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블로그 | 랜덤블로그 쪽지
몽슈슈 무민의 블로그
http://blog.yes24.com/nykino
RSS
태그 & 테마링 | 방명록
초란공
무민의 블로그
프로필 쪽지 친구추가
11월 스타지수 : 별2,386
댓글알리미 비글 : 사용함
전체보기
기본 카테고리
새소식
나의 리뷰
기본 카테고리
나의 메모
기본 카테고리
태그
전염병문학 새뮤얼테일러콜리지 이반일리치와나눈대화 H2O와망각의강 창작과비평187호 촌평 최형섭 남궁석 암정복연대기 암연구
2020 / 11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월별보기
최근 댓글
최우수상 축하드립니.. 
깔끔하게 잘 정리하셨.. 
같은 책을 읽었는데 .. 
요즘은 언론인이라 해.. 
첫단락에 눈길이 가서.. 
오늘 23 | 전체 17293
2016-10-07 개설

전체보기
《천사는 침묵했다》 - 요동하는 전후 사회의 살아남은 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 | 기본 카테고리 2020-04-24 15:55
테마링
http://blog.yes24.com/document/12400389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천사는 침묵했다

하인리히 뵐 저/임홍배 역
창비 | 2019년 07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천사는 침묵했다

하인리히 (Heinrich Boll) 지음 | 임홍배 옮김 | [창비]


 

요동하는 전후 사회의 살아남은 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


 

지금 돌이켜보니 첫째날 오후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전쟁 내내 겪은 일보다 힘들었다.”(43)

 

한스 슈니츨러는 탈영했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소설은 시작한다. 처음에 한스는 알지 못했지만, 도시에 몰래 들어온 날은 1945 5 8일이었다. 날은 독일군이 연합군에게 항복을 선언한 날이었다. 소설천사는 침묵했다 2 세계대전이 끝나고 살아남은 독일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1985년에 사망한 저자 하인리히 뵐의 유고작이다. 하인리히 뵐은 독일군에 징집되어 전쟁의 참상을 몸으로 겪고, 전시에 탈영하면 총살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목숨을 걸고 수차례 탈영을 감행했다. 그의 인생 역정을 고려하면 한스의 삶을 뒤바꾼 날의 고통스러운 기억 결코 한스만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은 전쟁에서 입은 외상보다도 한스와 같이 전방에서 살아남아 돌아온 혹은 후방에 있던 사람들이 고스란히 입게 황폐해진 심리적인 상처, 내상의 단면들을 조명한다. 이들은 연합국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하루 아침에 폐허로 변해버린 도시를 목격했던 생존자들이다. 역사상 유례없는 경험이었다. 한스가 고통스럽게 떠올린 문장은 전후 생존자들이 새롭게 짊어져야 했던 삶의 무게를 암시한다.

 

     저자 하인리히 뵐은 2 세계 대전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소설은 1949 이전에 집필되었고, 50년이 되어 1992년에야 비로소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전후 독일 사회가 입은 상처의 깊이를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해볼 있는 지점이다. 소설의 초고를 읽은 편집자의 반응처럼 독일인들은 전후 오랜시간동안 생활의 터전이 완파된 전쟁의 상흔을 직시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저자는 전쟁터의 참상을 직접 묘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스가 탈영 고향에 돌아와서 처음 마주친 얼굴이 사람이 아닌, 있는 석조 천사상이었다는 사실은 폭격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의 참상을 간접적이면서도 더욱 극적으로 묘사한다. 전쟁의 폐허를 알아볼 있는 다른 단서는 인간이 사라진 빈자리를 채우는 식물의 모습에서도 찾아볼 있다. “보통은 폐허 위에 자라난 풀을 보고 건물이 파괴된 시점을 유추할 있었다. 그것은 식물학의 문제였다.”(108)  도시 한복판이었지만 인적의 발길이 뜸해지면 어디에서나 풀들이 자라기 시작함을 보여주며 폭격으로 사라진 이들을 떠올리게 해주기 때문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한스는 뵐의 아바타이다. 저자는 전쟁 전후 겪은 삶의 국면을 소설에 반영했다. 한스가 서점 관리인 자격증 시험에 합격한 상황으로 나오듯 뵐은 전쟁 전에 도서 판매 수습 사원으로 잠시 적이 있다. 전쟁 직후 출생한 아들이 오래지 않아 사망했던 작가의 경험은 소설 속에서 레기나의 아들이 총알에 희생된 설정으로 되살아 듯하다. 목숨을 걸고 탈영을 시도한 역시 소설 인물인 한스와 작가 하인리히 뵐의 공통점이다. 한스가 총살형을 당하기 직전에 갑자기 죽기로 결심한 누군가가 나타나 대신 죽음을 맞았다. 저자는 한스처럼 탈영하여 전쟁에서 살아남았고, 전쟁이 남긴 황폐함의 모습을 문학으로 남겼다. 공로로 하인리히 뵐은1972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70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 시기에 김지하 시인의 구명 운동으로 우리와 인연이 있기도 하다. 구소련에서 추방된 작가 솔제니친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는 , 소설가로서 뿐만 아니라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양심적인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지닌 작가이기도 하다.  

 


생존자들의 분열된 내면의 풍경들: 저항과 포용

 

     소설을 읽으며 주목한 부분은 폐허를 마주하게 생존자들의 분열된 내면세계다. 하인리히 뵐은 이들의 내면을 다양한 층위에서 감각적으로 제시한다. 무엇보다 신체의 다양한 감각을 통해 감지되는 세계상을 전한다. 폭격으로 타오른 도시의 불빛이 너무나 강하여 건물 입구의 글자를 알아볼 있었다는 대목이나, 폐허가 도시의 재와 오물 냄새처럼 구체적인 감각을 환기하며 전쟁의 참상을 묘사한다. 한편 인간으로서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경험을 생존자들에게 도시 파괴의 충격은 오히려 일차적인 감각을 마비시키는 압도적인 경험으로 다가왔다. 6개월 아이가 미군이 총알에 맞아 죽은 사건 앞에서 슬픔조차 느낄 없었던 레기나의 모습이나, 밖으로 보이는 불타버린 도시의 폐허를 가리기 위해 창문과 커튼을 닫고 어둠 속에서 사는 모습은 결코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소설은 이렇듯 감각과 무감각 사이에서 무기력하게 요동하는 생존자들의 분열적인 내면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이들의 모습은 전후 생존자들이 이제부터 익숙해져야만 하는 삶의 필수 조건이었다.

 

     이런 구도는 세상을 그나마 무덤덤하게 감지할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감각이 마비되어버린 이들의 모습을 대비하며 바라볼 있게 한다. 징집 명령이 담긴 엽서를 받기 전의 한스 슈니츨러는 탈영병이 되면서 이름을 버린 자의 모습과 대비된다. 한스가 군인이 되기 , 이름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한스와 군인이 제복을 입고 인간으로서의 고유성을 상실한 자의 분열적인 모습을 병치시켜 바라볼 있다. 전시 상황의 군인, 국가의 권위에 순응하는 기계 부품과도 같은 존재, 비인간화되는 상황에 맞서는 움직임으로도 있겠다. 한스가 탈영한 것도 결국 전쟁에 반대하고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저항 행위로 있지 않을까. 전쟁을 겪으며 무감각해져버린 생존자들에게 전후 새롭게 감지되는 감각에 대한 환기는 인간다운 삶으로의 회복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운명처럼 불쑥 나타난 한스의 등장으로 레기나는 잃어버렸던 감각을 서서히 회복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폐허 생존자들이 겪게 되는 분열적인 구도와 이에 대한 저항의 움직임은 망각과 기억행위라는 관점에서도 바라볼 있을 같다. 전후 독일 사회의 생존자들에게는 폐허가 세계를 회피하고 싶은 집단의 무의식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무의식과 회피의 결과는 과거 세계에 대한 집단의 망각 현상으로 이어진다. 하인리히 뵐이 소설을 집필한 행위는 현실을 마주대하고 집단의 망각에 저항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기억행위로 있을 것이다. 뵐과 마찬가지로 독일 사회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던 독일 작가 W.G. 제발트는 자신의 강연을 정리한 공중전과 문학에서 문학의 가능성이 사실을 기록하는 있다 언급했다. 제발트 역시 문학을 망각에 대한 저항행위로 인식한다. 소설은 독일 영토에 가한 연합국의 대대적인 폭격으로 60 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사망한 2 세계 대전의 막바지에 일어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제발트는 일본에 떨어진 발의 원자폭탄으로 사망했던 희생자의 3배에 가까운 민간인이 사망했는데도, 독일 사회가 사건에 대해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점에 충격을 받았다. 아무도 희생자들을 추도하지 않는 모습에 경악했던 것이다. 희생자들을 기억할 기회마저 포기해버린 듯한 독일 사회, 희생자를 애도하지 못하는 독일 사회의 무능력에 대한 저항으로 문학을 선택한 셈이다. 그런 제발트이기에 하인리히 뵐의 소설 천사는 침묵했다만이 유일하게 다시 폐허에서 실제로 주위를 둘러본 모두를 사로잡았던 경악의 깊이에 근접하는 표상을 전해준다라고 인정했던 것이 아닐까.

 

     소설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레기나가 집안을 청소한는 장면이었다. 레기나가 한스와 결혼을 약속한 질서와 청결함을 추구하는 충동 느끼게 것은 대대적인 폭격과 아이의 죽음으로 마비된 감각과 피폐해진 삶에서 나타난 새로운 변화였다. 벽에서 석회가루가 계속 떨어지는 상황과 목욕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을 자각하게 것이다. 변화는 한스와의 만남과 결합을 계기로 그녀가 잊고 있던, 익숙하던 것에 대한 갈망이 되살아 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레기나가 잊고 있던 감각을 회복하게 되면서 정상적인 삶을 소망하는 몸부림으로도 읽혔다. 한편 레기나는 7시간 넘게 청소를 해도 지워지지 않는 바닥의 얼룩과 끊임없이 벽에서 석회가루가 떨어지는 상황에 좌절하기도 한다. 부분은 독일이 항복한 이후 나치즘으로 대변되는 전체주의 질서에 익숙해져 있던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이를 부정하고 싶은 충동, 과거의 기억을 지우고 싶은 몸부림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레기나는 바닥의 얼룩이 악성 발진처럼 자꾸만 돋아날 임을 알고 있던 것처럼, 나치가 구축해놓은 공고한 현실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았을 터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레기나의 청소행위는 전쟁 전의 정상적인 , 인간다움을 회복하고자 하는 생존자들의 몸부림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과 사회의 모순들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완전히 파괴된 도시, 숱한 가족을 잃은 공간에서 생존자들이 그저 덤덤하게 묘사되고 있는 같아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이 정상적인 삶의 모습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드러난다. “도무지 슬퍼할 수조차 없어.”(75), “아이가 부러울 지경이야. 세상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냐”(76). 아이가 죽었지만 슬픔의 감정도 느끼지 못하던 레기나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한스가 나타난 이후 레기나의 삶에 차차 변화가 찾아온다. 한스와 함께하기로 약속하면서 비로소 울게 되었던 것이다. 레기나가 감정을 회복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그동안 마비되고 상실되었던 인간다운 삶의 징후들을 되찾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레기나는 병원에서 헌혈을 하고 집에 돌아온 후에, 그리고 한스는 성당의 사제로부터 미사에 사용할 포도주를 받아온 저녁에 사람은 결혼을 약속한다. 포도주는 예수가 흘린 피의 상징이자 생명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포도주를 나누어 마신다는 것은 사람이 앞으로 삶을 함께 나누겠다는 피의 서약이기도 하다. 남은 여생을 함께 하기로 다짐한 레기나는 행복감으로 눈물을 흘리며 비로소 잊고 있던 감정을 되찾는다. 레기나를 안고 있던 한스가 레기나의 눈물을 맛보고 그제서야 눈물이 땀처럼 짜고 따뜻하다는 이해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의 결합을 계기로 생존자에게도 여전히 살아가야 삶이 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인간으로서 혼자 삶을 구하는 일조차 힘겨운 전후 독일의 폐허 속에서 한스가 레기나에게 청혼을 한다는 것은 소설의 사건으로서만 끝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결합은 분열된 세계를 극복하는 저항 행위임과 동시에 전쟁 전에 누리던 일상의 삶을 향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 아닐까. 사건은 내게 소설 전체의 인상을 결정짓는 가장 전환점으로 다가왔다. 이유는 한스의 독백에서 가장 분명하게 확인할 있었다.

 

그는 삶을 받아들였고, 바로 자리에서 그의 삶이 집약되어 고통과 행복이 넘치는 짧은 순간의 영원을 경험했다….”(158)   

 

청혼하기로 결심한 일은 한스가 앞으로 평생 레기나를 보면서, ‘매일 매일, 수천 주어지는 숙제처럼 수많은 식사를 해결해야만 하는 책임을 지는 일을 의미했다. 책임을 위해서라면 도둑질이든 암시장이든 어떤 일이든지 감내하며 가정을 지키겠다는 결의이기도 했다.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를 사랑(긍정)하고자 하는 운명애의 철학을 떠올리게 해준다. 한스와 레기나의 결합은 전쟁의 참상, 폐허에 굴복하지 않고 이들이 다시 일어설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전하는 메시지다.     

 

     소설에서 레기나와 한스가 서로에게 끌리고, 서로를 받아들이는 가능성을 열어준 계기를 가지 주목해볼 있다. 하나는 마멀레이드와 같은 음식이었다. 한스가 징집 명령에 응하기 위해 집을 떠나던 날은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보게 날이었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준비한 음식은 빵과 버터, 쿠키와 커피, 그리고 마멀레이드였다. 빵과 커피, 그리고 마멀레이드는 한스를 만난 그를 위해 레기나가 준비해준 커피와 마멀레이드를 바른 으로 이어진다. 레기나는 자신에게 마지막 남은 값나가는 물건인 카메라를 팔아 한스를 위해 신분증을 구해온다. 신분증을 받은 한스는 외출하여 되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빵과 포도주, 돈을 구하여 복귀한 한스를 보면서 레기나는 떨리는 손으로 마멀레이드를 바른 빵을 한스에게 건넨다. 마멀레이드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레기나로 이어주는 역할을 하며, 새로운 삶이 이어지게 것임을 시사하는 같다. 다른 하나는 한스와 레기나가 서로에게 다가갈 있는 계기를 마련한 요소다. 사람이 처음 만난 레기나가 한스에게 갑자기 반말 했을 , 한스는 이루말할 없는 뭉클함 느낀다. 마치 오래 알고 지내왔던 사람처럼말이다. 레기나의 반말은 무감각의 세계를 깨뜨려 한스를 정상적인 감각의 세계로 되돌리는 망치 같은 역할을 해준다. 전쟁 전에 익숙하던 일상을 떠올리게 하는 계기로서 말이다. 오랜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은 전쟁 동안 타지에서 일하고 돌아온 레기나가 지붕 처마의 물받이 홈통이 내는 소리를 들은 이야기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수리하지 않은 처마에 6 매달려 있던 홈통은 도시에 가해진 대대적인 폭격에도 여전히 그대로 였던 것이다. 레기나는 전쟁 전의 일상을 홈통이 내는 소리를 통해 기억해낸다. 레기나의 반말과 마멀레이드는 폐허에 나겨진 사람에게 인간다운 감각을 환기하고,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장치로 있겠다.

 

       다만 소설은 레기나와 한스의 사랑과 결합으로 예상되는 새로운 희망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전후 독일 사회에는 생존자들이 마주해야 하는 현실 또한 가로놓여있었다. 곰페르츠 부인이 죽은 이후 그녀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피셔 박사와 시아버지 곰페르츠가 보인 행보는 전후 독일 사회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대변한다. 곰페르츠 부인의 장례식에서 사람은 검은 진창에 넘어져 있던 대리석 천사상을 밟고 위로 올라간다. 사람의 무게로 천사상은 진창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는다. 장면은 도시가 폭격으로 초토화 모습, 교회와 전체주의 권력과의 유착과 부정, 남자로 대표되는 이들의 과거 행적을 모두 목격했을 천사상이 가라앉으며 과거의 진실이 망각될 있음을 알려주고 있는 듯하다. 피셔 박사와 곰페르츠와 같은 이들은 과거가 빨리 망각되기를 바라는 자들일 것이다. 문학은 이에 대한 저항행위로서의 기능할 있음을 고민해볼 있는 부분이다. 레기나와 한스가 폐허 속에서 잊고 있던 감정을 회복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면, 피셔 박사와 곰페르츠 사람으로 대표되는 나치 동조 세력들은 여전히 살아남아 영향력을 행사하게 것이라는 경고가 있다. 게다가 레기나는 자신의 피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려 하는데, 수혈의 대상이 다름아닌 피셔 박사의 딸이라는 설정 역시 다른 사회의 모순을 보여준다. 시대의 상처는 그대로 남아 생존자들에게 짐을 지우지만, 나치 동조 세력들에게 과거는 그대로 잊혀질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여느 사회와 마찬가지로 전후 독일 사회 역시 여러 가지 가능성과 모순이 공존하는 사회임을 경고하고 있다.

 


글을 마무리하며


     작가 하인리히 뵐은 전쟁이 끝난 자신이 목격하고 경험한 전쟁의 모습을 소설로 쓰기 시작했다. W.G. 제발트가 말한 시대의 증언으로서의 문학을 실천한 셈이다. 무엇보다 소설천사는 침묵했다에서 마비와 인간적인 감각, 전쟁의 비인간화와 인간다움의 가능성 사이를 요동하는 전후 독일 사회의 분열적인 세계를 묘사했다. 한스가 과거를 회상하며 느끼는 고통은 감각의 환기, 감각적 묘사에 의해 새롭게 되살아 난다. 폐허에 대한 감각적 묘사는 생존자들의 기억을 관통하는 매질과도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나아가 소설은 레기나와 한스의 결합을 통해 분열적인 세계를 극복하고 걸음 나아갈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인물은 자신들에게 던져진 삶을 그대로 끌어안음을 보여줌으로써 전후 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작은 영감을 제공하고 있다. 모습은 전후 불가항력적으로 경악의 깊이에 압도당한 생존자들의 마비상태를 다시 인간다운 삶으로 되돌아 있음을 강조한다. 이와 더불어 피셔 박사와 곰페르츠의 몸무게로 인해 진창 속으로 가라앉는 대리석 천사상처럼 시대의 상처와 모순은 여전히 그대로 남을 것이다.

 

     제발트의 소설 이민자들 주로 전쟁 떠돌게 독일계 유대인들의 삶을 따라가며 이들에게 깊이 패인 전쟁의 상처들을 들여다보고 있다면, 하인리히 뵐의 소설천사는 침묵했다 이민자들 독일인 버전으로 생각해볼 있겠다. 다만 뵐의 소설에 나오는 독일인들은 이민자들 인물들이 마주한 상황처럼 고향을 벗어난 이들은 아니었다. 고향을 상실한 상황이라기 보다는 검은 진창 위에 넘어진 천사상이 점점 가라 앉던 모습처럼, 상처를 입고 무감각해진 모습으로 삶에 대한 견고한 믿음을 상실한 독일인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제발트가 전후 희생된 독일인들에 대해서 애도 하지 않는 독일 사회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있다면, 하인리히 뵐은 자신의 소설에서 적극적으로 희생자들에 대해 애도하려는 의도가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작품 모두 전쟁의 참상보다는 전후 사회를 직시하면서 살아남은 자들 내면 풍경을 묘사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인리히 뵐이 전쟁 직후 써내려나간 소설은 작가가 전후 독일 사회에 새로운 가능성과 우려의 목소리를 함께 담아 전해주는 메시지였다.  

 






#천사는침묵했다 #하인리히뵐 #임홍배 #창비 #창작과비평 #창비세계문학리뷰대회 #리뷰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2        
[독서일기] [틸리 서양철학사] 읽기 (1차 리뷰) | 기본 카테고리 2020-04-21 03:00
테마링
http://blog.yes24.com/document/12384766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틸리 서양철학사

프랭크 틸리 저/김기찬 역
현대지성 | 2020년 03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틸리 서양철학사


프랭크 틸리 지음 | 김기찬 옮김 | 현대지성



 

철학은 인류 고유의, 가장 오래된 사유 형식이라 만하다. 물론 시대에 따라 철학이나 사유라는 행위에 대한 관점이 달라져 왔겠지만, 인류의 생존과 함께 지금까지 왔다는 점에서 철학은 인류에게 가장 유용한수단이라고 있겠다. 물론 철학이 취직에 가장 유용한도구라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의미라는 것도 있을 것이다. 오히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철학의 유용함은 우리가 안고 있는 삶의 문제들, 구체적인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이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것이라는 의미에 가깝다. 어쩌면 철학공부를 해본 적은 없어도 내가 철학 관련 서적들 근처에서 여전히 기웃거리고 있는 것은 아마도 철학의 유용함에 대한 믿음을 아직 놓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철학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도 학창시절 도덕과 윤리, 그리고 정치와 경제 과목, 심지어 과학을 공부하면서 수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천착해온 철학의 정수와 이들의 주장을 접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철학과에 진학하여 본격적으로 철학서적을 접하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대개는 어느 철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라는 정도만 기억이 , 이러한 철학자의 주장이 그리고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접해본 경험이 없을 것이다. 결과는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기록했다는 사실을 아는 일반 독자들이라고 하더라도 명제가 어떤 배경에서,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게 되는 같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한 이후로는 학창시절의 지식마저 모두 잊어버리게 된다. 마치 타인을 보고 이야기하는 같지만, 사실 이야기를 써본 것이다. 재작년까지도 나는 이런 선언을 했던 철학자가 데카르트인지 칸트인지도 명확히 알지 못했다.

 

     이번에 읽게 틸리 서양철학사   철학분야의 무지를 다르게 벗어나고자 하는 의도에서 도전하게 되었다. 철학이 아닌 철학사는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우선 나는 몇몇 철학자들의 저서를 읽어보곤 했다. 하지만 어떤 철학자의 책을 권만으로(그리고 제대로 소화가 안된 상태에서) 철학자의 철학에 대해 파악하기는 힘들었다. 내겐 철학자가 그저 시대의 천재가 불쑥 나타나서 과거의 철학을 비판하고 혁신적인 생각의 체계를 세운 사람들로만 보였다. 부분적으로는 수긍할 만하지만 이런 판단은 상당히 편협한 생각임을 이제는 알고 있다. 철학자들은 결코 시대와 동떨어져서 등장한 별종이 아니다. 천재적인 철학자들 역시 시대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철학자는 이들이 속한 사회와 분리가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사는 통시적 입장에서, 철학자의 위상을 제대로 보여줌과 동시에 철학자들이 주장한 내용의 맥락을 눈에 보이도록 마련한다.

 

     책의 저자인 프랭크 틸리는 미국과 독일에서 철학공부를 하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평생을 철학 연구와 교육에 힘쓴 교육자이기도 하다. 1914년에  틸리 서양철학사 초판을 출간한 이래로 오랫동안 대학교재로 사용되어온 만큼 책은 많은 이들의 검증을 받아왔다. 다만 고대 그리스 철학부터 현대철학(대략 20세기 전반의 철학까지) 이르는 인류지성사를 권으로 압축해 놓았기 때문에 철학자의 사상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책을 읽는 일차적인 목적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철학자가 속했던 시대(역사적, 지리적, 정치사회적 정황을 포함)에서 철학자가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들이 무엇이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주안점이 되어야할 같다. 저자는 이러한 철학사의 용도를 분명히 책의 서문에 밝히며 시작하고 있다.

 

     철학사는 페이지부터 읽어 나갈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철학을 공부하면서 관련 철학자부터 개별적으로 참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틸리의 철학사는 소제목의 구분이 아주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고, 핵심적인 키워드를 활용한 제목으로 철학사의 맥락을 짐작하고 읽어 나갈 있게 배려하고 있다. 한편 철학사로 유명한 버트런트 러셀의 러셀 서양철학사 경우, 틸리의 철학사 구성과 기본적으로 유사하다. 예를 들면 러셀의 철학사는 고대철학(틸리의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시작하여 카톨릭 철학(틸리의 중세철학’) 이야기하고, 마지막으로 근현대 철학(틸리의 근대 철학’) 이야기한다. 책의 기본적인 골격은 유사해보인다. 대신 러셀의 철학사는 철학자와 학파를 중심으로 글의 구성이 진행되고 있으며, 틸리의 철학사보다는 수업시간에 강의를 하듯이 서술해나간 것이 특징인 같다.  

 

      틸리가 러셀보다 7 연장자였으며, 러셀의 철학사가 1938 이후 여러 대학에서 철학사를 강의한 내용을 기반으로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틸리의 철학사가 먼저 세상에 나왔을 것이다. 학자의 철학사 책은 (비전공자가 보기에) 상당히 유사한 면이 있지만, 앞서 말한 서술 방식의 차이가 나기 때문에 서로 보완적으로 참고해 있는 관계라고 본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목차에 보이는 글의 전개가 구조적으로 비슷한 면이 있기 때문에  비교가 한결 수월하다. 한편 틸리의 문장은 러셀의 철학사보다는 정제되어 있고 밀도가 있다고 느껴진다. 게다가 구체적인  소제목을 제시하고 있어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맥락을 위한 단서를 연결 지으면서 읽는 독서에는 도움이 이다. 여러 철학자들이 문제의식이 무엇인지 근거와 이유를 찾으려고 시도하며 읽어 나간다면, 다소 딱딱하게 느껴지는 틸리의 서양사도 추리소설처럼 읽혀질 있을 것이다. 다시 틸리의 책과 러셀의 책에서 받은 인상을 정리해본다면, 틸리의 설명은 정리정돈이 잘되고 주제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기획된 정원 같다면, 러셀의 설명은 자유분방하고 맥락의 연결이 보다 흐르듯 자연스러운 초원 같은 인상을 준다.          

 

     책의 전부를 읽지는 못했지만 저자 틸리가 그리스 최초의 철학자 언급한 탈레스를 비롯하여 그리스 최초의 과학자로도 여겨지는 아낙시만드로스, 그리고 이어서 아낙시메네스로 이어지는 소위 밀레토스 학파에 대한 부분을 시작으로 러셀의 철학사와 비교하며 읽어 보기 시작했다. 철학서를 비교하며 천천히 깊게 읽는 재미를 느낄 있었다. 러셀의 책에는 밀레토스 학파로만 소개되어 나오지만, 틸리의 책에는 학파의 이름을 내세우기 보다는 중요한 키워드를 소제목으로 내세운다. 바로 밀레토스 학파가 구체적인 실체 이론 주목했다는 점을 제목(‘실체의 문제’)으로 정하여 이를 통해 관련 철학자 내지는 해당 학파의 중심적인 문제의식 추출해낼 있도록 했다. 철학사가 철학이론과의 관계, 이론들이 산출된 시대, 이론을 제공한 사상가들과 관련된 연구라는 틸리의 관점이 반영된 서술방식이 무엇보다 돋보인다. 다만 틸리의 철학사 책을 활용할 우선적으로 아쉬운 부분은 틸리 서양철학사 책에 용어나 인명을 정리한 찾아보기섹션이 나와있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나 수많은 철학자들과 다양한 철학용어들이 등장하는 책에서는 사소한 부분일 수는 있겠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찾아보기가 있다면 특정 개념을 전후한 맥락을 찾아보려 매우 유용할 있을 것이다.    






YES24 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0        
[독서일기] 《종의 기원》 2장 - 자연상태의 변이 | 기본 카테고리 2020-04-12 11:30
테마링
http://blog.yes24.com/document/12343777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종의 기원

찰스 다윈 저/다윈 포럼 기획/장대익 역/최재천 감수
사이언스북스 | 2019년 07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

(자연 선택을 통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 또는 생존 투쟁에서 선호된 품종의 보존에 관하여)

찰스 다윈(Charles Darwin) 지음 | 장대익 옮김 | 사이언스북스

 


[독서일기]

2 - 자연상태에서의 변이

 

지난 1장에서 다윈은 인간이 적극적으로 개입한 경우(사육과 재배를 통해) 동식물에서 나타나는 변이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면, 이번 2장에서는 자연 상태에 있는 동식물들의 변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은 적극적으로 개입(사육과 재배)하여 특정 품종의 선택과 개량을 만들어 냈다. 효과를 빠르고 분명하게 확인할 있다는 말이다. 반면 자연 상태에서 나타나는 동식물의 변이는 느리게, 그리고 어떤 환경적인 조건에 의해 우연히 진행되기 때문에 효과를 눈으로 확인하기는 어렵다. 찰스 다윈은 20 가량 동식물 종이 변화하는 기작에 대해 고민하고, 이를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 그리고 어떻게?’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것이다. 다윈이 사육과 재배를 통해 나타난 변이와 자연에서 발견한 변이들의 사례를 놓고 설명의 순서나 방식을 포함하여 자신의 논리른 주장함에 있어 신중에 신중을 기해 써내려나간 정황을 행간에서 느낄 있었다.

 


     종의 기원 2장에서 다윈은 질문 하나를 독자에게 던지며 시작한다. ‘유기체들은 과연 변이를 겪는가?라는 질문이다. 그러면서 당시에 통용되던 (species) 변종 대한 개념이 학자들마다 다르다는 것에 주목한다. 다윈은 이런 분류상의 개념이 자체로 모호하며 정의를 내리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며 시작하고 있다. 물론 치밀한 다윈이 주장을 아무런 검토없이 내놓지는 않았다. 옮긴이 서문에도 언급되고 있지만, 다윈은 사망 나이 70대에 이르는 동안 거의 2,000명과 수만 통의 편지를 주고 받았다. 20세부터 70세까지 거의 매일 통의 편지를 셈이다. 다윈은 몸이 좋지 못했던 점과 중간중간 일의 진행이 미루어지기도 정황을 고려하면, 컨디션이 좋은 , 혹은 바로 서신에 대한 답변을 보내야 했던 상황을 참작할 , 하루에 편지 2-3 정도는 일상적으로 썼을 것이다. 비글호 항해를 마치고 결혼하며 정착하게 다운하우스(Down House)’에서 평생을 벗어나지 않고 지냈던 다윈은 자신의 집을 실험실을 겸비한 지적 중심지/연구 센터를 구축했던 셈이다


 

     다른 의미에서 종의 기원 당대 지성들이 구축해 집단 지성의 결정체로도 있을 같다. 이것은 다윈의 기여와 업적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윈의 지적 성장에 영향을 주고 받은 이들을 인정하자는 의미다. 다윈은 작업을 주도하고, 자신의 통찰을 담아 종의 기원 세상에 내놓은 대표 저자인 셈이다. 따라서 책에서 다윈이 주장하는 모든 내용은 당대의 지성들과 끊임없이 대화와 토론을 거쳐 세상에 나온 것임을 잊지 말아야 것이다. 수많은 동료 지성들과의 토론과 검증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면 상당히 신중했던 다윈이 생전에 출판까지 가지 않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미국의 작가 허먼 멜빌은 자신의 대작 모비 에서 다윈의 비글호 항해기 고래의 진화, 그리고 라마르크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과학자도 아닌 멜빌에게 까지 초기 진화론에 대한 언급을 소설에도 담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이미 서양의 지성 사회에서는 진화론 등장하게 조짐을 전반적으로 보이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미 다양한 사실과 논의를 거친 사항들이 확보되어 있었는데, 이야기를 언제 어떻게 터뜨릴지 중요했을 것이란 의미다. 2천년 가까이 영향력을 지녀온 서양의 종교가 제시해온 세계의 기원에 대한 의문에 도전장을 내는 셈이었는데, 어설프게 세상에 내놓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번의 일격으로 공고한 분열을 일으키고 충격을 주기위해 다윈은 20 가까이 자신의 비밀노트 증거와 통찰을 담아가며 준비했다.    

   

 

     다윈은 2장에서 자연상태에서 발견할 있는 여러 동식물들의 차이 주목한다. 심지어 곤충의 애벌레가 제각기 다른 근육을 가지고 있다 놀라운 사실을 지인으로부터 듣고 이를 언급한다. 개인적으로 활짝 벚꽃을 보다가 살구나무 꽃을 보고 놀라움을 느낀 적이 있다. 심지어 매화꽃과도 비슷하게 생겼는데, 나무의 꽃은 모두 장미목 장미과 벚나무속에 속한다고 한다. 그리고 벚나무만 관찰하더라도 여러 벚꽃을 보다 보면 꽃잎의 색이나, 가지의 형태도 조금씩 다른 나무들을 있다. 어떤 벚꽃은 수양버들처럼 쳐지는 가지가 있는 벚나무도 적이 있다. 이처럼 비슷하게 보이는 식물들을 분류하는 작업은 머리가 아플정도로 복잡해보인다. 분류의 기준에 수학 공식처럼 불변하지 않은 어떤 전제나 법률조항처럼 분명한 기준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개체 차이 다윈에게도 당혹스러운 문제였다. 다윈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른바 다변적또는 다형적 속에 관한 것이다”(97)라며 분류에 관한 혼란스러운 감정을 내비치고 있다. 자연에서 발견하는 개체들의 차이 주목하게 되면 원인이 무엇일까하는 의문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다윈은 종들에 차이를 만드는 요인으로 우선 거리라는 변수를 고려한다. 경우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어야 어느 종에서 차이를 보이는 별개의 종으로 분류할 있는지 문제가 된다고 반문한다. 결국 거리라는 요인을 고려해보아도 뾰족한 실마리를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편 다윈은 눈에 띄는 특징을 가진 변종 또는 의심스러운 종에 대한 많은 사례들을 검토해 가치는 충분하다”(101)라고 했다. 자연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증거를 통해 그것들이 공통 조상으로부터 내려왔으며 따라서 변종으로 분류되어야만 한다는 무게를 실어 준다”(102)라고 덧붙였다. 아마도 문장은 2장의 중간 단계의 결론으로 삼을 있겠다. 주장의 배경이 되는 단서는 아마도 창조론과의 관계에서 찾을 있다. 성경을 따르는 창조론자들의 경우, 자연에서 있는 수많은 종들과 변종들이 사실은 모두 원래 모습대로 창조되어 변화없이 지금까지 유지된다고 본다. 당연히 자연에서 발견할 있는 수많은 변이들을 설명할 없다. 다윈은 여기에서 과감하게 나아가 여러 종과 변종들은 사실 공통 조상으로부터 변화를 거치며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1장에서도 다윈은 동식물을 사육 또는 재배하는 사람들이 개입하여 품종 개량 과정을 거치며 변화를 겪은 개체들을 분명히 확인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재배자, 사육자들도 종들에게 공통 조상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믿지 않았던 것이다. 당대의 정황을 고려하면, 다윈이 공통 조상개념을 명시한 것은 상당히 과감한 시도였다는 의미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 공통 조상 놓아 두었다면, 반대쪽 끝에는 종과 변종, 종과 아종, 그리고 변종들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선이 없다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다만 차이를 만드는 기작으로 자연 선택이란 개념을 염두에 두며 표현을 살짝 노출시키고 있다


 

부모보다 약간 달라진 상태에서 점점 달라지는 상태로, 어떤 분명한 방향으로 구조적 차이들을 누적시켜 나가는 자연 선택의 작용 때문에 변종의 계대(passage) 이루어진다고 본다.”(105)       


 

     옮긴이의 설명에 따르면 계대(passage) 계통적으로 세대를 이어 나가는 뜻한다. 쉽게 말하면 자연 선택의 작용 때문에 개체는 계통의 (공통적인) 특징을 이어 받으면서도 (개별적인) ‘차이 만든다는 의미다. 개념을 설명하면서 다윈은 발단종(incipient species)이란 개념도 언급하고 있다. 다윈에 따르면, 발단종이란 뚜렷한 특징을 가진변종을 의미했다. 옮긴이(장대익 교수) 발단종을 개체의 단순 변이에서 아종이나 종으로 이행하는 중간 단계 변이에 비해 뚜렷한 영속적 특징을 갖는다 설명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어느 부모 새로부터 태어난 자손에 어떤 새로운 차이 드러났다고 하더라도, 차이가 자손 세대에서만 나타나고 후대에 유전이 되지 않는다면 자손 새는 발단종 아니다. 발단종은 분명한 특징이 유전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당시에 통용되던 개념은 모호하기에 변종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다윈은 지적하기도 한다. 유전과 관련한 개념은 현대유전학에 대한 이해를 통해 유전자 수준에서  다시 들여다보면 보다 의미가 분명해질 것이라고 기대해본다. 아직은 역시 분명하게 이해되지는 않는 부분이다.


 

     신중을 기하는 다윈은 자신의 과감한 견해를 피력하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자신의 논리를 준비했는지 느낄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다윈은 수많은 지인 전문가들과 주고받은 서신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비판하고 형성해나가며, 사항을 종의 기원 치밀하게 짜넣었다. 많은 전문가들의 의견을 자신의 주장에 끌어 들여 자신의 논증에 허점을 줄이고, 논증에 찬성하는 이들을 아군으로 혹은 반박에 대비하는 치밀함을 보인 셈이다.  예를 들면 알퐁스 캉돌을 비롯한 명은 넓은 분포 영역을 갖는 식물에 대체로 변종이 있음을 보였다. 이유로 다윈은 넓은 영역에 분포해 있는 식물이 보다 다양한 환경에 노출되고, 다른 유기체 집단과 서로 경쟁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바라보았다. 이것 역시 우연적인 요소와 빈도의 문제로 이해해볼 있다. 보다 넓은 영역에 분포해 있는 어느 식물은 식물에 영향을 주는 환경 요소가 보다 다양할 있다는 자연스러운 이유 때문이다


 

     2장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내용에는 변이의 발생 빈도에 영향을 주는 조건들에 대한 서술이 있다. 이를테면 분포지역이 넓고 흔히 있는 종에서 변이가 대단히 일어난다 의미로, 바로 문단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변이에 영향을 있는 요인과 가능성이 좁은 곳에서 드문드문 변종이 발생할 가능성보다 크다는 의미다. 수긍하기에 어려운 논리는 아니다. 다윈이 언급한 다른 변이 요인 대한 진술은 (genus) 속한 (species) 작은 속에 속한 종보다 변이한다 것이다. ‘(genus)’ 생물 분류의 단위로 가장 마지막 단위인 (species) 속보다 단위인 (family)사이에 위치하며, 무리의 근연종으로 이루어진다. 다윈은 다양한 생물종들과 변종들을 조사하고, 여러 학자들과의 서신 교환 토론을 통해 창조설을 신중하고 조심스럽게부정하고 있다. “만일 종이 각기 독립적으로 창조되었다고 가정한다면 이러한 유사성을 설명할 방법은 전혀 없을 것이다”(113) 비글호 항해를 비롯하여, 다윈이 이런 내용을 언급하는 것은 애초에 다윈이 창조설 부정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이보다는 비글호 항해를 통해 설명하기 힘든 다양하고 복잡한 생물 형태들을 수집하고 목격하면서 자신의 신념에 균열이 생겼다고 보는 쪽이 옳다. 그리고 의문을 평생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수많은 고민을 했을 거이다. 물론 명확하게 연관성을 파악하기는 어렵겠지만, 다윈의 건강상의 문제와 이런 심리적인 고민 사이에 연관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만큼 다윈은 당대에 굳건하던 믿음을 흔드는 문제에 뛰어들었다는 점은 부인할 없다


 

     이제 다윈은 2장을 마무리하면서 앞서 언급한 변종이 발생의 빈도와 관련한 서술을 기반으로 하여 다른 소결론을 내린다.

 


변종은 새로운 별개의 종으로 변해가는 경향이 있다.”(113)


 

경향성에 대한 주장으로 다윈은 속이 커지고, 우세한 형태들은 우세하게 변화된 자손을 많이 남기게 되어 우세해질 이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그러면서 속은 작은 속으로 나뉘는 경향 있음을 아울러 이야기하며 마무리한다. 다시 말해 (아직은) 변이 현상에 대한 기작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우세한 생물 형태의 집단은 점점 커지고, 다양하게 변이체를 만들어내고 분기하면서 뚜렷한 특징을 지닌 작은(하위) 집단으로 나뉘어 가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해볼 있겠다. 그렇게 생명체의 종은 다른 변종을 만들어내고, 사이의 새로운 변이체가 생겨나며 생명체가 다양해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생명체들의 다양성에 대한 논의는 매우 중요한 화두라고 있다. 특히 진화론과 창조론의 논쟁을 염두에 두면 더욱 중요한 지점이다


 

     여기까지 다윈은 인간의 개입이 반영된 생물체의 (빠른) 변이 현상과 자연에서 발견되는 (느린) 변이 현상을 이야기 했다. 생물체 집단이 커지고, 변이를 거듭하여 다양해짐에 따라 야기되는 문제는 희소한 자연 자원을 놓고 벌이는 경쟁이 것이다. 부분은 다음에 나올 3 생존투쟁에서 이야기할 것이다. 이번 장에서 살짝 선을 보인 자연선택이란 표현은 다음 나오는 4 전체를 통해 이야기할 것이다. 다윈은 1장과 2장을 서술하면서 이야기를 무척 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1        
박사랑 작가의 단편 ‘서울의 바깥’을 읽고 | 기본 카테고리 2020-04-10 03:20
테마링
http://blog.yes24.com/document/12334560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잡지]창작과 비평 (계간) : 187호 (2020년 봄)

창작과비평사편집부 편
창비 | 2020년 03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박사랑 작가의 단편 서울의 바깥 읽고


박사랑 지음 | [창작과 비평 봄호(187)]

 


길을 잃은 사람들 - 포스트코리안(post-Korean) 자화상

 


이번 리뷰는 처음 알게 박사랑 작가의 단편을 선택했다. 소설의 줄거리를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소설의 배경 정도는 언급해야할 같다. 소설의 화자는 서울의 외곽에 살고 있는 30 미혼 여성이다. 소설은 서울의 어느 고가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다. 화자는 아파트에 살고 있는 가정의 아이를 대상으로 입시 과외를 하기 위해 아파트를 들어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화자가 고액 입시 과외를 있었던 것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다가 점점 발을 들여 놓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도면 대강 소설에서 묘사되는 상황을 앞에 그려낼 있다.  


 

     소설에서 설정해 놓은 상황은 아직 내가 직접 겪어보지 않은 종류의 것이지만,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과 상황에 대해 많이 감지하고 있기에 공감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만큼 소설 속에 묘사된 현실은 다른 진실로 다가왔다. 작가의 예리한 관찰가 묘사가 너무나 실감났기에 서글픈 마음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화자가 가르치는 학생은 온실 속의 화초와 같은 청소년이었다. 1 단위로 엄마가 짜놓은 삶에 익숙해져야하는, 아니 적응해버린 아이는 마치 무균실에서만 살아가는 기니피그를 떠올리게 한다. 자신의 집에서 여러 개의 세균 막이용 압축 문을 통과할 때마다 엄마, 나가도 ?라고 묻는 아이의 묘사에 나도 모르게 연민이 들었다. 이런 아이들에 대한 묘사가 과장이 아님을 요즈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무균실에서 엄마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가는 인간 기니피그들은 세상에 대해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존재다. 스스로 세상과 부딪치며 아파본 적도 없는 존재들. 이들은 회복 대한 경험마저 결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상사에 대해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의 독립된 주체로서 자신의 삶에서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앎을 축적해놓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와이는 가봤지만 붐비는 지하철 역에 대해서는 모르는아이. 화자가 수업 시간에 고전 문학을 가르치는 장면에서 어떤 대목을 아이에게 이해시키려는 대목 역시 소름끼치도록 사실적이었다. 내가 요즘 감지하고 있는 새로운 인류 단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공감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과 선생의 문답식 대화는 형식상 소크라테스식 산파술을 닮았지만,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보단 검색엔진 사용자가 단순히 어떤 정보를 찾는 과정과 유사하다.

 


왜요? 말에 내가 동굴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학생은 동굴 밖에서 나에게 끊임없이 물었다. 왜요, 왜요?” (171)

 


     학생에게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에서 그녀가 화자에게 던지는 질문을 따라가다보면 안의 에너지마저 빼앗기는 기분이다. 어떻게 이럴 있을까? 어쩌면 문학적 상상력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본다. 자신이 체화한 지식, 자신이 스스로 발견한 앎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확장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여기에는 분명히 어느 정도의 상상력과 함께 자신의 삶이 한계짓는 외연을 넓히려는 욕구가 필요하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학생은 삶에서 스스로 자신의 욕구를 발견할 기회마저 갖지 못한 존재같아 보였다. 도대체 무엇이 그리고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물론 작가가 묘사한 인물들의 모습은 과장되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학생과 화자의 모습에서 나의 일부를 발견하기도하고, 내가 만나고 아는 이들의 단면들을 소설 인물들에서 발견할 있었다. 그러니까 학생과 화자의 모습은 적어도 내게 상당히 실감나게 다가온다. 이런 아이들이 살아가야 세상, 그리고 아이들에 대한 안스러움과 연민이 들기도 했다.      

 


     화자가 가르치는 학생은 일종의 클린룸 되어버린 집에서 엄마의 욕망을 먹이로 살아가는 존재다. 또한 사회가 만들어 놓은 관습과 경계의 안에서 그나마 살아남기 위해, 자본주의의 모든 자원을 흡수하며 생을 유지해 가는 존재다. 소설 속에서 보이는 아이의 모습은 요즘 내가 사람들을 확인하게 되는 일부 모습이기도 하다. 어쩌면 새로운 하나의 전형인지도 모른다. 극단적이긴 하지만 실제로 소수는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 특히 소설 속의 아이는 엄마와 몸을 이루는 존재다. 아직도 엄마로부터 심리적인 독립을 하지 못한 존재로 보인다. 아이는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되돌아볼 기회마저 없어 보인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나는 누구인지 고민하는 기회를 박탈당한 존재가 아닐까. 엄마의 욕망이 아이의 욕망이었다. 자기의 생에 대한 아무런 욕망과 의지가 없는 존재 같다. 자신의 욕구를 위해 엄마와 대립해본 적이 없을 같은 아이.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모른 성인의 신체를 지니게된 존재다. 내가 요즘 종종 발견하는 대한민국의 신인류, 포스트코리안의 모습을 소설에서 발견했다.

 


      소설 속의 학생과 대비되는 다른 인간상은 화자가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학생의 입시를 가르치는 과외선생으로 능력을 인정받은 인물이다. 서울에 있는 유명 대학을 나와 학력에 관한 자본주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상위권에 자리를 잡은 인물이라고 있다. 짐작할 있듯이 화자는 시험이 특기 인물이다. 다만 화자 역시 학생처럼 유약하다. 시험을 봐서 대한민국의 틈새에서 그럭저럭 버티며 살아올 있었지만, 그만큼 실패에는 취약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실패에는 아직 충분한 면역을 가지지 못한 인물임을 알고있다. 화자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과 달리 대한민국 사회에서 그나마 발을 인물이지만 학생처럼 취약한 존재다. 하지만 화자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처럼 부모님의 도움으로 욕망을 충족할 형편이 못됨을 알고 있다. 학생의 엄마가 플러스 한우를 다져 만든 비빔밥 학생의 입에 넣어주는 존재라면, 화자는 자신이 돈으로 자신의 형편이 차지하는 자리를, 이어폰이며 원피스, 명품 가방 등을 쇼핑하며 채운다. 화자는 무선이어폰을 구매하는 과정에서 따라오는 고민과 염려마저도 돈으로 구매한다.  

 


     작가가 묘사하는 학생과 화자의 실감나는 모습에 공감을 많이 하게 되었다. 화자가 가르치는 학생이 무균실에서 태어나 자라는 금수저 기니피그처럼 느껴진다면, 화자는 흙수저의 위치에 있지만, 그나마 피나는 노력으로 먼저 인서울 발을 디디고, 서울과 외곽의 경계 위에 있기 위해 무릎에 힘을 주고 버티는존재다. 화자와 학생은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한민국이라는 소비지향적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적응하게 하나의 (spec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