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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양형 이유-박주영] 죽이느냐 살리느냐 역시 쉽지 않다. | Memento 2020-04-26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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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어떤 양형 이유

박주영 저
김영사 | 2019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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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쉬운 판결이 어디 있으랴. 쉬운 선택이 있기는 한 걸까. 죽이느냐 살리느냐 역시 쉽지 않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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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를 하다보면 난감한 상황이 많다. 사정은 딱하나 법과 규정은 고정적이고, 해석이나 재량의 여지가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담당에게 아무리 빌고 애원해도 다른 방법이 없다. 법이나 규정이 잘못된 경우는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결국 담당자인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인데, 그것도 쉽지 않다.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처리해야 정의다. 형평성의 문제다. 나는 걸리고 너는 안 걸린다면, 그건 법치주의가 아니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쉽지 않다. 단순한 규정에도 예외는 항상 발생하기 마련이다. 사람의 삶이 똑같지 않듯이 각자의 사정 역시 다르다.

종종 강력범죄로 보이는데 판결은 터무니없이 약하게 나온 기사를 접할 때, 사람들은 분노한다. 법이 잘못되었다고도 하고, 판사가 문제라고도 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전관예우는 이러한 사법불신의 대표적 사례다. 실재로 그렇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아니라고 믿는다. “‘죽이느냐 살리느냐 To kill, or Not to kill’의 처지에 선 사람에게도 선택은 괴로운 문제(p.279)”라고 고백하는 판사들이 많음을 믿기 때문이다. 현직 비주류(?) 판사가 쓴 <어떤 양형이유>는 그래서 읽어봄직하다. 왜 그런 터무니없는 판결이 나올 수밖에 없는지를 고민케 한다.

사실 기사는 개개의 사정을 전달하지 않는다. 자극적인 내용과 정보만 전달할 뿐이다. 이를 보완할 방법이 없을까.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판결문이 있다면 2016헌나1”가 아닐까 싶다. 이 판결문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인용한 판결문인데, 생중계를 통해 전 국민에 공개되었다. 정치적 문제를 떠나서 판사들의 중노동을 통해 만들어진 판결문들이 이와 같이 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최대한 쉽게,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다면, 법에 대한 불신도 어느 정도 해소되리라 본다. 현대사회에서 법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렇다면 결국 법과 친해져야만 하는데 판결문에 대한 접근이 쉬워진다면 그만큼 어떤 양형이유에 대한 고민이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우리의 인식변화도 필요하다. 정의와 선함이 승리한다고 믿는다. 문제는 각자의 정의와 선함이 다르다. 저마다의 정의와 선함이 난립하는 상황에서 나에게 맞지 않는 판결은 부정의고, 악함이다. 그래서 우리는 법에 호소하고, 법정을 찾고, 공명정대한 판결을 요구한다. 하지만, “법정은 선악의 공론장이 아니다.(p.50)” “같은 것을 같게, 다른 것을 다르게 취급한다는 정의론은 사실상 알맹이 없는 이론이다. 세상에 같은 사례는 없다. 서로 유사한 것을 같은 범주로 묶어 같다고 선(p.370)언할 수밖에 없는데, 일반화하고 범주화하는 과정에서 벌써 정의는 훼손되고 만다. 다른 것을 같은 것으로 취급해야 하기 때문이다.(p.370)” “불법과 적법의 영역에는 선악이 개입될 수 없다. 선의에서 비롯된 불법도 있고 악의에 차 있지만 적법한 행위도 있다.” “선악은 양형에 다소 참고 될 뿐이다.(p.50)” 우리가 믿는 정의와 선함은 어느 곳에도 없다.

결국 방법이 없는지도 모른다. 좋은 법을 만들고, 뛰어난 판사를 고용하고, 좋은 제도를 만들더라도 모든 정의를 구현하고 선함을 지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건가. 그럴 수는 없다. “국민은, 불복할 수 없는 상급심(p.13)”이다. 국민의 명령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더불어 국민인 우리 역시 깨달아야 한다. “법정이라는 무대에 오른 드라마에는 해피엔딩이 없(p.27)”, “법정은 모든 아름다운 구축물을 해체하는 곳(p.28)”이라는 것을. 법원에 없는 것을 요구한다면 그 역시 잘못된 명령이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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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 불복할 수 없는 상급심이다. p.13

법정이라는 무대에 오른 드라마에는 해피엔딩이 없다.(p.27) ... 법정은 모든 아름다운 구축물을 해체하는 곳이다. 사랑은 맨 먼저 해체되고, 결국 가정도 해체된다. 형사사건에서는 한 인간의 자유를 지지해준 법적 근거마저 해체시킨다. 재산을 나누고, 아이도 나눈다. 사랑의 잔해를 뒤적이고 수습하다 보면 법정이 도축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법관은 굳어버린 사랑을 발라낸 다음 가정을 이분도체, 사분도체로 잘라내고 무두질한다. 법은 날카롭게 벼린 칼이고, 법관은 발골사다. p.28

폭력이 난무하는 곳보다 더한 공적 영역은 없다. p.36

사실관계가 증거, 특히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주로 따지는 영역이라면, 해석은 문자의 의미와 가치관, 감수성의 영역이다. 해석은 옷감과 비슷하다. 작은 옷에 억지로 몸을 욱여넣으면 단추가 터져버리지만, 옷감에(p.47) 신축성이 있다면 가능하다. 그러나 아무리 신축성이 있어도 담을 수 있는 용적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고무자루를 옷이라 할 수 없다. 이는 법의 외피를 둘렀을 뿐 규범이라고 부를 수 없다. 법과 같은 규범은 정해진 사이즈가 있어야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라지, 엑스라지, 44, 66이 법이라면 옷감의 신축성이 바로 해석의 영역이다. 사이즈를 해석의 최대치로, 신축성을 시대정신으로 비유할 수 있다. 그 시대상황이나 사회적 관습, 동시대인의 보편적 인식, 당대의 사회구조 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정확한 법률해석을 할 수 없다. 시대정신이 법의 엄격한 해석을 요구하느냐, 아니면 유연한 해석을 요구하느냐에 따라 법의 해석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사실관계 인정이나 법률의 규범적 해석은 법원치과 선례 등이 누적된 경우가 많으므로, 법관들마다 중구난방의 결론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p.48

불법과 적법의 영역에는 선악이 개입될 수 없다. 선의에서 비롯된 불법도 있고 악의에 차 있지만 적법한 행위도 있다. 법정은 선악의 공론장이 아니다. 선악은 양형에 다소 참고될 뿐이다. p.50

법정증언은 진실된 피해자가 다시 마주치는 폭력적 상황이다. 그럼에도 진실된 피해자라면 견뎌야 한다. 힘들고 불쾌해서 증언을 못하겠다거나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갈 경우 유죄 입증은 점점 더 힘들어지고 변호인의 공격은 성공을 거둔다. ... 진실은 어눌하고 오락가락하며, 기억은 희미하고 게으르지만 대부분 시험대를 통과한다. p.53

혐오는 대부분 관념에 정주한다. 혐오의 대상을 관찰하고 그들의 삶 속으로 조금만 들어가보면 혐오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편견에 근거한 것인지 금방 깨닫게 된다. p.100

강만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다. 산재사건에서는 형벌도 낮은 곳으로만 흐른다. 기업이 크면 클수록 그 기업의 최고책임자에게까지 산재사고의 책임을 묻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p.133

편견은 진영을 만들고, 진영 속에서 강화되어 차별과 혐오를 낳는다. 집단 혐오는 사적 혐오를 정당화하고, 그 집단을 혐오하는 다른 집단을 만들어낸다. A처럼 가장 약한 개인과 집단부터 혐오의 대상이 되고 결국은 차례차례 조리돌림당한다. p.147

그러나 법의 영여에서 동정이나 연민은 위험하다. 인권은 시혜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수자에 대한 법적 보호를 시혜라고 보면, 그 시선은 언제 철회해도 무방한 것이 된다. p.153

법의 주된 기능은 선긋기에 있다. 적법과 불법을 경계로 국가권력으로부터의 보호 여부가 결정된다. p.154

햇볕은 감미롭고, 비는 상쾌하고, 바람은 힘을 돋우며, 눈은 마음을 설레게 한다. 세상에 나쁜 날씨란 없다. 서로 다른 종류의 날씨가 있을 뿐이다.”(존 러스킨) 세상에 나쁜 아이도 없다. 서로 다른 처지의 좋은 아이만 있을 뿐이다. p.218

결혼을 하고 시간이 흘러 깨달은 건, 결혼은 사랑해서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랑에 대한 예지로 감행된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오래 연애를 했더라도 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고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천천히 커지고, 작게 시작해(p.229) 크게 여무는 것이다. 사랑이 식는다는 말도 이상한 말이다. 확 타올랐다가 식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욕정이다. 결국 결혼은 저 사람이라면 계속 새롭게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지에서 결정된다. p.230

기억은 법적 사실이라는 존재의 집이다. 기억이 없으면 사실도 없다. 기억하지 못하고, 기록되어 있지 않다면, 적어도 재판에서는 그날 그 일은 벌어지지 않은 것이다. 나의 실감만으로 내 존재를 입증하지는 못한다. 누군가 나를 기억하고 언급하지 않으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적 존재는 물질이 아니라 기억과 이야기로 이뤄진다. 문제는 기억이 믿을 게 못 된다는 점이다. p.240

정을병은 단편소설 <육조지>(1974)에서 형사는 때려 조지고, 검사는 불러 조지고, 판사는 미뤄 조지고, 간수는 세어 조지고, 죄수는 먹어 조지고, 집구석은 팔아 조진다.”고 썼다. p.260

사느냐 죽느냐 To be, or Not to be’의 처지에 선 사람도 괴롭지만, ‘죽이느냐 살리느냐 To kill, or Not to kill’의 처지에 선 사람에게도 선택은 괴로운 문제다. p.279

소송은 타협의 지점 없는 일도양단의 장이다. ... 재판은 양자역학의 세계가 아니라 고전물리학의 세계다. p.279

가치는 상대적이고, 중요하지 않은 하찮은 가치란 없음에도 소송은 추어이나 생명 같은 계량할 수 없는 것을 형량해야 한다. p.286

모든 사안을 법대로 공평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법원칙이 법적 안정성의 문제라면, 유사해 보이지만 다를 수밖에 없는 각 사건에서 개별 사안에 따라 거기에 맞는 최선의 결론을 도출해야 하는 것은 구체적 타당성의 문제다. 어떤 법관은 법적 안정성이 정의의 영역이라면 구체적 타당성은 사랑의 영역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p.287

칼 포퍼의 지적처럼, 반증 가능성 없는 과학은 사이비이고 닫힌 사회가 곧 전체주의이듯, 화석화된 판사는 그 자체로 해악이다. p.289

이해나 공감이 경험에서 비롯된다면, 떨림과 감응은정성에 달린 문제다. 이해하고 공감하되 불 좋은 연탄마냥 뜨겁게 반응하지 않는다면, 쇳조각은 고사하고 달고나한 국자 녹여낼 수 없다. p.291

판사는 법이라는 바람을 맞으며 정의가 있는 곳을 가리키는 풍향계일 뿐이다. 풍향계가 갈팡질팡한다면 바람이 문제인가, 풍향계가 문제인가? 고장 난 풍향계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혐의는 오히려 정의에 있어 보인다. 정의는 동서남북처럼 고정된 방위가 없다. p.356

같은 것을 같게, 다른 것을 다르게 취급한다는 정의론은 사실상 알맹이 없는 이론이다. 세상에 같은 사례는 없다. 서로 유사한 것을 같은 범주로 묶어 같다고 선(p.370)언할 수밖에 없는데, 일반화하고 범주화하는 과정에서 벌써 정의는 훼손되고 만다. 다른 것을 같은 것으로 취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상황은 얼마든지 변주도고 무한히 확장된다. 이런 논리적 모순과 간극을 메우기 위해 규범과 해석은 열려 있어야 한다. 반증 가능성 없는 명제가 참이 아니듯 닫힌 규범과 해석은 위험하고, 정의에 반할 가능성이 높다. 법정형을 무겁게 하고 판사의 재량을 줄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p.370

법은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를 바로 찾게 하는 것이 국민의 건전한 법감정 내지 법의식인 것이요, 일단 제정된 법에 가치와 생명을 불어넣는 것도 법감정과 법의식의 힘이다.” 최종고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p.374

힘없는 정의는 무력하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 정의와 힘은 동시에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정의가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의가 되어야 한다. 정의는 시비의 대상이 되기 쉬우나, 힘은 시비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정의는 강해지기 힘들다. 결국 강한 것이 정의가 되었다.” 파스칼 p.374

법감정은 단순히 격앙된 감정상태가 아니라, 힘이 약한 정의일 가능성이 높다. 들끓는 법감정은 곧 강해(p.374)질 정의 아닐까? p.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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