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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터리어스 RBG | 독서일기 2020-01-01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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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올해의 책 리뷰 이벤트 참여

[도서]노터리어스 RBG

아이린 카먼,셔나 크니즈닉 공저/정태영 역
글항아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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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연말이 되면 우리는 한 해를 돌아보고 새로운 해를 어떻게 보낼지 계획합니다. 회고와 새해 계획은 다양한 관점에서 진행할 수 있지만 특히 제게는 한 해 동안 읽은 책을 돌아보는 것, 그리고 새해에 어떤 책을 읽을지 고르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온갖 서점과 언론사가 앞다투어 '올해의 책'을 선정하기 때문에 내가 놓친 좋은 책이 없는지 살펴보는 재미도 있고요. 아무튼 2019년에도 저는 좋은 책을 정말 많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2019년에 제가 읽은 책들 중에서 가장 좋았던 책, 가장 의미가 있는 책을 골랐습니다. 바로 아이린 카먼과 셔나 크니즈닉의 『노터리어스 RBG』입니다. 저자도 제목도 생소하고, 표지도 영 끌리지 않죠? 심지어 2019년에 출간된 책도 아니고, 무려 2016년에 나온 책입니다. 대체 이 책은 무슨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요?


 제가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2019년에 개봉한 영화 두 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나는 반대한다>와 <세상을 바꾼 변호인> 덕분입니다. 『노터리어스 RBG』와 이 두 편의 영화 모두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라는 인물을 다루고 있죠. 그게 대체 누구냐고요? 그는 1933년에 태어난 미국인이며, 빌 클린턴에 의해 연방 대법관으로 지명된 1993년 8월 이래로 지금까지 연방 대법관으로서 일하고 있습니다. 미국 역사에서 두 번째로 임명된 여성 연방 대법관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연방 대법관이 대체 뭐길래, 이 사람을 다룬 영화가 두 편이나 개봉하고 책도 나왔을까요?


 우선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미국 연방 대법원은 미국 최고의 사법 기관으로 사법부를 총괄합니다. 한국으로 치자면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역할을 겸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고 하네요. 대법원장과 8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법관은 대통령에 의해서 지명되지요. 또한 대법관은 사망, 사직, 은퇴, 탄핵에 의해서만 물러나는 종신직이기도 합니다. 연방 대법원에서는 보통 1년에 100여 건 정도의 아주 적은 재판만이 이뤄지는 만큼, 미국 내에서 정말 중요하고 큰 재판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 유명한 '미란다 원칙'도 미국 연방 대법원의 판결에서 나왔으며 인종 차별, 낙태, 총기 소유, 동성결혼 등 정말 중요한 이슈들을 다루는, 그야말로 미국의 역사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기관입니다.


 이제 미국 연방 대법원의 중요성은 알겠는데, 연방 대법관은 무려 9명이나 됩니다. 대체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어떤 사람이길래 그중에서도 이렇게 이름을 날리게 되었을까요? 어떻게 미국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전설적인 래퍼 노터리어스 BIG(Notorious BIG)의 이름을 딴 노터리어스 RBG로 불리며 SNS를 달구게 되었을까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1950년에 제임스 매디슨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당시는 "여학생들은 의사나 판사와 결혼하는 것을 최선으로 여기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만점 성적표를 받던 긴즈버그는 코넬대에 입학했고, 고등학교 졸업식 전날 엄마를 자궁경부암으로 잃습니다. 그 이후 긴즈버그는 엄마의 가르침, 언제나 독립적으로 살라는 가르침을 평생 잊지 않으며 자신의 삶을 꾸려나갑니다. 엄마가 어렵게 모아 남겨주신 8,000달러 정도의 학자금과 함께요. 코넬대에 다니면서 그는 변호사를 꿈꾸게 되었고 결국 하버드대 로스쿨에 입학했으며, 마틴 긴즈버그와 결혼했습니다. 마틴 긴즈버그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코넬대 및 하버드 로스쿨 1년 선배였으며 평생 그를 단단하게 받쳐주는 존재가 됩니다.


 긴즈버그가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하던 그해의 신입생 중 여학생은 총 9명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하버드 로스쿨의 원장이던 어윈 그리스올드는 그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성인 여러분들이 남성의 자리를 차지했으니, 이를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날엔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판결문 확인을 위해 도서관에 들어가려던 긴즈버그를 경비원이 가로막았습니다. 여성은 출입할 수 없다면서요. 로스쿨 본관에는 여자 화장실이 아예 없었고, 몇몇 동기 여학생은 로스쿨에 입학했다는 이유로 혼삿길이 막힐까봐 걱정해야 했습니다. 긴즈버그는 뛰어난 성적으로 로스쿨을 졸업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재판연구원이 될 수 없었고, 로펌에도 고용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말 어렵게 커리어를 시작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이후 컬럼비아대를 거쳐 럿거스대학교에 교수로 부임합니다. 물론 여자라는 이유로 형편없는 봉급을 받아야 했고요. 하지만 점차 변호사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특히 성차별적인 법에 관한 소송을 많이 맡았고, 성차별이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에게도 해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칸 대 셰핀, 와인버거 대 비젠펠트, 칼리파노 대 골드파브 사건은 모두 차별적인 연방법 및 주법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남성을 대변한 경우입니다.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에서 다룬 모리츠 대 국세청 사건 역시 성차별적 제도로 피해를 입은 남성을 대변한 경우였고요.


 결국 1993년 긴즈버그는 빌 클린턴에 의해 지명되어 연방 대법관이 됩니다. 하지만 연방 대법관이 되었다고 해서 만사가 잘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연방 대법원의 판결은 다수결로 이뤄지기 때문에, 내부에서 첨예한 대립이 일어나기도 하지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언제나 차별받는 편에 섰고, 때로는 거침없이 소수의견을 낭독하며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하나만 살펴보자면, 바로 셸비 카운티 대 홀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꽤 유명한 사건입니다. 이 판결의 핵심 쟁점은 투표권법 핵심 조항의 위헌 여부였는데요, 여기서 투표권법은 투표에서 인종이나 피부색을 근거로 차별을 둘 수 없도록 선거 제한을 엄격하게 금지한 법입니다. 그리고 이 판결에서 위헌 결정이 난 제4조는 주 정부가 선거법 개정 시 연방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제 5조가 적용되는 지역을 구체적으로 열거한 조항입니다. 이렇게 말하니 너무 어렵죠. 쉽게 이야기하자면, 이 판결로 인해 인종차별이 심한 주의 정부가 연방정부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특정 인종의 투표권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선거법을 개정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참고) 실제로 이 판결 이후 여러 주에서 법을 고쳐 투표 참여를 어렵게 만들었고, 이로 인한 피해는 유색인종과 빈곤층에게 쏠리고 있다고 합니다. 너무 암담한 일이지요. 이 판결에서 긴즈버그는 다음과 같은 소수의견을 냈습니다.


 수많은 증거가 퇴보를 예견한 의회의 전망이 사실임을 보여주었다. 차별적인 변화를 막는 데 효험을 보였고, 지금도 그러한 효과를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사전 승인 제도를 폐기한다는 것은 폭풍우 속에서도 젖지 않을 것이라며 우산을 내동댕이치는 것이나 다름없다. (p.191-192)


 이렇게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자신의 일생 내내 차별과 맞서 싸웠고, 소수의견을 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실제로 세상을 바꾼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를 읽으며 정말 힘이 많이 났고, 저 또한 제가 선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조금이라도 세상을 개선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뭐래도 제게 2019년 최고의 책은 바로 이 책입니다. 책의 내용도 참 좋지만 디자인이나 만듦새도 훌륭해서, 소장 가치도 정말 높은 책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더 많은 분들이 이 책의 가치를 알아봐 주신다면 더없이 기쁠 것 같습니다. 또한 밝은 눈으로 이 책을 알아보고 2016년에 출간한, 언제나 좋은 책을 내는 글항아리 출판사에도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습니다. 올해에도 저 역시 좋은 출판사들의 정성 가득한 책을 더 많이 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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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테라스에 펭귄이 산다 | 독서일기 2019-12-31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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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우리집 테라스에 펭귄이 산다

톰 미첼 저/박여진 역
21세기북스 | 2016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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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집 테라스에 펭귄이 산다』는 소설 같은 제목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 저자에게 벌어졌던 일을 바탕으로 쓰인 에세이입니다. 저자 톰 미첼은 영국인으로 20대 초반이던 1970년대에 아르헨티나에서 기숙학교 교사를 한 적이 있는데, 우루과이에서 휴가를 지내다 만난 마젤란펭귄 후안 살바도르와 함께 동거하게 되어 그 이야기를 이 책에 재미있게 담아내었습니다.


 고즈넉한 오후, 휴가지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을 떠올리며 해변을 산책한 지 10~15분쯤 됐을까. 내 눈에 충격적이고도 비통한 광경이 들어왔다. 처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움직임이 없는 검은색 물체였다. 처음에는 얼마 되지 않는 줄 알았다. 그런데 다가가서 보니 그 수가 어마어마했다. 검은색 카펫을 깔아놓은 듯 검은 사체들이 해변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검은 기름을 뒤집어쓴 펭귄들이 바다 수위를 표시하는 기둥부터 북쪽 해안을 따라 끝도 없이 길게 누워 있었다. 펭귄들은 끈적거리고 역겨운 기름과 타르에 숨통이 막힌 듯 기름범벅이 된 채로 죽어 있었다.

(...)

 나는 죽은 새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기가 영 거북스러워 일부러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시야 한편에서 언뜻 미약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 움직임은 바다의 흰 거품 쪽이 아니라 움직임이라곤 전혀 포착되지 않았던 검은 해변에서 느껴졌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움직임이 느껴지는 곳을 주시했다. 착각이 아니었다. 대견하게도 펭귄 한 마리가 살아 있었다. 온통 죽음뿐인 그곳에서 유일하게 고군분투하고 있는 단 하나의 생명이었다.


 이렇게 참혹한 환경에서 우연히 만난 펭귄 한 마리를 살리기 위해 집으로 데려온 저자는, 처음엔 기름때만 씻어준 후 펭귄을 바다로 돌려 보내주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바다로 돌아가기는커녕 자신만을 따라오는 펭귄을 저버리지 못했습니다. 동물원에 맡기려는 생각도 했지만, 동물원에서 비참하고 무기력하게 살고 있는 펭귄들의 모습을 보고는 결국 함께 살기로 다짐하죠. 하지만 그가 사는 환경은 평범한 집이 아니라, 바로 학생들로 가득한 기숙학교였습니다. 후안은 학교의 인기 스타가 되었고, 심지어 학교 구성원들의 고민 상담원 노릇까지 하게 됩니다.


 후안이 다른 이의 말을 잘 들어준다고 생각하게 된 건 그의 태도 때문이다. 후안은 상대가 말을 할 때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바라보며 귀를 기울인다. 후안을 찾아온 사람들은 후안의 무거운 입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후안의 격려에 기댄다. 인간의 말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후안에게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후안의 눈동자에는 뛰어난 달변가가 갖추어야 할 명쾌한 의사전달 법이 모두 담겨 있다. 이따금 나는 후안의 주식인 생선이 두뇌 발달에 그렇게 좋다고들 하는데, 혹시 그 때문에 후안이 친구들에게 통찰력 깊고 지혜로운 대답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제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행복했던 부분은, 소년 디에고와 후안이 함께 수영하는 모습에 대한 묘사입니다. 디에고는 볼리비아에서 온 형편이 다소 어려운 아이였습니다. 지독한 향수병에 시달렸고 학교생활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으며 친구도 별로 없었죠. 하지만 후안을 돌보기 위해 시장에서 청어를 사 오고, 테라스를 청소하고, 후안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우울함에서 벗어나 위안을 얻습니다. 심지어 후안과 함께 수영하면서 자신의 잠재력을 드러내고, 어느새 이 잠재력을 찬란하게 꽃피워 모든 아이들이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학생으로 성장하죠.


 그날 밤 나는 두 번째 충격을 받았다. 디에고는 그저 수영을 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수영을 잘했다! 디에고는 후안의 뒤를 쫓아갔다. 만약 다른 사람이 그렇게 했다고 하면 정말 터무니없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디에고는 전혀 우스꽝스럽지 않은, 기가 막히게 우아한 동작으로 수영을 했다. 디에고가 수영을 하자 후안이 디에고 주위를 빙빙 돌았다. 그리고 둘은 똑같은 동작으로 수영을 했다.

 내 평생 서로 다른 두 종이 그렇게 교감하는 장면은 처음 봤다. 그 둘은 마치 바이올린과 피아노 듀엣 연주처럼 서로의 기술을 돋보이도록 안무를 하며 완벽하게 교감하고 있었다. 주연도, 조연도 없었다. 때론 후안이 앞서면 디에고가 후안의 뒤를 쫓아갔다. 후안은 디에고가 자신의 뒤를 바짝 따라올 수 있도록 속도를 조절했다. 후안은 그렇게 멈춰 섰다가 다시 날듯이 수영을 했다. 때론 디에고가 앞서서 수영을 하면 후안이 마치 누에가 고치를 짓듯 8자로 디에고의 주위를 빙빙 맴돌았다. 어떤 때에는 둘이 거의 몸이 닿을 정도로 바짝 붙어서 수영을 하기도 했다. 절묘한 파드되를 보는 듯했다. 황홀한 광경이었다.

 그날 저녁, 그날의 분위기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로웠다. 무수히 많은 장면이 한데 어우러지는 마법 같은 시간이었다.


 이 책을 통해 인간이 지구에 미치는 끔찍한 영향과 결과, 펭귄이라는 동물의 사랑스러움, 펭귄과 아이들의 귀엽고도 뭉클한 교감, 아름답고 광활한 자연의 묘사, 그리고 언제나 슬픈 이별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쿠데타와 엄청난 인플레이션 아래 살아가야 했던, 그리고 여전히 진행 중일 평범한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고통과 빈부격차 같은 이야기들도 볼 수 있고요. 무엇을 더 중점적으로 보든, 명랑하고 생기 가득한 펭귄 후안의 모습은 독자들의 뇌리에서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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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책이었고 책이며 책이 될 무엇에 관한 | 독서일기 2019-12-29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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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애머런스 보서크 저/노승영 역
마티 | 2019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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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머런스 보서크의 『책: 책이었고 책이며 책이 될 무엇에 관한』은 책이 무엇인지, 어떻게 발전했는지, 그리고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원제는 『The Book』으로, 한국어 제목을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마티 출판사의 책이 언제나 그렇듯, 책의 만듦새가 뛰어나고 디자인이 참 좋아서 읽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읽는, 네모난 모양의 종이책을 가리켜 "코덱스(codex)"라고 부릅니다. 킨들, 크레마와 같은 전자책 단말기와 태블릿 PC의 등장 이후로 이런 종이책의 시대는 저물 것 같았지만 지금 보면 전혀 그렇지 않죠. 심지어 미국에서도 전자책 시장의 성장은 주춤하고 다시 종이책이 부활하고 있다고 하니까요. 어쨌거나 우리가 지금 손에 쥐는 코덱스의 시대가 오기 전까지, 책의 구조가 다양한 발전을 거쳤음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점토판에서 파피루스 두루마리로, 양피지에서 간책과 종이 두루마리로, 그리고 종이 아코디언에서 코덱스로 책의 구조가 발전하면서, 그리고 인쇄술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방대한 지식을 쉽게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텍스트의 기계적 재생산이라는 중요한 기술적 변화와 더불어 우리가 책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대한 철학적 변화가 인쇄본 코덱스의 초창기에 일어났다. 이 시점에 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친밀한 공간이 되었다. 책은 하루하루 기도문을 건네 신앙 생활의 길잡이가 될 수도 있었고 비극의 구조에 대한 옛 사람들의 생각을 전해줄 수도 있었다. 지금의 우리는 여러 종류의 독서 경험을 누리지만, 서구 문화에서 '책'을 들여다보는 거의 보편적인 통로는 이 친밀함의 렌즈다. 코덱스는 소유자의 지성을 드러내는 표시로서 소유되고 개인 서재에 보관될 수 있다. 코덱스는 표지로 싸서 보호하거나 감출 수 있다. 코덱스는 사랑의 징표나 크나큰 연대감의 상징으로서 손에서 손으로 전해질 수 있다. "이 책이 맘에 들더라. 당신도 좋아할 것 같아서." 여행 안내서이든 로맨스 소설이든 책이 표지로 둘러싸인 작은 세계라는 인식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는 자신이 책 속으로 사라졌다가 독서 경험에 의해 변화된 채 몇 시간 뒤에 다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p.102)


 이렇게 코덱스가 상품이 되면서 인쇄업자들은 자신의 책을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한 다양한 부속물들을 개발했다고 합니다. 발행인의 이름 머리글자와 상징이 들어 있는 '발행인 표장' 같은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펭귄 로고 같은 것을 탄생시켰고, 차례, 쪽수, 찾아보기 같은 유용한 도구들도 이 시기(17세기)에 만들어졌습니다.


 불, 곤충, 물, 햇빛에 취약하긴 하지만 코덱스는 사실 경이로운 보관 매체다. 소프트웨어 업데이트가 필요 없고, 덥거나 추운 기후에서도 보관할 수 있고, 고급 중성지에 인쇄하여 제본하면 독자의 손에 묻은 기름과 들었다 놨다 하는 충격과 펼쳤다 덮었다 하면서 서서히 책등을 쪼개는 동작도 이겨낼 수 있다. 하지만 정치적 힘과 시장의 힘에는 당해낼 수 없다. 이념이 변하고 자료가 갱신되고 도서관이 꽉 차면 책은 매각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폐기된다. (p.202-203)


 하지만 물리적인 책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그 형태 때문이든, 아니면 정치적 혹은 사회적 힘 때문이든 말이에요. 많은 도서관들은 만성적인 공간 부족에 시달리고, 책은 아무리 잘 보관하려 해도 시간이 지나면 낡게 마련입니다. 특히 도서관에서 계속 대출되는 책이라면 더 그렇지요. 오래전에 절판되었지만 여전히 찾는 사람이 꽤 있는 책을 도서관에서 빌린 적이 있는데, 정말 심각하게 낡아서 읽기 싫을 정도였습니다. 값어치가 꽤 나가는 절판된 책은 아예 도서관에서 사라지기도 하지요. 디지털화가 대안으로 언급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 책에서도 지적하듯 기술 발전의 속도가 빨라지면 오히려 디지털 책의 유통기한이 더 짧아지기도 합니다. 기술 발전에 발맞춰 호환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이 다루는 것은 물질화된 텍스트―우리가 '책'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읽는 휴대용 수단―이다. 이 수단은 설형문자 점토판 이후로 4500년간 변해왔으며 통신 기술의 급격한 발전으로 보건대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이다. 전자책과 이전 매체의 관계를 고려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문학비평가 N. 캐서린 헤일스가 '물질적 은유'라 부르는 것으로 책을 들여다보게 된다. 우리는 이를 통해 언어와 접촉하며 이를 통해 우리의 접촉 방식을 바꾼다.

 헤일스는 말한다. "인공물의 물리적 형태를 바꾸는 것은 단지 읽기 행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말과 세계의 은유적 관계를 속속들이 탈바꿈시키는 것이다." (p.221)


 전자책 단말기는 인쇄본 코덱스에서 발전한 요소들을 계속하여 재매체화하면서 성장하고 있다. 가볍고 가지고 다닐 수 있고 눈이 부시지 않은 흑백 전자 잉크 화면을 갖춘 전자책 단말기는 크기도 얇은 페이퍼백과 비슷하다. 대부분 형광펜과 메모 기능이 있고, 페이지 넘기기와 가상 북마크를 모방하며, 마지막으로 읽은 위치를 저장하는데, 이 기능이 필요한 것은 텍스트를 유동적인 것으로 취급하기에 기기와 글자 크기에 따라서 쪽 번호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

 전자 잉크 독서 기기의 디자인은 단추와 손잡이를 최소화하면서 점차 간소해졌는데, 이는 전자책 단말기가 텍스트 읽기의 인터페이스에 불과하다는 통념을 부각하고 디지털 탈육의 신화를 영속화한다. 전자책 단말기는 활자 크기와 서체를 바꾸고 어두운 곳에서는 화면을 밝힐 수 있으며 기기에 따라서는 내장 TTS 기능으로 책을 읽어주기도 한다. 이런 편의 기능은 종이책의 고정된 인터페이스와 다른 중요한 특징이며 디지털화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p.256-257)


 이어 '인터페이스로서의 책' 부분에서는 디지털 책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프로젝트 구텐베르크와 디지털 아카이브, 세상의 모든 책을 스캔하겠다는 구글 북스에 이어 제 주요 관심사인 전자책 단말기에 관한 내용이 등장합니다. 제가 처음 만난 전자책 단말기는 리디북스에서 나왔던 6인치 페이퍼(300ppi)였는데요, 이 기기 이후 전자책 단말기의 매력에 홀딱 빠져 크레마, 킨들, 누크, 코보 등 정말 다양한 브랜드의 기기를 사용해 보았습니다. 꼭 책을 읽기 위해서만은 아니고 제가 전자기기를 좋아하다 보니 이렇게 된 감이 있긴 하지만, 저는 책을 읽어보고자 하는 분들께 단말기를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편입니다. 책을 아무리 많이 사도 물리적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것이 최고의 장점이고, 특히 저는 여러 책을 동시에 읽는 편이라서 기기 한 대 안에 수백, 수천 권의 책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이 정말 큰 매력이죠.


 물론 코덱스로 읽는 경험과 전자책 단말기로 읽는 경험은 다릅니다. 사람에 따라 이 차이를 아주 크게 느끼기도 하죠. 전자책 단말기를 이용하면 서체의 종류와 크기, 여백 등을 개인의 취향에 맞추어 바꿔 읽을 수 있습니다. 형광펜 표시한 부분을 나중에 아주 쉽게 찾아갈 수 있고, 책 내용을 바로 검색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화면 터치 또는 버튼만으로 장을 넘기는 것과 책의 종이를 넘기는 것, 손에 쥔 인터페이스의 무게와 형태의 차이는 위에 인용된 문학비평가 N. 캐서린 헤일스의 말처럼 단지 읽기 행위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매리언 울프의 『다시, 책으로』에 인용된 연구들에 따르면 동일한 내용을 인쇄물로 읽느냐, 스크린으로 읽느냐에 따라 독해력과 기억력에 작지 않은 차이가 발생한다고 하고요.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지만, 이런 차이가 발생할 수 있음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처럼 『책: 책이었고 책이며 책이 될 무엇에 관한』은 사물로서의, 내용으로서의, 아이디어로서의, 인터페이스로서의 책을 다루며 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깊게 탐구합니다. 중간에 다소 지루한 부분도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책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아서 메모를 꽤 많이 하면서 읽었네요. 책은 언제나 제 일상의 일부인데, 이렇게 당연하게만 여겨지던 것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기회를 갖는 것은 흔치 않은 즐거움입니다. 더 많은 분들이 이 책을 통해 저와 같은 즐거움을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책이라는 용어가 애매모호한 것은 단점이 아니라 오히려 최대의 자산이다. 책은 우리가 생각과 만나는 말랑말랑한 구조다. 사물, 내용, 아이디어, 인터페이스 ― 책은 우리를 바꾸고 우리는 책을 바꾼다. 한 글자 한 글자, 한 페이지 한 페이지씩.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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