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블로그 | 랜덤블로그 쪽지
Memento mori
http://blog.yes24.com/swordsou1
태그 & 테마링 | 방명록
검혼
읽은 책에 대해 끄적거리는 연습하는 곳입니다
프로필 쪽지 친구추가
12월 스타지수 : 별304
댓글알리미 비글 : 사용안함
전체보기
잡설
취중잡설
나의 리뷰
Memento
m o r i
살림지식총서
영화
태그
고궁을 나오면서 자살사건 눈사람자살사건 와장창 류근 상처적체질 notsure 달리봄 수동형인간
2018 / 07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월별보기
새로운 글

Memento
[대법원, 이의 있습니다-권석천]정의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 Memento 2018-07-15 21:01
테마링
http://blog.yes24.com/document/10530831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eBook]대법원, 이의 있습니다

권석천 저
창비 | 2017년 07월

        구매하기

우리는 늘 억울해서 화만 낼 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정의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우리는 왜 억울한가. 왜 억울하다고 느끼는가. '정의'에 대한 고민이 없기 때문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공평하고, 부당하지 않고, 정당하며,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무언가? 결국 동어반복일 뿐이다. 한 가지 확실 한 사실은 높은 법대 위에서 법봉을 두드리는 일 만으로 정의는 세워지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정의와 부정의의 모호한 선을 누군가는 그어야만 한다. 그 기준이 항상 세상보다 느린 법이고, 그 법에따라 법관들이 선을 긋는다. '현실적인 정의'는 그 망치질로만 못 박아지고, 그 망치를 쥔 사람들. '소수'의 양심에 의존하여 정해진 정의에 따라세상은 굴러간다. 그렇기에 우리는 억울하다. 정의는 소수의 그리고 비슷한 성향을 가진 법관들의 해석에 달려 있다. 법이 부족할지라도, 선이 모호할지라도. 우리 모두가 고민하고, 논의해서 결정할 수 없다. '정의'는 늘 소수의 사람들의 손에 달려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억울하다.

권석천 보도국장의 <대법원, 이의 있습니다>는 이용훈 코트가 걸어간 대법원에 대한 뒷얘기를 푼다. '사법부 블랙리트스', '재판 거래의혹' 등 작금의 이슈에 실마리가 될 만한 뒷얘기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법부의 관료화. 여기에 맞서는 이용훈 코트의 개혁을 매우 흥미진진하다. 어렵지 않다. 오히려 야사처럼(하지만 야사가 아닌) 풀어가는 이야기의 흐름은 마치 법정 드라마를 보는 듯 선명하다.

생각해보면 대법관의 다양성 확보에 대한 노력은 늘, 사법부의 좌경화(혹은 우경, 보수화)라 집중포화를 맞곤 했다. 현재의 '정의'를 보여주는 다수의견, 미래의 길을 보여주는 소수의견 사이의 갈등은 우리 사회가 정의를 위해 고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인데, 특정 세대, 특정 성별, 특정 부류가 독점해 왔음을 잊고 살았다. 대법관들의 인적구성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인지. 그렇기에 언론과 정당이 한 뜻이 되어 서로를 비난하고 비판하는지를 이제 서야 깨닫는다.

'양심'에 기댄 법관들의 판결이 얼마나 정의에 부합하는지, 그 기초가 얼마나 허약한지도 깨닫는다. 우리는 억울하다. 정의는 소수가 독점하고 있고, 판단은 계급과 직급의 우위에 따라 결정된다. 여론은 지체된 정의를 조장하고, 악은 그 사이에서 힘을 키워간다. 우리는 정의에 무관심하고, 오해하고 있다. 저자의 마지막 말대로, '정의'는 '명사'가 아니다. 살아 움직이는 '동사'다. 그들이 그은 선은 늘 움직여야만 한다. 삐뚤삐뚤하고 불편할 지라도. 마음에 들지 않을지라도 변해야만 한다.

정의에 대해서 고민해본다. 결국 우리가 각자의 입장을 가지고 싸울 때만,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할 때 그곳에서 올바른 정의가 바로 설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당연히 조용할 날이 없다. 그렇기에 살아있다. 지체된 정의는 악이다. 소수가 가진 정의는 억울함을 낳는다. 민주주의는 시스템에 의해 굴러가는 공화국이다. 누군가의 '양심'에만 기대기에는 녹록하지 않다. 우리가 편해지고자 하는 그 순간, 생각을 멈추는 그 지점에서 정의는 지체되고 악은 그만큼 커진다. 우리는 늘 억울해서 화만 낼 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정의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

'입장(立場)'이라는 명사에는 '서다' 혹은 '맞서다'라는 동사가 들어 있다. 다른 생각과 맞서는 데서 입장은 시작된다. 자신의 생각도 하나의 입장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데서 모든 도그마는 시작된다. p.8

그 누구도 정의를 독점할 수 없다. 법원이 판결한 이상 그 결론이 어떠하든 따라야 한다는 신화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이제는 판사들도 정의를 선언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그것이 왜 정의인지 설명하고 논증해야 한다. p.10

모든 글은 상처다. 상처에서 시작되어 상처로 끝난다. p.12

대법원의 권위를 논리의 탁월성이 아니라 직급의 우위에서 찾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p.26

'착한 사람들도 발을 조금만 젖게 하면 금방 온몸을 다 적시게 된다.' p.114

부끄럽지 않을 자유, 그것이 아직도 문제가 되고 있나 봅니다. ~ 자유를 침해당해서가 아니라 부끄럽지 않게, 양심에 따라서 자기의 직업을 수행하면서 인생을 살 수 있는 권리가 무엇이며 또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말하기 위해서 스스로 어려운 길을 선택하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노무현 p.130

자신이 사는 세계와 자신이 재판하는 세계 사이의 분열을 자신의 삶으로 끌어안는 자만이 진정한 판사일지 모른다. p.150

"법률 해석을 통해 '이것이 법이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다수의견이다. 그런 점에서 다수의견은 살아 있는 법에 가깝다." p.181

소수의견은 향후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예고해주는 것 p.183

한국이 '검찰 공화국'이 된 데는 판사들의 책임이 작지 않다. p.260

'사법'과 '관료화'는 서로 맞지 않는다. p.268

지체된 정의의 해악은 정의가 아니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지체된 정의는 악을 조장하고 방치한다. 그 악을 바로잡는 데 몇 배, 몇 십 배의 에너지가 소모된다. p.383

정의는 법 논리와 법 감정, 머리와 가슴 사이에 있다. 맥락을 끊어낸 법리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p.490

노동의 문제는 단순히 노동조합이나 파업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사람의 문제이고, 삶의 문제이다. p.531

모두가 균형감각을 갖고 있는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다.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세상에서 균형감각이 있다는 건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뜻이다. p.648

"어떤 일을 한 지 20년이 넘으면 자기 분야에 적응하며 도태되기 쉽다. 새로운 일을 배울 수 있고, 또 겸손할 수밖에 없다는 건 행(p.654)운이다." p.655

"그는 자신과 싸워서 이겨낸 만큼만 나아갈 수 있었고, 이길 수 없을 때는 울면서 철수했다." -라인홀트 메스너를 묘사한 김훈의 글 p.656

이길수 없었다고 해서 패배한 것은 아니다. 철수했다고 해서 포기한 것은 아니다. 시민들이 다시 세운 나라다. 패배할수도, 포기할 수도 없다. 정의를 위해 스스로와의 싸움을 멈추지 않는 순간 우리는 정의롭다. 정의는 명사가 아니다.(p.656) 살아 움직이는 동사다. p.657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1        
[일 따위를 삶의 보람으로 삼지 마라-이즈미야 간지]보람으로 삼기 싫지만, 보람으로 살아야하는 비극 | Memento 2018-07-15 20:51
테마링
http://blog.yes24.com/document/10530809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eBook]일 따위를 삶의 보람으로 삼지 마라

이즈미야 간지 저/김윤경 역
북라이프 | 2017년 12월

        구매하기

보람으로 삼기 싫지만, 보람으로 살아야하는 비극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저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일 따위를 보람으로 삼지 마라! 그럼 일 말고 뭘 보람으로 삼아야 하는가. 사실 일을 보람으로 삼고 싶은 사람은 몇 없지 않을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돈을 벌 수 있다면 그것이 정당한 일이고 올바른 일이라면, 누구든 자기 일을 보람으로 삼지 않을까. 하지만 세상일 자기 마음대로 되는 일 보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은 법. 이런저런 핑계로 자기합리화를 하는 수 밖에 없다.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버티기 위해. 그래도 “밥 값”은 했다는 자위만큼 슬픈 일도 없겠지만, 벗어날 수 없다. ‘밥’에 메여서 어쩔 수 없이 싫은 일을 하고, 굴종의 하루를 보냈지만 그렇기에 나에게는 따스한 ‘밥’을 위한 ‘값’이 주어졌다. 이 소소한 보람을 누가 뭐라고 비난 할 수 있을까. 하지만 100세 시대, 우리가 일 할 수 있는 시간 보다, 멍하니 지낼 시간이 많아지는 시대. 미생에 나온 말 처럼 “먼지 같은 일을 하다가 먼지가 되어 버”릴 소중한 인생. 이대로 삶을 먼지처럼 보낼 수 없다. 여기부터 우리는 저녁에 술을 찾고, 사직서를 만지작 거리며, 새로운 세상을 동경한다. 그리고 좌절한다. 그래 군대도 그렇듯, 내가 있는 곳이 가장 힘든 곳이야. 여기서 보람을 찾자! 버티자!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무한 반복하며 살아간다.

저자는 말한다. “본래는 인간적인 보람을 얻어야 할 일이 어느 사이엔가 노동이라는 행위에 흡수합병되어 완전히 변질되고 말았다.”고.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말이 이를 대변한다는데,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입구에 내걸린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Arebeit macht frei' 표어(p.104)”에 속고 있는게 아닐까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는 “질적인 불만족을 양적으로 보충하려고 발버둥(p.40)” 칠수록 늪으로 빠져든다. “생산기계처럼 항상 가치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압박을 느껴온 우리는 의의 있는 일을 하라는 주술에 꽁꽁 묶여 초조해하고, 무엇보다 소중한 의미를 느끼며 사는 삶을 상상할 여유조차 없는 상태에 빠(p.125)”진 결과, 우리는 같은 챗 바퀴를 돌고 돌고 또 돌며, 한숨짓고 있다. 앞에서 말한 밥 값(물질적 행복)->자위->절망과 좌절->밥 값의 무한 루프는 이렇게 완성되어 지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일 따위를 보람으로 삼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방향성”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의미는 사람이 '의미를 추구한다'는 '지향성'을 가질 때 비로소 생겨나는 특성이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의미는 어딘가에 점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추구한다는 의식의 방향이 생기면서 출현하는, 어디까지나 동적인 개념이다. 즉, 의미는 결코 어딘가에서 찾아주기를 줄곧 기다리는 고정된 성격이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자신의 내면이 작용하면서 비로소 생겨난다. p.128

우리는 생산기계가 아니다. 최상의 효율로 가치를 만들어내는 기계가 아니다. 고정된 의의라는 어떤 목표점에 도달하는 것이 삶의 목표가 아니란 말이다. 그것 보다 내가 어떤 것을 추구하면서 얻는 것이다. “'마음=몸'이 다양한 일을 맛보고 행복을 느낌으로써(p.133)” 살아가는 의미를 찾게 된다. 이러한 추구함은 “세상의 다양한 사물과 인생 그 자체로도 향하며 대상에 잠재한 본질을 상세히 알고 깊이 맛보는 일(.165)”인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다. 계획과 합리성, 효율성, 가치 이러한 계량적인 실적들이 우리를 좀먹고 있다. 이를 위해 즉흥성, 번거로움을 감수, 창조적 놀이를 통해 ‘머리’가 하는 계량적인 수치를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나는 그 조언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오늘도 밥 값 앞에서 웃다가, 페이퍼 위에서 좌절하고, 먼지같이 가라앉아 집으로 돌아간다. “식사가 마지못해 치르는 의무처럼 이루어”지고, “삶 자체가 어쩔 수 없이 살고 있는 의무로 전락(p.188)”한 이 순간. 무한히 돌아가는 챗바퀴를 보며 오늘도 버티고, 내일도 버텨야 하겠지만. “계속 이어가야 한다고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말고 그저 길고 긴 인생에서 여유로운 마음을 갖고 노는 시간을 즐기(p.210)”라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결국 오늘도 일 따위를 보람으로 삼았다.

-------------------------------------------------------------------------------

헝그리 모티베이션으로 나아가기만 해서는 안심할 수 없는 지금, 이간만이 가질 수 있는 도익가 요구되는 시대에 우리는 과연 어떠한 가치관으로 무엇을 지침으로 삼고 살아갈 수 있을까. p.18

우리의 머리는 질적인 불만족을 양적으로 보충하려고 발버둥친다. 그 결과 제한 없이 야만 늘리는 꼴이 되는데 이것이 의존증의 본질적인 작동원리다. 다시 말해, 수동적인 현대인은 대리만족을 위해 제공된 물질이나 행위에 현혹되기 쉬울 뿐만 아니라 그에 탐닉하게 되어 의존하는 상태에도 쉬이 빠지게 된다. p.40

중년기 위기의 저연령화 현상은 왜 일어날까? 한 가지 원인은 '사회적 자기실현'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데 있다. p.62

어느 사이엔가 많은 학교에서 '학문'이 아니라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인간'을 키우는 데에 '도움이 되는' 교육을 주된 사명으로 믿게 되어 실존적 주제를 다룰 여유를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p.66

노동이 안고 있는 딜레마는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동물이면서도 다른 동물과는 결정적으로 다르게 문화를 창출해내고 문화를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양면성을(p.82) 동시에 갖고 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p.83

본래는 인간적인 보람을 얻어야 할 일이 어느 사이엔가 노동이라는 행위에 흡수합병되어 완전히 변질되고 말았다. 그리고 노동이야말로 가치를 창출한다는 노동가치설이 사회경제의 근본적 가치관으로 자리 잡았다. 더욱이 예로부터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받던 차분한 관조생활의 의미가 완전히 잊혀 사라지고 단지 나태하고 비생산적인 것으로만 인식(p.103)되었다. 또한 전력으로 천직을 수행하는 일이, 세속 내 금욕이야말로 가치 있는 삶이라는 프로테스탄트 가치관의 출발점이 되고 노동해서 돈을 버는 일이야말로 선행이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거기서 자본주의라는 사고가 생겨나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에토스가 힘을 갖게 된다. 즉, 라파르그의 자본교에 빗대어 표현하자면 '노동교'라는 종교에 근현대인이 완전히 홀려버리고 만 것이다. ...(중략)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입구에 내걸린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Arebeit macht frei' 표어가 찍힌 사진다. p.104

우리도 어느새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거짓된 표어에 휘둘려 속고 있는 것은 아닐까. p.105

사람이 살아가는 의미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는 의의를 추구하는 삶에 지쳤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다시금 의의를 물어본다고 해서 무언가를 찾을 수 있지도 않다. 생산기계처럼 항상 가치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압박을 느껴온 우리는 의의 있는 일을 하라는 주술에 꽁꽁 묶여 초조해하고, 무엇보다 소중한 의미를 느끼며 사는 삶을 상상할 여유조차 없는 상태에 빠진 것이다. p.125

의미는 사람이 '의미를 추구한다'는 '지향성'을 가질 때 비로소 생겨나는 특성이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의미는 어딘가에 점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추구한다는 의식의 방향이 생기면서 출현하는, 어디까지나 동적인 개념이다. 즉, 의미는 결코 어딘가에서 찾아주기를 줄곧 기다리는 고정된 성격이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자신의 내면이 작용하면서 비로소 생겨난다. p.128

사람이 살아가는 의미를 느끼는 것은 결코 가치 있는 일을 이뤄서가 아니라 '마음=몸'이 다양한 일을 맛보고 행복을 느낌으로써 실현된다. p.133

인류에 도움을 주는 이 활동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거나 사는 보람을 느끼고 싶다는 동기에서 행해진다면 이 역시 욕망이 위장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선행'처럼 보이는 행동이 자기 인생의 보람이나 존재의 증명을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한 것이라면 그 행동이 아무리 사랑인 듯 보일지라도 내면의 진실은 욕망이므로 위선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p.152

지금까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인생이나 세상을 향해 '의미'를 추구하는 방향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강조 해왔다. 이 방향성은 '마음'이 일으키는 '사랑'의 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랑은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향하는 감정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다양한 사물과 인생 그 자체로도 향하며 대상에 잠재한 본질을 상세히 알고 깊이 맛보는 일이다. p.165

식사가 마지못해 치르는 의무처럼 이루어진다면 이는 곧 삶 자체가 어쩔 수 없이 살고 있는 의무로 전락했음을 시사한다. p.188

효율주의를 포함해 목적만을 지향하는 사고는 비즈니스뿐만 아니라 현대인의 사고 전반에 깊이 침투해 있어 우리는 어떤 사소한 선택을 할 때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보는 습관이 생겼다. ... 그래서 '결국', '어차피', '귀찮다'는 말을 마구 하게 되고 '어차피 같은 결과가 나올 거라면 쓸데없이 헛수고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놀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쓸모없음' 위에 성립하기 마련이며 그 결과는 어디까지나 이차적인 데 지나지 않으므로 목적보다는 과정에 재미가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합목적적 사고에 치우친 심적 상태에 '놀이'가 파고 들어갈 여지가 전혀 없다. 그래서 인생 자체도 다른 사람에게 자랑할 수 있는 '의의'를 훈장처럼 모으기만 할 뿐 정작 중요한 '의미'는 느낄 수 없는 공허함으로 가득차는 것이 아닐까. p.200

머리의 계획성과 합리성을 회피하려면 '즉흥'이라는 정반대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이 매우 유효하다. p.203

또 하나의 중요한 방법으로 '번거로움'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사고방식이 있다. 머리에는 효율성 높은 결과를 얻으려고 하는 조급한 성격이 있다. 번거롭다고 하는 감각은 여기에서 생겨난다. 이 감각은 마음에서 온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머리에서 나온다. p.206

'창조적 놀이'는 이러한 식으로 자유롭게 형식을 깨부수는 일이다. ... 이제 무언가가 될 필요 없이 그저 무언가를 하면서 놀아도 좋지 않을까. 그것이야말로 놀이의 진수라고 할 수 있다. ... 계속 이어가야 한다고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말고 그저 길고 긴 인생에서 여유로운 마음을 갖고 노는 시간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p.210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0        
[조선의 무인은 어떻게 싸웠을까?-최형국]신과 악마, 모두 디테일에 있다. | Memento 2018-07-15 20:44
테마링
http://blog.yes24.com/document/10530791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eBook]조선의 무인은 어떻게 싸웠을까?

최형국 저
인물과사상사 | 2016년 10월

        구매하기

신과 악마, 모두 디테일에 있다.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외교관들이 협상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한 말이다, 독일 루트비히 미스 반데어로가 건축물의 사소한 부분까지 최고의 품격을 지녀야만 명작이 될 수 있다며 자신의 성공 비결을 ‘신은 디테일에 있다.’고 한 말에서 유래했다. 두 말을 보다 보면 참 신기하다. 악마와 신이라는 대립적인 요소가 결국 같은 디테일에 있다는 말인데, 사극에서 벌어지는 논란을 보고 있노라면 고개가 끄덕여 진다. 역사를 차용한 팩션사극이나, 사료가 극히 빈약한 고대사를 재현한 사극에서 신과 악마의 갈등은 극에 달한다. 아에 판타지를 표방한 <태왕사신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주몽>에서 나온 한나라의 철기군은 시대를 뛰어넘어 버려 경악을 금치 못할 수준이다. 작은 소품 정도는 애교로 봐준다 하더라도, 명백하게 역사적으로 인정받은 사실들마저 각색하고, 러브라인을 위한 불필요한 인물들까지 끼어들어버리니 사극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소설로 보는 것이 마음 편한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빈 부분을 상상으로 채워 넣어야 하면서도 재미를 놓칠 수 없는, 그러면서도 동시에 싸고 효율적으로 일을 진행해야 하는 제작자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겠지만, 이런 사례는 무수히 많다. 위키디피아 등에서 한국 사극 부분에서 “고질적인 문제점” 또는 “한국 사극의 고증무시 사례 및 암묵의 룰”과 같은 파트가 따로 있을 정도이니… 그것을 바라보는 전공자의 입장에서는 마음이 쓰릴 수 밖에 없다.

<조선의 무인은 어떻게 싸웠을까>는 이 문제에 대해 전공자로서 외친 비명이다. 저자는 “검객(劍客)이며 역사학자”로 현재 한국전통무예연구소장으로 활동하면서, 무와 문을 연마하는 사람이다. 사극 속에서 반복되는 군사사, 무예사의 오류를 적나라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이러한 오류가 자칫 사람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 줄 수 있음을 심각하게 걱정한다. 아무렴 그럴까 싶겠지만, <주몽> 방영 당시 철기군을 진짜 믿었다는 썰, 실재로 소서노가 저렇게 예뻤냐고 군대 선임들이 역사학과 출신 후임에게 물어봤다는 썰들이 난무했다. 사극이나 미스터리 극에 항상 따라 붙는 질문은 “실화”논쟁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지만,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까지가 가짜인지는 헷갈리기 마련이다. 재미를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가공이 필요한 법. 그저 역사책마냥 그저 줄줄이 나열할 수 만은 없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이상, 창작자의 자유와 현실적인 문제 속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 개인적으로 소설이나 글로 만들어진 저작물이 영화화 되는 순간, 그 저작물은 죽는다고 믿는다. 더 이상 상상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한 배우의 이미지, 인상적인 한 장면이 머리 속에 박혀버린다면 같은 텍스트를 가지고 다른 갈래로 상상해 내기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최수종이 시대를 뛰어넘어 왕건이었다가, 이제마였다가, 장보고를 거쳐 대조영으로 가는 웃지 못할 테크트리가 발생한다. 사극전문 배우로서 입지를 폄하하는 뜻이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가 박히기 시작하면 바꾸기 어렵다는 반증이 아닐까. 그렇기에 저자의 절규에 깊은 공감을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순신 장군. 3년 전, 국회에 있는 이순신 장군상이 왜색 시비에 시달려 교체되었다. 이 일이 단순한 일일까. 우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인, 그리고 가장 역사적인 자료가 많이 남아있는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적국의 복색을 갖추고 있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시간이 흐르고 흘러, 모든 동상이 사라지고 국회의 동상만 남았다고 생각해 보자. 임나일본부설 같은 헛소리가 나오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사극과 같은 영상물들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훗날에 살아남은 자료가 그것 뿐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기억하고 믿어버린다면 우리에게 무슨일이 일어날지 상상해보자.

저자의 주장대로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장치를 도입하고, 시스템을 구축하고, 성적 지상주의를 벗어나는 것이 대안이겠지만, 현실적으로 돈과 시간과 인력을 무시할 수 없다. 또한 한꺼번에 충족되기도 불가능하다. 다만, 신(훌륭한 고증)과 악마(최악의 고증)은 같은 장소(디테일)에 있다. 그 마을 되새겨 봐야하지 않을까.

-------------------------------------------------------------------------------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은 늘 똑같이 흘러가는 듯 보이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펼쳐지고 망각되어 간다. 그 안에서 우리는 더 의미 있고 기억해야 할 일들을 묶어 '역사'라는 이름으로 재포장한다. 그 재포장 과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사료와 다양한 관점을 바탕으로 사건을 재구성하며 본질적인 의미에 접근하고자 한다. p.12

역사 고증의 핵심은 "왜?"와 "실제로 그 시대에 가능했을까?"이다. 이에 따라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것을 실제 자료에 맞추어 고증하는 것이다. 물론 단 몇 줄짜리 사료를 바탕으로 창작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그것이 공개되는 순간 관객들은 그것을 진실 인 양 받아들일 수 있기에 늘 조심하고 조심해서 고증해야 한다. p.177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0        
1 2 3 4 5 6 7 8 9 10
진행중인 이벤트
트랙백이 달린 글
내용이 없습니다.
스크랩이 많은 글
내용이 없습니다.
많이 본 글
오늘 66 | 전체 43315
2005-12-30 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