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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트룸(Suite Room) | 기타 - 잡동사니 2014-02-28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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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스위트룸에서

'스위트'는 달콤하다는 뜻이 아니라

스위트룸(Suite Room), 한데 이어져 있는 방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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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신학에 대한 대담한 도전 | 이 책 꼭 읽자 - 기독교 2014-02-27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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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신학에 대한 대담한 도전

<천하무적 아르뱅주의>를 읽고

 

 

   
▲ <천하무적 아르뱅주의> / 신광은 지음 / 포이에마 펴냄 / 512쪽 / 1만 8000원

<메가처치 논박>의 저자 신광은 목사가 새 책 <천하무적 아르뱅주의>를 펴냈다. 전작이 한국교회의 교회론에 대한 비판이었다면, 이번 책은 구원론에 대한 비판이다. 하지만 교회를 '구원 공동체'로 여기는 저자에게 구원론과 교회론이 별개일 수는 없다. 결국 저자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윤리적으로 실패한 한국교회의 잘못된 구원론이다. 그는 그 잘못된 구원론을 '아르뱅주의(Arvinism)'라고 칭한다.

 

아르뱅주의는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ism)'와 '칼뱅주의(Calvinism)'의 조합, 그것도 최악의 방식으로의 조합이다. 따라서 아르뱅주의를 이해하려면 먼저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칼뱅주의의 구원론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칼뱅(1509~1564)이 죽은 후, 그의 예정론이 데오도르 베자에 의해 경직화되고 도식화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평신도 신학자 쿠른헤르트 베자가 일어나 그런 경향에 반발했다.

 

데오도르 베자는 그의 제자 아르미니우스(1560~1609)에게 쿠른헤르트 베자에 맞서 예정론을 변호하라고 지시한다. 한데 아르미니우스는 예정론을 변호하는 과정에서 점차 그것의 문제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적진으로 넘어가 자신이 옹호하려 했던 예정론을 반박하기 시작했다.

 

1610년에 그의 추종자들은 예정론에 반대하는 '항론서'를 통해 구원에 대한 5대 교리를 선포한다. 항론파의 이런 도발에 당황한 칼뱅주의자들은 1618~1619년에 네덜란드 도르트에서 종교회의를 열어 항론파의 5대 교리를 정죄하고 그에 맞서는 칼뱅주의 5대 교리를 발표한다. 흔히 '튤립(TULIP)'이라 불리는 다섯 가지 명제를 담고 있는 '도르트 신조'였다.

 

아르미니우스파의 항론서와 칼뱅파의 도르트 신조는 거의 모든 항목에서 상반된다. 하지만 가장 큰 차이는 '자유의지'와 '성도의 견인'에 관한 것이다. 아르미니우스파는 인간이 자유의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여기는 반면, 칼뱅파는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아르미니우스파는 은혜로 구원받은 인간이라도 그 은혜와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고 여기는 반면, 칼뱅파는 한번 택함을 받아 구원을 얻은 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 구원을 잃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신광은 목사는 아르미니우스주와 칼뱅주의 모두에 나름의 진리와 나름의 오류가 있다고 여긴다. 그의 관심사는 각각의 신학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한국교회가 그 두 신학을 수용하며 보인 뒤틀린 방식이다. 그에 따르면, 한국교회는 반지성적 편의주의에 입각해 도저히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그 두 신학에서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곶감 빼먹듯 빼먹었다. 즉 아르미니우스주의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임으로써 발생하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그리고 칼뱅주의에서는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든 그 구원을 잃지 않는다는 '성도의 견인' 교리를.

실제로 오늘날 우리들은 너무 쉽게 구원을 얻는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나는 주님의 구속의 은혜를 믿습니다"는 말 한마디로 그동안 지은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얻는다. 영화 <밀양>에 등장하는 유괴범이 단적인 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구원을 얻는 자들은 영화 속에만 있는 게 아니다. 지금 한국교회 신자들 대부분은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 없이 그리고 그 회개에 대한 그 어떤 공식적인 확인 절차도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내적 확신만으로 '저 혼자 은밀하게' 구원을 얻고 있다.

또한 오늘날 우리들은 신자가 된 이후에 지은 죄에 대해서도 제약 없는 면책 특권을 누리고 있다. 한번 구원받은 자들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 구원을 잃지 않는다는 '성도의 견인' 교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 때문이다. 성추행을 저지르고 교회를 사임했던 목사가 피해자들에게 그 어떤 공식적 사과나 배상도 하지 않은 채 하나님의 용서를 들먹이며 당당하게 목회를 재개하고 있다. 헌금을 유용해 배임과 사기죄로 실형을 선고받은 자가 여전히 목사직을 유지하면서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 하나님은 끝까지 나를 용서하고 구원해 주신다는 어처구니없는 확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저자는 이런 자의적이고 혼합적인 구원론인 아르뱅주의가 오늘날 한국교회의 윤리적 타락의 주범이라고 확신한다. 즉 교회의 타락의 배후에는 '신학의 타락'이 있다는 것이다.

 

한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그가 기독교 신학이 전에는 멀쩡했는데 한국교회로 인해 갑자기 타락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가 보기에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비롯한 모든 기독교 신학은 한국교회로 유입되기 오래 전부터 이미 심각한 문제에 빠져 있었다. 그는 그동안 기독교에서 '정통'으로 간주되어 왔던 신학이 빠져 있던 세 가지의 우물을 지적한다. 그리스 철학,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루터. 저자가 그 셋을 '우물'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 셋 모두가 신학에 생수를 제공한 생명의 원천이었으나 그와 동시에 신학이 헤어 나오지 못한 채 빠져 죽은 무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지적을 통해 <천하무적 아르뱅주의>는 단순히 한국교회의 잘못된 구원론을 비판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그동안 교회사를 지배해왔던 정통 신학 전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아주 대담한 도약이다.

 

평자가 보기에 이 책의 주제는 단순히 한국교회의 잘못된 구원론인 '아르뱅주의'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비판은 저자 자신이 "아직 답을 내어 놓을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고 고백하며 제시했던 '새로운 구원론을 위한 제언(제6부)'을 위한 서론에 불과하다. 이 책의 핵심은 이 제언 부분이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먼저 출애굽기를 중심으로 성서의 구원관을 분석한 후 그 분석을 통해 그동안 우리가 통상적으로 받아들였던 구원론의 허점을 찾아낸다. 그가 보기에 성서의 구원론은 '지상에서 영원으로의 이동'이 아니라, '하나님을 멀리 떠난 상태로부터 하나님의 통치로의 이동'이다.

 

신약성서는 '하나님의 통치'를 '하나님 나라'로 묘사한다. 예수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가르치신다. 한데 이때의 회개는 과거의 잘못에 대한 단순한 뉘우침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 곧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구원론은 단순히 인식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행위의 차원 속으로 진입한다.

 

하나님의 통치의 회복으로서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케 한다. 새로운 구원론의 입장에서 볼 때 십자가는 '대속'이 아니라 '타락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의 회복'을 보여 주는 사건이다. 그 사건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통치권을 넘겨받았다. 그리고 우리를,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초대교회는 그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주로 고백했고 그 주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자들의 공동체를 이뤘다. 그 공동체는 그들의 주인 그리스도가 추구했던 정의와 평화가 지배하는 곳이다. 그 공동체가 추구하는 선교는 교회의 구성원을 늘려 나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를 확산시켜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의 선교의 표어는 이렇게 되어야 한다. "우리 안에 하나님나라가 있으니 우리 안으로 들어오라." 교회가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의 모범을 보이는 구별된 공동체가 될 의무를 갖게 되는 지점이다.

 

<천하무적 아르뱅주의>는 한국교회의 윤리적 실패의 원인이 된 아르뱅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해 새로운 구원론을 제안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한데 그 새로운 구원론은 단지 기존의 구원론 중 세부 사항 몇 가지의 변화만을 요구하지 않는다. 구원론의 변화는 그리스도론, 교회론, 선교론의 신학적 패러다임 전반의 변화를 요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저자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그동안 세계 교회가 정통으로 여겨왔던 신학에 대해 만만치 않은 도전을 제기한다. 어떤 이가 이 책을 아르뱅주의에만 초점을 맞추어 읽는다면, 아마도 그는 이 책을 잘못 읽는 것이 될 것이다.

 

김광남 / <한국 교회, 예레미야에게 길을 묻다>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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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계발서 열풍에 똥침 놓는 '개독교' 연구자 | 인문학(人文學)에 관하여 2014-02-26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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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계발서 열풍에 똥침 놓는 '개독교' 연구자

[인터뷰] <거대한 사기극>, <인문학으로 자기 계발서 읽기>, <공부란 무엇인가>의 저자 이원석 연구원

 

임수현 =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6180

 

어떤 사람이 한 분야에서만 천 권의 책을 읽고, 그 분야를 비평하는 책을 써서 상을 받았다면 그 비평은 들을 만한 이야기이지 않을까? 모처럼 따스한 오후, 홍대 어느 카페에서 만난 이원석 연구원(언더우드학원선교센터) 얘기다. '자기 계발서 권하는 사회의 허와 실'이라는 부제를 가진 <거대한 사기극>으로 지난해 출판평론상을 받았다. "첫 책부터 상을 받아 기분이 좋으셨겠다" 물었다. "뭐, 예"로 끝난 대답, 얼른 메뉴판을 건넸다.

이 연구원은 선생님이셨던 어머니의 추천으로 자기 계발서를 읽기 시작해 지금까지 천 권을 넘게 읽었다. 그 정도 읽었으면 성공 안 하기도 어렵겠다 싶은데 그는 자기 계발서가 오히려 올바른 자기 길을 가지 못하게 막는다고 비판한다.

 

   
▲ <거대한 사기극>으로 2013 한국출판평론상을 받은 이원석 언더우드학원선교센터 연구원을 만났다. 이 연구원은 자기 계발에 매진하는 사회와 적극 이용하는 교회에 짱돌을 던진다. ⓒ뉴스앤조이 임안섭

서점에 가 보면 안다. 베스트셀러 코너는 자기 계발서가 점령하다시피 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데는 이유가 있을 텐데 그가 제대로 짚은 걸까.

큰 꿈을 품으라는 자기 계발적 가르침을 따라 10대 때 이 연구원의 꿈은 선교사였다. 3대째 가톨릭을 믿는 가정에서 청소년 때 개신교인이 된 그는 자기 계발서의 지론처럼 위대한 꿈을 꾸었다. "순교가 아니면 휴거를." (증인은 곧 순교자다.) 물론 믿는 바를 제대로 알고자 성경을 읽고, 기독교 고전을 봤다. 빨리 성장하고 싶어 방언 기도를 하고, 금식을 했다.

 

선교사 꿈꾸던 10대, 개독교 연구하는 40대

 

이원석 연구원은 학부와 대학원 과정에서 신학과 인문학을 넘나드는 공부를 했다. 박사 과정에서는 문화이론이라는 전공을 택했지만 연구 주제는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교회에서 내 자신을 새롭게 발견해 가고, 인생을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처음으로 다녔던 곳이 개독교의 모델 같은 교회였어요. 돈, 섹스, 권력이 얽히고, 삯꾼 목사까지 온갖 문제가 있던 교회였어요. 지금 와서 보면, 제가 신학을 공부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총이지요. 교회를 통해 새롭게 내 자신, 자아를 만들었다고 여기기 때문에 기독교 문제에 더 민감해져 이제는 한국 사회의 '개독교 스터디즈(studies)'를 창시하겠다라고 반 농담으로 말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이 연구원은 잠언 16장 9절 말씀을 언급하며 딱 자기 삶이라고 했다. 위대한 선교사를 꿈꾸다 개독교 현상을 연구하게 된 것, 몇 달 새 펴낸 자기 계발과 관련한 3권의 책(<거대한 사기극>, <인문학으로 자기 계발서 읽기>, <공부란 무엇인가>)이 그 방증이다. 3권의 책 이야기에 앞서 그가 말한 '개독교 스터디즈'가 궁금했다.

 

"한국교회는 세상과 짝패예요. 한국교회는 일제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강한 힘에 대한 동경, 의지, 열망을 갖게 됐어요. 그때부터 교회는 항상 권력자 편에 서서, 지배 계층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병리적 상태에 처했습니다. 사학법 개정을 논의할 때 목사들이 스님처럼 머리를 밀었죠. 주5일제가 도입되기 전, 한 목사가 안식일 계명을 내세우며 반대했습니다.

안식일 계명은 노예나 가축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로서의 계명인데, 그 목사는 (6일 동안 힘써 일해야 한다는) 그야말로 전복적 성경 읽기의 정수를 보여 줬어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대형 교회가 대기업 등의 주류 집단과 이해관계가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스스로 지배 집단에 자리한 이런 예들은 셀 수 없이 많아요."

 

미우나 고우나 한국교회 일원으로서 남이 까는 것보다 자기가 까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개독교 현상을 연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어릴 때부터 읽어 온 자기 계발서가 개독교로 불리는 한국교회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했다.

 

"2007년 출간된 <시크릿>은 2년 연속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는데, 2년 전 <긍정의 힘>이 나와서 두 해 동안 기독교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해요. 그야말로 세례요한처럼 먼저 길을 예비해 줬달까? 그 이후도 마찬가지예요. <아침형 인간>이 나오니까 <새벽형 크리스천>이 나옵니다. 기독교는 자기 계발의 터를 닦기도 했지만 백업도 해 줘요. 자기 계발서와 기독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아주 긴밀한 사이예요."

 

성경에 없는 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 자기 계발론은 승자 독식 사회를 인정한다. 경쟁에서 진 사람은 승자보다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이원석 연구원은 사회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묻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뉴스앤조이 임안섭

자기 계발의 고전 상당수는 미국 청교도 목사들에 의해 집필됐다. 미국 개척 시대, 현세의 성공을 향한 열망에 자기 계발 패러다임이 필요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자기 계발서의 일차적 확산로는 교회였다. 노만 빈센트 필의 <적극적 사고방식>은 1952년에 쓰여 1955년 번역되고, 필의 후계자 로버트 슐러의 <불가능은 없다>는 출간된 지 1년 만인 1968년 대한기독교서회에서 번역했다. 이는 당시 우리나라 출판 상황을 고려했을 때 놀라운 속도다.

로버트 슐러의 절친, '삼중 축복(요삼 1:2)'의 조용기 목사가 부흥 집회와 기도원 등을 통해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는 식으로 자기 계발 정신을 퍼뜨렸다. 그가 선포하는 '삼중 축복'은 구원의 복이 건강의 복, 경제의 복 등 현세의 성공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IMF 이후 많은 사람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자기 계발서는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어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쏟아졌다.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이길 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회구조의 잘못은 배제하고 모든 일을 자기 자신의 책임으로 만들었다는 데 있다고 이원석 연구원은 말했다.

 

자기 계발의 원어가 "Self Help(자조)"라고 그는 밝힌다. 자기 계발서의 바이블 격인 <자조론>(새뮤얼 스마일스)의 원서 제목이기도 하다. <자조론>의 첫 문장이기도 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격언이 미국에 깊이 뿌리내리게 된 데에는 국가가 주도적으로 도와줄 수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모든 걸 건설해 가야 했던 미국적 정황을 배제하고 생각할 수가 없다.

이원석 연구원은 여기에 돌을 던진다. "정말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울까?" 다시 말해서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을 것이라며 자신만을 챙기는 태도가 과연 성경적인가?

 

자기 계발서는 자조(自助)를 말하지만 이 연구원은 공조(共助)를 말한다. 그는 하늘은 서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믿는다. 교회가 진젠도르프의 모델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20여 명의 신도가 한 명의 선교사를 후원하는 구조를 가리킨다.

 

교인 중에 암에 걸린 환자가 있다면, 교회는 암 치료를 위해 돈을 걷어야 한다. 그런데 교회는 오히려 믿음이 부족하고, 기도가 부족했다고 문제를 모두 개인에게 환원해 버리는 모습을 보인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웃 돌봄을 잊고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며 세상 권력을 취한 한국교회는 개독교라고 비판받는다.

 

   
▲ 이원석 연구원이 펴낸 3권의 책에서 우리는 언젠가부터 자기 계발이 시대 정신이 된 현상에 관한 진단과 그 처방을 발견할 수 있다.

욕망 조장하는 자기 계발서 아닌 진정한 삶 찾는 공부

 

"자기 계발 사회는 겁을 줍니다. '남들처럼 일하면 망해. 더 빨리 아침부터, 아니 새벽부터 일찍 공부해야지', '안정된 노후를 위해서는 10억 정도 모아야 해', '중1, 2 때의 성적이 고3 때까지의 성적으로 이어지니, 중학교 때부터 열심히 해야 해' 등으로요. 또한 자기 계발 사회는 헛된 약속을 합니다. '인문학 공부하면 천재의 뇌로 바뀌어서 성공할 수 있어', '성공하려면 성공을 생각해', '지금은 말단 사원이라도 CEO의 마음으로 살면 언젠가는 CEO가 될 거야' 이런 식으로 욕망을 조장합니다. 더욱이 사람들에게 자신의 욕망도 아닌 것을 내재화하게 했지요."

 

앞서 이 연구원이 쓴 <거대한 사기극>, <인문학으로 자기 계발서 읽기>가 이 같은 현상에 대한 진단이라면 최근 출간된 <공부란 무엇인가>는 대안이다. 사회의 거짓된 시스템에서 자기 계발서는 욕망의 체계를 공고히 한다. 인문학마저 조장된 욕망을 내재화하는 데 쓰이는 형편에서 바른 공부만이 대안이라고 그는 말한다.

 

"인문 고전을 공부한 사람들이 세계를 지배했다는 말은 허구입니다. 가령 서구 중세에서 인문 고전을 공부한 이들은 수도사들이었고, 그들의 몫은 청빈, 순결, 복종이었습니다. 외려 왕과 귀족은 대개 문맹자들이었지요. 우리 시대 갑부의 대다수가 저학력자들입니다. 인문 고전이 약속하는 것은 세속적 성공이 아니라 내면적 자유입니다.

 

우리도 중세의 수도사들처럼 읽어야 할 것입니다. 성공을 위한 도구로 고전을 대하면 안 됩니다. 논술 준비하듯이 인문 고전을 보는 작금에는 성경마저 기계적으로 대합니다. 매일 구약 3장, 신약 1장 읽기로는 크게 변하기가 어렵습니다. 두 가지 접근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66권으로 이루어진 성경의 각 권을 가급적 앉은 자리에서 다 읽는 거예요. 특히 복음서를 그렇게 읽는다면, 새로운 눈이 열릴 거예요. 더불어 가급적 한 권의 성경을 반복적으로 읽는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가령 마태복음서 한 권을 여러 번 통독하는 거지요.

 

다른 하나는 묵상하는 것입니다. 매일 십여 절의 본문을 QT하는 것으로는 크게 변하기 어렵습니다. 한 번에 소화하기에는 본문도 많고, 정해진 도식으로 분석하기 일쑤입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한두 절 정도의 짧은 본문을 개가 뼈다귀 물고 늘어지듯이 곱씹어 읽고, 수시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가급적 일주일 정도는 거기에 매달리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의 내면을 세밀하게 돌아보고, 세상을 다시 볼 때 이전에 깨닫지 못한 부분을 새롭게 통찰하게 되는 것입니다."

 

   
▲ 이원석 연구원은 자기 계발서에서 주창하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자기 현실에 맞닿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기지 않아도 행복한 사회, 자기 계발하지 않아도 취업할 수 있고 결혼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힘이 거기에 있다. ⓒ뉴스앤조이 임안섭

이원석 연구원이 강조하는 인문 고전 읽기에는 욕망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 자조가 아닌 공조의 삶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이다. 예수는 로마제국과 종교 체제 속에서 자기 자리를 확보하고자 하는 욕망을 좇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기 길을 가셨고, 그 결과로 십자가에 달리셨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많은 세속적 위인들도 그렇다. 고대 희랍 도시국가의 현자 소크라테스는 결국 사약을 받았다. 그들은 두렵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세상과 '맞짱 뜨는 자유'가 있었다. 자기 욕망이 아닌 것에 속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계발서가 요구하는 고삐 풀린 욕망의 질주를 멈추고, 진정한 자기 길을 찾는 것은 자기 내면을 비추는 공부의 힘으로써 가능하다.

 

삶에 맞닿은 공부, 더 많은 이들과 함께

 

일상을 바쁘게 몰아치는 세상에서 "개가 뼈다귀를 물고 늘어지듯이" 고전을 보고, 성경을 읽는 것은 쉽지 않다. 요즘 20대는 오찬호 교수(<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저자)가 짚었다시피 자기 계발서의 내용을 완전히 내면화해 사회구조의 불이익을 자기 책임으로 여기고, 경쟁에서 낙오한 이들을 대놓고 차별하는 모습도 보인다. 이러한 현실에서 이원석 연구원이 말하는 제대로 읽기는 여간한 자기 직면에 따른 결단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를 수월하게 해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자기 계발을 비판하는 입장에서 개인의 몫과 사회구조의 몫을 항상 구별하고자 하지만, 그럼에도 자기가 져야 할 몫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자기 자신과 현실을 바르게 직면하는 것입니다. 많은 돌팔이 약장수들은, 많은 동기부여자, 많은 힐러, 멘토들은 사회적 차원을 거세하고, 개인적 문제로 줄여 준 다음에 개인의 능력을 부풀리고, 그 욕망을 '뽐뿌질'합니다. 상처를 토닥이고, 잘못하지 않았다고 격려하며, 더 잘할 수 있다고 다그치면서 말이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러한 일차원적 사회 속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라면, 그렇게 살면 됩니다.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면 안 됩니다. (바른 공부할)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마음과 욕망이 없는 것입니다. 싫으면 안 하면 됩니다. 그냥 노량진에서 계속 시험 준비하고, 계속 남 차별하면 돼요.

 

스스로 직면할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경쟁이 옳은 걸까?', '이렇게 결혼하고 살아가도 괜찮은 걸까. 내 아이에게도 이런 지옥 같은 세상을 주는 게 옳은 걸까' 하는 질문이 든다면, 깊이 한번 인문 고전을 보고 제대로 성경을 읽어 보라고 하는 거지요. 저는 기본적으로 남의 소리가 아닌 자기 내면의 성찰에서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고 봐요."

 

   
▲ 한국교회가 개독교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도록 이원석 연구원은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다고 했다.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생계와 사회, 교회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 나누는 자리를 만드는 데 소망을 두고 있다. ⓒ뉴스앤조이 임안섭

이원석 연구원이 말하는 바른 공부는 자기 계발서들이 주창하는 성공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자기 현실에 맞닿은, 서로 돕고 살아가기 위한 공부다. 그는 몇몇 동료들과 함께 연구 공동체를 구상하고 있다. 모여서 생계와 사회, 교회에 대해 공부하고 발표하면서 이야기 나누려고 한다. 교회 밖이든 안이든 더 많은 이들과 공부하는 모임을 만들고 싶다.

 

"저는 어쨌든 사람들이 공부하도록 제가 독려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하고 싶어요. 이미 여러 곳에서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 안에서만 하더라도 청어람아카데미나, 기청아(기독청년아카데미), 현기아(현대기독연구원), 느헤미야, 로고스서원 등이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더 많이 그런 운동체가 일어나야 한다고 믿습니다. 좁은 시장을 두고 서로 경쟁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더욱 파이를 키워야지요.

 

저는 특별히 교회가 거듭나는 데에는 교양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가 공부하는 공동체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럴 때에야 개독교라는 오명을 벗게 될 것이고, 나아가 한국 사회에 빛과 소금으로 다시 나타나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한국교회와 한국 사회가 공부하는 교회와 공부하는 사회로 새롭게 나아가는 데에 그저 벽돌 하나를 올리고 싶습니다.

 

이게 한국 사회와 교회에 제가 기여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에요. 일자리 못 찾은 수많은 시간강사들 있습니다. 수많은 젊은 연구자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분들이 뜻을 함께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내가 잘 안 될 때, 남이 날 도울 거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공조(共助)지요. 어떤 곳보다 교회가 해야 할 역할이에요. 제 책에서 인용한 피터 모란의 말입니다.

 

'아무도 부유해지려 하지 않으면 모두 부유해질 것이고, 모두가 가난해지려 하면 아무도 가난해지지 않는다.'(<인문학으로 자기 계발서 읽기>, 2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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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구려 구원 퍼트린 괴물 신학, 아르뱅주의 | 이 책 꼭 읽자 - 기독교 2014-02-26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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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구려 구원 퍼트린 괴물 신학, 아르뱅주의

[서평] 신광은 <천하무적 아르뱅주의>(포이에마)

 

뉴스앤조이 =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6195

 

신광은 목사는 한국 개신교의 부패한 현실에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소장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신학대학의 교수가 아닌 지역 교회의 목회자이며 아직 박사 학위도 마치지 않은 그에게 '신학자'라는 칭호가 적절한지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에게 나는 우선 그의 문제작 <메가처치 논박>을 읽어 볼 것을 권한다.

   
▲ <천하무적 아르뱅주의> / 신광은 지음 / 포이에마 펴냄 / 512쪽 / 1만 8000원

 

<메가처치 논박>은 한국 개신교회의 대형화에 따른 윤리적 퇴행 현상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크기에 대한 집착'이라는 보다 근원적인 차원의 문화 이데올로기에 주목함으로써 개신교의 일그러진 '오늘'을 읽어 내려는 비평적 개입이 돋보이는 저작이었다.

그 책에서 저자는 '메가처치 현상'이라는 용어를 통해 '무한 성장'을 추구하는 욕망을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일부 '상업적인' 대형 교회들에 국한된 현실이 아니라, 동시대 개신교회 일반이 공유하고 있는 지배적 정서라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즉, '메가처치'가 된 소수의 교회들이 성취한 욕망을 대다수의 교회가 내면화함으로써 또 하나의 '메가처치'가 되기를 바라는 욕망이 한국교회의 일반화된 '현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이는 무한 성장을 미덕으로 '이미 큰 교회'와 '장차 클 교회'만이 존재하는 개신교의 현실에서 성장의 한계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메가처치 논박>에서 보여 준 저자의 현실 분석과 비평적 개입은 신학대학의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신학자라는 정체성과는 별개로 지역 교회의 더 많은 '목사-신학자'의 출현을 기대할 수 있도록 해 준 희망의 신호이기도 했다. 그의 새 책 <천하무적 아르뱅주의>가 반가운 이유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이 희극적인 현실은 그냥 몇몇 지도자들의 인간적인 연약함으로 생겨난 우발적인 도덕적 스캔들이 아니(23쪽)"다. 겉으로 드러나는 윤리적 실패의 이면에는 한국 개신교회의 '신학적 실패'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문제의식의 출발점이다(26쪽). 그는 '아르뱅주의'라는 새로운 용어를 통해 한국 개신교회의 윤리적 문제를 지속적으로 양산해 내는 신학적 구조에 주목하고, 그 해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저자가 보기에 한국 개신교회의 문제의 근원에는 왜곡된 구원론이 있다. 교회가 값싼 죄의 용서를 통해 구원에 이르는 면죄부를 무차별적으로 남발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과거 성 베드로성당 재건축 자금 마련을 위해 면죄부를 판매한 가톨릭교회의 과오가 종교개혁자들의 공분을 샀다면, 오늘날 수천억 원에 이르는 대형 교회의 건축(을 위한 모금)과 목사직 세습, 헌금의 횡령과 목사의 성범죄 등으로 얼룩진 한국교회의 퇴행적 현실은 교회 개혁자들의 관심을 넘어 동시대 시민 일반의 공분을 사고 있다. 이른바 "교회가 사회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윤리적 문제의 근원에 대한 신학적 분석과 비평적 개입은 반드시 필요한 과제이다.

 

저자는 한국교회가 '구원론'에 있어서만큼은 종교개혁의 대상이었던 중세 가톨릭교회보다 더욱 심각한 타락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중세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발행이 "돈이 되었든, 선행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모종의 징벌과 보속의 행위를 요구한 만큼 완전히 공짜는 아니"었던 반면,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가 발행하는 신학적 면죄부는 "아예 찍을 필요도 없이 그냥 말로 발행하면 되는 완전 '공짜'(93쪽)"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발행하는 구원에 이르는 '완전 공짜' 면죄부를 얻기 위해서는 죄를 사함받기 위한 일체의 다른 노력이 필요 없다. 그저 죄 사함의 은총을 "마음으로 믿고" 이로써 구원에 이르렀음을 "입으로 시인"하면 족하다. 한국의 개신교가 "개신교 역사상 가장 부패한 교회(11쪽)"라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한국의 개신교회는 이른바 '회개'를 위한 노력의 진정성을 입증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동체적 검증 장치도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죄의 용서'와 '구원의 확신'을 무차별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신앙의 이름으로 '살인 면허'를 발급하고 있다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253쪽). 그러므로 이 책은 이러한 극단적 편의주의에 물든 구원론이 아무런 문제 제기도 없이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한국 개신교회의 현실을 '문제'로 설정하여 신학적·비평적 개입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평으로서의 신학'의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사례로 읽힐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 <메가처치 논박> / 신광은 지음 / 정연 펴냄 / 357면 / 1만 5000원

 

저자는 책의 2부와 3부에서 각각 칼뱅주의의 주요 교리(T.U.L.I.P.)와 아르미니우스주의 교리(N.C.U.R.C.)의 내용을 소개하고, 각각의 교리가 형성된 역사적 맥락을 설명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모두 각각의 교리가 태동하게 된 역사적 교훈을 따라 제대로 작동하기만 한다면 오늘날 한국에서와 같은 '윤리적 패배'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220쪽).

 

그러므로 저자는 문제가 교리들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역사적 맥락을 떠난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즈주의의 '최악의 조합'이 개신교회의 구원론을 대체하고 있는 현실에 있다고 보고 있다.

 

이 책의 백미는 저자가 '아르뱅주의'라는 용어를 소개하고 이를 통해 구원론의 문제점을 분석해 내고 있는 4부 '한국교회의 면죄부, 아르뱅주의'이다. 그는 마이클 호튼(Michael Horton)이나 크레이그 블룸버그(Craig Blomberg) 등이 사용한 '칼미니즘(Calminism)'이라는 용어에서 영감을 얻어 '아르뱅주의'라는 신조어를 주조하였는데, '칼미니즘'이 두 교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제3의 길로서의 혼합을 지칭하는 용어라면, '아르뱅주의'는 두 교리의 최악의 조합을 지칭함으로써 현실에 비판적으로 개입하기 위한 비평적 용어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지닌다(221쪽).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의 최악의 조합인 '아르뱅주의'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각각의 역사적 교리가 모두 유지하려고 했던 '변증법적 긴장'을 제거하고(246쪽), 칭의와 성화를 별개의 사건으로 봄으로써 '성화의 실종'에 기여하며(251쪽), 이로써 '현실 긍정의 이데올로기(253쪽)'로 전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르뱅주의'에 물든 한국의 개신교회는 "야훼 종교의 특징인 예언자적 상상력이 질식된 현실 체제 긍정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하여 "기득권자들에게 아부하고 아첨하기에 바쁜(257쪽)" 타락한 종교의 전형성을 지니게 된다고 말한다.

 

한편,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아르뱅주의'가 한국 개신교회의 타락한 구원론의 전형으로 자리매김하기까지는 1940년대를 전후로 미국에서 출현한 '신복음주의' 운동의 지속적인 영향력이 있었다(267쪽).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의 대중 전도 집회로 대표되는 미국의 신복음주의 운동은 이전까지의 근본주의적 신학과 적절한 거리두기를 통해 온건하고 중도적인 입장의 복음주의 운동을 전개해 왔다.

 

1960~1970년대를 전후로 대중 전도 집회와 복음주의 학생 선교 운동 등이 결합된 형태의 새로운 복음주의 운동이 시작되면서 한국에서도 이에 영향을 받은 선교 단체들을 중심으로 학생 선교 운동, 초대형 대중 집회 운동, 복음주의 문서 선교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문제는 이들 신복음주의 운동에 영향을 받은 단체와 교회의 지도자들 기독교의 본질을 '자기 영혼의 구원에 관한 문제'에 일차적으로 국한된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구원에 있어 (타자와의 관계에 따른 책임이 배제된) '개인의 결단'을 지나치게 강조해 왔다는 데 있다.

 

1980년대 한국의 신복음주의 교회 개척 운동을 이끌며 급속한 교회 성장을 이룬 이른바 '복음주의 4인방'의 성공은 교회 성장에 있어 '영혼 구원'과 '개인의 결단'에 대한 강조가 지니고 있는 '실용성'에 주목함으로써 점차 '탈신학화'의 길을 걸어갔다(274쪽).

 

다시 말해, 이들 탈신학화된 신복음주의자들에게는 "칼뱅주의냐 아르미니우스주의냐 하는 문제로 입씨름을 하느니, 차라리 밖에 나가서 한 영혼이라도 전도하는 것이 더 낫다(275쪽)"는 생각이 지배적 정서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실용주의적 탈신학화의 경향은 1990년대 이후 후발 대형 교회의 성장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개신교 전반에 걸쳐 '메가처치 현상'이 자리 잡게 된 배경이 되고, '아르뱅주의'라는 왜곡된 신학이 태동하는 온실이 되어 왔다고 저자는 본다.

 

5부 이하에서 저자는 '아르뱅주의'를 통해 현실을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보다 근본적이고 구체적인 '대안' 모색에 나선다. 이를 위해 저자는 "개신교 구원론이 빠져 버린 우물(298쪽)"이 있음을 지적한다. 즉, 기독교신학이 지난 2천 년 동안 발전해 오는 과정에서 '생수'를 제공하는 생명의 원천이 되기도 한 반면, 그 안에 갇혀 '무덤'이 되기도 한 역사신학적 계기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우물'들을 2~3세기의 그리스 철학, 5세기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 그리고 16세기의 루터의 칭의론에서 찾고 있다. 각각의 주제들이 별도의 신학적 논의를 필요로 하지만, 나는 특히 그가 '그리스 철학'을 '우물'로 언급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신학의 소위 근본적인 '왜곡'의 계기가 여기에서 마련되었다고 보는 저자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아르뱅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제3의 길'은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가 모두 공유하고 있는 '그리스 철학'의 형이상학적 방법론에 대한 근원적 문제 제기를 통해 보다 효과적으로 모색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가 모두 그리스철학의 '존재론적 패러다임'에 기초하여 성서를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314쪽). 그 때문에 이들은 모두 성서를 '명사화'시키고, '실체화'시켜서 결국 '존재론'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를 이렇듯 존재론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은 '잘못 놓인 구체성의 오류(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를 따르는 것에 다름 아니다. 명사적 개념화와 과정을 중시하는 그리스 철학의 논리적 추론과정을 따르는 동안 성서(의 언어)가 지닌 비명사적 역동성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재론적 관점에 입각한 신학은 결국 "자기중심적 전제로부터 자기중심적인 논리 체계를 만들어 내는(327쪽)" 독백적 자기의식의 강화에 다름 아니고, 이로써 "진리라는 이름의 폭력과 인식론적 제국주의(345쪽)"를 정당화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아르뱅주의'에 대한 강조 못지않게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중요한 논점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굳이 덧붙이자면, 그리스철학에 대한 이러한 저자의 비판적 관점이 이 책 전체의 관점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부분은 약간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것은 아마도 한국교회의 왜곡된 구원론의 개혁이라는 급박함에 따른 '대중 신학'을 표방하는 이 책의 성격 때문일 텐데, 존재론적 본질주의의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듯 보이는 저자의 언급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적지 않은 곳에서 초대교회와 성서적 '원형'에 대한 애착을 드러내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즉, 왜곡된 '아르뱅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마치 '우리가 돌아가야 할 그 어딘가'가 이미 실재하고 있는 것처럼 확실성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저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교회 개혁가들을 위한) 또 다른 '인식론적 제국주의'에 봉사할 우려를 안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이 지닌 훌륭한 비평적 가치를 더하기 위하여 '바른 신학', '올바른 복음' '그릇된 신학', '왜곡된 복음' 따위의 본질주의적 언어의 사용은 되도록 피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책에서의 저자의 비평적 개입은 구체적인 대안 없이도 이미 충분히 '대안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신광은 목사의 <천하무적 아르뱅주의>는 '지금' 한국교회 내에서 유통되고 있는 대중적 구원론을 문제로 삼아 비평적 개입을 시도한 드문 역작이다. 더욱이 지역 교회 목회자로서 신학적 비평을 수행하는 저자의 '목사-신학자'로서의 정체성은 '아르뱅주의'의 유통의 주역인 지역 교회 목사들에게 지적 자극이 되기에 충분하다.

 

신학적 사유와 현실에 대한 비평적 개입은 신학대학에 소속된 '전문 신학자'의 특권으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럴 때 비판은 특권이 되고, 비평은 권력이 되기 때문이다. '메가처치 현상'이라는 용어에 이어 '아르뱅주의'라는 시대를 통찰하는 또 하나의 비평적 용어를 통해 한국교회의 현실을 분석하는 저자의 선구적 노력이 더 많은 '목사-신학자'들의 비평적 개입으로 교회 개혁의 활성화에 기여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홍정호 / 신반포감리교회 목사, 연세대학교대학원 박사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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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루글 | 국어 공부 합시다 2014-02-25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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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사] 노루가 겅중겅중 걷는 것처럼 내용을 건너뛰며 띄엄띄엄 읽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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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시오노 나나미를 맹종하지 않는 이유 | 책 저자 출판사 등등 2014-02-23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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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시오노 나나미를 맹종하지 않는 이유

    [세계문명기행V : 로마문명이야기⑩] <로마문명이야기>를 가능케 한 책(상)

     

    박찬우 = 오마이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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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 관련 사진
     <문명과의 대화 : 인권학자 박찬운 교수의 세계문명기행> 겉그림.
    ⓒ 네잎클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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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내 '로마문명 이야기'의 종점에 다다랐다. 여기에선 좀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이제까지 이야기한 '로마문명 이야기'를 가능케 한 책 이야기다.

    나는 지난 십여 년간 로마문명과 관련해 적지 않은 독서를 했다. 그것의 시작은 지적 호기심이었고, 그리고 내가 업으로 삼는 인권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위함이었다. 지난해 나의 세계문명기행기 <문명과의 대화>가 출간됐다. 그 책 서문에서 나는 이에 대해 언급했다. 그 말을 다시 한 번 옮겨 보아도 될 것 같다. 지금도 그 마음 그대로이니.

    나는 독서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어쩌면 별 볼 없는 일개 서생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남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호기심이 많다는 사실이다.

    나는 알고 싶다.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어떻게 오늘까지 왔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싶다. 그 같은 호기심과 거기에서 비롯된 지식은 내가 지금 연구하고 가르치는 인권을 실감 나게 전달하는 귀중한 자산이다.

    나는 인권을 그저 서가에 꽂혀 있는 육법전서상의 조문 몇 개로 설명하고 싶지 않다. 인류의 장대한 문명으로 이해하고,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유장한 이야기로 들려주고 싶다."(<문명과의 대화> 서문 중에서)

    나는 책 읽기를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도락의 차원에서 읽진 않는다. 솔직히 이것이 나의 단점이자 약점이기도 하다. 어떤 때 나는 진정한 독서는 오락이 돼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그것이 순수한 독서이고, 참다운 독서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책 중에서도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는 책, 예컨대 순수문학으로서의 시·소설, 만화, 판타지 등에 약하다. 어린 시절 가난했고, 철 들면서 생존하기 위해 공부를 해야 했던 그 경험이 나를 그렇게 만든 것 같다.

    나는 대부분의 책을 치열하게 읽는다. 지금도 고시공부를 하는 젊은이들은 그렇게 읽겠지만 고시준비를 하는 수험생들이 책을 읽을 때는 말 그대로 안광(眼光)이 종이를 철(徹·꿰뚫다)할 정도로 집중해야 한다. 정독의 정독을 하고, 노트북에 중요한 것을 따로 요약정리하기도 한다. 그래야만 책 속의 내용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고, 어떤 사례에 적용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지식이 된다.

    나는 지금도 대부분의 책을 그렇게 읽는다. 로마문명과 관련된 수많은 책, 다는 아니지만 내가 중요하다고 판단된 책을 그렇게 읽었다. 밑줄을 긋고, 중요한 연도는 외우고, 때론 중요 내용을 요약정리했다.

    이제 나는 그렇게 읽은 책 중에서 일부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이들 책이 로마문명을 이해하는 데 어떤 의미가 있는 책인지를 간단히 설명하고, 내가 어떻게 읽었는지를 언급할 것이다. 독자들도 내 설명을 듣고 혹시나 관심이 있다면 그중 몇 권을 선정해서 한 번 읽어 보길 바란다.

    '로마역사의 대중화'... 이 책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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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인 이야기 1-15권>(시오노 나나미 저/김석희 역) 겉그림
    ⓒ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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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지난 1년 '로마문명 이야기'를 씀에 있어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한길사, 전 15권)에 상당한 빚을 졌음은 본문 여기저기에서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나는 내 글에서 그것을 요약하거나 맹종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시오노 나나미의 책 때문에 내가 로마문명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얻게 된 것은 분명하지만, 나는 일찌감치 그녀의 글에서 내가 경계해야 할 것을 가려냈기 때문에 그 책 전체를 내 것으로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시오노 나나미의 남성 중심, 승자 중심 사고를 항상 우려했다. 그런 사고가 자칫 남용되면 오늘날 '세계화'라는 이름하에 빚어지는 온갖 제국주의 행태들이 모두 정당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세기 강대국의 식민지 정책과 전쟁에서 야기된 수많은 참상들, 심지어는 나치나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만행마저도 면죄부를 줄 수 있다.

    최근 일본에서 우경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데 거기에도 이런 사고는 상당한 정도 영향을 주고 있음이 분명하다. 나는 이제껏 시오노 나나미가 일본의 우경화 현상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그것은 그의 역사관에서 나오는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로마인 이야기>는 정통 사서가 아니다. 문학과 사서의 중간 정도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역사문학'이다. 때문에 엄밀한 사료에 근거한 역사서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보면 시오노 나나미의 상상과 추리를 냉혹히 비판한다. 하지만 그것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읽는다면 그리 역사의 정확성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역사는 과거의 일이니 아무도 그 정확성을 장담할 수 없다. 어차피 역사기술은 상상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상상력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나오는 것이라면 문제가 될 것이지만 <로마인 이야기>에서 그런 부분을 찾기는 쉽지 않다. 비록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지만, 대부분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어떻게 로마는 제국의 길을 걸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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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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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사를 말할 때 많은 사가들(에드워드 기본을 포함해)은 로마 쇠망의 원인에 답하려고 노력한다. 그렇게도 찬란하고 위대했던 로마문명이 어떻게 해서 쇠망의 길을 걸어야 했나, 거기에 답하고자 했다.

    그런데 시오노 나나미는 그런 질문보다 '어떻게 해서 로마는 그리도 오랫동안 서양사에서 제국의 길을 걸을 수 있었을까'에 답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녀는 <로마인 이야기>1권에서 5권까지 로마의 위대함을 설명하는 데 지면을 할애한다. 여기에서 빠질 수 없는 영웅이 카이사르다. 그녀는 카이사르를 로마제국의 위대한 설계자로서 소개하며, 현재의 유럽의 아이덴티티는 카이사르에서 비롯됐다고 보고 있다.

    또한 그녀에게 있어 로마가 위대한 이유는 단지 힘 때문이 아니다. 그 힘을 영속시킬 수 있는 시스템을 로마제국에서 발견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로마가도와 로마법을 비롯한 사회적 인프라였다. 그녀는 오로지 로마의 사회적 인프라에 제10권을 헌정했다. 하드 인프라로 로마가도·다리·수도 등을, 소프트 인프라로 의료와 교육을 소개한다.

    <로마인 이야기>에서 내가 특별히 주목한 것은 시오노 나나미의 종교관이다. 그녀는 다신교의 나라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그런 연유로 그녀는 로마의 다신교의 장점에 대해 누구보다 깊게 이해한다. 그리고 이 종교가 로마의 쇠망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곳곳에서 지적한다.

    기독교의 배타성이 로마제국의 사회체제를 무너뜨려 결국 로마를 해체를 가속화시켰다는 입장이다. 아마도 기독교인들이라면 매우 불편한 종교관일 것.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시오노 나나미의 입장만이 아니다. 이미 18세기에 에드워드 기번도 그의 <로마제국쇠망사>에서 줄기차게 주장한 내용이다.

    <로마인 이야기>는 매우 논쟁적인 책이다. 하지만 이 책으로 말미암아 적어도 일본과 한국에서 로마사의 인식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은 틀림없다. 한국과 일본에서 어떤 전문 사가도 이런 정도로 과거의 역사를 알기 쉽게 대중에게 설명한 적은 없다. 비록 그녀의 글이 군데군데 역사서로서의 신뢰성을 의심할 부분이 있지만, 그것으로 인해 이 책이 한국과 일본의 지식인 세계에 준 영향을 반감시키지 않는다.

    나는 지난 2008년 여름 방학을 전후로 거의 두 달을 할애해 이 책을 집중적으로 읽었다. 어떤 부분은 밑줄을 치고, 또 어떤 부분은 통째로 외웠다. 그러는 사이 내가 그동안 공부했던 로마사 지식이 <로마인 이야기>를 통해 전체적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느꼈다.

    로마사의 영원한 고전... 이 책 능가할 책은 아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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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제국쇠망사>1-6권(에드워드 기번, 윤수인·김희용 외 옮김)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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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사에 관심 있는 사람치고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민음사, 전 6권)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이 책은 로마제국과 관련한 '불후의 명작'이다.

    <로마제국쇠망사>는 하룻밤 내에 소설 읽듯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기번이 1776년부터 1788년까지 12년에 걸쳐 전 6권으로 간행한 방대한 볼륨의 대작이다. 이 책은 로마제국이 쇠퇴해 가는 과정을 아주 실증적이면서도 유장한 문체로 다룬다.

    아쉽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최근까지 그 일부만이 같은 이름의 책으로 발간됐을 분이다.

    그런데 몇 년 전, 이 책 전권이 드디어 완역됐다. 몇몇 젊고 유능한 전문번역가들에 의해 이 책 6권이 모두 우리 말로 번역된 것이다. 이제 한국에서도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를 속속히 알 기회가 온 것이다. 이 번역은 연구자들의 로마사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로마제국쇠망사>는 현대에 이르러서도 로마사 연구에 기본 중의 기본자료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쇠망사>가 로마사 연구의 가장 중요한 자료 중의 하나라고 할지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책이 로마사 전체를 다룬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책은 아쉽게도 로마의 기원(기원전 753년)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약 900여 년은 다루지 않았다. 그러니 로마의 왕정 및 공화정 그리고 제정으로 이어지는 로마사의 매우 중요한 부분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이 책은 팍스 로마나 시기라고 하는 오현제 시대, 그중에서도 트라야누스 황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서로마제국의 멸망, 동로마제국의 성립, 신성로마제국의 건국 그리고 동로마제국의 멸망(1453년)까지 약 1400여 년의 역사를 기술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왜 기번은 로마사를 쓰면서 그 주제를 쇠망(decline and fall)으로 정했는지' 궁금했다. 기왕 로마사를 쓴다면 로마제국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공화정기 역사와 그 이후 극적으로 만들어지는 제정의 역사를 쓰지, 왜 하필 로마의 쇠퇴기를 썼는가였다.

    아마도 역사가로서 기번은 이런 기본적 질문에 답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토록 찬란했던 로마제국이 왜 쇠퇴해 결국 멸망의 무덤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을까? 그런 이유로 기번의 로마사 기술은 로마제국이 가장 번성했던 팍스 로마나에서 시작한다. 일단 로마사의 정점을 설명하고 그러한 로마제국이 왜 점점 하강 국면을 맞이 하지 않으면 안 됐는지를 기술하는 게 그의 로마사 기술의 기본적 방향이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박해한 이유

    나는 이 책을 통해 로마제국의 기독교에 대해서 새로운 생각을 정리했다. 시오노 나나미도 이 부분에 큰 영향을 받았음은 분명하다. <로마인 이야기>에서 기독교에 대한 기술은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에서 보이는 기번의 생각과 많이 중첩되기 때문이다.

    기번은 로마제국의 기독교 문제를 신학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철저히 역사적 관점에서 접근한다. 도대체 로마에서 기독교는 어떤 종교였는지, 왜 그들은 박해받을 수밖에 없었는지 등에 대해서 역사적 사실이라는 관점에서 기술한다. 종래 로마의 기독교 박해는 기독교 신앙이라는 측면에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사특한 것이라는 것이 서구세계를 지배한 관점이었는데, 기번은 그런 신학적 관점을 완전히 배제했던 것이다. 이것은 역사를 사실에 기초해 실증적으로 접근하는 근대 역사학의 출발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럼, 로마제국의 황제들은 왜 기독교를 박해했을까. 기번의 말을 직접 들어 보자.

    "고대의 종교 화합은 고대 국가들이 서로의 종교 전통과 의식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존중한 것을 통해 유지되었음을… (중략) 따라서 이런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와, 종교적 지식의 배타적인 독점권을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예배를 제외한 다른 모든 예배 형식이 신성모독이며 우상 숭배라고 멸시하는 교파가 나타난다면, 전체 공동체는 당연히 분노하여 이에 대항할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예상해 볼 수 있다."(<로마제국쇠망사1> 622쪽)

    역사적 관점에서 기독교가 로마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은 것은 '기독교의 배타적 신앙관에서 나온 필연적인 결과'였다는 이야기다. 이런 문제의식은 기독교 입장에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매우 불경한 주장일지도 모르지만, 역사가 입장에서는 당연히 주장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역사는 사실에 기초한 과학이지, 믿음에 기초한 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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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콧배기'와 '코빼기' 중 올바른 표현은? | 국어 공부 합시다 2014-02-23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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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콧배기'와 '코빼기' 중 올바른 표현은?

    한글맞춤법 제54항에 따르면, ‘-빼기’라는 접미사는 된소리로 적는다.

    이에 따라, ‘코빼기’가 옳다.

     

    올바른 표현: 코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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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교육에서 교양이란 무엇인가? | 인문학(人文學)에 관하여 2014-02-22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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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교육에서 '교양'이란 무엇인가? /도정일  = 한겨레 신문 

    “교양교육의 목표는 추정된 사실들을 동요시키고,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며 현상들 배후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폭로하고, 젊은이들의 방향감각을 혼란시켜 그들이 다시 방향을 잡을 수 있는 길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한국의 4년제 대학에서 ‘교양교육’이란 걸 실시하지 않는 곳은 거의 없을 정도다. 대학 입학자는 초급 학년 단계에서, 혹은 그 이후에도, 반드시 교양과정이란 걸 거쳐 소정의 교양학점을 따야 졸업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아는 바다. 그런데 대학 운영자, 다수의 전공 교수들, 사회 일반인들, 그리고 학생들조차 잘 모르거나 거의 모르고 있는 것이 있다. 교양교육을 실시한다고 야단 떨기는 하는데 정작 그 ‘교양’이란 무엇인가? 대학에서는 무엇을 가리켜 교양이라 부르는가? 내가 아까운 지면을 바쳐 느닷없이 교양의 문제를 꺼내드는 것은 누군가가 공론의 장에서 반드시 지적해야 할 어떤 ‘위기’ 때문이다. 총장을 비롯한 대학 운영자들, 고위 보직자들, 다수 교수들, 대부분의 신입생들, 그리고 많은 일반인들이 교양이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않는 한 한국에서의 대학교육은 막대한 낭비, 왜곡, 저효율에 계속 시달릴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위기다. 이런 위기는 사회와 무관한가?

     

    최근 어떤 대학의 교무위원회 자리에서 이렇게 발언한 보직 교수가 있었다고 한다.

    “요즘 우리 대학 신입생들은 교양과목 듣느라고 공부와 멀어지고 있다. 무슨 조치가 필요하다.”

    교양과목 듣느라 공부와 멀어진다? 다수의 보직 교수들, 특히 전공학과 교수들의 머릿속에 ‘교양’이란 것이 어떻게 인식되고 이해되는지 단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들이 아는 교양은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는 잡동사니 상식 같은 것, 백화점 문화센터 꽃꽂이 강의 같은 것, 금강산도 식후경이랄 때의 그 ‘식후경’ 같은 불요불급의 장식성 액세서리 같은 것, 본격적인 공부와는 관계없는 어떤 것이다. 놀랍게도, 대학 전공학과 교수들 가운데 줄잡아 80퍼센트 이상은 교양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 틀려먹은 ‘교양관’으로 평생 학생들을 가르치다 퇴임한다. 퇴임 전에라도 자신의 틀린 생각을 바로잡는 교수는, 미안한 얘기지만, 극소수다.

     

    신문 지면에서 교양론을 편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핵심적인 얘기만 추리도록 하자. 핵심 중의 하나는 이제 우리 대학들이, 다수 교수와 학생들이, 교양교육이랄 때의 그 ‘교양’이란 말에 대한 틀에 박힌 상식과 이해를 완전히(그렇다, 완전히) 벗어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교양은 잡학, 상식, 장식물이 아니고 심지어 박학다식이랄 때의 ‘다식’(多識)도 아니다. 많이 읽고 많이 아는 사람의 다식을 꼭 흠잡을 일은 아니지만 이것저것 많이 알기만 할 때의 박학다식은 철학자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적절한 지적처럼 ‘백해무익’하다. 교양이란 말은 박식, 잡식, 다식 같은 것을 가리키는 일반적 상식어가 아니다. 무엇보다 그것은 철학 기반을 가진 교육학적 용어이고 진리 발견과 인식에 관한 방법론이며 인간의 창조적 능력을 상향 조성하고자 할 때의 정신적 훈련과 관계되어 있다.

     

    이럴 때는 사례를 드는 것이 좋다.

    하버드대학은 2007년 학부 교육과정을 개편하면서 낸 보고서에서 “하버드 교육의 목적은 ‘리버럴 에듀케이션’을 실시하는 데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쪽에서 ‘리버럴 에듀케이션’(liberal education)이라 불리는 것이 지금 한국에서 ‘교양교육’이다. 두 용어의 의미와 역사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해방 후 미국 학제를 도입하면서 그쪽의 리버럴 에듀케이션을 ‘교양교육’이라 번역해서 수입한 것은 매우 불행한 사건에 속한다. 리버럴 에듀케이션이란 상식적 잡식 교육이 아니라 ‘틀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운 탐구와 교육’이다. 틀에 가두고 갇히는 교육 아닌 틀을 깨고 나가는 교육, 기성의 진리체계, 지식, 진리주장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비판적 사고력의 함양, 지식의 단순 전수와 답습보다는 전수를 넘어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낼 수 있는 상상력, 호기심, 이해력의 자극과 확대-몇 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런 것이 ‘틀을 깨고 나가는’ 교육으로서의 리버럴 에듀케이션, 우리식 표현으로는 ‘교양교육’이다. 문제는 서구식 교육방법으로서의 리버럴 에듀케이션의 전통이 거의 없는 한국에서(이것은 중국·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들의 공통점이다) 그 전통에서 나온 교육법을 가져다 정신과 알맹이는 빼고 ‘교양’이라는 모호한 말 속에 담으려고 한 것이 우리의 교양교육이다. 교양이라는 말 자체는 나쁘달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상식화된 의미의 교양은 대학 교양교육이랄 때의 ‘교양’을 크게 왜곡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건 우리가 교육편제 도입에서 반드시 했어야 할 정리 작업 가운데 무엇을 소홀히 했는가에 대한 자성적 차원의 지적이다. 교양교육이랄 때의 ‘교양’의 의미, 철학, 교육방법을 수십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정립하지 못한 것이다.

     

    또 쉬운 사례를 드는 것이 좋겠다.

    앞서 말한 하버드 보고서에는 대학에서의 교양교육(리버럴 에듀케이션)의 성격과 목표를 간명하게 정리한 이런 대목이 나온다.

    교양교육의 목표는 추정된 사실들을 동요시키고,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며 현상들 밑에, 그리고 그 배후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폭로하고, 젊은이들의 방향감각을 혼란시켜 그들이 다시 방향을 잡을 수 있는 길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학 총장들, 보직 교수들, 전공학과 교수들의 상당수가 지금부터 100번 이상은 읽고 새겨들어야 할 ‘교양교육론’이다. 이 간명한 진술은 이 글의 주제(대학교육에서 ‘교양’이란 무엇인가)에 잘 응답하고 있다. 교양은 단순 지식의 집적, 잡학과 다식, 박학을 넘어 기성의 진리체계를 동요시키는 힘, 익숙하고 친숙한 것들을 낯설게 하고 심문하는 능력, 기존의 진리주장 어느 것도 그냥 받아들이지 않는 비판적 사고력, 현상의 배후에 숨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드러내는 힘, 방향감각을 흔들고 혼란시켜 새로운 방향을 잡아나갈 수 있게 하는 능력, 틀린 것은 바로잡으려는 오류 수정의 정신- 이것이 ‘교양’이고 교양교육의 ‘목표’다. 교양은 전공 지식을 절대로 무시하지 않으면서 지식의 틀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자율적인 정신의 생태체계, 거리낌없이 탐구하는 모험적 호기심에 대한 대긍정의 체제다.

     

    그런데 교양과목 듣느라 학생들이 공부와 멀어진다고? 이렇게 말한 교수는 필시 대학 1학년 때에도 공부해야 할 전공지식이 있는 법인데 교양수업이 그 전공 공부의 시간을 뺏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를 낸 것이리라. 그러나 교양은 공부와 멀어지게 하는 시선분산의 놀이가 아니라 공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능력을 키우자는 노력이고 생각하는 힘 기르기다. 그것 없이 대학공부는 되지 않는다. 대학을 나온 다음에도 대학이 길러주려는 그 교양의 힘만큼 요긴하고 중요한 것이 없다. 나는 앞서 하버드 보고서만을 예로 들었는데, 그 보고서가 교양교육의 목표라고 부른 것은 사실은 하버드 한 곳만의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근대 학문과 근대 교육의 체계를 받아들인 세계 모든 주요 대학들이 이구동성으로 천명하고 있는 교양론이다. 그 교양론은 사실은 근대 과학혁명 이후 과학이 천명한 탐구의 방법론이고 정신이며, 분야가 무엇이냐에 관계없이 사실상 모든 학문 분야(예술까지도 포함해서)들이 공유하는 방법이다. 그 교양을 통해 과학과 인문학이 만난다. 기존의 진리주장을 심문하는 것은 근대 과학의 등장 훨씬 전에 이미 소크라테스가 확립한 대화적 교육법의 진수다. 최초의 근대적 과학공동체인 런던왕립학회가 만들어진 것은 350년 전의 일이다. 그 왕립학회의 모토는 그때나 지금이나 “어느 것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이 모토는 과학의 것이자 동시에 인문학의 것이며 교양교육의 것이다.

     

    도정일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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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폼페이: 최후의 날 | 영화 이야기 2014-02-22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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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20일 전세계 최초 개봉을 앞두고 있는 

    <폼페이: 최후의 날>


    <타이타닉> <2012> 제작진이 참여해 

    압도적 스케일과 화려한 비주얼을 재현해냈다고 관심을 모으고 있는데,





    훠우~ !!!!!



    <타이타닉> <폼페이: 최후의 날>은 평행이론 이 아닐까 싶은 

    소름 끼치는 공통점이 발견됨 ㅋㅋㅋ






    1. 같은 개봉일



    <폼페이: 최후의 날>의 개봉일은

    16년 전 <타이타닉> 개봉일과 같다!



    <타이타닉> 의 한국 개봉일은1998년 2월 20일!

    <폼페이: 최후의 날> 역시 2014년 2월20일 한국개봉 (전세계 최초개봉!)


    뭔가 이것부터 '제 2의 타이타닉을 예고하는 듯한 

    기운이 밀려오는 듯... ?!








    2. 재난영화




    <타이타닉>





    <폼페이: 최후의 날>



    우선 가장 큰 공통점은 둘 모두 재난영화라는 것.

    수많은 피해자를 낸, 침몰 사건과 

    한 도시를 멸망시킨 사상 최대의 화산폭발!

    모두 스케일이 어마어마한 재난영화들 !





    3. 전설같은 사랑 이야기











    <타이타닉>의 잭과 로즈.


    <폼페이: 최후의 날>의 마일로와 카시아.


     커플 모두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눈 앞에 두고서도 


    서로를 지키고자 하는 위대한 사랑을 보여준다!

      

     게다가 두 커플 모두 남자는 서민과 노예검투사,

       여자는 귀족으로 신분차이로 인한 장벽이 있어

       그들의 사랑이 더욱 애틋하게 느껴진다 ㅜㅜ




    4. 같은 제작진




    2월20일 세계최초 개봉하는 <폼페이: 최후의 날>


    <타이타닉>의 제작진들이 참여해


    어마어마한 스케일과 마치 실제 화산 폭발을 보는 것 같은

    엄청난 비주얼을 재현해냈다고 해서 화제!!


    <타이타닉>도 실제 타이타닉호와 거의 똑같이 

    재현해내서 놀라움을 자아냈었는데, 

    폼페이 역시 리우드를 대표하는 

    재난 블록버스터 제작진이 참여했으니 

    초대박 스케일을 자랑하는 영화가 탄생했다는 것은 

    기정사실 아님?!!!





    5. 실화를 모티브로 만들어짐












    또 다른 공통점은,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는 점!


    로마에서 가장 화려하고 부유한 도시였던 폼페이를

    단 하루만에 사라지게 만든 폼페이 화산폭발 사건과,


    당시 가장 거대한 여객선으로 

    신도 침몰시킬 수 없을 거라는 말까지 들었던 타이타닉호의 침몰.

    이런 엄청난 이야기가 실화라니 놀랍지 않을수가!!





    6. 여러번 영화화 됨


    이런 엄청난 재난 실화, 

    그 속에 숨겨진 휴머니즘과 사랑이야기는

    시대를 막론하고 대중들이 좋아할만한 소재일 수 밖에 없음!


    두 소재 역시 여러차례 영화화 되었다는 점 에서도 동일!




    <폼페이 최후의 날 (1960)>                                  <폼페이: 최후의 날 (2014)>



    폼페이 : 2014,1988, 1960, 1935, 1913





    <타이타닉 인양>                                   <타이타닉>



    타이타닉 : 1997, 1996, 1980, 1958, 1953










    oh 소름의 끝 oh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런 공통점들이 있어서 더 기대되는 

    <폼페이: 최후의 날> 


    2월 20일 전세계 최초 개봉 

    그것도 3D 로도 개봉이라고 하니 

    개봉날까지 기대감 업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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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전한 오목교 (Mere Omukgyo) | 성경 해석학 2014-02-21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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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전한 오목교 (Mere Omukgyo) _ imagodei

    기독교(Christianity)와 오목교(Omukgyo)의 중요한 차이는 기독교의 원전(original text)를 대하는 태도에 있다. 기독교 설교자는 성경은 물론이거나와 기독교 고전을 진지하게 대하고 참조하여 설교한다. 반면 오목교 강단에서는 성경과 기독교 고전마저도 짜깁기 모자이크 설교의 대상으로 취급될 뿐이다. 인간 영혼의 비참함을 아는 기독교 설교자는 반드시 전해야 할 메시지가 있기에 부담을 가지는 반면, 오목교 설교자는 시간 때우기식 짜깁기 설교에다가 싫증나면 다른 사람을 자주 불러 땜빵 설교를 시키기도 하는 법이다.

     

     

    오목교 설교자에게는 인간 영혼의 비참에 대한 무게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회개의 긴급성과 중대성 문제가 항상 비껴간다. 오목교 설교자는 성경은 물론이거니와 기독교 고전에 대한 독서와 연구의 소명을 저버리고 만다. 오목교주는 성경과 기독교 고전을 끊임 없이 읽고 기도할 때 가지게 되는 영혼의 중압감을 알지 못한다.

     

    이 글에서는 한 가지 사례를 통하여 오목교주가 기독교의 고전을 대하는 태도를 잠시 살펴 보고자 한다.

    오목교주는 지난 주일(2014. 2. 9.) 설교에서 여호수아서 24장을 본문으로 ”너희 섬길 자를 선택하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이 설교에서 오목교주는 올바른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영국의 문학평론가이자 기독교 작가 C. S. Lewis(Clive Staples Lewis, 1898~1963)를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

     

    변증가인 C. S. Lewis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선택은 우리의 삶을 이전과는 다르게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선택은 천천히 우리의 삶 전체를 천국에 속한 존재로 만들든지 아니면 지옥에 속한 존재로 바꾸어 놓는다“는 거예요. 짧지만 상당한 경구의 말씀이죠… (책 읽어 주는 남자, 설교동영상 약 27분 45초 경과후)

     

    The Leader와 혼동해서는 안되는 The Reader, 곧 강단에서 책 읽어 주는 이 남자는 능숙하게 잘 읽어 주었다. 이번에는 이 책의 출처를 밝히는 예의(?)를 보여 주었다. 영국의 기독교변증가 C. S. Lewis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C. S. Lewis의 ‘어떤 책’에서 읽어 준 것일까?

    책 읽어 주는 남자는 C. S. Lewis의 책 제목을 밝히지 않았지만, 그 인용은 <Mere Christianity>라는 책에서 가져온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홍성사에서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으로  번역되어 나왔다(2001년에 번역본의 초판 출간됨)

     

    140215_순전한기독교

     

    <Mere Christianity>의 영어 원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Every time you make a choice you are turning the central part of you, the part of you that chooses, into something a little different than it was before. And taking your life as a whole, with all your innumerable choices, all your life long you are slowly turning this central thing into a heavenly creature or a hellish creature: either into a creature that is in harmony with God, and with other creatures, and with itself, or else into one that is in a state of war and hatred with God, and with its fellow creatures, and with itself. To be the one kind of creature is heaven: that is, it is joy and peace and knowledge and power. To be the other means madness, horror, idiocy, rage, impotence, and eternal loneliness. Each of us at each moment is progressing to the one state of the other. (Lewis, p.92)

     

    위에서 볼드체로 강조한 영어원문이 오목교주의 인용 부분인데, 우리의 The Reader는 장경철 & 이종태가 번역한 한국판(홍성사 간) <순전한 기독교> 번역판을 읽어 주지 않았다. 홍성사 번역판(A)과 오정현씨가 읽어 준 부분(B)을 비교해 보자. 또다른 번역(C)을 동시 비교해 보자.

     

    A: 저라면 오히려 여러분이 매번 선택을 내리는 행위는 여러분의 중심, 즉 선택을 내리는 그 부분을 조금씩 전과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 가는 일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수없는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여러분의 생애 전체를 놓고 볼 때, 여러분은 이 중심부를 평생에 걸쳐 천국의 피조물로 바꾸어 가든지, 지옥의 피조물로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홍성사 번역본, 151~152쪽)

     

    B: 변증가인 C. S. Lewis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선택은 우리의 삶을 이전과는 다르게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선택은 천천히 우리의 삶 전체를 천국에 속한 존재로 만들든지 아니면 지옥에 속한 존재로 바꾸어 놓는다“는 거예요. 짧지만 상당한 경구의 말씀이죠…  (책 읽어 주는 남자, 설교동영상 약 27분 45초 경과후)

     

    C: …선택은 삶의 일부분을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조금씩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선택은 천천히 우리의 삶 전체를 천국에 속한 존재로 혹은 지옥에 속한 존재로 바꾸어 놓는다. (또다른 번역)

     

    오목교주의 C. S. Lewis 인용(B)은 홍성사 번역본(A)보다는 또다른 번역(C)에 훨씬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두번째 문장은 거의 일치한다. 원문의 innumerable choices, a heavenly creature, a hellish creature를 번역한 부분이 완전히 일치한다. 오목교주 인용(B)이 또다른 번역(C)을 따랐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번역 작업에 종사해 본 사람이라면, 외국어를 한국어로 번역할 때 번역자마다 천차만별의 번역이 생기며 똑같은 우리말 표현으로 번역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임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번역은 반역이다”란 말도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 그 반역도 천차만별인 셈이다.

     

    홍성사 번역본이 C. S. Lewis의 <Mere Christinity>의 유일한 한국어 번역판임을 감안한다면, 한가지 궁금함이 생긴다. 오목교주가 읽어 준 번역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곧 또다른 번역(C)의 출처는 어디일까? (우리는 때로 설교자가 외국 작가를 인용하는 경우 어떤 번역본을 사용하는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특히 오늘날 오목교 설교와 기독교 설교의 본질적 차이를 바르게 분별해 내야 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오목교주가 채용한 또다른 번역(C)은 존 맥스웰(John C. Maxwell)의 <선택>(The Choice is Yours)이란 책의 서문인 ‘들어가는 글’에 나오는 번역이다. 번역자가 번역작업을 하다보니 ‘들어가는 글’에 적혀 있는 맥스웰 목사의 C. S. Lewis 인용부분을 번역하였던 것인데, 아주 짧은 이 부분을 굳이 홍성사 번역본과 일치하게 번역을 할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해당 문장들의 또다른 한국어 번역(C)이 생성된 것이다(2008년 번역).

     

    140215_존맥스웰 140215_선택 

     

    그렇다면, 오목교주나 그 설교준비를 돕는 추종세력이 존 맥스웰의 <선택> 서문에 나오는 C. S. Lewis 인용부분을 직접 읽어보고 지난 주일설교문을 작성했다는 것인가?

    그럴 수도 있다. 존 맥스웰의 컨설팅 책인 <선택>의 ‘들어가는 글’을 직접 읽어 보았을 수 있다. 그러나 더 큰 가능성은 이것이다.: 인터넷 검색(web search)을 통해 설교자료를 모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위에서 언급한 또다른 번역(C) 전문을 copy하여 포털 등 검색엔진에 넣어 보면, 존 맥스웰의 <선택>의 책 소개 page를 지시해 주는데, 그 웹 페이지에서 오목교주가 사용한 또다른 번역(C)을 그대로 볼 수 있다.
    (http://mall.godpeople.com/?G=9788904157990)

    오목교주가 C. S. Lewis 저작물인 기독교 원전을 대하는 태도는 기껏해야 그 정도이다. 영어 원서나 한국어 번역본을 직접 대하는 ‘경건하고 신실한’ 자세가 아니라, 기껏해야  리더십 컨설팅 하는 맥스웰 목사의 서문을 봤거나 웹 검색을 통해 얻은 간접적 자료, 곧 2차 자료(the secondary data) 획득에 급급하는 자세였던 것이다.

     

    이런 것이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의 인용부분을 읽어주는 <순전한 오목교>(Mere Omukgyo) 설교자의 자세이다. <순전한 오목교>의 설교에 기독교인들은 만족하지 못하며 견디지도 못한다. 오직 오목교인들만 <순전한 오목교>를 용납하는 것이다.

     

    인간 영혼의 비참에 대한 무게로 신음하는 기독교 설교자는 성경은 물론이거니와 기독교 고전에 대한 독서와 연구의 소명을 저버리지 않게 된다. 아니, 저버릴 수 없다. 반면, 오목교 설교자는 그런 신실한 영혼의 중압감을 알지 못하기에 기독교 설교자의 이런 영광의 무게(the Weight of Glory)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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