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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황진이’에게 띄우는 연애편지 | 나의 리뷰 2007-05-24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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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황진이’에게 띄우는 연애편지

 

홍석중의 [황진이]와 김탁환의 [나, 황진이] 비교 서평

 

1. ‘황진이’를 택하게 됨

지난 북한문학예술 수업시간의 기말 과제물로 남북한 문예물을 하나씩 고르긴 골라야 하는 딱한 처지(?)에서 고른 것은 ‘황진이’였다. 대책없는 호기심이 발동했다고나 할까? 딱딱한 기말페이퍼의 소재로선 기중 무른듯한 것일거라는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사실 모 교수님의 연구실에 여러 권 비치된 것을 물심이 발동하여 한권 구비해 둔 것이 인연이라면 인연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고로 다른 여러 수강생들에게 윽박지르듯 나는 ‘황진이’를 나의 기말 페이퍼 소재로 삼았으니 알아서 하라고 떠들고 다녀, 결국 다른 수강생들을 제치고 황진이를 독차지하게 되었다.

먼저 2002년 11월 15일 출판된 북한의 ‘떠들썩한’ 「황진이」는 홍석중이 썼다. 벽초 홍명희의 손자인 홍석중이 쓴 「황진이」는 이전의 북한영화나 소설에서 전혀 등장한 적이 없는 질편한 성적인 묘사가 삽입되어 있어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반면, 김탁환의 ‘조용한’ 「황진이」는 2002년 8월 12일 초판본이 발행되어 조금 일찍 선을 보인 작품이다. 거의 동시에 발표된 작품이라는 동시성과 소재의 동일성으로 적절한 비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문학 비전공자로서 어차피 인상비평의 선을 넘을 수 없는 일인지라. 어줍잖은 갖은 문학 상식을 동원할지라도 모자랄 수밖에 없을 것 같아 두려운 일이다.


2. 남북한 황진이의 총평

우선, 황진이를 읽길 잘했다는 마음이다. 그건 홍석중이라는 뛰어난 이야기꾼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황진이를 살아움직이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글을 황진이에게 보내는 연애편지 쓰듯 쓰고 싶다. 다시말해 스스로 시서예를 갖추었다고 자부하는 한량의 마음을 미혹시키는 진짜 황진이 말이다. 그건 아마도 어느날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둘도 없는 연인의 다른 이름이다. 홍석중의 황진이가 김탁환의 황진이보다도 연애편지를 쓰고 싶도록 만들고 있다는 점이 평가되어야 한다. 불행히도 김탁환의 황진이는 자의식으로 꽉 들어차 있고, 그걸 스스로 제어하지 못해 밖으로 표출하고 있다. 다시말해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으며 무언가 침잠하고 있고, 손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재미없는 지식인의 모습을 띄우고 있다. 아무리 그 지적 수준이 높고 뜻이 크다 할지라도 매력이 없다. 일반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감히 말하건데, 김탁환의 황진이는 21세기 한국 소설문학의 침체를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신경숙까지만 하더라도 수필체의 문체가 신선하였지만, 은희경에 들어서선 바햐흐로 한국소설의 황혼기를 보는 것만 같았는데, 김탁환에 이르러서는 눈도 침침하고 귀도 먼 것만 같다.

김탁환의 황진이가 큰 뜻을 품었다고 토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건 소부루주아지(이젠 중산층은 없지 않습니까!)의 공허한 자기과신 이상으로 읽히지 않았다. 황진이 어머니의 비극적 종말와 황진이의 방랑, ‘살인의 추억’ 및 기타 등등의 계기들은 그저 기계적으로 얽혀진 계기일 뿐 황진이의 황진이답게 만드는 그 무엇이 되기엔 부족해 보인다. 다시 말해 김탁환의 황진이는 그동안의 한학실력을 다듬은 김탁환 자신의 모습 이상으로 읽히지 않았다. 김탁환의 황진이를 보자.

큰뜻을 품고 꽃못에 이르러 서경덕을 모셨다는데, 범인(凡人)으로서 그 무한하고 추상적인 큰 ‘뜻’이 무엇인지 도저히 읽어낼 수가 없다. 겨우 읽어낸 것은 나라를 경영할 능력을 지닌 학인을 키워내는 학파를 후원하는 황진이 정도... 아, 그리고 자연을 벗삼아 소요하는 시적 기질을 지닌 지식인의 멋드러진 세상 달관? 이건 다시말해 학자로서의 자의식을 벗어나지 못한 소설가의 한계를 반영한다. 스스로의 자의식이 소설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깊이있는 한시의 식견은 빛을 잃고 있다. 사실, 이 책은 보기에 따라 요즘 잘 나가는 변호사나 검사, 또는 유명 지식인의 그러루한 인생역정을 읽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왜일까?

반면 홍석중의 황진이는 너스레를 떨고 있다. 그야 물론 천의무봉 달인의 태도이다. 홍석중은 당대의 역사는 당대의 역사적 한계를 고려하여 평가하고 기술해야한다는 '역사주의 원칙'을 자연스럽게 배어들게 할 만큼 황진이를 둘러싼 역사에 달통해 있다. 또한 한시와 시조를 소설 곳곳의 상황에 자연스럽게 풀만큼 김탁환 못지 않게 당대의 한시와 시조의 멋스러움을 꿰둟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대중적인 접근을 한다는 점에서, 대중적 교양소설의 하나의 전범을 이루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홍석중의 황진이의 주제로 읽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사랑은 요령부득’이라는 메세지이다. 이는 인생은 요령부득이라는 말로 등치될 수 있는 것이고 나아가 인생은 불가해하다는 것의 은유로 읽힐수 있다.

재미나지 않은가! 주체사상에서 추구하는 완성된 인간형인 공산주의적 인간이 내뱉기에는 좀...평소 몇권의 북한 소설을 읽으면서, 매우 고전주의적인 교양소설과 맥이 닿아있는 점은 왜일까 의문을 품었는데, 몇권의 북한 문예물을 읽는 동안 약간의 이해가 자라났다. 그건, 공산주의적 인간전형을 그리기 때문이고, 마치도 이것은 예의 고전주의 문학에서 말하는 3위일체법과 유사한 기법을 추구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 홍석중의 장점은 북한 소설의 클래식한 면모를 다소 탈피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자유스러움의 원인은 소설의 소재 자체에서도 기인하고 있다. 아무래도 역사물은 당대의 현실을 그려내는 것보다는 북한적 심의체계 속에서 운신의 폭을 넓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 뿐은 아니다. 홍석중은 앞서 지적했듯이 대담하게 너스레를 떨 줄 안다. 그는 당대의 현실을 조선시대로 환치시키고 있다. 다음을 보자:


《…부중의 백성들이 근 5년째 가물루 하루 한끼 먹기 어려워합니다. …백성들이 무지렁이라 아무것도 모르는것 같지만 사또께서 자기 치적을 요란하게 떠들어 댈 때는 입을 막구 낄낄거리며 웃습니다.…》


위의 부중이라는 단어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그리고 백성들을 인민으로, 또 사또라는 단어를 수령이나 김정일 위원장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보면 어떨까? 이것은 분명 북한의 현실을 은유한 것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무의식적인 반영으로 해석된다. 문학 작품은 어쩔수 없이 당대의 현실이 삼투될 수 밖에 없다고 하지 않은가? 소설 곳곳에 사또에 대한 비평을 빌어 북한적 현상에 가차없는 관중(貫中)의 화살을 날리고 있다. 소설 속에 나타나듯이 암행어사까지 속이는 현실은 식량난 직전의 과장보고를 일삼던 북한 농업일군들의 도덕적 해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이 글을 읽었던 북한의 평범한 독자들은 어떻게 느꼈는지 굼금하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북한 독자들의 구체적이며 비공식적인 반향은 어떠했는지 알고 싶다.


3. 문제적 인간 황진이의 사랑

대개 이러저러한 야사와 소설속 황진이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거나, 호사가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승벽내기의 엉뚱한 것이거나, 또는 기생신분과 어울리지 않게 플라토닉한 사랑으로 그려진다.

먼저 홍석중의 황진이에서 그려지는 놈이의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은 요령부득이어서 신분의 벽이 허물어졌음에도 뜻대로 되지 못하고 있다. 말하자면 ‘말보로(Marlboro) 증후군(사랑을 차지할 능력을 갖추게 되었을 때는 이미 사랑했던 사람은 사라지고 없는 비극적 로맨스)'에 속하는 운명의 장난이 주체사관과 교직되고 있다. 놈이는 일자무식이었지만, 사랑을 잃고 강건한 붓놀림도 할 줄 아는 화적패의 두목이 되고있다.

반면, 황진이의 인연을 집어나가는데 있어서 김탁환의 황진이에서 보다 역사적 사실에 충실히 그리고 있다. 이사종과의 6년에 걸친 동거생활은 춘향이와 이몽룡과의 이별 전의 황홀한 시간을 연상케 한다. 무엇이 파국의 고통이며 그 기간이 길어지면 어째서 파국에 당도하는 지 설명은 사상되어 있지만, 아무튼 김탁환은 황진이로 하여금 “파국의 고통보다는 때이른 결별의 아쉬움을 택하”도록 만들었다.

황진이의 자유혼(魂)의 발동이라고 해도 좋고 도화살 내지는 역마살의 발동이라고 해도 좋을 성격적 비극미를 그나마 잘 그려내고 있다. 물론 김탁환은 황진이를 야담식으로 엮을 만큼 어리숙하지 않아서 교묘하게 사회적 담론을 교직시키는 능력을 발휘하였다. 1970-80년대의 진보적 문예조류의 격류를 거치고 난 다음일까? 진보적 사고와 민족주의적 정서를 굳이 표출해야만 떳떳할 수 있다는 지나친 두려움이 “물론 송나라 학자들의 주장을 곧이곧대 받아들이지 않고 끊임없이 비판하며 자기 것으로 녹여내셨답니다”라고 황진이가 ‘스승’ 서경덕을 찬탄하고 있다. 독자들이 스스로 사고하여 이미 알 수 있는 것을 부언시키는 태도는 소설의 긴장미를 떨어뜨리는 주범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세부묘사에 바쳐지지 않은 것임에랴! 이런 식의 교과서적인 중언부언으로 인해 김탁환이 그려낸 황진이의 사랑은 그닥 가슴 콩닥거리거나 애절하거나 하지 않다. 김탁환의 황진이는 시종일관 독백체로 일관하고 있는데, 이는 소설의 극적 효과를 더욱 감퇴시킨다. 역으로 수필체의 문체는 김탁환이 설정한 어떤 정체성을 궁구하는데에는 일정한 효과를 나타낸다.


4. 한없이 아름답기만 한 문장

물론 황진이라는 모티브는 다양한 변주가 가능한 고사이다. 김탁환의 변주가 다소 딱딱한 ‘평균율’이라면, 홍석중의 황진이는 완숙한 베토벤의 피아노 소타나와 비견된다. 일부러 홍석중의 장점을 논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김탁환의 새끼손가락은 이쁘기 짝이 없다. 문장의 고답적인 연마는 최근 소설이 지니지 못한 미덕이다. 이문구의 더 바랄 것 없는 육담과 한문투의 현란한 장광설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만하면 준작이라고 칭할 만하다. 즉, 김탁환의 건조한 황진이는 이른 새벽 모시적삼을 입고 도인(導引)을 행하여 기맥을 시원케하고 있을 때의 그 느낌을 전달해준다. 다분히 비과학적인 황진이 해석(사회적 담론으로 데코레이션을 거치긴 했지만)은 황진이의 고상한 모습을 부각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지식인 황진이를 그리고 싶었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데 작가의 자료섭렵, 인내심, 상상력, 필력에 경의를 표한다. 문제는 너무 고상하여 전혀 황진이스럽지 못했다는 데 있다. 황진이는 본래 너무나 놀기를 좋아하는 색계(色界)상의 천재적 인물인지라 죽어서도 길가에 묻히길 원했다는데, 김탁환의 황진이는 사실, 소설 곳곳에서 유가를 자처하고 있긴 하지만 깊은 산중의 비구니와 오락가락한다. 황진이의 실존에 천착하려 했다는 책속 작가수첩의 말과 배치되지 아니한가. 그런 점에서 앞서 밝힌 것처럼 이 책은 김탁환의 자아상이 너무나 많이 투영되어 있어 황진이의 실존과는 거리가 멀어졌다고 비판한 것이다. 기생 신분에 얽매인 유학자의 영혼을 지닌 황진이가 이 소설이 밝힌 황진이의 정체성이다. 정말, 황진이가 스스로의 실존을 그렇게 느꼈는지 의문이다. 굳이 극과 극은 통한다고 주장하면 더 이상 할 말은 없겠지만...

황진이라면 어땠을까? 홍석중의 무뚝뚝하지만 시원시원한 러브레터에 끌렸을까, 아니면 김탁환의 무언가 숨기는 듯한 소심하고 예쁘장한 러브레터가 마음에 들었을까?

역사적 현상과 사실의 해석이 이 만큼 달라질 수 있다는 데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필자가 누린 이런 호사를 보다 많은 남북한 독서광들과도 함께 나누길 꿈꾸며 글을 맺는다. 굳이 두 권중 한권만 읽어야 하는 바쁘고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직장인에겐 홍석중의 황진이를 권하겠지만, 나라면 결국 김탁환의 황진이를 선택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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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황진이’에게 띄우는 연애편지 | 독서와 음악감상 2007-05-24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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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나, 황진이

김탁환 저/백범영 그림
푸른역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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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황진이’에게 띄우는 연애편지

 

홍석중의 [황진이]와 김탁환의 [나, 황진이] 비교 서평

 

1. ‘황진이’를 택하게 됨

지난 북한문학예술 수업시간의 기말 과제물로 남북한 문예물을 하나씩 고르긴 골라야 하는 딱한 처지(?)에서 고른 것은 ‘황진이’였다. 대책없는 호기심이 발동했다고나 할까? 딱딱한 기말페이퍼의 소재로선 기중 무른듯한 것일거라는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사실 모 교수님의 연구실에 여러 권 비치된 것을 물심이 발동하여 한권 구비해 둔 것이 인연이라면 인연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고로 다른 여러 수강생들에게 윽박지르듯 나는 ‘황진이’를 나의 기말 페이퍼 소재로 삼았으니 알아서 하라고 떠들고 다녀, 결국 다른 수강생들을 제치고 황진이를 독차지하게 되었다.

먼저 2002년 11월 15일 출판된 북한의 ‘떠들썩한’ 「황진이」는 홍석중이 썼다. 벽초 홍명희의 손자인 홍석중이 쓴 「황진이」는 이전의 북한영화나 소설에서 전혀 등장한 적이 없는 질편한 성적인 묘사가 삽입되어 있어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반면, 김탁환의 ‘조용한’ 「황진이」는 2002년 8월 12일 초판본이 발행되어 조금 일찍 선을 보인 작품이다. 거의 동시에 발표된 작품이라는 동시성과 소재의 동일성으로 적절한 비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문학 비전공자로서 어차피 인상비평의 선을 넘을 수 없는 일인지라. 어줍잖은 갖은 문학 상식을 동원할지라도 모자랄 수밖에 없을 것 같아 두려운 일이다.


2. 남북한 황진이의 총평

우선, 황진이를 읽길 잘했다는 마음이다. 그건 홍석중이라는 뛰어난 이야기꾼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황진이를 살아움직이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글을 황진이에게 보내는 연애편지 쓰듯 쓰고 싶다. 다시말해 스스로 시서예를 갖추었다고 자부하는 한량의 마음을 미혹시키는 진짜 황진이 말이다. 그건 아마도 어느날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둘도 없는 연인의 다른 이름이다. 홍석중의 황진이가 김탁환의 황진이보다도 연애편지를 쓰고 싶도록 만들고 있다는 점이 평가되어야 한다. 불행히도 김탁환의 황진이는 자의식으로 꽉 들어차 있고, 그걸 스스로 제어하지 못해 밖으로 표출하고 있다. 다시말해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으며 무언가 침잠하고 있고, 손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재미없는 지식인의 모습을 띄우고 있다. 아무리 그 지적 수준이 높고 뜻이 크다 할지라도 매력이 없다. 일반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감히 말하건데, 김탁환의 황진이는 21세기 한국 소설문학의 침체를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신경숙까지만 하더라도 수필체의 문체가 신선하였지만, 은희경에 들어서선 바햐흐로 한국소설의 황혼기를 보는 것만 같았는데, 김탁환에 이르러서는 눈도 침침하고 귀도 먼 것만 같다.

김탁환의 황진이가 큰 뜻을 품었다고 토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건 소부루주아지(이젠 중산층은 없지 않습니까!)의 공허한 자기과신 이상으로 읽히지 않았다. 황진이 어머니의 비극적 종말와 황진이의 방랑, ‘살인의 추억’ 및 기타 등등의 계기들은 그저 기계적으로 얽혀진 계기일 뿐 황진이의 황진이답게 만드는 그 무엇이 되기엔 부족해 보인다. 다시 말해 김탁환의 황진이는 그동안의 한학실력을 다듬은 김탁환 자신의 모습 이상으로 읽히지 않았다. 김탁환의 황진이를 보자.

큰뜻을 품고 꽃못에 이르러 서경덕을 모셨다는데, 범인(凡人)으로서 그 무한하고 추상적인 큰 ‘뜻’이 무엇인지 도저히 읽어낼 수가 없다. 겨우 읽어낸 것은 나라를 경영할 능력을 지닌 학인을 키워내는 학파를 후원하는 황진이 정도... 아, 그리고 자연을 벗삼아 소요하는 시적 기질을 지닌 지식인의 멋드러진 세상 달관? 이건 다시말해 학자로서의 자의식을 벗어나지 못한 소설가의 한계를 반영한다. 스스로의 자의식이 소설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깊이있는 한시의 식견은 빛을 잃고 있다. 사실, 이 책은 보기에 따라 요즘 잘 나가는 변호사나 검사, 또는 유명 지식인의 그러루한 인생역정을 읽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왜일까?

반면 홍석중의 황진이는 너스레를 떨고 있다. 그야 물론 천의무봉 달인의 태도이다. 홍석중은 당대의 역사는 당대의 역사적 한계를 고려하여 평가하고 기술해야한다는 '역사주의 원칙'을 자연스럽게 배어들게 할 만큼 황진이를 둘러싼 역사에 달통해 있다. 또한 한시와 시조를 소설 곳곳의 상황에 자연스럽게 풀만큼 김탁환 못지 않게 당대의 한시와 시조의 멋스러움을 꿰둟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대중적인 접근을 한다는 점에서, 대중적 교양소설의 하나의 전범을 이루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홍석중의 황진이의 주제로 읽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사랑은 요령부득’이라는 메세지이다. 이는 인생은 요령부득이라는 말로 등치될 수 있는 것이고 나아가 인생은 불가해하다는 것의 은유로 읽힐수 있다.

재미나지 않은가! 주체사상에서 추구하는 완성된 인간형인 공산주의적 인간이 내뱉기에는 좀...평소 몇권의 북한 소설을 읽으면서, 매우 고전주의적인 교양소설과 맥이 닿아있는 점은 왜일까 의문을 품었는데, 몇권의 북한 문예물을 읽는 동안 약간의 이해가 자라났다. 그건, 공산주의적 인간전형을 그리기 때문이고, 마치도 이것은 예의 고전주의 문학에서 말하는 3위일체법과 유사한 기법을 추구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 홍석중의 장점은 북한 소설의 클래식한 면모를 다소 탈피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자유스러움의 원인은 소설의 소재 자체에서도 기인하고 있다. 아무래도 역사물은 당대의 현실을 그려내는 것보다는 북한적 심의체계 속에서 운신의 폭을 넓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 뿐은 아니다. 홍석중은 앞서 지적했듯이 대담하게 너스레를 떨 줄 안다. 그는 당대의 현실을 조선시대로 환치시키고 있다. 다음을 보자:


《…부중의 백성들이 근 5년째 가물루 하루 한끼 먹기 어려워합니다. …백성들이 무지렁이라 아무것도 모르는것 같지만 사또께서 자기 치적을 요란하게 떠들어 댈 때는 입을 막구 낄낄거리며 웃습니다.…》


위의 부중이라는 단어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그리고 백성들을 인민으로, 또 사또라는 단어를 수령이나 김정일 위원장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보면 어떨까? 이것은 분명 북한의 현실을 은유한 것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무의식적인 반영으로 해석된다. 문학 작품은 어쩔수 없이 당대의 현실이 삼투될 수 밖에 없다고 하지 않은가? 소설 곳곳에 사또에 대한 비평을 빌어 북한적 현상에 가차없는 관중(貫中)의 화살을 날리고 있다. 소설 속에 나타나듯이 암행어사까지 속이는 현실은 식량난 직전의 과장보고를 일삼던 북한 농업일군들의 도덕적 해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이 글을 읽었던 북한의 평범한 독자들은 어떻게 느꼈는지 굼금하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북한 독자들의 구체적이며 비공식적인 반향은 어떠했는지 알고 싶다.


3. 문제적 인간 황진이의 사랑

대개 이러저러한 야사와 소설속 황진이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거나, 호사가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승벽내기의 엉뚱한 것이거나, 또는 기생신분과 어울리지 않게 플라토닉한 사랑으로 그려진다.

먼저 홍석중의 황진이에서 그려지는 놈이의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은 요령부득이어서 신분의 벽이 허물어졌음에도 뜻대로 되지 못하고 있다. 말하자면 ‘말보로(Marlboro) 증후군(사랑을 차지할 능력을 갖추게 되었을 때는 이미 사랑했던 사람은 사라지고 없는 비극적 로맨스)'에 속하는 운명의 장난이 주체사관과 교직되고 있다. 놈이는 일자무식이었지만, 사랑을 잃고 강건한 붓놀림도 할 줄 아는 화적패의 두목이 되고있다.

반면, 황진이의 인연을 집어나가는데 있어서 김탁환의 황진이에서 보다 역사적 사실에 충실히 그리고 있다. 이사종과의 6년에 걸친 동거생활은 춘향이와 이몽룡과의 이별 전의 황홀한 시간을 연상케 한다. 무엇이 파국의 고통이며 그 기간이 길어지면 어째서 파국에 당도하는 지 설명은 사상되어 있지만, 아무튼 김탁환은 황진이로 하여금 “파국의 고통보다는 때이른 결별의 아쉬움을 택하”도록 만들었다.

황진이의 자유혼(魂)의 발동이라고 해도 좋고 도화살 내지는 역마살의 발동이라고 해도 좋을 성격적 비극미를 그나마 잘 그려내고 있다. 물론 김탁환은 황진이를 야담식으로 엮을 만큼 어리숙하지 않아서 교묘하게 사회적 담론을 교직시키는 능력을 발휘하였다. 1970-80년대의 진보적 문예조류의 격류를 거치고 난 다음일까? 진보적 사고와 민족주의적 정서를 굳이 표출해야만 떳떳할 수 있다는 지나친 두려움이 “물론 송나라 학자들의 주장을 곧이곧대 받아들이지 않고 끊임없이 비판하며 자기 것으로 녹여내셨답니다”라고 황진이가 ‘스승’ 서경덕을 찬탄하고 있다. 독자들이 스스로 사고하여 이미 알 수 있는 것을 부언시키는 태도는 소설의 긴장미를 떨어뜨리는 주범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세부묘사에 바쳐지지 않은 것임에랴! 이런 식의 교과서적인 중언부언으로 인해 김탁환이 그려낸 황진이의 사랑은 그닥 가슴 콩닥거리거나 애절하거나 하지 않다. 김탁환의 황진이는 시종일관 독백체로 일관하고 있는데, 이는 소설의 극적 효과를 더욱 감퇴시킨다. 역으로 수필체의 문체는 김탁환이 설정한 어떤 정체성을 궁구하는데에는 일정한 효과를 나타낸다.


4. 한없이 아름답기만 한 문장

물론 황진이라는 모티브는 다양한 변주가 가능한 고사이다. 김탁환의 변주가 다소 딱딱한 ‘평균율’이라면, 홍석중의 황진이는 완숙한 베토벤의 피아노 소타나와 비견된다. 일부러 홍석중의 장점을 논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김탁환의 새끼손가락은 이쁘기 짝이 없다. 문장의 고답적인 연마는 최근 소설이 지니지 못한 미덕이다. 이문구의 더 바랄 것 없는 육담과 한문투의 현란한 장광설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만하면 준작이라고 칭할 만하다. 즉, 김탁환의 건조한 황진이는 이른 새벽 모시적삼을 입고 도인(導引)을 행하여 기맥을 시원케하고 있을 때의 그 느낌을 전달해준다. 다분히 비과학적인 황진이 해석(사회적 담론으로 데코레이션을 거치긴 했지만)은 황진이의 고상한 모습을 부각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지식인 황진이를 그리고 싶었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데 작가의 자료섭렵, 인내심, 상상력, 필력에 경의를 표한다. 문제는 너무 고상하여 전혀 황진이스럽지 못했다는 데 있다. 황진이는 본래 너무나 놀기를 좋아하는 색계(色界)상의 천재적 인물인지라 죽어서도 길가에 묻히길 원했다는데, 김탁환의 황진이는 사실, 소설 곳곳에서 유가를 자처하고 있긴 하지만 깊은 산중의 비구니와 오락가락한다. 황진이의 실존에 천착하려 했다는 책속 작가수첩의 말과 배치되지 아니한가. 그런 점에서 앞서 밝힌 것처럼 이 책은 김탁환의 자아상이 너무나 많이 투영되어 있어 황진이의 실존과는 거리가 멀어졌다고 비판한 것이다. 기생 신분에 얽매인 유학자의 영혼을 지닌 황진이가 이 소설이 밝힌 황진이의 정체성이다. 정말, 황진이가 스스로의 실존을 그렇게 느꼈는지 의문이다. 굳이 극과 극은 통한다고 주장하면 더 이상 할 말은 없겠지만...

황진이라면 어땠을까? 홍석중의 무뚝뚝하지만 시원시원한 러브레터에 끌렸을까, 아니면 김탁환의 무언가 숨기는 듯한 소심하고 예쁘장한 러브레터가 마음에 들었을까?

역사적 현상과 사실의 해석이 이 만큼 달라질 수 있다는 데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필자가 누린 이런 호사를 보다 많은 남북한 독서광들과도 함께 나누길 꿈꾸며 글을 맺는다. 굳이 두 권중 한권만 읽어야 하는 바쁘고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직장인에겐 홍석중의 황진이를 권하겠지만, 나라면 결국 김탁환의 황진이를 선택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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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싼 음반, 세상에서 가장 희귀한 음반 | 독서와 음악감상 2007-05-10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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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베토벤 작품 전곡집 - 작품 총망라

Various
Casacade | 2007년 05월

음악     디자인/구성     구매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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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히히~

여자친구한테 생일선물로 사달라고 졸라서..드디어 오늘 받았습니다.

 

일로 늦게 들어와서 이제야 듣고 있네요~

 

음질이랑, 연주실력에 대해서 회의적인 평도 있는듯하지만

 

음 세상에서 가장 싼 가격에, 발견된 베토벤의 모든 작품을 듣는다는건

 

큰 행운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85번 시디 먼저 듣고 있어요.

 

오케스트라 소품이라니! 장난스럽고 희한한 소리 이면서도 기품이 느껴집니다.

 

아마, 작품번호가 없는 곡이라서 베토벤도 소일거리로 편하게 작곡한듯 싶네요.

 

음질도 아주아~~주 만족스럽구요. 어~ 연주 꽤 실력있네~라고 느낄정도~

 

머 사실, 전 베토벤의 웬만한 작품들은 다 있으니까. 일단은 희귀성에 점수를

 

주고 이 전집을 구하게(?) 되었으니까. 만족합니다.

 

교향곡전집이나 피아노소나타 전집을 싼값에 들으려고 이음반 사시진 마세요...

 

그런분들은 차라리 노링턴의 초염가 교향곡전집이 만족스러울 것입니다.

 

이 전집은

 

베토벤이라면 전기도 한두권 읽어보고, 교향곡전집이나 피아노소나타 전집

 

그리고 현악사중주 전집쯤 들어보신, 그야말로 베토벤 메니아에게 권합니다.

 

일단 이 전집만 있음. 들어보면서 좀더 좋은 연주로 듣고픈거만

 

최고의 연주로 손꼽히는 음반을 구하면 될듯싶습니다.

 

세상에나..베토벤의 소품들이 이렇게 많았네요~~^^/

 

베토벤 아저씨 만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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