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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도쿄기담집

무라카미 하루키 저/양윤옥 역
비채 | 2014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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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파니의 작가답게 하루키의 소설엔 갑작스런 차원의 전환이 자주 일어난다. 정체 불명의 도인에게 도움을 받거나 색채가 없는 인간과 만나는 건 일도 아니다. 어느 날 하늘엔 두 개의 달이 뜨고, 공원 벤치에 앉은 샌더스 대령이 말을 걸어오기도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런 하루키의 이야기를 가볍다거나, 키치적이라거나, 유치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하루키만큼 이야기의 맛을 잘 아는 작가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전 세계를 통 털어도 그렇다. 만약 그가 정말로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면 순수 문학계에 있어선 획기적 전환의 계기가 될 것이다. 어쩌면 천상에서 군림하던 예술을 땅 위로 끌어내리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상태가 오히려 이야기의 본질에 더 가까운 게 아닐까 한다. 이야기는 본래 대중의 것이었다. 재고 자시고 할 게 없는 것. 그랬던 게 하늘 높이 떠올라 쨍쨍한 빛을 쏘아대고 있으니 누가 그걸 올려다 보겠는가. 사람들이 바라보는 건 정오의 태양이 아니라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오렌지 빛 석양이다. 문학이 사라져가는 이 세상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야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소설가들이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재미 있는 소설을 읽고 싶을 땐 언제나 하루키의 책을 집는다. 심지어 이 책의 제목은 <도쿄 기담집>. 아예 이야기를 전면에 표방하고 있지 않은가. 책장을 펼치는 순간 딱 감이 왔다. 탄산수처럼 경쾌한 문장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지나간다. 그런데 이건 이상한 일이다. 5편의 단편 소설 모두 아주 커다란 상실에 대해 얘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감정은 최대한 배제되어 있다. 사람들은 쉽게 울거나 쉽게 절망하지 않는다. 소설은 상실에 대한 공감을 미끼로 억지 눈물을 짜내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하루키의 하드보일드다. 하루키는 상실에 대한 반응으로 눈물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건 너무 손 쉽고, 또 실제적이지도 않다. 소설 속 인물들은 슬퍼한다기 보다는 당황한 듯 보인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아들의 죽음, 사라진 이름, 가족과의 단절. 그들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맞아본 상실인 것이다. 위로의 목소리는 공허한 가슴을 울릴 뿐이다. 아무 생각 없이 허공을 응시하는데도 어디선가 그치지 않고 마음의 파문이 인다. 하루키는 이러한 상태에 직면한 사람들이 속절없이 다가오는 하루 하루를 어떻게 소화시켜 나가는지를 그려보인다. 그 정체 불명의 감정 덩어리를 조금씩 조금씩 잘라 반복되는 일상에 섞어 넣는 모습을.


하나레이 해변의 사치는 이러한 모습의 정수를 보여 준다. 사치는 몇 년 전 남편을 여의고 외동 아들과 살고 있는 평범한 중년 여성이다. 그런데 그 아들이 하와이의 하나레이 해변에서 서핑 도중 상어의 습격을 받아 죽어버린다. 경찰의 시체 안치소에서 다리 하나가 잘린 아들의 얼굴을 확인한 사치는 아들을 화장한 뒤 그가 머물던 하나레이 해변으로 와, 그곳에 눌러 앉아 버린다. 도대체 무엇을 확인하기 위해 그녀는 아들을 집어 삼킨 해변을 찾아온 것일까? 몇일 전 서퍼 하나가 상어에 습격 당해 죽었다는 걸 알면서도 다른 서퍼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파도를 탄다. 그들에게 아들의 죽음은 아무런 교훈이 되지 못하는 걸까? 어쩌면 그 위험을 능가할 뭔가가 저 바다 속에 감춰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저 모래 위에 앉아 아들을 집어 삼킨 바다와 끊임없이 파도를 향해 나아가는 서퍼들을 바라본다. 부서진 파도가 모래와 섞여 하나가 되듯이, 일상에 흡수된 슬픔은 바다에 부딪혀 잘게 쪼개진 햇빛처럼 흩어져 간다. 


취향이야 사람마다 다를테지만 나는 하루키의 책을 들고 후회해 본 적이 거의 없다(에세이는 논외로 하자). 특히 대단한 문학적 야심없이 써내려간 소설들은 더더욱 그렇다. 온 힘을 다해 장편을 쏟아낸 뒤 경쾌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듯 써낸 단편집. 나에겐 오히려 이런 소설들이 보물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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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래를 예측하는 유일한 방법은 나의 오늘을 보는 것이다 | 기본 카테고리 2017-06-18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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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데뷔의 순간

한국영화감독조합 저/주성철 편
푸른숲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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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영화계를 기웃거렸던 적이 있다. 대학 시절, 연출자가 되어 보겠다고 시나리오를 쓰고 단편 영화를 찍고 독립 영화의 스텝을 했었다. 그걸로 부산 영화제도 가봤다. 영화는 내가 사랑하고 또 잘할 수 있는 것들로 가득했다. 타협하지 않는 예술혼, 숨 막힐 듯한 고집, 위로 없는 외길, 그리고 이야기. 아무튼 영화는 그 시절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시간이 나면 무조건 도서관 DVD 실에 가서 영화를 봤다. 당시 우리 학교는 드물게도 어마어마한 DVD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허접한 상업 영화에서 찾기 힘든 고전 예술 영화까지 없는 게 없었다. 나는 매일 한 편 이상 영화를 보고, 시나리오를 쓰고, 하루내 촬영한 영상을 밤새 편집했다. 돌이켜보면 그때만큼 뭔가를 열정적으로 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그야말로 하얗게 불태우던 시절이었다.


나는 이제 영화를 만드는 대신 글을 쓴다. 영화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들로 가득했지만 아주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협업. 아무리 애를 써도 혼자서 영화를 만들 수는 없다. 그 부대낌이 지긋지긋했고, 눈으로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는 도마들에게 내 이야기를 끊임없이 설명해야 한다는 게 끔찍했다. 글은 누가 뭐래도 혼자 쓸 수 있으니, 나에겐 완벽한 출구였던 셈이다.


그래도 나는 아직 영화를 사랑한다. 하루에 한 편은 아니지만 한 번은 꼭 본다. 좋은 영화를 봤을 때 느끼는 전율은 아직도 예민했던 이십대 못지 않다. 그런 걸 보고 나면 몸이 떨려 잠을 못 잘 정도니까. 도대체 어떻게 이런 걸 만들었을까 속으로 되뇌고, 되뇌고, 또 되뇌면서.


<데뷔의 순간>은 그 때 그 시절 철없는 이십대의 나를 다시 살려낸다. 시나리오를 위한 고군분투, 바람 잘 날 없는 현장, 스텝과 배우들에게 무시당할까봐 쓸데 없는 기 싸움을 벌이는 긴장감. 사람은 다 똑같구나, 위대하든 위대하지 않든. 그런 생각이 들며 글 한 줄 한 줄에 조용히 빠져들게 된다.


이 위대한 감독들이 데뷔의 순간까지, 심지어 큰 성공 이후에도 별반 다를 게 없는 지리멸렬에 빠져 꾸역 꾸역 실패와 좌절을 삼키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욕구불만과 분노가 오롯이 드러난 내 마음이 아무런 여과없이 그들의 삶에 투영되는 걸 느낄 수 있다. 건방지게도 나는 그 순간 그들과 하나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옥자>의 봉준호 감독이 <플란다스의 개>라는 영화로 데뷔한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천재라 불리는 그의 데뷔작은 대단한 실패 속에서 막을 내렸다. 그는 <베테랑>의 류승완 감독과 매우 친했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해 개봉한 류감독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초저예산에 짜투리 필름을 구걸해 만든 영화였음에도 예산 대비 어마어마한 흥행 실적과 한국의 타란티노의 탄생이라는 찬사까지 거머쥐었다. 봉감독은 이 대조적 결과에 우울증에 빠졌다고 한다. 온갖 생각이 다 들면서, 자신의 진로를 심각하게 고민해보는 시간이 됐다고 한다. 그는 그 암울한 시간을 3년이나 더 보내고 나서야 <살인의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


남들의 실패담이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이유는 그들이 결국 해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실패도 언젠가는 승리로 바뀌리라는 걸 믿으며 위로를 얻는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언젠가라는 말은 그게 3년인지, 4년인지 아니면 20년인지, 30년인지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아마 우리 중 99%는 오늘 희망에 차 잠에 들었더라도 당장 내일 아침에 똑같은 좌절에 빠져 우울한 날을 보낼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까? 그 더러운 우울이 몸에 스며들기 전에 미친듯이 몸을 털고 달리는 수 밖에 없다. 끝날 때 까진 끝난 게 아니라는 말은 쓰러지고, 깨지고, 터지더라도 계속해서 달리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우리의 미래를 예측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오늘을 보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나는 오늘도 영화를 만든다. 나는 오늘도 운동을 한다. 오늘 우리가 이 말을 하지 못하면 미래 어딘가에 잠복하고 있는 언젠가라는 놈도 자신의 등장일을 하루 더 늦춘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공에 대해 기억해야 할 유일한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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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007 카지노 로얄

이언 플레밍 저/홍성영 역
뿔(웅진문학에디션) | 2011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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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플레밍의 007 원작을 처음으로 읽어봤다. 깜짝 놀랐다. 숨막히는 플롯, 치밀한 심리묘사, 매력적인 캐릭터, 그 무엇도 없었기 때문이다. 읽으면서 부러웠던 건 배경 설명을 덜 해도 괜찮다는 것이었다. 시리즈물은 이런 게 좋구나! 전작을 통해 이미 캐릭터도 잡혀 있고 설정도 끝났으니 그냥 하고 싶은 얘기만 하면 되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이 소설이 007 시리즈의 첫 작품이란 말을 들었다. 정말로 깜짝 놀랐다.


더블오세븐 제임스 본드는 이미 모든 사람이 자신을 알고 있는 것처럼 당당히 등장한다. 가타부타 말도 없다. 나 007이야, 나 몰라? 물론 나는 그를 잘 안다. 이미 수 많은 영화를 통해 그를 접해왔으니까. 그의 외모, 성격, 말투, 그가 끄는 자동차까지도 상세히 떠올릴 수 있다. 그 이미지를 이야기의 빈 곳에 채워 넣는 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첩보원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그의 행동과 MI6의 작전 계획을 보고 있으니 이 시리즈가 원래부터 그렇게 정교한 이야기는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때는 바야흐로 냉전 시대. MI6, CIA 그리고 프랑스의 첩보부는 프랑스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노조를 파괴하기 위해 합동 작전을 벌인다. 요즘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소설이라 비난 받고 각종 진보 매체에서 잡아 먹을 듯 으르렁 거릴 게 분명하지만 당시에는 비공산 국가의 노동 조합이 공산 국가의 자금 지원을 받아 운영되는 것 따위는 충분히 상상할만 했고 또 실제로도 있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더블오세븐, 살인 면허를 지닌(실제 MI6에 존재하는 코드 네임이라고 한다. 살인을 저질러도 국가가 책임을 진다는 권한도 마찬가지) 제임스 본드는 이 노동 조합을 깨부수기 위해 카지노로 향한다!


우루루루루루루루루레이~ 캐지노! 이 정도면 첩보원도 할 만한 직업이다. 호텔 스위트 룸에 방을 얻고 고급 애스턴 빌라 차를 몰아 매일 밤 카지노를 들른다. 돈 많은 사업가로 신분을 위장했으니 적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돈 걱정도 없다. 그의 비용은 모두 당신의 세금으로 충당되니까. 근데 왜 카지노로 왔느냐? 노동 조합의 위원장이 여기서 큰 판을 벌일 예정이기 때문이다.


설명하자면 길어서 귀찮은데, 어쨌든 위원장은 소련에서 받은 운영 자금의 대부분을 신변 잡기에 탕진했고 그걸 다시 채워 넣지 않으면 숙청 당할 게 뻔했기 때문에 마지막 남은 자금을 긁어 모아 카지노에서 한 몫을 챙길 생각을 한다. 더 웃긴 건 뭔지 아는가? MI6, CIA, 프랑스 정보부, 세계를 호령하는 이 강대국의 첩보부가 최고의 요원 더블오세븐을 파견해 위원장과 목숨을 건 카드 게임을 벌여 그의 돈을 다 따오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우와!


오늘날 우리가 자유 국가, 그리고 온갖 사치와 향락 풍요 속에서 살게 된 데는 이렇듯 뛰어난 첩보원의 완벽한 카드 실력 덕분이라는 걸 명심하자. 이후 벌어지는 일들은 스포일러가 되기도 하고 말하기 민망하기도 하니 생략하겠다. 여러분도 꼭 이 책을 읽고 내가 느꼈던 감정을 똑같이 느껴보길 바란다.


어쨌든 전설의 첩보원 더블오세븐은 생각보다 우스운 남자였다. 부풀려진 명성 때문에 여자를 홀리는 기술은 있는 것 같지만 순수하게 첩보원으로서의 능력만 따지면 냉철한 지성도, 뛰어난 신체 능력도, 철두철미한 준비성도 없는, 잘생기기만 한 허당이었다. 그러니까 본드는 일종의 로망이었던 것 같다. 냉전의 최전선에 선 고독한 남자. 가만히 있어도 여자들의 사랑을 받고 이목을 집중시키는 애스턴 빌라에(그의 직업이 첩보원이라는 걸 기억하자!) 돈 걱정 없는 삶. 게다가 마음대로 살인을 저질러도 되는 권력까지. 


다니엘 크레이그의 007 시리즈를 꽤 좋아했던 나에게 원작은 다소 생소한 경험이었다. 시간은 흐르고, 세계는 변한다. 그 변화의 흐름 속에서 더블오세븐 제임스 본드는 서서히 빛을 잃고 바짝 말라 속절 없이 떨어지는 낙엽이 되었다. 역시 나는 더블오세븐보다는 스마일리에게 더 많은 걸 배울 것 같다. 카지노 로얄은 첫 작품이니까, 수 많은 007 시리즈를 차근차근 훑어가며 점점 발전해가는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그런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을지, 지금은 전혀 확신이 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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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이 가진 궁극의 본질 | 기본 카테고리 2017-06-04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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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Super Normal

후카사와 나오토,재스퍼 모리슨 공저
안그라픽스 | 2009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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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노멀은 궁극의 본질을 의미한다. 최상의 디자인은 더 이상 더할 게 없을 때가 아니라 뺄 게 없을 때 완성된다. 불필요한 부분을 깍고 깍고 깍아내 사물의 핵심만을 온전히 담아낸 상태. 그것이 바로 슈퍼 노멀이다.


슈퍼 노멀의 시각적 단순함은 곧 사용 경험의 안락함으로도 이어진다. 군더더기 없는 외관은 물건의 사용 방법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게 해준다. 슈퍼 노멀에는 고민의 여지가 없다. 보는 순간 자연스럽게 사용이 가능하며 심지어 자신이 어떻게 그 사용법을 알게 됐는지 조차 의식하지 못한다.


우린 슈퍼 노멀의 위대함을 매일 접하고 살면서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혼란스러울 정도로 다양한 차이 속에서 홀연히 빛을 발하는 평범함의 가치를 발견하고 나면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유치하고 조잡해서 거들떠 보기도 싫어질 것이다. 슈퍼 노멀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다. 자극을 제거한 순수한 형태는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세계를 보장한다.


MUJI의 환풍기처럼 생긴 CD Player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걸 디자인한 게 바로 이 책의 저자 중 하나 후가사와 나오토다. 후가사와 나오토는 미니멀리즘의 대가 재스퍼 모리슨과 함께 자신들이 생각하는 슈퍼 노멀 제품을 골라 전시회를 열었다. 재떨이에서 잉크병, 스패너에서 펠트 속버선 까지 용도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엄선된 210점의 물건들. 이 책에는 그 중 52개의 제품이 풀컬러 사진과 함께 담겨 있다. 제품들은 쭉 훑어보면 슈퍼 노멀이 그럴듯해 보이는 말장난, 혹은 예민 예민한 디자이너들 특유의 호들갑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이건 그냥 의잔데? 이건 그냥 바구니잖아! 하지만 바로 그런 실망감이 여기 소개된 물건들이 슈퍼 노멀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슈퍼 노멀의 아름다움은(사용성과는 달리) 보는 순간 나타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세월의 흔적을 묵묵히 새겨나가는 과정에서 어느날 불현듯, 예기치 않게 발견된다.


오늘날 디자인은 단순히 차이를 만들어내는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다. 상품 사회는 끊임없이 다른 자극을 원하고 디자인은 불필요한 장식과 알맹이 없는 화려함으로 그 욕망을 충족시킨다. 범람하는 차이는 오히려 유의미한 차이를 지워 혼돈만을 낳는다. 없어져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져서 사라지는 예술처럼 말이다.


더 이상 차이에 현혹되고 싶지 않다면 우리를 둘러싼 물건의 세계를 유심히 바라보자. 거기엔 분명 당신이 못 보고 지나친 순수한 형태가 존재할 것이다. 그 형태를 기준으로 주위를 채워나가면 당신의 눈도 마음도, 평화의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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