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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 = = 단풍나무 알아보자 2012-10-31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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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나아가 공공 기록은 역사를 지배한다. <조선왕조실록>처럼 그 자체가 역사가 되거나, 노근리 사건 관련 기록처럼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기도 한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95615&PAGE_CD=N0001&CMPT_CD=M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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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문명기행⑤] 이란인들의 영원한 긍지, 페르세폴리스 | - 중동 2012-10-30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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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르세폴리스의 전경.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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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폴리스는 시라즈에서 이스파한으로 가는 간선도로를 타고 약 70여 킬로미터를 가는 곳에 있다. 이곳은 통상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로 알려진 곳이나 좀 더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아케메네스는 수도를 행정적 수도와 왕이 사는 왕도(또는 종교적 수도)로 나누어 운영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이 왕조를 연 키루스 대왕은 바빌로니아의 옛 수도였던 수사를 행정적 수도로 정하였으나 왕이 사는 왕도로는 파사르가데를 새로이 만든다. 그 뒤 다리우스 1세는 왕도를 파사르가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신도시 페르세폴리스로 옮긴다.

페르세폴리스는 아케메네스의 최전성기인 다리우스 1세 시절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그의 손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BC 469년) 때 완성된 도시다. 이곳은 알렉산더의 원정 때 그의 군대가 술을 마시며 저지른 방화로 완전히 전소되었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거대 대리석 궁전이 하룻밤의 불로 주저앉을 수가 있었을까. 전문가들은 그에 대한 해답으로 당시 이 궁전의 기둥은 모두 석주였지만 지붕은 통나무였을 것이라는 설명을 한다. 따라서 지붕에 불이 붙자 그것과 연결된 모든 부속품들은 녹아서 궁전 전체가 주저앉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마치 9·11 사태 때 뉴욕의 월드트레이드 빌딩이 녹아서 무너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페르세폴리스는 지난 2000년 이상 땅속에 파묻혀 있다가 1931년 미국 시카고 대학의 동방연구소 고고학팀에 의해서 발굴됨으로써 세상에 그 존재가 알려졌다.

'왕 중의 왕' 다리우스의 흔적을 찾아

 페르세폴리스의 그 유명한 조공행렬도.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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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지금부터 현재 남은 이 궁전의 모습을 설명해 보자. 우선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궁전 입구 계단을 올라오면 만국의 문을 만나게 된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번성기에는 외국의 사신이 이곳을 방문하면 계단의 맨 위에서 우렁찬 트럼펫이 울렸다고 한다. 그러면 사신을 맞이하는 영접사가 나가 사신을 맞이하여 만국의 문으로 안내한다. 이들이 들어 오는 문 양편에는 돌로 만든 목우상과 사람의 얼굴에 날개 달린 짐승 몸뚱이를 한 유익인면수신상(有翼人面獸身像)이 나타난다.

이 날개에는 크세르크세스 1세의 말이 새겨져 페르시아어와 바빌로니아어 및 엘람어로 쓰여 있다.

"나 크세르크세스 대왕은 왕 중의 왕이며 많은 종족의 왕이며 다리우스 대왕의 아들이다…."

이 만국의 문을 거치면 의장대 사열로가 나타난다. 길옆에 의장군인이 도열해 있는 장소가 지금도 선명하다. 사열로 오른쪽으로 큰 궁성의 터가 보인다. 높이가 20미터가 넘는 석주 십수 개가 지금도 위용을 자랑하는데 그것이 백 개나 서 있었다고 하는 백주지(百柱址)와 아파다나 궁전이 있다.

전문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백주지는 조금 작은 나라의 사신이 왔을 때 왕이 접견하는 곳이고, 아파다나는 큰 나라의 사신이나 제국의 중요 인물이 왕을 알현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아파다나의 계단 벽면과 중앙 궁전에 새겨져 있는 부조다. 아파다나 계단의 부조에서는 조공자행렬도와 사자가 목우를 습격하는 동물투쟁도를 볼 수 있는데 아주 사실감있게 새겨져 있다. 여기서 보는 행렬도가 바로 이란의 어느 선물가게에 가도 볼 수 있는 석판 부조다. 주변국에서 말, 소, 금가락지, 향수병 및 상아를 각각 헌상하는 그림에서 고대 페르시아의 화려한 역사를 알 수 있다.

중앙 궁전 동문 입구의 부조에는 왕관을 쓴 다리우스 대왕과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를 볼 수 있는데 대왕의 옥좌는 28명의 속국에서 온 대표들이 받들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궁전의 맨 오른쪽은 왕들이 이곳에 왔을 때 묵은 궁전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크세르크세스의 궁전이 크다. 한편, 이곳 유적지에는 조그만 박물관이 하나 있다. 이 박물관은 크세르크세스 유적지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는데 과거의 궁전을 훼손하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만들어진 독특한 형태의 박물관다. 이곳 발굴 과정에서 나온 돌사자를 비롯한 여러 가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페르세폴리스의 뒷산 라흐마트의 암굴묘 부조.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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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꼭 봐야 할 것이 궁전의 뒷산 라흐마트의 암석에 있는 두 왕의 무덤이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와 3세의 무덤인데 모두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 암굴묘다. 이 묘의 상단에는 28국의 속국 대표들이 지고 있는 옥좌 위에 피장자가 있고, 그 앞에는 활활 타는 불이 있으며 하늘에는 선신인 아후라마즈다의 신상(이것은 앞으로 보게 될 야즈드의 아슈테가데 사원에서도 볼 수 있는 조로아스터교의 심볼이다)이 조각되어 있다. 이같은 모양의 무덤은 아래에서 보게 될 낙쉐 로스탐의 무덤과 같은 형태이나 연대적으로 보아 페르세폴리스의 무덤은 낙쉐 로스탐을 모델로 해서 만든 것이 확실하다.

나는 이곳을 시라즈 문화재관리국의 직원(말리)과 함께 두어 시간을 함께 걸으며 안내를 받았다. 그녀는 페르세폴리스를 완전히 종교적 도시로 설명하였다.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이 도시는 노루즈(No Ruz)라는 신년 행사를 위한 도시라는 것이다. 이 도시 바로 뒷면에 위치한 라흐마트 산 위에서 신년이 되면 화려한 불의 제전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을 위해 왕을 비롯한 많은 신민들이 이곳에 운집하였다. 왕이 오면 묵을 곳이 필요했고 여러 속주로부터 오는 사신들을 맞이하는 알현 장소가 필요했다. 고대 페르시아인들은 이러한 의식을 아주 엄숙하게 진행한 모양이다. 수많은 의장 사열대가 도열해 트럼펫의 고음을 뽐내는 과정에서 속국의 사신들은 기가 죽은 채 다리우스 대왕과 그 옆에 서 있는 황태자 크세르크세스의 위용을 보았을 것이다.

사막 한가운데서 만난 비참한 로마황제

 낙쉐 로스탐에서 볼 수 있는 암굴묘.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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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탐사단은 페르세폴리스와 아쉽게 작별을 하고 이스파한으로 가는 간선도로에 들어섰다. 낙쉐 로스탐은 한 마디로 암굴묘군(岩窟墓群)이다. 사막 한가운데에 그리 크지 않은 바위산이 있다. 그 바위산의 한 면을 깎아 절벽 중앙에 구멍을 뚫고 묘를 만들고 그 위아래로 벽면 부조를 만들었다. 이곳에는 현재 4개의 묘가 있는데 암벽을 향해 왼쪽부터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크세르크세스 1세, 다리우스 1세, 다리우스 2세 순이다. 다만 다리우스 1세 외의 묘에 대해서는 그 주인에 대하여 이설이 있다고 한다.

이들 묘군은 앞서 본 페르세폴리스의 라흐마트 산 절벽에서 본 묘의 바로 전대에 속하는 것들로 거의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다. 묘실 표면은 전체적으로 십자가 모양이며 상부에는 피장자가 옥좌에 앉아 있는 모습과 조로아스터교의 선신 아후라마즈다의 신상, 그리고 불꽃이 그려져 있다. 다만 이들 부조의 상태는 페르세폴리스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마모도가 심하다.

 샤푸르 1세에 사로 잡인 로마황제 발레리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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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묘실 아래에는 아마도 후대 사산조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기마전투도 등이 부조되어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이 암벽 중앙인 크세르크세스 1세와 다리우스 1세의 묘실 사이에 있는 그림이다. 이는 260년 에데사에서 사로잡힌 동로마제국 황제 발레리아누스가 말 위에 앉아 있는 사산 왕 샤푸르 1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장면이다.

말이 나왔으니 잠깐 발레리아누스에 대하여 한 마디 하자. 로마제국은 1세기 후반에서 2세기 말까지 대략 100년간 오현제 시대를 맞이하여 이른바 팍스 로마나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오현제의 마지막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후 제국은 기울기 시작한다. 변방의 군사령관들이 어느 날 갑자기 기존 황제를 살해하고 황제가 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제국의 변경에는 이민족의 침입이 잦아졌고 그 와중에 동쪽 변방에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후예라고 일컫는 사산왕조 페르시아가 나타나 로마제국을 압박한다. 그 과정에서 군인황제 발레리아누스가 큰 맘 먹고 출정한 것이 샤푸르 1세와 한 판 붙은 에데사 전투다. 여기에서 발레리아누스가 샤푸르의 포로가 된 것이다.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로마황제가 전쟁 중에 죽는 일은 있어도 포로가 된 적은 없기 때문이다. 이 역사적 사건을 시오노 나나미는 그의 역저 <로마인이야기> 제12권에서 아주 리얼하게 표현한다.

"260년 새해 벽두에 뉴스 하나가 전 세계를 휘저었다. 로마 제국 전체를 두려움에 떨게 하고 제국 밖에 사는 사람들까지 놀라게 한 그 정보는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가 페르시아의 왕 샤푸르의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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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문명④] '페르시아의 꽃' 시라즈 | - 중동 2012-10-30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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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즈는 테헤란에서 동남쪽으로 약 100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자그로스 산맥의 안쪽 이란 고원에 위치하여 사막의 한가운데 있는 듯한 도시이다.

아마도 이 도시의 이름은 와인 애호가들에게는 그리 생소하지는 않을 것이다. 묵직한 맛과 강렬한 향이 느껴지는 자극적인 와인을 좋아한다면 포도 품종 중 시라즈(혹은 시라) 포도를 원료로 하여 만든 와인(예컨대 호주산 펜플즈 그레인지)을 마시는 것이 좋은데, 바로 이곳이 그 포도의 원산지이기 때문이다(시라즈 포도는 십자군 전쟁 때 유럽으로 전파되었다고 한다).

이 도시가 페르시아 탐방에서 반드시 대상 도시 목록에 들어가는 것은 그 도시 자체의 역사성에도 있지만, 무엇보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찬란한 유적을 지척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즉, 아케메네스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와 파르세가데가 60~70킬로미터 이내에 있기에 통상 관광객들은 이들 역사 유적을 보기 위해서는 시라즈에 들르지 않을 수 없다. 시라즈는 페르시아의 어원이 된 파르스 지역의 중심도시(현재도 파르스주의 주도임)로서 페르시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왕조가 흥성했던 지역에 위치한다.

아케메네스 왕조가 그렇고 사산 왕조 또한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흥성하였다. 근대에 들면 이곳은 카림 칸 잔드 왕조의 수도이기도 하다. 앞에서 본대로 카림 칸은 잔드 왕조를 열면서 사파비 왕조의 수도였던 이스파한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다. 따라서 시라즈 탐방을 함에 있어서는 잔드 왕조와 카림 칸에 대해 최소한의 상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필요하다.

고성 한가운데 오렌지 나무가 심어져 있다?

 카림 칸이 만든 아르게 카림 카니 궁전의 성곽.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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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즈 시내 탐방의 첫 목적지는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 고성 아르게 카림카니, 이곳은 원래 잔드 왕조를 연 카림 칸의 성이었으나 팔레비 시절에는 감옥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사각형의 그리 크지 않은 성은 약 14미터의 외벽을 갖고 있는 당당한 성으로 그 상태가 잘 보존되어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소위 중정(中庭)이 있는데 그 한가운데에 장방형의 연못이 있다. 이러한 형태는 이슬람 정원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스페인의 그라나다에 있는 알람브라 정원의 중정도 바로 이런 장방형의 연못이 있지 않던가.

그런데 중정에 심어져 있는 오렌지 나무가 이상해 보였다. 언뜻 유럽의 정원을 보는 듯 영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동행한 시라즈 지역 문화재관리청의 직원에게 물어보았다. 이 나무들이 원래 잔드 왕조 때부터 있었던 것이냐고.

대답은 나의 의문을 시원하게 해결해주었다. 원래는 이런 나무가 이곳에 심어져 있지는 않았는데 후대에 심은 것으로 이슬람 정원의 형식이 아니라고 하였다. 아마추어 여행가인 나도 어느새 문화에 대한 직관이 생긴 모양이다. 나 자신도 스스로 놀라울 따름이었다.

 맘알리이븐함자 묘당 내의 화려한 거울 장식.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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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행선지는 이맘 알리이븐함자의 묘당, 이곳은 시아파의 일곱 번째 이맘의 조카인 알리이븐함자를 위한 사원으로 10세기경에 축조된 것이다. 그러나 설명에 의하면 이곳을 강타한 수회의 지진으로 원래의 건축물은 남아 있지 않고, 우리가 보는 건물은 후대에 재건된 것이다. 여하튼 이곳 내부를 들어가면 그 휘황찬란함에 입을 다물 수 없다.

사원의 내부는 온통 거울로 장식되어 있어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이번 탐사 여행에서 가장 화려한 이슬람의 건축장식을 보는 순간이었다.

대적할 자가 없는 시인, 하피즈

 하피지의 대표시집 <디반>, 페르시아의 전통시 500개가 수록되었다고 한다.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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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우리 탐사단은 하피즈의 묘당으로 향했다. '하피즈'(하피즈는 원래 '꾸르안(코란)을 암송하다'라는 뜻임) 바로 이란의 시성이 잠든 곳이다. 13세기의 인물이지만 그는 지금도 이란인의 자랑이다. 이란의 가정에 꾸르안(코란)이 한편에 있으면 다른 한편에는 하피즈의 시집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

하피즈는 몽골제국의 침입 후 만들어진 일한국(1258~1353) 말기에 태어나 티무르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간 15세기 초까지 산 인물로 50년 동안 난세에 활동한 풍운아였다. 그의 신앙관은 소위 수피즘(이슬람 신비주의)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인간이 신비의 체험을 통해 자기를 소멸함으로써 신과의 합일에 도달한다는 사상이다.

그는 이러한 사상으로 철저한 금욕과 절제의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온종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오로지 신비로운 영적 심리상태에 집중하였다는 것이다.

하피즈는 이런 생활을 바탕으로 독특한 자신의 시(詩) 세계를 펼쳐 나갔다. 그의 시는 아랍세계뿐만 아니라 서구에서도 각광을 받았다. 괴테는 그에 대하여 '대적할 자가 없는 시인'이라고 극찬하였고, 니체 또한 <하피즈에게>라는 송시를 썼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그의 시에 대한 대중의 인기는 여전하고, 급기야는 유엔에서도 그의 시 50편을 엄선해 책으로 펴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가히 아랍권이 낸 세계의 시성(詩聖)이라 할 수 있다.

 하피즈의 묘당, 많은 어린이들이 묘당에 들어가고 있다.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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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하피즈를 모신 묘당은 어떤가.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묘당은 그리 크지 않은 정원 한가운데에 8개의 원주에 떠받쳐진 8각형 돔이 전부다. 원래 이슬람에서 8이라는 숫자는 신성한 의미를 뜻하므로 8각형의 돔은 바로 그런 신성함을 뜻한다고 안내자는 설명하였다. 마침 많은 아이들이 찾아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묘당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 어린 꼬마들이 하피즈가 누구인지 어떻게 알 터인가, 하지만 언젠가 그들도 하피즈의 시를 암송하면서 이슬람의 영원한 시성을 자랑할 것이다. 그들의 엄마나 아빠도 그랬으니.

 아랍권이 낸 세계의 시성(詩聖)으로 괴테도 "대적할 자가 없는 시인"이라고 극찬한 하피즈(Hafez).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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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꾸르안(코란) 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다. 이곳을 수많은 대상들이 지나갔다고 생각해 봐라.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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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즈에서의 본 마지막 기념물은 꾸르안(코란) 문, 이것은 시라즈를 벗어나 페르세폴리스로 가는 길목에 있는 시라즈의 대표적 기념물이다. 이 문은 원래 9세기경에 건축된 것인데 잔드 왕조의 카림 칸이 문 위에 다락방을 만들어 꾸르안을 넣었다고 한다.

이슬람의 전통에는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은 모두가 꾸르안을 지나가며 안녕을 빌었다. 바로 이곳이 그런 곳이다. 사방은 황량한 사막, 이제 먼 길을 떠나는 저 실크로드의 주인공들을 생각해 본다. 수십 마리의 낙타를 이끌고 이곳을 떠나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길을 떠나는 대상들의 모습이 바로 현실처럼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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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문명기행③] 테헤란의 박물관들 | - 중동 2012-10-30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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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수가, 이게 1700년 전 남자 얼굴이라니

 

[세계문명기행II : 페르시아 문명기행③] 테헤란의 박물관들

12.10.23 11:12l최종 업데이트 12.10.25 00:26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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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헤란 이란 국립박물관.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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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에서 첫 번째 방문지로 선택한 것은 이란 국립박물관이었다. 이란의 고대문명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박물관에 대한 첫인상은 참으로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곳은 루브르도 아니고 대영박물관도 아니다, 아니 우리의 용산 국립박물관과도 비교가 안 되는 초라함 그 자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내용물까지 무시하면 안 된다. 안내자는 그래도 이 박물관의 외형은 프랑스 건축가 앙드레 고다드가 사산시대의 궁전을 기초로 설계한 것이라고 자랑하였다.

초라한 외관... 놀라운 소장품

 국립박물관 내 함무라비 법전 비석 앞에서 선 필자(왼쪽 사진)와 루브르 박물관 내 함무라비 법전 비석(오른쪽 사진).
ⓒ 박찬운/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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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박물관의 주요 전시품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출토품이다. 즉, 페르세폴리스와 수사 등에서 출토된 도자기와 토기, 석재 부조 등 화려한 소장품을 볼 수 있다. 이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컬렉션은 수사에서 출토된 함무라비 왕의 법전이 조각되어 있는 비석이다. 그러나 이 비석은 아쉽게도 진품이 아니다. 현재 진품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루브르에서 본 함무라비 법전 비석이 생각난다. 원래는 이곳에 전시되어 있어야 할 물건인데 서양인들의 무자비한 컬렉션에 의해 명품 중의 명품은 이국땅에서 고향을 그리며 관람객을 맞고 있다. 아쉬울 따름이다.

 페르세폴리스에서 출토된 알현도.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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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르세폴리스에서 출토된 두 개의 말머리 석상.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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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이곳 박물관에는 페르세폴리스에서 나온 알현도, 몸통은 잘렸지만 다른 소장품을 압도하는 다리우스 대왕 동상, 그리고 이란의 어디를 가도 만날 수 있는, 그래서 이란의 상징물이 된 쌍두마석 등 볼 만한 유물이 셀 수 없이 많다.

 1700년 전의 소금인간과 그가 신은 가죽구두, 그리고 천조각.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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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전시물 중 내 눈을 특별히 자극한 것은 한 소금광산에서 발견된 남자의 머리와 그의 가죽 구두를 비롯한 몇 가지 유물이었다. 1700여 년이 지났지만 소금광산에 매몰되었던 것이라 그 원형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유물을 자세히 보다 보면 그 당시의 생활상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우선 가죽 구두를 보면 지금이라도 당장 신을 수 있는 현대적 감각의 부츠이다. 더욱 놀랄만한 것은 조그만 모직 천 조각이다. 이것은 당시 이미 높은 수준의 모직이 널리 사용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으로 복식사 연구에도 큰 의미가 있는 유물이라고 생각된다.

경주에서 본 유리잔, 테헤란에서 다시 보다

 경주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유리그릇, 5세기 것으로 추정, 용산 국립박물관에서 직접 촬영.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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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에서의 두 번째 목적지는 유리박물관이었다. 이 박물관이 있는 빌딩은 카자르 시대에 지어져 어느 돈 많은 사람의 저택으로 사용되다가 한 때는 이집트 대사관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다지 크지 않은 건물이지만 동서양의 특징이 잘 어우러져 있고 중앙의 나무 계단은 특히 아름다웠다. 이곳에는 기원전 2000년경부터 시대순으로 유리제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유리박물관의 파르티아조 유리그릇, 위의 황남대총 발굴 유리그릇과 비교해보라. 모양과 투명도에서 매우 유사하다.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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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박물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유리제품과의 관련성이다. 즉, 신라의 고분군에서 발굴된 각종 유리그릇은 대체로 이쪽 지역(중동지역 포함)에서 수입된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1층의 파르티아조 시절의 유리그릇을 보다 보면 경주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5세기경의 유리그릇(소위 '로만 글라스')과 그 모양과 투명도에서 흡사하다(나는 이 여행을 마치고 일부러 용산 국립박물관에 가서 신라의 유리그릇을 직접 카메라에 담았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 이미 페르시아와 어떤 식으로든지 문명의 교류가 있었다는 증거를 만나는 순간이었다.

 유리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고대 유리병 컬렉션.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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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꼭두각시, 팔레비의 흔적을 찾다

테헤란에서의 세 번째 목적지는 사드 압바드 박물관, 이 박물관은 엘브로즈 산맥의 경사면에 위치하면서 테헤란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있다. 이곳은 원래 왕들의 여름 궁전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종합 박물관이라고 해도 될만한 곳으로 백궁, 청궁, 국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등이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다.

우리 탐사단은 시간적 제한으로 위 시설 중에서 백궁과 국립현대미술관을 탐방하는 것으로 관람을 끝냈다. 백궁은 아주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이다. 이곳은 1953년 팔레비 국왕이 당시의 수상이었던 모하마드 모사데그를 축출하기 위해 미 중앙정보부 간부였던 커밋 루스벨트(이 사람은 1900년대 초의 미국 대통령이었던 데오도로 루스벨트의 손자임)과 친위 쿠데타를 모의하였던 장소로 유명하다.

 백궁 앞에 있는 레자칸의 잘려진 동상.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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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궁을 들어가기에 앞서 하나의 이상한 조형물을 볼 수 있다. 사람의 상체는 없고 오로지 허벅지 이하 발부분만 남겨져 있는 청동상이다. 언뜻 보면 이것은 현대 미술의 추상작품으로 오인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팔레비 왕가의 첫 왕인 레자 칸의 동상의 일부이다. 1978년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자 성난 군중들에 의해 몸통이 잘려나간 것이다.

이후 혁명 정부는 이 몸통 잘린 청동상을 이대로 전시해 왔다. 팔레비 왕가에 대한 원한을 이런 식으로 30년 동안 국민들에게 각인시켜 온 것이다. 이곳 백궁을 들어가면 1층에 접견실과 화장실이 있고, 2층에 식당이 있어 실각 전의 팔레비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팔레비 국왕이 실각되기 전에 극도의 화려한 생활로 국민들의 원성을 샀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백궁의 내부를 돌아보면 그 말의 진정성에 의심이 간다. 그것은 백궁의 규모나 그 내부가 너무 평범하기 때문이다. 돈 많은 사람의 개인 저택 수준에 불과한 이런 생활에 대해 이란 국민이 분노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러한 의문은 이번 탐사의 마지막 여행지였던 라시트의 팔레비 여름 궁전에서도 들었다. 그곳에는 현재 궁전을 개조한 군사박물관이 있는데 그것도 그 규모나 위치에서 도저히 팔레비 왕가의 영화를 상상하기에는 부족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팔레비를 사치스럽다고 한 것이 무엇일까, 자연스러운 의문이었다. 이란인들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사회주의적 평등의식이 강해서 그런가.

우리 탐사단은 이곳 박물관을 나오면서 현대 미술관에 잠시 들렸다. 18세기 이후의 근대 회화를 볼 수 있는데 유럽 작가와 이란 작가의 그림들이 걸려 있다. 팔레비가 그 많은 오일 달러로 사들였을지 모를 유럽의 대가의 작품을 기대하였다면 실망이 클 것이다. 한 점도 그런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전반적으로 실망스런 미술관 탐방이었다.

 아자디 탑은 밤에는 무지개 색깔 순서로 일정 시간 간격으로 조명을 바꾸고 있다.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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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의 밤이 시작된다. 우리 탐사단은 이제 다음 코스인 시라즈를 향해 떠나야 한다. 테헤란을 떠나기에 앞서 우리들은 공항 근처의 아자디 광장에서 아자디탑(자유의 탑)을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이 탑은 1971년 팔레비 시절 페르시아 제국 2500주년을 맞이하여 만든 국가 기념물이다. Y자를 뒤집은 듯한 형상의 이 탑 주변에서 1978년 혁명 군중들은 팔레비에게 자유를 외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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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살펴보는 20세기의 역사 | - 중동 2012-10-30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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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살펴보는 20세기의 역사  | 독서일기 2011.03.07 16:4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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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 새로운 세대를 위한 세계사 편지
임지현 | 휴머니스트 | 2010/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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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역사책을 읽었다.  책을 읽고 나서 리뷰를 쓰자니 내 블로그의 리뷰 분류 항목엔 `역사’가 없음을 깨달았다.  믿기질 않지만 사실 그랬다.  역사가 홀대받는 시대에 나또한 은밀히 동참했단 생각이 들어 부끄럽다. 고등학교에선 2004년부터 역사 과목이 필수에서 선택으로 바뀌었고, 주요한 국가고시에서 한국사는 제외되었다.  역사란게 얼마나 공부하기 까다롭나?  외울것 투성인게 역사다. 출제자가 수험생을 골탕먹이려면 영어나 수학 못지 않게 어려울 수 있는게 역사과목이다.  그래서 수험생은 제도가 바뀌는 시점에 당당히 역사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  

 

우스개 소리로 요즘 초등학생들은 3.1절을 유관순 누나 생일날 쯤으로 안다고 한다.  초등학생들은 그래도 괜찮다.  고등교육을 받는 고등학생들조차 자기가 발딛고 있는 땅덩어리의 역사를 모른데서야 말이 될까?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는걸 정치권에서 깨달은건지,  요며칠 전 당정이 한국사 교육을 고등학교 필수과목으로 채택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뉴스를 자세히 들어보니 수능 필수과목 선정에는 난색을 표했다 한다.  여전히 정치권은 국민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는데 소홀하지 않다.  점수에 목매달아 울고 웃는 영악한 아이들이 수능에도 나오지 않을 역사과목을 제대로 공부할 수 있을까 ?  답은 그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결국, 고등교육 자체가 수능 점수를 잘 받아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니 학교에서 역사 교육을 하고,  또 수능에 필수 과목으로 지정이 된다해도 제대로 된 역사공부가 될 리 없다.  역사는 이해가 아닌, 암기로 전락한지 오래니까.  그리고 학교 교육이 주도하는 역사 교육은 `객관적 역사’가 아닌 `국사(National History)’ 아닌가?  국사를 배운 이들이 닿게 되는 지점은 자민족 중심주의로 무장한 배타적 애국주의다.  과연 우리의 역사 교육이 가야 할 지향점은 애국주의인가?   우린 정부가 주도하고 심의해 논 국정 교과서안의 국사가 아닌, 진정한 역사 교육을 받아야 할 것이다.  역사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인류의 삶에 대한 애정이란 결국 독서를 통해 심화된 역사안으로 발디딜 때만 가능하다.

 

한양대학교 사학과 교수이자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인 역사학자 임지현 교수의 책 `새로운 세대를 위한 <세계사 편지>’는 국정 교과서 안의 역사를 넘어서, 아니 그 안에선 결코 배우지 못할 지식을 발굴하며 우리에게 20세기 역사를 되돌아 보게 하는 책이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트랜스내셔널 역사학자’다.   학문과 국경의 경계와 틀을 넘어서는 역사학을 주창하는 그는 다소 파격적으로 이 책에서  `만들어진 역사’나 `국사와 세계사 교과서를 찢어버릴’ 것을 요구한다.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국사가 결국 세계사의 진실을 외면케 하고 역사를 통해 인류의 삶을 성찰할 기회를 박탈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서양철학자로서 풍부한 지식과 남다른 역사관을 바탕으로 20세기 세계사의 중요한 순간을 이끌었던 역사안의 인간들을 관찰하고 분석한다.   그 대상은 스탈린과 같은 공산주의자, <오리엔탈리즘>의 저자인 에드워드 사이드,  우리 현대사의 두 독재자, 김일성과 박정희,  영원한 혁명 아이콘 체 게바라, 아우슈비츠를 탐색한 한나 아렌트와 지그문트 바우만,  동양 유림의 스승 공자에게까지 뻗어있다.  이 박식한 역사학자는 그들에게 1:1로 편지를 쓴다.  마치 친분있던 지인에게 부치는 편지인냥 가볍게 인사말을 하고 안부를 묻지만 그것 뿐이다.  인사말이 끝나기 무섭게, 본론에 들어가서는 역사적 과오를 묻고 따지며, 때론 은밀한 약점을 파고들어 공격한다.  당신, 왜 그 따위로 살았냐? 고 매섭게 공격할 때 죽은이가 묘지에서 일어날까 섬뜩할 지경이다.

 

20세기 세계사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있다면 이 책을 보다 쉽게 읽을 수 있을 듯 하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 대한 개념조차 없는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오는 시대니, 이 재기충만한 역사학자가 하는 이야기를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선다.  문장은 편지체 임에도 다소 딱딱하고, 쉽게 페이지를 넘길 수 없는 무게와 지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읽다보니 20세기 세계사가 인물을 통해 해체되고, 정리되는 느낌을 받는다. 인물위주로 역사를 톺아본다는 것은 겉핥기가 아니라 그 내면의 결로 파고든다는 장점이 있다.  시작할 때보다 책장을 덮고 나서 더 큰 만족과 지적충만감을 경험할 수 있었다.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 그의 책에 도전한 것은 몇 해 전인데 임지현은 그 많은 인물 가운데 역사가 사이드를 첫장에 불러온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동양이 서양을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상상의 지리’라 주장했다.  이 기막힌 용어엔 서양의 동양 지배 논리가 숨어 있었다.  언제나 동양의 발전 과정엔 서양이란 기준이 있었고, 동양인 스스로 자신을 비하할 수밖에 없는 매카니즘인 오리엔탈리즘으로 굳어진 경위를 파헤쳤던 팔레스타인 출신 하버드 대학 교수, 언젠가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아이들과 함께 이스라엘 탱크를 향해 돌을 던지는 사진 속의 그에게, 임지현은 그의 <오리엔탈리즘>이 `상상의 지리’라는 개념을 통해 동양과 서양의 이분법을 해체함으로써 세계사라는 개념 자체가 바뀔 수 있었음을 고마워한다.   그 바뀐 개념속에서 우리는 서양사나 동양사가 아닌 그저 인류의 `역사’를 공부해야 할 근거를 확보하게 되었다는 이유에서다.

 

1930년대 항일 무장투쟁을 했고, 1937년 보천보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던 김일성.  재미학자 서대숙에 따르면 일본군이 당시 그의 목에 걸었던 현상금이 중국인 공산주의자보다 세 배가 많은 1만엔이었다고 한다.  항일 투쟁에 대한 긍정의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북한을 건국한 후 스탈린의 개인숭배와 일제의 천황제에서 얻은 지배 노하우를 바탕으로 유례없는 개인 숭배 문화를 개발하고, 정치종교화 시킨 장본인. 임지현은 그에게 역사의 주체가 당신인가, 민중인가? 라고 따져 묻고 있다.  잘 살아보자는 대중의 욕망을 등에 엎고, 유신을 선포 같은 시기 한반도의 남쪽을 지배했던 독재자 박정희에게 쓰는 편지에선 항일 투쟁에 앞장섰던 김일성과 일본 육사를 나와 일본군 장교를 지냈던 박정희를 비교하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의 대학생의 충격과 당혹감은 어떤 것이었을까? 되묻고 있다.  김일성과 박정희를 독재자라는 공통의 분모로 묶어 내면서도,  박정희에 대해선 김일성에게 가졌던 광복전의 콤플렉스를 대중의 욕망을 자극하여 민족주의와 개발독재로 극복하려 했다고 분석해 낸 점은 독창적이며 신선하다.

 

폴란드의 사회주의자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보내는 두 통의 편지는 스탈린과 레닌, 모택동을 중심으로 한 현실 사회주의자가 걸었던 길과 다른 제 3 의 마르크스주의를 택했던 로자에 대한 임지현의 애정이 묻어나는 글이다.  마르크스 이래 최고의 두뇌, 피에 굶주린 로자 등 공적인 평가와 갈리는 로자는 작은 키에 매부리코, 불완전한 걸음걸이와 고급 취향에 항상 돈이 쪼들려 궁색했고, 친구의 아들과 스캔들을 만들기도 한다. 인간과 사회, 그리고 역사에 대한 이해는 개개인의 삶에 나타나는 모순과 양면성을 회피하지 않고 용기 있게 마주보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며, 로자를 변호하는 임지현의 글은 현실 사회주의에 실망한 한 역사학자가  때묻지 않는 순수 마르크시즘에 갖는 관념적 애정으로 보인다.

 

아우슈비츠의 기획자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을 취재하면서 악의 평범성 문제를 들고 나온 한나 아렌트, 나치의 우두머리인 아이히만을 잡아놓고 보니 그가 괴물이 아닌 보통이하의 평범한 남자였음에서 유추한 `악의 평범성’ 테제는 폴란트 출신의 유대인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악의 합리성: 근대는 야만이다’ 라는 연구 주제로 가 닿는다. 이들의 소신있는 역사 연구를 통해, 시오니즘으로 무장한 이스라엘과 유대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되고, 버림받았던 기억들을 독자에게 들려준다.  우리는 이 글속에서 이스라엘 건국의 이면, 나치의 아우슈비츠 학살을 묵인했던 시오니스트들의 정치적 악마성을 되돌아 볼 수 있다.  나치가 유럽에서 유대인을 추방하려 한 것, 멸절하려 한 것, 과 더불어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을 건국하려한 시오니스트들의 이해가 맞물려 있다는 점은 역사가 가진 이면의 아이러니를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20세기 세계사의 안쪽을 역사적 인물들로 살펴보는 일은 흥미롭다.  개인의 치부와 공적을 두루 살피는 과정에서, 역사가 한 개인의 능력과 철학을 통해 형성되었고, 옳고 그른 방향으로 지금 이 시간도 구획되고 될 수 있음을 알게 되면 섬뜩하기조차 하다.  역사의 주체는 민족, 종교, 이념과 같이 거시적이다. 그러나 그 역사를 이끌어가는 주체는 언제나 개인이다.  임지현이 세계사 편지를 개인에게 띄울 수밖에 없는 이유였을 것이다.   그는 21세기 우리가 처한 삶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선 민족에 갇힌 역사적 상상력을 국경을 넘고 이념을 넘는 지점으로 해방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한다.  트랜스내셔널 역사학을 주창하는 역사학자로서 당연한 결론이다.  역사를 국경앞에 가두면, 20세기의 비극은 언제든 재연될 수 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 2차 세계대전의 포화, 간간히 들려오는 우리 시대의 대량학살과 인종청소는 경계 안에 갖힌 역사가 맞이할 필연의 결과일지 모른다.

 

왜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가?  역사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고, 얻어야 하는가?   임지현은 `역사적 책임’이란 말로 답한다.  외울것만 가득한 역사과목을 선택하지 않는 학생들에게,  수능필수 과목 선정엔 난색을 표하는 역사에 대한 개념과 소신이 없는 정치인들에게, 이 책의 결론을 선물하고 싶다. 

 

"결국 책임이라는 말은 누구에겐가 대답한다는 거지요.  이때의 누군가란 곧 이웃이겠지요. 그중에서도 소외되고 배제되고 타자화된 이웃 말입니다. 우리가 대답해야 할 그들은 폴란드의 유대인일 수도,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일 수도, 미국 남부의 흑인일 수도, 멕시코 정글의 원주민일 수도, 헝가리의 집시일 수도, 르완다의 투치족일 수도, 세르비아의 보스니아계 이슬람교도 일 수도 있습니다. 역사적 책임이란 바로 이들의 고통스러운 물음과 신음에 이웃의 한 사람으로서 반응하고 답하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이들의 신음과 고통에 뒤돌아 반응하고 답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닐까요? "  임지현, <세계사 편지>, p.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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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3.7





임지현, 세계사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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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가면의 제국: 오리엔탈리즘, 서구 중심의 역사를 넘어 | - 중동 2012-10-30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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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가면의 제국

: 오리엔탈리즘, 서구 중심의 역사를 넘어 강력추천 

박노자 저 | 한겨레신문사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과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 전자는 '동양을 타자화하여 비화하는 서구중심주의적 인식'을, 후자는 서양을 정형화·범주화하는 '서양/비서양'식의 이분법적 인식으로 서양을 '악'으로 그리는 부정적 옥시덴탈리즘과 선망의 대상으로 보는 긍정적 옥시덴탈리즘으로 구분되는 말이다.

저자가 보기에 좀 더 원어에 가까운 영어 발음을 위해 아이의 혀에 가위를 들이대는 부모들이나 '영어공용화'가 식자층 사이에서 설득력 있게 논의되는 사회는 오리엔탈리즘(논란의 소지는 안고 있지만, 긍정적 옥시덴탈리즘도 포함될 것이다)이 지배하는 곳이다. 저자는 이런 현상을 단순한 과잉 충성을 넘어 자조 능력까지 마비된 맹종이라고 비판한다. 또한, 후세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과 미국과 유럽을 아무런 비판 없이 모범으로 삼을만한 미래로 여기는 자세에 대해서도 '맹목적'이라 일갈한다.

그는 우리에게 묻는다. 후세인은 정말 추방돼야 할 시대의 사탄인지, 북한은 정말 유교적 왕국인지, 영국과 프랑스 등 소수 서구 국가들의 19세기 산업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과연 '역사의 보편적인 모델'인지 말이다. 그리고 다시 묻는다. 그 시선은 어디로부터 왔는지. 그리고 그 시선을 만들어낸 곳이 어디인지 돌아볼 것을 권한다. 되돌아본 그곳에는 서구 제국주의의 시각을 고스란히 내재화한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이 자리잡고 있다

 

Vladimir Tikhonov, Park No-ja,블라디미르 티호노프, 朴露子, Владимир Тихонов 2001년 한국인으로 귀화하기 전까지 본명 '블라디미르 티호노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에서 태어났다. 한국과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영화 「춘향전」을 보고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동방학부 한국사학과를 졸업한 그는 이후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서 고대 한국의 가야사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러시아 국립 인문대학교 강사를 거쳐 학생과 강사의 신분으로 한국에서 대학 생활을 보냈던 그는 '박노자'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귀화한다.

박노자를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잘 아는 외국인', 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난 한국인'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귀화한 것은 스스로 한국사회에서 국적, 또 외국인과 내국인이라는 장벽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리트머스지가 될 것을 결심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한국학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박노자는 한국 사회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과 날카로운 논리로 지식인들은 물론 일반 독자들 사이에서 화제를 불러 일으킨 바 있다. 세계사를 보는 거시적인 혜안 속에서 치열하게 인문학적 성찰의 삶을 살아온 그는 『당신들의 대한민국』,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등의 저서를 통해 '토종' 한국인보다 진한 한국에 대한 애정으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해주었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 그는 한국을 잘 아는 외국인보다는 러시아를, 또 세계를 잘 아는 한국인에 가까운 그는 한국 사회를 그 주춧돌부터 다시 살펴본다. 누구나 당연하다고 믿고 살던 권위주의의 서까래며 집단이기주의의 기둥이 그 앞에서는 대번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폐품이 되고 만다. 이제까지 나왔던 많은 한국인 비평, 비판보다 서너 길은 더 깊은 통찰이 있고 무엇보다 저자가 한국에 대해 가지는 애정이 든든하다.

두 번째 책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 박노자의 북유럽 탐험』는 북유럽식 사회주의를 실현하고 있는 노르웨이 사회의 이모 저모를 소개하고 있다. 상하의 질서와 복종을 강조하는 우리의 일반적인 문화와 달리, 다양성의 존중과 소박한 삶을 생활의 주요 철칙으로 여기고 있는 노르웨이 사람들의 평등한 인간 관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박노자는 북유럽 사회에 비추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되돌아보는데 그치지 않는다. 외견상 선진적으로 보이는 그들의 이면에 존재하는 제3세계에 대한 차별, 인종주의와 극우 민족주의의 발호 등을 예리하게 포착해 내면서 평화로운 일상에 젖은 그들보다 모순과 부조리를 뛰어넘고자 하는 우리에게 오히려 더 큰 희망이 있음을 역설한다.

『하얀 가면의 제국 : 오리엔탈리즘, 서구 중심의 역사를 넘어』에서 보여주는 한국 사회는 '동양을 타자화하여 비화하는 서구중심주의적 인식'과 서양을 정형화·범주화하는 '서양/비서양'식의 이분법적 인식 속에 좀 더 원어에 가까운 영어 발음을 위해 아이의 혀에 가위를 들이대는 부모들이나 '영어공용화'가 식자층 사이에서 설득력 있게 논의되는 사회는 오리엔탈리즘이 지배하는 곳이다. 또한, 후세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과 미국과 유럽을 아무런 비판 없이 모범으로 삼을만한 미래로 여기는 자세에 대해서도 '맹목적'이라 일갈한다. 그는 우리에게 묻는다. 그 시선은 어디로부터 왔는지. 그리고 그 시선을 만들어낸 곳이 어디인지, 우리 안에 있는 서구제국주의의 시각을 돌아볼 것을 권한다. 근작으로 『길들이기와 편가르기를 넘어』,『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후퇴하는 민주주의』, 『씩씩한 남자 만들기』『리얼 진보』(공저)가 있다

 

서문 : 타자의 목소리가 살아있는 역사를 위하여

1부 하얀 나라를 아십니까

도스토예프스키의 나라, 러시아
도스토예프스키를 선망한다고? / 거인 도스토예프스키의 명암 / 스킨헤드, 러시아의 서북청년단 / '살인기계'는 어떻게 태어나는가 / 슬픈 독립군, 체첸 결사대! / '러시아 꽃제비'를 아십니까

유럽의 옷은 깨끗한가
섹스의 낙원, 연애의 낙원! / 기부금, 걷는 사람이 더 당당하다 / 35명을 구한 마지막 브레이크 / 당신의 옷은 깨끗한가 / 평화를 사랑한다면 달러를 팔자!

가면을 버린 사람들
음악계 패거리들을 조롱하다 / '개미'는 되고 싶지 않았다 / 영국을 배신한 진짜 국제주의자 / 해적국가의 양심, 물타툴리

2부 제국의 가면

미국의 명백한 운명
침략해야 하는 '명백한 운명' / 사탄의 국가여, 지옥으로 가라 / 자유와 해방을 믿지 않는다 / "시리아가 죽도록 밉다"

제국의 컴백, 폭격의 컴백
나치 포로는 사람도 아니었나 / 제국의 컴백, 폭격의 컴백 / 아, 투르크메니스탄! / 폴란드의 뜨거운 충성심

유대인은 십계명을 지켜라
살인마에게 준 노벨 평화상 / 유대인, 유대인을 말살하다 / 비극의 상업화, 홀로코스트 / 유대인은 십계명을 지켜라!


3부 하얀 가면을 벗자

동양을 보는 서구의 눈
티베트, 신비와 공포의 나라 / 불교와 파시즘의 기묘한 만남 / 달마대사는 서양에도 왔을까 / 도살자에게 동심을 기대하다

'우리'의 눈으로 본 KOREA
근대를 위한 혁명? - 동학 농민운동을 다시 본다 / '한반도 중립화'는 불가능한가 / 북한, 과연 '유교적 왕국'인가 / 북한의 민주주의와 일제 - 미워하면서 배우다 / 누가 진짜 '전체주의'인가 /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에 대한 단상

하얀 가면을 벗자
메이지는 과연 '성공'했는가 / '하얀 가면'을 벗으세요 - 우리 안의 서구중심주의 / 우생학 - 과학이라는 이름의 서구중심주의 / 구제 불능의 South Korea? / 맹목적인 '서구 신화'를 깨자

후기 : 변방들 사이의 경계선 허물기는 가능한가

인명 색인

 

‘하얀 가면’ - 우리 안의 서구중심주의를 벗기다

후세인은 정말 추방되어야 할 이 시대의 ‘사탄’인가?
미국과 유럽 사회는 정말 우리의 전범(典範)이자 미래인가?
북한은 정말 유교적 왕국인가?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통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전근대성’을 질타했던 박노자가 이번에는 ‘오리엔탈리즘’ 혹은 ‘서구중심주의’라는 화두를 들고 찾아왔다.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데 폭넓은 시각을 제공해왔던 그간의 저서들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해박한 학술적 깊이와 예리한 시선으로 서구열강들의 부도덕과 우리 안에 내재한 오리엔탈리즘을 해부하고 있다.
저자는 러시아와 북유럽, 미국과 이스라엘 등 전 세계의 정치/사회를 두루 돌아보면서 미국을 위시한 ‘하얀 가면의 제국’들의 이면을 파헤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진정한 미덕은 현실 세계 정치질서의 비판에 머무르지 않고, 그 너머를 향한, 평등하고 객관적인 역사관을 모색한다는 데 있다.
이라크와 미국의 전쟁을 지켜보며 ‘후세인’을 이 세계에서 추방해야 할 ‘사탄’으로 묘사한 한 종교인의 모습에서 박노자는 이스라엘과 미국의 근본주의, 소수 백인 특권층의 시각을 고스란히 내재화한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을 본다.
또한 러시아를 보는 한국의 눈(서구/미국의 보수주의자들에게서 배운 듯한 제정 러시아의 ‘고급 문화’에 대한 흠모와, 옛 소련 시기를 ‘기형’으로 보는 태도의 양면성)에서도 객관적이고 주체적이지 못한 ‘서구의 눈’을 느낀다.
저자는 소수자와 피지배자를 배제하고 타자화시키는 ‘그들만의 세계’와 맞서 ‘타자의 목소리가 살아 있는 평등하고 객관적인 세계 보기’야말로 평화로 가는 첫걸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일찍이 저명한 사회철학자이자 인종주의에 맞선 혁명가이기도 했던 프란츠 파농은 그의 저서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백인의 제국에서 기생하는 유색인종들의 정체성 분열을 지적한 바 있다.
'하얀 가면의 제국'은 과거 일제와 미국에 의해 이식되어 지금까지 맹위를 떨치고 있는 ‘하얀 가면 - 우리 안의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예리한 비판서이자 한국인의 눈으로 한국을 보고자 하는 독자들을 위한 훌륭한 참고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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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적 공범자와 우리 안의 파시즘-임지현 교수 | - 중동 2012-10-30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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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적 공범자와 우리 안의 파시즘-임지현 교수
대담: 신종호 편집장 사진: 김점기 기자  | 2005-02-28

임지현
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동대학원에서 서양사상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폴란드의 바르샤바 대학, 크라쿠프사범대학 등에서 연구하고 강의하였다. 또한 영국 포츠머스 대학 소속 연구모임인 「유럽의 민족주의와 민족적 정체성」의 연구 펠로우,『역사와 문화』,『당대비평』편집위원을 역임했다. 2005년 현재 한양대학교 사학과 교수이자 비교역사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마르크스 엥겔스와 민족문제』(1990), 『민족주의는 반역이다』(1999), 『이념의 속살』(2001), 『오만과 편견』(2003),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공저,2004), 『대중독재』(공저, 2004) 등이 있다.


북새통: 이번에 출간하신 『적대적 공범자들』(소나무)을 주의 깊게 읽어 보았습니다. 제목이 시선을 많이 끕니다. '적대적 공범자들'이란 무엇인지 알기 쉽게 설명해 주시죠.

임지현: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주제죠. '정치적으로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 적대적 공범자다'라는 식으로 현실 정치에 대입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적대적 공범자란 그런 현상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개념입니다. 19세기 이후의 역사는 제국주의와 민족해방운동이 날카롭게 각을 세우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그렇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적대적 갈등 관계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사실상 같은 코드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적대적 공범자'라는 개념의 중요한 측면입니다. 예를 들면, 북한에서 말하는 강성대국은 제국주의로부터 자기를 지키겠다는 논리에 입각해 있지만, 곰곰이 따져 보면 북한도 또 다른 제국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민족주의라는 것의 이면에는 제국주의를 모방하려는 욕망이 담겨 있다는 측면에서 '적대적 공범자'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북새통: '민족', '민족주의'라는 개념 안에 제국주의적인 요소가 담겨 있다는 말씀이신데, '민족'이라는 개념을 그다지 긍정적으로 보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임지현: 긍정과 부정이라는 이분법적인 방식으로 사유하는 자체가 서양의 '근대'가 만든 사고의 틀입니다. 민족을 중심으로 사유하는 방식이 과연 한국의 전통적인 방식이냐는 말이죠. 아닙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서양 사상을 접하면서 민족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된 것이고, 그 사유 방식을 받아들여서 다시 만들어낸 것이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민족'이라는 개념입니다. '민족'이라는 개념의 역사는 1백 년도 안 된 것이죠. 기본적으로 서구 개념에 입각해 있는 것이고, 길들여지고 조작된 개념입니다. 그러한 배경을 모르면 민족이라는 개념을 항상 서구의 제국에 저항하는 형식으로만 인식하게 됩니다.

북새통: 근대 이전에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은 것인가요?

임지현: 저는 그렇게 봅니다. 가령 우리가 조선 시대에 살았다고 합시다. 편집장님은 양반이고 저는 그 밑의 종이었는데, 두 사람 사이에 '우리는 같은 민족이다'라는 의식이 존재했을까요?

북새통: 그래도 왜구나 오랑캐들과 대적해서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형성되지 않았을까요?

임지현: 그것이 우리의 '국사' 교육이 만들어 놓은 허상인 것이죠. 제가 한국사 전공은 아니지만 예를 들어 보면, 몽고군이 쳐들어왔을 때 충주성에서 김윤후와 노비들이 일치단결하여 싸웠다, 그래서 민족 간에 연대감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때 싸운 이유는 김윤후가 노비문서를 불태웠기 때문이죠. 너희와 나는 노비도 귀족도 아니고 같은 사람이다, 라고 한 것이죠. 그래서 노비들이 함께 싸운 것이죠. 최근에 상주 양반이 남긴 기록을 보니까 한일합방 체결되자 창피해서 밖에 못 나갔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왜 그런 줄 아세요? 뭐 조국, 종묘사직이 망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밖에 나가니 상놈들이 호형호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망했다는 것이 아니라 '야, 세상이 바뀌었다, 이제 양반 세상 끝났다'는 생각을 뒤집어 보여 주는 것이죠.

북새통: 양반들은 민족의 문제보다는 자신들의 권력적 질서가 무너진 것만을 우선적으로 생각했다는 것인가요?

임지현: 그것은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19세기, 봉건적 신분제 질서를 가지고 있던 사회에서 이민족에게 저항하는 것은 민중이 아니라 항상 양반들, 귀족들이었죠. 왜냐하면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권력이 무너지는 것이니까. 신분제가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민족이나 민족적 연대감이 존재할 수가 없다고 봅니다. 그것은 이미 세계사의 상식이라고 할 수 있어요.

북새통: 민족이라는 개념으로 우리의 전 역사를 포장하는 것은 국사 교육의 허상이라는 하셨는데, 그러면 역사와 국사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임지현: 어떻게 보면 근대 역사학 자체가 다 국사의 틀로, 유럽에서 만들어진 발명품이지요. 국사라는 것이 내셔널 히스토리(national history)거든요. 최초의 일본 역사서(국사책)는 서양 독자들을 대상으로 '파리 만국박람회'의 요청에 의해서 작성되었습니다. 서구 열강이 일본을 자꾸 야만적인 나라로 보니까 일본은 '아니다, 우리도 너희와 똑같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국사책을 만든 것이죠. 근대 국민국가의 요구에 맞게 과거를 재구성한 것이 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재구성 방식을 국민들에게 주입하는 것이 국사 교육입니다.

북새통: 어딘지 모르게 선조들의 삶이 축소되는 것 같습니다.

임지현: 그렇지는 않아요. 근대 이전의 사람들의 삶을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것은 근대 국가 권력이 재구성한 역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민족이라는 허명 속에 가려진 개인들의 삶을 그대로 보존하자는 것이지요. 오늘날 국민국가가 만들어지기까지 모두가 왜적에 대항해 분투했다는 식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중앙권력에 대항해서 싸우기도 했고 양반에 대항해서 싸우기도 했다는 다양성을 보여 주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근대 국가의 역사 해석 체계인 국사의 틀로 본다면 양반과 노비의 갈등 같은 것들은 상대적으로 자꾸 지워진다는 것이죠. 외적이 침입할 때마다 전체 민족이 일치단결해 싸워 왔다는 식의 관점을 지양하자는 것입니다.

북새통: 얼마 전 가수 조영남이 '나는 친일파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임지현: 일본 대 한국이라는 이분법적 발상 자체가 민족적 사유 방식이지요. 일본인은 하나인가요? 한국인은 하나입니까? 굉장히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일본 친구는 어떤 한국인보다 더 가까이 할 수 있고 이야기가 잘 맞을 수 있는데, 그런 가능성을 민족이라는 범주로 닫아 버리게 되는 것은 문제입니다.

북새통: 그러한 생각의 틀을 깨는 첫 번째 출발점은 무엇일까요?

임지현: 민족적 사유는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기보다는 현실을 적극 호도하고 덮어 버리는 은폐 기능을 가집니다. 민족주의적 사유 방식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정말 복잡합니다. 어려서부터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었다는 인식이 주입되어 있고, 모든 매체도 다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이젠 그것이 상식이 되어 버렸죠. 놀라울 정도로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에 그 싸움이 정말 힘든 것 같습니다.

북새통: 상식이나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무의식적으로 남아 있는 틀이 문제가 된다는 것인가요?

임지현: 그렇지요.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이 우리 안의 파시즘으로 작동한다는 것이죠. 국가 권력이 굳이 매를 때리지 않아도 알아서 국가 권력에 복종하고, 알아서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고, 알아서 국가적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합니다.

북새통: 선생님과 몇몇 분들이 공저로 내신 『우리 안의 파시즘』(삼인)을 보면서 '우리 안의 파시즘'이라는 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예를 들어 설명을 해 주시지요.

임지현: 예컨대 우리 고유의 전통 중에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공경하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긍정적이기도 하지만 사회를 위계적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 위계 질서가 때로 고약하다는 것을 아는데, 그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전통이라는 논리 때문이죠.

북새통: 권력자의 이데올로기에 안주하는 것을 '자발적 동의'라고 하셨는데, 시민들의 자발적 동의는 생존의 선택이 아닌가요?

임지현: 그렇게 안하면 불이익을 당한다고 해서 동의하는 측면도 있지만, 그것이 몸에 배어 있거나 이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옳은 일이다'라고 확신을 가지게 될 때, 그것이 제일 무서운 것이죠. 차라리 이렇게 안하면 불이익을 당하니 기회주의적으로 보이더라도 그런 척해야 한다는 태도는 상황의 변화에 따라 바뀔 수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몸에 각인된 관습적 의식은 정권이 바뀌어도 변함이 없습니다.

북새통: 과거의 민주화 운동 진영이 정치적으로는 진보적이었지만 일상의 관습에서는 보수적이었다고 지적하셨는데…….

임지현: 민주화 운동의 역할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신성화시키면 안 된다는 것이죠. 신성화시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비민주적인 방식이죠. 사회 시스템의 변화, 제도, 법의 변화가 이루어졌다고 해서 사회가 바뀐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라는 것이죠. 사회의 결이 근원적으로 민주화되지 않는 한, 소수 선각자들이 나서서 권력을 장악해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힘들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북새통: '우리 안의 파시즘'이 존재하는 한 사회 형식이 바뀐다고 하더라도 사회 자체가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이군요.

임지현: 저는 '우리 안의 파시즘'보다는 '일상적 파시즘'이라는 용어를 즐겨 씁니다. 일상 속에 그런 파시즘적인 요소가 남아 있을 때, 아무리 법이 민주화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필요조건일 뿐이지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이죠.

북새통: 요즘 국가적으로 일제 과거 청산을 문제로 삼고 있는데, 과거 청산을 어떤 방향으로 전개해야 할까요?

임지현: 먼저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총체적으로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는 친일파라고 하는 사람들의 행적을 밝혀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면 안 됩니다. 소위 우리가 친일파라고 규정하는 집단 말고도 상당히 많은 일반 사람들이 제국의 혜택을 받고 살았습니다. 그것에 대한 자기반성이 같이 있어야 합니다. 상징적인 의미에서 몇몇 사람들만 처벌하고 나머지는 전부 면죄부를 주는 것은 곤란합니다. 소수자 외의 다른 사람들의 행적은 그 소수자들과 질적으로 달랐는가라는 질문을 던져 주어야 합니다.

북새통: 당대의 사람들 모두에게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겠군요?

임지현: 그렇죠. 그들뿐만 아니라 지금의 우리에게도 해당되지요. 우리도 독재 시대를 살았는데, 과연 그때 최선을 다했는가?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는가라는 내면적 반성의 계기가 사회적으로 주어져야 합니다.

북새통: 그런 계기의 대표적 예로 프랑스 68혁명을 전범으로 삼고 계신 것 같은데, 지금 우리 사회에도 68혁명과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인가요?

임지현: 그렇습니다. 우리의 일상적 삶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문제가 제기되어야 합니다. 68혁명은 일상의 전복입니다. 쉽게 말하면 대학에서 처음으로 교수와 학생들이 68년 이후에 퍼스트 네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는 꼬박꼬박 프로세서, 미스터, 미스라고 불렀지요. 그리고 당시 프랑스에서는 여자가 이혼을 하면 이혼녀라고 손가락질을 받아 미장원에 못 갔습니다. 처음으로 68년에 섹시즘의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섹시즘 같은 경우 좌파의 패러다임에서는 노동해방이 이루어지면 자동적으로 해결된다는 것이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지요.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것들은 계급적인 것뿐만 아니라 성 정체성, 체제의 정체성 등 다양한 것이죠. 어느 하나가 중요하고 나머지가 그 밑에 종속되는 관계가 아닙니다. 보다 업그레이드된 사회 민주화를 위해서는 일상의 작동 방식(일상의 파시즘)에 대한 성찰과 문제 제기가 있어야 합니다.

북새통: 통일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시는지요?

임지현: 간단합니다. 중요한 것은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행복하고 인간적인 삶을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통일이 인간적인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되면 통일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아니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게 전도되었잖아요?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통일을 해야 한다는 논리가 압도적입니다. 통일된 사회는 어떤 사회여야 한다는 논의는 전혀 없잖아요. 저는 통일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통일도 하나의 가능성이고, 여러 옵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절체절명의 과제로 강조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논리가 전도된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민족 우선주의지요. 민족을 위해서 개인들의 삶은 얼마든지 희생되어도 된다는 논리지요.

북새통: 통일을 하나의 선택적 가능성으로 바라보자는 것이군요.

임지현: 그렇죠. 필요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하나의 옵션으로 열어 두자는 것입니다. 오히려 제일 중요한 것은 남·북한 간의 탈냉전입니다. 서로 군비 축소하고 긴장을 완화하는 게 현실적으로 중요합니다. 절감된 군사비용은 사회복지기금으로 돌린다든가, 북한 같은 경우는 경제 쪽으로 돌린다든가하는 조치가 필요합니다.

북새통: 고구려사 문제를 여쭈어 보겠습니다. 『적대적 공범자들』에서 '변경사는 변경사일 뿐이다'라고 하셨는데, 무슨 뜻인지요.

임지현: 변경사야말로 중국 동북아공정정책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담론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고구려사는 한국사다'라고 말하는 것은 중국과 똑같이 국사 패러다임(근대 국가에 의해 형성된)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적대적 공범 관계이지요. 현재 중국은 자국에 편입된 영토의 역사는 중국의 국사라고 하고 있습니다. 한국도 고구려 예맥족이 우리 쪽에 합류되어 있으니까 우리 국사라고 이야기를 합니다만, 고구려에는 그럼 예맥족만 있었나요? 고구려는 신승, 말갈, 여진 등등 무수히 많은 종족들이 모인 다종족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고구려에 예맥족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사라고 한다면 고구려에 살았던 사람들 중에서 말갈, 여진, 숙신, 이들은 배제해 버리는 셈이죠. 이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국사가 억압의 기제를 작동하여 자기들의 취향에 맞지 않는 것을 지워 버린다는 것이죠. 중국사의 경우에도 변경의 민족을 항상 중국사에 편입했나요? 오랑캐라고 간주했지요. 그러다가 중화인민공화국 생긴 다음에 중국사로 간주한 겁니다. 이러한 중국에 대해서 '고구려사는 한국사'라고 말하는 것이 위협이 되겠어요? 오히려 변경사라고 우리가 주장하게 되면, 중국은 티벳이 중국사가 아니라고 부정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겁니다. 중국의 동북아공정에 대해 '고구려는 한국사다'가 아니라 '변경사'라고 할 때 중국이 가장 무서워하는 결과로 나타날 수 있죠.

북새통: 변경사라는 주장의 논리적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임지현: 그렇지요. 중국의 국가 권력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으로 변경사만큼 좋은 패러다임이 없다는 것이죠.

북새통: 각국의 역사 왜곡에 대한 대안으로 국사의 해체를 주장하셨는데…….

임지현: 국가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국사를 해체하자는 것이지요. 제가 말하는 국사 해체는 한국 사회에서만 단독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동아시아 모든 국가에서 같이 진행되어야 합니다. 민족이라는 서구적 개념의 틀에서 벗어나 다양한 종족의 융합사라는 자유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북새통: '세습적 희생자'란 말을 하셨는데, 어떤 내용인가요?

임지현: 그것은 유대계 지식인들이, 특히 지그문트 바우만이 이스라엘의 시오니즘을 비판하면서 나온 내용인데, 지금 이스라엘 군인들이 홀로코스트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잖아요.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을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라고 자처합니다. 홀로코스트와 같은 것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해서는 국가가 강해져야 한다는 논리로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을 국가 권력이 자기 식으로 횡령하는 것이죠. 우리가 이렇게 끔찍한 비극을 당했고, 너희가 바로 희생자라는 것을 교육시키는 것이죠. 그러니까 16살, 18살 애들이 13살, 9살 팔레스타인 아이들을 아무런 가책도 없이 쏴 죽이잖아요. 무서운 거지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승만이나 김일성이 또다시 나라 없는 백성의 설움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국가 건설에 허리띠를 졸라매고, 노동자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세습적 희생 의식을 강요했죠. 과거 역사를 매개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거죠.

북새통: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임지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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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대를 위한 세계사 편지(임지현) | - 중동 2012-10-30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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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대를 위한 세계사 편지(임지현) 책 리뷰

2012/02/29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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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2001년 출간되었던 임지현 교수의 『이념의 속살』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책의 키워드는 ‘일상적 파시즘론'이었습니다. 이 이론이 제시되었을 때는 김대중 대통령 재임시절로 군부독재와 그로 인한 파시즘은 종식되었다고 생각하던 무렵이었습니다. 그런데 임지현은 아직 파시즘이 끝나지 않았다고 얘기합니다. 파시즘이라는 것이 정권, 제도의 측면만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과 사고, 생활양식 등 우리 일상의 전국면을 통제하는 것임을 지적하고 나선 것입니다. 

일상적 파시즘론과 연계되는 대중독재론(합의독재론 concensus dictatorship)은 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여태껏 군부독재는 '절대악'으로, 고통받는 민중은 '절대선'으로 상정되어 왔는데, 임지현은 나치 독재가 그러했듯 우리의 군부독재 역시 민중의 동의가 없었다면 그 유지가 불가능했다고 지적하고 나섰습니다. “저항하고 투쟁하는 민중의 신화에서 벗어나, 지배 헤게모니에 포섭되어 권력에 갈채를 보내는 민중의 또다른 존재방식”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좌파진영은 분노했습니다. 진중권은 “애꿎은 민중”을 파시즘의 원흉으로 삼았다며 즉각 반격하고 나서기도 했습니다. 비난이 더욱 커진 것은 조선일보에서 임지현의 주장을 크게 다루면서부터입니다. 사실 대중독재론은 조선일보에서 크게 반색할 만한 내용이었습니다. 군사독재의 동조자였던 보수언론 입장에서 대중독재론은 독재정권에 면죄부를 줄 수 있는 논리였던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임지현의 문제제기를 상당히 의미있게 생각해왔습니다. 그 논의의 역기능을 감안하더라도 언젠가는 꼭 짚고 넘어가야할 사안이라고 느꼈던 것입니다.  2010년 출간된 임지현의『세로운 세대를 위한 세계사편지』를 읽었습니다. 논조는 계속 유지하되 사유가 풍부해지고 깊어진 느낌을 받았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주장이 초기에 가졌던 불필요한 논란에서 벗어나 안정기에 접어들었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제기했던 일상적 파시즘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습니다.

 

 ‘일상적 파시즘’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세상이 쉽게 변하지 않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정치권력을 장악해서 사회경제의 구제를 바꾸고 체제를 변혁한다는 발상이 가진 한계에 대해서 고민했던 거지요. 마르크스주의에도 이런 전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수직적인 ‘지배’의 아비투스를 수평적인 ‘우애’의 아비투스로 대체해야 한다는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의 혁명론도 그렇지만, 말년의 엥겔스가 혁명은 기독교가 로마제국을 점령했던 방식대로 일어나야 한다고 했을 때 그의 흉중에도 이런 문제의식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이 책에서 제일 관심있게 읽었던 부분은 서구의 나찌에 대한 태도였습니다. 저자는 나찌를 절대적 악의 상징으로 내모는 서구의 태도에 거부감을 표합니다. 당시 유럽의 선진제국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제국주의적 확장에 골몰하면서 인종주의적 학살에 동참했습니다. 예컨대 벨기에는 식민지 콩고에서 레오폴드 2세의 재위기간(1865-1909)을 중심으로 1885년부터 1920년까지 불과 30여 년 사이에 무려 1,000만명이 넘는 아프리카인을 학살했습니다. 독일 역시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많은 아프리카인을 학살했습니다. 이것은 마땅히  “유럽 식민주의의 넓은 맥락 속에서" 또 하나의 "홀로코스트"로 보아야 것이지만 서구의 역사가들은 이런 부분은 거의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나찌의 유대인 홀로코스트만이 천인공노할 학살로 묘사되었습니다. 저자는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정합니다.

 

많은 연구자들이 히틀러가 더 괘씸한 것은 반인류적 범죄에 더하여 백인이자 같은 유럽인인 슬라브인과 유대인을 오리엔트화하고 같은 유럽인들을 식민화하려 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거지요. [...] 즉 나치 독일의 괘씸죄는 유럽의 식민주의가 유럽의 외부에서 ‘문명화 사명’을 완수하려한 데 반해, 유럽의 내부에서 ‘문명화 사명’을 수행하려 했다는 겁니다. 그것은 ‘유럽인’에 대한 명예훼손인 셈이지요.

 

저자는 홀로코스트와 관련해 유대민족의 시오니즘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시오니즘에 따라 20세기 초부터 팔레스탄으로 이주하게 되었지만 이런 시오니즘에 동참하지 않은 유대인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충격적인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시오니즘 지도자들이 나찌의 홀로코스트를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를 거부하고 독일인으로 행세하며 동화되기를 기대했던 유럽의 동화주의 유대인들에 대한 천벌”로 보고 되려 홀로코스트에 협력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오는 것마저 부정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영웅적인 시온주의 전사들에 비해서 온갖 굴욕과 상처가 몸에 각인된 이들 생존자들은 좋은 인적 자원이 아닐뿐더러, 시온주의와 민주주의, 키부츠의 건강성을 해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컸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유대인들이 나찌의 게르만 순수혈통주의에 그토록 상처를 받았으면서도 유대인의 혈통주의에 대한 반성이 부재하는 것도 지적합니다. 그 자신 유대인이었던 저명한 지식인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이 아닌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유대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적 관습법이 반영된 이스라엘의 민법이 아리아인과 유대인의 통혼과 섹스를 금지한 뉘른베르크법과 무슨 차이가 있냐”는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민족주의 폐해에 대한 비판도 여전합니다. 한일간의 관계는 민족주의에 관한 한 “적대적 공범관계”인데 왜냐하면 “일본의 (한국) 민족주의 비판이 한국의 민족주의를 강화하고, 또 역으로 한국의 (일본) 민족주의 비판이 일본의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의도하지 않은 공범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순환이 될 수 밖에 없으니 민족주의라는 틀 자체를 벗어버리자고 주장합니다.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 탈국가적)한 시선”으로 보자는 거지요.

저자는 민족주의가 지식인들이 박정희 독재정권에 동조하는 계기로 작용했다고 주장입니다. 저자는 박정희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내내 군사독재에 대한 가장 비판적인 잡지로 알려진 장준하 씨의 <사상계>가 당초에는 5 16 군사정변과 당신을 지지한 것도 놀랍기는 하지만, 당신의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구호와 인민주의적 태도가 지닌 호소력이 그만큼 컸던 거지요. 서울대학교 문리대의 민족주의비교연구회가 주동이 되어 김지하 시인이 기초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도 사실은 그들이 애초 당신에 대해 가졌던 기대감의 반영이라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어요. 기대감이 컸기 때문에 배반감도 그만큼 컸던 거지요. 나중에 이들 ‘민비연’ 멤버들의 상당수가 다시 당신의 부름에 응해 조국 근대화의 기수가 되기도 하는데, 그 역시 이들이 돈과 권력에 몸을 팔았다는 단순 도식으로 설명하면 곤란할 것 같아요.

 

저자는 "빅팀 마인드 내셔널리즘(victim mind nationalism, 희생자 의식 민족주의)“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이스라엘의 젊은 병사들이 팔레스타인 청소년들에게 아무 거리낌없이 총기를 난사하는 의식의 근저에는 기본적으로 희생자 의식이 자리잡고 있어서라고 지적합니다. '다시 희생당하지 않기 위해서 강한 국가가 있어야 하고,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저 정도 희생은 필요하다'는 생각, 혹은 '우리는 홀로코스트로 600만이 죽었는데 팔레스타인인이 죽어봤자 고작 몇이나 죽었는가'라는 의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우리의 젊은이들 역시 일본인에 대해 유사한 심리를 갖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책은 제가 근래 가장 만족스럽게 읽은 책이었습니다. 저자가 그 동안 정말 성실하게 연구를 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강단의 아카데미즘에 머물지 않고 이렇게 사회적 이슈에 적절하게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학자가 우리나라에 몇이나 될까요.  

 

* 임지현 교수는 일상적 파시즘론을 고안하게 된 배경에 대해 한 주간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 DJ 정권 때 박정희기념관 설립 사업이 발표되고 진보학자들이 반대하는 심포지엄을 열었습니다. 그때 제 생각도 그 진보학자들이랑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독재라는 건 소수의 나쁜 놈들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하고 강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 심포지엄에 토론자로 나갔고 물론 비판했죠. 저는 그 심포지엄이 끝나면 한국사회가 우리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반대할 줄 알았는데, 가면 갈수록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증가하더라고요. 누구는 그게 프로파간다 때문이라고 했지만 저는 그 뿌리가 상당히 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럼 이건 뭔가? 소수가 독재를 하는 게 아니고 독재에 대한 어느 정도 대중의 동의나 지지가 있었던 게 아닌가. 그럼 가설적으로 대중의 동의와 지지 아래 근대 20세기 독재가 이뤄졌다는 의미에서 '대중독재'란 말을 써보자. 그렇게 그 말을 만들어 냈죠.(주간한국 201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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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유대인을 말살하다 - 박노자 | - 중동 2012-10-30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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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유대인을 말살하다 - 박노자

 

이스라엘 단일민족의 유령은 어떻게 ‘아슈케나지’와 ‘세파르디’를 부정했는가 

현재 일각에서 비판적으로 재인식되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개화기 때 일본으로부터 수입한 ‘단일민족’이라는 용어는 거의 성역 그 자체였다. 고대의 고구려·백제·신라의 언어와 문화가 대단히 달랐음에도, 50년 전만 해도 제주도에 피난간 함경도 출신들이 제주 사투리를 도저히 이해 못해 일본말로 대할 수밖에 없었음에도, ‘단일성/동질성’이 ‘우리 민족’의 변치않는 신성한 속성으로 간주되어 왔다. 단일민족이란 말이 아이누족·오키나와 주민의 독자성을 무시하는 것은 물론, 한국인까지도 “우리 일본인과 단일한 존재”로 취급하여 황민화하려는 일제의 프로파간다로부터 이입·이식됐다는 사실을 아는 역사학자들은 냉소적 웃음을 참고 단일민족을 들먹이는 교과서의 어용 민족주의적 궤변을 여태까지 그냥 받아들여야 했다. 이제 관제 민족주의의 마취가 풀려 ‘단일성’ 신화가 상당히 후퇴한 것은 크나큰 다행이다. 


교회의 언어에 불과했던 히브리어 

그러나 문제는 ‘단일성’ 신화의 조작이 한국·일본 관제 민족주의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데 있다. 권좌에 앉아 있는 민족주의자들이 ‘일체 단결’·총동원의 광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명분이 없는 권력을 공고화하는 것은 동서를 막론하고 자주 쓰는 수법이다. 몇백만명이나 되는 쿠르드족의 존재를 부정하여 ‘일체 터키 국민의 영원한 민족적 단일성’을 외치는 터키의 어용 민족주의나, 몇십년 전까지만 해도 바스크족의 독자성을 전면 부인하여 일체 바스크인들을 단순히 ‘스페인 사람’으로 봤던- 그러다가 테러까지 불사하는 바스크인의 극단적인 민족운동을 초래한- 스페인의 관용 민족주의나, 이 차원에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유럽·중동·극동권의 어용 민족주의들보다 ‘단일성’의 신화를 훨씬 더 무리하게 추진해 결국 미증유의 끔찍한 문화적 파괴와 억압·배제의 구조를 낳은 것은 이스라엘의 시오니즘(시온주의)이라는 관제 민족주의다. 이스라엘 건국(1947년) 이전부터 아랍인의 대량학살·추방 등을 주도해 수많은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르고, 지금도 아랍인들에 대한 차별·억압·학살의 선봉에 서 있는 이스라엘의 경력이야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유대인 사회 내부에서도 ‘단일성’ 신화를 바탕으로 한 억압·배제·차별의 구조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아직까지 비교적 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유대족의 문화적·종교적 다양성과 아랍권·아프리카 등 출신 유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범죄도 결코 만만치 않다. 

유럽의 19세기 말 민족주의·인종주의 이데올로기들을 모방해서 시오니즘을 생산한 것은, 유럽의 유대인인 이른바 아슈케나지(Ashkenazi)족이었다. 이 용어의 근원이 히브리어의 독일 명칭인 ‘아슈케나즈’인 만큼, 아슈케나지들과 독일과의 관계는 그야말로 각별한 것이었다. 15세기 폴란드·우크라이나·러시아 등의 동구지역으로 진출하기 전 주로 독일에서 살았던 그들은, 언어마저도 독일 어휘·문법을 골간으로 하는 이디시(Yiddish)어를 썼다.

지금 이스라엘의 ‘국어’의 위치에 오른 히브리어는 당시만 해도 일반인들이 잘 구사하지도 못하는 교회의 언어였다. 언어 생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아슈케나지들의 성씨도 독일식으로 만들어지고, 복장·일상 습관도 상당부분은 독일의 도시민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19세기 사회주의 혁명운동가 입장에서는 독일 노동자와의 연대를 쉬운 것으로 만들어주었던 이디시어가 유대인 프롤레타리아들의 ‘국제성’을 보장하는 ‘진보에 유리한’ 것이었다. 유대인 국제 사회주의자 정당이었던 ‘분드’(Bund)를 비롯한 일체 유대인 진보단체들은 이디시어를 공식 언어로 썼다. 


황민화 캠페인과 시오니즘화 캠페인 

그러나 ‘이민족과의 연대’라는 발상 자체를 거부했던 부유층 민족주의자인 시온주의자들에게는 ‘이민족의 언어’를 일상에서 쓴다는 것은 ‘민족 타락’의 징조일 뿐이었다. 이디시어로 된 유대인 세속 문학의 전통이 오래됐다는 점이나, 수많은 민요·동화·전설 등이 이디시어로 구비 전승됐다는 점 등은 ‘민족의 순수성’을 주장했던 그들에게 하등의 관심사도 아니었다. 그들은 교회의 사어(死語)인 히브리어를 다시 인위적으로 뜯어고쳐 현대화한 다음 ‘민족의 언어’로 설정했다. 바로 히브리어는 지금 이스라엘의 국어다. 이디시어를 모국어로 했던 사람들이 마르크스나 로자 룩셈부르크(1879∼1919), 칼 카우츠키(1854∼1938) 등의 유럽의 저명한 사회주의자들의 독문 저서를 쉽게 읽을 수 있었던 반면, 히브리어밖에 몰랐던 팔레스타인 거주 2세의 유대인들에게 유럽의 혁명적·국제주의적·반전(反戰)적 전통은 이미 완전히 ‘남의 것’이 돼버렸다. ‘유대인의 탈혁명화’라는 시오니즘의 한 과제가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실행된 셈이었다. 

이스라엘은 건국 직후부터 아랍 세계와의 외전(外戰)과 동시에 이디시어를 기반으로 하는 아슈케나지들과 내전(內戰)을 시작했다. 이것은 전통문화와의 내전이었다. ‘비국민’적인 이디시어 신문·잡지들의 발행이 금지되고, 이디시어 학교·극장 설립도 불허됐다. 이디시어를 금지하는 건국 초기의 법령이 몇년 전까지만 해도 자칭 ‘민주국가’ 이스라엘에서 유효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길거리에서 이디시어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욕설과 물리적인 공격을 당하기 일쑤였다. 유럽 유대인들의 1천년의 역사를 전면 말살하려고 했던 그 관제 민족주의적 광란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는가? 차이가 없지는 않지만, 성황당들을 파괴하고 전통 굿 등을 ‘미신’으로 치부했던 새마을운동의 광풍과 일면 상통하기도 한다. 구체적인 역사적 문맥이 달라도 통치자들이 원한 획일적 ‘민족’을 만들어내는 의미에서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회 상류·중류층을 이룬 아슈케나지들의 유럽적 유산이 이 정도로 무자비하게 부정됐지만, 이슬람권 출신의 유대인인 ‘세파르디’(Sephardi)들에 대한 단일화 정책은 인종주의적인 문화유산의 말살 그 자체였다. 건국 초기부터 권력을 잡은 유럽 출신의 시온주의자들은, 시온주의에 무관심한 반면 1천년 이상 같이 한 땅에서 살았던 아랍인들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가졌던 ‘세파르디’에 대한 잔혹한 세뇌적 ‘단일민족화’ 작전을 폈다. ‘동양화되어 후진적인 세파르디’들을 시오니즘화·근대화시켜 아랍인들을 광적으로 증오하는 ‘이스라엘의 정상적인 국민’으로 만든다는 목적이었다. 일제 말기의 황민화 캠페인을 방불케 하는 ‘시오니즘화 캠페인’의 일환으로 아랍어를 기반으로 하는 ‘세파르디’들의 고유 일상언어가 이디시어보다 훨씬 철저한 금지와 배제를 당했다. 


“평화공존의 기억을 지워버려라” 


더불어 세파르디의 역사는 이스라엘 교육과정에서 말살되고 말았다. 이스라엘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의 400쪽 중에서 이스라엘 인구의 절반을 이루는 세파르디의 역사에 할애된 것은 고작 9쪽(!)이다. ‘동양’에 대한 이스라엘 지배층의 오리엔탈리즘적 멸시의 깊이도 느껴지지만, 이 역사 말살의 또 하나 주된 목표는 세파르디와 아랍인들의 평화적 공존에 대한 일체의 기억을 말살해버리는 것이었다. 아랍인에 대한 증오의 이데올로기를 국민 통합의 바탕으로 삼는 이스라엘 지배층에는, 아랍권에서 유럽과 달리 반유대주의가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만큼 껄끄러운 사실이 없었다. 시오니즘이 팔레스타인을 정복하기 이전에 유대인들을 언제나 반기고 관대하게 대해주었던 아랍인들에 대한 그들의 ‘배은망덕’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세파르디들에 대한 파시스트적 ‘동화’ 캠페인의 가장 반인륜적인 요소는 ‘가장 악질적인 후진 분자’로 분류된 일부 종교적인 세파르디들로부터 갓난아이들을 강요와 기만으로 빼앗아가 ‘선진적인’ 유럽 출신의 시온주의자의에게 입양시키는 ‘2세 동화 작전’이었다. 부와 권력이 없는, 그리고 ‘동양인’으로서 서구 언론의 주목도 받기 힘든 세파르디에게, 오스트레일리아의 백인들이 원주민을 다루었던 수법을 그대로 적용한 셈이었다. 

아슈케나지들의 이디시어와 그 언어와 관련된 풍부한 문학·문화 유산, 세파르디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여 법적 조치와 불법적 폭력 등의 각종의 가혹한 수단으로 ‘시오니즘적 단일민족’의 허구를 실현하려고 혈안이 된 이스라엘은, 말 그대로 문화와 언어들의 묘지다. 아랍인들에게 폭력으로 빼앗은 땅에서 허구적인 시오니즘 위주의 ‘국사’를 진실로 알고, 인위적인 히브리어를 쓰고, 3년간의 군복무 경험을 주요 ‘동질성’의 근거로 삼는 이스라엘의 ‘단일화된 국민’들이 살고 있다. 그들의 진지한 과거- 아랍권에서의 아랍인과의 조화로운 공존과 문화적 교류의 역사나, 유럽에서의 국제주의적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 등- 는 시오니즘으로 세뇌된 그들에게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진지한 과거 대신에 증오와 배제의 단세포적인 시오니즘 이데올로기로 무장된 그들에게 미래가 있는가? 필자의 생각으로는 시오니즘에 대한 철저한 해체작업으로 억압과 배제의 ‘업장’이 소멸되지 않는 한, 이스라엘은 아랍인에 대한 적대적 행위를 멈추지 못하고 진정한 평화를 찾지 못할 것이다. 요즘 인기를 얻은 임지현 교수의 책 주제대로, 시오니즘은 유대인의 문화와 인류 보편성의 원칙에 대한 반역이요 배신이다. 


박노자 ㅣ 오슬로국립대 교수·<아웃사이더>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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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안철수, '죄수의 딜레마'에 빠졌다 | 나라 돌아가는 모습 2012-10-29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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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안철수, '죄수의 딜레마'에 빠졌다

[이정전 칼럼] 양 김 씨의 실패로부터 교훈 얻어야

이정전 서울대 명예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2-10-29 오후 1:48:16

    

요즈음의 정치 판도를 보면서 1987년 대선 때의 악몽을 상기하고 가슴 졸이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때도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의 세 후보가 출사표를 던지면서 치열한 3파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김영삼후보와 김대중후보는 박정희-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지는 군사독재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는 국민의 간절한 여망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당시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야권이 단일 후보를 낼 경우 승리가 확실하였다. 만일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가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협동하면 오랜 군사독재를 끝내는 쾌거를 이룰 뿐만 아니라 이들이 그토록 원했던 대통령 자리를 차례로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후보가 동시에 출마하면 모두 낙선하면서 국민 대다수가 싫어하던 노태우 후보가 어부지리를 얻게 되는 상황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이런 상황에서는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 중에서 한 사람만 나오는 것이 자신들에게도 이익이고 국민에게도 이익이다. 그래서 양 김 씨에게 후보를 단일화 하라는 국민의 성화가 빗발쳤다. 이런 여론의 압력에 못 이겨 이른바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로 알려진 양쪽 진영 사이에 무수히 많은 물밑 대화가 있었다. 심지어 후보 단일화를 놓고 두 후보가 직접 담판을 짓도록 감금(?)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두 후보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동시에 출마하였다. 결과적으로 두 후보 모두 고배를 마시는 치욕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문민정부의 출현을 그토록 바라던 국민에게 큰 마음의 상처를 안겼다. 학술 용어로 말하면, 양 김 씨는 죄수의 딜레마의 덫에 걸리고 말았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금년에도 국민이 대선에 거는 간절한 소망이 있다. 썩어빠진 우리 정치판의 쇄신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런 국민의 간절한 여망이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에게 쏠리고 있다. 이 두 후보 각각 정치 쇄신을 최고 목표로 삼고 선거판에 뛰어들었으며, 이 뜻을 기필코 이루겠다고 국민에게 다짐하였다. 또한 이들이 그럴만한 의지와 능력이 있다고 많은 유권자들이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정치의 때가 묻지 않은, 참신한 이 두 후보에 대한 유권자의 지지가 노회한 정치가인 여권 후보를 크게 능가하고 있다. 그러니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가 서로 신뢰를 쌓고 협동하기만 한다면 이들은 자신들의 그 큰 뜻을 실현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후보가 대통령 자리에 연연한다면 과거 김영삼, 김대중 후보처럼 대통령 자리도 날아갈 뿐만 아니라 정치 쇄신을 바라던 국민에게 큰 죄를 짓게 된다. 이렇게 보면,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 역시 과거 양 김 씨처럼 죄수의 딜레마 상황에 빠져 있다.

그렇다면, 이 두 후보가 이런 죄수의 딜레마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서로 협동하면 모두에게 이익이고 협동하지 않으면 모두 망한다는 것이 죄수의 딜레마의 교훈이다. 따라서 대답은 극히 상식적인 것이다. 두 후보 각각이 대통령의 자리에 연연하지 말고 오직 정치 쇄신에 대한 국민의 여망만을 바라보고 상호 신뢰 아래 협동하는 것이다. 사실, 정치 쇄신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도 아니요, 어느 한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이미 수십 년 우리 정치판이 썩어왔으니, 두 후보 중에서 어느 한 후보가 운 좋게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임기 내에 국민이 바라는 정치 쇄신을 완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시간도 많이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치세력이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고, 정치개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강력한 정치세력을 등에 업어야 한다. 정치란 웅대한 뜻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현실이다. 현재의 여론 조사 결과를 보면, 문재인 후보의 지지층과 안철수 후보의 지지층을 합치면 국민의 과반수를 넘는다. 그러므로 앞으로 이 두 후보가 원하는 정치 쇄신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두 후보의 배경을 이루는 정치세력이 합쳐져야 한다. 단순히 후보 자리를 양보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장기적 안목으로 서로 정치적 동지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 사이의 후보 단일화 이유는 더욱 더 명백해진다. 더욱이나 이 두 후보는 과거 양 김 씨와는 달리 대통령 자리에 연연할 인물들이 아니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기 때문에 후보 단일화에 실패할 경우 국민에게 안기는 실망이 1987년 대선 때보다 더 클 것이다. 만일 단일화에 실패해서 이 두 후보 모두 낙선할 경우, 과거 양 김 씨와 달리 이 두 후보는 정치판에서 영원히 떨려날 가능성이 높다. 이 두 후보를 지지하는 정치세력이 과거 양 김 씨의 정치세력처럼 공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 ⓒ프레시안
요컨대, 문재인, 안철수 두 후보가 진정 정치쇄신을 목표로 삼는다면, 작금의 대선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앞으로 10년을 내다보고 이 목표의 달성을 위해서 서로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대다수 국민의 바람일 것이다. 문재인, 안철수 두 후보는 1987년 정치판을 더렵혔던 죄수의 딜레마의 교훈을 꼭 마음에 새기면서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점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단순히 후보 자리를 양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점도 한 번 더 강조해둔다.
 

     

/이정전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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