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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데스밸리에서 죽다 | 시집 읽기 2020-02-09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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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데스밸리에서 죽다

이재무 저
천년의시작 | 2020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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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한 인생에서 길어올린 생의 새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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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랑

  

  밤사이 비가 다녀가셨다

  우리가 잠든 사이 도둑처럼 오셔서 산과 들을 깨끗이 쓸고 닦고 가셨구나

 

  나는 이렇게 몰래 다녀간 것들이 좋다

 

  몰래 온 비

  몰래 온 눈

  몰래 온 사랑

 

  몰래 와서는 존재의 흔적을 남기고 가는 것들

 

  몰래 들어와 내 안에서 기숙하는 사랑아!

 

  올 때처럼 갈 때에도 몰래 가거라

  - 이재무, 「몰래 온 사랑」

       

밤사이 내린 비로 산과 들은 오랜만에 목욕을 했다. 말끔하게 제 빛깔을 드러낸 산과 들을 보며 시인은 우리가 잠든 사이 도둑처럼다녀간 사랑을 떠올린다. 몰래 온 비는 지상에 흔적을 남기고 어딘가로 가버렸다. 미처 알아채지도 못한 채 산과 들을 적시고 가버린 사랑이라니. “나는 이렇게 몰래 다녀간 것들이 좋다라고 시인은 쓰고 있다. 우리가 잠든 사이에 몰래 다녀간 것들이 베푼 이 환대를 시인은 감격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몰래 오는 비가 있고, 몰래 오는 눈이 있고, 몰래 오는 사랑이 있다. 비가 그쳐도 비가 내린 흔적은 남아 있다. 눈이 그쳐도 눈이 내린 흔적이 남아 있다. 마찬가지로 사랑이 떠나간 자리에도 사랑의 흔적은 남아 있다. 이 흔적으로 우리는 비를 그리워하고, 눈을 그리워하고, 사랑을 그리워한다.

 

몰래 와서는 존재의 흔적을 남기고 훌쩍 어딘가로 떠나버린 것들을 생각하다가 시인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차마 잊을 수 없어 몸에 새긴 것들이 바로 흔적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걷던 길을 홀로 걸으면 가슴 저 깊은 곳에서 그리움이 밀려온다. 그리워서 그 길을 걸은 게 아니다. 그 길을 걷다 보니 그리움이 밀려온 것이다. 분명 그 사람을 잊은 줄 알았는데, 이 길을 걸으면 잊었던 그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 머릿속을 채운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 본능과도 같이 무심결에 떠오른다. 배고픔의 본능이야 밥을 먹으면 이내 사라지지만, 그리움은 밥을 먹을수록 더욱 더 깊어진다. 그리움이 커질수록 존재의 흔적이 커진다. 그 흔적을 지우려면 그리움도 지워야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움은 문득 문득 떠올라 우리를 당황스럽게 한다.

 

시인은 이 상황을 몰래 들어와 내 안에서 기숙하는 사랑아!”라는 시구로 표현하고 있다.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몰래 들어온 이 사랑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언제 들어 온지 모르는 이 사랑을 시인은 그 사랑이 나간 다음에야 알아챈다. 몰래 온 비를 비가 내린 흔적으로 알 수 있듯, 몰래 온 사랑은 사랑이 남긴 흔적으로 알 수 있다. 알지도 못한 사이에 왔다가 가버린 사랑은 어떤 흔적을 남기게 될까? 시인은 산과 들을 깨끗하게 쓸고 닦고 간 비를 통해 몰래 왔다가 간 사랑의 흔적을 상상하고 있다. 혼자 사는 방에 밥상을 차리고 사라진 우렁각시/우렁총각이 생각나지 않는가. 그들이 어디에 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밥상을 차려놓고 갔다는 사실에 있다. 시인은 바로 이 흔적을 통해 몰래 온 사랑을 가슴 깊이 느끼는 것이다.

 

몰래 온 사랑은 갈 때에도 몰래 가야 한다. 우렁각시가 현실에 나타나는 순간, 사랑은 이내 현실이 되어버린다. 사랑이 현실이 되면, 욕망 또한 현실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무언가를 원하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하나가 이루어지면 다른 하나를 원한다. 다른 하나가 이루어지면 또 다른 하나를 원한다. 이것이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이다. 사랑만큼 지독한 욕망이 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비는 세상을 욕망하지 않는다. 눈 또한 세상을 욕망하지 않는다. 사랑도 과연 이럴까? 사랑은 세상을 욕망한다.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사랑을 욕망한다. 이 욕망이 극단으로 치달을 때 사랑은 이내 집착으로 변한다. 무언가를 향한 욕망이 금기가 되어 사랑에 빠진 사람을 얽매기 시작한다.

 

몰래 온 사랑은 이리 보면 사랑이라는 지독한 욕망과 거리를 둔 사랑임이 분명하다. 몰래 들어온 사랑이므로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신이 사랑에 빠진 것을 모른다. 사랑에 빠진 줄 모르고 사랑하는 상황이 참으로 재미나지 않는가. 밤새 내린 비가 산과 들을 깨끗이 씻고, 밤새 내린 눈이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듯, 몰래 온 사랑은 욕망에 물든 사람들의 마음에 가만히 닿았다가 이내 사라진다. 그 사랑이 온 것을 알 수도 없거니와, 설사 안다고 해도 그 사랑을 붙잡을 수는 없다. 사랑이 다녀간 흔적으로 하여 시인은 가슴이 뭉클해오는 것을 느낀다. 가슴을 뒤흔드는 사랑의 마력을 느낄 수는 없지만, 가슴을 잔잔하게 맴도는 사랑의 여운만은 느낄 수 있다. 세상을 겪어야 할 젊은이의 사랑이 아니라, 세상을 이미 겪고 편안하게 의자에 앉은 황혼녘의 사랑을 시인은 몰래 온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2. 인생

       

오늘처럼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여름 저녁은 양푼에 찌개용 돼지고기와 묵은 김치와 네모나게 썬 두부를 넣고 끓인 찌개를, 갓 지은 밥과 포장 김과 함께 먹고 싶다. 반주도 곁들이면 더욱 좋으리. 얼큰한 국물을 한 숟갈, 두 숟갈 뜨다 보면 이마에 송골송골 땀은 돋아나리라. 싱겁게 살아온 하루를 맵짠 맛으로 달래다 보면 울컥, 설움이 자욱하게 솟기도 하리. 밖은 허공에 못 박듯 사선을 그으며 줄기차게 비가 내리고 열린 창으로 빗소리가 들어와 찌개 속으로 첨벙 뛰어들기도 하리. 안부가 그리운, 먼 곳의 사람아, 얼도 있고 큰도 있는 찌개가 아니라면 우리 어찌 저 매캐한 세월을 건너갈 수 있겠는가. 오늘 저녁은 비가 와서 어둠이 근친처럼 살갑고 먼 곳의 네 얼굴조차 가차이에서 환하다.

- 이재무, 「김치찌개」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 시인은 김치찌개를 먹는다. 양푼에 가득 담긴 김치찌개를 먹으며 더위에 지친 몸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음식이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생명은 먹어야 살 수 있다. 먹는 일이 곧 생명이 사는 일이다. 반주를 곁들여 얼큰한 국물을 먹다 보면 이마에서는 송골송골 땀이 맺힌다. 몸이 살아 있다는 표시다. 한여름에 비까지 내렸으니 눅눅한 날씨가 아닌가. 온몸에 달라붙은 습기를 뜨거운 찌개 국물로 날려 버리면, 오랜만에 매끄러워진 몸을 느낄 수 있다. 음식이란 이런 것이다.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몸이 달라지고 마음이 달라진다. 다른 생명을 먹어야 비로소 생명을 유지하는 생명의 본성 때문인 걸까? 먹기 위해 사느냐, 살기 위해 먹느냐고 사람들은 묻지만, 어쨌든 사람은 먹어야 산다는 말 하나는 거부할 수 없는 진실임이 분명하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느낄 새도 없이 맵찬 김치찌개를 먹으며 시인은 싱겁게 살아온 하루를 달랜다. 음식을 먹을 때만큼 평화로운 때가 어디에 있을까? 다른 생각을 하며 음식을 먹으면, 음식은 결코 몸으로 가지 않는다. 빨리 먹으면 체하기 일쑤이고, 억지로 밥을 먹어도 속에 무언가 걸린 듯 그득한 느낌이 든다. 인생에서 먹는 재미만한 것도 별로 없는데, 지금 사람들은 마치 일을 하기 위해 음식을 먹는 것도 같다. 그래서일 것이다. 시인은 김치찌개를 먹다가 울컥, 설움이 자욱하게 솟기도 하리.”라고 이야기한다. 김치찌개 하나로도 이토록 큰 위안을 얻을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런 시간마저도 외면한 채 일에 매진한다. 성공을 하면 더 맛있는 김치찌개라도 먹을 수 있는 것일까?

 

밖에서는 줄기차게 비가 내린다. 열린 창으로 들어온 빗소리가 찌개 속으로 첨벙 뛰어든다. 빗소리가 가미된 김치찌개라, 참으로 감미롭지 않은가. 어디에 가서 이런 김치찌개를 먹을까? 시인은 비 오는 날 그저 김치찌개만 먹는 게 아니다. “안부가 그리운, 먼 곳의 사람을 그리워하기도 하고, “얼도 있고 큰도 있는 찌개를 통해 저 매캐한 세월을 건너가기도 한다. 한마디로 그에게 김치찌개는 인생을 돌이키게도 하고, 다른 인생을 떠올리게도 하는 고마운 음식으로 나타난다. 김치찌개 하나에 드리워진 인생의 맛이 느껴지지 않는가. 먹는 일이 사는 일이라는 말에 담긴 진의를 시인은 김치찌개의 맵짠 맛을 통해 감각적으로 표현한다. 인생이 김치찌개만 같다면 정말로 살 만하지 않겠는가.

 

하긴, 김치찌개를 먹는 마음으로 인생을 살면 그뿐이다. 김치찌개가 어디 값비싼 음식이던가. 가장 서민적인 음식을 먹으며 시인은 비가 오는 날의 정취를 느끼고, 지금은 볼 수 없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매캐한 연기로 남아 있는 지난 세월을 들여다본다. 빗소리까지 첨가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김치찌개를 먹다 보니 어둠이 근친처럼 살갑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둠과 식구가 되어서 그런 것일까? “먼 곳의 네 얼굴조차 가차이에서 환하다.”라고 시인은 쓰고 있다. 이 정도면 김치찌개의 낭만이라고 이름 지을 만하다. 김치찌개 하나로 먼 곳에 있는 네 얼굴을 환한 세상으로 데려오는 이 낭만 시학이 이재무 시를 관류하는 근원인지도 모른다.

 

낭만이란 현실에서 현실 너머를 보는 일이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 시인은 김치찌개를 먹으며 안부가 그리운 먼 곳의 사람을 떠올린다. 먼 곳에 있는 사람을 이곳으로 불러냄으로써 시인은 김치찌개를 먹는 장소를 그리움이 흘러넘치는 시적 공간으로 만든다. 어둠에 물든 칙칙한 세상은 김치찌개의 낭만과 만나 멀리 있는 네 얼굴조차 환한 세상으로 돌변한다. 사물 하나로 피워내는 낭만치고는 참으로 그럴싸하지 않은가. 낭만이 유물이 되어버린 이 시대에 시인은 김치찌개의 맵짠 감각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입안에 침을 고이게 하는 그 감각을 온몸으로 느끼며 우리는 누군가와 먹던 김치찌개를 떠올린다. 이것이 인생이고, 동시에 이것이 이재무가 추구한 낭만의 시이다. 감각은 무엇보다 그런 낭만과 더불어 더욱 깊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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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서, 『빛의 마녀』 | 소설 읽기 2020-02-07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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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빛의 마녀

김하서 저
자음과모음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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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는 늘 우리 마음속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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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속에 숨어 있는 마녀들

- 김하서, 『빛의 마녀』

 

 

 

마녀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마녀로 행세하는 여자가 있다. 남편이 바람을 피자 여자는 자기 마음속에서 다른 자아를 찾았다. 자신을 타락한 천사로 소개한 그는 여자를 환상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 환상 속에서 여자는 다섯 살 딸만 있는 집에 불을 질렀다. 아이는 빠져나오지 못하고 불에 타 죽었다. 이때부터 여자는 집을 떠나 세상을 떠돌았다. 세상을 떠돌다가 한국에 왔다. 스스로를 200살이 넘은 마녀로 생각하며 학원에서 영어 강의를 하며 일상을 영위했다. 니콜의 이야기다. 니콜은 한국에서 강태주를 만난다. 그녀는 태어나 삼일 만에 목숨을 잃은 아기를 잊지 못해 방황하고 있다. 병원의 책임을 물으며 한겨울에 맨발로 거리에 나섰다. 다른 사람들은 외면하는 그 여자를 니콜은 외면하지 못했다.

 

니콜은 태주에게 죽은 아이를 살리는 마법을 펼치겠다고 했다. 그러려면 먼저 육손이 아기의 여섯 번째 손가락이 필요하다. 아기를 살릴 욕망에 부푼 태주는 봉사활동을 빌미로 천사원에 가 육손이 아기의 손가락을 구해온다. 태주는 니콜이 마녀라는 것을 정말로 믿는다. 아니, 그녀는 죽은 아기를 살릴 수 있다는 니콜의 말을 믿는지도 모른다. 니콜이 마녀든 아니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니콜이 죽은 아기를 살릴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니콜이 정말로 그럴 수 있다면 태주는 자기 영혼이라도 팔려고 한다. 육손이 아기의 손가락을 가위로 끊어낸 순간, 태주는 자기 영혼을 악마에게 건넸을 수도 있다. 그만큼 태주는 죽은 아기에게 집착한다. 죽은 아기에 집착하는 그녀가 낯설어 남편은 일을 핑계 삼아 군산으로 떠났다. 태주 곁에는 이제 니콜 외에는 아무도 없다. 아기가 살아야 태주도 살 수 있다.

 

손가락을 구해온 태주에게 니콜은 열일곱의 임신한 여자아이를 데려오라고 말한다. 죽은 아이를 살리기 위한 제물이란다. 태아의 부정한 피가 죽은 아이에게 새 생명을 준다는 말을 태주는 철석같이 믿는다. 태아의 부정한 피는 태아가 아무에게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걸 의미한다. 아무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태아의 피를 사용하면 이미 죽은 아기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이 황당한 얘기를 믿을 만큼 태주는 절실한 마음으로 아기를 살리려고 한다. 남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면 자기 눈에는 피눈물이 흘린다는 걸 태주는 모르는 것일까? 태주는 그것을 잘 안다. 그럼에도 그녀는 남의 눈에 피눈물이 흐르는 일을 하려고 한다. 죽음을 각오했다는 말이다. 아기에게 바쳐지는 이 마음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숭고한 모성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아니면, 끔찍한 집착이라고 말해야 할까?

 

태주는 열일곱에 임신을 한 초희를 데려온다. 그녀는 초희를 육손이의 손가락을 구하기 위해 천사원으로 가는 길에서 본 적이 있다. 당시 초희는 마흔이 넘은 아저씨를 따라나선 상황이었다. 초희는 화장실에서 태주가 떨어뜨린 물건을 집어주었다. 손수건에 싼 손가락이었다. 태주는 임신한 여학생을 구하기 위해 여학교에 갔다가 임신한 초희를 발견한다. 초희는 태주를 기꺼이 따라나선다. 태주가 벌이는 일을 알고 따르는 게 아니다. 그녀는 갈 곳이 없다. 세 여인이 만났는데, 모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다. 스스로를 마녀로 생각하는 여자는 아기를 잃은 여자에게 죽은 아이를 살릴 수 있는 마법을 부린다고 장담한다. 아기를 잃은 여자는 마녀의 말을 믿고 임신한 여고생을 제물로 데려온다. 배 속 아기가 제물이 되는 줄도 모르고 여고생은 별다른 생각 없이 태주를 따라 니콜의 집으로 들어간다.

 

이 운명의 칼로 배 속 태아를 죽여. 그래야 죽은 네 아이가 살아 돌아와.”

태주는 두려움에 숨이 막혔다. 배 속 태아를 죽이라고? 거대한 피 물결이 눈앞에 출렁이는 듯했다. 피 물결 어디에도 그녀의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희미하게 작은 북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태주는 두리번거렸다. 초희의 불룩한 배 위에 빛줄기 하나가 비치는 광경을 보았다. 태주는 북소리가 살아 있는 아이의 심장 뛰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배 속의 태아는 긴 어둠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살아 있다. 태주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225)

 

배 속에 든 남의 아기를 죽여야 죽은 아기를 다시 살릴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 같은가? 마녀가 죽은 아이를 살릴 수 있다고 우리 귀에 속삭인다. , 죽은 아기를 살리려면 남의 아기를 죽여야 한다. 악마와의 거래는 이렇게 진행된다. 하나를 얻으려면 다른 것을 잃어야 한다. 하나를 살리려면 다른 것을 죽여야 한다. 태주가 마녀의 속삭임에 굴복하는 순간 태주 또한 마녀가 된다. 마녀란 다른 게 아니다. 마녀는 자기를 위해 남을 죽이는 사람을 가리킨다. 당연히 마녀는 여자만이 아니다. 남자든, 여자든 이익을 얻기 위해 기꺼이 남을 해치는 사람을 우리는 마녀라고 불러야 한다.

 

서양 중세 시대에는 마녀 사냥이 유행이었다. 일반 사람들과 조금만 달라도 사람들은 그녀를 마녀라고 불렀다. 마녀는 차별의 기호이다. 요즘으로 따지면 소위 왕따가 마녀가 아니겠는가. 마녀는 강하지 않다. 강한 사람은 결코 마녀가 되지 않는다. 강한 사람은 마녀가 되기는커녕 마녀를 생산한다. 이 사람은 마녀고, 이 사람은 마녀가 아니라고 결정을 내린다. 태주는 초희의 배 위에서 빛나는 빛줄기 하나를 본다. 배 속에 살아 있는 생명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을 향해 빛을 내뿜고 있다. 생명의 빛이다. 어디선가 북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아기를 낳아 본 태주는 북소리가 태아의 심장 소리라는 것을 금방 깨닫는다. 이렇게 죽은 아기를 살리는 의식은 실패한다. 죽은 아이를 살리지는 못했지만, 태어나야 할 아이는 무사히 태어났다.

 

니콜은 왜 스스로 마녀가 되었을까? 아무도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편인 에드워드는 늘 일에 지쳐 살았다. 니콜에게서 얻을 수 없는 위안을 다른 여자에게서 얻으려고 했다. 니콜은 세상으로 열린 마음의 문을 아예 닫아버렸다. 마음속에 서식하는 또 다른 자아에 집착하여 늘 환상 속에서만 살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딸이 죽었고, 죽은 딸을 잊기 위해 니콜은 마녀로 사는 삶을 선택했다. 이것은 태주 또한 마찬가지다. 죽은 아이에 집착한 그녀는 어떻게든 아이를 살리려고 했다. 죽은 아이를 살리기 위해 다른 아기를 죽이려고 했다. 사악한 마녀의 길로 뛰어든 것이다. 마녀는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마음이 마녀를 만든다.

 

무언가에 집착하는 마음이 마녀를 만든다. 태주는 배 속 아기가 내보내는 생명의 빛을 통해 새로운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누구나 마음속에 마녀를 품고 있다. 마음속에 숨어 있던 마녀는 무언가에 집착하는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순간 마음 밖으로 뛰쳐나온다. 죽은 아이를 살리라는 얼토당토않은 명령을 내려 세상을 죽음의 바다로 만들어버린다. 마음속 세상을 불타는 지옥으로 만들어버린다. 니콜이 그런 삶을 살았고, 태주도 그런 삶을 살았다. 지금 이 세상을 그 누군가도 이런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른다. 당신은 아닐 것 같은가? 결코 아니다. 당신 또한 무언가에 집착하는 삶을 산다면 이런 삶을 빠져들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누구나의 마음속에 마녀가 들어 있다. 그것은 사람들의 간절함을 먹이 삼아 세상을 피바다로 물들인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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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계속되는 이념의 비극 - 윤흥길 「장마」 | 소설 읽기 2020-02-03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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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장마

윤흥길 저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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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는 아직도 이념의 그늘에 덮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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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계속되는 이념의 비극 - 윤흥길 「장마」

  

 

외할머니의 꿈

 

외할머니가 불길한 꿈을 꾸었다. 아래위 합쳐서 7개밖에 안 되는 이 가운데서 그나마 실하게 붙어 있던 이빨 하나를, 무쇠로 만든 커다란 족집게가 난데없이 입 안으로 들어와 우지끈 잦뜨려놓고 달아났다는 것이다. 꿈에서 깬 외할머니는 손으로 더듬이 이가 그대로인지 점검했다. 거울까지 들여다보며 하나하나 살뜰히 살피기도 했다. 이는 빠지지 않은 채로 있는데, 외할머니는 자꾸만 꿈 이야기를 하며 불안해했다. 현실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무언가를 외할머니는 느끼고 있는 것일까? 꿈이 현실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어느 경우에는 꿈이 어떤 일을 예시하는 경우도 있다. 왜 하필 튼실한 이가 빠진 것일까, 하고 묻는 순간 외할머니는 깊이 모를 두려움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어머니가 외할머니의 불안감에 불을 붙인다. 육군 소위를 달고 일선 소대장으로 나간 외삼촌을 입에 올린 것이다. 외할머니의 축 늘어진 양쪽 볼에 심한 경련이 일어난다. 외할머니는 지금 튼실한 이를 외삼촌과 동일시하고 있다. 차마 그것을 말로 꺼내지 없어 외할머니는 어머니의 말을 못 들은 척 넘긴다. 외삼촌은 외할머니에게는 하나뿐인 아들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들은 집안의 뿌리가 아닌가. 입 속에 있는 실한 이빨과 집안을 지탱하는 아들이 묘하게 하나로 이어져 외할머니를 불안에 떨게 한다. 아들이 잘못 되면 집안의 핏줄이 끊어지는 것이다. 집안 핏줄을 끊어놓고 어떻게 죽어서 조상들 얼굴을 볼까. 실한 이빨이 빠지는 꿈에서 시작된 외할머니의 상념은 집안 핏줄 문제와 이어져 더욱 깊어만 간다.

 

집 바깥에서 사람들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인민군이 북으로 밀려났다고 하지만, 여전히 전쟁 중인 상황이다. 해가 다 진 이 시간에 비까지 억수로 내리는데, 저 사람들은 지금 누구네 집을 찾아가고 있는 것일까? 방안에 불안한 기운이 감돈다. , 사람들 발자국이 외할머니 집 앞에 멈춘다. 밖에서 아버지 이름을 부른다. 아버지가 집안 단속을 하고 대문으로 나간다. 외할머니는 방안에서 진즉부터 기별이 올 줄 알았다며 자신은 아무렇지 않다고 중얼댄다. 어떤 기별을 말하는 것일까? , 전쟁터에 나간 외삼촌과 관련된 기별인 것일까? 아버지가 종이쪽지를 들고 방안으로 들어온다. 외할머니는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완두콩을 까고 있다. 입으로는 계속 아무렇지 않다는 말을 내뱉는다. 어머니가 참지 못하고 흐느낀다.

 

어머니가 기어이 통곡을 터뜨린 상황에서도 외할머니는 자기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을 반복한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어미가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저 깊은 속은 이미 새까맣게 타버렸을 것이다. 어머니처럼 통곡이라도 하면 막힌 속이 조금이나마 뚫릴 수 있으련만, 외할머니는 한없이 지독한 아픔을 온몸으로 삭이고 있다. 이토록 큰 상처를 품은 몸이 과연 남아날 수 있을까? 가슴에 맺힌 한()은 어떤 방식으로든 풀어야 한다. 그런데도 외할머니는 그 한을 자꾸만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려고 한다. 왜냐고? 아들 잃은 슬픔을 마음 깊이 품고 살아가기 위해서다. 당연히 외할머니가 사는 삶은 지옥이 될 수밖에 없다.

 

아이 눈에 비친 집안의 비극

 

전쟁이란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상황을 가리킨다. 죽여야 할 적을 살려두고 어떻게 내가 살 수 있단 말인가. 전쟁이 일어나면 그래서 피바람이 분다. 죽이거나, 죽임을 당하는 상황이 끊임없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이념으로 해서 발생한 한국 전쟁 역시 이러한 전쟁의 의미망을 그대로 따른다. 같은 피를 나눈 사람들이 한쪽은 자본주의를 수호한다고, 다른 한쪽은 공산주의를 수호한다고 싸웠다. 일상은 사는 사람들에게 관념뿐인 이념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권력자들이 후방에서 발 뻗고 잠을 잘 때, 권력이 없는 민중들은 전선에 나가 상대를 향해 총구를 겨누어야 했다. 이념 전쟁을 일으킨 권력자들 대신 이념과 상관없는 민중들이 이념을 이유로 죽어나갔다.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서도 한국사회는 아직도 이념의 탈을 벗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한국전쟁은 일어난 것인지.

 

윤흥길은 ?장마?에서 아이(동만) 서술자의 눈으로 이러한 전쟁을 그리고 있다. 동만에게 전쟁은 건지산에 오른 봉홧불 이미지와 이어져 있다. 건지산 정상에서 장난처럼 불길이 오르면 읍내에서는 시가전이 벌어져 무수한 사람들이 죽었다. 아이는 건지산에서 피어오르는 불길과 읍내에서 벌어진 시가전을 하나로 묶을 사유 능력이 없다. 아이는 그저 일어나는 상황을 받아들일 뿐이다. 상황을 해석하는 기준인 이념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얘기다. 시가전은 건지산에 숨은 빨치산과 국군 사이에 벌어진 것이다. 이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어른들은 빨치산이든, 국군이든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삶과 죽음이 달라질 수 있다. 아이가 보는 전쟁과 어른이 보는 전쟁이 이토록 다르다. 윤흥길은 아이의 시선을 선택하여 이념에 물든 어른들의 시선을 비껴가고 있는 셈이다.

 

외할머니는 서울 집을 떠나 할머니 집에 피난을 왔다. 외삼촌의 전사 소식을 외할머니는 할머니 집에서 들은 것이다. 할머니는 느닷없이 들이닥친 외할머니와 작은이모를 살갑게 맞았다. 삼촌이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올라가고, 외삼촌은 국군에 입대하는 묘한 상황에서도 두 사돈은 의좋게 지냈다. 이념으로 세상을 나눌 사돈들이 아니지 않는가. 의좋던 사돈의 관계는 동만이 형사의 꼬임에 빠져 삼촌이 집에 온 사실을 발설하면서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한다. 할머니는 동만을 과자 한 조각에 삼촌을 팔아먹은,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고 꾸짖는다. 삼촌 문제로 아버지가 경찰서에 잡혀가 고문까지 받았으니, 할머니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손자를 닦달할 만했다. 외할머니가 유일하게 궁지에 몰린 동만을 감싸 안았다. 누구 하나라도 아이를 위로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두 사람을 갈라서게 한 결정적인 계기는 외삼촌의 전사통지서가 온 다음 날 일어났다.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는 그날, 외할머니는 벼락까지 내려치는 건지산을 보며 어서 쏟아져라! 어서 한 번 더 쏟아져서 바웃 새에 숨은 뿔갱이마자 다 씰어 가그라! 나무 틈새기에 엎딘 뿔갱이 숯뎅이같이 싹싹 끄실리라!”라고 외쳤다. 빨갱이에 외삼촌을 잃은 외할머니 입장에서는 당연한 외침이었다. 소리를 듣고 마루로 몰려나온 식구들이 아무 소리도 못하고 있는 찰나, 안방 문이 우당탕 열리며 저 늙다리 여편네가 뒤질라고 환장을 혔댜?” 하는 할머니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외할머니가 죽으라고 외친 빨갱이 속에는 할머니의 아들도 포함되어 있다.

 

물론 외할머니가 이 상황을 알고 일부러 빨갱이는 다 죽어야 한다고 외친 것은 아니다. 외할머니는 그저 아들을 죽인 빨갱이들이 한없이 미웠던 것이다. 내내 참고 있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한을 토하듯 외친 것인데, 할머니는 그것을 삼촌 죽으라는 말로 듣는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빨갱이가 모두 죽으면 북으로 올라간 삼촌 또한 죽어야 하지 않는가. 이념에는 무관심한 두 사람이 아들 문제가 걸리자 이내 서로 각을 세운다. 외할머니는 전쟁 통에 죽은 아들 때문에 한이 맺혔고, 할머니는 자기 아들 죽으라는 사돈 소리에 기겁을 한다. 전쟁이란 이런 것이다. 하나가 살려면 다른 하나는 죽어야 한다. 삼촌이 살려면 외삼촌은 죽어야 하고, 외삼촌이 살려면 삼촌이 죽어야 한다.

 

외할머니가 사과를 않자 할머니 입에서 기어이 외할머니를 내보내라는 얘기가 터져 나온다. 외할머니도 이판사판이다. 생때같은 아들 잃은 것도 서러운데, 오갈 데 없는 사람을 나가라고 하니 얼마나 화가 치솟겠는가. 할머니는 더럽고 창피해서 이런 집에는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다고 외친다. 그러면서 그예 입에 담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 만다. 이런 뿔갱이집……에서 외할머니 말이 갑자기 끊긴다. 그리고는 말을 흐리며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다가, 한참 동안 동만을 눈여겨본다. 자신이 지금 얼마나 무서운 소리를 했는지 외할머니는 말을 뱉고 나서야 깨닫는다. 빨갱이 집으로 몰리면 집안사람들 전체가 몰살을 당한다. 이후로 외할머니는 입을 꽉 다물고 오로지 완두콩만 깐다. 스스로 저 깊은 침묵의 세계로 빠져든 것이다.

 

할머니의 굳건한 믿음

 

삼촌이 집에 들른 날, 식구들은 삼촌에게 자수를 권유했다. 귀순한 사람을 경찰이 마구잡이로 죽인다는 삐라를 산에서 본 삼촌은 완강하게 자수를 거부한다. 삼촌도 살고 싶다. 젊은 나이에 허망하게 산에서 죽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어쩌나, 이미 많은 사람을 죽였다. 빨갱이라면 이를 가는 사람들이 산 생활까지 한 삼촌을 그냥 놔둘 리가 없다. 가족들이 끈질기게 설득을 하자 삼촌은 결국 자수를 결심했다. 지금 당장 자수하기보다 이틀 정도 동정을 살피기로 했다. 잠시 눈을 붙이기 위해 윗옷을 벗던 삼촌이 갑자기 몸을 엎드려 방바닥에 귀를 댔다. 밖에서 소리가 났다는 것이다. 산 사람의 예민한 감각으로 삼촌은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정말로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이미 잠에서 깨어난 동만도 어디선가 귀에 익은 소리가 밖에서 들려오는 걸 느꼈다.

 

삼촌이 몸을 일으키더니 뒷문으로 급하게 빠져나갔다. 동시에 동만 또한 밖으로 나갔다. 부엌을 돌아 안마당으로 달려가서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반쯤 열려 있던 사랑채 방문이 소리 없이 닫히는 게 보였다. 사랑채는 외할머니가 사는 방이다. 이 늦은 시간에 외할머니는 왜 안방 동정을 엿본 것일까? 자수를 결심한 삼촌은 그 이후로 집에 오지 않았다. 형사는 동만을 초콜릿으로 유혹해 삼촌이 집에 온 사실을 알아냈고, 아버지를 경찰서로 잡아갔다. 일주일 만에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초췌한 모습으로 두부를 세 모나 날것으로 먹었다. 동만은 무릎을 꿇고 앉아 아버지 매를 기다렸지만, 아버지는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자리에 들면서 아버지는 동만에게 한 달 동안 외출 금지령을 내렸다.

 

동만은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형사가 왜 초콜릿을 내밀며 삼촌 소식을 묻는지도 알지 못한다. 아이는 경찰서에 끌려간 아버지가 다리를 절룩거리며 집에 돌아온 상황이 무섭고 슬프기만 하다. 하면 안 될 말을 자신이 발설하는 바람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걸 아이는 알고 있다. 아이는 그래서 아버지의 매를 기다린다. 차라리 매를 맞고 잘못했다고 말하면 마음이 편해질 것 같다. 하지만 아버지는 매를 들지 않는다. 초콜릿으로 아이를 꼬인 형사가 문제라는 걸 아버지가 모를 리 없다. 전쟁을 모르는 아이는 이렇게 저도 모르게 전쟁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총알이 어디 어린아이라고 피해 가던가. 어른들이 일으킨 이념 전쟁에 애꿎은 아이만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할머니는 과자 하나에 삼촌을 팔았다며 손자를 거들떠도 안 본다. 자연 외할머니가 동만을 챙긴다. 동만의 집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암시하기라도 하듯 장맛비는 계속해서 내린다. 또 다시 읍내에서 총격전이 벌어진다. 읍내에 다녀온 동네 사람 하나가 집에 들러 돌아가는 상황을 알려준다. 읍내 곳곳에 빨치산 시체들이 널려 있단다. 동네 사람은 아버지에게 빨리 읍내에 나가 보라고 한다. 혹여나 모르니, 삼촌의 시체를 찾아보라는 얘기겠다. 아버지는 다음 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읍내로 나간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할머니는 쓸데없는 일을 한다고 타박한다. 할머니는 삼촌이 살아 있다는 걸 철석같이 믿고 있다. 소경 점쟁이가 그리 말했다는 것이다. 소경 점쟁이는 삼촌이 아무 날 아무 시에 돌아온다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점쟁이의 말을 신탁(神託)’처럼 믿는다. 신탁이란 신이 인간에게 전한 하늘의 뜻을 의미한다. 미신이라고 비판할 필요는 없다. 할머니는 지금 지푸라기도 잡고 싶은 심정이다. 점쟁이의 말처럼 삼촌이 아무 날 아무 시에 기적처럼 나타날지도 모르지 않는가. 읍내에 나간 아버지가 빈손으로 돌아오자 할머니의 믿음은 더욱 더 깊어진다.

 

이윽고 할머니는 어린애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면서, 합장한 두 손바닥을 불이 나게 비벼대면서 샘솟듯 흘러내리는 눈물로 뒤범벅이 된 늙고 추한 얼굴을 들어 꾸벅꾸벅 수없이 큰절을 해가면서, 하늘에 감사하고 땅에 감사하고 부처님께 감사하고 신령님께 감사하고 조상님네들께 감사하고 터줏귀신에게 감사하면서, 번갈아 땅바닥과 천장과 사면 벽을 향하여 이리 돌고 저리 돌고 뺑뺑이질을 치면서 미쳐 돌아가는 것이었다. 할머니가 가진 소박한 신앙과 모성애가 우리 모두의 가슴 구석구석을 뜨겁게 적시는 감동의 순간이었다. 우리는 모두 믿기로 했다.

 

할머니는 믿기 위해 믿는 것이다. 과학적인 증거가 있어 믿는 게 아니라 믿어야 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가족들도 할머니를 따라 믿기로 한다. 할머니 말마따나, 아무 날 아무 시가 되면 삼촌이 멀쩡한 몸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기로 한다. 할머니의 믿음 속으로는 이념이 들어설 틈이 없다. 믿음은 이념 이전에 있는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할머니는 그저 하늘과 땅과 부처님과 신령님과 조상님들을 향해 수없이 큰절을 하며 기도할 뿐이다. 보이지 않는 신들을 향해 간절하게 기도를 올림으로써 할머니는 인간의 힘으로는 이루지 못할 일을 반드시 이루려고 한다. 할머니는 무엇보다 이 믿음으로 얼마 남지 않은 생을 견디고 있다. 믿음은 이미 할머니의 몸과 하나가 되어버린 것이다.

 

외할머니는 외할머니대로 완두콩을 까며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고 있다. 한 사람은 아들이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고, 한 사람은 죽은 아들의 저승길을 애도한다. 할머니와 외할머니는 서로 다른 상황에 처해 있지만, 아들을 기리는 마음이 다를 수는 없다. 외할머니는 동만에게 외삼촌 이야기를 자꾸 들려준다. 아들을 기억하기 위해서이다. 할머니가 아들이 선택한 이념에 연연하지 않듯, 외할머니 또한 아들이 선택한 이념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아들의 무사함을 빌고 또 빌었을 뿐이다. 한 아들은 이미 죽고, 다른 아들은 아직 생사를 모르는 상황에서 그들은 남은 생을 어떻게든 견디려 하고 있다. 한 사람은 기도를 하며 견디고, 다른 사람은 아들 이야기를 하며 견딘다. 전쟁의 비극은 전장에서 죽는 사람들을 통해 드러나지만, 후방에서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들의 애달픈 마음을 통해 더욱 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구렁이 울음소리

 

소경 점쟁이가 예언한 아무 날 아무 시가 점점 다가온다. 삼촌의 목숨 줄이 이 날에 달려 있고, 할머니의 목숨 줄 또한 이 날에 달려 있다. 계속되는 장맛비에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징검다리는 잠긴 지 오래다. 이런 상황에서도 할머니 믿음은 굳세다. 할머니는 아무 날 아무 시가 되면 돌아올 아들이 불어난 강을 건너지 못할까 걱정이다. 광 속에 넣어둔 겉보리 가마가 썩어 집안사람들이 바쁜 와중에도 할머니는 오직 아들 돌아올 날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아들을 맞을 때 입을 한복을 마름질하고, 삼촌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이틀 후면 쉬어터질 호박전을 한 광주리나 장만한다. 할머니의 목숨과 삼촌의 목숨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 삼촌이 죽으면 할머니도 살지 못할 것이다. 이래저래 할머니는 지금 목숨을 걸고 삼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할머니의 모성애에 감동한 가족들은 이제 현실감을 되찾았다. 할머니 정성이 갸륵해 묵묵히 따르기는 하지만, 삼촌이 돌아올 가능성이 없다는 걸 가족들은 잘 알고 있다. 어린 동만의 생각도 다르지 않다. 할머니의 신앙이그것은 완벽한 하나의 신앙이었다. 그리고 신앙도 아주 이만저만한 신앙이 아니었다우리에게 남긴 뜨거운 감동에서 벗어나 한 발짝만 물러서서 생각해보면 거울 앞에 선 듯 사정이 너무도 명백해지는 것이어서 할머니와 한가지로 낙관적이 될 수 없는 현실이 그저 안타깝기만 했다.” 할머니의 간절한 마음을 알기에 가족들은 할머니를 따를 뿐이다. 한 발짝만 물러서도 할머니의 믿음이 얼마나 근거 없는 믿음인지는 어린 동만의 소견으로도 금방 판별된다.

 

초콜릿으로 동만을 속인 형사는 여전히 집 주변을 맴돌고 있다. 그는 간혹 아버지를 불러내 주막에서 술을 마시고는 했다. 아버지가 형사와 만나고 집에 들어올 때마다 동만은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죄책감에 떨어야 했다. 할머니는 삼촌을 팔아먹은 놈이라며 아직도 손자를 멀리 한다. 동만의 죄책감이 얼마나 심하냐면, 아이는 할머니의 저주에 대항하는 유일한 방법은 죽음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어린 주검을 앞에 놓고 서럽게 우는 할머니를 상상하며 아이는 감미로운 기분에 젖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삼촌이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면 동만의 죄책감은 더욱 더 커질 것이다. 아이는 누구보다 삼촌이 돌아오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셈이다. 삼촌 문제는 할머니와 삼촌 두 사람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가족 전체의 운명을 거머쥔 특별한 계기가 되어버렸다.

 

삼촌이 돌아오기로 예언된 전날 밤, 외할머니 곁에 누운 동만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식구들이 모두 깨어 있을 텐데도 집안은 너무나 조용했다. 문득 날카로운 줄칼로 사물의 귀퉁이를 참을성 있게 깎아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치와 귀뚜라미 울음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그 소리를 오래도록 음미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이상스런 소리가 끼어들었다. 아이들이 병 주둥이를 입에 대고 장난으로 부는 소리와 흡사했다. 끊겼다가 다시 이어지는 그 소리는 먼 바다에서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처럼 은은하게 들렸다. 동구 밖 강 언덕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기도 하고, 집 텃밭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기도 했다. 동만은 소름이 돋을 만큼 음산한 그 소리에 매혹되어 정신을 온통 빼앗겼다.

 

구렁이 우는 소리라고, 외할머니가 말했다. 구렁이가 뱀들을 모으기 위해 우는 소리라는 말을 듣고 동만은 구렁이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제 몸을 친친 휘감는 기분이 들어 숨을 내쉬기 힘들었다. 이모가 동만을 끌어안는다. 이모의 품안에서 동만은 다시 먼 바다에서 울리는 뱃고동 같은 그 소리를 다시 듣는다. 소리가 저 멀리로 사라지자 외할머니가 동만을 부른다. 그리고는 묻는다. 삼촌이 위험해진 게 자기 탓이냐고? 동만의 대답을 들으려고 물은 게 아니다. 삼촌이 온 그날, 외할머니는 소피가 마려워 밖에 나왔다가 안방에 불이 훤해 무슨 일인가 싶어 잠깐 들여다봤을 뿐이다. 그것이 그만 삼촌을 자극해 지금 이 지경에 이르게 했다. 외할머니는 자신이 아니었더라도 삼촌은 산으로 돌아갔을 거라고 말한다. 그게 삼촌의 운명이라는 것. 외할머니 가슴에 맺힌 한이 얼마나 깊은지 이를 통해서도 알 수가 있겠다.

 

구렁이로 돌아온 삼촌

 

아무 날 아무 시에서 아무 시는 진시(辰時, 오전 9~11)였던 모양이다. 이 시간이 되자 마을사람들이 모여든다. 가족들에게는 삶과 죽음을 오가는 날이지만, 마을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재미있는 날이다. 사람들은 점쟁이의 말이 실현될지 궁금하다. 오전 9시가 지나 10시가 되어도 삼촌은 돌아오지 않는다. 가족들이 늦은 아침을 드는 상황에서도 할머니는 한사코 조반상을 받지 않는다. 할머니는 아무 시는 지났지만 아무 날은 아직 지나지 않았다고 믿는다. 오늘 중으로 아들이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 할머니 믿음이란 이런 것이다. 아무 시에 안 오면 아무 날을 기다리면 된다. 아무 날에도 돌아오지 않으면 어떡하느냐고? 그것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믿는 마음이다. 믿어야 삼촌이 돌아온다는 이 간절한 믿음이라니.

 

갑자기 밖에서 함성 소리가 들린다.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동만네 집 쪽으로 빠르게 달려오고 있다. 저마다 손에 돌멩이 아니면 기다린 나뭇개비 같은 것을 들었다. 아이들은 무엇을 쫓고 있는 것일까? 한 아이가 힘껏 돌팔매질한 자리에 꿈틀꿈틀 기어오는 기다란 것이 보인다. 구렁이다. 간밤에 울음을 울던 그 구렁이인가? 몸에 한기를 느낀 것도 잠시 동만은 지게 작대기를 들고 아이들과 합세한다. 자기 쪽으로 오면 단매에 요절을 낼 양으로 작대기를 쥔 양쪽 팔을 높이 들었는데, 누군가 동만의 팔을 움켜잡았다. 외할머니였다. 동시에 등 뒤에서 누군가 숨넘어갈 듯한 비명소리를 내질렀다. 할머니였다. 비명을 내지르며 할머니는 마루 위로 고꾸라졌다.

 

한순간에 집안은 난장판이 되었다. 가족들이 졸도한 할머니는 돌보는 사이, 외할머니는 비명소리를 듣고 몰려든 사람들을 밖으로 몰아냈다. 그리고는 대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구렁이는 그 사이를 틈타 텃밭 이랑을 지나 감나무에 올라앉았다. 밖에 있는 아이들이 돌멩이를 던지자 외할머니는 호통을 쳤다. 주변이 잠잠해지자 외할머니는 감나무 아래로 가 구렁이를 사람인 양 대했다. 할머니를 얘기하고, 다른 가족들을 말하는 걸 보면, 외할머니는 구렁이를 집에 오기로 한 삼촌으로 대하는 게 분명하다. 구렁이가 어떻게 삼촌이 될 수 있는 것일까? 한국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기복신앙을 떠올리지 않으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집 밖에서 횡사한 사람은 뱀의 몸에 영혼을 실어 집안으로 들어온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그러니까 죽은 삼촌의 영혼이 뱀에 실려 돌아온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지 않는 이 마음상태를 샤머니즘(shamanism)이라고 한다. 샤먼(shaman)은 하늘과 땅을 잇는 존재이다. 땅에 사는 인간은 샤먼을 통해 하늘의 뜻을 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할머니는 지금 샤먼이 되어 죽어서도 저승으로 가지 못한, 한 맺힌 삼촌의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려고 한다. 영혼을 하늘로 인도하는 의식이니 얼마나 성스러운 의식인가. 구렁이를 향해 돌을 던져서도 안 되고, 헤픈 웃음을 내보여서도 안 된다. 외할머니가 좋은 말로 타일러도 구렁이는 꼼짝하지 않는다. 울 밖에 있던 아낙네가 구렁이를 쫓으려면 여자의 머리카락을 태워야 한다고 말한다. 외할머니는 안방으로 가 할머니의 머리카락을 얻어서는 불씨가 담긴 그릇에 넣었다.

 

단백질을 태우는 노린내가 멀리까지 진동하자 꼼짝 않고 있던 구렁이가 땅바닥으로 내려와서는 외할머니에게로 다가온다. 외할머니가 길을 터주자 구렁이는 누런 비늘 가죽을 번뜩거리며 마당을 가로지르고, 뒤란을 통과해서는 숲이 우거진 대밭으로 사라졌다. 외할머니는 구렁이를 따라가며 연신 집안일은 걱정 말고 저승길 편하게 가라는 말을 되풀이한다. 구렁이가 되어 집에 돌아온 삼촌은 샤먼 역할을 한 외할머니를 따라 무사히 저승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할머니가 기절한 상황에서, 외할머니가 아니었다면 이 불쌍한 영혼을 그 누가 인도할 것인가? 아들 문제로 그토록 싸운 두 사람이었지만,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만은 다르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억울하게 죽은 아들을 천도하는 마음으로 삼촌의 영혼을 배웅한 것이다.

 

졸도한 지 서너 시간 만에 할머니가 깨어났다. 할머니는 깨어나자마자 식구들에게 갔냐?”라고 묻는다. 구렁이가 잘 갔느냐는 말이다. 할머니는 구렁이를 보자마자 삼촌의 죽음을 직감한 것이다. 구렁이가 갈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할머니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할머니가 해야 할 그 일을 외할머니가 했다. 이념이 전혀 개입할 수 없는 자리에서 두 사람은 사람으로 해야 할 일을 했다. 사람이 만든 이념이 사람을 죽이는 상황에서도, 두 사람은 이념과 먼 자리에 있는 죽은 영혼을 간절한 마음으로 위무했다. 할머니가 외할머니를 안방으로 불러 고마움을 표현한다. 죽은 아들 목숨 줄을 이어준 거나 마찬가지다. 저승으로 가진 못한 영혼은 한이 맺혀 이승을 떠돌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날 저녁 다시 까무러친 할머니는 꼬박 한 주일을 버티다 한 많은 생을 내려놓았다. 아들의 목숨 줄로 지금까지 버텨왔는데, 그 아들이 저승길을 갔다. 그러니 할머니의 목숨 줄 또한 끊어질 밖에. 임종의 자리에서 할머니는 동만의 손을 잡고 지난날을 모두 용서했다. 동만 또한 비로소 할머니에 대한 원망을 풀었다. 이승에서 맺힌 한은 이승에 놓고 가야 한다. 저승까지 한을 지니고 가면 이승에 매여 저승길이 편안해질 수 없다. 할머니는 손자를 용서함으로써 아들에 대한 그 질긴 인연을 간신히 내려놓는다. 동만 또한 할머니의 용서를 받음으로써 가슴 깊이 맺힌 죄책감을 비로소 풀어낸다. 죽은 사람에 매이면 산 사람은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다. 할머니는 바로 그 마음으로 임종 직전 손자의 잘못을 기꺼이 털어버린 것이리라.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그려진 한 집안의 비극은 민족의 비극적인 역사와 맞물려 있다. 사람들은 역사의 진실을 말하지만, 그 역사를 실제로 겪는 민중들은 진실이라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고된 삶을 겪게 된다. 할머니와 외할머니에게 역사는 무엇일까? 삼촌과 외삼촌에게 또 역사는 무엇일까? 이런저런 가족의 비극사를 온몸으로 체험한 어린 동만에게 역사는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이 소설의 제목을 참고하면, 민중에게 역사는 장마철의 끈끈한 습기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몸에 들러붙어 사람들을 꿉꿉하게 만드는 그 습기를 역사를 사는 민중들은 결코 떨쳐버릴 수 없다. 온몸으로 그 습기를 견뎌야 한다. 정말 지루한 장마였다.”는 구절로 이 소설은 끝난다. 지루한 장마는 과연 끝난 것일까? 지금 이 사회를 보면, 그 지루한 장마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여전히 우리는 비극을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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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광, 『우리의 시간은 공평할까』 | 사회사상 2020-01-31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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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우리의 시간은 공평할까

양승광 저
씽크스마트 | 2020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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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의와 시간의 공평성

- 양승광, 『우리의 시간은 공평할까』

 

 

 

누구에게나 하루 24시간이 주어진다. 갓난아기도 24시간을 살고, 비정규직도 24시간을 살고, 기업 회장도 24시간을 산다. 사람들은 그래서 말한다. 24시간을 동일하게 주어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누구는 부자가 되고, 누구는 빈자가 된다고. 부자가 되려면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가난한 사람들은 게을러서 가난해진 거라고. 지은이는 우리의 시간은 공평할까, 라고 묻는다. 시간의 공평함을 묻다니? 누구에게나 24시간이 주어지는 게 아닌가. 부자라고 해서 25시간이 주어지는 건 아니지 않은가? 정말로 그런 것 같다. 겉으로 보면 누구나 24시간을 산다. 부자도 24시간을 살고, 가난한 자도 24시간을 산다. 다만 그 시간을 누구는 즐기며 살고, 누구는 슬픔에 빠져 사는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면 결국 문제는 개인에게로 돌려진다. 같은 직장에 같은 날 입사했는데도, 누구는 승진을 하고 누구는 승진을 못한다. 승진한 사람에게 더 많은 시간이 주어진 것인가? 아니다. 시간은 똑같이 주어졌다. 그 시간 동안 누구는 성과를 냈고, 누구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낸 성과를 다른 사람은 내지 못했다면, 성과를 내지 못한 사람이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휴일도 반납하고 회사를 위해 일한 사람이 승진을 한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에 퍼진다. 승진을 하려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에 투자해야 한다. 회사를 위해 일하는 것이 결국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이 된다. 성공하고 싶은가? 그러면 회사를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라. 그러면 회사가 알아서 당신을 성공의 광장으로 이끌고 갈 것이다.

 

공정한 기회 균등은 공직과 사회적 지위가 형식적 의미에서 열려 있을 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것을 차지할 공정한 기회를 가질 것을 요구한다. 공정한 기회의 관념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우리는, 천부적 재능의 분배를 가정할 때, 동일한 수준의 재능과 능력, 그리고 이러한 자질을 이용하려는 동일한 의욕을 가진 이들은 그들의 출신 사회 계급, 즉 그들이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 성장하는 계급과 무관하게 동일한 성공의 전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과도한 재산과 부의 집중, 특히 정치적 지배로 이어지기 쉬운 집중을 방지하기 위해 자유 시장 체계는 경제 세력들이 장기 동향을 조정하는 정치적, 법적 제도의 틀 안에 놓여야 한다. 또한 무엇보다도 사회는 가족의 소득에 관계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를 확립하여야 한다. (114)

 

존 롤즈의 『공정으로서의 정의』에 나오는 내용이다. 성공을 개인 문제로 돌리려면, 그 개인들이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롤즈는 공정한 기회 균등은 공직과 사회적 지위를 차지할 공정한 기회에서 비롯된다고 선언한다. 지금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들은 과연 공정한 기회를 얻고 있는가? 어떤 학생은 부모에게 용돈을 받으며 대학을 다닌다. 어떤 학생은 공부를 하는 시간보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시간이 더 많다. 집에서 등록금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국가 장학금을 받으면 된다고? 국가 장학금도 기준이 맞아야 받을 수 있다. 설사 국가 장학금을 받아 학비를 해결한다고 해도 생활비는 어찌 하는가? 누구에게는 대학을 다니는 것 자체가 빚을 지는 일이다.

 

같은 해에 졸업을 한 학생들이 있다. 누구는 몇 천 만원의 빚을 지고 있고, 누구는 전혀 빚이 없으며, 또 누구는 회사에서 버는 돈을 용돈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으로 나뉜 사회이니, 비정규직은 회사에서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감을 안고 직장 생활을 해야 한다. 하청업체를 통해 들어간 비정규직은 제대로 된 혜택도 받지 못한다. 더 공부를 해서 다른 직장을 찾고 싶어도, 먹고사는 게 급해 다른 공부를 할 생각도 못한다. 모든 시간을 일을 하는 데 소비하는 것 같지만, 손에 들어오는 돈은 한없이 적다. 같은 시간을 일해도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받는 액수가 적다. 정규직은 제도의 보호를 받고, 비정규직은 제도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어릴 때 공부를 안 해서 그런 거라고? 웃기는 말이다. 공부를 안 해서 그런 게 아니라, 공부를 해도 공평한 대우를 받을 수 없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공평하지 않은 시간을 살고 있다. 돈이 많은 사람은 시간이 많고, 돈이 없는 사람은 시간이 그만큼 없다. 돈이 많으면 어릴 때부터 고급 교육을 받으며 성장을 한다. 당연히 돈이 없는 아이들은 뒤처질 수밖에 없다. 영어유치원에 다닌 학생과 일반 유치원에 다닌 학생의 영어 실력이 같을 리 없다. 기업 회장의 아이와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근근이 살아온 아이가 하루 24시간을 동일하게 활용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돈이 많은 아이는 어릴 때부터 능력을 개발하지만, 돈이 없는 아이는 능력을 개발할 기회가 오지 않는다. 롤즈가 얘기하는 모두가 평등하게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는 무엇보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고려 속에서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동일한 의욕을 지니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출신 계급이 다르다고 그 의욕을 펼치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결코 공정한 사회라고 볼 수 없다. 이 책의 제목인 우리의 시간은 공평할까에는 우리가 사는 사회는 과연 공정할까, 하는 물음이 내포되어 있다. 권력자들은 자기 자식을 좋은 대학에 들여보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돈이 있는 아이들은 쌓는 스펙을 돈이 없는 아이들은 쌓을 수 없다. 돈이 있는 아이들이라면 당연하게 받는 고액 과외를 돈이 없는 아이들은 꿈조차 꿀 수 없다. 이러면서 사람들은 공정한 경쟁을 말한다. 출발지가 다른데도 경쟁은 공정하다고 외친다. 시간을 사유하는 건 곧 이 사회를 사유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걸 새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아이들이 살 세상의 공정성이 결정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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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설’에 관한 가장 체계적이고 분석적인 저서
    2,400년 동안 읽히고 연구되어 온 ‘설득의 기술’


    수사학은 다른 사람을 설득하기 위한 언어기법을 연구하는 학문의 한 분과이다. 정의를 현실 세계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관점에서 보자면, 『수사학』은 그 정점에 있는 저술이다. 왜냐하면 수사학은 그가 제시한 변증학을 기반으로 자신의 윤리학과 정치학을, 대중 연설과 법정에서 현실 정치로 구현해내는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논증 수사학, 문예 수사학, 기호론적·언어학적 수사학에 의한 담론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새로운 수사학이 관심 받고 있으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은 2,400년 동안 수사학 체계에서 ‘논증’ 이론에 관한 성찰의 기본서가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은 로마의 키케로와 퀸틸리아누스를 거쳐 중세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을 빼놓고 새로운 수사학을 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시 소피스트들은 정의와 윤리를 다 배제한 채로 오직 사람들의 감정을 움직여 자기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변증학적 기초 위에서 어떤 것이 국가에 이롭고 정의로우며 훌륭한 것인지를 개연적으로 증명해내는 수사학이야말로 ‘설득의 기술’로서 가장 좋은 수단이 된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은 세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권에서는 전체적으로 내용을 개관한 후에, 연설가가 사용해야 할 설득 수단이자 수사학에서 다루어야 할 내용 중 논리적 추론에 해당하는 ‘로고스’와 관련한 전제들을 집중 설명한다. 제2권에서는 ‘에토스’와 ‘파토스’를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제3권은 연설가가 신경 써야 할 추가 문제, 즉 문체와 배열, 그리고 전달의 문제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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