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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골든아워 #03 가벼운 사랑싸움이라는 말에 구역질이 났다 | 살아가는 힘이 되는 책 2018-10-17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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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아워』

 

생과 사의 경계, 중증외상센터의 기록
: 남과 여

 


 

 

 

혼절한 채 누워 있던 여자는 창백했다. 응급실에서 연락을 해왔을 때, 가정폭력으로 보인다고 했다. 환자의 발치에 한 남자가 잔뜩 웅크린 채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그가 보호자라 짐작했다. 커튼을 젖히고 들어가 기척을 했지만 남자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미동 없는 검은 뒤통수를 쏘아보았다. 침대 위 여자의 의식은 혼미했다. 옹송그린 남자의 등을 흔들었다.

보호자분, 정신 차리고 묻는 말에 답해주세요.
 
남자는 일그러진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굵은 손톱자국으로 난 상처가 피부 위로 붉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여자가 낸 절박한 저항의 흔적이라고 생각했다. 남자는 내 눈길을 피했다. 얼굴 위 붉은 줄이 내 시야 밖으로 벗어났다.
 
자기 발에 걸려 넘어졌어요.
 
남자의 목소리는 기어들어 갈 듯 작았다. 나는 이런 식의 말도 안 되는 손상기전을 수없이 들어왔다. 외과 의사 초년 시절에는 보호자라 말하는 남자들이 뱉는 말을 믿었다. 그 말을 손상기전으로 분석해 수술을 시작했다가 전혀 다른 문제를 발견하곤 했다. 무언가에 맞고 찔려 망가진 환자의 장기를 수술하며, 그런 말 같지 않은 말을 더는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침대 위의 여자 몸에서 굵은 상처 자국이 꿈틀거렸다. 손에도 아문 지 오래된 상처 자국이 있었다. 나는 상처에 관하여 묻지 않았다.

 

 

 

 

들고 있던 차트를 펼쳤다. 응급의학과 의사들이 이미 CT촬영을 마친 후였다. 결과를 확인했을 때 이미 쇼크 상태인 환자의 내부 장기는 파열돼 출혈이 심했다. 남자의 거짓말을 일일이 짚을 시간은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는 일이다. 급히 기관삽관을 하고 마취과에 도움을 청했다. 항생제 반응 검사와 수술에 필요한 기본 검사를 했다. 가해자가 분명할 남자에게 수술 동의서를 받았다. 욕지기가 치솟았다. 남자는 여자의 생명에 지장이 있는지 반복적으로 물었다. 그의 불안이 환자에 대한 걱정 때문인지 아니면 형사적 책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내가 상관할 바 아니었다.
    

환자를 수술방으로 올리고 갱의실에서 수술복으로 갈아입었다. 수술방 앞에서 소독약이 묻은 솔로 손끝과 손가락 사이사이를 문질렀다. 머릿속에 드는 생각들도 비벼 뭉개보려 애썼다. 드물지 않은 일이고 내가 개입할 문제도 아니다. 책임을 피하려는 치졸함이 아니라 경험에 의한 결론이었다.
   

연인이 연인을 칼로 찔렀고 부모가 자식을 밟아댔다. 자식의 주먹질에 부모가 쓰러졌고 손자의 발길질에 노인이 의식을 잃었다.

   
환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시작은 대부분 경미했다. 밀어젖히다 가볍게 주먹을 휘둘렀고, 그것이 심각한 구타로 이어졌다. 폭력은 그렇게 깊어지며 번져나갔다. 밖에서 일어나는 주먹다짐과 칼부림이 집 안에서도 빈번했으나 피해자들은 대개 침묵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들은 상대를 벌하지 않았고, 생계가 상대에 달려 있어 벌하지 못했다.
 
마음이 닳아빠진 이후로 나는 웬만하면 이런 일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컨베이어 벨트에 서서 나사를 조이듯 환자가 죽지 않도록 수술만 했다. 시급하고 중요하게 처리해야 하는 의료적인 일들이 쌓였고, 타인의 삶에 깊이 관여하기에는 일상이 너무 피곤했다. 손끝에서 소독약을 헹궈내며, 나는 더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며칠 후 여자가 깨어나고 사고 경위는 뒤바뀌었다. 처음에 남자에게 맞았다고 했던 여자는 문고리에 배를 부딪혔다고 했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의사로서 해야 할 말만 전했다. 사고 경위는 여자의 실수인 것으로 하여 사건은 종결되었고, 여자는 잘 회복해 퇴원했다.
 
여자가 남자 없이 혼자 외래 진료를 받으러 왔던 날 나는 실제 사고 원인을 물었다. 여자의 대답은 같았다. 대부분의 경우 그랬다. 나는 다시 물었다.
 
저는 경찰이 아닙니다. 그러니 제게 말씀하셔도 법적구속력이 없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사실 치료가 잘 되었으니 제가 더 관여할 부분도 아닙니다. 하지만 환자분 같은 상황을 너무 많이 봐왔습니다. 혹시라도 도와드릴 부분이 있나 해서 그렇습니다.
 
여자는 말을 할 듯 말 듯 하며 망설였다. 이 또한 예상했던 바였다.
 
저는 정말로 이 일을 문제 삼지 않을 겁니다. 이미 의료보험도 잘 받으실 수 있게 처리되었습니다.
 
맞아서 생긴 사고로 치료받는 경우에는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진료비를 보조해주지 않는다. 가정폭력에 대한 사실을 숨기다 보험 처리가 확인되고 나면 대부분 구체적인 경위를 털어놓는다. 여자 또한 같았다.
 
— ……생각하시는 게 맞아요. 제가 배운 것도 딱히 없고 애들도 아직 어려서 아빠가 필요해요. 이걸 문제 삼으면 이혼해야 하는데, 막상 이혼하면 먹고사는 것도 막막하고……. 가정을 지키고 싶어요.
 
비교적 정교한 오차범위 안에 들어 있던 여느 답들과 다름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여자들로부터 듣는 사고 경위는 대략 이러했다. 지나가던 남자가, 처음 만난 남자가, 연인이나 남편이 술을 마시고 때리고, 제정신으로 칼로 찔렀다. 여자를 잡아 던지고 가구를 들어 여자에게 던졌다. 가구 모서리는 여자의 약한 몸을 짓이기고 들어가 내부 장기를 찍어내며 터뜨렸다. 그럴 때 오로지 제일 질긴 신체 조직인 피부만이 온전히 붙어 있다. 폭력의 강도는 점차 세졌으나, 서서히 끓어가는 물 온도에 익숙해져 죽는 줄도 모르고 죽는 개구리처럼, 여자들은 앞으로 더 맞고 살이 썰려 나갈 것을 알지 못했다.
 

 

 

 

나는 가벼운 사랑싸움이라는 말에 구역질이 났다. 십중팔구는 점차 더 심하게 맞겠지만 당사자는 그것을 짐작조차 못해 유감이었다. 그러면서도 함께 사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인내를 높이 볼 수도 없었다. 그런 문제들에 고작 의사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사지에 선 말단 노동자로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내 업의 범위 안에 있는 것들일 뿐이었다.

 

 

 


 

 

 

 

 

 

골든아워 1

이국종 저
흐름출판 | 2018년 10월

 

골든아워 2

이국종 저
흐름출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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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골든아워 #02 대한민국에 중증외상 의료 시스템만 문제라고 생각하세요? | 살아가는 힘이 되는 책 2018-10-1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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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아워』

생과 사의 경계, 중증외상센터의 기록
: 정책의 우선순위

 

 


 

피는 도로 위에 뿌려져 스몄다. 구조구급대가 아무리 빨리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도 환자는 살지 못했다. 환자의 상태를 판단할 기준은 헐거웠고, 적합한 병원에 대한 정보는 미약했다. 구조구급대는 현장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병원을 선택할 것이어서 환자는 때로 가야 할 곳을 두고 가지 말아야 될 곳으로 옮겨졌고, 머물지 말아야 할 곳에서 받지 않아도 되는 검사들을 기다렸다. 그 후에도 다른 병원으로 옮겨지고 옮겨지다 무의미한 침상에서 목숨이 사그라들었다. 그런 식으로 병원과 병원을 전전하다 중증외상센터로 오는 환자들의 이송 시간은 평균 245, 그 사이에 살 수 있는 환자들이 죽어나갔다. 그렇게 죽어나가는 목숨들은 선진국 기준으로 모두 예방 가능한 사망이었다.

사지가 으스러지고 내장이 터져나간 환자에게 시간은 생명이다. 사고 직후 한 시간 이내에 환자는 전문 의료진과 장비가 있는 병원으로 와야 한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골든아워(Golden Hour)’. 그러나 금쪽같은 시간은 지켜지지 않았다. 가까운 거리는 앰뷸런스로 이송 가능하지만 먼 거리는 상황이 다르고, 가깝더라도 차가 막히는 러시아워가 되면 환자들은 길바닥에 묶였다. 고속도로나 일반도로에서 심하게 흔들리는 앰뷸런스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앰뷸런스로 2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가 헬리콥터로는 20분 안쪽이면 충분하다. 그렇게 실어 온 환자들의 생존 가능성은 당연히 높다. 내가 미국에서 보고 런던에서 봤던 사실이었다.

   

 

 

 

  

는 헬리콥터를 이용한 이송 체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일개 지방 병원의 외과 의사가 원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죽지 않아도 될 환자를 죽지 않게 하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필요했고, 그 의지를 실현시킬 정책이 필요했으며, 관련된 자들의 합의가 필요했다. 그러나 정책을 누가 만드는지는 알 수 없었고, 확실한 정책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아서 나는 그들의 실체를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결정적인 제약과 한심한 조치들은 늘 보이지 않는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정부로부터 몰려왔다.

 

보건복지부 측에서 마련한 회의 자리에서는 헬리콥터를 이용한 의료진의 현장 출동과 중증외상 환자 치료 체계 전반이 화두였다. 나는 중증외상 환자 이송에 헬리콥터를 도입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죽지 않아도 될 목숨을 살리려면 우선되어야 할 것이었다. 동석한 의료인들은 헬리콥터의 이착륙 장소와 소음 등을 문제로 삼으며 반대를 표했다.

나는 경험했으므로 알고 있었다. 런던 시가지의 수백 년 된 건물들 사이에서 헬리콥터가 날고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의료 헬리콥터로 인한 불편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서울의 도로는 역사가 오래된 외국의 대도시보다 넓고 잘 정비되어 있으며 동네마다 큰 운동장을 가진 공립학교들이 있어, 착륙 거점으로 쓸 수 있었다. 한국의 도로 정도면 얼마든지 유사시에 헬리콥터의 이착륙이 가능하므로 나는 실례를 들어 가능성을 논했다. 그러나 모두 안 된다고만 했다. 제대로 된 중증외상 의료 시스템을 세우려면 국가의 방향 설정이 필요했다.

서로의 뜻이 다르다는 사실만 확인한 채 회의는 끝났다. 속에서 마른 먼지가 일어 숨이 틀어막혔다. 정부에서 밀어붙여주었으면 싶었으나 그 역시 더뎠다. 중증외상과 관련한 정책 추진이 답보 상태인 데 대해 한 전문위원에게 답답한 속내를 토로했다.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그가 되물었다.
이 교수님. 대한민국에 중증외상 의료 시스템만 문제라고 생각하세요? 그것만이 심각하고 촌각을 다투어야 하는 문제인가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국방, 예술에 이르기까지 어디 하나 녹록한 부분이 있는 줄 아세요?

머릿속이 서늘했다. 그의 말은 사실을 짚었을 뿐 비난도 질책도 아니었다. 정부에서 추진하고 진행해나가는 일들은 수없이 많고 중증외상 문제는 그중 하나에 불과하다. 나는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물음과 눈빛에 말문이 막혔다. 그는 차분하고도 군더더기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리 수많은 사람이 노력하고 필요성을 알린다고 해도 국가 정책이 움직일 수 있는 파이는 정해져 있어요. 그게 현실이고 사실이죠. 민주 국가에서 정책을 집행할 때 다양한 안건이 수많은 사람들을 거쳐 진행됩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일들이 발생하고요. 시급했던 정책들이 미뤄지다 폐기되기도 하고, 대규모 국책사업이 예산 낭비로 판명되는 경우도 있어요. 하지만 어떻게 합니까? 옳은 방향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 다 다른걸요.
 
그의 말은 틀리지 않다. 제대로 된 중증외상센터가 없다고 나라가 망하지는 않는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것 없이도 지금까지 잘 지내왔다. 중증외상 의료 시스템이 없어 죽어나가는 목숨보다 더 많은 목숨이 걸린 중대 사안은 많을 것이다. 그것들조차 잰걸음을 하다 고꾸라질 수도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책의 우선순위는 사안의 중요성보다 누가 얼마만큼 관심을 가지고 동의하느냐에 달려 있다. 대한민국에서 기본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것이 중증외상 분야뿐인가? 노동 현장이나 교육 현장이나, 수많은 사안들이 주먹구구식으로 흘러간다. 힘없고 돈 없는 이들에게 기본이라는 말은 참으로 사치스러운 단어다. 기준도 저마다 달라 싸움은 곳곳에서 벌어진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인정하기 쉽지 않았다. ‘왜 우리는 안 되는 것인가?’ 하는 답 없는 의문만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내 앞에 놓인 길은 아득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사지에서 나아가고 물러서기를 반복해야 하는데, 그사이 조촐하게나마 모인 팀원들이 광범위한 업무와 산적한 업무량에 쓰러져가고, 죽어나가는 환자들 또한 수없이 많을 상황이 눈앞에 보였다. 기다림은 길고 지난할 텐데, 묵묵히 버텨낼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참고 기다린다고 한들 앞으로 달라질 가능성조차 없어 보이는 것이 제일 견디기 어려웠다.

 

 


 

 

골든아워 1

이국종 저
흐름출판 | 2018년 10월

 

골든아워 2

이국종 저
흐름출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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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골든아워 #01 환자에게 가까이 접근할수록 환자를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커질 거야 | 살아가는 힘이 되는 책 2018-10-05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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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아워』

생과 사의 경계, 중증외상센터의 기록
: 남루한 시작

 

 


 

 

중증외상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이 나의 업()인데도 환자들은 자꾸 내 눈앞에서 죽어나갔다. 살려야 했으나 살릴 방법을 찾지 못했다. 필요한 것은 시스템이었다.
 
선진국의 중증외상 의료 시스템을 봐야만 했다. UC 샌디에이고 외상센터(University of California, San Diego Trauma Center)에서 단기 연수를 받기로 했다. 40여 년의 역사를 거치며 정돈된 미국의 중증외상 의료 시스템은 한국과 차원이 달랐다. 환자 치료의 규모와 범위에 따라 각 임무에 맞게 레벨이 정해진 외상센터들이 1~4단계까지 분류되어 있었고, 그 센터들은 유기적으로 작동하며 환자를 살렸다.

 
‘OR Resus pt in 15min by Air’
출근 첫날 지급받은 페이저(pager) 날카롭게 울었다. 센터의 오퍼레이터가 의료진에게 보낸 메시지였다. 환자는 심폐소생술이 필요한 상황이며 헬리콥터로 15분 내에 센터에 도착, 응급실을 거치지 않고 곧장 수술방으로 올라가 수술적 치료가 시작될 것을 뜻했다. 나는 중증외상 환자 전용 수술방에 진입했다. 외과 수석 전공의 데니가, 환자는 공사장에서 추락했고 개흉술을 통해 심장마사지를 해야 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하다고 설명했다. 곧 헬리콥터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환자의 심장은 이미 멈춰 있다고 했다. 긴박한 상황에 모두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다다다다다…….

이동용 침대가 복도를 가로지르는 소리가 수술방까지 울렸다. 헬리콥터 착륙장에 올라갔던 외과 전공의 우탐이 환자 위에 올라가 심폐소생술을 하는 상태 그대로 침대가 밀려들어 왔다.

 

 

 

우탐이 환자에게서 내려오자 포텐자 교수는 곧장 칼을 들고 환자의 가슴을 수평으로 열었다. 폐와 심장이 드러났다.

립 스프레더(Rib Spreader)!
스테인리스강으로 만들어진 스프레더가 환자의 늑골을 벌렸다. 포텐자 교수는 익숙하게 환자의 심장 부위까지 절개해 들어갔다. 옆에 있던 데니가 심장을 양손으로 직접 잡아 마사지했다. 이 모든 일이 3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안에 이루어졌다. 혈액과 수액을 환자에게 쏟아부었다. 환자의 심장이 곧 떨려왔다
.

디피브릴레이터(Defibrillator)!
포텐자 교수가 외쳤을 때 한국에서 심장 수술할 때나 쓰는 심장제세동기가 이미 환자 곁에 준비되어 있었다. 포텐자 교수가 직접 제세동을 시도했고 환자의 심장이 곧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는 마취과 의료진 쪽으로 눈을 돌렸다. 눈이 마주친 그들은 길게 말을 섞지 않았다
.

시작하죠(Let’s Do it)!
환자의 몸이 곧장 개복(開腹)됐다. 열린 복벽 사이로 파열된 간에서부터 피가 뿜어져 올라와 사방으로 튀었으나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수술창과 수술 범위는 몹시 컸다. 수술방에 긴장감이 돌았으나 당황하는 사람은 없었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수술은 충격적이었다. 첫날부터 모든 것이 압도적이었다. 환자가 헬리콥터로 빠르게 이송됐고 수술 준비와 진행은 완벽했으며 지원은 아낌없었다. 모든 것이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던 중증외상 환자 수술적 치료의 정석이 눈앞에서 이루어지던 순간 나는 전율했다
.

환자를 헬리콥터로 이송하는 것이나 의료진이 헬리콥터에 탑승하는 것은 한국에서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방금 전 수술한 환자도 한국이었다면 앰뷸런스로 이송되었을 것이고, 병원 도착 전에 이미 사망했을 것이다. 나는 수술을 마친 포텐자 교수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헬리콥터로 현장에 출동하는 의사들에 대해 물었다. 그의 답은 선명했다.

 

 

"네가 환자에게 가까이 접근할수록 환자를 살릴 기회가 많아질 거야

(The closer you get to the patient, the more likely you’ll save the patient)."

 

 

어떤 환자라도 조건은 같고 환자는 언제나 상황에 우선한다. 원칙은 흔들리지 않았다. 의료진은 원칙대로 환자에게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더 빨리, 더 가까이 가려고 애썼다. 헬리콥터로 20분 남짓이면 현장에서 센터까지 환자를 이송해왔다. 때로는 의료진이 장비를 메고 헬리콥터에 올랐고, 그 안에서 긴급한 시술이 이루어졌다.

 

 

이성과 원칙, 교과서적인 알고리즘을 따라 움직이는 시스템, 그 시스템을 받쳐줄 수 있는 규모의 센터, 민간과 군이 하나가 되는 의료 체계……. 그 안에서는 환자들이 살아 나갔다. ‘이 시스템을 한국에 도입해야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한국에 돌아온 후 주위 반응은 막막했다. 이곳에는 이곳만의 ‘질서’가 존재했다. 외상외과를 하면 할수록 선진국과 한국의 간극을 절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진국 수준의 중증외상 의료 시스템을 그대로 가져와 심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현실에서 극심하게 부딪치면서도 나는 좀처럼 그 생각을 바꿀 수 없었다.

 

 


 

 

 

골든아워 1

이국종 저
흐름출판 | 2018년 10월

 

골든아워 2

이국종 저
흐름출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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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라틴어 수업 #08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 (마지막) | 살아가는 힘이 되는 책 2017-08-2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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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lite ergo esse soliciti in crastinum crastinus enim dies solicitus erit sibi ipse sufficit diei malitia sua.'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신약성서 마태오복음 634절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마태오는 신앙의 삶이 실현되면 인간이 내일의 근심에서부터 해방되어 오늘을 자신 있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삶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믿음 안에서 살아야 내일 일을 걱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물론 이런 해석은 어디까지나 성서적인 해석입니다.

 

저는 이 문장은 하루의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인간의 임계치를 드러내주는 말이라고 봐요. 하루에 자신이 수용할 수 있는 감정의 한계치를 넘으면 겸허하게 그 감정을 내일로 넘겨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참 쉽지 않죠. 무엇 하나에 꽂히면 종일 온통 그 생각뿐이고 잠도 잘 이루지 못해요.

하지만 우리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듯 매일매일 부정적인 마음도 다음 날로 연기한다면 어떨까요? 절망, 지금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싶은 마음, 누군가에 대한 분노 같은 것들을 말입니다.

 

Hoc quoque transibit!
이 또한 지나가리라!

저는 힘들 때 이 말을 생각합니다. 지금의 고통과 절망이 영원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어디엔가 끝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마침표가 찍히기를 원하지만 야속하게도 그게 언제쯤인지는 알 수 없어요. 다만 분명한 것은 언젠가 끝이 날 거라는 겁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가요.

그러니 오늘의 절망을, 지금 당장 주저앉거나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끝 모를 분노를 내일로 잠시 미뤄두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에 나를 괴롭혔던 그 순간이, 그 일들이 지나가고 있음을, 지나가버렸음을 알게 될 거예요.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은 그 말 그대로 기쁘고 좋은 일도 머물지 않고 지나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허망하죠? 하지만 그게 인생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웃고 울 일들이 일어나고 또 지나가고 그렇게 반복해가는 것일 겁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것은 기쁘고 행복한 그 순간에는 최대한 기뻐하고 행복을 누리되, 그것이 지나갈 때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돌아와 웃을 수 있는 순간을 위해 지금을 살면 됩니다. 힘든 순간에는 절망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내일로 미뤄두는 겁니다. 그 순간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려보는 것이죠.

세상에 지나가지 않는 것이 무엇이고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것은 지나가고 우리는 죽은 자가 간절히 바란 내일이었을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것들에 매이지 마세요. 우리조차도 유구한 시간 속에서 잠시 머물다 갈 뿐입니다.

 

 


 

라틴어 수업

한동일 저
흐름출판 | 2017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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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라틴어 수업 #07 무엇을 봐도 별로 감흥이 없다면 | 살아가는 힘이 되는 책 2017-08-21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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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파시즘 국가를 탄생시킨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 그는 ‘위대한 이탈리아’외치며 대형 건설 공사를 시작합니다. 이를 통해 1938년 로마 주변의 많은 위성 도시가 탄생했습니다. 무솔리니 건축물의 특징은 파시즘을 상징할 수 있도록 웅장하고 위압적이라는 겁니다. 그는 건축가이자 도시 계획자인 마르첼로 피아젠티니와 함께 바티칸 광장에서부터 콜로세움에 이르는 거대한 도로 건설 프로젝트를 준비했습니다.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이 됐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길을 내기 위해 1927, 지금의 토레 아르젠티나 광장에 위치한 건물들을 부수기 시작했는데, 그 아래 땅서 뭔가 발굴되기 시작한 것이죠. 학자들은 여기에서 발견된 유적지가 무엇인지 조사하기 시작했어요. 그곳은 바로 율리우스 캐사르(카이사르)가 기원전 44315, 독재정 타도를 외친 브루투스와 가티우스 등이 주도한 음모에 의해 암살당한 장소였던 겁니다.

 

 

캐사르가 암살된 장소가 발견되자 이탈리아 여론은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무솔리니의 바티칸 광장에서 콜로세움까지이르는 도로 건설 프로젝트도 무산됩니다.

이곳이 캐사르가 암살된 장소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법의학 수업 때였습니다. 캐사르가 브루투스 외의 여러 사람의 칼에 찔려서 자상으로 사망하려면 몇 사람이 동시에 어떤 자세로 찔러야 가능한가에 대한 수업이었습니다.

하지만 제 귀에는 더 이상 수업 내용이 들리지 않았어요. 그 장소가 제가 늘 무심히 지나다니던 곳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살던 기숙사는 로마의 주요 관광지의 중심에 있었는데 정작 저는 관심이 없었어요. 그때를 돌아보면 정말 관심이 없었다기보다 마음의 여유가 너무 없었던 것 같아요. 해야 할 공부, 해야 할 일만 생각하기에도 벅찰 때였으니까요. 그러니 그 유적지 역시 무심코 지나다녔던 것이죠

 

 

Tantum videmus quantum scmus.
우리가 아는 만큼, 그만큼 본다.

 

 

 

이 말을 절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로마의 대부분은 그 유구한 역사만큼 역사적인 장소가 아닌 곳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죠. 하지만 알지 못하면 보이지 않습니다. 문득 궁금하더군요. 무솔리니 같은 독재자가 캐사르가 암살당한 이곳에 왔다면 어땠을까, 그는 이곳을 그냥 지나쳤을까, 이곳에 서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고요.

사실 알 수 없는 일이죠. 알고 왔다고 해도 아무 생각 없었을 수도 있고 아주 마음이 불편했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 나는 다르다라고 해석하고 돌아갔을 수도 있고요. 어쨌든 중요한 건 아는 사람은 그만큼 잘 보겠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성찰하는 사람은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그런 사람이었다면 이국에서 온 저와는 아주 다른 인생의 전환점맞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람마다 자기 삶을 흔드는 모멘텀있을 수 있습니다. 나를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힘은 다양한 데서 오죠. 한 권의 책일 수도 있고 한 곡의 음악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만남일 수도 있고 잊지 못할 장소일 수도 있고요. 그 책을 보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그곳을 가보았기 때문에 새로운 것에 눈뜨게 되고 한 시기를 지나 새로운 삶으로 도약하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모멘텀은 그냥 오지 않아요. 아는 만큼, 그만큼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과도 같을 겁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깨어 있고 바깥을 향해서도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야 책 한 권을 읽어도 가벼이 읽게 되지 않고 음악 한 곡을 들어도 흘려듣지 않게 될 겁니다.

 

누군가와의 만남도 스쳐 지나가는 만남이 아니라 의미 있는 만남이 될 것이고요. 한순간 스치는 바람이나 어제와 오늘의 다른 꽃망울에도 우리는 인생을 뒤흔드는 순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뒤흔든 무언가가 있나요?
그것은 무엇인가요?
그처럼 흔들리고 나아가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혹 아직 그와 같은 뭔가를 만나지 못했다면 천천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알고자 하는 마음조차 없었던 것은 아닌지, 깨어 있으려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라틴어 수업

한동일 저
흐름출판 | 2017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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