(Noam Chomsky) 미국 MIT 교수가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을 크게 우려했다.


촘스키 교수는 제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평화운동가인 고길천 화백에게 보낸 서신에서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에 대한 매우 불길한 계획들에 대해 전해 듣는 것은 상당한 충격"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제주도가 평화의 상징이 될 만한 놀라운 과정들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소식들은 제겐 감동적"이라며 "저는 선생님과 뜻을 함께하시는 분들이 행하시는 노력에 대해 존경과 찬사를 보낸다"고 해군기지 건설반대 투쟁을 펼치고 있는 이들을 격려했다.


특히 촘스키 교수는 "더 많은 동역자들이 이러한 용기 있고 반드시 필요한 일에 동참하게 되기를 기원한다"며 해군기지 반대투쟁에 많은 이들이 함께해줄 것을 기대했다.


촘스키 교수는 제주 4·3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저술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지난 2003년 "제주 4·3의 참극은 미국에도 책임이 있다"며 "미 대통령이 제주에 가서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번 해군기지 관련한 촘스키의 메시지도 고길천 화백과 제주 4·3과 4·3진상규명 운동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던 중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촘스키 교수 외에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세계 여러 나라 활동가와 단체들의 연대활동도 점차 거세지고 있다.


지난 2009년 제주 해군기지 건설예정지를 둘러보았던 세계적인 반전평화운동가 브루스 개그넌(Bruce K. Gagnon) '우주와 핵무기 반대 글로벌네트워크 사무총장은 "옥중 단식 투쟁을 벌이고 있는 양윤모 영화평론가와 연대한다"며 동조 단식을 시작했다.


개그넌은 자신의 블로그에 "미국 해군 이지스함이 들어오기 위한 부두를 만들기 위해 강정의 돌들을 콘크리트로 덮고 파괴한다는 점에서 깊은 우려를 느낀다"고 말했다. "미사일방어시스템이 갖춰진 군함들이 제주도 강정에 출현하고 이로 인해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긴장이 고조되어 미국의 중국에 대한 군사견제가 계속되는 것을 어떻게 보고 있겠냐"는 것이다.


지난 13일부터 17일까지 '오키나와 평화행진'에 참여했던 오키나와 주민들과 단체대표가 강정마을과 연대를 공식 밝혔다. 이들은 미군의 신기지 건설계획을 백지화시킨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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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링턴 국립묘지, 위인전기 속 영웅 케네디를 만나다 | 역사란 무엇인가? 2011-05-30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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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링턴 국립묘지, 위인전기 속 영웅 케네디를 만나다
[비영리단체 활동가 해외연수] 글로벌 해피로그인 ④
11.05.29 16:29 ㅣ최종 업데이트 11.05.29 16:29 이윤기 (ymcaman)

비영리단체 활동가 해외연수로 워싱턴에 도착한 첫 날, 시차 적응 안 되어 축축 쳐지는 지친 몸으로 알링턴 국립묘지를 방문하였습니다. 미국 전쟁 영웅들을 꼭 만나야 한다는 무슨 사명감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여행사의 배려(?) 때문에 공항에서 워싱턴으로 이동하면서 맨 처음 들런 곳이 바로 알링턴 국립묘지입니다.

 

미국인들에게는 굉장히 의미있는 장소인 때문인지 흐리고 추운 날씨였지만 많은 관람객들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알링턴 국립묘지는 포토맥 강을 사이에 두고 워싱턴 D. C.와 마주보고 있는 곳인데 200㏊가 넘는 커다란 공동묘지입니다.

 

  
알링턴 하우스
ⓒ 이윤기
워싱턴

여행사 가이드 '데니 정' 선생님은 케네디 묘역으로 걸어가는 길에 연도를 줄줄이 꽤면서 미국 역사와 알링턴 묘지에 대하여 설명을 해주었습니다만 제 귀에는 별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묘지 중앙에 있는 아테네 양식의 건물 '알링턴하우스'와 로버트 리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익숙하지 않는 미국 역사여서 별로 기억에 새겨지지는 않았습니다. 리 장군은 남북 전쟁에 참가하였던 유명한 장군인 모양인데, 이 건물은 알링턴하우스라고 불리며 로버트 E.리 장군의 기념관으로 쓰인다고 하였습니다.

 

이곳에는 미국 남북 전쟁에 참전하였던 군인들, 그리고 미국독립전쟁 때 죽은 몇몇 장교들을 비롯해, 미국이 참전한 모든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고 합니다.

 

많은 군사지도자들과 저명인사들도 이곳에 묻혀 있다고 하는데, 존 J.퍼싱 장군, 리처드 E.버드 제독,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로버트 E.피어리, 조너선 웨인라이트 장군, 조지 C.마셜 장군, 로버트 토드 링컨, 피에르 샤를 랑팡 소령,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존 F.케네디, 로버트 F. 케네디 등 입니다.

 

  
알링턴 국립묘지, 케네디 묘역
ⓒ 이윤기
케네디

 

위인 전기 속의 옛 영웅 케네디 무덤에서

 

그 중에서 제게 익숙한 이름은 케네디 형제 뿐입니다. 그중에서도 익숙한 이름은 대통령을 지낸 존 F.케네디는 한 사람  뿐 입니다. 철 없던 어린 시절에 읽은 위인 전기 전집 시리즈에 미국 제32대 대통령을 지냈던 존 F.케네디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어린 소년이었을 때, 이 유명한 취임 연설문(어른이 된 후에  케네디가 이 연설문을 베꼈다는 것을 알았지요)에 감동하였고,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 하려고 하였을 때, 핵전쟁을 불사하겠다며 소련의 미사일 배치를 막아낸 자유 세계의 영웅(?)에게 감동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에는 젊은 나이에 암살 당한 영웅(?)에 대한 경외감 같은 것도 있었고, 그의 묘지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있다는 것도 아주 멋있게 생각하였답니다. 책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기도 하였지만, 그 때는 케네디가 아주 멋있고 훌륭한 미국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그의 전기를 수십 번도 더 읽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좀 더 철이 들어 미국이라는 나라를 몰랐다면, 어쩌면 워싱턴 케네디 묘지 앞에 서서 감격하였을 수도 있었는데. 미국이라는 나라를 많이 알고 난 지금은 한 때 영웅이었던 케네디의 무덤도 그냥 무덤일 뿐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위인 전기에 나와 있던)영원히 발전하는 '자유와 민주주의의'를 상징한다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도 별 감동을 주지 못하더군요.

 

알링턴 국립묘지 케네디 무덤에 서서 내 어린 시절 위인을 다시 한 번 떠 올려보았습니다. 그 시절에는 위인 전기에 나온오는 또 다른 미국인 영웅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과 케네디의 개인사를 줄줄 외울 수 있었지요. 늦기 전에 철이 들어 그들을 영웅으로 기억하고 있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제 아이들이 읽는 위인전기 전집에는 케네디나 맥아더 같은 미국인들이 빠진 자리에 김구, 장준하, 전태일 같은 분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여간 다행스럽지 않습니다.

 

  
케네디 묘역
ⓒ 이윤기
재클린

 

재혼한 영부인도 국립묘지에...우리나라였다면?

 

케네디 묘지에는 우리와는 다른 미국인들의 자유스러운 면을 볼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케네디의 아내였던 재클린의 묘 입니다. 케네디가 죽은 후에 재클린은 그리스 선박 재벌과 재혼을 하였습니다.

 

아마 우리나라였다면 외국인과 재혼한 영부인 재클린이 전 남편이었던 케네디 대통령 옆에 나란히 묻히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사생활의 '자유'는 우리보다 앞서 있다고 여겨지더군요.

 

아 ~ 그리고 이건 그냥 제 느낌인데요. 김해 봉하마을에 있는 노무현 대통령의 박석 무덤과 느낌이 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무덤에 봉분이 없는 탓인지, 아니면 박석 묘역의 느낌 때문인지 왠지 저는 그냥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미국 참전 군인들의 무덤
ⓒ 이윤기
알링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전쟁에서 죽어갔는데, 제 2차 대전이 끝난 후에 지구상에는 단 하루도 전쟁을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하는데, 그 대부분의 전쟁에는 미국이 관련되어 있는데.수 많은 이름없는 죽음들 앞에서 미국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였습니다.

 

  
힘으로 지키는 미국의 자유
ⓒ 이윤기
자유의 여신상

 

알링턴 국립묘지 입구의 기념관에서 미국이 주장하는 '자유'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을 하나 발견하였습니다. 그림을 그린 사람은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희생된 수 많은 젊은 죽음들을 표현하였는지 모르지만, 그림을 보는 저에겐 '자유의 여신상'이 상징하는 미국인들의 자유는 전쟁과 총, 칼 그리고 무력으로 유지되는 이 나라 권력 집단의 자유라는 느낌이 확 들더군요.

 

끝도 없이 서 있는 하얀 비석들을 보면서 자신들에게 죽음을 안겨 준 전쟁의 의미를 얼마나 알고 죽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 국립묘지나 마찬가지겠지만, 알링턴 국립묘지 역시 그 동안 저지른 전쟁 살인을 반성하는 장소가 아니라 수 많은 젊은이들에게 조국을 위해(?) 기꺼이 전쟁에 참가하도록 용기(?)를 심어주는 장소인 것이 못내 불만스러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제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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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는 왜 중종에게 개개고도 무사했나 | - 조선시대 2011-05-30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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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는 왜 중종에게 개개고도 무사했나
[역사, 그 밖의 이야기들 11편] 동아시아에서 충신의 조건
11.05.30 16:13 ㅣ최종 업데이트 11.05.30 16:13 김종성 (qqqkim2000)

  
조선시대 선비의 전형인 조광조. 출처: 고등학교 <한국사>.
ⓒ 비상교육
조광조

충신의 조건은 무엇일까? 임금이 가자고 하면 교회든 절이든 군말 않고 따라가는 사람이 충신일까?

 

이 점에서, 조선시대 선비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계적으로 귀감이 될 만하다. 물론 선비들이라고 해서 항상 옳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확신하는 문제에서만큼은 임금 앞에서도 소신을 잃지 않았다.

 

그 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서 조선 왕실의 종교 문제를 들 수 있다. 유교를 국시로 삼았는데도 조선 왕실에서 신선교(혹은 도교)와 불교에 대한 신앙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래서 조선시대 선비들은 신선교나 불교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임금에 맞서 수백 년간 투쟁을 벌였다.

 

물론 어느 종교가 옳은가는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이 글은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한 선비들의 소신을 다룰 뿐이다. 종교 문제와 관련된 선비들의 소신을 입증하는 두 건의 사례를 살펴보자.  

 

조선시대 '충신의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가뭄이 들 때 기우제를 지낸다든가 왕족이 아플 때 하늘에 비는 역할은 신선교가 수행했다. 소격서(昭格署)라는 기구가 이런 책임을 맡았다. 그래서 이 기구는 선비들에게 눈엣가시가 되었다.

 

이 점에서, 가장 과격성을 보인 인물은 조광조였다. 그는 정권을 잡은 뒤 정부 전체를 움직여 소격서 폐지운동을 전개했다. 중종이 "이것만은 안 된다"며 버티자, 그는 승정원(비서실)까지 동원해서 사실상의 '정부 총파업'을 단행했다.

 

그래도 중종이 말을 안 듣자, 그는 중종 13년 9월 1일(1518.10.5)부터 승정원에서 밤샘 농성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궁궐 안에서 목청껏 구호를 외쳐댔다. 결국 9월 2일 밤, 중종은 굴복하고 말았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중종이 '지금은 밤이 깊었으니 내일 처리하자'고 했지만, 조광조는 그것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처리해 달라고 떼를 쓴 것이다.

 

  
소격서 터. 서울시 종로구 소격서동 소재.
ⓒ 문화재 지리정보 서비스
소격서 터

조선시대의 후궁들 중 상당수는, 남편이 죽은 뒤 궁을 나와 정업원·안일원·자수궁 같은 비구니 사찰에 들어가 부처를 모시면서 여생을 마쳤다. 유교국가의 왕실에서 이처럼 불교를 신봉했으니, 선비들이 얼마나 분개했을지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유교를 신봉하는 신하들은 '후궁들의 비구니 행(行)을 금지시켜 달라'고 왕에게 끊임없이 요청했지만, 이것은 조선왕조의 절반이 훨씬 넘도록 고쳐지지 않았다. 신하들이 임금을 마음을 겨우겨우 돌리는 데 성공한 것은 제18대 현종 때인 1661년이었다.

 

이때 왕명을 받아낸 신하들은 한성에 있는 모든 비구니 사찰을 철폐하고 관련 건물까지 싹 다 허물어 버렸다. 이때 자수궁에서 빼낸 목재가 성균관 비천당 건물에 사용되었다. 

 

"아니되옵니다"가 미덕인줄 알았던 조선의 선비들

 

  
성균관 비천당.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 소재.
ⓒ 김종성
비천당

저명한 일본학 연구자인 루스 베네닉트는 <국화와 칼> 제6장에서, 일본에서는 충효가 최상의 가치이지만 중국에서는 덕(德) 혹은 인(仁)이 충효보다 상위에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인은 군주의 명령을 최상위에 두지만, 중국인은 그것이 보편적 가치에 부합하는지를 먼저 따져본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중국인들과 똑같았다. 아니, 중국인들보다 한 술 더 떴다. 그들이 그렇게 된 데는 유교 경전의 영향이 무엇보다 컸다. '충신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유교의 가르침이 그들의 인격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이다. 이와 관련된 유교 경전 몇 구절을 살펴보자.

 

<맹자> '공손추' 편에서는 "장차 큰일을 할 군주에게는, (쉽게) 부르지 않는 신하가 반드시 있다"(將大有爲之君, 必有所不召之臣)고 했다. 임금이 큰 일을 하려면, '쉽게 부를 수 없는 신하' 즉 '대하기 힘든 신하'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자신들이 그런 신하가 되어야 한다고 배웠다. 그들은 왕의 명령이 보편적 가치관에 부합할 때만 왕에게 복종했다. 왕이 틀렸다고 생각되면, 그들은 조광조가 그랬던 것처럼 한밤중에라도 임금을 찾아가 괴롭히곤 했다. 그들은 임금이 대하기 편한 신하가 아닌, 임금이 대하기 곤란한 신하가 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들은 "아니 되옵니다!"를 입에 달고 살았다. 신하들이 임금 앞에서 입버릇처럼 "아니 되옵니다!"를 외치는 것은 한국 사료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맹자>의 나라 중국에서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다.

 

선비들의 필독서인 <서경> '여형' 편에도 '충신의 조건'에 관한 메시지가 있다. 이것은 주나라 목왕(기원전 947년 사망)이 왕실 구성원들에게 한 말이었지만, 그들 역시 신하였으므로 이 메시지는 신하 일반에 대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형벌하라 하더라도 (너희는) 형벌을 집행하지 말고, (내가) 용서하라 해도 (너희는) 용서하지 말라."(雖畏勿畏, 雖休勿休) 참고로, 주나라 시대에는 외(畏)라는 글자가 '형벌'의 의미로도, 휴(休)라는 글자가 '용서'의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목왕의 메시지는 군주의 결정을 무조건 따르지 않고 군주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신하가 되라는 것이었다. 군주의 비위를 맞추는 사람이 아니라 군주를 바로잡는 사람이 진정한 충신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신하가 아니라 군주 자신이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만큼 한국·중국에서는 임금 앞에서 소신을 지키는 것이, 군주와 신하가 공감하는 '충신의 조건'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군주가 죽으라면 무조건 죽는 신하, 죽기 힘들면 죽은 척이라도 하는 신하는 진정한 충신이 아니었다. 군주가 옳으면 충성하고 군주가 그릇되면 비판하는 게 이상적인 충신이었다. '까라면 까는 신하'는 충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유교의 군신관계

 

  
조광조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도봉서원. 서울시 도봉산 소재.
ⓒ 김종성
도봉서원

유교는 이미 상당부분 시대에 뒤처졌지만, 군신관계에 관한 유교의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빛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의 통치자와 부하 관료의 관계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다. 

 

통치자에게 잘 보이겠다는 일념 하에 그의 말이 옳든 그르든 무조건 맹종하는 관료. 통치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신(神)도 바꿀 수 있는 관료. 통치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면, 개종까지는 않더라도, 다니던 교회 말고 다른 교회, 다니던 사찰 말고 다른 사찰로 갈 수 있는 관료. 이런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의 충신이 될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은 군주에게는 물론 국민에게도 진정한 충신이 될 수 없다.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면, 통치자의 종교까지 바꿀 수 있는 관료. 꼭 필요하다고 확신하면, 통치자를 자신이 다니는 교회나 절로 모셔올 수 있는 관료. 그런 신하가 유교 경전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충신이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통치자에게는 물론 국민에게도 진정한 충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진정한 충신이라면, 통치자의 종교를 바꾸거나 혹은 교회·사찰을 바꾸지는 않더라도 신앙의 세부적인 문제와 관련하여서도 통치자 앞에서 소신을 지켜야 하지 않을까. 사적인 자리에서 통치자가 성경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 "나는 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제일은 '소망'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다면, 진정 소신이 있는 관료는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성경 말씀을 직접 읽어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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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도망쳐 떠난 곳에 대통령이 도망쳐 왔네 | - 조선시대 2011-05-30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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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도망쳐 떠난 곳에 대통령이 도망쳐 왔네
역사유적과 문화유산 답사로 보는 '대구의 풍경'(30) 동구 일원
11.05.30 12:28 ㅣ최종 업데이트 11.05.30 12:28 정만진 (daeguedu)

대구 동구에 있는 역사유적과 문화유산을 두루 보려면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왜냐하면, 대구 최고의 '보물' 보유지인 팔공산이 동구에 있기 때문이다. 또 동구를 답사하는 길목에 망우공원도 있어서 그곳을 둘러보는 데에도 만만찮은 시간이 걸리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동구를 답사하는 여정에 팔공산을 포함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팔공산은 별도로 날을 잡아 느긋하게 다녀야 옳다. 다만 망우공원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수성구에 소재하지만 심리적으로는 동구의 출입구에 있으므로, 오가는 길에 둘러보는 것이 좋다. '도랑 치고 가재 잡고' 하자는 말이다.
 
여정은 둘 중의 하나. 망우공원- 백불고택- 용암산성- 첨백당- 도동 측백수림- 문창공영당- 불로고분군- 독좌암- 신숭겸장군 유적지- 신암선열공원의 순으로 둘러보는 것이 하나요, 다른 하나는 그 역순이다. 그렇게 다녀야 '왔다갔다, 오락가락' 헤매지 않고 경제적인 답사를 할 수 있다. 
 
  
망우공원의 영남제일문
ⓒ 정만진
망우공원
망우공원은 대구 동구를 떠나 경북 영천 방향으로 가는 출입구에 있다. 물론 동구의 끝은 망우공원 옆을 흐르는 금호강변의 동촌과 반야월이지만, 사람들의 의식은 망우공원을 넘을 때마다 '대구를 떠나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만큼 강을 건너는 행위는 사람의 지리적 정체의식을 지배하는 까닭이다. 강은 곧 국경이기도 하고, <공무도하가>나 <서경별곡>이 말해주는 것처럼 이별의 상징적 무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망우공원에는 볼 것도 많고 생각해볼 것도 많다. 무엇보다도 그곳에는 임진왜란 방어의 민간인 주역인 홍의장군 곽재우의 동상이 있고, 그를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임진왜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임란의병관도 산뜻하게 지어져 있다. 친일파 박중양에 의해 1906년-1907년 허물어진 대구 읍성의 남문이었던 영남제일문도 1980년 이곳에 복원되어 있고, <비내리는 고모령> 노래비도 있다.
 
그뿐이 아니다. 대구의 독립운동사에서 총본부 역할을 한 조양회관도 있다(1922년 건립). 조양회관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일 대구의 청년들이 가장 먼저 뛰쳐나와 만세를 불렀던 건물이다(1982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  
 

  
백불고택 본채와 사랑채
ⓒ 정만진
백불고택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마시던 옥천이 지금도
 
금호강을 건너 동촌 안에서 왼쪽으로 비행장 담을 타고 들어가면 둔산동에 닿는다. 둔산은 왕건의 군대가 주'둔'한 '산'이라는 뜻이다. 본래 이름은 옻골마을인데, 이 마을은 안으로 들어서면 대단한 옛날 와가들이 즐비하여 답사객을 황홀하게 만든다.
 
옻골마을의 한옥들 중에서 한가운데에 있는 저택이 흔히 백불고택이라고 불리는 '경주최씨종가'이다. 대구에 남아 있는 주택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본채는 1694년(숙종 20)에 지어졌고, 사랑채는 1905년(고종 42)에 중건되었다. 이 고가들에 백불고택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최씨 문중이 낳은 대학자 최흥원(崔興遠)의 호가 백불암(百弗庵)이기 때문이다. 
 
백불고택에서 동촌으로 곧장 나오지 않고 고속도로 아래를 지나면서 바로 우회전하면 그대로 도동에 닿는다. 이 길의 끝도 고속도로가 하늘을 덮어 사람을 답답하게 한다. 고속도로 아래의 길가에서 오른쪽 산비탈을 보면 주차장이 숨은 듯 들어앉아 있다. 주차장 끝에는 안내판이 하나 댕그마니 서 있다. 용암산성 일대와 옥천을 안내하는 표지판이다. 
 
정상까지 가는 데에는 30분가량 걸린다. 그리 멀지는 않지만, 계속 숲 사이를 걷는데도 제법 길이 가파른 탓에 산을 오르는 기분만은 충분히 느껴진다. 
 
답사객이 이 오름길을 오르는 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정상 우측 비탈에서 뜻깊은 샘 하나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정상 턱밑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이 떠 마시면서 결사항전했던 우물에서 아직도 물이 샘솟고 있는 신기한 광경을 볼 수 있다. 그 이름 옥천(玉泉)이 헛되지 않은 것이다.
 
또 하나는, 옥천 옆에서 바라보는 팔공산의 전경이 장쾌하게 사람의 마음에 사무쳐온다는 점이다.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지는 팔공산의 위세를 바라보노라면, 등산 끝에 밀려오는 노곤함은 순식간에 다 사라져버리고 문득 꿈을 꾸는 듯한 무아지경으로 젖어든다. 켜켜이 쌓인 산줄기들이 그려내는 아득한 빗살무늬는 애써 찾아온 답사객을 선사시대의 풍경 속으로 황홀하게 이끌어간다.
 

  
용암산성 옥천
ⓒ 정만진
용암산성
 
일제의 광기를 확인하고 싶다면 당장 도동으로
 
용암산성 옥천에서 내려와 다시 직진하면 100m도 못 가서 작은 다리를 건너게 된다. 거기서 우회전을 하자. 왕건이 견훤을 피해 반야월 방면으로 도주한 길을 한번 따라가보려는 것이다. 하지만 왕건이 앉아 있다가 사라졌다는 시량리[失王里]까지 가볼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 목적은 오늘 여정의 핵심으로 잡혀 있는 신숭겸장군 유적지 방문으로 충분히 달성되기 때문이다. 이 길에서는 다만 첨백당을 보는 것으로 마음을 넉넉하게 채우는 게 좋다.
 
첨백당은 단양 우씨들이 효자 우효중과 지조 있는 선비 우명식을 기리고, 자녀들의 교육을 행하기 위해 1896년(고종 33)에 지은 건물이다. 첨백당 답사는 마을 어귀에 늘어선 충신 효자 비석군부터 예사롭지 않게 눈길을 끌고, 건물 바로 앞에 즐비하게 자란 아름드리 나무들과 예쁜 연못도 마음을 사로잡지만, 특히 눈여겨볼 것이 따로 있다. 뜰에 말끔하게 자라 있는 소나무 한 그루이다. 그 이름 '광복 소나무'.
 
해방을 맞아 이 마을 청년들이 심었다. 소나무 앞에는 소박한 비석 하나가 서 있다. 비석에는 세로로 '解放 紀念(해방 기념)'이라고 새겨져 있다.
 
소나무도 사람 키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고, 비석도 무릎밖에 안 오는 조그마한 크기이지만, 그 앞에 서면 이 세상의 어느 기념석을 보는 것보다 더 진한 감동이 일어난다. 조금만 세속적 지위를 얻으면 제 돈도 아닌 국민의 세금으로 아무 데나 기념식수를 하고, 그 앞에 자기 이름 석자를 새겨넣은 사각형 기념석까지 세우는 일이 비일비재한 천박사회를 살면서, 이런 나무와 비석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잔잔한 기쁨이다. 사진의 대상이 되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지만, 이 소나무 앞에서만은 왠지 기념 촬영이 하고 싶다.
 

  
첨백당과 광복소나무
ⓒ 정만진
첨백당

길을 돌아나오면, 용암산성 옥천에서 내려와 주차장에 섰을 때 정면에 바라보이던 작은 봉우리, 개울가에 비스듬히 서 있는 향산(香山)을 눈에 담아야 한다. 너무 작아 산이라고 부를 것도 없지만, 그래도 평지에 불쑥 솟은 것이니 결코 봉(峰)은 아니다. 이름이 향산인 것은 향기가 나는 산이라는 뜻인데,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제1호인 측백수림으로 울창하게 뒤덮인 풍치를 보면 작명의 연유에 충분히 공감이 간다.
 
그런데 향산 앞에서 우리는 문득 말을 잊는다. 얼마 전까지는 어느 답사객도 보지 못했고, 얼마 후면 역시 그 누구도 보지 못하게 될 광경이,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다. 고사한 측백나무나 기타 잡목을 제거하기 위해 측백나무 울창한 절벽에 인부들이 올라가 공사를 했는데, 놀랍게도 사이사이에 시커먼 굴이 나타난 것이다.
 
일제가 판 전쟁용 석굴들이다. 천연기념물 측백나무 숲속의 암석을 깨고 뚫어 전쟁용 굴을 판 참혹상을 보면, 일제의 집요한 광기가 두 눈으로 생생하게 확인이 된다. 그런데 그 굴들은 지금만 볼 수 있다. 다시 숲으로 가려지면 앞으로 언제 다시 볼 수 있게 될지 모른다. 관심 있는 분이라면 오늘 당장 도동 측백나무 군락지로 발걸음을 재촉해야 하리라.
 

  
▲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1호 대구 도동 측백수림. 숲 아래에 일제가 판 동굴이 보인다.
ⓒ 정만진
천연기념물
 
삼국시대 고분이 181기나 남아 있는 불로동고분군
 
향산을 등지고 서서 정면으로 바라보면 집들 위로 작은 산이 보인다. 그 산 너머에 고분들이 운집해 있다. 바로 불로고분군이다. 만약 걸어서 답사여행을 하고 있다면 여기서부터 걸음을 내디디면 되고, 차량으로 이동 중이라면 잠깐 문창공영당에 들렀다 가도 되겠다.
 
문창공은 최치원을 말한다. 측백수림을 왼쪽에 두고 비스듬히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금세 나타난다. 영당(影堂)이니 최치원의 초상화를 모시고 있는 사당으로 알면 되겠는데, 불쑥 찾아온 일반인에게 1860년경에 그려진 전신 좌상(全身坐像)을 보여줄 리는 만무하니 지나친 욕심은 부리지 않아야겠다. 다만 경주최씨 문중이 1995년에 영당 옆에 세운, 대구 최대의 재사(齋舍) 경운재를 보며 찬탄을 거듭하는 것으로 허전한 마음을 달래면 족하리라. 

 

  
불로동 고분군
ⓒ 정만진
고분

  
왕건이 망연자실한 채 혼자 앉아 있었던 독좌암(사진의 우측 상단 부분)
ⓒ 정만진
왕건
불로동 안으로 들어가면 엄청난 고분군을 보게 된다. 본래는 현재 복원되어 있는 것들보다 훨신 더 많이 있었겠지만, 지금도 삼국시대의 것으로 여겨지는 고분을 181기나 볼 수 있다.
 
비산동, 대명동, 내당동 등지의 고분들이 도시 확장에 밀려 다 사라지고 없고 대구에는 불로동(봉무동, 도동 포함) 고분군만이 거의 유일하게 남았으므로, 대가야 고분군을 보기 위해 경북 고령으로 발검음을 하지 않는 한 불로동은 답사의 필수 여정이 될 수밖에 없다. 노(老)인이 보이지 않는다[不]고 왕건이 이 마을에 불로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지만, 불로동은 무수한 고분을 거느린 채 당당히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불로동에서 팔공산 방향을 바라보면 봉무동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왕건의 군(軍)대가 부서진[破] 고개인 파군재 아랫마을이다. 그러므로 왕건의 유적이 남아 있을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큰 도로 좌우에 남아 있는 독좌암과 독암서원이 바로 그것이다. 독좌암은 왕건이 혼자[獨] 앉아[坐] 있었던 바위[岩]라는 뜻이고, 독암서원의 이름도 역시 같은 어원에서 유래했다. 독좌암은 봉무정 바로 앞 개울가에 있다. 요즘의 동사무소 역할을 했던 봉무정은 개인(최상룡)이 세운 대구 지역 유일의 공공건물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1875년 건축).
 

  
신숭겸 유적지
ⓒ 정만진
왕건

 

신숭겸장군유적지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만

 

파군재에서 신숭겸 장군 동상을 쳐다보며 고개를 넘으면 지묘동에 들어간다. 신숭겸이 황포를 대신 입고 적을 속여 왕건을 무사히 구출해낸 신묘(妙)한 지(智)혜의 땅이라고 해서 마을 이름이 지묘동이 되었다. 마을 뒷산(山)이 곧 왕(王)건이 넘어서 도망을 친 왕산(王山)이다. 이곳이 곧 왕건이 대패하고 신숭겸이 죽은 곳이다.

 

왕산 바로 앞 일대는 신숭겸 장군을 제사 지내는 표충사를 비롯하여 표충단, 충렬당, 순절비 등등 유적과 건물들이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공식 이름은 신숭겸장군유적지이지만, 무심코 보면 한옥으로 된 건물을 여러 채 거느린 깔끔한 공원으로만 여겨진다. 그만큼 이 유적지는 단정하다. 내용으로든 형식으로든 신숭겸장군유적지는 괜찮은 답사지로 추천하여 전혀 손색이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곳에 서면 어쩐지 마음이 애잔해진다. 왕건이 신숭겸을 위해 세웠다는 지묘사는  조선시대도 아닌 고려 말에 이미 폐사되었고, 피비린내 나는 아비규환 속에 파묻혔을 장졸들의 비명 소리 또한 귀기울여 애써 들으려 해도 아득하기만 하다. 그저 신숭겸장군유적지에는 철 모르는 아이들과 그 부모의 유쾌한 웃음소리만 가득할 뿐이다. 이것이 정녕 역사무상인가.

 

장군의 유적지 앞으로 작은 도랑이 흐른다. 그 도랑 바로 너머는 대단지 아파트 숲이다. 한때 전직 대통령 한 분이 그 아파트의 80평인가 90평 되는 집에 살았는데, 그래서 그 아파트 덕분에 신숭겸유적지가 좀 더 유명해졌다. 그분은 지금도 저 안에 살고 계실까. 왕이 (서울로) 도망쳐 떠난 바로 그 자리에, 천 년 후 이번에는 대통령이 (서울에서) 도망쳐 왔으니, 이 지묘동은 풍수지리적으로 과연 어떤 땅일까.

 

  
신암선열공원
ⓒ 정만진
신암선열공원

신암선열공원은 자주와 독립을 위해 평생을 보내다가 이승을 떠난 대구 지역의 선열들이  모여 계시는 곳이다. 동구청에서 영진전문대학으로 가는 고개의 정점에서 오른쪽에 있다. 하지만 큰 도로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애써 골목 안으로 들어가 찾아보아도 동네 사람들의 웰빙용 공원처럼 활용되고 있는 모습에 마음만 아프다. 여기저기 산책을 하고 있는 저 주민들 중 한 사람이라도, 이곳에 묻힌 분들 중 어느 한 분의 성명이라도 아는 이가 있을까? 

 

신암선열공원은 이름부터 고쳐야 한다. 굳이 예를 들자면, 신암선열공원이라는 이름은 '국립대구박물관'을 '국립황금박물관'으로 개명하는 것과 같은 꼴이다. 대구에 한 곳뿐인 선열공원인데 어째서 동네 이름을 붙여놓았을까? 이런 작명은 선열공원의 위상을 땅바닥으로 끌어내린 행위나 마찬가지이다. 도대체 이건 어디에 건의해야 바로잡을 수 있을까? 오늘 여정의 마지막은 작은 궁금증으로 잔뜩 채워진 채 막을 내린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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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오공의 삼장법사가 실제 겪었던 사막 유령들은 | 기타 - 잡동사니 2011-05-30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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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오공의 삼장법사가 실제 겪었던 사막 유령들은...
[아이들과 함께 읽는 책 57]<서유기의 삼장법사, 실크로드에서 진리를 찾다>
11.05.29 12:40 ㅣ최종 업데이트 11.05.29 14:07 김현자 (ananhj)

  
<서유기의 삼장법사, 실크로드에서 진리를 찾다> 겉그림
ⓒ 아카넷주니어
실크로드

'실크로드, 삼장법사, 손오공(혹은 저팔계, 혹은 사오정), 드래곤볼, 현장스님, 대당서역기, 날아라 슈퍼보드, 서유기, 인도 여행기, 오아시스, 불교.'

 

깊이 연관된 단어들이다. 그런데 손오공과 삼장법사, <서유기> 혹은 <드래곤볼>을 알고 있다는 아이들에게 <대당서역기>와 현장스님에 대해 물으면 고개를 갸우뚱하기 일쑤다. 그 유명한 삼장법사가 현장스님이고, 현장스님이 <대당서역기>를 썼기에 <서유기>가 나올 수 있었는데 말이다.

 

삼장법사는 경전에 두루 통달한 현장스님(600-664)에게 붙였던 별칭이다. 스님이 실크로드를 따라 당시 천축국으로 불렸던 인도를 향해 16년간 구법 기행, <대당서역기>를 쓰고 이후 19년간 경전 번역에 매진했기 때문이다.

 

허영만 화백의 <날아라 슈퍼보드>, 故 고우영 화백의 <서유기>, 일본 만화 <드래곤볼> 등으로 우리에게 더 많이 알려진 <서유기>는, 현장스님의 이런 구법 기행과 <대당서역기>, 혜립의 <대자은사 삼장법사전> 등을 바탕으로 쓴 중국 명나라 장편소설이다.

 

현장스님과 손오공 등이 주인공인 이 장편소설은 모두 100회, 서유기 작가라는 증거는 충분하지 않지만 현재까지 오승은(중국 명나라, 1500~1582)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현장스님이 살았던 당시에는 아시아가 번성, 아시아의 문물들이 실크로드를 따라 세계로 뻗어나갔다.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양의 문물교류와 역할에 대해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배웠으니 생략하고.

 

그런데 실크로드는 카라반(대상) 교역을 하고자 아무 때나 쉽게 오고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아니었다. 어쩌다 간혹 형성된 오아시스 왕국에 의지하여 몇 개의 사막과 험난한 산맥들을 넘어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강도 혹은 도적들이 시도 때도 없이 출현했기에 위험했다.

 

삼장법사 현장은 629년 황제의 명을 어기고 몰래 중국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645년 성대한 환영을 받으며 중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약 16년이라는 기나긴 세월동안 멀리 인도까지 구법 여행을 떠났습니다. (중략)…삼장이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그가 대단한 모험가였기 때문입니다. 인도로 가는 도중에 그는 온갖 위험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의 가장 높은 산맥 중 세 곳을 넘었습니다. 쿤룬산맥, 톈산산맥, 힌두쿠시 산맥이 그곳입니다. 또 악마와 유령들이 나타나는 끔찍한 사막을 건너면서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습니다. 빠른 물살이 흐르는 강도 여러 차례 건너야 했고, 강도도 여러 번 만나면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위험한 순간들을 넘겼지요. 그래도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않고 5만리, 즉 20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위험천만한 여행을 완수한 멋진 모험가였습니다.

 -<서유기의 삼장법사, 실크로드에서 진리를 찾다>

 

현장의 <대당서역기>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과 함께 불교 발상지인 인도를 비롯하여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교류 주역이었던 네팔·파키스탄·방글라데시·중앙아시아 지역의 고대역사·지리·종교·문화 및 중국과 서역의 교역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대당서역기>는 모두 12권. 138개 국가들의 자연환경과 기후 및 지리, 정치, 문화, 교통, 풍습, 산물, 역사나 전설, 역사 인물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수많은 연구와 발굴 조사에도 불구하고 현장 스님이 기록한 것들 중 많은 것들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당시의 카라반들이나 현장스님이 의지했던 수많은 오아시스 국가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수세기를 거치면서 산맥에 있던 빙하들이 녹아 수많은 오아시스 국가들을 집어삼켰고, 메마른 모래바람이 도시전체를 덮어 당시의 오아시스 국가들이 사막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가끔 이 도시들을 덮쳤던 바람이 다시 불어와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현장스님이 기록한 것들은 도시를 확인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고 대체적으로 매우 정확하다고 한다.

 

바미얀은 힌두쿠시 산맥과 코흐이바바 산맥을 가로지르는 긴 계곡 사이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였습니다. (중략) 삼장은 또한 바미얀 계곡의 구석진 곳에 돌로 만든 불입상이 잇다고 설명하면서 이 불상들이 세계에서 가장 큰 부처 입상이라고 적었습니다. 이 불상들은 6세기에 사암 절벽을 파고 조각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짚을 섞은 흙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나중에 색을 칠했습니다.  두 개 중에서 작은 불상은 높이가 37미터나 되며 푸른색 옷을 입고 있고, 큰 불상은 55미터 높이에 붉은 옷을 입고 있습니다. 삼장은 이 불상에 대한 세계 최초의 기록을 남긴 사람이었습니다. 그 후 이 불상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주요 뉴스, 신문 사설, 잡지 기사의 소재가 되고 있습니다.

-<서유기의 삼장법사, 실크로드에서 진리를 찾다>

 

<서유기의 삼장법사, 실크로드에서 진리를 찾다>(아카넷주니어 펴냄)는 현장스님이 걸었던 실크로드 주요 지역을 답사, 그에 대해 들려주는 책이다. 책을 통해 현장스님이 실크로드, 즉 <대당서역기>에 기록한 여러 왕국, 여러 도시들의 역사와 문화, 자연환경, 풍습, 역사적 인물 등을 대략이나마 만날 수 있다.

 

바미얀 계곡의 불상이 처음으로 국제적인 관심을 끌게 된 것은 2001년.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부가 이 불상을 파괴하겠다고 선포하면서부터다. 탈레반 정부는 이 불상들이 이슬람을 모욕한다고 간주했지만 다른 나라의 이슬람교 지도자들을 이에 동의하지 않고 파괴를 반대했다. 그럼에도 탈레반 정부는 박격포, 다이너마이트, 탱크, 대공무기, 로켓 등의 무기들을 총동원해 불상을 파괴, 세계인들의 지탄을 받았다.

 

<서유기의 삼장법사, 실크로드에서 진리를 찾다>는 현장스님이 걸었던 길 중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역들을 동화형식으로 소개하는 한편 관련 자료들을 쪽지형태로 페이지마다 덧붙였다. 이런지라 본문만 읽어도 되고 쪽지형태의 설명만 따로 떼어 읽어도 된다.

 

외에도 ▲'한번 들어가면 절대 나오지 못한다'는 의미의 이름을 붙일 정도로 무시무시한 타클라마칸 사막 ▲현장스님도 여러 차례 경험한 무시무시한 유령들의 실체 ▲실크로드 전역 지도 ▲당시 가장 강력한 오아시스 국가였지만 지금은 폐허인 고창 고성 ▲'우는 모래산'이란 뜻의 명사산 속 오아시스 월아천 ▲신라인의 모습도 새겨진 베제클리크 천불동 ▲쿠차와 쿠차의 키질석굴 ▲만년설로 뒤덮인 톈산산맥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한곳으로 최근 재건 운동이 불고 있는 날란다사원 ▲현장도 이용했던 당시의 물시계▲힌두쿠시 산맥과 파미르고원▲현장스님이 20일간 머물렀고 고선지장군도 거쳐 간 타슈쿠르간 ▲당시 중국과 인도의 거리측정법 등을 만날 수 있다.

 

유명세와 중요성에 비해 실크로드 주요 지역들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책 덕분에  그동안 막연하게만 알고 있던 <대당서역기>와 <서유기> 현장스님과 실크로드에 대해 정리해 보게 됐다.

 

동·서양을 잇는 중요한 교역로 그 현장이자 현장스님이 걸었던 그 길들은 현재 여행지로 인기가 높단다. 일부 지역은 <왕오천축국전>을 쓴 혜초스님(704~787,신라)이 걸었던 길이기도 하다. 실크로드는 어떤 길일까? 어떤 지역들을 거쳤을까? 어떤 왕국들이 있었으며 그곳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현장스님은 어떤 사람이었으며 <대당서역기>은 어떻게 나왔을까? 아이들과 함께 읽으며 이들 지역으로의 여행을 꿈꿔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서유기의 삼장 법사, 실크로드에서 진리를 찾다>|프리실라 갤러웨이·돈 헌터| 양녕자 옮김| 아카넷주니어 | 2011-05-22 |정가 : 1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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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例--][예ː컨대] | 국어 공부 합시다 2011-05-29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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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例--][예ː컨대]

[부사] 예를 들자면.

유의어 : 가령5

예문(18)

  • 잡곡류, 예컨대 보리, 수수, 조, 콩, 팥 등을 많이 먹는 게 건강에 좋다. (표제어:예컨대)

  •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 예컨대 병원 대기실, 수감자 면회실, 대학생의 시위가 벌어지는 장소, 선거 유세장…. 출처 : 김원우, 짐승의 시간 (표제어:예컨대)

  • 예컨대 그는 방독면을 쓰고 구보하라는 우리의 명령을 가장 두려워하였다. 출처 : 조해일, 맨드롱 따또 (표제어:예컨대)

  • 하찮은 미미한 사건, 예컨대 자동차의 급격한 회전 마찰음이라든가 기름기 도는 너무 밝은 불빛을 보고도 그대는, … 출처 : 이제하, 초식 (표제어:예컨대)

  • 그런 가상된 관념 때문에, 예컨대 명예나 지위나 권력이나 그런 것들 때문에 여러 가지 업을 저지른다(起業相). 출처 : 정병욱 외, 한국의 인간상 (표제어:예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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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어잡다[휘어잡따/휘여잡따] | 국어 공부 합시다 2011-05-29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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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어잡다[휘어잡따/휘여잡따]

[동사]

  • 1.무엇을 구부리어 거머잡다.
  • 2.손아귀에 넣고 부리다.

유의어 : 거머잡다, 거머쥐다, 쥐다1

예문(42)

  • 멱살을 휘어잡다 (표제어:휘어잡다)

  • 강변 미루나무 가지를 휘어잡았는데, 나뭇가지가 우두둑 꺾이는 바람에 급류에 휩쓸리고 말았다. 출처 : 문순태, 타오르는 강 (표제어:휘어잡다)

  • 험담은 간혹 정도가 지나쳐서 머리채를 휘어잡는 큰 싸움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출처 : 홍성원, 육이오 (표제어:휘어잡다)

  • 그의 연설은 청중을 휘어잡는 강렬함이 있다. (표제어:휘어잡다)

  • 부러 그렇게라도 해서 민심을 휘어잡아야 할 판인데 저절로 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출처 : 송기숙, 녹두 장군 (표제어:휘어잡다)

본문(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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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 [無關心] | 국어 공부 합시다 2011-05-29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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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관심이나 흥미가 없음.

유의어 : 무감각

  • [형용사] 관심이나 흥미가 없다.

    유의어 : 냉담하다, 무심하다, 방임하다

  • 예문(70)

    • 가정에 대한 남편의 무관심 (표제어:무관심)

    • 사회의 무관심 속에 살고 있는 노인들 (표제어:무관심)

    • 그 배우 이름을 몰랐던 것은 영화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표제어:무관심)

    •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 (표제어:무관심하다)

    • 무관심한 표정을 짓다 (표제어:무관심하다)

    본문(28)

    속담/관용구(8)

    • [관용구] 강 건너 불구경 (표제어:1)

      자기에게 관계없는 일이라고 하여 무관심하게 방관하는 모양.

    • [관용구] 나 몰라라 하다 (표제어:3)

      어떤 일에 무관심한 태도로 상관하지도 아니하고 간섭하지도 아니하다.

    • [속담] 남의 굿 보듯 (표제어:1)

      [북한어]자기 일이 아니라 하여 무관심한 태도로 방관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관용구] 너면 너고 나면 나다 (표제어:1)

      너와 나와는 관계가 없다는 뜻으로, 남에 대하여 전혀 무관심하고 자기의 이익만 채우는 이기적인 태도를 이르는 말.

    • [관용구] 물 건너 불 보듯 (표제어:1)

      [북한어]벌어지는 일이 잘되건 못되건 직접 관계하지 않고 방관하는 입장에서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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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월의 장미 | 시 - 쓰거나 읽거나 2011-05-29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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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의 장미  / 이해인 

    6월의 장

                                                                                

                                                                                         이해인

     

     

    하늘은 고요하고

    땅은 향기롭고 마음은 뜨겁다.

    6월의 장미가 내게 말을 건네옵니다.

    사소한 일로 우울할 적마다

    '밝아져라'

    '맑아져라'

    웃음을 재촉하는 장미

     

     

    삶의 길에서 가장 가까운 이들이

    사랑의 이름으로 무심히 찌르는 가시를

    다시 가시로 찌르지 말아야

    부드러운 꽃잎을 피워낼 수 있다고

     

     

    누구를 한 번씩 용서할 적마다

    싱싱한 잎사귀가 돋아난다고

    6월의 넝쿨 장미들이

    해아래 나를 따라오며

    자꾸만 말을 건네옵니다.

     

     

    사랑하는 이여

    이 아름다운 장미의 계절에

    내가 눈물속에 피워낸

    기쁨 한송이 받으시고

    내내 행복하십시오

     

    emot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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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ice, cost, fare,fine | 영어 공부 합시다 2011-05-29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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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ice는 주로 개개의 유형(有形) 상품에 관해서 씁니다.
    Ex.
    What is the price of that coat?
    [저 코트는 얼마입니까?]


    Cost는 주로 객관적으로 쓰이는 낱말로, 금전상의 계산에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Ex.
    The cost of building a new annex was estimated at $10,000.
    [새 별관의 건축비는 1만 달러로 견적되었다.]


    Fee는 보수[구전, 사례금], 각종 요금, 공공요금 등에 쓰입니다.
    Ex.
    a doctor's fee
    [진료비]/ an admission fee[입장료]/ a license fee[인가료]


    Fare는 통상 수송ㆍ통행의 요금 혹은 승차 요금에 쓰입니다.
    Ex.
    a taxi fare
    [택시 요금]/ a single(double) fare[편도(왕복) 요금]/ That will more than pay my fare back to England.[그 돈으로 영국으로 돌아갈 내 여비를 지불하고도 거스름돈을 받게 될 것이다.]


    Fine은 법을 어겼을 경우 내게 되는 벌금, 과료(mulct), 대상(代償)[금](penalty)의 의미로 쓰입니다.
    Ex.
    a parking fine
    [주차위반 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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