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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 == 조엘 오스틴 자료 2013-05-30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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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에런라이크의 <긍정의 배신>(서울: 부키, 2011)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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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승인 2013.05.30  02:08:57 성기문 (ksung)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 <긍정의 배신> /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 전미영 옮김 / 부키 펴냄 / 304쪽 / 1만 3800원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의 기복주의의 뿌리를 국내, 즉 샤머니즘에 근거하여 분석한 책들이 좀 있었는데, 최근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의 기복주의 신앙의 뿌리를 파헤치는 연구서는 <바벨탑에 갇힌 복음>(관련기사 참조)이 대표적인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비록 비기독교인의 시각이긴 하지만, 한국교회의 기복주의를 떠받치는 기둥 중의 하나인 긍정의 신학의 기원과 발전 과정 연구에 통찰력을 주는 책이 나타났으니, 그것이 바로 에런라이크의 <긍정의 배신>이다.

 

 

바바라 에런라이크는 원래 미국 저임 노동자들의 암울한 노동 현장을 고발한 <노동의 배신>이라는 책으로 더 유명세를 탔지만 국내 독자들에게는 <긍정의 배신>이 먼저 알려졌다. 그러나 그녀의 배신 시리즈는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희망의 배신>이다. 오늘의 책은 생물학 박사 출신인 저자는 자신이 유방암으로 치료를 받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긍정은 우리를 어떻게 배신하는가

인생에서 성공은 모든 사람들의 소망이라고 할 수 있다. 성공을 거부하는 사람은 정상인은 아닌, 정신병자나 기인(奇人)이라고 치부될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를 믿는 신앙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부자가 되어야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린다는데, 긍정적인 믿음을 가져야 가난도 탈출하고 질병에서 나을 수 있다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모든 것이 마음먹기 달렸고, '절대' 신앙에 달렸다는데, 어쩔 것인가? 그런데 사실은 이러한 행복은 모두의 것이 아니라, 아주 극소수만이 '마치 복권 당첨처럼' 잭팟(Jack Pot)을 터뜨릴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이 그 배후에 있다. 더 인정하기 싫은 사실은, 긍정의 '신학'이 19세기의 칼뱅주의의 '부정의 신학'의 반작용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인 것이다. 이제 칼뱅주의는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된다. 이 모든 게 '칼뱅주의' 때문이라니! 자, 그 논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보자.

 

긍정이란 무엇인가

저자가 말하는 긍정적 사고에는 질병의 치유와 부와 성공이라는 세 가지 목표가 있다. 이러한 긍정적 사고는 전적으로 미국적 상황에 기반을 두는 것으로, 긍정 비즈니스와 긍정 신학이 이러한 세 가지 목표를 공유하는 양대 산맥이다. 

 

1) 체험: 저자는 우선 자신의 암 투병 경험으로 시작한다(제1장). 신자들뿐만 아니라, 비신자들도 암을 극복하는 데 긍정적인 사고가 중요하며, 심지어 암 투병이 인생의 '축복'이라고까지 주장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이러한 주장은 대개가 교회에서 간증이나 설교할 때 사용되는 논리들이 아닌가? 심리적으로 심지어 의학적으로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재화적으로 부유하게 만들고, 병도 낫게 해 주는 만병통치 비법인가? 저자는 이러한 의문을 제기한다. 바이러스나 세균은 외부에서 침입한 병원균이지만, 암 세포는 인체 내부에서 생기는 세포 덩어리다. 일부 심리학자들의 주장은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인간의 면역 체계를 활성화시켜 암을 치료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일종의 마인드 컨트롤로서 자기암시 같은 것이다. 그냥 태도의 변화이고 냉혹한 현실 인식을 수면 아래로 억누르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2) 긍정의 마인드: 긍정주의자들은 긍정적 태도를 가지거나 긍정적 상상만으로 바라는 것들의 현실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2장). 이러한 긍정주의는 대기업이나 판촉 비즈니스와 관련하여 인기 있는 아이템이다. 이것은 일종의 자기 계발로서, 매출 증대를 목적으로 사용된다. 이러한 긍정 이데올로기는 더 나아가서 마음이 우주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허황된 과장 논리에까지 이른다.

 

3) 원인은 칼뱅주의?: 저자는 현대 미국의 긍정주의의 뿌리에는 부정 신학의 원조인 칼뱅주의가 있다고 주장한다(3장). 저자는 현대 긍정주의가 근대 칼뱅주의의 억압의 반작용으로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칼뱅주의의 죄책감에 대한 강조와 가부장적 억압으로 말미암아 당시 여인들은 만성 질환에 시달렸고 한다. 저자는 19세기 미국 상황을 심리적 육체적 질병이 만연했던 시기로 규정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등장한 사람이 칼뱅주의 신도인 농부의 딸 매리 베이커 에디(Mary Baker Eddy)로 크리스챤 사이언스의 창립자다. 그녀는 인간의 정신이 물리적 세계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한 입장을 따라 최초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그리고 20세기에 '긍정적 사고의 창시자' 노만 빈센트 필(원래 감리교 목사였지만, 화란개혁파 목사로 전환하였다)이 나왔다. 저자는 미국인들이 벗어나려고 애썼던 부분들이 죄와 감정에 대한 칼뱅주의적 자기반성(혹은 억제)과, 부정적 사고에 대한 긍정적 사고의 강한 억제의 산물들(일종의 반작용)이었다고 이해한다.

 

4) 동기 유발 프로그램의 진화: 종교적 심리적 측면에서 시작된 긍정의 사고는 기업과 마케팅 쪽으로 확장되었다(4장). 이것은 세일즈맨들을 중심으로 사업체의 교육 프로그램이 되었고 판매 전략이 되었다. 이러한 긍정의 마케팅은 화란개혁교회 교인이 만든 암웨이를 통해서도 잘 전파되었다. 이러한 동기 유발 프로그램은 주주 이기주의와 맞물려 사원을 (자극과 격려-동기 부여-를 통한) 하나의 판매 도구화로 이해하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또 이것은 불평하지 않고 수용하고 재배치되는 등의 정리 해고의 중요한 무마 수단으로도 사용되었다.

 

5) 긍정의 신학의 열매: 심판이나 십자가는 없는 부와 성공과 건강의 비결을 설파하는 대형 교회들이 등장하게 된다. 성공의 예들을 통한 긍정의 태도가 모든 사람을 긍정의 신학의 열매를 얻게 한다고 가르친다. 이들은 티비 설교가들이거나 대형 교회 설교자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 명의 목사를 떠올려야 한다. 그는 수정교회를 창시한 미국 개혁교회 목사 로버트 슐러다. 그에 대한 언급은 나중에 다른 곳에서 하게 될 것이므로, 이번 서평에서는 언급만 하기로 한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목사가 조엘 오스틴이다. 그에게 하나님은 단지 그가 성공하도록 돕는 조력자에 불과하다. 저자는 긍정의 신학의 한 아류로 초대형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릭 워렌과 빌 하이벨스 목사도 언급한다. 이 대형 교회들의 특징은 교회 같지 않고 소비자들의 욕구에 철저하게 응하는 형태를 취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특징은 그 정점에 담임목사가 CEO로 있는 대기업 마인드가 강하다는 것이다.

 

6) 긍정적 사고를 넘어서: 여기에서는 다루지 않겠지만, 7장에서 어떻게 긍정적 사고가 미국 경제에 돌이킬 수 없는 충격을 주었나를 다룬다. 우리는 뼈아픈 현실 인식과 비판적인 평가만이 미래를 더욱 긍정적이며 현실적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저자의 충고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결론

세상은 꿈꾼 대로 바라는 대로 심지어 기도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현실이다. 더 열심히 기도하고 더 열심히 교회에 헌신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목표가 부와 성공과 건강인가? 그것이 우리가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긍정적인 믿음이나 열심을 통하여 달성될 것이라고 믿는가? 물론 그것은 이뤄질 수 있는 꿈이며 소망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목표이며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를 향한 거룩한 계획인가?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살아 계심을 드러내시고 반드시 그렇게 하시고자 하시는가? 설령 그것이 목표라고 하더라도 어째서 하나님은 개인과 교회와 사회적으로 우리의 땀과 피와 수고와 노력을 통하여 제도와 법과 인식과 문화의 개선을 통해 이루려 하지 않으시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와 긍정적인 사고에만 '투쟁'하도록 강요하고 계신가? 이러한 회의와 물음은 믿음 없음의 증거가 아니라, 우리가 그동안 강요된 믿음 가운데 분별력을 잃었기 때문은 아닌가?

긍정도 믿음도 한국교회의 쇄락을 구원하지 못했으며 한국 사회나 경제를 회생시키지 못했다는 것이 서평자의 인식이다. 이 글을 읽는 '의식 있는' 기독교인들과 목회자들은 긍정의 신학에 물든 한국교회의 강단을 어떤 방식으로 개혁시켜야 하는가? 이것이 가장 큰 고민과제다. 마지막으로 반드시 고려해 봐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저자가 그 근거로 삼고 있는, 미국 역사에 나타난 부정의 신학뿐만 아니라, 긍정의 신학의 배후에 칼뱅주의, 청교도, 혹은 개혁주의 기독교에 대한 의혹이다. 이것은 의혹의 대상이 되는 개혁주의자들이 솔선해서 해결해 주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한다.

성기문 / 신명기 해설서 <모세의 고별설교> 저자, <레위기 주해와 설교>도 출판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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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의 변증법 | 철학 공부 2013-05-30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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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의 변증법

TH.W.아도르노 외 지음 | 김유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08월 14일 출간 
계몽의 문명 사회가 어떻게 야만에 빠졌을까? 기술 진보가 절정에 달한 시대에 야만 상태를 빚어낸 현대는 어떤 시대이며 인류는 어떻게 이러한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나치즘을 통해 타락한 몰골을 드러낸 서구 중심적인 이성과 문명을 역사철학적 관점에서 비판한 20세기의 고전. (양장본)
목차 

-계몽의 개념 ...21
-부연설명 1 오디세우스 또는 신화와 계몽 ...80
-부연설명 2 줄리엣 또는 계몽과 도덕 ...131
-문화산업 : 대중 기만으로서의 계몽 ...183
-반유대주의적 요소들 : 계몽의 한계 ...252
-스케치와 구상들 ...312

북로그리뷰(1) 


  • 고전의 가치는 시 공간을 초월한 보편성과 항구성에 있다.
    그 여일함에 사람들은 매혹된다.
    게다가 함부로 곁을 내주지 않는 고고함도 고전의 매력이다.
    그러나 자리는 높을지언정 대다수의 사람이 읽지 않는 책이 고전이다.
    다 알지만 아무도 찾지 않는 책.
    고전의 초라한 현주소다.
    그 이중적 자리가 주는 자조는 우리가 넘어야 할 고지이다.
    고지를 넘으면 그토록 바랐던 목표물도 나오니 말이다.

    책에도 함량이 있다면 '계몽의 변증법'은 함량 초과로 잴 수 있는 계량기가 없을 듯하다.
    그래서 일찌감치 '20세기의 고전'이라는 수식어가 붙어버렸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2세대인 하버마스는 이 책을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책중의 하나'라고 논평했다.
    정확한 평가지만 그래서 더욱 절망적인 책이다.
    아무런 출구도 알려주지 않고 어두운 전망만이 가득하다면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러나 이 책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계몽의 변증법'은 질주하는 도구적 이성에 대한 절망적 선고를 통해 계몽의 자기 파괴를 선언하는 책이다
    진보 앞에서조차 비판적 사유를 촉구하는 강한 도전이야말로 이 책이 갖고 있는 엄청난 힘이다.
    '계몽의 변증법'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거두인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공저로 1947년 암스테르담에서 출간되었다.
    책에 대한 두 학자의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20년이 지나 나온 개정판 서문에서도 알 수 있다.
    두 사람은 수정에 인색했다며 인쇄상의 오류나 교정 정도로 만족했다 밝힌다.

    그들의 도도한 책임감은 '이 책이 일차적 자료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거나 '자신들이 하나하나의 문자에 대해
    어느 정도로 공동 책임을 지고 있는지 다른 사람들은 쉽게 상상할 수 없을 것'이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조그만치의 겸손도 없이 에두르지 않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학문과 지식에 대한 자세는
    이 책이 '20세기의 고전'이라 불리는 직접적 근거이기도 하다.

    '계몽의 변증법'은 왜 인류가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지 못하고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로 빠지게 됐는지에
    대한 총제적이며 역사적 해석을 시도한 책이다. 나치 파시즘의 광기와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벌어진
    이해 불가한 일들이 결국은 인간의 이성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참담한 견해가 이 책 속에 담겨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접근 금지의 불온한 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비상구도 없이 닫힌 문 속에서 생존해야할 사람들에겐 필독서이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불확실함과 무한 경쟁의 공포속에 사는 우리의 모습이 병치되지 않는가.

    그렇다손 치더라도 '계몽의 변증법'을 일반인인 우리가 읽기에는 독해상의 어려움이 있다.
    이는 난해한 문체와 저자의 깊은 사유에서 기인한다.
    그러므로 이 책을 끝까지 읽기란 무척 힘겨울 것으로 사료된다.
    이 책이 얼마나 난해한지는 이 책에 대한 안내서가 나왔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도서출판 살림에서 'e시대의 절대사상 시리즈 '로 이 책에 대한 안내서를 출간했다.
    서문에서 가이드 노명우 교수는 자신이 '계몽의 변증법' 의 저자들과 대화를 시도한 한 사람의 독자
    라며 이 책은 텍스트에 대한 해석서이며 강독기록이라 규명했다.
    이 책을 읽고 도전한다면 한결 편하게 저자들의 사유를 즐기며 되새김을 통한 탐닉의 나른한 맛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다이제스트의 유용성을 따진다면 책 제목을 유의미하게 보심이 큰 팁이 된다하겠다.
    그런 제목을 붙인 뜻이 있기 때문이다.
    단 전제는 있다.
    '계몽의 변증법' 전부를 취하겠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그러나 다 버리고 하나를 얻는다 해도 가치는 충분하다.
    마치 갈비 뼈에 붙은 살을 발라먹듯 한다면 육질의 깊은 맛도 느낄 수 있다.
    고기의 맛은 뼈에 붙은 씹히는 그 맛에 있으니까.
    그리하여 꼭꼭 씹어먹을 수만 있다면 사유가 주는 선물을 취할 수 있다.
    그리곤 도전해 보시라.
    여정이 길어질 걸 감안하고 정독한다면 이해가 아닌 해독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서구 문명에 있어 계몽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일까?
    계몽은 근대의 핵심원리이며 본질적 특성으로,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패러다임의 전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서구 휴머니즘이 보는 중세는 야만성의 시대였고 벗어나야 할 신화의 시대였다.
    계몽은 신화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탈신화화의 도구였고, 이성과 합리성을 내세움으로 인해
    반봉건주의라는 혁명적 성격을 지닌 이념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계몽이 20세기에 이르러 현대적 야만이 되어버렸다.
    그 당혹감에 대한 의문 제기가 이 책의 시발이라 할 수 있다.

    '계몽의 변증법'은 독일 근대사에서 되풀이 되고 있는 야만의 징후에 대한 유대계 지식인이었던 두 학자의
    직접적 피해로부터 출현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나치즘의 정점에서 현대적 야만의 직접적
    희생자였고 결국 그들은 미국으로 망명하는 디아스포라가 된다.
    따라서 이 책은 그들이 학자적 명예를 걸고 작업한 야만의 시대에 대한 고뇌의 물음이여 처절한 절규다.
    이 책이 왜 그렇게 암울하다는 평을 받는지 그 역사적 배경이 느껴지는가.

    우리가 발을 딛는 이 세상은 역사성과 현재성이 반복되고 때로는 일치되는 곳이다.
    나치즘의 광기를 우리는 떠올리기도 주저하며 홀로코스트를 악몽이라 기억한다.
    그런데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오히려 우리가 사는 실증주의적 시대를 더 두려워 한 듯 하다.
    그들이 말하는 총체적 세계는 오늘날 우리 현실에 더 해당되는 듯 하니 말이다.
    어쩌면 이 책은 당시보다 지금에 더 필요한 교과서 같은 책이 아닐까 싶다.


    그림 출처:http://cafe.daum.net/sicp4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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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을 항하여'' | 영화 이야기 2013-05-29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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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같은 현실을 벗어나고 싶었던 두 명의 팔레스타인 청년.
신의 진리를 쫓아 자신의 몸을 불사르려던 그들에게
진정한 천국은 과연 어디일까…?

이스라엘에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그들의 압제와 차별정책, 절대적 빈곤 속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팔레스타인의 젊은 청년들. 그들이 할 수 있는 저항이라고는 자신의 온몸을 산화시켜 이스라엘인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뿐이다.

어릴 때부터 형제처럼 자라온 ‘자이드’와 ‘할레드’도 어느 날 저항군 조직의 부름을 받고, 기꺼이 “순교자”의 소명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막상 가슴에 폭탄 띠를 두르고 이스라엘의 “텔 아비브”로 향하던 두 청년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게다가 자이드를 사랑하는 아름답고 지적인 젊은 여성 ‘수하’가 그들의 계획을 눈치채게 되는데..

지옥 같은 현실에서 죽음과 같은 삶을 사는 것보다는, 영웅적인 죽음을 택해 천국으로 가고자 했던 그들. 그러나 과연 끊임없이 죽이고 죽고, 보복에 보복을 거듭하는 이 저항방식이 그들이 원하던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인가, 그들에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인가 하는 의문들이 그들을 주저하게 만든다.
삶의 마지막이 될 48시간, 그들은 결국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자살 폭탄 테러 청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2005년 제55회 베를린영화제에서 3개부문을 수상하고, 2006년 골든글로브상 시상식에서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해 전세계 영화인들의 관심을 받고있는 ‘하니아부 아사드’ 감독의 영화 <천국을 향하여(원제:Paradise Now)>

 지난 2005년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소개되어 국내관객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받고있는 작품으로 현재 2006년 제78회 아카데미상 외국어 영화상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어 유력한 수상후보로 지목되고 있다.

이스라엘 점령 치하의 서안지구에 살던 평범한 두 명의 기계공이 자살폭탄 공격수로 자원하고 결국 텔-아바브에서 민간인에 대한 폭탄공격을 감행하면서 최후를 맞는다는 내용의 영화<천국을 향하여>는 영화는 요르단강 서안의 나블루스에 사는 사이드와 칼레드의 일상에서 출발해 결국 그들이 폭탄테러는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천국을 향하여>는 이스라엘 정부의 영화기금을 받아 제작되었지만 감독이 팔레스타인계 이스라엘인이라는 점과 아랍어 영화라는 점에서 정작 이스라엘에서는 대부분의 대형 개봉관에서 상영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 외 전세계 60여 개국에서 상영되고 있고, 앞으로 상영될 예정이며, 국내에서는 4월에 개봉될 예정이다.

여전히 총격과 폭탄으로 얼룩진 지옥과도 같은 그 곳,
‘나불루스’에서 감행한 촬영

이스라엘이 수배자 체포를 위해 도시를 침범하고 새벽에 탱크가 굴러다니며 총격이 끊이지 않는 지역, ‘나불루스’

<천국을 향하여>팀은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스라엘군과 팔레스

타인군 사이에서 조심스레 줄타기를 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팔레스타인 폭탄 테러자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으로 인해 그들 중 한 분파에 의해 지역 담당 매니저 ‘핫산’이 납치되고, 당장 ‘나불루스’를 떠나라는 협박이 이어졌다. 같은 날, 자동차 가까이로 이스라엘의 미사일 공격이 있었으며 유럽스텝 6명에 대한 무장괴한들로부터 재차 협박이 계속되기까지 했다. 결국 그 6명의 유럽 스텝이 떠나고 촬영은 난항에 부딪혔다.


그 곳에 남아야 할지 떠나야 할지 계속되는 딜레마 속에서 고민을 하고 있던 중에 지역기자와 외신기자들은 지역담당 매니저인 ‘핫산’의 납치사실을 전세계로 보도하려고 했다. 이로 인한 더 위험한 상황을 피하고자 보도중지를 요청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내 적대파가 촬영팀이 ‘미국인/스페인 음모단’이라는 글귀가 적힌 팜플렛을 유포하면서 결국 이들은 법외추방자가 되었다.

말 그대로 전쟁터와 같았던 촬영 현장…

세트장에서 겨우 300미터 떨어진 광산이 폭파하였고, 전날 밤 촬영했던 바로 그 곳에는 세 명의 청년이 죽어있기도 했다. 이에 ‘수하’역의 여배우 루브나 아자발은 충격으로 기절하기까지 했다. 바로 전날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오가던 곳이 폭탄으로 폐허가 되고 어쩌면 자신이 되었을지도 모를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절망으로 가득 찬 전쟁터와도 같은 촬영 현장. 결국 ‘나불루스’를 떠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이처럼 나불루스에서의 촬영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그곳에서의 촬영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조용호의 씨네에세이]''천국을 항하여''
 

--> [조용호의 씨네에세이]''천국을 항하여''
-->
-->이스라엘이 1967년부터 점령한 팔레스타인 땅 나불루스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64km 떨어진 비옥한 계곡에 있다. 나불루스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 군에 의해 엄격하게 통제당하며 사는 ‘죄수’ 신세나 다름없다.

 

지난 겨울 외신이 전송한 사진 한 장은 이곳의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팔레스타인 여인이 나불루스 인근 마을에서 이스라엘 군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스라엘 정착민들이 파괴한 농장의 올리브나무 둥지를 끌어안고 통곡하는 사진이다. 올리브 농장을 파괴한 이스라엘 정착민들은 이 땅이 성경에 보장된 이스라엘 영토라고 주장한다. 이에 맞서 팔레스타인 저항조직은 자살폭탄테러를 감행하고, 이스라엘은 첨단 미사일과 자동화기로 거침없이 보복한다

.

지난해 베를린영화제에서 최우수유럽영화상을 수상한 ‘천국을 향하여’는 나불루스를 무대로 자살테러를 앞둔 팔레스타인 청년 두 명의 심리적 방황을 밀도 있게 그려낸 작품이다. 팔레스타인계 이스라엘 감독 하니 아부 아사드는 이 영화를 통해 최대한 객관적으로 이곳의 비극을 담아내려 노력했다.

 

팔레스타인 청년 자이드(카이스 나셰프)와 할레드(알리 술리만)는 어린 시절부터 형제처럼 자라난 사이다. 그들은 자동차 정비소에서 일하다가 어느 날 저항조직으로부터 부름을 받는다. 두 청년은 기꺼이 알라를 위해 자신들을 바칠 것을 다짐한다.

허리에 폭탄을 두르고 이스라엘 결혼식 하객 차림으로 말쑥하게 단장한 이들은 철책을 넘어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지만, 일이 틀어져 쫓겨 돌아온다. 이 과정에서 자이드가 증발한다. 저항조직은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인다.

 

그가 배신했다면 금방이라도 자신들의 거처에 미사일이 날아들 것이기 때문이다.

 자이드는 겁이 나서 하루 동안 허리에 폭탄을 두른 채 나불루스 거리를 헤매다가 동족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혀 죽었던 아버지의 무덤에 간다. 할레드가 천신만고 끝에 그를 찾아 조직으로 데려오지만, 이미 그는 대를 이어 반역자로 살아가야 하는 신세다. 결국 그들은 ‘자발적’인 선택으로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넘어가 극적이고 서글픈 마지막 반전을 연출한다.

 

이들 사이에 끼어 ‘이성’의 힘으로 설득하려는 프랑스 태생 팔레스타인 여인 수하(루브나 아자발)와 두 청년의 대화야말로 감독의 육성이다. 할레드가 “눈앞에 천국이 기다린다”고 강변하자 수하는 “천국이 어디로 도망가지 않는다”고 절망적으로 외친다. 그녀는 이 전쟁을 도덕적인 전쟁으로 바꾸자고 말하지만, 할레드는 “죽음만이 우리를 공평하게 할 뿐”이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이 영화는 겉으로는 “알라께서 자진해서 천국으로 오는 자들을 진정으로 반긴다”는 저항조직 책임자의 말을 청년들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양상으로 전개되지만, 두 청년의 복잡한 내면을 진솔하게 보여주는 데 방점을 찍는다. 서구 관객들은 이 영화에서 테러를 준비하는 팔레스타인 청년들만 보게 된다. 이들의 대화에서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죽임도 드러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관객들의 눈에 직접 보이지 않는 대사일 뿐이다.

 

감독이 아무리 객관적인 입장에 섰다 하더라도 이 영화가 굳이 어느 쪽에 유리한가를 따져보면 이스라엘 입장에서 크게 손해볼 것은 없다. 하지만 이스라엘에서는 정작 상영조차 못했고, 미국의 유대인들은 지난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에 이 작품이 후보로 오르자 수상을 막기 위해 로비까지 벌였다는 소문도 있다.

 

털끝만큼도 양보할 수 없는 절대적인 ‘신념’으로만 맞선다면 이미 서로 죽이는 과정에서 ‘희생자’라는 단어는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테러를 소재로 한 영화이면서도 총소리나 피 한 방울 화면에 드러내지 않고 비극의 진실을 포착한 감독의 솜씨에 기립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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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팔레스타인 30] 팔레스타인에서 산다는 것, 두 번째 | - 중동 2013-05-29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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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아! 팔레스타인

역사에서 팔레스타인의 고대사가 사라진 이유는 무엇인가? 성지의 대명사인 예루살렘은 어쩌다 분쟁과 냉전의 상징이 되었는가? 팔레스타인인의 몸속에는 테러리스트의 피가 흐르는가? 세계를 유랑하던 민족 이스라엘이 어떻게 팔레스타인 땅에 국가를 세우게 됐는가? 미국인은 왜 유대인을 지지하는가? '만화로 보는 팔레스타인 통사'를 통해 이 모든 의문에 답합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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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아! 팔레스타인'은 매주 수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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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퉁 시계 착용시 주의사항 | 웃고 삽시다 2013-05-29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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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다오의 짝퉁사랑은 유명하다.

특히 시계는 특, 상, 중, 하급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특급은 한국 시계방에서도 구분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나 몇 년 전만 해도 상급 짝퉁시계를 선물할 때 예의상 두 가지 주의사항을 전했다는 것이다.

 

첫째, 비올 때는 착용하시지 말고,

둘째, 시계 차신 상태에서 박수를 치시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중급도 박수칠 때 분침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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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천번제, 그 신기루에서 벗어나라 | 각주없이 성경읽기 2013-05-29 06:27
테마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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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천번제, 그 신기루에서 벗어나라
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왕상 3: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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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승인 2013.05.28  19:20:36 오세용 (seyoh)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일천번제 헌금'이라는 희한한 이름의 헌금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무려 일천 일 동안 헌금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솔로몬이 드렸다는 일천번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데, 솔로몬이 드렸다는 일천번제는 일천 번 번제를 드렸다는 말이 아니라 번제물로 드린 희생 제물의 수가 일천 마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일천 번의 제사를 드린 것처럼 '일천 번제 헌금'을 하면 솔로몬이 받았던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바른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런 잘못된 가르침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요? 오늘 본문은 번역의 문제와 그것을 읽어 내는 과정에서 일어난 오독의 문제가 겹쳐 있는 문제의 구절입니다.

 

 

문제의 발단 - 잘못된 성경 번역의 문제

 

첫 번째, 성경 번역의 문제입니다. 번역자들이 아무런 생각 없이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같은 사건을 다룬 기사가 나오면, 앞뒤를 살펴보아 같은 뜻이면 같은 말로 일관되게 번역을 해야 하는데, 다르게 번역되어 있으니, 아무래도 번역을 할 때에 별 깊은 생각 없이 해 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열왕기상 3장 6절과 역대하 1장 6절에서, a thousand burnt offering 을 다르게 번역한 데에서, 생각 없이 번역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열왕기상 3장 6절)."

"여호와 앞 곧 회막 앞에 있는 놋 제단에 솔로몬이 이르러 그 위에 천 마리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더라(역대하 1장 6절)."

'천 마리 희생'’이라고 번역해야 할 것을 '일천 번제'라고 해 놓아, 번역자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문제의 발단 - 잘못된 해석의 문제

 

그렇게 '일천번제'라고 번역된 것을, 누군가 '일천번 제'라고 읽었고 그와 동시에 그의 머리에 솔로몬이 받았던 수와 부의 복이 떠오른 게 화근이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리고 복을 받았으니, 그렇게 하면 복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헌금과 복을 연결시키려고 작정을 했겠지요. 이 구절에 등장하는 '일천번제'라는 말을 솔로몬의 축복과 연결시킨 그 놀라운 지혜, 그가 받은 지혜는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일까요?

그렇게 시작된 일천번제라는 기상천외한 헌금이 지금도 유효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니 참 안타깝습니다.

'일천번제'란 말은 몇 겹의 의미를 가지고 해석이 됩니다.

첫째는 번(番), 몇 번째 할 경우의 번(番)으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일천번제를 '일천번(一千番), 제'로 오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에 해도 될 헌금을 일천 번에 나누어 드리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번'을 '구울' 번(燔)으로 이해합니다. 구약시대 유대인들이 드리던 다섯 가지 제사 중 하나로서, 제물을 태워 드리는 것이 바로 번제입니다. 솔로몬은 천 마리의 제물을 태워 번제를 드렸는데, 이제는 그 대신 봉투에 현금을 넣어 번제라 칭하면서 드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열왕기상 3장 6절에 등장하는 '일천번제'라는 말은 어떤 때에는 '일천번(番), 제'로, 어떤 때에는 '일천, 번제(燔祭)'로 읽혀지면서 '솔로몬의 일천번제'로 자리매김을 했습니다. 복 받기 원하는 그 심리를 이용한 오독자의 그 약은 꾀에 모두 다 넘어가고 만 것이지요.

 

사람의 욕심이 화근

 

성경은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위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일천번제'라는 개념은 우리말 성경에서만 볼 수 있는 말입니다. 하나의 의미여야 할 성경 말씀이 이상하게도 유독 우리에게만 다르게 이해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우리나라 민족을 사랑하셔서, 특별히 일천번제를 허락하시고 솔로몬에게 주셨던 축복을 주시려고 하는 것일까요?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다는 속담이 있는데 '일천번제 헌금'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 생각이 납니다. 욕심에 눈이 멀어 성경을 잘못 해석해서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고 있으니 그 결말은 복은커녕 하나님을 욕보이는 것이지요.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그렇게 말해 주어도 사람들은 듣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는(딤후 4:1~4)" 때가 되었기에 그렇습니다.

일천번제 헌금이 비성경적인 것이라 말하자, 혹자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설령 그게 틀려도 무슨 대수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에게 '정성'을 다해 드린다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오히려 더 기뻐하지 않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과연 그런 헛된 정성을 기뻐하실까요? 우리들의 중심을 보시는(삼상 16:7) 하나님께서 번제를 빙자하여 욕심을 내어 복 받으려는 그 마음을 모르실까요?

성경에서 정성이란 이렇게 사용되는 것입니다.

"또 내 아들 솔로몬에게 정성된 마음을 주사 주의 계명과 권면과 율례를 지켜 이 모든 일을 행하게 하시고 내가 위하여 준비한 것으로 성전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라(역대상 29:19)."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정성은 '매일 밤 장독대에다 정화수를 떠 놓고 치성을 드렸다'는 식으로 옛날 어르신들, 우리 조상들이 정화수 떠 놓고 치성 드리는 그런 행동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 치성 드림과 '일천번제 헌금'은 맥을 같이합니다.

그렇게 '일천번제 헌금'을 드리는 사람들이 그들의 마음이 허탄한데 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응답하실 리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려 하기보다는 재물에 있음을 이미 간파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결코 그런 '일천번제 헌금'을 기뻐하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홀히, 경홀히 여기는 사람들

 

하나님은 인간과 소통하는 방법인 제사에 대하여 그저 사람이 좋은 대로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방법을 일일이 규정하여 주셨습니다. 레위기에 제사에 관한 규정이 자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 절차, 방법을 다 지켜 가면서 제사를 드려야만 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 절차와 방법을 무시하고 '정성만 있으면 되지'라고 하면서 제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일천번제에 연연하시는 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일천번제 헌금'을 드리면서 레위기를 한번이라도 머리에 떠올린 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더하여 제사를 헛되이 드리다가 그 앞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있다는 성경의 기록을 읽어 본 적은 있는지?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레위기 10장 1~2)."

그처럼 하나님에게 드리는 제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에 합당할 때에만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진노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부인하는 일천번제

 

그래도, 이런 말들을 듣고서도, '일천번제 헌금'이 전혀 성경 말씀에 합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듣고도, 일천번제 헌금을 '번제'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받아 주시겠지 생각하며 드리는 사람은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경우 더 큰 문제를 야기합니다. 하나님에게 제사의 제물로 일천번제 헌금을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겠는가,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히브리서 10장을 자세히 읽어 볼 일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18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그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그러니, 제사드릴 것이 없다는데도, 그런 것을 위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데도, 우리의 사소한 욕심, 솔로몬의 복을 받아 누리려는 그 욕심이 부득부득 우겨 가면서 번제를 드리겠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사역을 송두리째 부인하는 꼴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니 그 욕심 때문에 고귀한 주님의 사역을 부인해 버린 그 작태에 어찌 통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금도끼 은도끼', 그 속내를 들켜 버린 욕심쟁이

 

그래도 '일천번제 헌금'을 드리겠다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잘못된 것이라 누차 외쳐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계속해 왔습니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서도, '일천번제'의 유혹에 넘어가 '일천번제 헌금'을 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솔로몬의 일천 마리 번제를 일천번제로 억지로 해석해서 드린 다음에, 그야말로 가정에 가정을 더하여 하나님이 꿈속에 나타나셔서 솔로몬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내가 네게 무엇을 주랴 너는 구하라" 하신다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요?

 

우리 옛날이야기에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음씨 착한 나무꾼과 욕심쟁이 나무꾼이 각각 연못에 도끼를 빠뜨린 후에 벌어지는 사건입니다.

 

신령님은 욕심 없는 나무꾼에게 금도끼와 은도끼까지 선물로 주고 다시 연못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욕심쟁이가 자신의 도끼를 일부러 연못에 빠뜨리고 우는 척을 했습니다. 그러자, 신령님이 나왔고, 욕심쟁이에게 울고 있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도끼를 연못에 빠뜨렸다는 욕심쟁이의 말에 신령님은 연못 속에 들어가 찾아 주기로 했고, 잠시 뒤, 신령님은 연못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습니다.

"이 금도끼가 너의 도끼가 맞느냐?"

"예! 그 금도끼가 제 도끼 맞습니다!"

"예끼! 이놈 어디서 거짓말을 하느냐!"

욕심쟁이의 거짓말에 화가 난 신령님은 연못 속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욕심쟁이는 울면서 괜히 욕심 부리다 도끼마저 잃어버린 자기 자신에게 한탄을 했습니다.

 

솔로몬은 꿈속에서 하나님께 나라를 잘 다스릴 지혜를 달라고 간청을 했고, 그것을 가상하게 여기신 하나님이 그에게 부와 재물과 영광도 주신 것인데, 그것이 그대로 반복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니 '일천번제 헌금'을 열심히 드린 후에 혹시라도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신다면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요? 위의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에서 배운 것처럼 처음부터 금도끼를 자기 것이라고 한다면 안 되는 것이니, 지혜를 주시옵소서(속으로는 이런 것을 건너 뛰어 복과 재물을 주시기를 바라면서도)라고 해야만 할 것입니다. 맨 처음부터 하나님에게 그때 솔로몬에게 더하여 주신 부와 재물과 영광도 달라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하나님이 그분에게 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이 구절이 일천 번의 번제가 아닌 것을 깨닫게 되며, 성경의 구절을 결코 개인적인 이익과 욕심을 위하여 잘못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럴 때에 진정으로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다면, ('일천번제 헌금'을 드리는) 그런 행동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을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받지 못한 것이니, 더하여 다른 축복은 말할 필요 없을 것입니다.

 

집어등 불빛에 달려드는 오징어

번역의 문제 그리고 그 생각 없이 번역한 구절을 잘못 이해한 결과 예수님의 귀한 사역을 송두리째 부정한 결과가 되어 버렸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런 문제가 발생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욕심입니다. 인간의 욕심이 성경을 잘못 보도록 만들었고, 그 결과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일까지 하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깝고, 안타까운 일입니까?

오징어는 집어등의 불빛을 보고 달려듭니다. 그 불빛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달려듭니다. '일천번제 헌금'을 드려서 솔로몬의 복을 받겠다고 달려드는 오징어처럼, 우리들 또한 머리를 들이밀어 축복을 간구합니다. 반짝인다고 다 금은 아닌데(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밝게 비춘다고 모두 다 진리의 등불이 아닌데. 그런 데 좇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가 아닌가 냉철하게 따져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시인 유하의 시 '오징어'는 적절한 충고가 될 것입니다.

 

눈앞의 저 빛!

찬란한 저 빛!

그러나 저건 죽음이다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

 

그래도 감사한 일은 '일천번제 헌금'을 드려서 얻을(?) 솔로몬의 지혜보다 훨씬 쉽고도 바른 길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하나님께 우리의 부족한 지혜를 채워 주십사 간구하는 것입니다. 과연 어떤 것이 바른 진리인지를 알게 되는 복된 지혜를 주시기를, 그래서 '일천번제 헌금'은 다만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야고보서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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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왜 올바르고 균형 잡힌 문장을 경멸했나 | - 니체, 짜라투스트라 2013-05-27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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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써 올리기 시작한 지 5개월이 지났다. 원래 글쓰기에 노둔한지라 기사를 쓸 때마다 어려움이 적지 않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두려움이 앞서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진한 감동은 바라지도 않는다. <오마이뉴스> 독자들은 내 글을 읽고 과연 무언가를 느끼기는 할까. 글을 쓸 때마다 나는 나만의 고유한 문체를 의식한다. 하지만 늘 마음만으로 끝나고 만다. 그러니 그들이 내 글에서 어떻게 무언가를 느끼거나 생각하겠는가.

나는 아직도 나만의 고유한 문체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물론 내 나름대로의 원칙을 갖고 노력하고 있기는 하다. 되도록 문장을 짧게 하려고 하거나, 냉소적이기보다는 진지하고 차분한 문체로 글을 쓰려고 한다. 나는 아주 자주 의도적으로 무미건조한 서술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때 나는 보조사나 어미, 문장 전후 구절의 연결 관계를 놓고 오랫동안 고민한다. 나는 내 생각과 감정이 투영되는 부사어를 문장의 어느 곳에 놓을 것인가를 놓고 한참을 주저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까지 '이것이 정은균의 문체'라며 내세울 만한 것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털남'의 김종배 선생이 보여 주는, 그 속도감 있는 '고속도로 문체'나, <한겨레>의 성한용 선임 기자가 구사하는, 정말 딱 맞는 말만 냉정하게 내뱉는 '차도남 문체'가 부럽다. 꼼꼼하고 치밀한 자료들에 힘입어 그만의 고유한 아우라를 뿜어내는 아이엠피터의 진지한 '-습니다 문체', 혹은 묵직한 주제들에 걸맞은 진중한 문체로 이곳에 멋진 서평 기사를 자주 써 올리는 김진형 기자의 글도 내 눈길을 사로잡는다.

나는 왜 이토록 문체에 집착하나. 프랑스의 철학자 뷔퐁이 말한 "문체는 사람이다"라는 유명한 명제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문체론 관련 저작에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 경구는 어떤 작가의 문체가 그의 도덕적 품위나 인격을 재는 잣대 구실을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나는 한 사람의 문체를 깊이 들여다 보면 그 사람의 도덕적 품위나 인격뿐만 아니라 내면의 깊이와 진실성까지도 알 수 있다고 믿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문체는 사람이라는 명제는 매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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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체의 문체> 겉그림.
ⓒ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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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문체>의 저자 하인츠 슐라퍼 교수에 따르면, 이런 생각은 저 먼 고대 그리스에까지 소급되는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다. 저자는 그 대표적인 예로 수사학 교과서에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키케로와 세네카를 든다. 그들은 문체의 건강학에 관심을 기울였다. 저자는 키케로와 세네카가, 영혼이 건강하고 힘을 얻는다면 말하는 것도 힘이 있거나 용감하고 남성적이며, 영혼이 죽어 있으면 모든 것이 붕괴된다고 말했다고 소개한다.

문체는 사람이라는 명제는 매혹적이다. 문체는 글을 대상으로 하는 개념인데, 글을 쓰는 사람치고 '자신만의 문체'를 바라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글로써 세상에 맞서고자 했던 철학자 니체에게는 이러한 점이 더욱 각별했던 모양이다. 저자에 따르면, 니체는 글을 쓸 때 당대의 문법 관습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한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너무 노골적이었을까. 저자는 니체의 문체에서 그 자신의 진정한 초상화를 얻기에는 그 문체가 너무 의도적이고 너무 철저했다고 말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숫자'가 '말'과의 대립에서 승리한 사실을 슬프게 바라보는 이 책의 저자는 니체의 언어(문체)가 반수사학적이라고 판단한다. '숫자'는 경제와 민주주의를 대변한다. '말'은 작가들의 무기이다. 저자는 19세기의 니체가 당대 문화에서 교양 계층과 국가가 아주 천박한 화폐 경제에 넋이 나갔다는 사실에 한탄했다고 말한다.

민주주의는 말을 희생한다. 그런 만큼 말의 의미도 상실한다. 다수가 공유하는 법과 정의에 기초한 자본주의 경제와 시민적 민주주의는 말의 시대에 종말을 고했다. (11쪽)

저자가 보기에 니체는 그러한 숫자의 시대를 결코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저자는 니체가 그 자신의 "위대한 문체"를 통해 분주하게 폭주하는 양(量)들을 축출하려고 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저자는 니체의 문체가 매스 미디어의 언어를 대표하는 통계의 문체와 대비된다고 본다. 통계의 문체는 사람들이 말로 반박하기가 어렵다. 니체의 문체는 그러한 통계의 문체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지점에 위치한다. 토마스 만은 니체가 그러한 의도적인 문체를 통해 독일 산문에 감수성, 예술적 경쾌함, 아름다움, 날카로움, 음악성, 리듬, 정열을 부여했다고 평가한다.

니체가 주창한 "짜라투스트라의 문체", 곧 "위대한 초인의 문체"가 목표로 삼은 것은 무엇인가. 저자가 보기에 니체에게 글쓰기는 행위 그 자체였다. 저자는 이를 '파우스트'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파우스트는 서재에 앉아서 <요한복음>을 번역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러나 그는 곧 막히게 되며―"나는 말이라는 것을 그렇게 높이 평가할 수가 없다."―, 그러고는 표현들을 더 강하게 바꾸고자 한다. 우선 '뜻'으로 번역했다가 이내 다시 '힘'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종국적으로 '행위'라고 번역하고서야 그는 만족한다. '말씀'에서 '행위'에 이르기까지 파우스트는 종이와 펜, 그리고 14행의 시구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195쪽)

20세기 많은 작가들은 왜 전쟁을 바랐나

니체는 행동에 대한 요구를 배경에 두고 있지 않은 말은 쓸모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에 따른 대가도 컸다. 저자는 니체가 스스로 "그저 바보, 그저 시인일 뿐"이라는, 그래서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말들만 생산한다는 세간의 의심에 고통 받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저자는 니체가 행위를 실현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 그리고 행위를 통해 극복해야 하는 것은 모두 영웅적인 성격을 북돋운다고 보았다. 여기서 말하는 '극복해야 할 것들'은 익숙한 것의 편안함, 삶에의 애착, 변화의 어려움, 경험 부족, 손실들의 부피, 몰락의 위험 같은 것들이다. 니체는 말했다. "위험하게 살라!"

저자는 이러한 니체의 주장이 20세기 초에 아주 극단적으로 받아들여졌다고 분석한다. 저자는 그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이탈리아 미래파와 파시스트라고 말한다. 실제 이탈리아의 미래파 시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는 대위 계급장을 달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저자는 20세기의 많은 작가가 전쟁을 바랐고,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자 '행위'를 위해 전쟁에 참전했음에 주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많은 시인들은 자원해서 전선으로 갔고 거기서 수많은 이들이 죽었다. 작가가 전쟁터로 갔다면 드디어 말이 행위를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1차 대전은 열광하는 자들에게 약속한 것을 지켜주지 않았다. 참호에서의 기다림, 물량전의 살육은 행위가 아니었다. 굴욕적인 패배도 비극적 종말이 아니었다. 니체의 말을 계속 믿고자 하는 자는 행위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고대하며 기다려야 했다. (206쪽)

니체는 위대한 철학자이자 산문가, 시인 등으로 평가된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저자는 니체가 자신의 글을 통해 공손한 글에 대한 불경함을 보여 주고자 했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시선을 따를 때, 니체는 전통적이고 인습적인 문장, 올바르고 균형 잡힌 문장을 경멸했다. 저자는 공손한 문체는 쉽게 잊히지만 불경스러운 문체는 시대가 달라지더라도 사람들에게 기억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묻는다. 왜 니체의 열광적인 문체는 상도를 벗어난, 그리고 위험한 이념에 대해 면역력을 키운 오늘날의 독자들까지도 열광시키는가고.

많은 사람이 글에서 달변과 능변을 꿈꾼다. 능수능란한 논리 전개와 문장들 간의 매끄러운 연결도 작문이나 문체 교범에서는 핵심적인 고려 사항들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좋은 글은 결코 그런 능변이나 달변, 매끄러운 문장들에만 있는 게 아니다. 니체처럼 글을 행위로까지 생각하지는 않더라도, 글 한 편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는 열정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해 보이기 때문이다. 글을 감정이나 생각의 배설물로만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니체의 문체> (하인츠 슐라퍼 지음, 변학수 옮김 | 책세상 | 2013. 4. 30 | 303쪽 | 1만 7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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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 | 역사란 무엇인가? 2013-05-26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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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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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리째[송두리째] | 국어 공부 합시다 2013-05-26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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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리째[송두리째]

[부사] 있는 전부를 모조리.

유의어 : 온통, 깡그리, 모두1

 

  • 재산을 송두리째 다 써 버리다 (표제어:송두리째)

  • 노름으로 가산을 송두리째 날리다 (표제어:송두리째)

  • 화재로 집이 송두리째 타 버렸다. (표제어:송두리째)

  • 그 원금이 일화(日貨)로 삼십만 원, 그도 모르는 사이에 그 자는 책이며 돈을 송두리째 가로채 버린 것이다. 출처 : 정병욱 외, 한국의 인간상 (표제어:송두리째)

  • 그런데 심각할 것도 없는 장난이 자신을 송두리째 뽑아 내동댕이치는 결과를 가져올 줄이야. 출처 : 박경리, 토지 (표제어:송두리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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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성1 (致誠)[치ː성] | 국어 공부 합시다 2013-05-26 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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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성1 (致誠)[치ː성]

    [명사]

    • 1.있는 정성을 다함. 또는 그 정성.
    • 2.신이나 부처에게 지성으로 빎. 또는 그런 일.

    유의어 : 정성11

     

     

    • 무당이 단골집을 위하여 치성 드리는 일.
    • 자식이 아무 탈 없이 잘 크도록 치성드리는 돌.
    • 노구메를 놓고 산천에 제사 드리는 치성.
    • 배에서 드리는 치성. 뱃일을 할 때의 무사고와 행운을 빈다.
    • 치성드리는 사람.
    • 뒤울안에 단을 뭇고 치성드리다. (표제어:뭇다)

    • 엄마는 매일 밤 장독대에다 정화수를 떠 놓고 치성드렸다. 출처 : 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표제어:드리다1)

    • 옛날 성인들을 모셔 놓고 나라에서 춘추로 두 번 굉장하게 치성드리는데치성 드리는 것을 석전 올린다고 한답디다. 출처 : 홍명희, 임꺽정 (표제어:춘추1)

    • 지난번에 치성드린 이후로 나는 사흘 동안 내리 밤똥을 눈 적이 없었다. 출처 : 윤흥길, 무지개는 언제 뜨는가 (표제어:밤똥)

    • 그 칠성당에서 열흘을 치성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그는 그 귀여운 딸을 얻은 것이다. 출처 : 한무숙, 만남 (표제어:칠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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