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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서양철학사 | 나의리뷰 2020-08-21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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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틸리 서양철학사

프랭크 틸리 저/김기찬 역
현대지성 | 2020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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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수업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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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시작은, 우주를 신화로 설명하려 했던 신화시대부터 시작된다, 물론 그 전에도 인간은 사유를 했겠지만 철학의 역사는 그리스 신화로 부터 시작된다. 이어서 중세 시대에는 그리스도 신학이 대부분을 차지하는가 하면. 근대는 르네상스철학 시대가 열린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정답이 없다는 것이 또한 철학의 답이다. 그러므로 철학사는 대부분 앞선 학파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이 책은, 철학의 명문인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철학 교수로 평생 봉직한 프랭크 틸리 교수가 쓴 것으로 철학 이론의 단순한 연대기적 나열과 설명이 아니라 철학 이론 간의 관계, 그것들이 산출된 시대, 그리고 그 이론을 제공한 사상가들과 관련된 연구이다.

가장 탁월한 특징은 객관성과 공정성이다. 틸리 교수는 철학에서 나중에 등장하는 체계들이 앞선 학파에 대해 아주 훌륭한 비판을 제공한다는 확신을 갖고서 자신의 비판을 최소한으로 줄였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철학을 하는가?’라는 질문부터 해 봐야 겠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현존 속에 부재가 있기 때문에, 생체 안에 죽음이 있기 때문에, 결핍의 현존을 증명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라고 말한다.

이를태면 철학이란 자기 자신의 앎의 문제를 탐구하는 사유의 학學이라는 말이다.

인간은 욕망의 동물이다. 해서 늘 결핍을 느끼는 것이 또한 인간이다. 그것은 끝없이 의심과, 고민과, 방황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인간은 철학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철학 체계는 한 개별 지성의 창조적 사유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철학사는 “상당히는 인간적 기질들의 충돌의 역사이다”라는 윌리엄 제임스의 말대로, 순전히 역사적인 혹은발생적인 유형의 철학 해석은 종종 엄청나게 복잡한 전기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의 실타래를 푸는 일과 관련된다. 개인적, 혹은 기질적 요소는 철학에서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의 철학 체계는 한 개별 지성의 창조적 사유의 산물이지, 어떤 집단 의식의 업적인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p.18)



20세기 전번에 걸쳐 미국 주요 대학에서 철학 교재로 사용된 책인 만큼,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부터 니체와 러셀까지. 서양 철학사를 총 망라한 820 쪽의 두터운 책이다. 철학 참고서역할을 넉넉히 할 것 같은 이 책은, 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한권 씩 소장 해야할 것 같다. 시대적으로 나열된 것이지만 그때그때 알고싶은 시대와 학자들을 부분적으로 찾아봐도 좋을 것 같은, 철학 사전이다.

전문성이 느껴지는, 다소 어려운 책이지만 그래도 그동안 부분적으로 접했던 철학관련 책들을 한 권으로 정리해 놓은 듯 해서 책꽂이에 꽂아두니 마음이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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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두려움 날려보내기 | 나의리뷰 2020-06-20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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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에세이를 씁니다

우수진 저
SISO | 2020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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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는요.

▶ 글쓰기의 두려움을 날려버리는 마음 챙김

▶ 잘 익은 수박의 꼭대기에 큰 칼을 대자마자 수박이 쩍 갈라지는, 그런 사이다 같은 글의 맛.

▶ 누구나 무엇이든지 쓰고 싶게 만드는 신묘한 힘.

이 세 가지를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라는 말로 시작되는 작가의 글쓰기에 대한 주관적인 생각을 펼쳐낸 책이다.

'오호, 그깟 글쓰기쯤이야. 나도 한번 써볼까?' 이런 생각이 드실 거라는 작가의 말은 아무래도 약간은 과장된 것 같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깟 글쓰기쯤'이 아니라 '그래, 나도 한번' 정도라면 모르겠지만.

어쨌든, "글쓰기 방법도 그 시대가 요구하는 유행이 있다. 마치 사실주의 미술이 인상주의, 추상주의 미술로 바뀌는 것 같이. 해서, 시대나 유행을 초월한 아주 사적인 영감, 자신만의 생각을 쓴 글이 좋은 글이다."라는 대체적으로 자유분방한 글쓰기를 유도하는 작가는 자신의 글쓰기 경험과 노하우를 소개한다.

삼천포로 빠지면 빠지는 대로 내버려 두고 거기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쓴다. 여기에선 삼천포였어도 저기에선 환영받는 주인공이 될 가능성이 언제나 있다. 이게 또 다른 주제로 하나의 글이 되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삼천포로 빠진 글만 살아 남과, 주제에 맞게 적었다고 생각한 글은 잘라내 새로운 간판을 걸고 내 마음에 쏙 드는 글이 되기도 한다. (p.40)

개인적으로 나는 이 구절이 제일 마음이 든다. 이런 생각으로 글을 쓴다면 적어도 글쓰기가 즐거워지지 않을까? 마치 어린아이가 놀이를 하듯….

'아버지와 아들과 당나귀'라는 옛날이야기처럼 눈치 보지 말고 '우리 그냥 쓰고 싶은 대로 쓰자'라고 하는 주장은 나를 참 편하게 해 주는 이야기인 것도 같지만 한편으로는 '그러면 자칫 '자기 넋두리' 내지는 '일기'가 되지 않을까'하는 의구심이 살짝 들기도 한다.

그러면서 "글쓰기에 도 기술이 있기는 하지만 그 기술이 예술보다 앞선다면 언젠가 모든 예술은 AI가 대체하고 말 것"(p 172 )이라고 은근한 우려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사실주의는 기술이고 추상주의는 예술이라는 말인가?

아마도 시작 부분에서 말한 "기승전결을 지키고 시작과 끝은 어떻게 해야 한다"와 같은 매너리즘에 빠지지 말라는 말로 해석해 본다. 아마도 '에세이' 라는 장르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가 아닐까?

부록에는 원고를 투고하는 방법에 대한 안내까지 친절하게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을 읽고나면 아마도 좀더 편안한 마음으로 에세이 쓰기에 도전 해 볼 수 있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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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왜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가? | 나의리뷰 2020-05-14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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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사람의 아들

이문열 저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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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은 왜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가?>


대구시의 동부서 형사과에 살인사건 신고 전화가 들어온다. 피살자는 민요섭. 누군가의 칼을 맞고 살해된 것이다. 그 사건을 맡은 남 형사는 민요섭을 키워준 할머니 집에서 민요섭이 쓴 원고 뭉치를 발견하고 수사에 참고하기 위해서 가져온다



로마 제정 초기 옥타비우스 아우구스투스의 시절, 어느 날. 베들레헴 마구간에서는 ' 예수'가 태어나고 같은 시각 벧엘 부근의 한 샴마이학파 율법사 집에서는 '아하드 페르츠’가 태어난다.

아하드 페르츠는 태어나자마자 걷고 말할 수 있었다. 놀라운 기억력과 총명을 타고난 아이는 장차 꿈이 이 땅에서 가장 우러름 받는 랍비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자라면서 자신들의 신 야훼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급기야 인간의 고통을 해방 시켜줄 빵과 기적과 권세의 신을 찾아 나선다. 이집트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신 찾기는 바벨론,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수호신, 인도의 불교까지, 수천의 신들로 이어지며 그 교의들을 익힌다. 그러나 결국은 그 모든 신들의 불합리와 악덕과, 부패와 타락에 더 많은 실망을 하고, 마지막으로 로마로 발길을 돌린다. 거기에서 서로 말다툼을 하고 있는 한 무리를 만난다.




아이러니하게도 별로 배운 것도 없는 그 무리의 한낱 가벼운 말다툼에서 크게 진리를 깨달은 아하스 페르츠는 고향 유대로 돌아간다. 그리고 광야로 가서 단식과 묵상에 잠기며 참된 신의 부름을 기다린다, 40일째 되던 날, 마침내 '위대한 신성'의 음성을 듣고 직접 대면하여 하루 낮 하룻밤을 함께 긴 이야기를 나눈다.

위대한 신성과 헤어져 광야를 벗어나려던 그는 광야의 다른 쪽에서 기도하고 있는 야훼의 아들 예수를 만난다. 그곳에서 사람의 아들인 아하스 페르츠는 세 번에 걸쳐 야훼의 아들을 시험한다. 빵과 기적과 권세를 가지고 유혹하는 사람의 아들을 야훼의 아들은 위대한 신성의 말씀으로 물리친다.

그러고도 그는 다섯 차례를 더 예수와 만남을 가지는데 그 마지막이 예수가 처형되는 날 해가 가려지던 낮 열두시에서 오후 세시까지의 암흑으로 만난다.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사탄>이었다.

그러나 원래 그 둘(사람의 아들과 야훼의 아들)은 하나다. 단지 인간에 의해서 그 둘은 선과 악으로 나누는 이분법이 생겨났을 뿐.

민요섭의 원고 속 인물, 아하드 페르츠는 바로 민요섭 자신이며 오롯한 자신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민요섭은 전쟁고아로 외국 선교사의 양자다. 일류 중, 고등학교를 나와 명문 대학교에서 이 년 동안 철학을 공부하다가 신학대학에 들어갔다. 뛰어난 성적으로 승승장구하던 그는 삼학년에 올라가자 갑자기 성적이 뚝 떨어지고 휴학, 급기야는 퇴교로 끝낸다. 그가 경험한 신학교와 교회 목사들의 불합리는 급기야 자기가 믿는 신에 대한 회의로 이어진다. 분노를 느낀 그는 실천신학에 몰두하게 되고 교회를 떠난다. 마침내 양부의 재산은 물론 자신이 버는 돈마저 이웃을 위해 모두 쓰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신앙으로 사랑을 실천한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회심을 하고 다시 기도원으로 들어와서 기도에 전념하게 되는데, 그의 회심에 대한 계기는 이 책에 확실히 밝히지 않았지만 그가 남긴 낙서장과 소설의 원고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이제 너는 신앙할 수 있다. 절망했으므로, 살 수 있다. 죽었으므로."

자아에 대한 절망, 또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절망을 느낀 그는 지적 오만, 독선, 편견, 허영 같은 것들을 죽이고 진정한 신앙인으로의 회귀의 고백이자 결의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p.40-41)

우리는 '신 안에'남아 있었어야 했다고, 불합리하더라도 구원과 용서는 끝까지 하늘에 맡겨두어야 했다고, 그러고는 단정했소. 우리는 무슨 거룩한 소명이라도 받은 것처럼 새로운 신을 힘들여 만들어냈지만, 실은 설익은 지식과 애매한 관념으로 가장 조악한 형태의 무신론을 얽었을 뿐이라고, 우리가 어김없이 신이라고 믿었던 것은 기껏해야 저 혁명의 세기에 광기처럼 나타났다가 조롱 속에 사라진 이성신이거나 저급하고 조잡한 윤리의 신격화에 지나지 않았다고, 그런 다음 과장된 참회와 더불어 십자가 아래로 돌아가겠다고 했소.p.389


한편 민요섭을 신처럼 따르며 그의 신앙관을 온전히 이어받았으나 갑자기 변해버린 민요섭의 신앙관에 동의하지 못했던 조동팔은 배신감과 허탈감에 민요섭을 살해하고 자기도 독극물을 먹고 자살한다. 그도 나름대로 새로운 경전을 남기는데, <쿠아란타리아서>. 바로 그들이 바랐던 신, 그들이 만든 신의 경전이다.



책속의 인물, 아하스 페르츠의 질문은 곧 민요섭의 질문이며 또 나의 질문이다. 역시 "해아래 새것은 없나니…."라는 성경 말씀이 절감된다. 그동안 하나님에 대한 나의 부정과 갈등과 의문도 이미 오래전 우리의 조상들이 했던 것들이었다. 신을 찾아 떠난 그의 여행, 또한 나의 여행이었다.

생각해 보면 나의 독서도 바로 신을 찾는 여정의 시작이었다.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받으면서 시작된 의문들은 너무나 많았다. 성경의 불일치에서부터 성경의 무오설, 하나님의 사랑, 자비, 용서, 완벽성, 예정론, 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최고의 불경한 질문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난해하기만 한 성경을 손에서 놓고 조직신학에 관심을 가졌고 새로운 해석의 유튜브 동영상, 신학자들의 말들에도 귀를 기울여 보고 기존의 설교를 뒤집는 설교 집들도 읽어보았다. 철학서를 뒤적였고, 인문학, 문학에서 그 답을 찾아 헤매었고, 지금까지도 그 과정은 진행 중이다. 그런 내 눈에 이 책의 제목이 바로 눈에 뜨였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다.

이미 다섯 번째 출판으로 25년 은경축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나로서는 처음 접한 책이다.

생각 해 보건데, 신앙에 대한 나의 오랜 갈등과 물음이 "해를 더 많이 알고 싶어서 확실하게 해를 보려다가 두 눈이 멀어버린 장님"과 같은 어리석음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것이 진리라고 하더라도, 무조건 믿어 버리는 것과 "아니다"라고 한 번쯤 뒤집어 보고, 고민해 보고, 체험 해보고 난 뒤 깨닫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내 신앙이 확실하게 꽂꽂이 섰다고는 말할 수 없겠으나 그래도 "피상적인 경전 해석이나 이 시대에 유행하는 편견과 오류에서 자유로워지기만 하면 반드시 부딪히게 될 의문일 뿐이다."( p.113)라는 말과 "부정은 확신하고 긍정하기 위한 것."(p.116)이라는 말에 힘입어서 나름대로 나의 비틀거리는 신앙을 합리화 시켜본다.

그러면서 나는 오늘 "그분을 믿음으로써 우리가 지혜로워진다"는 말을 마음에 담는다.

얘야, 너는 인간의 앎과 슬기를 지나치게 믿는 것 같구나.

하지만 언제나기억해라.

아무리 큰 앎과 슬기라도 하나님의 섭리를 산술처럼 풀어낼 수는 없는 것,

그분을 믿는 것이 지혜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믿음으로써 우리가 지혜로워진다는 것. 그리고

과도한 지식으로 종종 우리의 믿음과 경건을 해치게된다는것을.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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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나에게 말을걸어올때 | 나의리뷰 2020-03-28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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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종교가 나에게 말을 걸어올 때

김봉현 저
지식의숲 | 2020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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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내가 그에게 대답을 건넨다. 관계는 그렇게 시작된다.

그런데 대답을 건네기 전에 우리에게는 망설임이 있다. ‘이 관계를 시작해도 되나’의 망설임이다. 나는 상대를 알지 못하니 망설여질 수밖에 없다. -중략- 내가 상대에 대해 미리 소개를 받았다면 일은 좀 더 수월해질 수 있다.“ (p.340)

마찬가지로 종교가 그렇다고 작가는 말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종교’란, 반드시 형이상학적인 종교뿐 아니라 세속주의, 과학주의를 포함한다.

“종교가 나에게 말을 건다. 우연히 만난 하나의 문장으로, 우연히 만난 한 사람을 통해, 잠들지 못하고 깨어난 불면의 밤에, 견디는 삶에 지쳤을 때, 잊고 있었던 죽음을 맞이할 때, 이렇게 사는 것이 전부인가라는 질문으로, 우연히 들어간 성당의 경건함에 이해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질 때 종교가 말을 걸어온다.” (p.341)

그럴 때 그저 외면하지 말고 대답을 건네길, 종교와 대화를 시작하길, 그 순간을 삶에 소중한 인연을 만난 때로 기억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가는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을 “종교 사용 설명서”라고 이름 붙인다.

참으로 명료하게도 정리된 종교 설명서다.

기우제로부터 시작하여 대표적인 네 개의 종교(세속주의, 과학주의, 명상 종교, 계시종교)에 대해서, 또 ‘다원주의’까지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각각의 그에 대한 비판과 반론까지 언급한다.



1. 세속 주의 ;

▷죽음을 무시하고 오늘을 소중히 여기는 것.

▷좋은 환경을 만들어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

▷성공을 추구하는 그들은 ‘성실한 개척자’다

▷모두가 성공을 위해 달리다 보면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는 정글과 같은 사회가 될 위험이 있다.

2. 과학주의 ;

▷인간을 단지 육체로 규정하고 죽음을 소멸로 받아들이는 것.

▷나는 먼지이기에 겸손하다

▷인간은 DNA를 지키는 그릇이다. 이기적인 유전자. 세상을 만들어가는 존재다.

▷나는 우주에서 단 한 번만 일어나는 현상이기에 특별하다. 삶은 순간이기에 소중하다. 삶은 불꽃이다. 고로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해서 그들은 ‘자유로운 여행자’다.

▷그들은 자칫 ‘이기심’에 빠질 위험이 있다.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살아갈 이유를 잃어버리게 된다. (삶의 존엄성이 흔들린다.)

▷원하는 삶을 선택할 때에 충분한 명상이 필요하다.

3. 명상 종교 ; (불교, 힌두교)

▷인간을 정신으로 규정하고 죽음 이후에도 남아 있는 진정한 나로 남아 있다는 것. (자유의지, 자의식, 도덕성, 사랑 등 육체로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은 소멸되지 않는다).

▷우리는 아마도 첫 번째 우주가 아니라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고 있는 여러 우주 중의 하나일 것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진정한 나, 내 안에 있는 선한 마음을 찾아서 떠나는 구도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4. 계시 종교 ; (기독교, 이슬람교)

▷인간을 영혼으로 규정하고 죽음 이후에도 남아 있는 진정한 나로 생각하는 것.

▷인격은 육체로부터 형성되지 않았다. 육체 속에 담긴 무엇이다. 이것이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우리의 정체성이다. 이것이 곧 ‘영혼’이다.

▷우리가 인격적인 존재라는 것 자체가 우리를 만든 인격체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된다. 최초의 인격, 즉 모든 인격을 만든 아버지를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생존의 욕망보다 ‘존재의 욕망’을 가지고 있다. 살아남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나의 종교를 돌아보니 참으로 우왕좌왕하며 떠돌아다니는 종교였다. <움직이는 성/박완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움직이지 말아야 할 성이 늘 움직이고 있었던 거다. 내가 바로 유랑민 근성일까?

“평소에는 세속 주의자이다. 그래서 죽음을 무시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종교에 대해서 논쟁할 때는 과학주의자가 된다.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장례식장에서는 계시종교를 믿는다.

돌아가신 고인이 지금 좋은 곳에 가셔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고 말이다.

사회적인 이야기를 할 때는 명상 종교를 믿는다.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며 그렇지 않은 사람을 향해 비판한다. (p.43)

이 말은 나의 종교를 정확하게 꼬집는 같아서 가슴 한 쪽이 움찔해진다.

어쨌거나 명목상 지금 나의 종교는 계시종교인 기독교다. 세상으로부터 ‘개독교’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 실정이지만 이 책의 설득력 있는 설명은 부패한 종교, 폭력적 종교,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없어져야 할 것이라는 비판에 대한 오해를 풀기에 충분했다. 나의 종교를 다시 한번 정리해 본다.

종교란 소원을 이루어주는 램프의 요정이 아니다. 거짓 희망을 파는 곳이 아니다. 죽음에 질문을 던져 삶에 답을 얻는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깨달음을 찾고 사랑을 추구하며 바르게 살아가는 삶을 권면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증명되기보다 발견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나의 인식론 안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내 인식론 자체를 넓혀야 한다.

‘자기중심성’은 자만이다, 이기다, 이것이 곧 ‘죄’다. 지옥이다.

천국은 내가 하나님을 통해 완전해지는 공간이다.

영혼 구원을 믿는 것은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진정한 나’를 하나님을 통해서 깨어나게 하는 일이며 내가 진정한 내가 되어 살아가는 길이 라고 믿는 것이다

구원은 죽음 이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 안에서 죽어 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 내가 현상적인 나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나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구원이 실제화되는 공간이 ‘기도(믿음, 정직, 경청, 순종)’다.

마지막으로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종교를 가지라’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죽음에 대한 나의 답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나의 삶을 지탱하는 하나의 기둥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라고.

종교를 가진 사람이건, 현재 안 가진 사람이건 언젠가 종교가 나에게 말을 걸어올 때를 대비 해서 꼭 한 번 읽어봐야 될 책이라고 생각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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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심원단 | 나의리뷰 2020-03-24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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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배심원단

마이클 코넬리 저/한정아 역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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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할러 주니어’. 그는 2킬로그램으로 태어나서 미키마우스라는 별명이 붙은, LA에서 유명한 속물 변호사다

1년 전 그는 스캔들과 자기 파괴적인 행동으로 인해 지방검찰청장 선거에서 패배하고, 아내와는 이혼하고, 딸의 사랑도 잃고, 자신이 석방시킨 사람 때문에 두 명이 차에 치여 사망한다. 연쇄강도사건과 관련된 아홉 개의 혐의로 기소되어있는 레너드 화츠로부터 의뢰받은 사건도 재판무효로 끝낸다. 물론 상황이 불리할 때 쓰는 꼼수였다.

법정 복도를 얼쩡거리고 있으면 의뢰인 한 명 쯤 건질 수도 있을. 그런 입장이 된 할리는 요양원에 있는 퇴직 변호사 리걸 시걸을 찾아간다. 허탈할 때면 찾아가는 그는 법정 경험이 풍부하고 좋은 전략을 갖고 있는, 할러에게는 유일하고 믿을만한 멘토다.

그는 할러에게 말한다.

법은 유연한 거야 구부릴 수도 늘일 수도 있지.”

 

그렇다. 법이란 것이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1+12가 아니었다.

서로의 유익을 위해서 검사와 변호사, 의뢰인과, 피고인, 증인. 그들 사이에는 모종의 거래가 오고 가고 그들의 불꽃 튀는 머리싸움, 협박과 거래, 위험. 모순, 등 검사와 변호사의 주장이 순간적으로 뒤집히기도 하는 상황들은 숨을 돌릴 사이가 없이 책장을 넘기게 만든다.

 




 

다행히 할러는 동료 변호사로부터 문자를 받으면서 성매매 여성의 살인사건을 맡게된다.

캘리포니아 형법전의 살인죄 조항 번호인 ‘187’”

성매매 여성의 살해당했고 그 피의자로 지목된 안드레 라 코세’(성매매 여성들의 소셜미디어를 관리하는 디지털 포주)가 변호를 의뢰 해 온 것이다.

그의 무죄를 위해서 온 몸을 바쳐 뛰는 할러 변호사의 숨막히는 스릴과 서스펜스는 이 책의 끝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이 책의 주제는 <배심원단>이다

검사와 변호사는 결국 배심원단을 설득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자신들의 승패가 갈린다.

그리고 피해자와 피고인의 인생의 앞날, 아니 심지어는 생사가 달라진다.

배심원단은 곧 <단죄의 신>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쓴 목적이 결코 흥미위주의 법정 드라마, 스릴과 서스펜스에만 있는 것만이 아니었음을 작가는 마지막 부분에 피력한다.

 

누구에게나 배심원단이 있다. 마음속에서 함께하는 목소리들이 있다. 얼 브릭스가 내 배심원석에 앉아 있고, 글로리아 데이턴도 그렇다. 케이티와 샌디, 내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도 보인다. 얼마 안 있으면 리결 시걸도 합류할 것이다. 내가 사랑했고 내가 상처 준 사람들, 나를 축복하고,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사람들, 내 단죄의 신들. 나는 그들과 함께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날마다 그들 앞으로 걸어가서 변론을 펼친다. ”p.510

 

그렇다면 그 단죄의 신들은 과연 을 대신할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단죄 한다는 것. 날마다 그들 앞으로 걸어가서 피를 토하는 변론을 펼쳐봐도 그들의 판단은 극히 위험하고 극히 불완전하기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펼치는 변론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단죄의 신은 오직 일 뿐.

다만 우리는 날마다 을 향해 자신을 변론을 해야하지 않을까?. 자신과의 합리화와 거래가 아닌, 결코 변명이 아닌, 온전한 변론 말이다.

아니, 진정한 우리의 변론자는 성자 예수다. 이미 저 높은 곳에서 날마다 나의 변호사가 되어 열띤 변호를 하고 계시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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