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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 핍 윌리엄스 저. | 문학 2021-02-12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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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

핍 윌리엄스 저/서제인 역
엘리 | 2021년 01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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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단어들을 빼앗길 수 없었다.

그것들이 나를 설명해주기 때문이었다.

110쪽.

 

 


 

 

주인공 에즈미 니콜이 태어난 해는 『옥스퍼드 영어 사전』 편찬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전국에서 자원봉사자들이 단어를 제보하는 엽서를 보내면 사무실에서 그것들을 전부 검토하고 분류하면서 중요한 단어들을 골라냈다. 사전 책임 편집자 제임스 머리의 조수였던 아빠 덕분에 사무실에 마음껏 드나들 수 있었던 에즈미는 어느 날 책상 밑에 버려진 단어를 발견한다. 'Bondmaid'였다.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에즈미는 그것을 숨겨 집으로 가져온다. 여성 노예라는 뜻의 그 단어를 구출한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이 책은 에즈미가 어떻게 사전 편집자가 되는 꿈을 꾸게 되었는지, 사전 편찬 작업에서 누락된 단어를 수집하기 시작했는지를 그린다. 사전 편집자들, 시장의 하층민들, 조판공들,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 전쟁에서 살아돌아온 젊은 군인 등 에즈미가 도중에 만나게 되는 다양한 인물을 통해 단어와 언어, 여성의 삶에 대한 고찰을 끌어낸다. 작가는 때로 질문이나 행동으로 계속해서 부딪히는 인물을 등장시켜 에즈미를 고민에 빠뜨리고, 성장시킨다. 나아가 독자에게도 생각거리를 제시한다.

 

프롤로그부터 에필로그까지 500여 쪽 내내 집중력이 흐려지는 일 없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훌륭하게 전달하는 그 힘이 놀라웠다. 이게 작가의 첫 장편이라니, 부러웠다. 특히 프롤로그를 잊을 수 없었다.

 

엄마 릴리의 이름이자 백합이라는 뜻의 단어가 영어사전 편찬 작업에서 누락된다. 아빠 해리가 그 단어를 벽난로 속으로 던져 버리는데, 다섯 살 에즈미는 그걸 구하려다가 손가락에 화상을 입고 만다. 그 화상 자국은 훗날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또래들에게 놀림거리가 되곤 한다. 이 장면은 빅토리아 시대에 여성이 지식을 추구했을 때 대가로 치러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앞으로 에즈미가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지 암시하는 장면이다.

 

 


 

 

이 책을 읽기 전만해도 나는 언어의 주인이란 그것을 쓰는 사람 전부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만약 그 말이 주인을 대변하지 못하는 기능을 상실한 것이라면 어떨까? 그래도 그것이 진짜로 주인이 있는 언어가 되는 걸까?

 

에즈미가 열네 살에 생리를 시작했을 때 사전에 나오는 '월경혈'이나 '생리'의 용례를 아무리 찾고 읽어봐도 그 단어는 에즈미 본인이 느끼는 고통과 혼란을 답해주지 못한다.

 

조판공이었던 개러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전쟁터로 나간다. 그곳에서 '슬픔'과 '공포'라는 단어의 한계를 절실하게 느낀다.

 

"내가 뭔가 쓸모 있는 일을 한다고 느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슬픔'이라는 말을 조판해봤자 슬픔은 사라지지 않아요. 제드 어머니는 사전에 뭐가 적혀 있든 느껴지는 걸 느끼실 거예요."

"하지만 어쩌면 그분의 느낌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게 도울 수 있을 거예요."

내가 한 말이기는 했지만 나 자신도 설득이 안 됐다. 어떤 경험들에 대해 사전은 오직 거기 가까운 말들을 제공할 뿐이었다. '슬픔'도 그중 하나임을, 이미 나는 알고 있었다.

436쪽.

 

 

 

머레이 가문의 시종이자 에즈미의 친구인 리지는 에즈미가 처음으로 구한 단어 'Bondmaid'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여자 노예라는 이 단어는 처음엔 리지라는 존재를 정의하며 속박하는 단어로 느껴진다. 이처럼 언어는 그 한계가 뚜렷한 발명물 혹은 현상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것에 매달려야 하는가?

 

이 외침에 답해 준 것은 리지였다. 에즈미가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에 들어갈 단어들을 수집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리지는 'Bondmaid'에 자신만의 정의를 내리며 단어의 한계성을 스스로 뛰어넘는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이 매달 일어나는데 당하는 사람이 이유를 모를 수 있지?

85쪽.

 

 

에즈미가 생리를 시작했을 때 고통의 이유를 모른다는 것에 경악을 했던 반면에 내 첫 생리는 담담하게 지나갔다. 왜?라던가 어떻게?라고 물을 생각도 않았던 것 같다. 그저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 달마다 심해지는 통증과 함께 내 몸에 서서히 쌓여가는 것이 있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한 불신과 분노였다. 그래서인지 육체의 감각은 여성의 몸으로 태어난 나에겐 굉장히 중요한 것들이다.

 

육체란 사회가 나라는 사람의 정체를 파악하는 시작점이기에 정체성과도 맞물려있다. 고통이나 쾌락은 육체를 통해 전해지고 그런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여 가치관이 된다.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누락된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 언어를 쓴다. 그러니까 언어와 사회와 육체는 내게 있어선 떼려야 뗄 수 없어 보이는데 이 책에서 그 역학관계를 보았다.

 

개인과 사회가 만들어낸 단어는 정의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나는 그 단어에 고려되어야 할 가치가 결여되어 있을 때, 여성이 동등하게 존중받지 못한 사회에서 쓰는 단어와 표현이 여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전쟁이나 출산 같은 경험 앞에선 단어가 얼마나 무력한지 재확인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작가는 소외된 사람들의 잃어버린 단어들을 향한 에즈미의 열정, 역사를 개척하는 여성들의 용기, 타인을 향한 애정 어린 시선 또한 언어를 통해 전달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 따스함에 얼마나 많이 구원받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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