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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내 안의 [섬]을 찾아서 | 보고 싶은 책들 2010-01-30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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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열일곱 살, <>을 만나다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다시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다른 수많은 순간들의 퇴적 속에 깊이 묻혀 있다. 다른 순간들은 그 위로 헤아릴 수 없이 지나갔지만 섬뜩할 만큼 자취도 없다. 결정적 순간이 반드시 섬광처럼 지나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유년기나 청년기 전체에 걸쳐 계속되면서 겉보기에는 더할 수 없이 평범할 뿐인 여러 해의 세월을 유별난 광채로 물들이기도 한다. 한 인간의 존재가 그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점진적일 수도 있다. 저 자신 속에 너무나도 깊이 꼭꼭 파묻혀 있어서 도무지 새벽빛이 찾아들 것 같지가 않아 보이는 어린아이들도 있다. 그래서 그들이 문득 壽衣를 밀어붙이며 나자레처럼 일어서는 것을 보면 우리는 의외라는 듯 깜짝 놀란다. 그런데 사실은 그 수의란 다름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배내옷이었던 것이다. (29, 空의 매혹)

 

그리 길지 않은 내 마흔 다섯의 삶을 결정 지은 어느 한 순간을 지금 와서 기억해내기란 쉽지 않다. 아니, 지나온 내 삶에서 그런 순간이 과연 있기나 했을까 싶다. 그러나 위 인용문에서 한 순간한 권의 책으로 고쳐 읽는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나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아주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할 수 있다. 쟝 그르니에의 <>. 그렇다면, 내 일생을 결정 지은 한 순간은 쟝 그르니에의 <>을 처음으로 읽었던 어느 가을 날 저녁일지도 모르겠다.

 

그때 나는 열일곱 살이었다. 아래쪽으로는 분출구를 찾지 못한 테스토스테론이 어쩌지 못하고 위쪽으로 치밀고 올라와서, 하룻밤 사이에 마치 제주도의 오름처럼 내 얼굴에 새로운 등고선을 만들어 내곤 했던 여드름만이 일생일대의 근심거리였던 고등학교 2학년생이었다. 불량해 보이려고 무던히도 애쓰던 선량한 친구 몇 놈과 함께 가끔씩 동네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맥주 파티를 열거나, 아니면 명동에 있는 단골 레스토랑의 어두운 조명 밑에서 뻐끔 담배를 피우곤 하던 조금 삐딱한 범생이었다.

 

<거의 30년이나 된 손때묻은 책치고는 멀쩡하다. 비닐 커버 덕택이다.>
 

헤세의 <데미안>을 일찌감치 졸업하고 까뮈의 <이방인>에게 새로이 경배를 드리고 있던 당시의 내게, 동네 서점에서 우연히 마주친 쟝 그르니에의 <>은 전혀 낯선 이름이었다. 나는 그저 이색적인 정사각형의 판형과 세련된 장정 디자인에 시선이 끌려 무심코 책을 집어 들어 뒤적거렸을 뿐이었다. 그런데 뒷표지 책 소개글에 내게는 너무나도 낯익은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이 아닌가! 바로 당시 나의 우상이었던 알베르 까뮈였다. 호기심에 가득 차서 책을 펼친 나는, 까뮈가 이 책에 바친 유려하고 열렬한 서문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이 책을 사 들고 서점을 나서고 있었다. 이렇게, 까뮈를 징검다리 삼아 나는 쟝 그르니에의 <>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까뮈는 쟝 그르니에를 스승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리고 자신의 글쓰기가 이 위대한 스승에 대한 모방으로부터 출발했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에 실린 쟝 그르니에의 산문들은 여러 면에서 까뮈의 글들과는 다르다. 둘 다 가볍고 투명한 향일성의 언어를 구사하고 있지만 그 강도와 각도에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까뮈의 글들은 바로 머리 위에서 수직으로 내려 쪼이는 정오의 강렬한 햇살인 반면, 그르니에의 글들은 막 동이 터 오르는 아침 또는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저물녘에 만나게 되는 섬세한 결이 느껴지는 부드러운 햇살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그런지 <>에 실린 쟝 그르니에의 글들에는 정오의 햇살로는 거의 드러내지 못하는 우리 삶의 그림자들이 곳곳에 나타나 있다. 이를테면, 행복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오만한 직업으로 삼고 있는 젊은 날의 까뮈(또는 내)가 미처 포착하지 못한 스러져가는 향기, 문득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환영, 덧없는 희망, 이루지 못하고 헛되이 잊혀진 꿈 등 말이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 삶에 있어서 보다 중요한 쪽은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는 쪽보다는 바로 그 반대 방향으로 슬그머니 몸을 숨기고 있는 이러한 그림자, 즉 삶의 가려진 쪽이 아닐까.

 

달은 우리에게 늘 똑 같은 한쪽 밖에는 보이는 법이 없다고 한다. 흔히들 짐작하는 것보다는 수가 많은 어떤 사람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우리는 그들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서는 다만 추리적으로밖에 알지 못하는데, 정작 단 하나 중요한 것은 그쪽이다. (74, 케르겔렌 群島)

 

이렇게 해서 나는 삶에 대해 의혹을 품게 되었다. 확신해 마지 않던 미래에 대해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말하자면, 쟝 그르니에의 <>을 읽으면서 나는 비로소 내 오랜 배내옷을 벗게 된 것이다.

 

2. 스물네 살, 섬을 찾아 떠나다

 

하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 싹이 튼 이러한 의혹과 불안에도 불구하고, 나는 좌충우돌하면서도 나름대로 무난하게 대학을 마칠 수 있었다. 가끔씩 쟝 그르니에의 <>을 읽기는 했어도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그 치열했던 80년대!), 그 안에 오래 머무르지는 못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남들처럼 직장을 얻고 이어서 바로 군대를 갔다 오고(겨우 6개월 방위) 다시 복직해서 1년 정도 고달픈 샐러리맨 생활을 경험하고 나니, 그때서야 갈증이 밀려왔다.

 

섬들을 생각할 때면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은 어디서 생기는 것일까? 난바다의 시원한 공기며 사방이 수평선으로 자유스럽게 터진 바다를 섬 말고 어디서 만날 수 있으며 육체적 황홀을 경험하고 살 수 있는 곳이 섬 말고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섬에 가면 <격리된다(isolé)> - (Ile)의 語源 자체가 그렇지 않은가? , 혹은 <혼자뿐인> 한 인간. 섬들, 혹은 <혼자씩일 뿐인> 인간들. (100, ‘復活의 섬’)

 

그래, 섬으로 가자. 어느 쪽을 바라보더라도 막히는 데 없이 하늘 끝까지 확 트인, 그래서 오히려 숨이 막히는 섬으로 가자. 그렇게 해서 간택이 된 나의 첫 여름 휴가지는 소매물도. 통영시(당시에는 충무시였다)에서 통통배를 타고 두 시간이나 더 가야 나오는 외딴 섬, 이골이 난 바다낚시꾼들이나 이따금씩 드나든다는 작은 섬 소매물도로 향하는 나의 배낭에는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집 몇 권과 쟝 그르니에의 <>이 들어 있었다. 그저 나 혼자서 막막한 바다나 하루 종일 바라보면서, 간간이 책이나 읽으면서, 어줍잖은 시나 몇 줄 끄적이면서, 사나흘 보내다가 올 생각이었다.

 

<소매물도 등대섬의 아찔한 절벽 위에서 우연히 만난 고교 선배와 함께 담배를 피우다.>
 

하지만 나의 계획은, 도착 첫날 민박집에서 만난 동숙인과 함께 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서로 족보를 따지기 시작하면서부터 틀어지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교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내 고등학교 선배이자 대학교 선배(전공한 학과는 달랐다)임이 드러난 것이다. 결국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마추어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와 그의 동행들과 함께 사흘을 보내게 되었다. 가져간 책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들과 함께 수영을 하고, 함께 등대섬을 오르고, 텅 빈 분교의 운동장에서 함께 시소를 타고, 밤 바닷가에서 무수한 별들을 향해 함께 랜턴 불빛을 쏘아 보냈다. 내가 기대했던 평온한 고적함은 없었지만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이들과 함께 어울리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었다.

 

<아마추어 사진작가인 선배를 위하여 똥폼을 잡아보다. 선배는 이 사진에 '아도니스의 탄생'이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그런데 그렇게 나름 야무진 여름 휴가를 다녀왔는데도 내 안의 목마름은 가시지 않았다. 몸은 사무실에 있었지만 내 마음은 일상으로의 복귀를 한없이 미루고 있었다. 도리가 없었다. 사표를 냈다. 그리고 며칠 후 퇴직금을 챙겨 다시 여행을 떠났다. 이번에는 소매물도 뿐만 아니라 보길도, 제주도까지 이어지는 섬 순례였다. 쟝 그르니에의 <>이 동행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번에는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섬에서 <>을 읽을 수 있었다. 소매물도 등대섬의 절벽 위에 우뚝 서서, 보길도 예송리의 검은 몽돌밭에 누워서, 제주도 함덕 해수욕장의 현무암 갯바위에 앉아서. 무엇이 나를 이렇게 섬으로, 아니 <>으로 이끌었던 것일까?

 

따라서, 인간이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통과해 가야 하는 저 엄청난 고독들 속에는 어떤 특별히 중요한 장소들과 순간들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 장소, 그 순간에 우리가 바라본 어떤 고장의 풍경은, 마치 위대한 음악가가 평범한 악기를 탄주하여 그 악기의 위력을 자기 자신에게 문자 그대로 <계시하여> 보이듯이, 우리들 영혼을 뒤흔들어 놓는다. 이 엉뚱한 인식(reconnaissance)이야말로 모든 인식 중에서도 가장 참된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즉 잊었던 친구를 만나서 깜짝 놀라듯이 어떤 낯설은 도시를 앞에 두고 깜짝 놀랄 때 우리가 바라보게 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다. (80~81, 幸運의 섬들)

 

그렇다. 스물네 살 청춘은 나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쟝 그르니에가 몇 차례나 경험했던 계시의 순간들, 제로에서 무한으로 옮겨가는 그 충만한 순간들을 나는 단 한번 만이라도 경험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한 순간들은 필경 고독을 통하여 그 모습을 드러낼 터이니, 섬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스물네 살, 홀로 떠난 섬의 순례 여행길에서 나는 그런 계시의 순간을 만나지 못했다. 섬들은 나를 받아들였으되, 내게 그 내밀한 속까지 열어 보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다시 찾은 소매물도에서 나는 온전히 혼자일 수 있었으나 간절히 원했던 '계시의 순간'은 끝내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사실, 쟝 그르니에의 <> 역시, 쉽게 읽히는 듯 하면서도 그 전모를 쉽사리 우리에게 다 드러내 보이지는 않는다. 이 책 속에서 정말로 다 말해버린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고 지적한 까뮈의 말처럼, 이 책에서 가장 긴 글이자 가장 쉽게 읽히는 글인 고양이 물루조차도 그르니에가 말하고 있는 것 이상의 것을 텍스트 너머의 침묵 속에 감추고 있다. 아끼고 사랑했던 한 마리 고양이의 죽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자의식 가득한 그 작은 짐승의 삶이 우리 인간의 삶과 별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르니에는 예민한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삶에도 그렇게 여백을 남겨놓을 수 있는 여유가 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바쁜 일상의 틈에 잠깐 머무르다 가는 침묵 속에서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긴 여운을 들을 수 있고, 또 그 여운에 가슴 깊이 느꺼울 수 있는 여유가 우리에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아마도 또 다른 섬이 필요할 터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3. 서른일곱 살, 섬에서 살게 되다

 

나 자신의 진정한 모습과 만나는 데 실패한 내게 결혼은 손쉬운 선택이었다. 오랫동안 사귄 동갑내기 애인과 결혼한 때가 스물여섯 살. 이후 십 년 동안은 사회에서는 바쁜 직장인으로서, 집에서는 한 여인의 남편이자 어린 딸아이의 아비로서, 또한 양가 어른들에게는 아들이자 사위로서, 오로지 생활을 도모하는 데 바쳐졌다.

 

물론 간간히 느껴지는 갈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어서, 그때마다 나는 아내와 어린 딸아이를 데리고, 남해도, 돌산도, 거문도, 백도, 완도, 진도, 안면도, 선유도 등으로 이어지는 섬의 순례를 계속했다. 어느 해인가는 소매물도를 다시 다녀오기도 했다. 제주도를 다시 찾았을 때는 해안도로 일주만으로는 모자라 마라도와 우도에까지 다녀오고 나서야 직성이 풀렸다. 하지만 그 여행들은 오랜 목마름을 잠깐 속이는 것에 불과한, 말 그대로 휴가에 불과한 것일 뿐이었다. 나는 어느덧 그 여행길에 쟝 그르니에의 <>을 더 이상 챙겨가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밀레니엄 버그로 조마조마한 가운데서도 새로운 천 년이라고 지구촌이 온통 떠들썩하던 2000 1, 나의 섬 순례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결혼 10주년 기념 여행지로, 해외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아내와 함께 내가 간택한 곳은 새 천 년의 햇살이 가장 먼저 비춘다는 남반구의 작은 섬나라 뉴질랜드. 우리는 떠들썩한 패키지 여행이 아니라 현지 교민에게 직접 의뢰하여 우리 가족끼리 오붓하게 다니는 자유여행 형식으로 뉴질랜드 남섬과 북섬을 보름 동안 다녀오게 되었다.

 

<푸르른 자연 속에 깃들어 있는 도시, 남반구의 작은 섬나라 뉴질랜드는 내가 꿈꾸던 이상향과 가장 근접한 곳이었다.>
 

뉴질랜드는 나에겐 신천지였다. 과연 항간에 떠도는 말대로 지상의 낙원이었다. 여행을 다녀와서 이민을 결심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복잡한 이민수속 과정을 내가 직접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손수 밟고 마침내 영주권을 받아서 우리가 다시 뉴질랜드 땅을 밟은 것은 2001 4. 내 나이 서른 일곱 살이었다. 관광객이 아니라 이제는 이 작고 평화로운 섬나라의 주민이 되어 살게 된 것이다. 쟝 그르니에의 <>이 내게 다시 찾아 든 것은 그 때였다.

 

혼자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설은 도시에 도착하는 공상을 나는 몇번씩이나 해보았었다. 그리하여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아보았으면 싶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65, 케르겔렌 群島)

 

우리의 새로운 터전이 된 이 작은 섬나라에서는 나는 내가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는 것을 내보일 필요가 전혀 없었다. 누구도 그러한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 말이다. 남루하게 살고 싶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겸허하게 살고는 싶었기에, 나는 넓고 푸르고 깨끗한 자연환경 이상으로 이곳 현지인들의 이러한 무관심이 마음에 들었다.

 

<섬나라 뉴질랜드에는 섬들이 많다. 그러나 그 많은 섬들 중에서, 내가 이곳에서 다시 발견한 쟝그르니에의 '섬'만한 것이 어디 있으랴.> 
 

그렇지만 비밀이라면?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사는 곳을 옮겨야만 했을 정도로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무슨 대단한 <비밀>이 내게도 있었단 말인가? 이 물음 앞에서 나는 오랫동안 서성거렸다. 내게 이루지 못한 욕망은 있었어도 성취한, 그래서 숨겨야만 하는(왜냐하면 숨기는 것이 성취한 것을 온전히 간직하는 방법이 되고, 마침내 나중에 드러나게 될 때에도 숨긴 것일수록 더욱 빛이 나는 법이니까) 비밀은 없다는 사실을 나는 뼈아프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나는 새롭게 내 비밀을 만들어야만 했고, 예전에 내가 이루지 못했던 욕망이 그 출발점이 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것은 항상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살고, 언젠가는 시인이 되자는 꿈이었다. 이렇듯, 쟝 그르니에의 <>은 내 안에서 오래 잠자고 있던 욕망을 다시 일깨워 주었다. 까뮈 역시 <>을 처음으로 읽던 스무 살 무렵에 작가로서의 길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으니, 아직 이 책을 읽어보지 않은 이들도 <>이 지니고 있는 문학적 향취가 얼마나 대단한 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책을 단순히 섬세한 감성과 유려한 언어로 직조한 아름다운 문장들로 가득한 그 흔하디 흔한 산문집으로 생각한다면 그건 오해다. 쟝 그르니에가 이 책에서 추구한 것은 감각의 섬세함을 넘어서는 정신의 깊이이며 언어의 유려함을 뛰어넘는 인식의 명징함이다. 이 책이 산문집이라기보다 철학적 에세이로 불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상상의 印度 라는 제목 아래 묶여져 있는 일련의 글들이 그 대표적인 본보기가 되겠지만, 이러한 경향은 다른 글들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알제이에서 보낸 2 6, 나는 바다를 구경하려고 변두리 아랍인들 동네꼭대기로 올라가고 있었다. 엄청난 정적…… 그렇다. 날씨가 나빴는데도 엄청난 정적이었다. 바람에 펄럭이는 저 깃발을 보아라, 하고 入門하려는 제자에게 티베트의 僧은 말한다. 펄럭이는 것은 그 깃발인가 바람인가?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그것은 깃발도 아니고 바람도 아닙니다. 그것은 정신입니다. (130, 사라져버린 날들)

 

이러한 문체는 섬으로 치자면, 물 위로 드러나 있는 땅덩어리보다는 물 아래 잠겨 있는 섬의 뿌리 쪽에 더 관심을 두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을 터인데, 과연 책의 앞 표지에 보면, 하얀 섬의 뿌리가 가느다랗게 몇 줄로 드러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도 바다 한가운데가 아니라 푸른 하늘 허공 중에. 까뮈는 이를 두고 <>은 우리들이 자연스럽게 발 딛고 있는 땅으로부터 뿌리를 뽑아내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온 것이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文化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라고 이 책의 서문에 적고 있다.

 

문화(文化)라니? 나는 감히 내 글쓰기가 거기까지 나아갈 꿈은 꾸지도 않는다. 다만 내 정신의 깊이, 내 인식의 명징함이 적어도 내 글을 읽는 몇몇 독자의 공감은 충분히 끌어낼 수 있을 정도의 글들을, 그런 시들을 오래도록, 바라건대는 내 죽음에 이르는 날까지, 쓰고 또 쓰고 싶을 뿐이다.

 

, 열일곱에 처음 만나 다도해와 서해의 섬들을 떠돌다가 스무 해 뒤에는 남반구의 작은 섬나라 뉴질랜드까지 흘러와서 지금까지도 마흔이 넘은 사내의 비밀을 키워주는 밑거름이 되고 있는 내 인생의 책, 쟝 그르니에의 <>이여! 그대가 그토록 일찍 내 배내옷을 벗겨주었으니, 나는 내 무덤까지 그대를 들고 가서 기꺼이 나의 수의로 삼아주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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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리즘연구소 참신하고 재미있다 | 딸과 함께 쓰는 알고리즘연구소 공부일기 2010-01-30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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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의 알고리즘 공부 이야기

 

 

 

작성자: 김예지

타이핑: 김선욱

 

 

 

예전부터 아빠가 알고리즘 보내준다고 했었다.

어떤 방식으로 가르쳐주길래 여기는 보내준다고 했는지 궁금했다.

지금 알고리즘에 다니고 있는데 재밌고 좋다.

 

이곳은 다른 학원과 다른 곳이다.

내신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고, 수능을 공부하는 곳이다.

 

수리 챕터를 25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공부를 하고,

그것을 가지고 팀을 결성해 토론을 하는 것이다.

토론을 하는 것도 참신하고 재미있다.

 

수학을 꼭 하나의 방법으로 푸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문제라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푸는 사고력을 필요로 한다.

정말 참신하고 좋은 것 같다.

 

지금은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렇게 계속 열심히 하다보면 어떤 결과가 있을지 정말 기대된다.

 

 

 

2010. 1. 30. 19:11

 

 

 

예지의 알고리즘 일기를 대신 타이핑 한 아빠

김 선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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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영어공부 잘 하는 방법 | 올바른 정보와 지식 2010-01-30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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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부 방법 by 잭 런던

(Original by 대륙횡단)

 

2MB의 영어교육 때문에 시끄러운데, 영어는 필요에 따라서 필요에 맞는 수준만 하면 된다. 경험에 의한 생생한 방법이 있으니, 이대로 해보시길. 특히 어머니들은 참조하시길.... 반말체는 용서하시고...

 

왜 영어공부가 안될까? 아마도 그건 영어를 시험 목적으로 공부하거나, 또는 한국어의 대응요소로서 공부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를테면, 아주 쉽게, 외국인이 영어로 천만 단위의 숫자를 말한다고 생각해보자. "twenty five point six two million 어쩌고"하면 아마도 일반적인 한국인은 그것을 한국 숫자로 번역하는 프로세스를 뇌에서 실행시킨 다음 '이천오백육십이만 어쩌고'라고 한국어로 이해할 것이다.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국어로 생각한 다음, 매칭되는 영어단어를 뇌 속의 기억 저장소에서 찾고, 이를 문법 지식과 버무려내 말하려니.... 늦지...

 

, 방법...

 

첫째, 영한사전을 버려라. 영영사전이 어렵다고? 초심자는 'Active Study Dictionary', 중고급자는 'Dictionary of Contemporary English'를 추천한다. 쉽다. 1 수준만 되어도 Active Study Dictionary는 한 3개월 보면 익숙해진다. Webster Oxford니 유명하지만, 왠만큼 영영사전에 익숙한 내가 봐도 짜증날 정도로 설명이 어렵다. Longman사 사전을 강력 추천한다. 쉽다, 무엇보다도. 나는 고1때 우연한 기회에 그냥 눈 딱 감고 시작했다. 그때 내 반등수가 60명에 30등 안팎 할 때이니 등수 걱정도 하지 마시라. 영영사전 볼 수 있다.

왜 영영사전을 봐야하는가? 영영사전으로 암기할 경우, 듣거나 말할때 뇌, 안그래도 특정 기능은 형편 없는 뇌를 이용해서 '번역'하는 절차를 근원적으로 없앨 수 있다.

이를테면, 영한서전으로 공부한 사람이 'yellow'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 '노랑'이라는 글자를 떠올린다면. 영영사전으로 오래 공부한 사람은 '노란색깔 자체'를 떠올린다. 말할 때도 번역과정이 생략되기는 마찬가지다.

부수입도 있다. 단어가 기억 안나면, 영영사전 뜻풀이식으로 말하는 법도 자연스레 깨우친다. 왜 꼭 어려운 단어를 써야하나? 쉬운 단어로 풀어서 설명해도 영어다. 특히 Active~의 경우 불과 수백가지 단어로 1만단어 이상을 설명하고 있다.

 

둘째, 영어 공부 하지 마라. 공부를 영어로 하라. 특히 대학가면 꼭 실천할 일이다. 누구나 전공이 있기 마련이고, 나중의 일도 전공과 관련한 일을 할 경우가 많을 것이다. 단순히 전공이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공부를 영어로 하라영어공부 하는 텍스트를 이왕이면 전공분야 교과서로 바꾸어 보시라. 문장실력이 느는 것은 당연할 것이고, 이는 일반적인 독해 공부의 효과와 같다. 그리고, 특히나 분야별로 jargon terminology가 있기 마련인데, 나중에 외국인 앞에서 이를 정확하게 사용하면, 여러분의 어눌한 외국어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이 당신을 보는 시각을 달리할 것이다. 그때부터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학식'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일석이조 아닌가? 공부해서 학점도 따고, 영어공부 효과도 있고. 학기 초면 교수님께서 배포하는 '강의계획서'에 보통 한두권의 부교재로서 원서가 포함되어 있기 마련이고, 어렵겠지만, 한국어 교재와 병행해서 영어 원서 교재를 보는 습관을 들이기 바란다. 실제 좀 익숙해지고 나면, 원서 교재가 더 잘 이해될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셋째, 영어로 얘기할 수 있는 화재거리를 축적하라. 이거 안하면 외국인과 술먹고 새벽 2~3까지 노는 즐거움이 없다. 미국의 이랔 침공에 대해서 토론할 정도는 되어야한다. 영어만 잘하는 토익 귀신들 치고 외국인과 2시간 이상 대화하거나 상업 토론을 하는 자를 아직 보지 못했다. 용어만 정확히 한다면 한국어로된 책, 저널, 신문을 많이 보는 것도 도움이 크다. 영어만 잘하는 바보가 되지 말란 얘기다. 한국어로도 할 말이 없으면 영어로도 할 말이 없음은 당연지사 아니겠는가?

 

넷째, 문법... 귀찮지만 기초 문법은 확실히... 단어로 말하는 것과 문법을 갖춰서 얘기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고등학교때 죽자 사자 문법공부 했다면, 앞에서 말한 영영사전을 보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유지가 되니까 걱정은 하지마라. 영영사전 보면 문법이 체화되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다섯째, 제발 한국어로 된 책 많이 보자. 왜 한국어와 외국어가 단절되었다고 생각하나? 언어로서는 동일한 것이다. 호주의 실험결과를 하나 소개하면, 외국 출신 어린이들에게 영어교육을 하는데, 한 그룹은 일주일 내내 영어공부만 시키고, 다른 그룹은 수업시간의 절반은 모국어 교육, 절반은 영어교육을 시킨 결과, 절반의 시간을 모국어 교육에 투자한 그룹의 영어 성취도가 훨씬 좋았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자녀 교육에 참조하시길... 한마디로, 국어 못하는 놈은 영어나 외국어 잘하기 힘들다는 말씀 되겠다.(2MB, 알아듣겠냐?)

 

여섯째, 본토발음은 잊어라. 본토발음에서, 한국어에도 적용되는 연음법칙 정도만 알아도 충분하며, 자신의 발음에 있어서는 사전에 나오는 발음기호를 자기 식으로 미국사람 발음 따라서 외우는 것으로 충분하다. 언어는 규칙일 뿐이다. 싱가폴 영어, 중국인 영어 들어보시길... 영어는 영어가 아니라 세계어이며, 소화하는 사람의 국가별로 발음이 다 다르다. 자신만의 규칙성을 가지시길. 자신만의 규칙성을 가지는 길은, 영어사잔의 발음기호와 액센트 위치만 정확히 익히는 것으로 충분하다. 미국 사람들도 남부 다르고, 동북부 다른게 영어 발음이다. 하물며 한국인 임에라야... 배짱있게... "넌 한국어 못하지? 난 니네나라말 하는데.."하는 자세로... 싱가폴, 인도, 필리핀과 같은 나라 사람들 만나면, 엘리트의 발음과 일반인의 발음은 확연히 차이난다. 특히 싱가폴은 공용어가 영어임에도, 엘리트와 비 엘리트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그렇지만, 그러한 싱가폴 엘리트들의 영어발음이 미국이나 영국 발음나올까? 착각하지 마시길. 다른 말로, 영어 발음 탓하지 말고, 공부를 게을리 한 것을 탓하란 말이다. 영어는 수단이지 절대로 목적이 아니다. 공부 열심히 하고, 엘리트들과 대화 많이하면 발음도 자연히 좋아진다는 얘기다. 미국 사람 발음 따라할려는 것 자체가 낭비 중의 낭비다.

 

가장 핵심은 "사전"이다. 잠시라도 영한사전은 보지 마라. 일부 단어 중에서 이를테면, 꽃 이름 같은 것은 영한사전 안보면 도저히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는데, 그때만 영한 사전 보는 것은 괜찮을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단어 설명문에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그 단어를 다시 영영사전에서 찾아서라도 이해하라. 절대로 영한사전 보지마라... 중요하다.

 

이상은 시험 목적이 아닌 인생 목적의 영어 공부 방법을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다. 효과? 시험공부는 거의 안한거나 마찬가지지만 토익은 940정도, 이것도 회사에서 자꾸 쳐보라고 해서 한 10년 전에 친거고다른 시험은 안쳐봤다. 외국인과는 P/T 텍스트 안보고도 하며, 토론도 하고, 빡센 협상도 하고, 싸우고밥먹고, 새벽까지 술도 마신다. 물론 엉터리 영어도 많이 쓰지만, 규격화된 한국사람들 보다는 듣기 편하단다. 어학연수나 영어권 국가에서의 생활은 안해봤다. 영어 전공도 아니며, 영어공부랍시고는 회화학원 한 5개월 듬성듬성 다녔고... 회화 테이프 한 세트 억지로 1번 들었던 것 같다.

 

이 방법은 절대로 단기적인 시험점수 목적으로는 사용금지다. 영어가 뇌에 스며드는 과정, 일테면 직관적인 영어 의사소통을 위한 과정이지, 시험 목적에는 별 효용이 없다. 어느 수준에 이르고 나면 영어 시험이란 것이 그냥 국어시험 비슷하게 될 것이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방법이지만, 어학연수도 안가고 사회에서 부드럽게 영어로 수준 높은 사람들과 일하기에는 유일한 방법인 듯 싶다.

 

일찍 시작하시라. 특히 어린 애들을 두신 학부모님들은 당장 영한사전 버리고, 영영사전으로 바꾸게 하시라. 요즘은 선행학습이 있어서 중학생 정도면 앞에서 말한 사전 보는데 지장 없다

 

몰입 수업도 필요 없고, 조기유학도 필요 없다. 그럴 시간 있으면 더 많은 교양을 한국어로 쌓게하는 것, 그게 실제 애들과 국가에 도움이 된다. 모국어로 공부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것은 당연한 것은 알겠지? 그래야 멍청하게 범죄자를 대통령으로 뽑는 우민들이 줄어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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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을 위한 자식공부 경제학 | 올바른 정보와 지식 2010-01-28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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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다음의 AGORA에서 펀글이다.

 

 

경제토론 서민을 위한 자식공부 경제학 [5]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866709

 

  • 대륙횡단 jwb**** 대륙횡단님프로필이미지
    • 번호 866709 | 10.01.28 03:10
    • 조회 414 주소복사
    잭 런던 이놈이 지웠지만, 영어공부에 대한 제 글을 이미 포스팅해버려서, 쪽팔림을 무릅쓰고 수학에 대해서 띄웁니다. 옳든 그르든, 서민들은 참조하세요. 선택을 해야지요. 학원? 저는 안보냅니다. 돈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성장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 때문에요.

    다음은, 수평적인 관계의 힘에 대해서 삼성/LG의 어처구니 없는 스마트폰 대응책과 연결해서 써보지요. 교육과도 연관됩니다. 참고로, 부산의 황당한 저희 학교의 입시 결과는 외고 좀 우습게 봅니다. 다음엔 '공부의 신'에 나오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공부방법', '경쟁', '수직 서열'에 대응하여, 수평적인 관계의 위력에 대해서 써볼께요. 공부와 회사의 경영은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아래....................................................................................................................................


    경제사정으로 인해서 애들의 학원비를 끊어야하는 학부모들을 위해서 씁니다.

    지난 번에는
    영어학습 지도에 대해서 썼습니다. 이번엔 수학입니다. 대상은 성적이 중위권이라 고민하는 중학생과 고등학교 1-2학년입니다.

    영어와
    수학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두가지 핵심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영어와 마찬가지로, 수학 공부에 있어서도 가장 핵심적인 학문은
    "국어" 입니다.

    둘째, 시간과의 싸움... 단기 시험성적, 일테면, 주초고사니 중간고사니 기말고사니 하는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을 목표로 하여서는 안됩니다. 꼭, 시험범위가 제대로 없는 그런 최종 시험을 잘 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즉, 길게 보라는
    것입니다.

    또다시 실증성을 높이기 위해서 저의 스토리를 집어넣어야겠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에 아무도
    없고, 과외는 물론 도무지 공부를 왜 해야하는지, 어떻게 하는지 알려줄 사람 조차 없었습니다. 게다가 장남인지라 물어볼 형제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중학교 대충 다니고, 연합고사 178점(이거 당시 인문계 고등학교 합격자 딱 중간 수준입니다.)

    자, 고등학교 1학년,
    정말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반 등수가 딱 절반... 60명 중에서 28등 성적표를 들고 어머니께 드렸더니, 당시 노점상을 하시던 어머니 왈,
    "절반 보다 잘했으니 됐다"라는 말씀.... 전 그 말씀을 진짜로 받아 들일 만큼 순진했습니다. 1학년 1학기 중간쯤, 드디어 반에서 24등을
    받고는 참 우쭐했었는데, 마침 휴가 나오셨던 외삼촌 왈, "너가 그렇게 공부 못하는줄 몰랐다". 즉,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 수준에 대해서
    객관적인 평가를 들었습니다. 요즈음엔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뭔가 깨달은 저는 한손엔 영어를 잡겠다는 일념에 영영사전을 들었고,
    우선 영어를 두들겨 잡으면 수학을 때려 잡을 시간이 있을 것이다라는 계산 하에, 친구들에게, "나는 앞으로 주초고사, 중간고사, 기말고사는
    신경쓰지 않겠다. 3학년 때에 보자"라는 선언을 합니다.

    즉, 이왕 일반적인 코스웤을 남들 하는 대로 따라가서는 절대로 이미 공부
    지독히 잘하는 까마득한 그들의 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그리고 장기적인 목표 하에 공부하지 않으면 허구헌날 단기적인 시험성적에 일희일비하는
    소모전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자각을 한 것이지요.

    그리하여, 영어를 딱 1년, 즉,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까지 영영사전과 문법책
    제일 쉬운 것 하나(설명이 장황해서 성적이 낮은 저도 이해할 수 있는 책... 페이지는 물경 1500페이지) 줄기차게 두들겨 팼더니, 글쎄 고교
    2학년 2학기부터는 교내외 시험을 막론하고 적어도 영어성적은 1-2등을 다투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수학 차례... 이놈의 수학은
    고등학교 2학년2학기가 되어도 도무지 학급 평균점수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영어공부에서 손떼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생긴 터라, '그래, 요놈
    한놈만 더 패면 뭐...' 하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드디어 2학년 겨울방학... 비장한 각오로 정석실력 들고 독서실에
    쳐박혔습니다. "하루에 한 챕터를 풀고, 절대로 해답을 먼저 보지 않을 것이며, 절대로 물어보지 않고, 스스로 찾고 생각해서 모든 문제를
    풀자"라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겨울방학이 끝날 즈음에는 수학정석(실력)을 뗄 수 있었습니다.

    핵심은, 절대로 해답을
    먼저 보지 않는 것, 절대로 물어보지 않는 것,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 모든 문제를 풀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 3-4시간
    고민하는 것을 불사했지요.

    요즈음 학원에서 가르치는 방식과는 다르지요? 참 무식하기도 하고, 비효율적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
    과정이 끝났을 때에 뇌에서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학교의 수학 진도란 것이 챕터별로 나가지 않습니까? 학교내 시험도 그 챕터별로 시험범위에
    따라서 진행되고요. 하지만 제 머릿속에서는 모든 챕터들, 그리고 그 공식들, 원리들이 여러 다발의 링크들로 연결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냐면, 그 학급 평균도 안되던 수학성적이, 2월 겨울방학 직후 1-2학년때 배운 전 범위를 대상으로한 시험을 쳤는데,
    당당히 반에서 1등이었습니다.

    자, 가장 골치 아픈 영어와 수학을 이렇게 그냥 패버렸으니, 나머지 과목은 여유있게 커버해
    나갔지요. 마침 고3때 간염이 걸려 하루 8-9시간을 자야 했으니, 천만 다행이었지요.

    그러면, 그 요체가 뭔가?


    첫째, 절대로 단기 목표지향적인 요령공부에 매달리지 마라. 특히 학원에서 단기적인 성적이 좋아지는 찍기과외 같은 것을 잘하는데,
    이건 장기적인 결과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소위, 중간고사는 잘치는데, 학력고사는 못치는 전형적인 이유가 됩니다.

    둘째,
    스스로 풀 것. 제가 과외를 해보면, "선생님, 어떻게 그렇게 푼다는 것이 떠올라요?" 하는데, 특히 복합적인 문제일 수록 선생님의 멋진 풀이
    방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고해서 풀었을 때에 진정 머리에 남습니다.

    셋째, 패턴을 익히는 공부는 또한 지양해야 합니다.
    대체로 저와 같은 중간 수준의 학생은 출제 패턴이나 문제의 패턴을 익히려고 하는데, 이는 3년을 공부해야하는 고등학교 공부에서는 좋은 최종결과를
    얻을 수 없는 방식입니다. 중위권일 수록 더욱 본질적인 접근을 해야 끝내 승리합니다.

    넷째, 좀 우둔했으면 합니다. 반야심경에서도
    가르치고, 이병철 회장께서도 가르쳤지만, 너무 똑똑하면 안됩니다. 잘 될 것을 믿고 그 선택한 길로 쭈-욱 우둔하게 가야 1-2년 후에 그
    결과를 봅니다.

    그 결과, 어떤 기관에서 주최하는 어떤 종류의 시험이라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앞의 글에서 영어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만, 영어의 경우, 그게 학력고사든, 토익이건, 아이엘츠건, 토플이건 상관이 없어져버렸지요.) 워낙 게으른 탓에 만화보느라 전교
    1등 수준에선 놀지 못했지만, 그래도 학력고사 수학 성적은 영어와 마찬가지로 0.3% 이내... 대충 고등학교 졸업하고 배나 탈려고 했던 부산
    산동네 학생 치고는 큰 진보지요?

    이런 접근방식이 이후에도 공부와 일에 버릇이 되어서 이후로도 어떤 과정의 시작 보다는 항상 끝이
    좋은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시작할때는 항상 당시의 제 모습이 미천한 수준인 좀 버거운 과정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사고하고
    조급하지 않게 본질적으로 접근하면 끝에는 항상 좋았습니다. 대학도, 대학원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특히 아이가 중학교 또는 고등학교
    1-2학년에 있다면, 성적이 중위권 수준이라면, 그리고 학원에 보내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작심하고 시도해보세요. 저희 부모님 참고서값 이외에는
    거의 돈 든게 없었습니다. 쓸 돈도 없었고요.

    제 동생에게도 똑 같이 적용해봤는데, 고3이 되니 확실히 효과가 나타나더군요.
    동생은 저보다 더했습니다. 고1때 반에서 꼴찌에서 2-3등 하던 놈이, 고3 때는 반에서 못해도 2-3등이었습니다.

    조급증,
    불안감, 타인과의 비교... 이런 것들이 최대의 적인 것 같습니다.

    만약 실행하시고, 효과를 보신 분은 몇년 뒤에 소주나 한잔
    사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우석훈박사는 엄마표 젊은이들을 사회 진보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세대로 분류하더군요. 이런 과정의 덤은,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선택하는 아이를 만드는 것 같습니다.

    주제넘었다면 용서 바랍니다.

    사족 : 하늘의 뜻...


    저희 집이 부산의 산동네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적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저희 집이 산동네였고, 또 저희 집에 글을 읽는
    사람도 없고, 돈도 없는 관계로 신문을 구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희안하게 중학교 1학년인가 2학년 때 부터 아침에는 중앙일보, 저녁에는
    석간 부산일보가 배달이 되는 것입니다. 집에 사람이 없으니 배달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그 후로 쭈욱 공부는 안해도 신문은 하루에 두부를
    통독할 수 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제가 고교를 졸업하니 끊어지더군요. 키다리아저씨가 있었나?

    부수적인 효과는,


    첫째, 책이 없는 집이었지만 덕분에 그래도 많은 글들을 읽을 수 있었고 따라서 한국어 독해를 부지불식간에 향상시켜서 고등학교에서도
    국어 때문에 심한 고생을 하지 않았다는 것,

    둘째, 다양한 사회, 경제, 문화, 국제, 역사 등과 같은 이슈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익숙하였으므로, 당시 사회와 같은 과목은 거의 껌이었다는 것(시험공부 자체가 거의 필요 없었습니다.)입니다.

    또 하나의 기적은,
    갑자기 학력고사 시험과목이 9과목으로 줄었다는 것... 저 같이 개념 없이 공부한 인간이 자기가 좋아하는 과목만 선택해서 시험 볼 수 있게된
    것은 마치 제가 박지만이 된 기분이었죠.

    이 하늘의 뜻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혜택을 본 저로서는 어떻게 갚을까, 갚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뿐입니다. 지금은 비록 아직 미천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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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수와 진보의 갈등, 그 유일한 해결책은 무엇일까? | 깨달으며 ..... 2010-01-27 18:09
    http://blog.yes24.com/document/1875261 복사 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왜 옳고 그름이 생기는가?

     

    보수와 진보 중,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

     

    시비(是非)를 가리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게 있다. 사실은 진보와 보수는 음.양의 조화에서 음과 양이 필요하듯 서로 보완적인 개념일 뿐이다. 보수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진보라는 개념도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한쪽이 무너지면 다른 한쪽도 존재할 수 없다. 다른 한쪽이 없어지는 순간 그 자신의 개념도 없어진다. 즉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와 보수는 어느 것도 그르지 않다. 다른 곳에서 서서 서로를 바라보기 때문에 의견이 갈리는 것뿐이다. 만일 같은 곳에 서서 바라본다면 같은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진보는 그 토대가 보수와는 다른 곳에 서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수와 진보는 자신이 서 있는 곳을 드러내주는 것뿐이다. 아래 그림에서 음.양에서처럼 다른 곳에 위치해 있을 뿐이다. 영남이라는 지역에 위치해서 다른 곳(호남)을 바라보는 것이다. 또 호남이라는 다른 지역에서 살면서 영남을 바라보는 것이다. 당연히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할 수 밖에.

     

     

     

    두 사람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은 하나의 방법밖에 없다. 누군가가 상대지역으로 옮아가든지, 전혀 다른 제3의 곳으로 옮겨가 한 자리에서 서야만 한다. 따라서 영남, 호남은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다.

     

    보다 의식있는 깨어있는 사람으로 살려면, 영남인이나 호남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건전한 시민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현명하고 지혜로운 지구인으로서 살아가야만 한다. 우리는 사실 호남인이나 영남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더 먼저는 대한민국 사람인지도 모른다. 아니 한명의 존귀한 지구인이 아닐까? 누가 영남, 혹은 호남 사람이라고 이름지었는가? 태곳적부터 고유한 이름이란 말인가?

     

    대화든 토론이든 혹은 논쟁이든 우리는 왜 이견이 생기는지 그 근본 원인을 모르고 있다. 아무리 좋은 토론 규칙을 내세우든 매너를 강조하더라도 그 근본 원인을 모르는 한 우리는 절대로 토론에서 성장을 하거나 발전할 수가 없다. 왜 그럴까?

     

    논증적인 작성시의 일곱 가지 규칙들 (V.1.0)

    사회자팀

    http://theacro.com/zbxe/?document_srl=88172

     

    논쟁은 누가 많이 배울 있는가를 겨루는 '배움의 전쟁'이다.

    Crete

    http://theacro.com/zbxe/?document_srl=99783

     

    그 원리는 상대성의 원리이다.

    우리는 이 세계를 상대성에 의해서 인식하게 된다. 어떤 하나의 사물, 개념 혹은 사건은 상대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관념지어지는 것이다. 어떠한 명제나 주장이나 법칙 혹은 원리도, 그리고 사실이나 현상도 하나의 근거에 토대를 두고 설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근거는 다른 상대되는 근거가 있기 때문에 개념지워진다.

     

    ()과 서(西)가 그렇다.

    이 지구상 아니 우주상에 원래의 동과 서가 있을까? 없다. 그런 것은 결코 없다. 임의의 기준을 두어 어떤 곳을 이라 이름 부르기로 하는 순간 그 대()가 되는 곳이 서(西)로 명명되는 것이다. 그냥, 그것들은 원래 큰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림 [가]에서 당신은 동.서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그냥 자연인이다. 그런데 그림 [나]에서처럼 임의의 기준선을 두니까 검은 점의 당신은 동쪽에 속한 특정한 사람으로 불리우는 것이다. 그리고 동쪽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한사람으로 명명된다. 동인이라고 말이다. 그 반대는 서인으로 불리는 것이다.  구분되어 서로 달리 이름지워지는 순간 그 두 개념은 영원히 반목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혜롭게 임의로 그어놓은 선을 없애기 전까지는 말이다.

     

    []에서처럼 동()이라는 근거를 두고 생각하는 한 서(西)에 근거를 두고 생각하는 사람과의 의견이 절대 같을 수가 없다. 합의점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관점이 다르면 견해는 당연히 다를 수 밖에 없다. 어떻게 다른 곳에서 바라보는데 같게 보일 수가 있겠는가. 대롱으로 통해서 보는 하늘이 달리 보일 수가 없다. 하지만 맨눈으로 바라보는 하늘은 확연히 다르다. 또 망원경을 통해 보는 하늘은 사뭇 다르다. 이렇게 관점이 다르다는 것은 사물을 동일하게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토론은 이렇게 다르게 보이는 것을 서로 옳다고 다투는 꼴이다.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하게 보이고 확실한데 어떻게 옳지 않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그는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모르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도 그 자신의 눈을 통해서 옳은 것을 보고 있다는 것을.

     

    이제 그림 []에서처럼 임의의 기준선을 제거해 보자. 이제 동서는 없어진다. 동과 서라는실제처럼 느껴지던 구분이 허상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더 이상 동과 서라는 실제는 물론 개념도 사라진다. []에서처럼 당신은 동과 서가 아닌 어느 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이제 이 마당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아직도 동과 서의 색깔 혹은 이념 논쟁이 의미가 있는가? 없다. 그냥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우리는 동인과 서인 혹은 영남과 호남 사람이 아니라 어떠한 존재인가로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이냐, 환경과 어우러져 지낼 수 있는 사람이냐. 인간성을 가진 훌륭한 존재이냐, 아니면 개차반처럼 사는 짐승이냐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당신은 호남 사람인가, 영남 사람인가? 아니면 훌륭한 인간인가?

     

     

     2010. 1. 27. 17:51

     

     

    세상을 이해하는 근본원리부터 먼저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고서

    김 선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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