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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에 깃든 마력 | 기본 카테고리 2015-11-30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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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첫 문장 못 쓰는 남자

베르나르 키리니 저/윤미연 역
문학동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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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라는 이름엔 뭔가 특별한 힘이 깃든 것 같다. 세상에 없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힘. 금가루를 뿌리며 날아다니는 단어의 요정들을 잡아 정교하고 환상적인 세계를 구축하는 힘.


아마도 보르헤스적이라는 말이 베르나르 키리니를 설명하는 가장 쉬운 말일 것이다. 하나이자 모든 것인 궁극의 실체,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야기, 책속의 책,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 갑자기 끝나는 결말, 파렴치한 사기지만 동시에 눈이 부실정도로 매혹적인 거짓말, 아주 유치하게 말하면 무한한 상상력. 이것들이 바로 보르헤스와 베르나르 키리니를 연결하는 스타일이다.


또 한 가지 두 사람의 공통점을 찾으라면 분량이다. 우리 나라에 소개된 키리니의 작품은 총 두 권으로 보이며 전부 단편집이다. 아시다시피 보르헤스는 평생 단편만을 썼다. 세계를 알렙이라는 작은 유리 구슬에 넣었던 사람이라 긴 글은 좋아하지 않는다. 압축된 상상력이 대기를 뚫고 세상에 내려오는 순간 찰나의 섬광을 그리며 사라진다. 사라졌기에 오히려 강렬히 남는 여운과 떨림. 이것이 바로 두 사람의 이야기가 가진 매력이다.


차이가 있다면 베르나르 키리니 쪽이 덜 난해하다. 표범의 얼룩에서 신의 메시지를 읽으려 한 보르헤스다. 때때로 그는 고행자나 수도승이 되어 기꺼이 고립과 감금을 받아들이지만 키리니는 빳빳히 다려진 양복에 중절모를 쓰고 사람들로 빽빽한 도시의 거리를 걷는다. 1899년에 태어난 보르헤스가 오히려 미래적이라면 베르나르 키리니는 현대적이다.


이 소설집의 가장 위대한 점은 이야기들에서 삼류 잡지의 믿거나 말거나 코너처럼 싸구려 흥미가 느껴지는 동시에 아주 거대한 철학, 얼핏 비논리로 보이나 사실은 딱딱하게 굳은 관념을 깨부수는 반전의 논리가 숨어있다는 점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당신의 뇌는 삐걱거리면 회전할 것이다. 딛고 있던 땅이 뜩! 사라지는 것처럼 갑작스레 끝나는 이야기에 추락한 뇌가 고통을 받고 움직임을 멈출 수도 있다. 하지만 최후의 한 장을 넘기고 나면 의식의 깊숙한 곳, 수 십 년 간 활동을 하지 않았던 생각의 논리들이 저마다 기지개를 켜며 일어날 것이다. 굳었던 근육이 말랑말랑 풀리는 것만큼 상쾌한 일은 없다.


설명하려는 것이 너무 추상적이라 쉽게 정의내릴 수 없는 경우, 끈질기게 그것을 정의하려기 보다는 그 대상이 할 수 있는 것, 혹은 만들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게 더 효과적인 설명이 될 때가 있다. 나는 <첫 문장 못 쓰는 남자>를 읽고 아래의 이야기들을 구상해 냈다.



거대한 탑


늙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죽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세계의 중심에 우뚝 솟은 탑을 오른다. 탑의 높이는 가늠할 수 조차 없다. 어느 날 한 소년이 탑에서 떨어진다. 소년은 공포에 눈물을 흘리지만 곧 그친다. 하루를 꼬박 떨어졌는데도 지상에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소년은 탑에서 수시로 떨어져 내리는 빵과 잼과 고기와 밥을 먹으며 살아간다. 어느덧 소년은 남자가 되고 고개를 돌렸을 때 자신과 마찬가지로 추락 중인 한 여자를 만난다. 남자는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두 사람은 그렇게 평생을 추락하며 산다. 어느 날 눈을 떴을 때 남자는 자신에게 더 이상 살아갈 힘이 없을 느낀다. 그는 여자의 얼굴에 가득한 주름을 본다. 여자도 남자의 몸에 깃든 늙음을 본다.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눈을 감는다. 그러자 추락이 멈추고 두 사람은 영원으로 돌아간다.



복수


젊은 시절을 온통 문학에 바친 남자가 있다. 남자는 노력했으나 문학은 결국 그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는 문학에 청춘을 바친 대가로 늙음을 얻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던 남자는 거지가 되어 십 년을 방황한다. 겨울비가 내리는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쓰레기 통에서 공책과 연필을 발견한다. 그리고는 백 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글을 쓴다. 글이 완성됐을 때 남자는 이것이 문학의 세계를 한 차원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할 대작이라는 것을 직감한다. 그 순간 남자는 공책을 쓰레기 통에 쳐박고 다시 거지로 돌아간다.



거래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연애에서도 실패를 거듭하던 남자가 어느 날 우연히 악마를 만난다. 남자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성공을 사려 한다. 그러자 악마는 남자의 영혼이 너무 순수해 가치가 없으니 나쁜 짓을 해서 더럽혀 오라고 요청한다. 그 날 이후 남자는 친구를 배신하고 직장 동료의 아이디어를 훔치고 상사를 음해한다. 남자는 승진을 거듭하고 돈다발을 손에 쥔다. 예쁜 여자와 결혼한다. 등을 돌렸던 친구들이 남자의 영향력을 보고 돌아온다. 그러자 남자는 더 이상 악마를 만나 영혼을 팔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한다.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텐가? 이야기는 작가에서 독자로, 그리고 다시 작가에게 돌아간다. 그리고는 다시 독자에게, 다시 작가에게 돌아간다. 이야기는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이야기의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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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가 쓴 스파이 소설 | 기본 카테고리 2015-11-23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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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존 르카레 저/김석희 역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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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르 카레는 1931년 영국 도싯 주의 항구 도시 풀에서 태어났다. 베른 대학과 옥스퍼드에서 문학과 어학을 수학한 뒤 1956년 졸업, 이튼 칼리지에서 2년 간 독일어를 가르쳤다.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직업 사기꾼이었는데 대다수의 평범한 사기꾼들과는 달리 자기 아이를 내깔려두거나 하지 않았다. 무려 300억을 빚지고 파산한 빈털터리였음에도 아버지는 아들을 명문 학교에 보냈다. 아들을 끔찍이 사랑해서가 아니다. 졸업 후 그가 가질 인맥과 배경을 사기에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본명 데이비드 존 무어 콘웰. 이 남자의 학창 시절이 어땠을지 상상이 되는가?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 자신과 관계를 맺으려는 사람들에게 자기 정체에 깊숙히 뿌리내린 아버지의 야망을 숨겨야했다. 동시에 그는 이 야망을 조용히 뽑아 뿌리를 말리는, 그러니까 겉으로는 아버지의 충실한 심복인양 하지만 사실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 자신과 관계를 맺으려는 사람들을 진실되게 대하려는 사나이이가 되야만 했다.


사나이는 1961년 부터 영국 외무부에 근무하면서 소설을 썼는데 훗날 이 외무부가 영국의 정보부 였음이 밝혀진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왜 그의 소설이 이토록 리얼했는지를 깨닫는다. 그러나 그는 스파이였기 때문에 스파이 소설을 잘 썼던 게 아니다. 그 보다 더 강한 이유가 존 르 카레의 삶에 씌여 있다. 앞서 언급했던 학창 시절을 돌아보라. 그는 아주 어릴 적 부터 자신의 정체를 숨겨야했던 스파이, 그 자체였던 것이다.


소설을 쓰기 시작한 이래로 사내는 인세만을 입금 받는 통장을 하나 만들었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를 쓴 뒤 그는 은행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통장의 잔고가 얼마 이상이 되면 연락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1963년 존 르 카레는 자신이 부탁했던 은행 직원으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그는 전화를 끊고 책상에서 일어나 외무부 건물을 나간다. 잠시 서서 주변을 둘러보는 일, 그러니까 감상에 젖어 촉촉해진 눈으로 자신의 사무실과 붉은 벽돌이 멋드러진 건물의 외벽과 쇠창살이 튀어나온 담벼락을 쓰다듬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스파이는 감상에 젖지 않기 때문에? 그 이유는 존 르 카레가 자신의 소설에서 서커스(영국 정보부)를 어떻게 묘사하는 지 보면 알 수 있다. 첩보의 세계에서 정당과 정의는 과정이 아니라 결과에만 허용된다. 이데올로기 싸움은 인간을 위한 투쟁이 아니다. 권력 깊숙히 파고든 고위 관료들에겐 그저 비지니스 모델에 지나지 않는다.


2005년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를 펴낸 열린책들은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를 펴낸 열린책들과 같은 출판사다. 2005년에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를 읽은 사람이라면, 두 출판사가 같은 출판사라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해, 그 때 그 소설을 읽으며 머리 속에 옮은 질병, 즉 난독증이 <죽은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에게도 옮겨 붙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 쉽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어쩐 일인지 2005년의 열린책들은 2009년의(세계 문학판 1쇄를 찍은 해) 열린책들과 사뭇 다르다. 강산이 변하기엔 한참 모자란 시간이었음에도 이 회사는 놀라운 변화를 보여준다.


왜 자꾸 딴 얘기를 하냐고 화를 낼 수도 있다. 우리는 분명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에 대해 얘기하려고 이 자리에 모인 건데 말이다. 그런데 이런 얘기는 이 책을 읽을까 말까, 살까 말까, 빌려볼까 돌려볼까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믿기에 행해지는 얘기들이다. 그런 이유라면, 나는 이 책에 대해 내가 느낀 것과는 정반대로 얘기하고 싶다. 


이 책은 정말 쓰레기다. 백 번, 천 번을 읽어도 재미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을 수 없다. 냉전 시대의 첩보는 낡고 허름하다. 너덜너덜한 누더기들이 문장을 넘어 책 밖으로 쏟아져 내린다. 할 수만 있다면 별 0개를 주고 싶지만 인터페이스가 허락하지 않는다. 만약 당신에게 8,820원이 있고 그 돈으로 엄청나게 쓸모 없는 짓을 하고 싶은데 그렇다고 그 돈으로 '똥'을 사고 싶지는 않다면 이 책을 사서 읽어라. 나는 그 누구에게도 이 책을 추천하고 싶지 않다. 정말로, 정말로,


나 혼자만 읽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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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과 직업 탐정 | 기본 카테고리 2015-11-16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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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몰타의 매

대실 해밋 저/고정아 역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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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이 소설이 재미 없지는 않을 겁니다.


대실 해밋의 <몰타의 매>를 드디어 읽었다. 좋아하는 열린책들 세계 문학 전집 양장본으로. 열린책들에 감사. 양장본에 감사.


<몰타의 매>는 나를 매료시킬 수 있는 것들로 가득한 소설이다. 우선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 하드보일드라면 그 대가라 불리는 헤밍웨이를 제외하고는 무조건 OK인 나다. 나에게 하드보일드는 일종의 신앙과 같다. 나 외에 다른 문학을 섬기지 말라? 말씀은 믿음이 부족한 사람에게나 필요한 법이다.


하드보일드하면서 탐정소설이다. 이 말은 나에게 문학과 장르 소설의 경계에 걸쳐 있다는 말로 들린다. 경계는 얼마나 매혹적인가! 그 곳엔 두 가지 성질이 매끄럽게 섞여 있다. 문장의 아름다움 혹은 주제의 진정성 거기에 이야기의 재미가 붙는다. 순수 문학이 화려하게 피는 꽃이라면 경계에 선 문학은 그 꽃이 진 자리에 열매를 맺는 문학이다. 터져나온 과육이 뺨으로 턱으로 가슴으로 줄줄 흐른다. 지저분하고 천박해 보이지만, 그 맛을 모르고 논하지 마오.


<몰타의 매>는 아가사 크리스티와 그녀의 추종자들이 뱉어내는 복잡한 트릭이 없다. 있는대로 플롯을 꼰 뒤 온갖 잡다한, 있을 법하지 않은, 부자연스러운 트릭으로 장식하는 소설이 아니다. 범죄는 리얼하고 묵직하다. 미국 최대의 탐정 사무소에서 실제 탐정으로 일해 본 경력이 도움이 됐을 것이다.


<몰타의 매>는 탐정 소설이지 추리 소설이 아니다. 탐정은 행동하지만 추리는 생각을 한다. 탐정은 움직이지만 추리는 빙빙 맴돌 뿐이다. 탐정은 추리와는 달리 밀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방팔방 돌아다니고 여기저기 쑤셔 쥐새끼를 밖으로 끄집어 낸다. 그리고는 도망치는 쥐새끼를 온 힘을 다해 쫓는다. 이 소설엔 생각대신 행동이 있다. 지루할 새가 없다.


샘 스페이드. 유쾌한 금발의 악마 같은 남자. 그는 하드보일드를 갑옷으로 무장한 남자다. 그는 선하다고도 악하다고도 볼 수 없다. 그를 설명하는 단어는 오로지 프로페셔널, 이거 하나 뿐이다. 직업 탐정의 세계에선 이거 말고는 아무 것도 필요 없다.


유명한 탐정은 어느 순간 '범인은 바로 너야'하는 쇼맨쉽을 발휘해야 하지만 직업 탐정은 범인을 본 순간 주먹을 날려 턱을 부숴버린다.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면? 마주 앉아 협상을 벌인다. 정의의 사도로 보이고 싶은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다. 취미로 바이올린을 켜고 독서를 하는 우아한 인간이 아니다. 우선 살아야 한다. 살아서 연명해야 한다. 휴식은 담배 한 개비와 위스키로 충분하다.


샘 스페이드는 하드보일드 최대의 적인 '사랑' 앞에서도 자기 삶의 태도를 굽히지 않는다. 브리지드 오쇼네시는 온갖 거짓말로 온갖 사건을 일으킨 뒤 샘 스페이드를 엮어 소동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결국 그에게 모든 음모가 탄로나고 만다. 여자는 샘 스페이드와 나눴던 사랑을 무기로 그를 설득하려 한다.


"하지만... 하지만 샘, 어떻게 그런 일을!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의미였는데 그러면 안 돼요."

"왜 안 되는 거죠?"

"그럼 당신은 나를 가지고 논 거예요? 나를 좋아하는 척한 거예요? (중략) 나를... 나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사랑하지 않아요?"

"아마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죠?" (중략)

"나는 서스비가 아니에요. 재코비도 아니고요. 당신 때문에 얼간이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p.276)


샘 스페이드. 진정한 직업 탐정. 그는 단호히 사랑을 거부했기에, 비로소 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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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고고학이 되는 날 | 기본 카테고리 2015-11-11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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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저
난다 | 2013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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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황현산은 1945년 생이다. 옛날 사람이다. 오래된 사람의 글쓰기는 이렇다.


넓디 넓은 자갈밭에 앉아 구슬을 찾듯 단어를 고른다. 골라진 단어들을 이리저리 꿰어 문장을 만든다. 만들어진 문장은 창밖에 걸린다. 하루내 말린 문장을 늦은 밤 꺼내와 색을 칠한다. 그리고는 다시 창 밖에 걸어 말린다. 쎄 했던 색깔이 차분히 가라앉아 은은한 빛을 띨 때까지, 바람과 새벽의 냄새가 배 시간과 밤의 소리가 고일 때까지, 칠하고 말리기를 반복한다. 그러기를 며칠, 까만 하늘을 밀고 들어오는 여명과 함께 하나의 글이 탄생한다.


요새는 아무도 이렇게 글을 쓰지 않는다. 아무도 이런 글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문화적으로는 영락없이 꼰대인 나는 이런 사람들이 다 죽고 사라졌을 때 우리에게 무엇이 남을지를 고민 한다. 천박한 가벼움이 사막의 모래처럼 끊임없이 날아온다. 이런 문장들이 풀과 나무가 되어 막아주지 않으면 세상은 오래지 않아 폐허가 될 것이다. 나는 평생 모래를 씹고 삼키며 살 수는 없다. 끔찍한 일이다. 그런데 나는 결국 그런 세상을 맞아야 한다. 


곧 사라질지언정 차라리 옛날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좋을 뻔 했다. 그들은 전쟁을 겪었고 힘든 삶을 살았지만 땀 흘려 오래 만드는 일을 존중했고 자유를 찾아 싸웠으며 돈을 섬기지 않았다. 그들은 천박하지 않았다. 염치가 있었다. 도리를 알았다.


언젠가 죽음은 이 옛날 사람들을 모조리 찾아가 기어이 그 이마에 칼을 찔러 넣을 것이다. 그러고나면 나는 세상을 떠나 아주 먼 곳으로 갈 것이다. 그 곳에서 옛 기억을 간직한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 찬 바람을 맞으며 궁핍하게 살아갈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먼 미래에 인류는 이렇게 떠난 사람들을 우연히 찾게 될 수도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원시 인류'라는 이름을 붙일 것이다. 그들은 오래된 인류의 유산을 찾아 기뻐하지만 우리의 말과 글을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문학은 고고학이 될 것이다. 문학은 새까만 어둠을 겹겹이 둘러 입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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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엇을 묻었냐면 | 기본 카테고리 2015-11-03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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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우리가 묻어버린 것들

앨런 에스킨스 저/강동혁 역
들녘 | 2015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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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장은 장르 소설의 무덤이다.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한다. 그건 내 취향탓도 있지만, 솔직히 책 잘못도 있다. 한 번 읽는 것도 끔찍할 만큼 엉망인 책들이 많다. 문장에 신경쓰는 작가는 거의 없다. 인기를 끄는 이유는 줄거리, 반전, 트릭 때문인데 아무래도 불감증 환자인지 나는 이런 것들을 통해서는 심장을 추동하는 흥미진진을 느끼지 못한다.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주인공이 용의자를 찾아갔다 핀치에 몰린 대목이었다. 나는 두 손을 모아 간절히 주인공이 뒈져버리길 기도했다. 지긋지긋한 장르의 공식이 깨지길 바라면서.


<우리가 묻어버린 것들>은 얼핏 <HQ 사건의 진실>과 비슷한 플롯을 지니지만 HQ보다 어설프다. 나은 점은, 길이가 짧다. 한 200페이지 정도. 대단한 미덕이다. 또 하나, 그래도 작가가 새로운 표현을 써 넣으려 애를 쓴다. '나는 머리를 가득채우고 소용돌이치다가는 저녁 어둠에 부딪쳐 조그마한 물결로 산산이 부서지는 불길한 기분에 잔뜻 짓눌려 있었다' 라거나 '록우드가 저지른 죄의 얼룩이 칼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다' 라거나 '나무의 위엄을 띤 진짜 불이 생겼다' 같은 것들. 때로는 새로운 문장을 쓰겠다는 집착이 과도해 괴물이 탄생할 때도 있지만 중요한 건 노력 아닌가? 게다가 데뷔작이라고 하니까.


장르 소설을 쓴다는 건 특정 공식에 여러 변수들을 채워 넣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 필요한 캐릭터들을 만들어내고 이 캐릭터들이 관계할 수 있는 사건을 만들고 막힌 흐름을 한 방에 뚫어줄 소품을 복선으로 흩어 놓는다. 좋은 소설이라면 이 모든 게 자연스럽게 존재해 그 존재의 목적을 눈치채지 못해야 한다.


존재의 목적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렇다. 실세계의 캐릭터(우리들)는 어떤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사르트르 식으로 말하자면 대자적 존재. 우리 인간은 어떠한 경우라도, 결코, 무언가의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소설 속의 존재는 다르다. 그들은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기 위해서, 또는 범인이 되기 위해서 존재한다. 만일 셜록 홈즈가 코난 도일의 소설에서 범죄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상해보라. 홈즈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는 당장 소설의 세계에서 쫓겨날 것이다.


정리하면, 좋은 소설은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존재가 자신의 목적을 감쪽같이 숨긴 채 음흉하게 잠복해 있는 소설이다. 장르 소설은 이런 일을 잘 하지 못한다. 특히 현실 세계를 배경으로 할 때 그 조악함은 앞니에 낀 고추가루 처럼 끔찍하다. 그런데도 이런 소설이 살아남는 이유는 독자들이 이런 조악함을 눈치채지 못하거나, 장르 소설은 원래 그런 거라고 간주하거나, 부분의 매력에 빠져 전체적인 완성도는 무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달고 맵기만 한 짬뽕을 냠냠 맛있게 먹듯이. 난 이런 류의 '영화'는 참 재밌게 보는 편인데 유감스럽게도 책에서만큼은 셋 중 무엇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런 소설을 읽을 때마다 항상 괴롭다. 


나는 또 한 번 내 책장에 무덤을 파야했다. 그걸 보고 <우리가 묻어버린 것들>이 묻는다. 당신이 묻을 게 뭐냐고. 나는 답한다. 


바로 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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