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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날들의 사회학-정인호]문제제기를 멋지게 한 만큼 한 걸음 더 나아갔다면... | m o r i 2018-02-21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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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가까운 날들의 사회학

정인호 저
웨일북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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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제기를 멋지게 한 만큼 한 걸음 더 나아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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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에서 문제의 해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제의 발견'이다. 문제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해결할 지점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p.6"

 저자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르게 보기. 질문하기. 이 사소한 것에서 부터 새로움은 시작한다. 수 많은 발명품들은 부단한 노력과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주변을 다르게 보기 때문에 아주 사소한 우연(처럼 보이는)에 의해 만들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변화와 혁신은 결국 가까운데서부터 시작한다. 내 삶의 주변에서 먼 곳부터 시작하려할 수록 오히려 더 어렵다. 허황되고 공허한 메아리에 그칠 뿐, 가까운 내 삶을 변화시키기 어렵다. 당장 내일 일터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 하거나, 작은 습관하나 바꾸고자 해도 너무 먼 목표를 향하기만 한다면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까. 

 문제제기는 좋다. 제목에서 밝힌바 "가까운" "가장 익숙한 곳에서 발견하는 새로운 생각들"이 "창조"의 기반이 됨은 분명하다. 하지만 첫번재 글 <5인치 화면에 갇힌 사람들>을 읽고 마음이 상했다. 전혀 생각했던 방향도 아닐 뿐더러, 읽는 순간 이거 뭐야 싶었다. 시작하는 글에서는 창조 이야기를 하면서, '문제의 발견'을 제대로 해보자. 관찰 태도를 바꿔서 보자 해놓고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게 아닌가. 저자가 제시한 이야기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제목과 서론의 거창함에 속았다는 느낌이랄까. 스마트폰(전자기기) 사용의 부작용이 글쓰기나 학습효과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오히려 역으로 스마트폰이나 전자기기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과 같은 생각지 못한 이야기를 기대했다. 아니면 이 시대에 어떻게 하면 우리가 전자기기의 맹점을 극복할 것인가를 떠올렸다. (내 생각도 너무 단순하지만) 스마트 폰에 갇혀 자신으로 살지 못하니 '나 자신으로 살자'는 이야기는 새로운 '문제의 발견'이 아니라 생각했다. 스마트폰이 없어도 우리는 나 자신으로 살기 쉽지 않다. 단지 지금은 스마트폰이 강력한 매개일 뿐.

 같은 글에서 세부사항에도 이런저런 딴지를 걸고 싶었다. 난 이 책을 스마트 폰으로 보고 있다. 심지어 종이책은 보관하기가 어려워 최근 3년간 구매도 못했다. 그래서 글쓰기 능력이 부족한지 모르지만, 어느 누가 취업때 자소서 쓰는 일이 쉽겠는가. 자소서를 쓰기 어려운 것은 꼭 글쓰기 실력만의 문제는 아니다. SNS를 이야기하며 최소한의 서비스(좋아요)를 제공해줘야 유지가 된다고 하는데, 그건 현실에서 인관관계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가족 간에도, 이를테면 아버지가 돈을 벌어오지 않는다거나, 어머니가 가정사에 무관심하거나, 자녀가 부모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가지지 않는다면. 최소한의 서비스(애정)를 하지 않는다면 깨어지는 것은 매한가지 아닌가. 

 멋들어진 문제제기에 너무 큰 기대를 해버린 걸까. 그만 읽고 싶었지만 이미 산 김에 마저 읽었다. 분명 길어올릴 의미는 많았지만 이미 마음이 상해서 일까. 영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너무 박한 평가일까? 사회학이란 이야기를 뒤집어쓴 자기계발서? 동기부여책? 이런 느낌으로 읽었다. 이런 글도 못쓰는 녀석이 무슨 헛소리냐! 라면 할 말은 없다. 다만 내가 받은 느낌이 그러할 뿐. 그만큼 좋은 문제제기를 했음에 한 걸음 더 나간 이야기를 기대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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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에서 문제의 해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제의 발견'이다. 문제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해결할 지점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즉, 창조는 결과변수고 관찰은 선행변수다. 선행변수가 있어야 결과변수도 유요한 값을 드러낸다. p.6

우리는 '규정한다'의 사전적 개념을 다르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내용을 부여한다'를 '내용의 의미를 새롭게 창조한다'로, '안으로부터 형성한다'를 '안과 밖의 융합을 추구한다.'로, '다른 것으로부터 구별한다'를 '나만의 독창성을 발현한다.'로. 규정된 인생이 아니라 내가 규명한 인생으로 말이다. p.205

많은 양을 보태고 빼면 성질자체가 변한다. 양의 차이가 차이의 본질을 만든다. 어느 정도의 양에 도달하면 질이 변화한다.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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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물 검역소-강지영]소설의 결말대로 수십년 뒤 이만하면 잘 살았다고 웃으며 바라볼 날이 오기를 | m o r i 2018-02-20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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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신문물검역소

강지영 저
네오픽션 | 2017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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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결말대로 수십년 뒤 이만하면 잘 살았다고 웃으며 바라볼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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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것을 배운는 일은 항상 어려움의 연속이다. 게다가 어디서 물어볼 수조차 없다면 가슴만 먹먹해 진다. 해아래 새것이 없다고 하지만 내가 해보지 않았고, 써보지 않았고, 들어본적 없다면. 새로움은 공포의 대상이 된다. 게다가 처음으로 대면해야 한다면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은 다르겠으나)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신문물 검역소>의 업무나 우리 삶이나 마찬가지다. 어떻게든 결론을 짓거나 선택을 해야 하지만, 갈길을 헤매다가 시기를 놓치기 일쑤다. 그리고 좌절하고 후회한다. 소설처럼 알아간다는 것, 아니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언제고 희극적으로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 천재를 가장한 바보(?) 주인공이 벌이는 활극이 소설의 메인이다. 역사적 사실은 양념이다. 고전소설의 권선징악과 해학적인 주인공을 보며 때로는 부럽기도하고 때로는 답답하기도 하다. 저자가 일부로 그런 컨셉으로 쓴 것 같지만. 역사적 사실들을 재미있게 버무려냈다. 흥미로운 소재로 소소한 재미와 웃음은 있지만 그 이상은 잘 모르겠다. 소설의 결말대로 수십년 뒤 이만하면 잘 살았다고 웃으며 바라볼 날이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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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작고하시기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죽음이 잘 낫지 않고 해마다 재발하는 부스럼 같은 존재란 걸 알지 못했다. 밋밋한 살결 위에 어느 날 갑자기 솟아나 쓰리고 아리고 쑤시기를 반복하다 종래에는 맥업싱 툭 터져버렸다 일 년에 한 번, 기일마다 덧나 두툼한 흉터에서 다시 피고름이 솟게 하는 고질병.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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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 취중잡설 2018-02-11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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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 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파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텅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 도종환


정신없이 살다보면 문득 길 한가운데 혼자 서 있는 나를 발견한다. 지금 뭐하고 있는거지. 왜 이렇게 살고 있는거지. 힘들다. 이런 저런 생각들 속에 파묻혀 주저 앉고 만다. 그리곤 내가 걸어왔던 길을 죽 둘러본다. 결코 쉽지 않은 길들이다. 비교적 잘 정돈된 길을 따라 왔지만, 때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고 울창한 숲을 지나기도 했다. 그때마다 아 저기로 오지 말고 좀 더 좋은 길 편안한 길 똑바른 길을 따라왔다면. 후회해봐야 이미 내가 지나온 길은 바뀌지 않는다. 그 길을 건너 왔기에 이 자리에 주저 앉아 있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사실 투정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가야할 길을 본다. 안개가 자욱하고, 얼마나 더 험난한 길이 될지 짐작조차 못하겠다. 겁이 난다. 계속해서 걸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지친다. 하지만 길 한가운데서 주저 앉아 살 수도 없다. 일어나서 걸어갈 수 밖에 없다. 가야겠지. 그래도 오늘은 좀 쉬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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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과 교류의 문명사-주경철]과거로의 모험 | Memento 2018-02-11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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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모험과 교류의 문명사

주경철 저
산처럼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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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과 함께하는 흥미진진한 과거로의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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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특이한 행위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반감을 가진다. 잘못된 역사교육이 한 몫을 차지하겠지만, 현재를 버텨내고 미래를 대비하기에 버거운 현실 역시 큰 부분을 차지한다. 급변하는 현실을 따라가기도 버거운데다가 당장 내일의 결과도 예측하기 어려운 판국에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들을 돌아보고 공부하는 행위는 언듯 합리적이지도 않고, 이치에 맞지도 않다. 이 시대는 지극히 미래 지향적(?)이고, 생존을 위해서도 필수 덕목이다.

 그럼에도 우리 인간은 생존의 계시를 거스르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소와 말이 어떻게 세계를 움직였고, 장건이나 카르피니가 어떻게 모험을 했고, 질병이 어떤 방법으로 문명을 파괴하고 변화시켰는지를 궁금해 하는 것은 일견 무가치해보인다. 일반적으로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향한다.(혹은 그렇게 믿는다.)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이 흐름을 거슬러 올라간다. 과거에서 우리가 놓친 부분은 없는지, 지금 이 시대는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세상을 만들어갈지. 생존의 계시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질문들은 거꾸로 내달림으로 목적지에 다다르고자 한다.

 주경철 선생의 일련의 저작들은 '생존의 계시', 시간의 방향성에 대해서 고민하게 한다. <모험과 문명의 교루사>와 같이 '세계화 이전의 세계화'의 시대에 대한 이야기들을 통해서 말이다. 속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세계는 언제나 연결되어 있었고, 이로인한 문물교류(심지어 세균까지도!)는 문명의 흥망과 인류의 역사 변화의 동력이 되어 왔다. 그리고 여기서도 '생존'보다는 '도전', '모험', 혹은 '세상과의 불화'한 인물들이 있었다. 실크로드의 개척에 선봉이었던 장건이나, 더 나아가 처음 아프리카를 떠나고,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던 그 누군가들. 그들은 미래를 향해 나아갔고, 그들이 희생으로 세상은 변화했고, 문명은 성쇠를 반복했다. 반면, 그들을 발견해서 세상에 내놓은 것은, 기억하고 따르는 자는 과거로 향하는 자들이다. 시간의 흐름은, 변화의 움직임은 과거와 미래로 향하는 양방향 속에서 현재로 수렴하는 것은 아닐런지.

 그런면에서 역사를 배우는 일은 과거로 모험을 떠나고, 과거와 교류하여 현재를 변화시키는 것.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도전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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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는 전 지구적인 소통과 교류의 역사다. 세계 각 지역에서 비롯되어 다시 세계 각 지역을 향해가는 문물의 교환 흐름에서 유리하게 대처하면 선두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렇지 않고 고립되거나 지체하면 몰락하기 쉽상이다. p.5

오남용될 가능성이 있는 일은 반드시 오남용된다는 머피의 법칙이 작용했다. p.174

'예외적 전형성'을 보이는 인물. 크게 보면 자기 시대의 흐름 속에 있지만 늘 주변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키며 소동을 벌이는 존재. 이런 인물들이 내놓는 시끄러운 마찰음이 그 시대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곤 한다. p.297

세계사의 중요한 사건을 초래하는 동력 중 하나가 다름 아닌 인간의 혀끝 문제. 즉 '맛을 찾아서'라는 것은 참으로 희한한 일로 보일 수도 있다. p.303

육체의 병이 동시에 사회 전체를 병들게 했다는 데에서 더 큰 문제점을 찾으르 수 있다.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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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엄기호]"여기가 너의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 Memento 2018-02-07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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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엄기호 저 저
푸른숲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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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너의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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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시절이고 직장을 다니는 지금이고 제일 싫어하는 말이 있다. 결단코 나는 이런말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말이 있다. "나때는 안그랬다!" "나 때는 말이지......" 시리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라고 골백번 말하고 싶지만 그게 어디 쉬운일인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지당한 말씀입니다.' '요즘 세상이 어디 그런가요.' '저도 어리지만 요즘 저보다 더 어린 친구들은 좀 더 다른가봅니다.'라며 맘에 없는 이야기를 곁들인다. 속으로 다짐할 뿐이다. 나는 절대 그러지 말자.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세상 혼자 살 수 없기에 다름을 만날 때마다 목구멍을 박차고 나오려는 말 "나 때는 말이지." 오늘도 삼키고 삼키지만, 스스로 점점 꼰대가 되어 가는 가보다. 나도 모르게 저 말을 하고 말 것만 같다. 듣는일에 능해야하는데 말하는 일에 능하고자하는 욕심일까. 아니면 생물학적인 욕구일까. 

그런면에서 엄기호 작가는 대단하다. 제자들의 말을 잘 듣고 그것을 잘 번역한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역시 마찬가지다. "그 정도면 너흰 괜찮아."(p.8)라 위로하며 이야기를 풀어낸다. <@좌절+열공, 서해문집, 2011> 강연집에서 책을 쓴 배경을 이야기한다. '들리지 않는 유령의 목소리를 어떻게 들리게 할 것인가?' (@p.525)는 고민을 가지고 "권력화된 언어로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릴 만하게끔 번역 작업을 한(@p.526)" 것이 이 책의 결과물이라 말한다. 책 제목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p.527)"다. "첫째는 우리 사회에 대학생이나 20대를 비난하는 사람들한테 '그럼 너희가 말하는 청춘은 도대체 뭐냐, 너희가 말하는 청춘은 도대체 언제 가능한 거냐, 그 청춘의 조건은 뭐냐, 그 조건을 이야기 하지 않으면서 청춘이 아니라고 말하는 너희 목소리는 얼마나 권력이고 폭력적인지 반성해라.'(@p.527-528)"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왜 꼭 청춘을 물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얘기(@p.528)"다. "'너희는 젊고, 너희 때가 제일 팔팔하니까 너희가 앞장서서 싸워라." 이러면서 책임 회피를 하는(@p.529)" 것이라고 "젊으나 늙으나 우리는 동시대인(@p.528)"으로 함께 이 시대를 꾸릴 대상이라고 말한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는 은교의 대사에 공감한다면, 역으로 '당신의 늙음이 벌이 아니듯, 우리의 젊음도 상이 아니다.' 상을 받은 것도 아닌데 청춘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무시당하거나 책임을 강요당할 이유는 없다. 중요한 것은 젊은이고 늙은이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동시대인이라는 것. 그리고 각자 시대의 구성원으로서 각자의 책임과 권리가 있을 뿐이다. '"요즘 학생들은 힘든 일을 싫어한다."는 말로 누가 누구의 삶을 무례하게 삭제(p.14)'할 권한은 아무도 가지지 않았다. 늙은이 역시 대우 받아야 하듯, 젊은이 역시 존중받아야할 존재다. 하지만 우리 뿐만 아니라 세상의 청춘은 과연 어떤 대접을 받고 있을까. 아무도 다른 이의 삶을 모독할 권리 따위는 없다. (p.32) 

세대 간의 갈등, 세대 간 착취의 문제는 오랜 역사간 이어진 싸움이다. 어쩌면 생물학적으로 해결이 불가능할지 모른다. 우리의 본능이 그렇게 만들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엄기호 작가의 마지막 말처럼,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시대. 그 불가능함에서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

결국 우리는 여기서 뛰어야 한다. 우리의 청춘도, 우리의 늙음도, 로두스는 여기다. 지금 이 시간, 이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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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를 깨달았다.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정도면 너흰 괜찮아." p.8

어른이 된다는 것은, 즉 성장한다는 것은 자기만의 언어를 가지게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언어를 가질 때 비로소 인간은 자기만의 시선으로 새상을 읽고, 그 세상에 개입할 수 있다. p.13

오히려 우리가 질문해야 하는 것은 "요즘 학생들은 힘든 일을 싫어한다."는 말로 누가 누구의 삶을 무례하게 삭제해버리는가이다. p.14

"아니,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라고 말하는 순간 정치는 끝난다. 다만 도덕적 비난이 시작될 수 있을 뿐이다. p.16

이해란 통제와는 달리 내가 그들과 무엇을, 어떻게, 함께할 수 있는지 돌아보는 작업이다. 때문에 이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정보를 넘어 그들의 삶의 조건에 대한 지식이며, 그들의 감수성과 나의 감수성 사이에 거리와 차이에 대한 성찰이다. p.20

사람에 대한 앎과 시대에 대한 앎은 다르지 않다. 사람을 안다는 것은 곧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가는지, 그 시대의 조건과 방향을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p.21

학문이란 'sample'에서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 구체적인 이야기인 'example'을 뽑아내는 과정이다. 이 과정 자체가 분석이라고 나는 믿는다. 어떤 'sample'이 왜 'example'이 될 수 있는지를 연구하고 논증하고 규명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 사례에 지저분하게 추상적인 이야기를 갖다 붙이는 것이 분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p.24

인간은 자신의 언어를 돌아봄으로써 세계와 자신이 어떻게 매개되어 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자신의 언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회에서 학습된 언어, 주어진 언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자신의 언어에 대해 긴장하고 거리를 두게 된다. 이 거리만큼 주어지는 '빈' 공간, 그것이 바로 자유의 공간이며, 주체란 이 거리 사이에서 탄생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리고 여기에 반전이 있었다. '정장'이 도덕적 비난이 되어 이들을 언어 밖으로 내칠 때에 이들은 그 '성장'이 말하는 '성장'을 체험할 수는 없었지만 우리가 어떻게 성장할 수 없었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다르게 '성장'해왔는지를 언어화함으로써 오히려 그들이 말하는 '성장'에 도달할 수 있었다. p.26

누군가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들이 내놓는 답을 가지(p.31)고 왈가왈부한다면 그것은 삶에 대한 모독이다. 아무도, 다른 이의 삶을 모독할 권리 따위는 없다. 각자의 삶이란 각자가 던지는 질문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p.32

"누가 조국의 미래를 묻거든 눈을 들어 청년을 보라." p.68

스펙은 이 잉여인간의 시대에 '자기관리'라는 도깨비 방망이로 탈락시킬 놈을 찾기 위해 강조되고 있다.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할 의사도 능력도 없는 시장의 무능을 '자유'의 이름으로 개인의 무능으로 돌려버린 것이 바로 스펙의 실체이다. p.79

대학에서 더 이상 성장은 가능하지 않다. 대학 자체가 이미 사람의 성장에 별로 관심이 없다. 대학의 가치는 오로지 얼마나 많은 학생을 생존시켰는가에 따라 결정될 뿐이다. 이전에는 고등학교 단계에서 대충 끝났던 경쟁이 이제는 대학교 단계까지 옮아갔다. p.86

우리 모두는 본래 속물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 속물이 되어야만 하는 존재이다. p.89

그래서 우리는 이 인간이 무엇인지를 질문해야 한다. '인간'이 여전히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인간은 무엇인지를 이들과 함께 물어야 한다. 우리는 이들과 어떤 질문을 공유하고 있는가. p.92

기성세대가 말했어야 하는 것은 '그러면'이라는 막연한 희망의 언어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실천의 언어였어야 한다. 이렇게 저렇게 하면 세상이 잘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의 말이 아니라 정치란 본질적으로 부패하고, 민주주의란 그 자체로 양날의 검이자 혼돈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했어야 한다. p.120

이들은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게이머로서 정치에 참여한다. p.125

속물이란 바로 그런 역설 위에서 만들어진 존재이다. 믿는다는 것, 그리고 그 언어로 말을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르다. ... 민주주의가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그것을 믿지는 않는다. 이 두가지 전혀 다른 태도의 접점이 바로 속물이다. 속물들은 도덕이 사기임을 잘 안다. 그러나 그(p.127)들은 여전히 도덕이라는 외피를 필요로 한다. 도덕을 자기를 돌아보기 위한 윤리로서가 아니라 남을 공격하기 위한 정치적 무기로서 필요로 한다. p.128

학교라는 공간도 계급에 의해 권력화된 공간이라는 것을 망각하는 경우가 많다. 같은 학생이지만 생명은 동등하지도, 평등하지도 않다. 우리는 이것을 교실에서 일찌감치 경험한다. p.158

교육이 폭력이 되는 가장 한가운데에 본보기가 있다. p.165

가족이건 친척이건 친밀감을 만들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노력 없이 혈연이라는 이름으로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다. p.184

한국의 가족이 위기에 빠진 이유는 '가족'이라는 이(p.186)름으로 서로에게 '노동'을 하지 않고 그저 쉬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족이 편안하게 쉬는 곳이지 노동하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감정노동'을 대신하는 것이 '소통'이다. 물론 소통도 감정노동의 일환이다. 그러나 그 '소통'이 내가 애써서 해야 하는 노동이라고 아무도 일러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소통이 있어야 정상적이고 화목한 가족이라는 말을 규범적으로만 하였지 그 '소통'이 수고로운 노동이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렇다 보니 소통이 '노동'이 되는 순간 모두가 피곤해한다. 동시에 소통이 제대로 혹은 활발하게 일어나지 않는 자기 가족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 또한 그 문제의 일부분이라는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 p.187

소통은 감정노동이 노동으로 여겨지지 않을 만큼 경제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을 가진 가족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p.191

소통이 폭력에 맞선 대안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체가 폭력이 되고, 불행의 해결책이 아니라 소통하라는 강요가 오히려 불행의 시작점이 되어버린 것이다. p.198

상처는 인간에게 삶은 감수하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근원적으로 얻을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삶은 '그래서'로 이어지는 인과관계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연(p.207)결되는 윤리의 드라마임을 배우게 된다. 아니,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p.208

삶은 미래를 위해서 유예되어서는 안 된다. 유예를 한다고 해서 보장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오지 않을지도 모를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거나 감수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삶은 어차피 불확실하며 우연에 맡겨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에 우리가 이야기하는 '서사적인 사랑'이란 불가능하다. ... 사랑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사랑이 지속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진 것이다. p.213

사랑에도 인프라가 필요하다. 우리는 이 사실을 간과한다. p.224

사생활은 사회로부터 내가 물러날 수 있는 권리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물러날 수 있는 공간이 전혀 없다. 한편에서는 안전을 위해서 일상 모두를 공개적으로 감시한다. p.259

인권이나 존엄에 대한 감수성, 그리고 사회의식이 이전 세대들보다 한심할 정도로 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들에 대한 우리의 질타와 비판의 언어가 그들의 귀에는 참기 어려울 정도로 지겹고 고리타분한, 후지고 하나 마나한 말씀이 된 것뿐이다. p.260

현실을 무시한다는 것은 현실에서 내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를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돈을 무시하는 것은 도덕에 대한 무시이며, 곧 삶 그 자체에 대한 무시이기도 하다. p.265

소비는 '무지'를 먹고 살며, 돈은 무지를 통해 작동한다. 알면 먹을 수 없고, 입을 수도 즐길 수도 없게 된다. 알면 돈도 다치고, 소비자도 다친다. p.272

돈은 유예이지만 돈을 통해 우리는 비유예의 삶을 살아가는 아이러니를 경험하고 있다. 미래가 보증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래에 대한 보증인 돈을 통해서 증명하고 안도하는 것이다. p.278

돈이 우리의 사회적 관계를 매개한다. 우리는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지만 돈이 없다면 삶이 고립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돈이 없다는 것은 불편함 이상이다. 그것은 자유의 박탈이고 존재의 박탈이다. ... 돈은 행복이 아니라 자유이다. 돈을 돈으로 봄으로써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돈을 통해서 자유로워진다. 돈에 종속될 때 자유를 얻는다. p.281

우리가 돈의 노예가 되는 이유는 행복을 좇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를 박탈당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p.284

이들에게 자유란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시절의 그 '정치적 자유'가 아니라 '경제적 자유'이다. p.287

돈에 의한 교환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철저하게 그 이면에서 일어난 일을 감추고 파괴하며(p.296) 숫자로 추상화하는 힘이다. 그래서 돈에는 기억도 추억도 표정도 없다. p.297

어찌보면 삽질이야말로 훨씬 더 숭고한 유희에 가까운 열정이 아닌가? p.311

교환을 위해, 축적을  위해 열정을 다해야 하는 순간 열정은 고문이 된다. p.314

소비만 미화된 것이 아니라 노동 역시 미화된 것이다. 우리가 직업을 갈망하고 선택하는 기준이 되는 거싱 소비사회에서는 '돈'이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돈'만큼이나 '미적 가치'가 중요하다. 그래서 일과 놀이와 자아실현이 동시에 될 수 있는 직업을 선호한다. 바우만은 우리 시대의 일중독자들은 "노예가 아니라 가장 운 좋은 성공한 엘리트들"이라고 이야기한다. p.328

세상은 20대들에게 슈퍼맨이 되라고 한다. 성적은 당연히 좋아야 하지만 성적에만 목을 매서도 안 된다. 성격과 사회성이 좋아야 하지만 정에 매여도 안 되고 철저히 경쟁적인 약육강식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제도에 충실하면서 자기 경험도 많아야 한다. 한마디로 슈퍼맨이 되거나 죽으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정작 이들은 투명인간에 가까운 삶을 산다. 이들은 한국의 대학 서열 체제에서도 투명한 존재들이고 심지어 '88만 원 세대'라는 그들을 '위한', 혹은 그들에 '대한' 담론으로부터도 소외되었다. p.333

정치의 끝에서 윤리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윤리가 멈추는 지점에서 우리는 정치를 만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생명을 어떻게 분류하고 그 분류표에 따라 어떻게 취급하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새로운 정치는 이렇게 분류표에 질문을 던지는 데서 시작한다. 사유는 정당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그것이 얼마나 정당한지를 되묻는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유는 가장 정치적인 행위이다. 그러나 우리가 대학생(p.334)들을 바라보는 분류표, 즉 우리의 정치를 성찰하기보다는 그들을 정치적으로 바라보기만 한다. ... 정치적 주체로서, 경제적 행위자로서의 이들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듣고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매우 드물다. p.335

누군가 나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줄때 비로소 나의 말할 권리는 완성된다. 그렇기 때문에 권리는 말을 하는 나의 용기만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상대방의 '듣는 의무'를 요청한다. p.336

나는 이 글의 전체를 통해 이들이 생각 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전혀 다르게 경험하고 판단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다만 그것이 우리에게는 안 보일 뿐이었다. p.339

우리(p.340)에게 필요한 것은 해답을 공유한 공동체가 아니라 질문을 공유한 공동체이다. 같은 질문을 던지는 공동체가 오래 갈 수 있다. p.341

해답의 공유가 같아져야 한다는 폭력이라면 질문(p.341)의 공유는 차이에 대한 생산이며 다른 것에 대한 절대적인 환대이다. p.342

질문을 봉쇄해버린 사회에는 그 어떤 미래도 기대할 수 없다. 질문에 우리 스스로를 개방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끝이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끝이 없기 때문에 '냉소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이어감으로써 윤리적이 될 가능성이 열린다. 정답이 없기 때문에 질문하기를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정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질문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p.342

이방인을 환대하지 않는 공동체는 성장할 수 없다. 정답만을 추구하는 공동체에서는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없다. 낯선 것들에 대한 환대를 통해 교실이라는 공동체는 쇄신된다. 그리고 낯선 것을 환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낯선 것으로부터 오는 위험을 각오할 '용기'가 필요하다. p.343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곳은 믿음이 아니라 행동이다. p.362

누군가와 공감한다는 것은 그를 나의 장소에서 환대하는 행위이다. 그에게 나의 장소에서 살 수 있도록 허락하고 나의 장소를 그와 공유하며 '우리의 장소'로 만드는 것이 환대의 행위이다. 이 환대를 통하여 나는 그와 함께 '세계'를 만든다. 세계는 객관적으로 주어진 외부 환경이 아니다. 오히려 세계는 소통하고 경쟁하고 공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공감 능력이 활기에 차 있을 때 세계-내-존재로서 인간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벗어나느 순간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 되는 셈이라는 말에는 학생들도 동의한다. 사람 사이에 있는 존재, 그리고 그(p.371)사이에서 스스로 인지상정이 있는 '인간'이 되어가는(being) 존재, 그것이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공감 능력이 활기를 띠고 살아 움직이게 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의 공감 능력은 완전체로 미리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확장되는 힘, 능력이라는 역동적인 것이다. ... 우리의 공감 능력이 철저히 위계화되어 있다 ... 다양한 사회적 조건에 따라서 '인간'의 공감능력은 분할되어 있다. p.372

불가능한 곳에서 가능함을 상연하는 것, 그것보다 멋진 혁명을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여기가 내가 선 자리이다. 한 현인의 말처럼. "여기가 너의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p.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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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30 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