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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그림-나카노 교코] '인공물'에 다양한 '인간'이 어떻게 담기는지 | Memento 2017-12-04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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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무서운 그림

나카노 교코 저/이연식 역
세미콜론 | 2008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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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물'에 다양한 '인간'이 어떻게 담기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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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만든 모든 '인공물'은 '인간'을 반영한다. 문학, 예술과 같은 거창한 것 뿐 아니라, 식기나 식기에 담긴 음식 작고 사소한 하나 조차 인간을 반영한다. 작은 '인공물' 속에서도 당대의 모습을 찾을 수 있고, 인간을 바라볼 수 있다. 하물며 최고의 작가가 그린 그림은 많은 것을 보여준다. 사진 등장 이전에 그림만큼 직관적이고 사실적으로 세상을 반영한 매체는 없었다. 글이나 말이 있었겠지만, 묘사는 가능하더라도 직접적인 모사는 불가능한다. 문자를 통해 머리속에서 재 가공하는 절차가 생기기 때문이다. 또한 말과 글은 특권층의 소유였디. 읽는 다는 것 자체가 권위의 상징이고, 말은 잘못하면 목이 잘리는 법이다. 이에 반해 그림을 보는 행위는 비교적(?)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직관적인 매체다. "본다"는 행위 역시 권력적인 행위지만, 반대로 누구나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비교적 평등한 행위다.

하지만, 나는 그림을 본다는 것. 특히 현대 미술이나 명작들을 보면서 이 역시 평등하지 않음을 느낀다. 도무지 알아 먹을 수 없다. 명작이니 대작이니 하지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다. 분명 나는 "보고" 있지만, 도무지 그림을 "볼" 수 없었다. 간혹 명작들을 설명해준 책들을 읽었지만, 보는 일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가보다,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뿐. 아는 만큼 보이지만, 반대로 보는 만큼 안다. 이 두 틈바구니 속을 비집고 들어가기에는 내가 너무 무지했다. 나카노 교코의 <무서운 그림>은 그림을 보고 싶어서 선택한 책이다. 겁이 많은 나에게 무섭다는 것은 머리속에 오래 남을 터이고, 다른 그림을 볼 때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다. 

솔직히 말하자면 도움은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그림이라는 혹은 본다는 행위에 있어서 충실할 수 있는 진득한 관찰자나 감상자가 아닌가보다. 공간을 보거나 색채를 감상하거나 하는 일에 있어서 잼병이다보니 더 그럴까. 어릴적 이런저런 상상화 그리기로 상을 받은 기억은 있지만, 수채화나 정물화로 받은 기억이 없다. 어떻게 바위를 회색이 아닌 흰색으로 표현해야하고, 풀잎에 녹색이 아닌 어두운 계통의 색을 섞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도 이런 몰이해가 선천적이거나 아니면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도 그림을 보다가 난감한 감정에 빠진다.

그러나 확실한 점은 나카노 교코의 책은 재미가 있다. 그림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줄 뿐만 아니라 이 그림이 무서운 이유를 다각도로 보여준다. 고야의 <제 아이를 잡아먹는 사투르누스>같은 그림은 딱히 설명이 없어도 무섭다. 하지만, 젠틸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딧>의 그림이 왜 무서운 것인지 작가의 삶을 통해 설명해준다거나, 브뢰겔의 <교수대 위의 까치>를 통해 중세 시대를 이해하게 해주는 작은 "까치"를 발견하게 해주는 설명은 흥미로웠다. 물론 그의 해석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무섭다"는 측면에서 그림을 볼 때 '인공물'에 다양한 '인간'이 어떻게 담기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충분히 재미있다. 다만, 그림 설명과 같이 보기가 어려운 편집상의 한계, 그리고 아직도 그림은 내게도 멀기만 해서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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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리석은 데다 자신이 만든 불완전한 사회제도에 휘둘리면서 편견, 빈곤, 차별을 생산하고, 결국 너나 할 것 (p.8) 없이 천천히 죽음을 향해 끌려 들어간다. p.9

아우구스트 폰 플라텐 <트리스탄> 자신의 눈으로 아름다움을 본 사람은 곧 죽음에 이른다. p.103

아무튼 '여류' 호가 아르테미시아는 재발견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여류'라는 점이 지나칠 정도로 강조되었다. 이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딧>도 그녀가 남성에 대해 품었던 혐오를 뚜렷이 드러낸 예로서 작품 그 자체의 가치와는 동떨어진 부분에서 평가되고는 했다. 아르테미시아가 '여류'라는 딱지를 떼고 남성들과 동등한 화가로서 인정받으려면 아직 시간이 더 걸릴 듯하다. 아무튼 그녀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사건이 너무도 선정적이었기 때문에 이 그림이 생생한 묘사를 그 사건에 겹쳐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p.115

공포는 보일 때 보다 보이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끔찍하다. p.139

르네상스라면 문예 부흥이네, 근대적 가치의 창조네 하며 긍정적인 시대인 양 생각하지만 실은 오히려 대단히 야만적인 시대였다. 르네상스가 서구 근대 사상의 원류가 되었던 터라 이 흐름에 편승하지 못한 이들, 즉 아름답지 못한 자들의 운명이 이 지점에서 결정되었대도 과언이 아니다. p.183

'추한 노파'는 남성이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노화를 거부하기 위해 설정한 일종의 희생양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추한 노파'를 조롱하는 행렬을, 자신만은 절대 늙지 않을 거라 믿는 젊은 여성들이 누워서 침 뱉기인 줄도 모른 채 따라간다. p.184

오늘날의 사회 또한 늙음에 대한 경의를 내팽개치고 노인을 그저 우스꽝스럽고 비참하고 거치적거리는 존재로 여기는 분위기가 강해지는 것 같다. 옛날처럼 자연스레 느긋하게 늙어 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고 노인은 곧잘 패잔병처럼 취급되곤 한다. 애당초 아름다움이란 젊음과 불가분의 관계엿던 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혹은 육친에 대한 사랑에 부속된 느낌이었는데, 그런 감정 일체를 벗겨 낸 '순수한 아름다움'이라는 추상을 추구하다 보니 인간성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내달리게 된 건 아닐까. 셰익스피어는 "겉모습이란 건 가장 지독스런 허위일지도 모른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p. 185

적에 대한 가혹함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잔학 행위 자체를 즐기게 된 것이다. 늙임이라는 건 그 인간이 애초에 지니고 있던 소질을 뜻하지 않은 모습으로 진하게 투영시키곤 한다.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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