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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게 우리 탓? 그게 바로 가짜고 선동이다 | 생각해 봅시다 2014-04-30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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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게 우리 탓? 그게 바로 가짜고 선동이다

[주장] 눈 똑바로 뜨고, 이 참극의 원인을 제대로 밝혀내자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85761&PAGE_CD=N0001&CMPT_CD=M0016

 

'단장의 슬픔'이라는 말

어느 분의 글인지 그 출처를 메모해 두지 못했으나, 아무튼 옮기면 대략 다음과 같다.

"연구 결과 육체적으로 인간이 느끼는 가장 큰 고통 중 으뜸은 몸이 불에 탈 때의 고통이다. 심리적으론 사랑하는 대상이 눈앞에서 죽어가는데 어찌해볼 수 없을 때의 고통이 그것과 맞먹는다.

실제로 새끼가 눈앞에서 죽임을 당하는 광경을 본 어미 염소는 창자가 새까맣게 타들어가 죽었다. 잡혀가는 새끼를 쫓아 사흘 밤낮을 뱃길로 내달린 어미 원숭이의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죽었다는 고사에서 비롯한 '단장의 슬픔'은 괜한 꾸밈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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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고해역만 바라보다 세월호 침몰사고 13일째인 28일 오전 비 내리는 팽목항을 뜨지 못하는 실종자 가족이 사고해역을 바라보며 소리없이 울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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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어이없는 참극,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이 겪는 아픔이 그러할 터이다. 가족이 아니라도 많은 사람들이 비탄과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다.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왜 구조는 그처럼 더뎠고 당국의 대응은 오락가락했는지, 무엇을 감추고자 하는 것인지 차마 입에 꺼낼 순 없지만, 우리는 그 모든 게 다 궁금할 뿐이다.

비탄과 분노란 그래서 이게 과연 정상적인 국가인가 하고 물으면서, 이것은 결국 국가에 의한 죽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를 서로에게 묻고 있다. 이것은 결코 선동이나 유언비어가 아니라 민심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꿈은 일상을 이기지 못한다. 너무나 비정한 말인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런데 정말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사법적 권한을 갖는 범사회적진실조사위원회를 구성하는 것도 논의해 볼 만하다. 그래서 그 누구든 성역 없이, 그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의혹을 해소할 것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

그런데 특검을 발의해서 진실을 규명하고 관련된 자들을 모조리 사법처리하는 데 앞장서야 할 야당이, 어이없을 만큼 무기력하고 무능력하다. 국정원과 국군 사이버사령부의 대선댓글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고, 그것의 책임을 묻고자 했던 시민사회의 염원을 깔아뭉개 버린 게 지금의 야당이다.

그들을 압박하고 견인해낼 시민이나 민중조직이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런 활동 경력을 훈장 삼아 정치권으로 갔거나 기웃대고 있으니 시민들의 비탄과 분노를 오롯이 담아낼 조직이 이제는 아예 없는 거다. 오직 시민들 개개인이 슬픔과 분노를 삼키면서 무엇인가 어디선가 폭발의 계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그래도 진실이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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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 조문 행렬 '세월호 침몰사고' 14일째인 29일 오전 경기도 안산시 화랑유원지에 설치된 '세월호 사고 희생자 정부 합동분향소'에서 시민들이 조문하기 위해 길게 줄 서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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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일상을 살아낸다. 이게 현실이다. 가난은 한갓 남루가 아니듯이 육체적 폭력은 우리의 영혼마저 파괴하는 악마 그 자체다. 우리가 겪어야 했던 저 1980년대의 폭력이 그랬다. 그랬어도 시간이 흘러가면 그저 자기이해에 함몰되어 현실을 살아낼 뿐이다.

이게 우리의 삶이다. 너무 슬픈가? 젊은 넋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대통령 직선제 만들어 놓았다. 그랬더니 독재자의 딸이 그 직선제 헌법으로 대통령이 된 게 이 나라다. 그러니 사실 시민들, 민중, 그런 거 너무 믿을 게 못된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비탄에 잠겨 있지만, 오래 가지 않는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세상은 딴청을 부릴 것이다. 자신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면 전두환이 다시 대통령에 나온대도 슬그머니 외면할지 모른다. 박근혜 대통령 말마따나 댓글 때문에 대통령 된 것 아니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선, 비를 맞으며 저 분향소에 줄지어선 사람들의 슬픔과 분노가 활화산처럼 폭발할 수 있는 어떤 계기가 어디선가 분명 일어날 것이다. 그러니 그때까지 우리 건강하게 잘 살고 있어야 한다. 너무 슬퍼서 자신을 학대할 것 없다. 모두 우리의 탓이라고 할 것 없다. 그게 바로 가짜고 선동이다.

눈 똑바로 부릅뜨고 이 참극의 원인을 제대로 밝혀내면 된다. 죽은 아이들이 다시 우리 곁에 돌아올 수야 없겠지만, 다시는 우리의 아이들이 그처럼 죽어가게는 말아야 한다. 오늘, 창자가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죽어가는 희생자 유가족들도 있으니까. 그분들에게도 하루 세끼 꼬박꼬박 잘 먹고 건강 잘 챙기라고 전해주고 싶다. 그래야 진실이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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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속으로 뛰어드세요” [ | 심리학 - 심리 상담 및 치료 2014-04-29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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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속으로 뛰어드세요” [2014.05.05 제1009호]

[표지이야기-4 부 상처는 오래 지속된다] 이명수의 충분한 사람

‘거리의 의사’ 정혜신 박사와 나눈 ‘PTSD 포켓북’ 같은 인터뷰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두 느낄 죄의식, “함께 슬퍼하면 많이 슬프지 않아요”

 

 

 

 

» 정용일
지난번 인터뷰에서 ‘세 아이의 아빠. 훌륭한 옆지기를 둔 쌍차 해고자’라는 고동민의 담백하고 꽉 찬 프로필에 감탄했더니 인터뷰를 읽은 그가 꼭 ‘쌍차 복직’까지 첨가해서 완벽한 스펙이 되고 싶다는 메아리 같은 소망을 전해주었다. 무분별하고 폭력적인 해고의 후유증으로 해고노동자와 그 가족 25명이 목숨을 잃는 트라우마를 겪은 고동민의 말이라 더없이 와닿았다. 꼭 그리될 수밖에 없으리라.

한동안 고동민‘들’의 마음주치의였던 정혜신은 트라우마 심리치유 전문가다. 지난 10여 년 조작간첩 피해자, 해고자, 광주 5·18 피해자 등 트라우마가 있는 이들을 심리치유 한 실제 경험이 누구보다 많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다. 멀지 않은 미래의 꿈도 ‘거리의 의사’다.

 

 

한국전쟁과 맞먹는 상흔이 남을 수도

 

그는 이번 세월호 트라우마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우리 사회에 한국전쟁과 맞먹는 상흔이 남을 거라고 단언했다. 지나친 예상 아니냐고 반박해도 꿈쩍하지 않았다. 우리 역사상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외상후 스트레스 장애·트라우마)적 상황의 범주 안에 들어간 적이 없고 그에 따라 심리치유가 필요한 사람의 규모가 엄청나게 큰 초유의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제대로 알고 대처하지 못하면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우리 사회에 자살자가 폭발적으로 늘고 각개약진 사회가 시작된 것 이상으로 국민 인식에 엄청난 지각변동이 아무 대책 없이 시작될 거라고 했다. 체감상으로는 이미 충분히 수긍할 만했지만 세월호 트라우마의 어떤 요인들 때문에 그렇게 판단하는지 자세하게 듣고 싶었다.

또 하나. 위급 상황에는 간단한 안전수칙을 숙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것처럼 이번 세월호 침몰 같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적 참사가 있을 때 그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기 쉽게 정리하고 싶었다. 그런 포켓북 같은 인터뷰였으면 좋겠단 생각에 처음으로 사람이 아니라 콘텐츠에 치중했다. 그래서 비슷한 일을 하는 배우자란 개인적 인연을 밀쳐두고, 이번 참사로 자식을 잃은 친구가 곁에 있다면 어떻게 위로해야 할까 그런 심정으로 묻고 들었다.

 

 


-PTSD가 뭔가요.

=살다가 겪게 되는 스트레스 중에서도 인간이 통상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는 스트레스, 즉 재앙적 수준의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보이는 반응을 말합니다. 사람을 서로 죽이는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군인, 고문 생존자, 삼풍백화점 붕괴 같은 재난 현장에서 살아나온 사람들이 겪는 스트레스가 재앙적 스트레스지요. 이런 재앙적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에는 개인적인 차이가 거의 없어요. 남보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고 잘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죠. 총에 맞으면 몸이 건강하든 아니든 차이가 없잖아요. 인간이 조절할 수 있는 범위 바깥의 스트레스인 거죠.

 

 

-이번 세월호 참사는 PTSD에 해당하는 거죠.

=그럼요. 전형적인 PTSD죠. 생존자와 유족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파국적이고 재앙적인 상황인 거죠.

 

 

-이런 재앙적 스트레스가 사람을 어떻게 파괴시키는 건가요.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이 갖는 공통적인 핵심 감정은 ‘죄의식’이에요. 내가 무언가를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누군가가 죽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희생자의 죽음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여기는 거죠. 예를 들어 세월호 사건에서 갑판에 올라가 있다가 생존한 학생이 있어요. 그럼 같은 방에 있던 친구들을 떠올리면서 걔들이랑 같이 나오자고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아서 친구들이 죽었다고 믿어요. 또 어떤 아이는 전날 늦게까지 함께 놀았던 친구가 빠져나오지 못한 걸 나랑 놀다가 피곤한 것 때문에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3자가 보기엔 비합리적인 생각이지만 재난 현장에서 살아나온 거의 모든 사람이 그런 식의 죄의식과 책임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유족들도 그래요. 몸살이 있었는데 수학여행을 보내지 말걸, 안산으로 이사만 오지 않았더라면, 그런 식으로 모든 게 내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치료하지 않으면 평생 이 생각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 삶이 일그러집니다. PTSD의 이런 턱없는 죄의식은 실제로 책임이 있어서 죄의식을 갖는 게 아니에요. 현장에 같이 있었다거나 부모·자식, 친한 친구, 교사·학생 사이처럼 희생자와 심리적으로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터무니없는 죄의식의 크기도 함께 커지는 거죠.

 

 

시스템이 마비된 사회, 실제 죄를 지어

 

 

-물리적 거리와 관계가 없다는 거죠.

=네. 책임이 있어서 죄의식을 느끼는 게 아니라 희생자와 심리적으로 유대감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만큼의 죄의식을 떠안는 겁니다.

 

 

-세월호의 무책임한 선장보다 내 죄가 더 크다고 느낄 수도 있겠네요.

=그렇죠. 심리적 거리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렇게 되는 거죠.

 

 

-어떤 사건에서든 이런 재앙적 스트레스에 노출된 사람들은 예외 없이 죄의식을 갖게 된다고 했는데, 왜 그런가요.

=PTSD의 재앙적 레벨의 스트레스라는 것은 인간의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그냥 내가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겁니다. 평상시에 100m를 10초에 돌파하는 사람과 20초에 도달하는 사람은 차이가 나지만, 거대한 해일이 밀려올 땐 그 차이가 아무 의미가 없잖아요. 불가항력적 상황인 거죠. 그런데 사람의 인지구조는 나한테 어떤 일이 일어나면 이 일이 도대체 왜 나한테 일어났는지 이해하고 싶어 해요. 설명하려고 해요. 해일이 덮쳐올 때 내가 조금 더 빨리 뛰었어야 했는데, 이런 식의 비합리적인 해석이라도 하게 되는 거죠. 해일에 책임을 물을 수 없으니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이유를 찾아서 설명하게 돼요. 그중 제일 손쉽고 빠르게 보이는 것이 자기거든요.

 

 

-세월호 침몰 트라우마가 다른 경우와 달리 더 심각하다고 보는 이유는 뭔가요.

=첫째는 이번 세월호 참사가 다른 PTSD적 상황과 달리 국소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거죠. 일반적 PTSD는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이라든지 재해 현장에 있었던 사람과 유가족 사이에서만 공유하는 국소적인 경험이죠. 그런데 세월호 사건에선 아이들이 수장되는 과정이 느린 화면으로 보듯 전국에 생중계된 거예요. 학살 현장이 실시간 생중계된 것과 다르지 않아요. 아이들이 그렇게 당하는 걸 속수무책 지켜봤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치명적인 균에 의해 피부가 감염됐다가 장기에 퍼져 염증이 생겨도 항생제를 쓰면 치료할 수는 있어요. 국소적이니까요. 그런데 균이 혈관을 타고 핏속으로 들어가면, 그게 패혈증인데요, 대부분 사망해요. 피를 통해서 균이 온몸 구석구석까지 다 뿌려지니까요. 그런데 세월호 재앙은 균이 혈관을 타고 들어간 형국이에요. 우리 사회 전체가 심리적 죽음에 이를 정도로요.

 

 

-두 번째 요인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사고 수습의 과정과 관련이 있겠군요. 침몰 사고 이후 경악과 분노와 절망과 죄의식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느낌입니다.

=네. 맞아요. PTSD가 사람을 붕괴시키는 핵심은 죄의식입니다. 그런데 이번 사고에서는 우리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굉장히 많았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아서 그 많은 아이들이 죽은 거죠. PTSD를 겪으면 실제적인 책임이 없어도 그 죽음에 대한 죄의식이 집요하게 따라다니는데 세월호 참사에선 PTSD적 죄의식만 있는 게 아닙니다. 실제로 씻을 수 없는 죄를 졌어요. 생명을 구하는 시스템이 마비된 이 복마전 같은 사회구조에 기여하지 않은 어른은 한 사람도 없잖아요.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거의 사이코패스적 무감각일 거예요.

 

 

혼자 죄의식을 안 느끼는 듯한 대통령

 

 

-지켜보는 사람조차 마음이 복잡하고 안정이 안 되는 게 다 이유가 있는 거로군요.

=하나의 상황에서 사람은 여러 가지 욕구를 가집니다. 그중 하나의 욕구가 해소되면 그다음 욕구의 충족 과정으로 넘어가죠. 충족된 욕구는 더 이상 욕구가 아니니까요. 그런데 세월호 참사 과정에서는 우리 모두가 가진 욕구들이 충족된 게 하나도 없어요. 이래선 심리적으로 다음 단계로 진도를 나갈 수 없어요. 분노만 해도 그래요. 책임 있는 사람이 ‘진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누군가 맞아죽을 각오를 하더라도 분노를 흡수해줘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상황도 사람들의 감정도 한 발짝도 진도를 나갈 수 없어요.

 

 

-대한민국호의 선장을 자처하는 대통령의 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겠어요.

=핵심적이고 결정적이죠. 이 재앙을 최소한이나마 수습할 수 있는 첫 번째이자 마지막 사람은 대통령입니다. 먼저 사과를 하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지금부터 대통령이 나선다 해도 재앙의 극단성으로 봐서는 최소한의 수습일 뿐입니다. 그마저도 안 한다면 심각한 상황이 올 수도 있어요. 실질적인 관계가 없으면서도 거의 모든 국민이 죄의식, 미안함을 느끼는 건 사고를 당한 부모에 대한 심리적 동질감, 연대감 때문이에요. 그런데 대통령 혼자 죄의식을 안 느끼는 것처럼 보여요. 누군가에게 화내고 혼내고 있잖아요. 지금의 고통과 연결된 정서적 끈이 존재하지 않는, 다른 나라 사람 같아요. 대통령이 나서서 이런 끔찍하고 무기력한 마음들을 흡수해주지 않으면 칼에 찔리는 것 같은 이런 상황은 계속될 겁니다. 그러면 우린 끝내 가라앉을 수밖에 없어요.

 

 

-누군가 그랬더군요. 배를 침몰시킨 건 선장이지만 ‘참사’는 정부가 만들었다고요.

=네. 세월호 참사는 사망자 수가 많아서만 참사가 아닙니다. 선장이 큰 죄를 졌지만 그건 어찌 보면 한 개인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어도 한 사람 때문에 그랬다면 그건 국소적인 문제예요. 그렇지만 당연히 우리를 지켜줄 거라 생각했던 국가가 이런 무능, 무책임, 사악함마저 느끼게 하면 집단우울증이 생길 수밖에요. PTSD에는 1차, 2차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배가 침몰된 게 1차 트라우마라면 정부의 무책임한 대응은 2차 트라우마예요. 그런데 PTSD에서 결정적으로 사람을 무너뜨리는 건 2차 트라우마입니다. 정신의학의 정설이에요. 이번에 우리는 정부의 반응을 보면서 돌이킬 수 없는 2차 트라우마를 받았습니다. 국소적 염증이 아니라 패혈증에 빠진 겁니다. 단언컨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관이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겁니다. 사회의 전 영역에서요.

 

 

최소한 10년은 지속적으로 매달려야

 

 

-PTSD는 치료가 되나요.

=죽을힘을 다해 치료하면 좋아질 수 있습니다. 유족이나 생존자들은 지금도 위험하지만 몇 년 지난 뒤에도 극단적 선택을 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요. 다양한 형태로 개인과 가족이 해체될 수도 있고요. 끈질기게 지켜보고 치료해야 합니다.

 

» 정혜신 박사는 “세월호 재앙은 균이 혈관을 타고 들어간 형국이에요. 우리 사회 전체가 심리적 죽음에 이를 정도로요”라고 트라우마의 심각성을 말했다. 지난 4월22일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실종자 가족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있다.김명진

 

 

-기간이 얼마나 걸리나요.

=치료에 얼마나 깊이 개입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생존자와 유족들은 최소한 2~3년 정도의 지속적인 치유와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치유가 필요한 대상 집단이 넓고 이 트라우마를 정확하고 입체적으로 해결하려면 사회적인 치유 시스템도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에 최소한 10년은 지속적으로 매달려야 한다고 봅니다. 1년 동안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한다고 해결될 일이 전혀 아닌 거죠.

 

 

-기본적으로 오랜 시간이 필요하군요.

=PTSD의 치료 과정이 본래 그래요. 한동안 많이 나타나는 증상은 잠도 못 자고, 음식도 못 넘기고, 사망자 통지를 받았던 순간들, 바다에서 파도가 치고 그랬던 순간들이 계속 떠오르죠. 이런 게 스테이지1의 증상들이에요. 그런데 계속 그러면 소진돼서 살 수가 없으니까 생존자나 유족들도 잊기 위해 뭔가에 몰두하기 시작해요. 왜냐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너무 힘드니까 몸을 학대한다 할 정도로 일을 한다든가 다른 걸 한다든가 뭔가에 몰입하는 거죠. 아이들 중에는 딴생각 안 하려고 공부만 파는 애도 있을 거예요. 이런 게 스테이지2의 증상들인데 이것도 사람이 살기 위한 심리 방어기제죠. 그런데 이런 시기가 되면 자기도 그렇고 주위 사람도 그렇고 상황을 잘 극복한 증거로 받아들이면서 안심하고 흡족해해요. PTSD 스테이지2에 나타나는 증상임에도요. 뭔가에 강하게 몰입함으로써 자기 안에서 올라오는 불안이나 두려움, 공포를 잊는 거죠. 좋아졌다고 착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아요. 그렇게 몰입하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사소한 계기에도 툭 끊어져요. 바이올린 현을 연주할 때 팽팽하게 조였다가 연주가 끝나면 느슨하게 풀어놓잖아요. 사람도 그렇죠. 조였다 풀어놓았다 이렇게 반복하며 살아야 하는데 집요하게 따라붙는 공포와 불안, 죄의식을 외면하느라 극도의 긴장 상태를 수년 동안 팽팽하게 유지하니 어느 순간 끊어질 수밖에요. 그러니까 잘 지내는 것도 잘 지내는 것이 아닌 거죠. 이런 메커니즘을 잘 알고 그들을 케어하면서 정부 예산이 쓰여야 합니다. 안산에 세월호 참사를 집중 치유하기 위한 구체적인 목표를 가진 PTSD센터를 만들어 10년간 활동하게 했으면 해요. 세월호 피해자와 피해 영역들을 샅샅이 찾아내서 끝까지 치유하고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도 우리도 다 같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숨어 있지 말고 나와서 함께 있어야

 

 

-그러자면 치유적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요.

=네. 심리상담만이 치유적 활동은 아니거든요. PTSD의 본질도 그렇고 사람 마음의 본질도 그렇고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접근하는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2차, 3차 외상을 줄 수 있어요. 이번 세월호 트라우마의 경우엔 제일 책임 있는 주체가 국가니까 공무원, 국가기관이 피해자들을 대할 때 지켜야 하는 준칙을 제대로 만들고 시행하는 것이 시급해요.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피해자를 가장 많이 접하고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하는데, 피해자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려면 무엇을 고려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아요. 그래서 상처를 치명적으로 덧나게 하고 결국 자기네들도 곤경에 빠지고 있어요. 그들의 업무에 심리적 개념을 탑재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안산 단원고에 100여 명의 소아청소년 정신과 의사들과 심리전문가들이 투입돼 학생들을 케어하고 있다더군요.

=꼭 필요하고 시급한 일인데 정말 다행이고 고마운 일이죠. 지금 소아정신과 의사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모아서 같이 얘기해야 한다고 하죠. 혼자 있다보면 나만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거든요. 그런데 속마음을 꺼내놓고 함께 얘기하다보면 이게 나만 그런 게 아님을 알게 돼요. 집단적인 현상이라는 걸 서로 확인하게 되는 거죠. 내가 못나서, 내가 뭘 잘 못해서, 책임이 있어서 이런 게 아니라 이런 일을 겪은 사람들이 다 느끼는 감정이구나. 나만 이런 게 아니었구나. 이것이 확인되면 자기와 자기 아닌 것 사이에 경계가 생기고 방어막이 생겨서 자기를 보호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숨어 있으면 안 되고 다 나와서 함께 있어야 해요. 일이 수습되면 유족들도 가능한 한 그럴 수 있어야 합니다.

 

 

-생존자들 말고 실종자 가족들처럼 아직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심리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게 많지 않겠네요.

=그렇죠. 그런데 저는 저 같은 심리전문가들이 현장에 가서 상담만 하는 게 심리적 개입이라고는 생각 안 해요. 지금 필요한 심리적 개입이라는 것은 이 상황을 빠르게 흡수해주고 또 정리해주고 설명해주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 이번 사고로 아이가 실종된 가족을 보면 넋이 나간 엄마를 아빠가 필사적으로 보호하는 가족이 많아요. 함께 중환자실에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 누군가는 보호자가 되고 누군가는 환자가 되는 거죠. 모든 식구가 거의 똑같이 힘들다는 것을 서로 인지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야 결국 모두가 살 수 있게 돼요. 예를 들어 세 식구가 남았다면 이제부터 우리가 함께 헤쳐나가야 하는 동반자다, 지금 나만 아프고 나만 감정이 있는 게 아니라 똑같이 힘들다는 생각이 들면 내 고통도 조금은 객관화될 수 있거든요. 서로 간의 상처나 갈등도 막을 수 있고요. 또 현장에서 일하는 공무원·자원활동가들에게 피해자들을 제대로 도울 수 있는 심리적 개념을 탑재시키는 일도 중요해요. 그런 게 심리적 개입이죠.

 

 

우선 분향소부터 찾으세요

 

인터뷰 다음날 정혜신은 진도로 내려갔다. 팽목항 신원확인소에서 실종됐던 학생들이 구명조끼를 입은 채 잠든 듯 엄마와 만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내내 마음을 포갰다고 했다. 그게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라고 했다. 국민적 트라우마는 어떻게 치유하면 좋겠느냐는 누군가의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심각한 신경증이 있지 않다면 이 슬픔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시길 권합니다. 우선 분향소부터 찾으시길요. 함께 슬퍼할 수 있으면 많이 슬프지 않습니다. 많이 힘들다면 혼자 슬퍼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트라우마 심리치유 전문가 정혜신의 그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왠지 위안이 되는 느낌이기도 하고, 지금은 내가 해볼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을 알지 못하겠다.

오래전 아이를 잃은 시인이 그랬다.

“저녁 밥상에 애기가 없다/ 애가 앉던 방석에 한 쌍의 은수저/ 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 …/ 맨발 벗은 애기가 울면서 간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김광균 ‘은수저’

이런 고통과 슬픔을 어떻게 위로하나. 진심을 다한 눈물과 기도가 가장 큰 위로가 되는 순간들이 있다. 지금이 그렇다.

 

심리기획자 이명수,녹취 전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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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 정몽주 | 나의 서재에는 어떤 책이? 2014-04-29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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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 당첨자 공지]

나날이, seyoh, 책마니아, 박카스에프, duetto 님

축하드립니다! 정몽주 서평단에 당첨되셨습니다. 

 쪽지 발송해드렸으니 확인 부탁드립니다.

 

이벤트에 참여해주신 모든분께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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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와 정도전 그리고 한 권의 책 | - 孔 孟子 2014-04-28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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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논단> 정몽주와 정도전 그리고 한 권의 책

 심후섭 (아동문학가 교육학박사)

 

http://blog.daum.net/adongmh/16099702

 


삼봉 정도전(三峰 鄭道傳)은 비운의 혁명가였지만 실패하지는 않았다. 비록 혁명 세력에 의해 제거되기는 했지만 자신의 뜻대로 낡은 세상을 뒤엎고 새로운 정치를 구현하였기 때문이다. 정도전의 개혁 사상은 고려 말기의 사회적인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대책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맹자(孟子)’의 민본 정치사상을 뿌리로 하여 사회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정도전의 정치사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역성혁명을 반대하다가 목숨을 잃은 정몽주에 의해 전수된 것이다. 정몽주 역시 민본 정치를 누구보다도 갈망하였다. 그러나 기존의 왕조를 뒤엎는 일은 성리학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에 의리에 벗어나는 일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정도전은 정몽주와 더불어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하던 선후배 사이였다. 당시 이숭인(李崇仁), 이존오(李存吾), 김구용(金九容), 김제안(金齊顔), 박의중(朴宜中), 윤소종(尹紹宗) 등 기라성 같은 동학 중에서 정도전은 유독 정몽주에 대해서 각별한 존경심을 가졌고, 정몽주 또한 정도전을 아껴서 부모상을 당하여 영주(榮州)에서 시묘살이를 하고 있던 정도전에게 `맹자’를 구해서 보내주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정도전은 `맹자’를 일부러 하루 반 장 밖에 읽지 않았다고 한다. 몇 번이나 다시 읽고 그 속에 담긴 사상을 어떻게 현실 정치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인가를 깊이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논어’와 비교하여 `맹자’는 민본과 민생을 더 강조한다는 점에서 비교적 급진적인 혁명 사상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왕조 국가에 대한 맹목적 충성이라는 가치관이 일반적인 상황에서 민본을 들고 나온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이라 아니 할 수 없었다.

당시 정도전은 `맹자’를 읽다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정뭉주에게 달려가 가르침을 받으려고 생각하였다’는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아 정몽주 역시 혁신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결국 정도전에게 혁명의 정당성을 깨우치도록 도와준 사람은 역성혁명의 가장 철저한 반대자였던 정몽주였던 셈이다.

그 뒤, 정도전은 인간적으로도 정몽주를 존경해서 정도전이 쓴 글을 살펴보면 스승 이색에 대한 회상보다도 정몽주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표현한 글이 훨씬 더 많다. 정도전의 정치사상은 그가 편찬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고려 말 사회의 모순은 인간 상호간 증오심의 격화, 즉 윤리의 타락이 원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윤리 재건을 위한 수단으로서 정치가 바르게 구현되어야 하고, 그 전제조건을 경제 안정으로 보았다.

따라서 정치는 인간을 바르게 하는 도덕 윤리의 실현 과정이며, 정치의 주체로 윤리 도덕을 체득한 군자가 담당해야 하는데 농민과 더불어 직접 농사도 지을 줄 알아야 하며, 천문과 의학 및 지리 등 기술적인 학문에도 능통해야 하며, 후학을 가르치는 교육자이고 역사가여야 하며, 의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지사이기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백성 보호를 위해 지방 토호에 의한 자의적인 지배 정치를 배제하고 중앙 정부에 의한 중앙집권체제를 지향하되, 실질적인 통치권은 재상(宰相)이 갖는 신권중심 체제를 지향하였다. 그리고 통치자의 부정과 독재를 막기 위해 감찰권과 언권(言權)의 강화를 중시하였으며 통치 윤리는 인정(仁政)과 덕치(德治)가 근본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상은 결국 정몽주의 사상이기도 하였다. 정몽주는 자신의 사상을 현실 정치가인 정도전에게 전해준 다음 자신은 성리학의 명분에 따라 죽음을 택함으로써 모두가 명분을 세우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정몽주는 정말 거시적인 안목을 소유한 인물이며 그가 수단으로 삼은 한 권의 책 또한 그 영향력이 지대한 것이다. 아름다운 인간관계와 훌륭한 책 한 권은 이처럼 역사를 새롭게 세우는 것이다.

  입력시간 : 2008-11-05 17: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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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는 맹자 1질을 정도전에게 보냈고 | - 孔 孟子 2014-04-28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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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몽주와 정도전의 첫 만남

 

  1360년, 고려 공민왕 9년, 정몽주가 24세의 나이로 고려 조정의 과거 3장에 연달아 장원급제할 때 정도전은 약관 19세의 나이로 성균시에 합격하였다. 이때는 홍건적의 침입으로 온 고려가 어수선할 때였다.

 

  홍건적의 침입이란, 원나라를 전복시키려 원의 수도를 공격했던 홍건적의 한 갈래가 원 조정의 반격을 받아 쫓겨 고려에까지 흘러들어온 것인데, 무려 10만 명을 헤아리는 홍건적의 패잔병들이 아무 예고도 없이 고려 땅을 넘어와 분탕질을 쳤다. 아무 대비도 없다가 허를 찔린 공민왕과 조정은 수도 개경을 버리고 복주(안동)으로 피난을 가고, 뒤늦게 장수들과 군사들을 불러모아 개경 탈환 작전을 펼쳤는데 그 와중에 나라의 대사의 하나인 과거 시험을 본 것이었다. (난리 중이라도 나라의 일은 정상적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그만큼 고려의 행정조직이 튼튼했다는 증거이다)

 

  정몽주는 고려 인조 때의 총신 정습명의 후손이었고 정도전은 당시 형부상서였던 정운경의 아들이었으니 둘 다 쟁쟁한 사대부 집안 출신이었다. 그들은 나라가 한창 어지러울 때 과거길에서 만나 길고도 험한 인연을 시작하였다.

  정도전은 공직에 먼저 들어온 5살 연배의 정몽주의 학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정몽주 또한 총명한 정도전을 매우 아꼈다.

 

2. 정몽주와 이성계의 첫 만남

 

  1363년 정몽주는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의 종사관이 되어 함주(함흥 방면)로 첫 출정에 나서고, 같은 해 정도전은 충주사록에 임명되어 첫 공직생활을 시작한다.

 

  정몽주가 종사관이 되어 고려의 동북면으로 출정을 한 이유는 여진족의 침입 때문이었다. 원래 이쪽은 동북면병마사인 이성계의 관할 구역이었는데 원나라 기황후를 배후에 업은 충선왕의 아들 덕흥군의 침입을 막으러 이성계가 압록강 쪽으로 원정을 한 사이에 이 지역의 여진족들이 고려 군사들에게 빼앗긴 자기들의 땅을 되찾으려 쳐들어온 것이었다.

 

  기마전술을 잘 쓰는 여진족들은 한방신의 고려군을 괴롭혔다. 한방신은 진지를 지키며 방어에 급급할 뿐이었다. 이때 덕흥군을 몰아낸 이성계가 돌아오고 정몽주는 말로만 듣던 북방의 용장 이성계를 만나게 된다. 이성계는 30세였고 정몽주는 28세였다. 이성계는 여진족들을 단 한 번의 전투에서 괴멸시켜 버린다. 정몽주는 이성계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정몽주는 무사히 출정을 마치고 개경으로 돌아왔고 정도전도 지방 근무를 마치고 개경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개경에서 매우 친하게 지냈던 것 같다. 정몽주가 모친상을 당하여 시묘를 위해 귀향한 이듬해 정도전도 부친상을 당하여 시묘를 위해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때 정몽주는 맹자 1질을 정도전에게 보냈고 정도전은 맹자를 정독하였다. 이는 두 사람이 매우 가깝게 지냈고 서로 존경하고 아꼈다는 걸 보여준다.

 

3. 성균관에서의 정몽주와 정도전

 

  고려의 정세가 내부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되자 공민왕은 신돈을 발탁하여 일대 개혁을 감행하는데, 신돈이 취했던 개혁 정책 중의 하나가 성균관을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정몽주는 모친상에서 돌아와 이색 등과 함께 성균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정도전도 부친상과 모친상의 시묘를 마치고 돌아와 성균관에 합류했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성균관에서 같이 근무하며 우의를 쌓았다.

  정도전은 삼봉집에서,

 

  “포은[정몽주]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았고, 듣지 못하던 새로운 것을 날마다 듣게 되었다.”

 

  라고 했으며, 목은 이색은

 

  “포은이 모든 유생을 시서(詩書)의 동산으로 인도하였다.”

 

  라며 정몽주가 성리학의 진수와 경학에 매우 조예가 깊었던 점을 극찬하였다.

 

  1374년 공민왕이 자제위(子弟衛) 신하들에게 피살되자 고려 조정은 소용돌이 속에 빠진다. 원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신흥 명나라와 새로운 외교 관계를 수립한 공민왕이 죽자 이인임을 중심으로 한 친원 세력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김의라는 자가 명나라 사신을 죽이고 북원으로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한 것도 이때이다. 명과의 관계가 급속히 냉각되었다.

 

  1375년, 우왕 1년, 정도전의 인생이 갈림길에 서게 되는 일대 사건이 벌어진다. 북원에서 사신이 오자, 권신 이인임은 정도전에게 사신을 접대하는 일을 맡긴다. 젊은 정도전은 노대신 이인임을 향해 거침없는 독설을 퍼부었다.

 

  “내가 차라리 원의 사신을 목 베어 오던가, 그렇지 않으면 꽁꽁 묶어서 명으로 보내 버리겠습니다!”

 

  노발대발한 이인임은 정도전을 회진[나주]으로 귀양 보내 버렸다. 이에 대사성이었던 정몽주가 정도전을 두둔하는 글을 올리게 되는데, 바로 그 유명한 ‘대의명분론’이었다.

 

  “우리 태조[왕건]가 당 말기에 일어나면서부터 중국을 예로 섬겨 왔는데, 그 섬기는 것은 오직 천하의 의주(義主)를 따를 뿐이었습니다. 지난번에 원이 북으로 파천되고 명이 일어나자, 우리 승하하신 왕[공민왕]께서는 분명히 천명을 알고 명에 표문을 올려 신하라고 일컬었습니다.”

 

 정몽주는 사대(事大)의 명분을 분명하게 ‘의로운 자[의주(義主)]’라 천명하였다. 즉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자가 아니라 의로운 정치로 천하를 다스리는 자와 외교를 맺을 것임을 확실히 밝혔다. 정몽주는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구분에 있어서, 진정한 화이(華夷)의 구분은 지역이나 혈통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집단이 도의문명을 숭상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구분하였다. 그리하여 야만의 속성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원을 배격하고 백성을 위한 대의명분을 가지고 일어난 명을 진정한 대국으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또한 현실적으로, 쇠락해 가는 북원을 향한 외교정책에 대해,

 

  “그들을 거절하면 우리의 강한 것을 보이는 것이요, 섬기면 도리어 그들의 뜻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라며 북원에 대하여는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을 건의하였다.

 

   앙심을 품은 권신 이인임은 최영을 등에 업고, 젊은 간관들이 함부로 재상을 논핵하였다 하여 친명파 대신들을 반란기도로 덮어씌워 대거 숙청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옥에 갇히고 국문을 받다가 죽고 귀양을 갔는데, 이때 정몽주도 언양으로 유배를 당하였다.

 

4. 정몽주의 활약, 정도전 인고의 나날

 

  정도전이 나주 거평부곡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정도전의 친구들은 다 멀어져 가고 가족들은 굶주렸다. 이 시기가 얼마나 어려운 시기였나 하는 것은 그의 부인이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난다.

 

  ‘당신은 평소 집안에 밥이 끓든 죽이 끓든 간섭조차 하지 않아 내가 그때그때 어떻게든 꾸려 나가야 했지요. 아이들은 지금도 방안 가득 들어앉아 춥고 배고프다고 울고 있지만, 당신은 죄를 지어 먼 곳에 가 있죠. 그동안 내가 숱한 고생을 참고 지냈던 것은 당신이 혹 뒷날에 입신양명하여 출세할 것이라는 한 가닥 믿음 때문이었는데 결국은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으니, 이것이 당신이 평소에 말하던 군자의 도라는 것입니까?’

 

  정도전은 답장을 써서 부인을 달래었다.

 

  ‘그대의 말이 참으로 온당하오. 나에게는 형제보다 친한 친구들이 많았지만 내가 이렇게 되니 모두 뜬 구름처럼 흩어지고 말았소. 그러나 그대가 나를 책망하는 것은 나를 사랑해서이지 미워서가 아닐 것이오. 난 나의 직분을 다할 뿐이오. 성패는 하늘이 정하는 것이지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닐 것인데 내가 무엇을 따로 근심하겠소?’

 

  그러나 정도전은 9년간의 유배와 유랑생활을 하면서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왕년의 다정했던 친구들은 다 떠나갔지만 오히려 가난하고 순박한 시골사람들은 정도전에게 따뜻한 정을 베풀어 주었던 것이다. 그는 뼈를 깎는 고난의 시기에, 민생의 피폐와 권신들의 발호, 그 자신의 가난과 고독의 절실한 체험, 비참한 밑바닥 생활을 통해 고려사회의 암담한 실상을 체감하게 되었으며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개혁의 꿈을 키워갔다.

 

  정몽주가 귀양에서 풀려나자 정몽주를 미워하던 권신 이인임은 일본 사신을 명하였다. 당시 일본 사행길은 왜구, 도적들이 수시로 출몰하여 일본 조정에서도 어찌할 수 없는 무법천지였다. 일본에 사신으로 가는 일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지만 정몽주는 조금도 난색을 표하지 않고 일본으로 가서 훌륭히 임무를 수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10개월에 걸친 일본행이 끝나고 돌아올 때는 일본에 잡혀갔던 고려인 포로 수백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정몽주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데 탁월한 재주와 능력이 있었다.

 

  이때 정도전은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영주로 돌아왔지만 아무도 불러주지 않아 야인에 머물렀다. 정몽주는 유배에서 풀려나자마자 바로 등용되었는데 정도전은 왜 등용되지 않았을까? (아마 정몽주는 원만한 성품과 대인관계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누가 이끌어주지 않아도 스스로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었고, 정도전은 능력은 있었지만 대쪽같은 성격 때문에 누가 이끌어주지 않으면 스스로 난관을 헤쳐나갈 수 없었지 않았나 짐작을 해 본다)

 

5. 이성계와 정몽주의 인연

 

  1380년, 왜구의 노략질이 절정에 달하였다. 전 국토가 왜구들에게 유린되었으며 이들의 신출귀몰한 출입에 고려 관군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왜구들은 수도 개경 근처까지 횡행하였다. 얼마나 심각했으면 북방을 수비하는 동북면병마사 이성계에게까지 출동 명령이 떨어질 정도였다.

  왜구는 전국에 들끓었는데 그 중 가장 강력한 왜구의 세력은 수천 명 규모의 정규군과 같은 병력으로, 전라도와 경상도 내륙으로 들어와서 휩쓸고 다니는 아기발도라 불리는 왜구 우두머리의 군대였다. 이성계의 목표는 이 아기발도였다.

 

  정몽주는 조전원수로 이성계의 군대를 따라 내려갔다. 온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갑으로 무장한 왜구 대장 아기발도는 무예 또한 출중하여 당할 자가 없었는데 이 아기발도를 잡는 그 유명한 ‘황산전투’는 <용비어천가>에서도 묘사되어 있다.

 

  ‘청하여 온 왜(倭)와 싸호샤 투구 아니 밧기시면 나랏 小民을 사시리잇가’

 

  이성계는 여진 출신 부하 퉁두란과 나란히 말을 달리며 아기발도를 향해 활을 쏘았다. 이성계의 첫 발은 아기발도의 투구끈을 맞추어 투구끈이 벗겨졌다. 아기발도가 투구를 바로 잡으려 할 때 이성계의 두 번째 화살이 투구를 맞추어 투구가 벗겨졌다.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퉁두란이 활을 쏘아 아기발도를 머리를 맞추어 죽였다. 이 상황이 벌어진 시간은 불과 1~2초 사이였을 것이다. 가히 신출귀몰한 신궁들이 아니고는 상상조차 못할 솜씨였다.

  아기발도가 죽자 왜구는 흔들리며 궤멸되었다. 정몽주는 황산전투에서 이성계의 활약상을 생생하게 목격하였다.

 

  이 소식은 야인이 되어 서울에 올라와 있었던 정도전의 귀에도 들렸을 것이다. 정도전의 서울 생활은 고달팠다. 권신들의 세도에 밀려 삼각산에서 부평으로, 부평에서 김포로 옮겨 다녀야 했다.

 

  1383년 정몽주는 동북면조전원수로 또 한 번 이성계를 따라 큰 전투를 치른다. 당시 동북면을 위협하던 여진 추장 호발도와의 결전이었다. 이 전투가 얼마나 위급하였는지는 이성계가 상중이던 퉁두란을 급히 불러올린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고려군을 끈질기게 괴롭히던 호발도는 결국 이성계에게 대패하여 달아나 다시는 고려를 범접하지 못하였다.

 

6. 이성계를 찾아간 정도전, 정몽주와 정도전의 밀월

 

  정도전이 서울에서 함주까지 이성계를 찾아간 것은 그때였다. 많은 사람들은 이때 정도전이 새로운 사회의 청사진을 이성계에게 제시하였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다음 해 정도전은 다시 한 번 이성계를 찾아가고 나서, 관직에 복귀하였다. 유배 당한 지 9년만이었다. 그리고 정몽주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을 때, 서장관으로 같이 동행하였다. 이성계의 입김이 있었는지 정몽주의 입김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사행길은 목숨을 건 매우 위험한 길이었다. 이인임과 최영이 권력을 잡고 있었던 고려 조정은 신흥국 명과 북원에 양거리 외교를 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명태조 주원장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고려에게 과분한 세공을 요구하며 의도적으로 고려를 괴롭히고, 명으로 오는 고려의 사신들을 일부러 받지 않았다. 어쩌다가 사신으로 받은 자들을 수도 남경으로 압송하여 몇 년간 가두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명나라의 사신으로 선발되는 것은 목숨을 걸고 사지로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고려는 계속하여 명에 사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명과의 외교관계는 계속 유지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었다.

 

  원래는 밀직부사인 진평중이 명의 사신으로 가게 되어 있었는데, 진평중은 당시의 권신인 임견미에게 뇌물을 써서 사신에서 빠지고 임견미는 명단을 바꾸어 정몽주를 밀어 넣었다. 그러나 정몽주는 주저하지 않고 흔쾌히 사신을 자임하였다. 목숨을 아껴 몸을 뒤로 빼거나 왕명을 거부하는 일은 정몽주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간의 우려와는 달리 명 태조 주원장은 정몽주를 접견하고는 그가 10년 전 자신이 촉을 평정하였을 때 하례하러 왔던 사신이었던 것과, 돌아가다가 풍랑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던 사실들을 떠올리며, 정몽주 일행을 반가이 맞이하며 특별히 상을 내리고 또 위로하였다. 또한 그동안 억류하였던 6명의 고려 사신들을 풀어 주었다. 다른 사신들과는 사뭇 다른 접대였다. 정몽주는 어떤 상황에 닥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조급해 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않고 자신이 나타내고자 하는 뜻을 논리정연하게 밝히는 능력이 있었다. 다른 사신들과 다른 점이었다. 이러한 정몽주의 활약으로 명과의 외교관계는 회복되었다. 정몽주는 외교의 달인이었던 것이다.

 

   서장관으로써 정몽주를 수행하였던 정도전 역시 무사히 사행 길을 마치고 귀국함으로써 오랜 공백 기간을 불식하고 성공적으로 조정에 복귀할 수 있었다. 정도전은 분명 명태조 주원장을 만나면서, 농민 출신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그를 전범으로 삼은 남다른 야망을 가슴 속에 키웠을 것이었다.

 

7. 이성계 - 정몽주 - 정도전, 힘을 합치다

 

  1388년, 정세는 급변하여 명나라는 고려 땅 중에서 과거 원나라에 속해 있던 땅인 철령 이북을 모두 내어놓으라는 일방 통고를 하고, 고려 조정은 분노하여 오히려 고려 땅이나 다름없는 동녕부(심양 일대)를 쳐서 뺏기로 결정한다. 예로부터 원 제국으로부터 부마국왕으로 임명받은 고려왕은 요동 일대를 통치하는 심양왕을 겸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원나라가 물러간 지금 심양 땅은 고려 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 이성계를 시켜 두 차례나 요동으로 진격하여 동녕부를 차지한 적이 있었다.

 

  이성계와 조민수 등 전국의 내로라하는 고려 장수들은 총동원되어 1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으로 향하였다. 이때 정몽주와 정도전은 개경에 남아 있었다. 그들이 개경에서 무슨 역할을 담당하였는지 모르지만 이성계가 군사들을 위화도에서 돌이켜 개경으로 돌아왔을 때, 이는 명백한 반란이었지만 고려 군사나 백성들 중 고려왕이나 최영의 편을 들고 이성계를 반대하는 세력은 찾아볼 수 없었다.

 

  1390년, 권신 최영을 제거하고 이성계를 정점으로 하는 권력구조가 재편되었을 때 정몽주는 그 중심에 있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정몽주는 이성계를 이용하여 부패한 고려를 새롭게 고쳐보려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정도전의 생각은 달랐다. 명의 주원장이 원을 몰아내고 중국 사회를 재편하였듯이, 이미 손쓸 수 없을 정도로 곪아버린 고려는 무너뜨려야 하며 새로운 바탕 위에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작업은 치밀하게 진행되었다.

 

  조준, 정도전 등에 의해 제기된, 전시과를 없애고 균전제로 복귀하는 전제개혁안은 조정 내의 많은 반대에 부딪쳤다. 이색 등의 구신들은 오래된 법을 함부로 고치지 말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정몽주는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정몽주의 입장은 다분히 정치적인 입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성계는 전제개혁안을 과감하게 밀어붙였다.

 

  이성계 진영의 핵심참모인 정도전의 개혁안은 상당 부분 정몽주와 의견의 일치를 본 것이었다. 정도전은 정몽주의 열렬한 추종자였고 정몽주는 정도전에게 있어서 정신적 지주로 의지하고 있던 스승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상당부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정몽주로서도 평소의 개혁적인 생각들이 실현되고 있었으므로 때로는 적극적으로 찬성하기도 하고, 입장이 곤란한 경우에는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하였다.

 

8. 동지에서 적으로

 

  그러나 어느 순간 정몽주는 정도전이 전혀 다른 야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부조리한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데 대해선 두 사람 다 공감하였고 개혁의 방법에 있어서도 두 사람 다 급진적인 성향이었지만, 정몽주는 고려의 체제 내에서의 획기적인 개혁을 주창하였고 고려왕조를 뒤엎는 것은 반역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정도전, 조준 등의 신진 사류들이 이미 이성계를 새로운 왕조의 제왕으로 옹립하려 한 계획이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정몽주는 이색 등의 구신들과 힘을 합하여 이의 저지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동지였던 정몽주와 정도전은 어느새 적이 되었다. 정몽주는 이성계를 건드릴 수 없었지만 이성계를 보필하는 참모들을 치면 이성계가 힘을 쓰지 못할 것으로 보았다. 이때 정몽주는 나라 안팎에서 인정받는 대정치가였고 공양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조정 내에서 파워가 있었다.

 

  정몽주는 드디어 정도전의 신분의 취약점을 찾아내어 그를 유배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정도전의 두 아들을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었다. 이성계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도 권력의 실세 정도전을 쳤으니 당시의 정몽주의 영향력이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커질대로 커져버린 이성계의 세력 앞에서 정몽주로서는 목숨을 건 일대 모험을 저지르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정몽주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공양왕 4년, 세자가 명에 입조하고 무사히 돌아오게 되자 이성계가 황주에 나가 세자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어 위독하게 되었다. 즉 해주에서 드러누워 꼼짝을 못하게 된 것이다. 이성계가 없는 개경은 정몽주의 안방이나 다름없었다.

 

  정몽주는 자신의 심복인 간관들을 시켜 이성계의 핵심 세력인 조준과 남은, 남재, 윤소종, 조박 등에게 죄를 씌워 유배 보내는 데 성공한다. 죄목은 권력남용죄였다. 공양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하였지만 왕명은 절대적인 위력이 있었으므로 정몽주는 왕명을 이용한 것이었다. 정도전, 조준이라 하드라도 왕명 앞에서는 무력했다.

 

  내친 김에 정몽주는 조준과 정도전을 극형에 처하기를 상주한다. 그러자 공양왕은 망설이기 시작했다. 이성계가 두려웠던 것이었다. 정몽주는 매일 어전에 나가 공양왕을 독촉하였다. 정몽주는 그의 심복들과 의논하였다.

 

  “만약 조준, 정도전, 남은 등을 탄핵하여 극형에 처하기만 하면 조박, 윤소종, 오상충의 무리들은 족히 제압할 것도 없다! 이성계가 자리를 비운 이때를 타서 먼저 양 날개를 제거하고 난 뒤 다음 일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공양왕은 좀 더 조사해 보고 난 뒤에 하자며 뒤로 미루었고 정몽주 측의 간관들은 어전에 엎드려 정도전 등의 극형을 연일 간청하였다. 당시에는 이인임, 최영 같은, 나는 새를 떨어뜨리는 권신일지라도 하루아침에 목숨을 잃는 일이 다반사였으므로 정도전과 조준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게 되었다. 이성계는 아픈 몸을 이끌고 돌아오고 있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공양왕이 상소에 전결을 해 버리면 끝이었던 것이다.

 

9. 이방원의 등장, 반전

 

   이 때 의외의 복병이 등장한다. 바로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었다. 이 상황을 절대절명의 비상상황이라 판단한 이방원은 밤을 새워 말을 달려 이성계가 있던 벽란도에 이르러 사태의 급박함을 고하였고, 깜짝 놀란 이성계는 지체하지 않고 밤을 새워 달려와 바로 궁으로 달려가 공양왕을 알현하였다. 공양왕은 이성계에게 아무런 확답을 하지 않았다.    

  허수아비라도 왕은 왕이었다. 급해진 이성계는 서너 차례나 왕궁을 왕복하면서 조준과 정도전을 변호하였다. 평소에는 이성계의 말에 꼼짝하지 못하던 공양왕이 이때만큼은 이성계의 주청을 들어주지 않고 미루기만 했다.

 

   이성계는 답답하였지만 어쨌든 시간은 벌게 되었다. 오히려 답답해진 쪽은 정몽주 쪽이었다. 이성계가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 몰랐던 것이다. 만일 이 일이 실패하게 되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자신의 목숨도 위태롭게 되었다. 그러나 위기는 이성계 측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새 왕조의 창조는 무력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성계는 잘 알고 있었다. 정치, 경제, 군사, 농업, 외교 등 모든 부문에 대한 청사진이 필요했으며 만일 정도전, 조준이 죽으면 이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성계는 일단 공양왕에게 조준 등의 억울함에 대하여 재가를 받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이성계는 정몽주의 학식과 인품을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가 정몽주를 제거할 줄 알았으나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자  이방원은 초조해졌다. 26세의 혈기방장한 이방원은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 만약 정도전이 죽으면 이성계 가문도 끝장이 나는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 아버지가 정몽주를 건드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자, 자신이 나서기로 작정를 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정몽주를 죽이려는 자신의 계획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걱정근심으로 사흘이나 음식을 섭취하지 못한 정몽주가 갑갑한 나머지 이성계의 집을 방문하였다. 서로가 상대방을 죽이려고 첨예하게 대립해 있던 상황에서 정몽주가 이성계의 집을 방문한다는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정몽주와 이성계는 죽음을 오고가는 전장을 같이 누빈 전우로써 허심탄회한 사이이기도 하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정몽주로서는 이성계와 화해를 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보려 하였는지도 몰랐다.

 

  무사들을 모으고 이성계의 집을 지키고 있던 이방원은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이성계의 심복 퉁두란에게 이 일을 시키려 하자 퉁두란은 이성계의 지시가 아닌 것을 알고 거절하였다.

 

  “우리 공[이성계]이 모르는 일을 내가 어찌 감히 하겠는가?”

 

  퉁두란이 말을 듣지 않자 이방원은 자신의 심복들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조영규, 조무, 고여, 이부 등을 시켜 돌아가는 길목에 매복하고 정몽주를 기다렸다. 밤이 으슥하여 정몽주가 돌아오는 것이 보이자 조영규가 나아가 철퇴를 치니 위기를 감지한 정몽주가 피하여 말을 달려 달아났다. 조영규가 추격하여 선죽교에 이르러 정몽주의 말을 쳐 정몽주가 땅에 떨어지니 고여가 정몽주를 척살하였다.

 

  권력의 정상에 서 있는 한 나라의 재상이 일개 하급무사의 손에 무참히 목숨을 잃고 말았으니, 이때 정몽주의 나이 56세였다. 정몽주로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갑작스런 일이었다.

 

   이성계는 정몽주의 죽음에 대해 매우 애석해 했다고 전해진다.

 

   정도전은 죽음 직전에서 살아나 개경으로 올라왔다. 정몽주 사후 더 이상 미룰 필요가 없게 된 이성계 추대계획은 급물살을 타 3개월 뒤 고려는 무너지고 조선이 세워지게 된다. 정도전은 가장 강력한 후원자 이성계를 등에 업고 마음껏 새로운 세상을 설계하였다.

 

  정몽주는 고려의 끝자락에 마지막으로 타오른 촛불이었고 정도전은 새로운 세상을 연 화려한 불꽃이었다.

 

 10. 이방원, 임금이 되어 정몽주를 추증하다.

 

  정몽주는 명석한 후배 정도전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지만 정도전은 정몽주의 가르침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사회의 기본 골격부터 뒤집어 바꾸려고 했고 그러한 힘을 가진 이성계를 끌어들였다. 이를 온 몸으로 저지하고 고려왕조를 지키려던 정몽주의 살신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충절은 두고두고 사람들의 뇌리에 남았고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죽음으로써 막으려 했던 조선왕조의 충절의 모범이 되었다.

  반면 정도전은 조선을 개국한 후 정치 바람에 휩쓸려 비운의 최후를 맞았다. 그는 역신으로 분류되어 한동안 그의 이름조차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못하게 하였다.

  조선 태조 이성계 역시 아들 이방원과의 문제로 인해 편안한 말년을 보내지 못하고 쓸쓸히 죽어갔다.

 

  정몽주는 이방원이 임금이 되었을 때 그로부터 문충공이란 시호를 받았다. 정몽주의 충성심을 본받으라는 것이다. 정몽주가 보여준 굳세고 변함없는 절의는 임금 된 자가 신하들에게 보여주고 싶고, 닮게 하고 싶은 전범이자 표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성계와 정도전, 정몽주에 대한 오늘날의 평가는 또 다르지만, 그 당시에는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며 동시대를 화려하게 풍미한 주인공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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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四神)은 청룡, 백호, 현무, 주작을 말한다. | 기타 - 잡동사니 2014-04-28 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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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四神)은 청룡, 백호, 현무, 주작을 말한다.

 

사신이란 동서남북의 4방위를 나타내는 동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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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자 가족에게 분노조절 장애라니… | 심리학 - 심리 상담 및 치료 2014-04-27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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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자 가족에게 분노조절 장애라니…

[기자수첩] 한국경제 정규재 칼럼에서 드러난 언론인의 ‘공감능력 장애’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6254

 

 

한 장의 그림이 언론을 부끄럽게 했다. 26일 KBS 1TV <심야토론>에 세월호 참사에서 구조된 단원고 학생이 그렸다는 그림 한 장이 등장했다. 여학생이 카메라와 마이크에 둘러싸인 채 얼굴을 가리고 있는 장면이었다. 이 그림을 소개한 서천석 서울신경정신과 원장은 “자신들을 도와주려하기보다 흥밋거리로 이용하는 것에 대한 분노, 언론에 대한 불신이 높은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구조된 학생들의 마음이 이런데, 팽목항 현장에서 정부 대책본부의 브리핑을 검증없이 보도했던 언론에 대한 실종자·희생자 가족의 불신은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다. 실종자 가족들이 진도 팽목항에서 청와대로 가겠다며 무모한 행진을 했던 것도 생존자 구조작업에 대한 의지를 확인할 수 없었던 정부대처에 대한 강한 분노와 함께 언론에 대한 불신이 작용했다.

세월호 생존 학생의 그림을 보며 지난 22일자 정규재 한국경제 논설위원실장의 <슬픔과 분노를 누그러뜨릴 때>라는 칼럼을 도마 위에 올릴 수밖에 없다. 정규재 실장은 “비록 위로를 받아야 하는 처지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행동할 권한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이해는 가지만 청와대로 행진한다고 무슨 문제가 풀릴 것인가”라며 실종자 가족을 가리켜 “분노 조절이 불가능하거나 슬픔을 내면화하여 누그러뜨리지 못하는 감정 조절 장애에 함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고 적었다.

   
▲ 26일 KBS '심야토론'에서 공개된 그림. 세월호에서 생존한 학생이 그린 그림으로 알려졌다. 
 
그의 말대로 감정조절에 장애가 있다면 문제다. 하지만 언론이 “슬픔과 분노를 누그러뜨릴 때”라며 감정조절을 운운할 자격은 없어 보인다. 언론은 지난 16일 참사 당일부터 “전원 구조”라는 대형오보를 냈다. 17일 실종자 가족이 ‘에어포켓’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을 때는 SBS와 YTN 등이 “선내 공기 주입이 시작됐다”는 오보를 냈다.

18일에는 국가재난주관방송 KBS에서 “선내 엉켜있는 시신 다수확인”이란 오보를 냈다. 내용도 사실과 달랐지만 실종자 가족을 배려하지 않은 자극적 자막으로 윤리적 비판까지 받았다. 최근에는 대다수의 신문·방송보도가 세월호 선주인 청해진해운 실소유주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에 쏠리며 수색작업의 어려움과 해경·해양수산부의 무능함, 무엇보다 박근혜 정부에 쏠리는 비판여론을 애써 감추는 모양새다.

정규재 실장이 지적한 ‘감정조절장애’의 원인제공자는 언론이다. 언론은 세월호 희생자와 희생자가족을 위해 거의 한 일이 없다. 오히려 잦은 오보와 무절제한 취재경쟁으로 전국적인 ‘언론혐오증’을 낳았다. 정 실장도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사고를 당한 아픔은 형언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행동들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사고수습을 위해 현장을 찾은 총리에게 욕설을 퍼붓는 것도 딱한 장면이다”라며 제3자의 시선에서 객관적인 척 바라본다. 인식장애이거나 자기기만에 가깝다.

정 실장은 칼럼에서 “슬픔은 타인의 그것과 뒤섞이기를 거부한다. 슬픔은 각자의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세월호 참사의 슬픔은 각자의 것이 아니다. 개인적 불행이 아니다. 탐욕에 눈 먼 어른들이 불러온 초대형 인재다. 죄 없는 아이들이 황망하게 세상을 떠났고 아직도 어둡고 차가운 바닷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한국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짊어져야 할 슬픔이다. 분노해야 할 때는 분노해야 한다. 슬픔과 분노를 누그러뜨릴 때는 슬픔과 분노를 온전히 쏟아낸 뒤일 수밖에 없다. 그걸 모른다면 공감능력장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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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피해자 | 동양 고전에서 배운다 2014-04-27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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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수혜자 | 동양 고전에서 배운다 2014-04-27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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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곤과 조광조가 등장하는 야사 | - 조선시대 2014-04-2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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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설화는 조선에 흔히 전해 내려왔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기묘사화의 주역이었던 남곤조광조가 등장하는 야사이다.

 

둘이 산책을 하던 도중 여인이 지나가자 조광조는 그 모습을 보고 산책하는 도중에도 계속 뒤돌아봤으나 남곤은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걸어갔다. 이를 부끄럽게 여긴 조광조는 어머니인 여흥 민씨에게 이것을 말하며 자책했으나 여흥 민씨는 오히려 남곤을 냉정하고 무서운 인물로 여겨 조광조에게 남곤을 멀리하라고 했고, 심지어 남곤의 집에서 먼 곳으로 이사까지 했다.

 

http://mirror.enha.kr/wiki/%ED%99%94%ED%9D%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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