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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위에는 왜 멍청이가 많을까-장 프랑수아 마르미옹] 또x이 보존의 법칙 | Memento 2020-04-28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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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내 주위에는 왜 멍청이가 많을까

장 프랑수아 마르미옹 저/이주영 역
시공사 | 2020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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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x이 (질량)보존의 법칙, 주변을 둘러봐라. 주변에 멍청이 밖에 없는가? 그렇다면 내가 멍청이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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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흔히 떠도는 용어로 X(질량)보존의 법칙이 있다. 어떤 조직이든 일정량의 또X이는 존재하며, 만약 주변에 또X이가 없다면 내가 또X이 라는 무시무시한 법칙이다. 중요한 점은 또X이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처럼 또X이는 우리 주변에 항상 존재하며 심지어 내가 그럴 수 있다는 점에서 책의 주제인 멍청이와 일맥상통한다. 책은 프랑스의 저명한 학자들이 멍청함에 대해 짧은 에세이, 기고문, 또는 인터뷰를 실은 내용이다. 전문가 마다 멍청함에 대한 정의나 해석, 분류는 다소 상이한 점은 있으나 대체적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음악에 배경음이 있어야 멜로디가 나오듯, 멍청함도 어느 정도 지혜를 얻을 수 있게 해주는 배경음(p.329)”이 책에서 나온 멍청함에 대한 최고의 긍정적 표현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멍청함이란 무엇인가? 저자마다 정의가 약간씩 상이하다. 멍청함의 정의보다 저자들이 말한 공통적인 특징을 살펴보는 게 이해에 좀 더 적합할지 모르겠다. 우선 멍청함은 전염이 빠르다. 더불어 지능과도 크게 관계가 없다. 똑똑한 사람도 멍청한 짓을 할 수 있으며, 이것은 순식간에 전염되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특히 멍청함은 자아도취적 성향과 관계가 있는데, 맹목적인 확신과 막무가내의 주장을 통해 우리의 건전한 사회를 파괴한다. 우리의 일상에서 멍청한 사람을 만난다면 절대 엮이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게 공통적인 입장이다.

지금까지의 표현을 보자면 멍청이=X이와 다를 바 없다. “멍청한 인간은 제대로 된 사람들이 가는 길을 방해하기 때문에 아무리 힘든 일이어도 사회가 나서서 멍청한 인간들의 수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p.66)” 하지만, 문제는 앞서 말한 대로 보존의 법칙이 존재한다. <X이 제로 조직>이란 책까지 나왔지만 또X이 제로 조직은 현실에서 이루기 힘든 이상적인 이야기다. 그리고 제거 대상이 나일지도 모른다.

제거도 불가능하다면 역시 공존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들의 영향력을 제한하고, 멍청함이 제한적으로 확산하도록 통제해야 한다. 하지만 세상은 점점 더 초연결의 시대로 가고 있고, 그들의 영향력은 막강해져만 간다. 저자들의 걱정대로 탈진실의 시대에서 멍청함이 진실을 이겨내고, 민주주의라는 우리의 삶의 토대를 파괴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이런 걱정조차 멍청한 짓인지 모르겠다. 인류는 늘 멍청이와 함께 살아왔다. 멍청한 상상, 멍청한 선택을 뚫고 여기까지 왔다. 단 한 번의 멍청한 짓이 전 인류를 멸망에 빠지게 할 힘 까지 가졌지만, 누가 알랴. 멍청함이 지배하는 시대가 올지도.

영화 <이디오크러시>는 멍청함이 통치하는 미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분명 멍청함은 보기 좋지 못하다. 불편하고, 바로잡아 주고 싶다. 그럼에도 그게 삶이라면, 모두가 그렇게 산다면 그 또한 살아지지 않을까. 문제는 모두가 멍청하고, 나만 똑똑한 순간이다. 내 옆 사람이 하는 짓이 멍청해 보이고, 저렇게 밖에 처리를 못하는지 답답한 순간. 도무지 세상 돌아가는 꼴이 말 같지도 않은 현실. 이 모든 걸 견딜 수 없는 순간. 앞서 말한 멍청함의 특성들을 잘 생기해보라. 멍청함은 상대적이다. 당신만이 똑똑하다고 생각한 순간. 이미 당신은 멍청한 짓을 했을지 모른다. 나 역시 매일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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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함이란 비꼬는 불신이다. 실제로 멍청한 이난은 비꼬는 성향에 남을 잘 믿지 못한다. 비꼬는 성향이란 인간의 본성과 동기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p.35

연구자들은 우리가 멍청이에 이토록 민감(p.36)한 이유는 두 가지로 파악했다. 먼저 우리에게는 멍청함을 포착하는 레이더가 있다. 바로 부정 편향이다. 우리 인간은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에 더 무게를 두고 주목하는 성향이 있다. 이러한 부정 편향은 인간의 의견, 편견, 낙인, 차별, 미신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 아무리 복잡한 사회에서도 우리는 천재보다 멍청이를 더 빨리 알아본다. 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사건보다 부정적인 사건을 더 먼저 알아본다. ... 두 번째로 연구진은 귀인의 근본적인 오(p.37)류를 밝혀냈다. 우리는 누군가를 관찰할 때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는 원인은 외부 환경이 아니라 타고난 성향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사례에서 결론이 무척 명확해 보인다. 멍청이 때문이다. ...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주변(p.38) 사람들 대부분이 멍청한 인간으로 보이는 것이다. p.39

멍청하다는 말에 담긴 뜻은 언제나 똑같다. 아무리 표현이 다양해도 멍청이란 지적 능력이 떨어지고 정신 연령이 낮은 사람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멍청함은 상대적인 평가다. 그 자체로 멍청이인 사람은 없다.(모두가 멍청이라면 누가 멍청한지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어느 정해진 기준점보다 떨어질 때 멍청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기준점보다 높은 사람은 우월감을 느낀다. p.43

말도 안 되는 것을 믿는 행위는 순진함이나 분별력 부족이라기보다는 기준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p.50

멍청한 짓은 머리와 가슴에 문제가 아니라 사회에서 보여주는 행동과 관계있는 겁니까? / 그렇습니다. 사회적인 행동과 관계된 문제입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따져보면 남을 제대로 배려(p.61)하지 못하는 사람이 멍청한 짓을 하게 됩니다. 멍청한 인간은 현실과 관계없이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맞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멍청이의 비위를 맞춰주는 주변 친구들도 있고요. 따라서 멍청한 짓은 사회적인 행동이기도 하지만 고치기 힘든 개인적 성향이기도 합니다. p.62

멍청한 인간도 달라질 수 있긴 하지만, 가능한 한 멍청한 인간과는 엮이지 않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p.63) ... 멍청한 인간들과 맞서려면 멍청한 인간들을 배제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힘을 합해 대항해야 멍청한 인간들이 몰락합니다. ... 멍청한 인간은 제대로 된 사람들이 가는 길을 방해하기 때문에 아무리 힘든 일이어도 사회가 나서서 멍청한 인간들의 수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p.66

오류는 단순히 의견뿐만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인식까지도 바꾼다. 인간은 오류에 빠지는 순간 맹목적이 된다. p.79

엄격한 논리적 사고는 인간의 본성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사고방식은 완전하지 않다. 대신 인간은 상황에 따라 생각하면서 복잡하고 불완전하며 불확실한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한다는 것이다. p.82

무지하다고 멍청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지는 지(p.110)식을 흡수하는 강력한 원동력이다. , 우리가 스스로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고 인정해야 한다. p.111

시스템1에서 세상, 욕망, 인상에 대한 해(p.115)석이 이루어지고 이 해석이 시스템2를 거쳐 신념과 결정으로 바뀝니다. p.116

우리의 정치적 신념을 정하는 것은 시스템1입니까, 아니면 시스템2입니까? / 시스템1입니다. 우리의 정치적 신념은 논리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존경하는 사람, 신뢰하는 사람을 따르다 보니 정치적 신념이 기우는 것입니다. 정치 활동을 전반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감정입니(p.123)니다. 민주주의에서 합리적인 인간이라는 신화가 여전히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완벽한 합리주의가 없어도 민주주의는 작동합니다. 민주주의는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을 위해 찬성표를 던지는 사람들만 있으면 충분하니까요. 그러나 추상적이고 위험 확률이 애매한 분야에서는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기후 변화 문제가 대표적이지요. 시스템1은 추상적인 위협 앞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합니다. 위협이 구체적이지 않으면 감정을 일으킬 수 없고, 감정이 없으면 행동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현재는 잘 와 닿지 않는 위협도 심각하게 인식하려면 시스템 2가 작동해야 합니다. 따라서 시스템2를 자극하는 적절한 방법을 찾아야겠지요. p.124

어리석음과 재치는 공통적으로 진실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어리석음은 진실을 존중하지만 재치는 진실을 무시한다. - 니콜라 말브랑슈 p.142

유언비어는 탈진실시대의 산물이다. 이제는 우리가 가짜뉴스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야 할 판이다. 문제는 우리가 유언비어를 듣고도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에 별로 관심이 없고 유언비어가 만들어내는 결과만 즐긴다는 사실이다. p.146

우리의 뇌는 곧 대처와 체 게바라 간의 싸움이다. p.155

멍청함은 두뇌의 어느 부분에 위치합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대답을 해줄 것이다.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보고 멍청이라고 조롱하는 사람의 두뇌 속에 있다.” p.160

당신이 멍청하든 멍청하지 않든, 언제나 누군가에게는 멍청이일 것이다. -피에르 페레 p.163

지능은 사람 전체에 해당하지만, 멍청함은 특정한 행동에 관한 이야기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p.189

멍청함과 창의성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다. 멍청함과 창의성은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고 기존의 기준과 대립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멍청함은 생각보다 미묘하다. 똑똑하다고(IQ가 높다고) 멍청한 행동을 하고 싶은 유혹에서 자유롭지 않다. p.179

민주주의 사회마다 교육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정작 지식에서 중요한 비판 정신 교육은 빠져 있는 것 같다. 아무리 교육적인 노력을 기울여도 비판 정신이 길러지지 않으면 쉽게 맹신에 빠질 수 있다. 의심을 하면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의심이 지나치면 주체적인 정신이 키워지기보다는 허무주의로 이어질 수도 있다. - 제럴드 브로네르, <맹신자들의 민주주의> p.184

메타 분석은 지능을 가리켜 추론하고, 계획하고, 복잡한 생각을 이해하고, 신속히 배우고, 경험에서 배우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메타 분석에 따르면 똑똑한 사람일수록 쉽게 무엇인가를 믿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p.185

비판 정신이란 인지 능력을 마비시키는 모든 편향(사후 과잉 확신 편향, 확증 편향 등)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다. -헤더 버틀러(캘리포니아 주립대 조교수) p.187

인간이 우연을 두려워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인간은 일반적으로 무엇이든지 설명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과학을 발명한 것이지요. p.217

이 지점에서는 관념적인 언어와 멍청한 말이 비슷하다. 즉 말고삐가 풀리듯 현시로부터 동떨어져 아무렇게나 나와 있다는 점에서다. 그러나 언어가 부적절하게 사용되었어도 거짓말과는 다르다. ... 이렇게 보면 멍청한 말과 관념적인 언어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언어에서는 실제 의미보다 상징성이 더 중요하다. p.273

단어는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가리키기보다는 우리 주변의 세상을 분석하고, 우리가 정의하는 개념을 통해서 세상에 의미를 준다. p.274

멍청함이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이유는 전염성이 강해서다. 멍청함이라는 바이러스에 전염되면 누구나 상식을 잃어버린다. ... 이 두 사람의 말을 살펴보면 언어 표현도 과장되었지만, 생각이 편협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런 말에 지지를 보낼 사람들은 두 사람과 같은 부류인 멍청한 인간들뿐일지도 모른다. p.281

인간의 지성이란 감정적인 반응과 지식 및 이성 사이에 타협을 보는 능력입니다. p.285

아무리 지적인 두 사람도 앉아 있으면 걸어가는 무지렁이에 뒤쳐진다.” - 미셸 오디아르 p.294

자조의 조사에 따르면 감정 능력이 부족하고 자기중심적이어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사람, 즉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이 멍청이인 것이다. p.296

감정이란 잘 다져진 지성입니다. 지적인 사람일수록 복잡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감정과 지성을 서로 반대 개념으로 봐서는 안 됩니다. 지성을 갈고 닦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복잡한 감정을 표현합니다. 지성도 훈련해야 합니다. p.324

지금은 우리가 스마트 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든 기기들이 스마트합니다. 스마트 기기로 우리는(p.325) 다른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은 언어를 만들었고 우리는 언어로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언어가 인간보다 지적입니다. ... 언어학자들도 자신들이 만든 도구에 의존합니다. 측정을 위해서요. p.236

음악에 배경음이 있어야 멜로디가 나오듯, 멍청함도 어느 정도 지혜를 얻을 수 있게 해주는 배경음입니다. p.329

라이언 홀리데이가 가짜 사건을 만들기 위해 사용한 여러 기술 중 두 가지를 소개한다. 첫 번째, 전문가 행세를 한다.(p.346) ... 두 번째, 거짓 이슈를 만든다. (p.347) ... “그럴듯하게 정확하면 정보로 둔갑합니다. 사실이 아니라면 기자들이 반박하는 기사를 쓸 수 있습니다. 같은 사건이어도 두 가지 기사가 나옵니다. 이처럼 기자들이 가짜 뉴스를 설명하는 기사를 써주면서 가짜 뉴스는 더욱 대중에게 알려집니다.” p.348

사람은 잘 모르는 주제를 다룰 때 반드시 멍청한 말을 지껄이게 된다. -해리 프랑크푸르트 p.377

멍청함은 단순히 지성의 반대가 아니다. 아주 똑똑한 사람도 놀랄 정도로 멍청할 수 있다. p.394

안타깝게도 멍청함이라는 표현은 너무 애매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멍청함이 지닌 뉘앙스를 정확히 표현하지 못한다. 이 단어에는 철학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다. ‘멍청이라는 표현은 현재 우리와 진실 사이에서 어리석음이 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관심을 갖는 데 도움을 준다. 탈진실을 보여주는 멍청한 말을 하려면 어느 정(p.398)도 지식은 있어야 한다. 어느 정도 머리가 있어야 멍청한 말을 지어내고, 맞는다고 우기고, 그 말을 퍼뜨릴 수 있다. 심지어 머리를 굴리는 전략도 있어야 한다. p.399

이 세 가지 요소(맹목적인 확신, 자아도취, 막무가내의 주장)를 이해하면 멍청한 말이 대규모로 나타나는 이유를 알 수 있고, 일반화된 백치 상태를 가리켜 탈진실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p.400

로제는 멍청함을 날카롭게 분석하면서 멍청함은 합리성이 부족한 상태가 아니라, 반대로 논리를 과도하게 내세우는 상태라고 결론지었다. ... 멍청함을 샅샅이 해부해보면 특이한 원치이 성립한다. ‘A=A’. 이미 이야기한 것과 생각한 것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밀고 나가는 것이다. p.401

멍청한 인간은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생각한다. p.401

자기중심적인 시각은 지혜가 아니라 직감을 중시한다. 내가 믿는 것은 무조건 진시이라고 본능적으로 확신하며 믿는다는 의미다. p.404

멍청한 인간은 자아도취와 자기맹신에 빠져 있다. 이 때문에 멍청한 인간들이 쉽게 늘어난다. p.408

멍청한 인간은 결론을 내고 싶어 한다.” -플로베르 p.409

탈진실 시대를 지탱하는 사람들은 본능과 감정을 지식으로 착각한다. 이러한 개인들의 믿음과 행동도 대부분 본능과 감정에 충실하다. 본능과 감정이 지배할(p.411)때 멍청함이 생긴다. p.412

국수주의는 개개인의 존엄성을 유지하려는 마음이 이성적으로 표출된 것이다. 그러나 도잇에 국수주의에는 개개인이 마음속에 간직한 욕망(사회적으로 출세하고 싶은 욕구, 오만함, 공격성, 지배욕)이 담겨 있기도 하다. 영광, 명예, 물리적인 힘, 씩씩함을 표현하도록 자극하는 국수주의는 앙시엥레짐(구체제)의 귀족들이 (p.425) 지닌 열망을 담고 있다. 특히 국수주의는 힘이 약한 개인들의 열등감과 무력감을 해소하는 도구도 된다. p.426

모든 사회는 집단 이상을 만들어 낸다.” 정신의학자 조르주 드브루가 했던 말이다. 집단 이상이 생겨나면 이 이상을 해치는 부정적인 존재도 만들어진다. p.427

신자유주의 사회가 발달하고 시장 지배와 자아도취 문화 속에서 개인들이 박탈감을 느끼면서 포퓰리즘이 퍼져나간다고 볼 수 있다. 누구나 소비주의에서 이익을 보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소비주의가 불러일으키는 환상에서 자유롭기는 어렵다. p.434

멍청한 인간들의 행동 때문에 계속 고통 받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맞서고 반박하며 자기방어를 했다. 바로 이것이 멍청한 인간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막는 방법이다. p.466

꿈은 가상현실이자 행동을 준비할 수 있게 돕는 방어막이다. 뿐만 아니라 꿈을 통해 감정을 잘 이해하게 되기도 한다. 꿈속에서는 감정적인 찌꺼기가 걷히고 중요한 정보만 남은 기억이 재현되기 때문이다. p.493

행동은 우리의 경험일 뿐 우리의 정체성이 아니다. p.522

어리석음은 신이 주신 능력이다. 그러나 남용해서는 안 된다. -교황 요한 바오로2p.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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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홍승은 저
어크로스 | 2020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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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은의 글쓰기가 그렇다면, 나의 글쓰기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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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글쓰기란 무슨 의미인가? 의미보다는 의무감이다. 어쩌면 의미를 남기고자 하는 최후의 발버둥일지 모른다. 이 블로그가 그렇다. 어떤 거창한 의미를 가지고 시작하지 않았다. 죽을 것 같이 힘들었던 순간. 심리 치료 중, 좋아하는 일을 해보라는 말에 무작정 서점을 찾았다. 그저 책 냄새, 잉크 냄새가 좋았다. 문득 잊고 살았던 독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샀고, 뭔가를 끄적였다. 아마 그게 시작이었다. 내 안에 있는 생각들을 걱정 없이 토해내기 위해서. YES 포인트는 덤이었다. 글쓰기는 그렇게 아무런 의미 없이, 그저 시원하게 토해내기 위해 시작했다.

문제는 어느 순간 목적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그저 가끔씩 울컥거리는 내 안의 감정들을 토해내고, 기록하는 정도로 그쳤어야 했다. 그걸로 끝이어야 했음에도 손가락을 목구멍으로 집어넣고 억지로 토해내고 있었다. 최소한 A4 1장 분량은 토해내자. 그래야만 꿈(으로 포장된 허황된 목표)을 이루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듯했다. 그리고 덤이었던 YES포인트는 그 실적을 계량화 해 주었다.

깊은 숙취나, 장염에 걸려본 사람들은 잘 안다. 토 하는데 한계가 있다. 위액마저 토하고 나면 고통만 있을 뿐 더 이상 아무것도 튀어나오지 않는다. 그저 헛구역질 해대며 고통 속에 몸부림 칠 따름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놀이가 의무가 되는 순간, 즐거웠던 독서도 고통으로 다가온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누군가는 말할지 모른다. 그 고통의 시간이 당신을 성장케 할 것이라고. 하지만 반복된 고통은 병의 신호일 따름이다. 억지로 토해내면 ?현대인의 불치병인- 역류성 식도염에 걸릴 뿐이다. 코난 오브라이언이 말했다. ”니체는 너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너를 강하게 만들 뿐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가 더 강조했어야 할 말은 그 정도 고통이면 정말 죽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작년, 그리고 지금. 그 역류성 식도염과 위염, 비염으로 너무도 힘들다. 실재 삶도, 글도 더 이상 토해낼게 없는 순간 몸은 무너져 내렸다. 재가 되었고, 병원비만 우수수 깨져나갔다. 그래도 삶은 계속되어야 했기에, 돈벌이를 멈출 순 없으니. 그리고 다시 토해내고자 움직여 본다. 별다른 생각은 없다. 그저 토해낼 뿐. 누군가를 위해서도 아니다. 나를 위해서. 나에게 글쓰기란 아직까지는 그 정도다. 그래도 계속 써야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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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과 연결될 때, 삶과 문장은 단단해 진다. p.2

서사가 부재한 곳에 정보만 남아요. 나에 대해서는 내가 가장 잘 말할 수 있기 때문에 글을 써요. 하나의 정보로 존재가 납작해지지 않도록, 제가 자유롭기 위해서요. p.6

어떤 글은 존재를 입체적으로 증명하지만, 어떤 글은 존재를 납작하게 만든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도, 읽는 사람에게도 그렇다. 글쓰기에서 가치판단이 적용되는 기준이(p.10) 있다면 바로 이 부분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의 고정관념을 재생산하는 글, 고유한 개개인을 하나의 덩어리로 뭉개는 글을 위험하다. p.11

내 경험을 말했을 뿐인데, 세상이 딸꾹질했다. p.14

적어도 성폭력에서 때린 놈은 발 뻗고 못 잔다.’는 말은 거짓이다. 때린 놈은 편하게 자지만, 맞은 사람은 모든 화살을 자신에게 돌리며 밤을 지새운다. p.16

내 세계를 타인에게 보이는 일, 타인의 세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일. 타인과 나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p.20)에 고개 돌리지 않는 일. 나에게 읽고 쓰는 과정은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구체적인 수단이었다. p.21

성장 과정에서 우리는 언제나 두려움이라는 난관을 마주하게 됩니다. 가시화에 대한 두려움, 가혹한 시선과 비판에 대한 두려움, 고통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 말입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죽음을 제외한 이 모든 두려움을 이미 침묵하며 지나왔습니다. -오드리 로드, <스스터 아웃사이더> p.37

글이 짓는게 아니라 살아내며 쓰는행위라면 시야가 좁거나 무례한 사람에게 권위를 줄 경우, 글뿐 아니라 삶이 막히는 위험에 처할 수 있다. p.58

질문에 대답하는 더 나은 방식 찾기. 질문을 다시 질문하는 방식. 그리하여 어떤 존재를 늘 질문으로 만드는 세상을 향해 우리가 질문하게 된다. -사라 아메드 p.71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못된 여자는 어디든 간다. p.74

우리는 모두 이미지와 이야기의 세계에 살고 있고, 대부분은 이런저런 이야기에 상처받으며 살아간다. 운이 좋으면, 우리를 받아주고 축복해주는 다른 이야기를 찾거나 더 나은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리베카 솔닛 p.74

글쓰기는 단지 지난 시간을 기록하는 활동이 아니라 경험을 기반으로 끈질긴 사유와 해석을 이어가는 과정이다. 기존의 관념을 비틀어 존재를 자유하는 언어를 구사하고, 경험을 다각도로 해석할 때, 내가 쓴 글은 단지 개인적인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답이라고 여겨졌던 상식에 글쓰기를 통해 질문을 더니면, 그 질문은 파장을 일으켜 누군가의 실제 삶에 자유를 선물할 수 있다. p.78

몸문화연구소의 임지연 교수는 죄책감이 부분적인 행위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는 감정이라면, 수치심은 전면적으로 자아를(p.88) 문제시하는 감정이라고 한다. p.89

들리지 않는 것, 말하지 않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은 말을 한다.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결정적인 한마디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단어를 입에 담지 않는 침묵에서 나온다. -찰스 백스터, <서브텍스트 읽기> p.92

고통을 스스로 언어화하지 못할 때 속이 썩는다는 말은 정확하다. 고통의 원인인 모든 부정의가 오로지 나라는 존재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p.97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꼭 가족이거나 연인일 필요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사랑하는 만큼 이해 받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몰래 글을 쓰는 모습은 쓸쓸하다. 그 관계가 다른생각 자체를 막아버리진 않을(p.113)지 걱정되기도 한다. 각자의 고유한 자국을 존중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세상에 하나뿐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꾼이 될 수 있을 텐데. p.114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문학평론가 신형철 p.115

내가 쓰는 글을 통해 누구에게 힘이 되고 싶은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싶은지 스스로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면 따라오는 비난에 대해서도 조금은 의연해질 수 있었다. p.121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당신에게 큰 영향을 주지 못해요. 나를 망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나 자신이에요. 다른 말로, 나를 망칠 권리는 오직 나에게만 있어요. p.127

글이 삶을 관통해서 나올 수밖에 없는 거라면, 소수자의 위치에서 나오는 글은 언제나 보편성을 획득하는 데 실패할 테고 영원히 사적이라는 딱지를 뗄 수 없을지 모른다. p.133

내면적인 것은 여전히, 그리고 항상 사회적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순수한 자아에 타인(p.135), ,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자 자신의 인류학자이다. -아니 에르노 p.136

대화와 글쓰기는 나와 타자의 소통이라는 점에서 닮았다. 다른 점이라면 대화에서는 즉각적으로 아록 물어줄 사람이 있지만, 글쓰기는 물어줄 사람이 없으니 내가 나에게 질문하며 써야 한다는 점이다. 읽는 사람이 라고 물을 만한 부분을 내가 먼저 보여주려는 노(p.148)력이 필요하다. p.149

나는 글의 고유성과 힘은 문장력 이전에 서사와 질문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내가 통과해 온 시간을 말할 수 있는 건 나 밖에 없기에 내 이야기를 쓸 때 글을 가장 고유해진다. p.149

자신으로 인해 슬픔을 가져야 했던 사람이 있었음을 잊지 않는 이들에게 우리는 기대를 건다. 자신의 경험을 배반하지 않는 그들 우리로부터 은 시작된다. -조한혜정, <글 읽기 삶 읽기> p.164

사라 아메드는 정의를 위해 싸운다고 해서 우리 자신이 정의로우리라는 보장은 없다며 망설여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촘촘하게 차별로 연결된 고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조금 더 촘촘하게 사유하고 망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p.181

누군가를 풍경의 배경으로 여기는 것만큼 고유성을 지워버리는 간편한 방식은 없다. 글에 생기가 줄고 관점이 지루하게 느껴질 때면 나는 먼저 내 애정을 의심한다. 눈앞의 존재를 고정된 물체로 인식하고 있지 않은지 묻는다. p.188

글쓰기는 직사광선이 내리쬐는 맑은 길로 가로지르는 과정이 아니라 뿌옇게 흐린 길을 더듬으며 내 위치와 감정의 실체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관성적으로 쉬운(p.272) 길로 가려고 할 때마다 잠시 제동을 걸어 일부러 길 잃기를 선택하는 게 쓰기의 과정이 아닐까. 내 경험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거나 느낄 수 없는지 이리저리 각도를 바꾸어 살피고, 첫 판단을 버리고 낯선 시선을 탐색해가면서. p.273

자기 서사를 쓰는 일은 자서전처럼 모든 일대기를 쓰는 일이라기보다, 내 기억과 일상을 낯설게 보고 기록하는 일이다. 권태에 눌리지 않고 감각을 열어 지금을 살아갈 때, 과거와 지금의 경험에서 글감은 자연스레 떠오르는 게 아닐까. p.301

여유 없는 사람들은 천박할 수밖에 없고, 나는 그 점을 말과 글로 옹호한다. 상대가 천박해(p.319)서 불편하다면 내 소갈머리를 살펴야 한다. 천박을 옹호하려는 내 말과 글이 고상한 단어들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내 삶과 언어의 치명적인 한계다. 내가 그 사람들보다 덜 천박하다면 내 삶의 여유에서 비롯된 배운 년의 체면과 껍데기 때문이다.“ p.320-최현숙

세상의 모든 글은 콜라보이자 타인의 흔적이다. p.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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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양형 이유-박주영] 죽이느냐 살리느냐 역시 쉽지 않다. | Memento 2020-04-26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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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어떤 양형 이유

박주영 저
김영사 | 2019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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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쉬운 판결이 어디 있으랴. 쉬운 선택이 있기는 한 걸까. 죽이느냐 살리느냐 역시 쉽지 않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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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를 하다보면 난감한 상황이 많다. 사정은 딱하나 법과 규정은 고정적이고, 해석이나 재량의 여지가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담당에게 아무리 빌고 애원해도 다른 방법이 없다. 법이나 규정이 잘못된 경우는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결국 담당자인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인데, 그것도 쉽지 않다.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처리해야 정의다. 형평성의 문제다. 나는 걸리고 너는 안 걸린다면, 그건 법치주의가 아니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쉽지 않다. 단순한 규정에도 예외는 항상 발생하기 마련이다. 사람의 삶이 똑같지 않듯이 각자의 사정 역시 다르다.

종종 강력범죄로 보이는데 판결은 터무니없이 약하게 나온 기사를 접할 때, 사람들은 분노한다. 법이 잘못되었다고도 하고, 판사가 문제라고도 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전관예우는 이러한 사법불신의 대표적 사례다. 실재로 그렇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아니라고 믿는다. “‘죽이느냐 살리느냐 To kill, or Not to kill’의 처지에 선 사람에게도 선택은 괴로운 문제(p.279)”라고 고백하는 판사들이 많음을 믿기 때문이다. 현직 비주류(?) 판사가 쓴 <어떤 양형이유>는 그래서 읽어봄직하다. 왜 그런 터무니없는 판결이 나올 수밖에 없는지를 고민케 한다.

사실 기사는 개개의 사정을 전달하지 않는다. 자극적인 내용과 정보만 전달할 뿐이다. 이를 보완할 방법이 없을까.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판결문이 있다면 2016헌나1”가 아닐까 싶다. 이 판결문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인용한 판결문인데, 생중계를 통해 전 국민에 공개되었다. 정치적 문제를 떠나서 판사들의 중노동을 통해 만들어진 판결문들이 이와 같이 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최대한 쉽게,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다면, 법에 대한 불신도 어느 정도 해소되리라 본다. 현대사회에서 법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렇다면 결국 법과 친해져야만 하는데 판결문에 대한 접근이 쉬워진다면 그만큼 어떤 양형이유에 대한 고민이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우리의 인식변화도 필요하다. 정의와 선함이 승리한다고 믿는다. 문제는 각자의 정의와 선함이 다르다. 저마다의 정의와 선함이 난립하는 상황에서 나에게 맞지 않는 판결은 부정의고, 악함이다. 그래서 우리는 법에 호소하고, 법정을 찾고, 공명정대한 판결을 요구한다. 하지만, “법정은 선악의 공론장이 아니다.(p.50)” “같은 것을 같게, 다른 것을 다르게 취급한다는 정의론은 사실상 알맹이 없는 이론이다. 세상에 같은 사례는 없다. 서로 유사한 것을 같은 범주로 묶어 같다고 선(p.370)언할 수밖에 없는데, 일반화하고 범주화하는 과정에서 벌써 정의는 훼손되고 만다. 다른 것을 같은 것으로 취급해야 하기 때문이다.(p.370)” “불법과 적법의 영역에는 선악이 개입될 수 없다. 선의에서 비롯된 불법도 있고 악의에 차 있지만 적법한 행위도 있다.” “선악은 양형에 다소 참고 될 뿐이다.(p.50)” 우리가 믿는 정의와 선함은 어느 곳에도 없다.

결국 방법이 없는지도 모른다. 좋은 법을 만들고, 뛰어난 판사를 고용하고, 좋은 제도를 만들더라도 모든 정의를 구현하고 선함을 지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건가. 그럴 수는 없다. “국민은, 불복할 수 없는 상급심(p.13)”이다. 국민의 명령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더불어 국민인 우리 역시 깨달아야 한다. “법정이라는 무대에 오른 드라마에는 해피엔딩이 없(p.27)”, “법정은 모든 아름다운 구축물을 해체하는 곳(p.28)”이라는 것을. 법원에 없는 것을 요구한다면 그 역시 잘못된 명령이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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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 불복할 수 없는 상급심이다. p.13

법정이라는 무대에 오른 드라마에는 해피엔딩이 없다.(p.27) ... 법정은 모든 아름다운 구축물을 해체하는 곳이다. 사랑은 맨 먼저 해체되고, 결국 가정도 해체된다. 형사사건에서는 한 인간의 자유를 지지해준 법적 근거마저 해체시킨다. 재산을 나누고, 아이도 나눈다. 사랑의 잔해를 뒤적이고 수습하다 보면 법정이 도축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법관은 굳어버린 사랑을 발라낸 다음 가정을 이분도체, 사분도체로 잘라내고 무두질한다. 법은 날카롭게 벼린 칼이고, 법관은 발골사다. p.28

폭력이 난무하는 곳보다 더한 공적 영역은 없다. p.36

사실관계가 증거, 특히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주로 따지는 영역이라면, 해석은 문자의 의미와 가치관, 감수성의 영역이다. 해석은 옷감과 비슷하다. 작은 옷에 억지로 몸을 욱여넣으면 단추가 터져버리지만, 옷감에(p.47) 신축성이 있다면 가능하다. 그러나 아무리 신축성이 있어도 담을 수 있는 용적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고무자루를 옷이라 할 수 없다. 이는 법의 외피를 둘렀을 뿐 규범이라고 부를 수 없다. 법과 같은 규범은 정해진 사이즈가 있어야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라지, 엑스라지, 44, 66이 법이라면 옷감의 신축성이 바로 해석의 영역이다. 사이즈를 해석의 최대치로, 신축성을 시대정신으로 비유할 수 있다. 그 시대상황이나 사회적 관습, 동시대인의 보편적 인식, 당대의 사회구조 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정확한 법률해석을 할 수 없다. 시대정신이 법의 엄격한 해석을 요구하느냐, 아니면 유연한 해석을 요구하느냐에 따라 법의 해석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사실관계 인정이나 법률의 규범적 해석은 법원치과 선례 등이 누적된 경우가 많으므로, 법관들마다 중구난방의 결론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p.48

불법과 적법의 영역에는 선악이 개입될 수 없다. 선의에서 비롯된 불법도 있고 악의에 차 있지만 적법한 행위도 있다. 법정은 선악의 공론장이 아니다. 선악은 양형에 다소 참고될 뿐이다. p.50

법정증언은 진실된 피해자가 다시 마주치는 폭력적 상황이다. 그럼에도 진실된 피해자라면 견뎌야 한다. 힘들고 불쾌해서 증언을 못하겠다거나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갈 경우 유죄 입증은 점점 더 힘들어지고 변호인의 공격은 성공을 거둔다. ... 진실은 어눌하고 오락가락하며, 기억은 희미하고 게으르지만 대부분 시험대를 통과한다. p.53

혐오는 대부분 관념에 정주한다. 혐오의 대상을 관찰하고 그들의 삶 속으로 조금만 들어가보면 혐오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편견에 근거한 것인지 금방 깨닫게 된다. p.100

강만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다. 산재사건에서는 형벌도 낮은 곳으로만 흐른다. 기업이 크면 클수록 그 기업의 최고책임자에게까지 산재사고의 책임을 묻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p.133

편견은 진영을 만들고, 진영 속에서 강화되어 차별과 혐오를 낳는다. 집단 혐오는 사적 혐오를 정당화하고, 그 집단을 혐오하는 다른 집단을 만들어낸다. A처럼 가장 약한 개인과 집단부터 혐오의 대상이 되고 결국은 차례차례 조리돌림당한다. p.147

그러나 법의 영여에서 동정이나 연민은 위험하다. 인권은 시혜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수자에 대한 법적 보호를 시혜라고 보면, 그 시선은 언제 철회해도 무방한 것이 된다. p.153

법의 주된 기능은 선긋기에 있다. 적법과 불법을 경계로 국가권력으로부터의 보호 여부가 결정된다. p.154

햇볕은 감미롭고, 비는 상쾌하고, 바람은 힘을 돋우며, 눈은 마음을 설레게 한다. 세상에 나쁜 날씨란 없다. 서로 다른 종류의 날씨가 있을 뿐이다.”(존 러스킨) 세상에 나쁜 아이도 없다. 서로 다른 처지의 좋은 아이만 있을 뿐이다. p.218

결혼을 하고 시간이 흘러 깨달은 건, 결혼은 사랑해서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랑에 대한 예지로 감행된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오래 연애를 했더라도 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고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천천히 커지고, 작게 시작해(p.229) 크게 여무는 것이다. 사랑이 식는다는 말도 이상한 말이다. 확 타올랐다가 식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욕정이다. 결국 결혼은 저 사람이라면 계속 새롭게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지에서 결정된다. p.230

기억은 법적 사실이라는 존재의 집이다. 기억이 없으면 사실도 없다. 기억하지 못하고, 기록되어 있지 않다면, 적어도 재판에서는 그날 그 일은 벌어지지 않은 것이다. 나의 실감만으로 내 존재를 입증하지는 못한다. 누군가 나를 기억하고 언급하지 않으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적 존재는 물질이 아니라 기억과 이야기로 이뤄진다. 문제는 기억이 믿을 게 못 된다는 점이다. p.240

정을병은 단편소설 <육조지>(1974)에서 형사는 때려 조지고, 검사는 불러 조지고, 판사는 미뤄 조지고, 간수는 세어 조지고, 죄수는 먹어 조지고, 집구석은 팔아 조진다.”고 썼다. p.260

사느냐 죽느냐 To be, or Not to be’의 처지에 선 사람도 괴롭지만, ‘죽이느냐 살리느냐 To kill, or Not to kill’의 처지에 선 사람에게도 선택은 괴로운 문제다. p.279

소송은 타협의 지점 없는 일도양단의 장이다. ... 재판은 양자역학의 세계가 아니라 고전물리학의 세계다. p.279

가치는 상대적이고, 중요하지 않은 하찮은 가치란 없음에도 소송은 추어이나 생명 같은 계량할 수 없는 것을 형량해야 한다. p.286

모든 사안을 법대로 공평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법원칙이 법적 안정성의 문제라면, 유사해 보이지만 다를 수밖에 없는 각 사건에서 개별 사안에 따라 거기에 맞는 최선의 결론을 도출해야 하는 것은 구체적 타당성의 문제다. 어떤 법관은 법적 안정성이 정의의 영역이라면 구체적 타당성은 사랑의 영역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p.287

칼 포퍼의 지적처럼, 반증 가능성 없는 과학은 사이비이고 닫힌 사회가 곧 전체주의이듯, 화석화된 판사는 그 자체로 해악이다. p.289

이해나 공감이 경험에서 비롯된다면, 떨림과 감응은정성에 달린 문제다. 이해하고 공감하되 불 좋은 연탄마냥 뜨겁게 반응하지 않는다면, 쇳조각은 고사하고 달고나한 국자 녹여낼 수 없다. p.291

판사는 법이라는 바람을 맞으며 정의가 있는 곳을 가리키는 풍향계일 뿐이다. 풍향계가 갈팡질팡한다면 바람이 문제인가, 풍향계가 문제인가? 고장 난 풍향계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혐의는 오히려 정의에 있어 보인다. 정의는 동서남북처럼 고정된 방위가 없다. p.356

같은 것을 같게, 다른 것을 다르게 취급한다는 정의론은 사실상 알맹이 없는 이론이다. 세상에 같은 사례는 없다. 서로 유사한 것을 같은 범주로 묶어 같다고 선(p.370)언할 수밖에 없는데, 일반화하고 범주화하는 과정에서 벌써 정의는 훼손되고 만다. 다른 것을 같은 것으로 취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상황은 얼마든지 변주도고 무한히 확장된다. 이런 논리적 모순과 간극을 메우기 위해 규범과 해석은 열려 있어야 한다. 반증 가능성 없는 명제가 참이 아니듯 닫힌 규범과 해석은 위험하고, 정의에 반할 가능성이 높다. 법정형을 무겁게 하고 판사의 재량을 줄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p.370

법은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를 바로 찾게 하는 것이 국민의 건전한 법감정 내지 법의식인 것이요, 일단 제정된 법에 가치와 생명을 불어넣는 것도 법감정과 법의식의 힘이다.” 최종고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p.374

힘없는 정의는 무력하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 정의와 힘은 동시에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정의가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의가 되어야 한다. 정의는 시비의 대상이 되기 쉬우나, 힘은 시비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정의는 강해지기 힘들다. 결국 강한 것이 정의가 되었다.” 파스칼 p.374

법감정은 단순히 격앙된 감정상태가 아니라, 힘이 약한 정의일 가능성이 높다. 들끓는 법감정은 곧 강해(p.374)질 정의 아닐까? p.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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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즈버거의 말-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헬레나 헌트] 한국의 긴즈버그를 기대하며 | Memento 2020-04-19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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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긴즈버그의 말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헬레나 헌트 저/오현아 역
마음산책 | 2020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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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즈버그와 같은 법관이 우리 사회에 없는 게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거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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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이 많다. 걱정도 많다. 부정적이다.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다. 걱정하고 고민하는 바를 얘기하면 보통은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말한다. 실재로도 그렇고. 그래서 나는 침묵을 택한다. 괜한 이야기는 피차가 서로 피곤한 일이다. 그것도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면 말이다. 누군가가 잘되고 있고 좋은 일이라고 말하는데 딴지를 걸고 우려를 표하는 일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굳이 얘기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말하지 않아도 이미 다들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반대의견을 말하기 어렵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더라도 나처럼 스스로 자기검열을 하곤 한다. 게다가 소수자이자, 소수자의 권익을 위해 반대하고 싸우는 일은 절대로 쉽지 않다.

그렇기에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의 언행은 소중하다 올바름을 위해 어떻게 생각하고 말해야하는지를 그의 삶을 통해 배울 수 있다. <긴즈버그의 말>은 그의 삶에 대한 엑기스다. 법과 시민의 자유, 그리고 나의 인생으로 나눠진 챕터 속에서 그의 삶을 짐작해 본다. “유대인이고 여자인 데다 엄마였(p.65~66)”고 사회적 지위까지 이뤄야 했을 그의 삶은 절대로 평탄치 않았을 테다. 그녀가 앞장서 차별을 철폐해 온 지금도 워킹맘을 슈퍼걸이라고 부르는데 하물며 그 차별과 온전히 싸워온 그의 삶은 평탄치 않았을 테다. 그리고 온전히 그를 지지해준 배우자를 보면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 결혼을 하며 가정을 꾸리는 일에 책임감을 가져본다. 위대한 인물에겐 위대한 지지가 있는 법이다.

특별히 인상 깊은 점은 상대방을 인정하는 태도다. 그와 의견이 대립하는 스캘리아 대법관과의 오랜 우정은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한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데 어떻게 친구로 지낼 수 있냐는 물음에 스캘리아 대법관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생각을 공격하지 사람을 공격하지 않아요. 선한 사람들이 나쁜 생각을 갖고 있기도 하지요. 그 둘을 구분(p.181)” 해야 한다고 말이다. 두 사람이 친구일 수 있는 이유는 스캘리아 대법관의 올바른 생각 덕분이겠지만,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듯, 긴즈버그의 생각도 짐작케 한다.

최근에 이런저런 법률 서적을 뒤적여 본다. 촛불혁명, 사법농단 이후 부쩍 관심이 높아졌다. 많은 법조계 인사들의 고민들을 책을 통해 접하기는 했지만, 정작 우리는 그들의 판결문을 볼 기회가 드물다. 판사가 중노동을 들여 쓴 판결문임을 감안할 때, 우리의 삶과 이다지도 괴리되어 있다면 뭔가 문제가 있지 않을까. “판사는 그날의 날씨가 아닌 시대의 기후를 고려해야 한다.(p.41)”는 말은 그래서 의미 있어 보인다. 책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것도 분명 좋은 방법이지만, 본연의 임무인 판결문으로써 세상에 피력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하다.

전부는 불가능하겠지만 우선 가능한 한 쉬운 언어, 일상의 언어로 써야 할 테다. 그리고 판결문에 접근하는 경로를 다양하게 해야 한다. 법원 홈페이지에 주요 판결문을 게시하지만 사실 일반 대중이 얼마나 그 공지를 확인하겠는가. 그게 어렵다면 정기적으로 판결문을 소개하는 기사나 컨텐츠를 만드는 것도 좋겠다. 이미 하고 있다면 홍보라도 잘해야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올바로 판결하는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사법 불신이 높다.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의 방향을 가속(p.125)”할 수 있어야 하지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긴즈버그와 같은 법관이 우리 사회에 없는 게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거라 믿고 싶다. 좀 더 판결문제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 사회에도 긴즈버그와 같은 법관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이것에 대해 서로 토론하고 논쟁할 수 있는 그런 사회로 발전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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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모든 사람에게 그와 같은 조건(성별)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 법은 긴즈버그가 종종 말하듯이 자유롭게 너와 내가 되도록허용해야 한다. p.15

페미니즘에 대한 가장 간단하면서도 본질을 포착하는 설명은, 말로 토머스가 노래한 <자유롭게 너와 내가 되자>가 아닐까 싶다. ... 페미니즘 개념은 우리 모두 어떤 재능이 있건 각자의 재능을 자유롭게 개발할 수 있어야 하고 인위적인 장애물-단연코 하늘이 내린 것이 아닌 인간이 만든 장애물-에 가로막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p.20

법은 사회를 통치하기 위해 존재한다. 법은 사회를 위해 존재한다. 따라서 사회의 경험이 법에 반영되는 것(p.27)은 당연하다. 법이 사람들의 생활 방식에 관계없이 무미건조하게 논리적이라면, 그것은 성공적인 제도로 자리 잡지 못할 것이다. p.28

판사는 그날의 날씨가 아닌 시대의 기후를 고려해야 한다. p.41

우리의 법체계가 판사들의 다양한 배경과 경험으로 한층 풍요로워진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p.58

1959년에 컬럼비아대 로스쿨을 졸업했을 때 뉴욕의 로펌 중에서 나를 고용하려고 한 곳은 단 한군데도 없었다. ... 나는 세 가지 이유로 탈락이었다. 유대인이(p.65)고 여자인 데다 엄마였다. 첫 번째 이유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게 했고, 두 번째 이유는 양쪽 눈썹을 다 치켜세우게 했으며, 세 번째 이유는 볼 것도 없이 나를 탈락시켰다. p.66

아메리칸드림을 ...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 지하철에서 보니 놀랍도록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의 신조는 에 플루리부스 우눔 E Pluribus Unum” 여럿으로 이루어진 하나이고, 그 핵심은 서로의 다름을 용인하고 더 나아가 인정하면서 끝까지 힘을 합치는 것이다. p.78

보다 정의로운 세상을 향한 기나긴 투쟁 속에서 우리의 기억은 가장 강력한 무기 가운데 하나다. p.82

거짓과 싸우는 길은 진실을 내세우는 것이라고 어느 위대한 법률가가 말했다. 그래서 누군가 거짓을 말할 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이 아니에요. 사실은-그것이 무엇이든 간에-바로 이렇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최선의 견제는 거짓을 퍼뜨리는 사람들에 맞서고 그들을 비난하는 것이다. p.83

차별을 겪어본 사람은 타인이 겪는 차별에 공감하기 쉽다. 개인적 능력이나 사회에 대한 기여도와는 전혀 관계없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p.88

1960년대 후반에 되살아나 거세게 타오른 여성주의 운동은 여성의 바뀐 삶의 양식에 주목했다. 이렇게 사회 분위기가 바뀐 데에는 특히 두 가지 요소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 가내에서 재배하거나 생산하는 음식과 상품이 사실상 없어졌고 효과적인 피임법이 등장한 것이다. p.107남성과 여성은 대체 가능하지 않다. ... 어느 한쪽 성별의 부재는 경제적 혹은 인종적 집단이 배제될 때보다 배심원단의 공동체 대표성을 훨씬 더 떨어뜨릴 수 있다. p.117

1970년대 10년 동안 젠더 구분을 허무는 소송이 잇달아 제기되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나 때문이 아니다. 사회가 변했기 때문이다. 사회는 움직였고, 법원은 반응하는 기관이었다. 법원은 길을 이끌지는 못하지만 변화의 방향을 가속할 수는 있다. p.125

여성의 권리라는 표현은 다소 문제가 있다. 인간의 권리다. 법의 평등한 보호를 받을 모든 인간의 권리다. p.126

삶의 다른 시기에 서로를 보완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p.179

나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게 그렇게 많은데 어떻게 친구로 지낼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스캘리아 대법관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생각을 공격하지 사람을 공격하지 않아요. 선한 사람들이 나쁜 생각을 갖고 있기도 하지요. 그 둘을 구분할 수 없다면 다른 직업을 찾아(p.181)봐야 합니다. 판사가 되려고 하면 안 돼요. 적어도 합의체 판사는 안 됩니다.” p.181

살아 있는 한 배운다. p.185

(어론과 대중의) 왜곡에 대처하는 방법은 청중이 누구든(p.185) 분노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교사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진실을 보여줄 기회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곡임이 드러났을 때 그것에 항구적이고 효과적으로 대응할 ... 사람들이 청중 속에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p.186

삶의 길을 갈 때 발자국을 남겨라. 나를 위해 길을 닦은 사람들이 있었듯이 내 뒤를 따라올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 후세의 건강과 안녕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사회가 나아갈 수 있도록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다하라.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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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아트 컬러링북-한국교육방송공사] 그 사람을 위한 최고의 힐링 선물 | Memento 2020-04-19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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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펭아트 #컬러링북

한결 저
한국교육방송공사 | 2020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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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펭수를 즐겨보지는 않습니다. 간혹 그 분과 함께 보기는 했지만, 쉬이 질리는 그 분 성격에 영상을 더이상 찾아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펭수 아트북은 매우 좋아하더군요. 12색 색연필로는 펭수를 살리기 어렵다며 36색으로 새로 주문하기로 했습니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졌지만 너무나 만족해 하는 그 분을 보니 잘 산 것 같네요. 그 분의 힐링을 위해서 그정도는 감수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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