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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 가쁜 사랑

폴 세르주 카콩 저/백선희 역
마음산책 | 2012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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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를 처음 봤을 때가 기억난다. 연출 수업에서 였을 거다. 교수님은 누벨바그를 언급하며 '네 멋대로 해라'를 틀었다. 숏 컷트의 진 세버그가 나왔고 중절모를 쓴 장 폴 벨몽도가 나왔다. 네러티브는 제멋대로 질주했고 컷은 사정없이 튀었다. 숨가쁜 90분이 지나고 영화는 갑자기 '뜩' 하고 끝났다. 다른 모든 영화가 시시하게 느껴졌다. 


그 학기 말 작품에서 나는 장 뤽 고다르의 화신이 되었다. 네러티브는 제멋대로 질주했고 컷은 사정없이 튀었다. 숨가쁜 28분이 지나고 영화는 갑자기 '뜩'하고 끝났다. 그것이 내 마지막 영화가 되었다.





진 세버그. 누벨바그의 여신. 진 세버그는 관습과 기성질서를 타파해 새로운 영화를 탄생시키겠다는 누벨바그의 살아있는 상징이었다. 그녀의 짧게 깍은 머리는 여성을 새롭게 정의했으며 수 천년간 여성 위에 군림해왔던 수컷 사회를 대담히 도발했다.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세상은 열광했고 숏 컷트한 여자들이 파리를 가득 채웠다. 가능성은 인정받았으나 결코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던 이 미국 출신 여배우는, 저항과 변화의 상징이 되어, 지구 반대편인 프랑스에서 뜻 밖의 대성공을 거둔다. 





1914년, 리투아니아의 젊은 단역 여배우가 로맹 가리라는 아이를 낳았다. 그는 유대인이었다. 여배우는 유대인에 대한 핍박과 가난을 피해 프랑스의 니스에 도착했다. '들고 온 짐이라곤 열네 살 된 로맹과, 아들에게 프랑스인의 운명을 만들어 주겠다는 유대인 어머니의 각오 뿐이었다.'(p. 26). 그녀는 어린 아들에게 '넌 프랑스 대사가 될 거야'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웠다고 한다. 로맹은 캘리포니아 주재 프랑스 총영사가 된다.


로맹 가리는 외교관이 되기 전부터 소설을 썼고 2차 세계대전 때는 프랑스 공군으로 참전했다. 전쟁으로는 훈장을 쓸어 담았고 소설로는 부와 명예와 인기를 얻었다. 너무 많은 것을 가진 자는 언제나 시기와 질투 속에 살아가는 법이다. 훈장과 명예와 잘생긴 외모와 뛰어난 외교 능력은 유대인이라는 최고급 양념과 버무려져 평생 핀치에 쳐박혔고 그는 소설이라는 주먹을 휘둘러 인간의 잔인함과 무지, 천박함과 편협을 고발했다.


로맹 가리의 화려한 인생은 에밀 아자르의 등장으로 정점을 맞게 된다. 에밀 아자르는 자신을 폄하하는 비평계를 묵사발 내버릴 최강의 무기였다. 전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둔 소설이라도 프랑스 평론계는 유대인이자 드골주의자였던 로맹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 맹수도 늙고 이빨이 빠진다. 소설가로서 로맹 가리의 경력이 끝나갈 기미가 보이자 비평가들은 그를 한물 간 소설가라고, 곰팡내 나는 다락방에 고장난 장난감을 쳐박듯 그를 몰아 붙였다. 로맹 가리는 어둠 속에서 에밀 아자르를 만들었다. 그는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여러 권의 소설을 출간했다. 로맹 가리라는 이름에 치를 떨던 비평가들이 에밀 아자르의 책에 열광했다. 에밀 아자르는 콩쿠르 상을 수상했다. 로맹 가리 또한 콩쿠르 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역사상 단 한 번도 동일한 작가에게 수상을 한 적이 없는 콩쿠르 상을 말이다.





미국에서 태어났으나 프랑스에서 성공했고 러시아에서 태어났으나 역시 프랑스에서 성공한 로맹 가리는 진 세버그의 고향 미국에서 첫 만남을 갖는다. 진 세버그는 위트와 유머와 부와 명예와 권력과 잘생긴 외모까지 갖춘 로맹 가리에게 빠져 들었다. 다가올 불행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어리석은 남자 프랑스 모뢰이는(당시 진 세버그의 남편) 로맹 가리에게 자신의 아내를 보살펴 줄 것을 부탁하고 프랑스로 떠났다. 모뢰이가 돌아왔을 때 진 세버그는 이혼을 통보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박살나 버렸고, 언제나 그렇듯 새로운 시작이 박살난 사랑의 폐허에서 탄생했다. 진 세버그의 열정으로 로맹 가리 또한 이혼 했다. 두 남녀는 결혼했다. 24살의 나이차가 났다. 


강이 나타나면 흘러내려 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거슬러 올라가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진 세버그는 후자에 속했고, 로맹 가리 역시 그랬다. 두 사람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었고 황금을 찾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는 휴식도 구원도 전혀 없다.(p.82)


진 세버그는 사회에서 소외 받은 약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흑인 인권 운동에 참여했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다. 하지만 당시는 매카시즘과 인종차별의 악랄함이 박애 정신과 숭고한 희생을 짓밟던 시절이었다. 진 세버그는 '흑인들의 창녀'라고 불렸다. FBI는 그녀를 빨갱이로 간주해 사생활을 감시했고 그녀의 명예를 실추 시킬수 있는 일이라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언론에 공개했다. 악의적인 가십은 그녀의 사생활을 파괴했고 보수적이었던 진 세버그의 가족은 그녀를 버렸다. 진 세버그의 영화 경력은 쇠퇴 일로였다. 불만족이 자기 경멸로 바뀌기 시작할 때는 누구도 도울 수가 없다(p.86). 진 세버그는 알콜 중독에 걸렸고 변함없이 인종차별에 분노해 세상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로맹은 그녀의 혈기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로맹은 수 많은 이데올로기가 짧은 시간 발화했다 먼지처럼 사그라 드는 것을 경험했고, 무엇보다 세상의 비열함을 알고 있었다. 진실과 정의는 영원 불변한 가치처럼 빛나는 것 같지만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면 순식간에 빛을 잃고 사라져 버린다. 열광했던 사람들은 전혀 몰랐던 일인 것처럼 주머니에 손을 넣고 집으로 돌아간다. 로맹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진에게 충고했다. 그러나 그것을 알기엔 진이 너무 어렸다. 그녀는 언제나 유보적인 로맹 가리를, 불의와 차별에 저항하지 않는 로맹 가리를, 행동하지 않는 소설가라고 매도했다. 평생을 인종차별과 소외와 싸워온 로맹 가리에게 말이다. 





로맹은 아버지 역할을 자진한게 아니었다. 24살의 나이차는 로맹에게 아버지의 역할을 덧 씌웠다. 그리고 모든 아버지는 젊은 자식과 불화를 겪기 마련이다. 결혼 생활은 8년만에 끝났다. 로맹은 더더욱 글 쓰기에 몰두했고 그가 연기한 에밀 아자르는 콩쿠르상을 거머쥔다. 진 세버그는 물에 빠진 나비처럼 힘없이 침몰하고 있었다. 급기야 경제적 여유마저 상실한 그녀를 로맹은 위기 때 마다 건져주었다. 그녀는 로맹에게 감사했고 새로운 삶을 약속했지만 '추락하는 곳엔 날개가 없었다'. 그녀가 흑인 인권 운동가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루머가 퍼졌다. 사람들은 '흑인들의 창녀'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고 떠들어댔다진은 잠적해 아이를 낳았다. 로맹은 진을 보호하기 위해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임을 밝혔다. 아이는 태어나자 마자 죽었다. 진 세버그는 아이를 유리관에 넣어 장례를 치렀는데, 그 아이가 흑인인지 아닌지를 보기위해 수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장에 몰려들었다. 남의 불행에서 흥미를 느끼는 동물은 인간 밖에 없을 것이다.


'1979년 9월 8일 토요일, 진 세버그의 시신이 그녀의 르노 자동차 안에서 발견되었다'(p. 228). 그녀의 나이 마흔하나였다. 로망 가리는 기자회견을 열어 FBI가 그녀의 삶을 파괴했으며 진 세버그가 아기의 죽음 이후에 정신병원을 드나들고 자살 기도를 이었다고 말했다. 


1년여 뒤 로맹 가리는 '진 세버그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깨진 사랑 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른 데 가서 알아보시길'(p.230~231) 이라는 메모를 남긴채 권총을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가 죽고 얼마 뒤 베일에 가려져 있던 천재 작가 에밀 아자르가 로맹 가리였음이 드러났다. 세상은 충격에 빠졌고 프랑스 비평계는 침묵했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인간의 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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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아자르 - 솔로몬 왕의 고뇌 | 기본 카테고리 2012-07-01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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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솔로몬 왕의 고뇌

에밀 아자르 저/김남주 역
마음산책 | 2012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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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은 분노, 허무, 그리고 아무리 떼어 놓으려 애를 써도 기어이 삶을 따라 잡고야 마는 죽음에 대한 무력감에서 나온다. 자신감 넘치고 강하며 선하고 올바른 자들은 역설을 비겁한 자조나 자포자기, 허약한 비아냥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오만한 소리! 역설은 허무를 온 몸으로 받아들였을 때만 얻을 수 있는 삶의 정수다. 죽음을 눈 앞에 두고도 열심히 입을 놀릴 수 있는 사람은 역설을 지닌 자들이다. 그리고 대개는 그들의 역설에서 죽음을 때려 눕힐 '웃음'이 탄생한다. 




에밀 아자르의 책은 처음이다. 제목을 보자마자 뇌세포가 쫄깃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지만 한편으론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솔로몬 왕의 고뇌. 지나치게 사색적이라 떠맡지 않아도 될 고뇌를 억지로 엎어 올 것만 같은 걱정. 세상의 비밀을 속속들이 알게 될 수록 고통과 비극은 멀어질거라 기대하지만, 사색의 깊이에 비례해 삶의 무게가 더해지는 것이 철학의 함정이다. 모르는게 약이지라는 말은 그냥 있는게 아니지. '심연을 오래 들여다 보면 어느새 심연도 당신을 들여다 보는 법이니까' -프리드리히 니체.


그런데 이책, 재밌다. 솔로몬 왕의 고뇌는 신나는 풍자와 역설로 부드럽게 다져져 애정어린 비웃음으로 요리된다. 우선 이 책의 화자 '장'부터 소개해야겠다. 장은 크메르 루즈의 킬링필드에서 살아남은 캄보디아인 통, 가난과 역병의 땅인 아프리카에서 온 요코와 함께 한 대의 택시를 번갈아 가며 운전하는 택시 기사다. 한 대의 택시를 세 명이! 이 가난한 청년은 어느 날 '기성복의 왕'이라 불리는 거부 솔로몬을 태우게 되는데, 장의 얼굴에서 비밀스런 추억을 느낀 솔로몬은 그 즉시 택시 임대비로 진 장의 빚 1만 5천 프랑을 갚아준다!


동화같은 이야기!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 우리는 불가한 꿈에 취해 비틀거리다 차가운 물을 뒤집어 쓰고 현실로 돌아와야하는 무기력한 독자? 그렇지 않다. 이 책은 그렇게 시시한 책이 아니야. 들어보게.


기성복의 제왕 '솔로몬'은 여든 네 살이다. 마흔 넷이 아닌 여든 넷이다. 여든 넷! 팔십 사! 죽음을 코 앞에 둔 늙은이지만 솔로몬은 그 예정된 방문자의 응시를 완전히 무시한다네. 그는 젊은 시절 기성복을 만들어 거부가 됐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그 친구의 방문을 받을 뻔 했지만, 샹제리제 거리의 어느 지하실에서 4년간 꼼짝않고 지낸 덕분에 그 불행을 면할 수 있었다. 그가 여든 네 살이 되어 임박한 죽음에 그토록 분개했던 이유는, 젊은 시절 그토록 드라마틱하게 죽음을 피해 살아남았건만 이제와서 고작 '자연사'라는 시시한 방법으로 그것을 맞이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거부한다. 그는 앞으로 5년간 쓸 수 있는 최신식 세라믹 이빨로 임플란트를 해 넣고 '트레이닝'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운동복을 입은채 격렬한 체조를 한다. 왜냐구? 인간은 언제나 내일을 대비해야 하지 않는가!


솔로몬의 또 다른 취미는 젊은 시절 벌어들인 돈으로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다. 근심과 걱정이 있는자, 수고롭고 짐진 자들은 망설임 없이 솔로몬의 집으로 전화를 거시라. 그곳에는 여든 네 살의 노인과 함께하는 자원 봉사자들이 24시간 당신의 전화를 기다린다. 이른바 솔로몬의 구조회. 

'장'에게 내려진 1만 5천 프랑의 은혜는 사실 이 곳에서 심부름 꾼으로 일하는 대가로 주어진 것이었다. 그는 택시를 이끌고 전화만으로는 도움이 부족한 사람들을 찾아가 과일 바구니를 선물한다. 그들은 대개가 노인들이었다. 솔로몬은 특히 자신과 비슷한 운명에 직면한 사람들을 각별히 도왔던 것이다. 노인들에게 부족하기 쉬운 비타민을 선물하면서, 마치 그들이 30년은 더 살수 있을 것처럼.


장의 룸메이트 척은 솔로몬의 구조 활동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린 바 있다. 


'솔로몬 씨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선한 마음에서가 아니라고 한다. 솔로몬 씨는 신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신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고 모범을 보이기 위해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이었다.'(16p)


척의 말을 수긍한다면 솔로몬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 나아가 이 세상, 나아가 이 세상을 만든 자에게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신이 정한 생사의 법칙을, 그가 인간을 위해 만든 유일한 친구의 도움을 거부한다. - 인간의 친구는 타자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약탈, 살인, 전쟁을 보고 있으면 신이 타자를 만든 이유가 서로를 죽여 그 수를 조절하기 위함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고로 신이 인간을 돕기 위해 만든 유일한 친구는 '죽음' 뿐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신이라면 마땅이 해야할 기적과 은혜의 축복을 대신 행사한다. 신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고 그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신은 죽음을 만들어 인간을 다스리려 하지만 여기 만만치 않은 존재가 서있다. 그는 여든 네 살의 노인이지만 그 눈은 어떤 젊은이 보다도 삶에 대한 열망으로 활활 타오른다. 그는 여든 네해를 쉼없이 보내 삐그덕 거리는 노구를 이끌고 사창가를 찾고 예순 여섯살의 옛 연인과 재회해 미래를 계획한다. 나는 이토록 천박하고 우아하면서 유쾌하고 진지한 반항아를 본 적이 없다. 


이 소설은 역설의 옷을 입고 인생의 무대에 올라 죽음을 노래한다. 그 노래가 끝나고 나면 죽음은 사그라 드는 박수 소리를 등에 엎고 무대 뒤로 사라진다. 죽음이 정복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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