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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카운슬러

코맥 매카시 저/김시현 역
민음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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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많습니다.


코맥 매카시라는 이름만 듣고 반사적으로 이 책을 손에 든 사람이라면 다소 실망했을지도 모르겠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64번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단 이 책은 우리가 열광해 마지 않는 코맥 매카시의 '소설'이 아니라 그가 최초로 집필한 '영화 시나리오'기 때문이다. 코맥 매카시가 문학 인생 최초로 영화 시나리오를 집필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출판 관계자들의 마음은 얼마나 설레었을까? 심장이 바운스 바운스 했겠지.


<카운슬러>의 출간은 철저하게 기획된 것이다. 마케팅의 산물이라는 얘기다. 영화가 개봉하기 13일 전 1쇄가 나온 이 책은 <카운슬러>의 개봉과 동시에 2쇄를 찍었다. 줄곧 탐욕의 부덕을 노래하던 코맥 매카시 자신도 - 물론 그 자신이 의도한 건 아닐지라도, 결국 출판 '산업'이라는 거대한 탐욕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은 씁쓸한 아이러니를 넘어 잔인한 조소로 다가온다.


산업은 산업의 탐욕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산업을 만들고 우리는 비판의 강도를 높임으로써 오히려 새로운 산업의 수요를 끝없이 창출, 그것의 활성화에 이바지한다. 산업은 우리에게 비판적 지식인이라는 훈장을 부여한다. 우리는 그 훈장으로 자위를 한다.


뭐가 이리 진지해?



똑같은 지옥 위에서


<카운슬러>는 코맥 매카시가 줄곧 그려왔던 지옥, 바로 그 위에서 폭력과 죽음의 서사를 되풀이 한다. 황량한 사막은 여전하고 그 위로 탐욕이 붉게 노을진다. 그 속에 녹색 돈다발이 있다. 바뀐점이 있다면 돈의 액수다. 루엘린 모스가(<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주인공) 10년 전 사막 위에서 주운 돈가방엔 250만 달러가 들어 있었다. 그 때는 250만 달러로도 인생 역전이 가능했을 것이다(<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배경은 80년대의 텍사스다). 하지만 오늘날 고작 250만 달러 때문에 국경을 넘나드는 대추격전을 벌이며 수 십명을 죽였다고 하면 사람들은 코웃음을 칠 것이다. 강남에 아파트 한 채 값도 되지 않는 돈을 갖고 도대체 왜? 그래서 액수는 8배, 2,000만 달러가 된다. 물론 1조원 대의 사기 대출을 받는 시대엔 이것도 보잘것 없어 보이지만.


코맥 매카시의 주인공들은 모두 중요한 선택을 한다. 그들은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어렴풋이 이해하지만 자기는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나는 아닐거야 라는 안이한 생각으로(<카운슬러>) 기꺼이 탐욕에 몸을 던진다. 그렇게 운명의 톱니바퀴가 굴러 간다. 이후 작가는 이 기계적 움직임을 역시 기계적인 건조함과 담담함으로 묵묵히 묘사해 나간다. 


여기서 중요한 건 추격자들이다. 그들은 살인청부업자나 마약 조직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죽음의 메타포다. 그 누구도 이 추격자를 피할 수는 없다. 탐욕은 가만히 있어도 언젠가는 찾아올 그 추격자의 방문을 좀 더 앞당긴다. 너는 도망칠 수 있다고? 어림없는 소리. 눈을 감는 순간에야 당신은 당신의 필사적인 도망이 사실은 죽음의 품을 향한 어이 없는 질주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이 죽음을 연기한 것이 최악의 사냥꾼 안톤 쉬거였다면 <카운슬러>에선 멕시코 후아레스의 마약 조직이 그 역할을 맡는다. 둘은 모두 죽음을 상징하지만 거기엔 큰 차이가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두 대상이 이야기의 재미에 미치는 영향에 큰 차이가 있다고 해야 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안톤 쉬거는 무적이었지만 어디까지나 한 명의 인간이었기에, 어쩌면 대항해서 이길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품게한다. 실제로 그는 루엘린 모스가 쏜 총에 맞아 빈사 직전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카운슬러>의 마약 조직은 그 실체를 전혀 알 수 없다는 점, 그것이 한 존재를 너무나 간단히 지워버릴 수 있다는 점에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끔찍한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 <카운슬러>의 등장인물들은 루엘린 모스처럼 샷건을 날리거나 국경을 넘어 도망치지 못한다. 그들은 속수무책이다. 검은색 에스컬레이드가 도착해 길을 막고 차에 태우는 것으로 모든 게 끝나는 것이다. <카운슬러>에선 비명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이 압도적인 힘의 차이 때문에 이야기는 아무런 긴장감을 얻지 못한다. 이것은 흥미진진한 싸움 구경이 아니다. 이것은 일방적인 폭력이며 끔찍할 정도로 잔인한 학살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보고 기대했던 당신이 이 영화 혹은 소설을 보고 실망감을 느꼈다면, 아마도 이게 그 이유일 것이다.



과대평가된 탐욕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나온 게 2005년이니 거의 10년 전이다. 이 10년 동안 세상은 어떻게 변했을까? 코맥 매카시는 변화한 세상에 만족할까? 올해 82세가 된 이 노인은 여전히 이 세상을 못마땅해 하는 것 같다.


코맥 매카시는 샷건 한방을 얼굴에 맞는 것으로 탐욕의 대가를 치루는 세상이란 천국에서나 존재할 법한 자비로운 세계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탐욕의 끝은 더 처절하고 끔찍해야 한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그 뜨거운 덩어리를 놓고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테니까. 


<카운슬러>에는 스너프 필름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스너프 필름은 대략 이런 내용이다.


마체테로 여자애 머리를 댕강 잘랐다더군. 열네 살쯤 된 아이였는데, 복면을 한 남자한테 항문 성교를 당하던 중 울면서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는데 머리가 떨어져 나갔다지.(p.99)


뭔가 일이 꼬였다는 걸 알았을 때 마약 중계상 웨스트레이는 주인공 카운슬러를 만나 이 얘기를 해준다. 그들이 관계를 맺은 마약 조직이 이 스너프 필름의 제작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카운슬러는 도망을 계획하지만 그의 약혼자 로라가 멕시코 조직에 납치당한다. 조직은 애초에 로라만을 타겟으로 했을 것이다. 탐욕의 대가는 죽음보다 더 커야 하니까.


카운슬러는 로라를 찾으러 멕시코 후아레스로 떠나지만 그는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채 그저 자신에게 배달된 DVD 한 장을 받는다. 그 순간 후아레스 변두리의 쓰레기 매립지에, 빨간 원피스를 입은 목 없는 로라의 시체가 더러운 쓰레기 더미 속으로 파묻힌다. 


'인생은 한 방'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머저리들에게 빨간 원피스를 입은 로라의 시체를 기억하라고 말하고 싶다. 당신이 '올 인'을 외치며 팔을 뻗는 순간 그 시체는 당신이 사랑하는 그 누군가가 될 수도 있다. 우리 머저리들은 그저 죽음으로 이 모든 걸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탐욕의 종말에 선 사람들에게 죽음은 자비다. 그 끝은 그렇게 깔끔하지 않다. 죽음보다 더 끔찍한 공포.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정도의 고통. 제발 죽여달라고 소리질러야만 하는 세상을 경험해 본 적 있는가? '탐욕은 언제나 과대평가되지만, 공포는 그렇지 않다'(p.105)는 말은 아마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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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예술을 놓아줄 때 | 기본 카테고리 2014-03-16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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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진중권의 서양미술사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편

진중권 저
휴머니스트 | 2013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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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술과 고전 미술을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재현성'에 있을 것이다. 고전 미술은 그것이 무엇을 재현하는지 명확한 입장을 취했다. 미켈란젤로는 성당 천장에 하나님과 아담을 그렸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캔버스 위에 성모 마리아와 루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를 그렸다. 그러나 여기 현대 미술이 있다. 그것은 형체를 잃고 주제를 버렸으며 의미를 숨긴 것처럼 보인다. 현대 미술을 마주한 우리는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무엇도 재현하지 않기에 미술은 순수하게 그 자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미술은 더 이상 '~을 위해 존재' 하거나 '~을 재현하지' 않는다. 미술은 말한다. 나는 '~을 하기 위해' 여기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오로지 '나이기 위해 이곳에 있다'. 이름만 들어도 성스러워지는 Fine Art의(순수 예술) 시작이다.


Fine Art는 자연이 아니라 예술 자체를 탐구한다. 더 이상 그 무엇도 재현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을 재현'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재현 대상과 재현 결과인 예술 사이에 위계를 만들어낸다. 실재보다 더 실재같은 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재현을 주제로 하는 예술은 태생 자체가 저급한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잘해도 결국엔 실재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한계에 가닿고야 만다.


재현을 포기하기 위한 가장 극단적 방법은 사물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이런점에서 뒤샹은 급진적일 뿐만 아니라 천재적이었다. 뒤샹은 변기에 서명을 한 뒤 전시회에 출품했다. 이미 만들어진 변기는 자기 자신 이외에 그 어느것도 지시하지 않는다. 예술은 사물 그 자체가 됨으로써 가장 순수한 것이 된다. 여기가 바로 모더니즘의 클라이막스였다.





모더니즘은 근대를 극복하기 위한 기획이었다. 다른 말로 그것은 그 당시의 '현재'를 극복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현재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더니즘 예술의 급진성은 자기 자신을 미래로 규정하기 위한, 혹은 자기 자신을 미래에 위치 시키고자 하는 노력으로 봐야한다. 그러나 여기 시간의 숙명성이 있다. 미래는 결국엔, 언젠가, 현재가 된다. 더불어 그것은 과거가 된다. 뒤샹이 변기를 '샘'으로 명명하는 그 순간 모더니즘은 현재를 극복하고 전통을 극복하고 체제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샘'이 그것을 설명하는 오디오 가이드와 함께 미술관의 '현대 예술' 섹션에 위치하는 순간 모더니즘의 생명은 다한다.


1960년대에는 이미 "아방가르드주의 자체가 전통이 되고, 예외로서 규칙이 되어버리는 미래 사회의 징후"가 나타나 있었다. (중략) 여기서 아방가르드의 극복이 '끝없는 자기 부정'이라는 아방가르드의 계승이라는 역설이 성립한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포스트모던은 이 역설에서 출발한다(모더니즘편 p.357).



포스트모더니즘, It's just happening


이 책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설명하기 위해 추상표현주의(잭슨 폴록), 앵포르멜, 색면추상,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팝아트, 플럭서스, 해프닝 등을 언급하고 있지만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오로지 '해프닝' 뿐이다. 


'해프닝'은 '간단히 말해 그냥 일어나는 사건'(p. 223)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해프닝은 '예술과 삶의 경계를 구별하지 않으'며 '단 한 번만 실연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예술과 삶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해프닝은 예술가 혹은 예술이 취하는 특권적 위치를 포기한다고 볼 수 있다. 자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예술을 위해 비평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진짜 바보에게 바보라는 말은 욕이 될 수 없듯이 여기서 너를 예술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비평의 협박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런데 이게 왜 중요할까?


고대에는 새조차 무엇이 더 위대한 예술인지 알고 있었다(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의 그림 경연을 떠올려 보라!).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비평은 단순한 사후 해석을 넘어 예술 자체를 규정하는 심판자가 된다. 비평 없이는 그 누구도 작품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써 예술과 비평 사이에 견고한 카르텔이 형성된다. 그러나 카르텔은 기본적으로 이권에(利勸) 대한 입장의 일치다. 이 말은 예술이 문화 산업에 굴복하고 그것을 살찌우기 위한 도구로 전락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해프닝은 예술이 되기를 거부했다. 그것은 그저 삶 자체일 뿐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해프닝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해프닝은 예술을 이용해 살을 찌우려는 그 어떤 주체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 진정한 Fine Art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한편 '단 한 번만 실연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에 해프닝은 영원히 '현재'일 수 있는 가능성을 얻는다. 초기에 해프닝은 꽤 엄격한 스크립트가 있어 관객과 퍼포머 사이에 행위를 규정하곤 했으나 후기로 갈수록 '즉흥성'을 더 강조해 그 기획과 실연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이를테면 그는 구경꾼들을 몰고 나가 마당 위에 얼음 벽돌을 함께 쌓았다. 얼음은 결국 녹을 것이다. 얼음이 녹고 나면 해프닝은 그저 해프닝으로 끝나고 만다. 


모던을 극복하려는 수 많은 포스트모던적 시도는 '작품'을 남기는 우를 범하므로써 언젠가 그 자신이 과거가 되는 참사를 겪는다. 전통을 극복한 위대한 작품들이 모든 열정과 힘을 쏟아 낸 뒤 박물관으로 돌아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전통이 되는 것이다전통을 극복하려는 그들의 야망은 일시적이지만 해프닝은 그 자체가 '일시적' 이었기에 오히려 영원히 '현재'로 남게 된다. 작품을 남기지 않은 것은 정말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체제를 극복하겠다는 정신이 결국엔 체제가 되어 군림하는 것만큼 치명적인 일은 없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애초에 시지프스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 둘은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순간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만 자기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 게 되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은 자기가 영원히 미래에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어느새 과거가 되버렸고 자기를 부정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그러나 해프닝은 애초에 부정될 '자기'를 남기지 않음으로써 그 윤회의 고리를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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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 있기에 채워지는 죽음 | 기본 카테고리 2014-03-09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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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저/장 자끄 상뻬 그림/유혜자 역
열린책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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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과 개미


<좀머 씨 이야기>는 설령 좀머 씨에 대한 이야기를 뺀다 하더라도 꽤 괜찮은 소설로 남았을 것이다. 유년기의 파스텔톤 추억이 잔잔하게 흘러, 이제는 온통 회색빛으로 변한 우리의 마음에 생명력 넘치는 빛깔을 돌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엔 좀머가 있다. 그의 죽음이 있다. <좀머 씨 이야기>를 읽는 것은 아름다운 벚꽃 가지 위를 부지런히 움직이는 개미를 보는 것과 같다. 벚꽃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선 그 개미까지 봐야 한다. 개미는 작지만 결코 우리의 시야를 벗어나는 법이 없다. 어느새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봄이 지나면 이제 남아 있는 것은 개미 뿐이다. 


이 작품은 호수와 숲과 바람이 있는 작은 마을을 그리는 데 대부분을 할애하지만 책을 덮고 나면 오히려 좀머의 발자국이 더 깊게 남는다. 나는 그 자국을 더듬어 이 책을 네 번이나 읽었다. 



좀머 씨의 죽음


좀머 씨의 삶은 대부분 공백으로 남아 있어 우리가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그러나 비어 있기에 채울 수 있다. 이 소설은 매우 짧지만 그 채워질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깊은 여운을 남긴다. 불필요한 오해를 없애기 위해 그가 우리에게 직접 전해준 말로부터 이 채움을 시작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p. 35)


이것은 작중 화자인 '나'의 아버지가 주먹만한 우박이 떨어지던 길을 홀로 걷는 좀머 씨에게, '그러다 죽겠어요'라고 말하자 그가 한 대답이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는 '그러니 나를 죽지 않게 하려면 제발 날 가만 놔두시오'라는 것이다. 이것은 '나'가 피아노 선생님에게 심한 야단을 맞고 자살을 결심해 올라간 가문비 나무 위에서 좀머 씨를 목격한 대목의 지지를 받는다. '나'는 거기서 아주 잠시 동안 휴식을 취하는 좀머 씨를 발견한다. 그리고는 자살할 결심을 포기한다. '불과 몇 분 전에 일생을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사람을'(p. 94)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 앞에서 고작 피아노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았다는 이유로 자살을 한다는 것은 정말 웃기는 짓거리가 아니겠는가. 


'나'는 좀머 씨의 끊임없는 걷기가 사실은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오해일 수도 있다. 이것이 오해라는 사실은 '나'가 훨씬 나이를 먹고 난 뒤, 좀머 씨와 다시 만난 대목의 지지를 받는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숲 속을 달리던 중 호숫가에 서 있는 좀머 씨를 보게 된다. 그는 걷고 있지 않았다. 좀머 씨는 석양이 지는 호수 반대편을 바라보며 멈춰 서 있었다. 그러다 한 발짝 한 발짝 호수 한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처음에 물은 좀머 씨의 무릎까지 찼다. 잠시 후 허리까지, 가슴까지 그리고 머리 꼭대기까지 물이 차 올랐다. 이윽고 호수는 잔잔해지고 좀머 씨의 밀짚모자만이 살랑이는 물결을 따라 유유히 떠내려갔다. 


'나'는 그제서야 우박이 떨어지는 그날 밤 자신을 향해 외쳤던 좀머 씨의 말이 이해 된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는 말은 '그러니 죽을 수 있게 나를 좀 그냥 놔두시오'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나는 가문비 나무 아래에서 좀머 씨가 뱉던 한숨을 떠올린다. '나'는 좀머 씨를 말릴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누나에게도, 형에게도, 경찰에게도, 심지어 가장 친한 친구 코르넬리우스 미켈에게조차 그의 죽음을 말하지 않았다. '나'는 침묵으로 그의 죽음을 지켜주었다.



쥐스킨트의 아이러니


좀머 씨가 원한 것은 영원한 침묵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를 이 세상에 묶어 두려는 다른 존재를 피해다닌다. 이것은 마치 타자에 의해 자신의 작품이(존재가) 해석되는 걸 끔찍히도 싫어하는 파트리크 쥐스킨트 떠올리게 한다. 좀머 씨는 타자와의 관계 맺기를 통해 발생하는 필연적인 오해와 불통의 과정을 피하고 싶어 끊임없이 도망다녔던 걸지도 모른다. 파트리크 쥐스킨트 자신이 언론과 대중을 피해 철저히 숨어 다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여기 쥐스킨트의 아이러니가 있다.


그는 왜 소설을 쓰는 걸까? 


그는 왜 소설을 써 대중에게 보여주는 걸까. 그 행위가 자신이 끔찍이도 싫어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나'는 '나'의 침묵이 좀머 씨에게 안식을 줬다고 생각하지만 틀렸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호수 밑바닥에 고요히 침잠해 있는 좀머 씨를 꺼내 <좀머 씨 이야기>를 썼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좀머 씨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만 기어이 소설을 써 그를 안식에서 몰아내고 완성된 소설은 다시 파트리크 쥐스킨트를 안식에서 몰아낸다. 그는 왜 이 부조리한 장난을 반복하는 걸까?


어쩌면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나'와 '좀머 씨' 사이에서 방황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 쥐스킨트는 보통 사람의 세계에 있는 '나'와 그것으로부터 영원히 침묵을 지키고 싶은 '좀머 씨'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이다. 그는 소설을 쓸 때는 '나'가 되지만 다 쓰고 나면 '좀머 씨'가 된다. 살아 있는 사람이 평생 동안 이 세계로부터 도망다니는 일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그러기 위해선 좀머 씨처럼 차가운 호수 한가운데로 발을 옮길 용기가 있어야 한다. 


9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신작을 발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쥐스킨트가 비로소 어떤 선택을 했는지 추측할 수도 있다. 나는 그가 평생 좀머 씨로 살기로 결심했길 바란다. 그 자신의 안식을 위해서라면 그의 작품 같은 건 다시는 안봐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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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는 역시 철학이다 | 기본 카테고리 2014-03-02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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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장자 & 노자

강신주 저
김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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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를 아십니까?'의 그 道가 노자의 道와 어떤 유사성이 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유사성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 용어의 선입견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도가를(道家) 얘기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떨떠름함과 기괴함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다. 물론 태초의 노장 사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니 문제가 없었을 뿐만아니라 도가는 수 많은 철학이 난무하던 제자백가, 그 중에서도 유가, 법가와 함께 시대를 대표한 사상이었으며 난세를 태평하게 할 강력한 후보 중 하나였다. 오늘날 우리는 '도'에 대해 많은 오해를 갖고 있다.


우리의 두 번째 오해는 우리가 노자와 장자를 노장으로 묶어 생각한다는 것이다(이건 비운의 역사가 사마천의 죄다). 노자의 사상 국가의 동작 방식을 철학적으로 해석해 영원불멸할 통치체제를 만드는 데 목적이 있었다면 장자는 타자와 관계를 맺고 살 수 밖에 없는 개인이 그 타자와 어떻게 해야 진정한 소통이 가능한지를 설명한 소통의 철학자였다. 노자와 장자는 근본적으로 다른 철학자였던 것이다.





장자 철학의 핵심 테마 '소통'


구성된 마음을(成心) 따라 그것을 스승으로 삼는다면(기준으로 삼는다면), 그 누군들 스승이 없겠는가? 어찌 변화를 알아 마음으로 스스로 판단하는 자에게만 구성된 마음이 있겠는가? 우매한 보통 사람에게도 이런 사람과 마찬가지로 구성된 마음이 있다. 아직 마음에서 구성된 것이 없는데도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마치 '오늘 월나라에 갔는데, 어제 도착하였다'는 궤변같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다(p. 30~31).


성심이란 이미 구성된 마음을 일컫는다. 그렇다면 구성된 마음이란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선입견이다. 선입견이란 어느 문맥에서 사용되든 뭇매를 맞기 쉬운 부정적 단어지만 사실 선입견 없이 우리의 자의식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어떻게 판단하며 살아가는가? 나의 판단과 행위의 축적은 곧 '나'라는 존재를 만든다. 선입견은 나라는 존재가 발현될 수 있는 최초의 원인인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선입견을 만들어 나간다. 선입견은 타자에 대한 판단 결과이기도 하지만 한편 사회 규범과 예의 범절이 내면화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어른을 만났을 때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며 또 조직 사회에서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한 나름의 생각이 모두 선입견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선입견은 특정 사회에서 정상적인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문제는 이것이 유유상종이라는 특유의 관계 맺기를 통해 고착화된다는 점이며 이것이 새로운 타자를 만났을 때 심각한 소통의 벽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여기 연애를 시작한 여자가 있다. 이 여자는 데이트를 위해선 남자가 반드시 차를 가지고 자신의 집으로 데리러 와야하며 모든 데이트 비용은 남자가 내야한다는 생각을 가진 여자다. 하지만 연애의 환상은 언제나 정반대의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서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여자는 자기에게 그런 대접을 해주지 않는 남자를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여자는 자신의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 주변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확인하는 데 안타깝게도 인간은 유유상종, 여자는 자신의 선입견이 보편타당함을 다시 한 번 확신한다. 이제 여자는 이별을 선언하고 소통은 실패한다. 


장자는 이렇듯 '특정한 성심을 표준으로 삼는 고착된 자의식'을 비판하며 유동적인 자의식 즉 '허심(虛心)'을 강조했다. 허심은 자신이 기존에 구성해온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에게 있어 커다란 충격이자 고통이다. 그것은 '나'를 부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소통의 가능성은 바로 그 고통의 순간에서 나온다. 


소통이란 나의 성심을 일부 수정 보완하며 타자에 맞춰 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똑똑한 이기주의자들이 삶에 대처하는 전략적 비지니스일 뿐이다. 진정한 소통은 확실히 대범하다. 그것은 나 자신을 지우는 고통의 순간을 통해 타자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 상태에서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달라'는 멜로 드라마 영원불멸의 테마가 사실은 장자의 철학이었던 것이다.


소통의 핵심은 타자와 더불어 끊임없이 변화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소통의 극의에 달한 사람은 깨끗하게 닦인 거울 같을 것이다. 거울은 미인이 보면 미인의 모습을 비추고 추녀가 보면 추녀의 모습을 비춘다. 거울은 추녀가 봤을 때 미인의 모습을 함께 비추며 추녀에게 미녀의 관점을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성심이 타자에게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한다.



<명경지수>, 정창균



노자 철학의 핵심 테마 '착취해야만 비로소 나눠줄 수 있다'


꽃과 나무를 벗삼아 무위자연, 욕심 없이 살아가는 게 노자 철학의 핵심이라 배워왔던 우리에게 그 사상의 진면목을 바라보는 건 마치 곰돌이 푸와 야생곰 사이에서 느꼈을 인지부조화의 충격과도 같을 것이다.


노자는 샌더스 대령 같은(KFC 앞에 서 있는 그 남자) 호호 할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는 난세 중의 난세, 전국 시대에 활동한 사상가였다. 천하를 얻을 수 있는 필살의 방법으로 자신의 철학을 전개한 것이다. 이런 철학이 어떻게 꽃과 나무만을 벗삼을 수 있을까? 노자의 철학은 천하를 얻는 것을 넘어 그것을 영속화 하는 법을 고민했다는 점에서 그 사상의 고유성이 있다. 남들보다 한 술 더 뜬 셈이다.


백성이 굶주리는 이유는 통치자가 세금을 많이 거두기 때문이다. (중략) 백성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저항하는 것은) 통치자가 지나치게 자신의 삶을 충족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p.83).


이 말은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국가가 작동되는 방식의 정수를 설명한다. 국가가 지속되기 위해선 백성들로부터 거둬들이는 세금을 백성들을 위해 써야 한다는 점이다. 백성이 세금을 내면 국가는 농업 기술을 개발해 보급하고 도로, 관개 시설 등 인프라를 건설하며 군대를 만들어 다른 나라의 약탈을 막는다. 이처럼 국가와 백성 사이에는 교환 관계가 성립된다. 내가 세금을 내면 국가도 뭔가를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이러한 교환 관계가 무너졌을 때 국가가 멸망에 이를 수 밖에 없음을 무수히 증언함으로써 노자의 통찰을 밝혀준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노자 철학의 근본적 한계가 있다. 위 말을 곱씹어 보면 노자가 이미 국가의 수탈을 당연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노자에게 있어 수탈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것을 얼마나 잘 하느냐가 문제였던 것이다.



<볼가강에서 배를 끄는 농노들>, 일리야 레핀



세금을 거두는 것은 따지고보면 국가의 수탈 행위다. 그것은 이 제도가 생긴지 수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우리가 세금을 낼 때 마치 도둑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느낌만의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국가가 당신에게 나눠주는 것은 모두 당신으로부터 빼앗은 것이다. 그리고 나눠주는 것은 결코 빼앗은 것보다 클 수가 없다! 모든 백성이 이 사실에 눈을 뜨게 되면 통치의 지속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러므로 노자는 수탈을 수탈처럼 보이지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 통치자가 취해야 할 전략이자 반드시 갖춰야할 덕목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그 유명한 무위의 통치가 등장한다.


가장 좋은 것은 백성이 통치자가 있다는 것만을 아는 것이고, 그 다음은 통치자를 가깝게 여기고 칭찬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통치자를 두려워하는 것이고, 가장 나쁜 것은 통치자를 모욕하는 것이다. (중략) 성인의 말 아낌이여. 그는 공을 이루고 일을 완수하였지만 백성은 모두 자신이 저절로 그러하였다고 말한다(p. 108).


그렇다. 가장 좋은 통치자는 그가 무엇을 하는지 국민들이 알 수 없는 통치자다. 이것은 빼앗고 나눠주는 교환 관계가(통치자의 행위가) 백성의 삶에 깊숙히 파고들어 아예 인지조차 못하는 상황이다. 좋은 통치자는 빼앗되 그것이 빼앗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한다. 또 베풀 때는 그것이 백성들로부터 빼앗은 걸 되돌려 주는 것 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한다. 백성이 죽을 때까지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통치자는 숨기고 숨겨야 한다. 


백성이 수탈을 수탈로 받아들이지 않고(無爲, 무위) 자발적으로 복종할 때(自然, 자연) 혁명의 가능성은 제로가 되고 통치자의 지배는 영원해 진다. 무위자연(無爲自然)에는 이처럼 간교한 통치자의 음모가 숨어 있다.



왼쪽부터 노자, 장자



그리고 지금, 노자와 장자의 철학


최근 노자의 철학은 근대 사회가 몰고온 인간성, 자연의 파괴에 맞설 대안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 얼마나 심각한 오해인가? 노자의 철학은 지배-피지배 구조가 이미 고착된 세계를 더욱 견고히 하기 위한 사상이지 변혁과 반전을 위한 사상이 아니다. 노자의 무욕(無欲)이 인간의 욕망을 근간으로 자행되는 환경 파괴를 막을 수 있다는 생각에도 무리가 있다. 우리는 욕망의 근원을 더 철저히 파헤쳐야 한다. 욕망은 과연 인간의 내부로부터 자발적으로 생성되는가? 오히려 현대의 자본주의가 없던 욕망을 생산하고 그것을 관리함으로써 인간을 부추기는 게 아닐까?


반면 장자의 철학은 계층, 종교, 정치 등 각종 이해집단이 격렬하게 대립하는 현대 사회에 '소통'이라는 근본적 해결책을 던져준다. 그것을 실행하느냐 마느냐가 모두 우리에게 달린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에필로그


한 가지 우려되는 바가 있어 덧붙이자면, 여기 나오는 장자, 노자에 대한 해석은 저자 강신주의 생각이자 그의 책을 읽은 나의 생각이다. 이 생각에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다소 과장된 건 아닌지는 여러분 스스로 여러분 자신의 지적 여정을 통해 밝혀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강신주가 아직 유명해지기 전에 쓴 책이다. 그는 확실히 말보다 글이 좋은 사람이다. 최근에 들어 그를 주목한 사람이라면 그의 글보다 말에 매료됐겠지만 말이다. 강신주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그의 책을 읽는 것이 좋다. 더 좋은 방법은 그의 철학책을 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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