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블로그 | 랜덤블로그 쪽지
매혹과 곤혹의 크레바스 - 문학평론가 이정현의 문학일기
http://blog.yes24.com/21cbach
리스트 | RSS
태그 & 테마링 | 방명록
21cbach
Auf alles, was wir liebe! Auf unsere verlorenen Illusionen!
파워 문화 블로그

PowerCultureBlog with YES24 Since 2010

3기 책

프로필 쪽지 친구추가
6월 스타지수 : 별475
댓글알리미 비글 : 사용안함
전체보기
문학 칼럼
기억과 풍경
스크랩
나의 리뷰
기묘한 울림
창 밖에는 태양이 빛났다(내 인생의 책)
상처와 풍경
헤르메스의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나의 메모
너를 사랑하고도
태그
하얀역병 마크로풀로스의비밀 도롱뇽과의전쟁 기계문명 굴라크 도덕적인러시아 전후세대 히카리 기묘한아르바이트 치료탑행성
2022 / 06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월별보기
나의 친구
나의 친구들
최근 댓글
아 쉽지 않는 도서네요...평소 잘 .. 
솔제니친에 대해 자세하게 알게 된 귀.. 
감사합니다.... 
좋은 글, 아침부터 뭔가 업 된 듯하.. 
아이구...부지런히 왔다갔다 해야겠습.. 
새로운 글

전체보기
인류의 위기를 예지한 작가-카렐 차페크의 삶과 문학 | 문학 칼럼 2022-05-11 23:13
http://blog.yes24.com/document/16282898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영화 ‘터미네이터’(1984)는 인류의 암울한 미래를 그렸다. 자원을 낭비하고 서로 갈등만 일삼는 인간들이 쓸모없다고 판단한 ‘지능을 가진 기계’들이 인간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디스토피아 영화의 고전이 된 이 영화의 상상력은 감독의 독보적인 전유물이 아니다. 영화의 저변에 깔린 상상력은 체코가 낳은 위대한 작가 카렐 차페크(1890~1938)에게 빚지고 있다. 카렐 차페크는 최초로 ‘로봇’이라는 말을 사용한 작가였다. ‘로봇’은 체코어로 ‘노동’을 뜻하는 단어 ‘robota’에서 비롯됐다.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미래를 그린 차페크의 작품들은 두 차례 세계대전 사이에 창작됐다.

 

 체코 크로코노셰에서 태어난 카렐 차페크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지적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문학적인 풍토에서 성장했다. 뛰어난 이야기꾼인 외할머니도 손자들에게 속담, 민요, 전설 등을 알려줬다, 미술과 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형 요세프도 차페크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두 형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창작하면서 이야기에 어울리는 삽화를 그렸다. 두 사람의 공동작업은 차페크가 세계적인 작가가 된 이후에도 이어졌다. 

 

 1909년, 명문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차페크는 중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카렐 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차페크는 베를린 대학과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도 여러 과목을 수강했고,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학자가 되고 싶었던 차페크의 꿈은 전쟁으로 깨졌다. 1914년 발발한 1차 세계대전은 문명의 이기가 총동원된 전쟁이었다. 기관총, 독가스, 탱크, 잠수함, 폭격기가 등장했고, 과학은 더욱 효율적인 살상을 목표로 발전했다. 다행히도 척추 질환으로 징집을 피할 수 있었으나 철학도였던 차페크는 전쟁을 보면서 깊은 충격을 받았다. 유럽이 그토록 자랑했던 ‘이성에 근거한 확실성의 세계’는 허무하게 무너졌다. 동시에 1차 세계대전은 체코에 독립을 가져다줬고, 차페크가 유명 작가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됐다.

 

 1920년, 차페크는 희곡 『R.U.R: 로섬의 만능 로봇』을 발표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 희곡은 형 요세프와 공동작업을 거쳐 1921년에 프라하 국립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지능을 가진 로봇을 이용하여 인류가 노동에서 벗어난다는 작품의 설정은 당시 1920년대에는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과학자 ‘로섬’이 발명한 인공지능 로봇은 인간의 육체노동과 사무 활동까지 대신하고, 군대의 병사들도 로봇으로 채워진다. 로봇 제조회사는 크게 번성하고, 인간들은 로봇 없이는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점점 지능이 발달한 로봇은 반란을 일으켜 인류를 멸절시키고 이 과정에서 로봇 제작과정이 담긴 설계도도 불타버린다. 손으로 일하는 인간 ‘알퀴스트’만 살아남는다. 로봇들은 알퀴스트에게 로봇을 수리하고 해체하는 작업을 시키지만, 그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수리 불가로 로봇 세계 역시 위기에 빠지게 된다. 우연히 한 쌍의 젊은 로봇이 희생정신과 사랑의 감정을 습득하는 것을 발견한 알퀴스트는 그들을 새로운 아담과 이브로 명명한다. 대량생산과 맹목적인 과학기술, 전체주의를 비판한 이 희곡에는 암울한 미래를 향한 차페크의 경고가 담겨 있었다.

 

영화 ‘아이 로봇’의 한 장면. 차페크의 희곡은 오늘날 SF(공상과학)영화에 많은 영감을 줬다.  필자 제공

                      영화 <아이 로봇>의 한 장면

 

 그러나 상황은 계속 나빠지기만 했다. 1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으로 경제 대공황이 시작됐고, 유럽 곳곳에는 전체주의가 득세했다. 불평등과 차별, 인종주의와 전체주의가 만연한 이 시기에 차페크는 많은 희곡과 소설을 집필했다. 그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은 형 요세프와 함께 창작한 『곤충극장』이었다. 곤충의 세계를 여행하게 된 인간 관찰자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 연극은 곤충들의 습성을 통해 인간들의 부조리한 욕망을 풍자한다. 무가치한 똥에 일생을 다 바치는 쇠똥구리, 타자의 목숨과 재산을 빼앗아 연명하는 말벌들, 무분별한 성적 유희에 삶을 탕진하는 나비들, 조직적으로 전투를 벌이면서 살상에 중독된 전투개미 등 『곤충극장』에 등장하는 무수한 곤충들은 모두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을 닮았다.

 

곤충극장

 이 연극은 오늘날까지 체코 연극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품으로 남았다. 희극과 풍자, 부조리가 가득한 이 연극은 연출에 따라 무한 변주가 가능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인간을 곤충에 빗댄 『곤충극장』은 당대 체코의 인기 작가였던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대표작 『변신』(1916)의 설정과 흡사하지만, 카프카와는 달리 차페크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차페크는 불멸하는 존재의 지루한 삶을 다룬 희곡 『마크로풀로스의 비밀』(1922)에서 인간의 삶은 유한하고 나약하기에 더 아름답다고 역설했다.

 

 1930년대에 차페크는 현실로 다가온 전체주의의 위험을 자각하면서 소설 『도롱뇽과의 전쟁』(1936)과 희곡 『하얀 역병』(1937)을 집필했다. 탐욕스러운 자본가가 양식한 도롱뇽이 진화한 뒤 대량으로 증식하여 인간 세계를 위협하는 내용을 다룬 『도롱뇽과의 전쟁』은 명백히 독일 파시즘을 비판하고 있다. 『R.U.R: 로섬의 만능 로봇』의 문제의식을 확장한 이 작품의 설정은 오늘날까지 숱한 SF영화의 토대가 됐다.

도롱뇽과의 전쟁


 『하얀 역병』에는 치료 불가능한 전염병을 통치 수단으로 악용하는 독재자가 등장한다. 전염병으로 증폭한 대중들의 공포와 불만을 전쟁의 동력으로 삼는 독재자, 방역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타락한 의사들의 모습은 팬데믹을 겪는 현재의 풍경과도 비슷하다.

 1936년, 스웨덴 한림원은 몇 번이나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른 차페크에게 상을 주는 문제를 두고 고심했다. 정치적 중립성을 표방하던 한림원은 여러 작품에서 독일 파시즘을 강력하게 비판한 차페크에게 상을 주는 것을 꺼렸다. 한림원은 차페크에게 정치색이 짙지 않은 작품을 하나 집필하면 노벨문학상을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차페크는 즉각 거절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한 차페크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1938년 9월, 뮌헨 회담에서 독일의 체코 수데테란트 병합을 영국과 프랑스가 합의하자 차페크는 프라하 국제펜클럽 총회에서 독일의 침략을 경고하면서 뮌헨 회담에 항의하는 체코 작가 성명서를 집필했다. 그러자 독일 비밀경찰은 차페크를 ‘공공의 적 3번’으로 지목했다. 주변인들이 차페크에게 영국으로 망명할 것을 권했지만, 차페크는 체코에 남는 길을 선택했다. 전쟁이 임박한 1938년 12월, 차페크는 인플루엔자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다음 해 체코에 진주한 독일 비밀경찰은 차페크가 사망한 사실을 모르고 그의 집에 들이닥쳤다. 

  

 차페크의 형 요세프는 곧 체포되어 베르겐-벨젠(Bergen-Belsen) 강제수용소로 이송됐다. 요제프는 1945년 4월, 전쟁이 끝나기 불과 3주 전에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차페크의 작품들은 지금도 전혀 낡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여전히 불안하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체코에서 발행된 차페크 기념 우표. 필자 제공

                                  체코에서 발행한 카렐 차페크 우표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2) 트랙백(0)
이 포스트를 | 추천 10        
도덕적인러시아는가능한가? -솔제니친의 삶과 문학이 던진 질문 | 문학 칼럼 2022-04-28 13:33
http://blog.yes24.com/document/16229068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이사예비치 솔제니친(1918~2008)은 1918년 12월 11일 러시아인 아버지와 우크라이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아버지는 솔제니친이 태어나기 전 사망했다.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으나 솔제니친은 예술에 조예가 깊은 어머니의 영향으로 많은 책을 접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타이피스트로 일하면서 힘겹게 생계를 꾸렸다. 1924년 레닌이 사망하고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소비에트 사회는 숨 막히는 감시 체제로 바뀌었다. 학교에서는 자치 활동과 토론이 금지됐고 숱한 교사들이 숙청됐다. 솔제니친은 그런 교육에 반감을 품고 성장했다. 모든 독재 정권은 토론, 질문, 상상을 질색한다. 소비에트 사회에서 토론과 창작은 정부의 간섭을 받았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솔제니친은 대학 전공으로 물리와 수학을 선택했다.

 1941년 대학을 졸업한 솔제니친은 문학을 공부하고자 모스크바 예술대학에 진학했으나 그해 6월 22일 독일의 침공으로 전쟁이 시작됐다. 솔제니친은 장교 교육을 받고 포병장교로 임관됐다. 그가 속한 부대는 3년 넘게 레닌그라드, 백러시아, 폴란드 등지에서 격전을 벌였다. 장교로 복무하면서 솔제니친은 인명을 경시하는 소련 지도부의 잔혹함에 치를 떨었다. 병사들은 자신의 목숨으로 지뢰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스탈린의 고집 탓에 무모한 작전을 벌이다가 무수한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솔제니친은 반발심을 누르며 애국심 하나로 전쟁을 견뎠다. 뛰어난 전공을 세운 그는 ‘2급 조국 전쟁 훈장’과 ‘붉은 별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전쟁 막바지에 어머니가 사망하고, 뒤이어 운명을 바꿔 버린 사건이 벌어졌다. 1945년 2월 솔제니친은 반역 혐의로 체포됐다. 소련 정보부대는 솔제니친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스탈린을 “콧수염 달린 남자”라고 적은 사실을 적발했다. 그 표현 하나로 솔제니친은 강제 노동 8년형과 3년간의 유형을 선고받았다.

 

강제 수용소(Gulag)의 모습.  필자 제공

                                

 그는 1956년까지 무려 11년 동안 모스크바 근교의 칼루가 형무소, 오스탄키노에의 마르핀 형무소를 거쳐 카자흐스탄 강제 수용소(Gulag)에 감금됐다. 유형지에서 솔제니친은 조국의 치부를 목격했다. 짐승보다 못한 대우를 받으면서 숱한 수형자들이 죽어갔지만, 정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비판을 봉쇄한다는 명목 아래 수백 만의 목숨이 수용소에서 사라졌다.


 스탈린이 사망하고 흐루쇼프가 집권하자 소련 사회에는 잠시 ‘해빙기’가 찾아왔다. 수용소에서 풀려난 솔제니친은 자신의 체험을 소설로 기록했다. 1962년, 강제 수용소의 하루를 낱낱이 묘사한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발표하면서 솔제니친은 작가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국가의 테러와 탄압이 자행되는 수용소의 실상을 접한 독자들은 충격을 받았다. 곧 솔제니친의 소설에는 ‘굴라크(Gulag) 문학’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그러나 1964년 브레즈네프(1906~1982)가 집권하자 솔제니친은 다시 감시를 받게 됐다. 경찰은 솔제니친이 탈고한 소설 『수용소 군도』와 『암병동』의 원고를 압수했다. 그의 소설은 소련에서 출간되지 못하고, 은밀히 유통됐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1968년 솔제니친의 『암병동』이 마이크로필름에 담겨 서방으로 유출됐고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출간됐다. 이 소설은 소련 사회를 ‘거대한 병동’에 빗댄 작품이었다. 건조한 관료들과 무력한 환자들의 모습이 대조되는 ‘암병동’은 ‘수용소’와 등가적인 공간이다. 이 소설에서 솔제니친은 병동에 갇힌 다양한 인물들을 조명하면서 인간 사이의 신뢰와 사랑이 비극을 이겨낼 힘이라고 강조한다. 1970년 이 소설로 솔제니친은 노벨문학상을 받았으나 소련 정부는 시상식 참여를 막았다. 『닥터 지바고』로 195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이후 두 번째 불허였다.

 

수용소군도 1

 

 1973년 프랑스에서 『수용소군도』가 출간되자 솔제니친은 구금됐다. 그러자 서방 국가들의 석방 탄원이 이어졌다. 1974년, 소련 정부는 솔제니친을 해외로 추방했다. 솔제니친은 스위스에 머물다가 1976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소련 정부는 솔제니친의 작품을 도서관에서 퇴출하고, 그의 이름과 작품을 거론하는 것을 금지했다. 솔제니친은 망명 중에도 조국을 잊지 않았고, 다시 돌아갈 날을 18년간 손꼽아 기다렸다.

 

암 병동 1

 

 1991년 소비에트 연합이 붕괴했다. 구소련의 마지막 대통령 고르바초프(1931~)는 솔제니친의 시민권을 복원시키고, 반역 혐의를 기각했다. 1994년 마침내 솔제니친은 러시아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귀국했다. 하지만 솔제니친이 그토록 돌아오고 싶었던 조국 러시아 상황은 마치 ‘병동’과 같았다. 소비에트 연합에 속했던 국가들이 독립하면서 첨예한 갈등이 불거졌고, 귀국할 즈음 러시아와 체첸 사이에는 전쟁이 벌어졌다. 더구나 러시아 경제는 파탄 직전이었다. 러시아 남성은 알코올 중독과 고질적인 산업재해로 계속 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솔제니친은 러시아 전역을 순회하며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청취했다. 그는 평론집 『세기말의 러시아 문제』에 자신이 생각하는 러시아의 문제들을 기록했다.

 

오랜 망명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솔제니친의 모습. 필자 제공

 

 말년의 솔제니친은 러시아 사회를 향해 절실한 화두를 던졌다. “도덕적인 러시아는 가능한가?” 솔제니친은 러시아가 차르가 지배하던 시절부터 21세기까지 ‘제국’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다고 지적한다. 러시아가 소비에트 연합에서 분리된 국가들을 힘으로 지배하려는 경향도 그 후유증이라는 것이다.

 솔제니친은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은폐하고,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우크라이나가 겪은 희생을 무시한 결과 두 국가의 관계가 어긋났다고 비판하면서 과거의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훗날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질 비극을 예견하고 있었다.

 줄곧 ‘하나의 러시아’를 지향하는 솔제니친을 ‘편협한 민족주의자’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솔제니친의 민족주의는 푸틴이 지향하는 민족주의와는 차원이 다르다. 비판과 토론을 틀어막는 ‘위대한 국가(지도자)’라는 허상의 폭력에 파괴된 솔제니친의 삶이 그 증거다. 2007년 솔제니친은 푸틴과의 대담에서 자신이 걱정하는 조국의 미래를 얘기했으나 푸틴은 수용하지 않았다. 푸틴은 단지 ‘국가공로 훈장’을 수여했을 뿐이다. 평생 국가의 폭력에 시달렸던 그에게는 정말 아이러니한 훈장이었다. 이듬해 솔제니친은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유해는 모스크바의 돈스코이 수도원에 묻혔다. 그곳은 스탈린 시절 비밀경찰이 정치범들을 죽이고 화장하던 장소였다. ‘이반 데니소비치’에게 어울리는 마지막 선택이었다.

 

러시아에서 영화로 제작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의 한 장면.   필자 제공

                                   영화 <이반 데니소비치>의 한 장면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2) 트랙백(0)
이 포스트를 | 추천 12        
[한줄평]악착같은 장미들 | 기묘한 울림 2022-04-24 01:37
http://blog.yes24.com/document/16213787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평점

놀라운 작가의 탄생.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포스트를 | 추천 3        
‘전후 정신’을 잃지 않은 영원한 청년 작가 - 오에 겐자부로의 삶과 문학 | 문학 칼럼 2022-04-20 20:34
http://blog.yes24.com/document/16202769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오에 겐자부로는 1935년 일본 시골 에히메 현에서 출생했다.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는 제국주의 말기 절대적인 일왕 숭배교육과 군국주의 교육을 받으며 ‘애국 소년’으로 훈육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 민주주의 헌법과 교육기본법이 선포되었고, 일본 사회에는 ‘개인’이라는 단어가 유행했다. 군국주의 시절 일본인에게 육체는 개인의 소유가 아니었다. 개인의 육체는 국가에 소속되고 검열되면서 언제든지 동원될 수 있는 ‘자원’에 불과했다. 그는 군국주의 교육을 받은 마지막 세대이자 민주주의 이념과 자유 평화 교육을 받은 첫 번째 세대였다.

 

오에 겐자부로.  필자 제공

 

 동경대 불어과에 진학한 오에는 미군 비행장 확장을 반대하는 ‘스나가와’ 투쟁에 앞장서는 등 사회 운동에 활발히 참여했다. 1957년 3학년 재학 중 ‘동경대 신문’에 『기묘한 아르바이트』라는 단편소설을 게재하여 ‘오월제상’을 받았다. 이 소설에는 대학병원에서 개를 도살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세 청년이 등장한다. 돈을 벌고자 한창 개를 도살하던 세 청년은 황당한 상황에 내몰린다. 도살 작업을 돕던 백정이 개고기 브로커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병원 측은 황급히 개 도살을 취소하고, 세 청년은 돈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허망하게 작업장을 떠나는 청년들은 자신들이 죽음을 앞두고도 ‘짖지 않는 개’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짖지 않는 개’는 당시 6·25전쟁을 계기로 벌어들인 달러로 소비와 향락에 젖어 과거를 점차 망각하는 일본인들을 풍자한 은유였다.

 

 히라노 겐, 에토 준 등 유명한 평론가들의 격찬 속에 작가로 데뷔한 오에는 『사자의 잘난 척』,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 『사육』 등 잇따라 문제작을 발표했다. 모두 전쟁을 쉽게 망각하고 과거를 봉인하는 일본을 비판하는 작품이었다. 1958년, 『사육』으로 일본에서 제일 권위 있는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받으면서 오에는 20대에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그는 또래의 젊은 작가들과 ‘젊은 일본의 모임’을 결성하여 과거를 망각하는 일본 사회를 비판했다.

 

 그러나 일본 젊은 작가들의 의식과는 달리 일본 사회는 점차 우경화되었다. 1960년, 17살 일본 고등학생이 도쿄 전철역에서 일본 사회당 아사누마 이네지로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일왕을 숭배하는 사상에 빠진 청소년이 과거 전쟁 범죄 반성을 촉구하는 진보당 정치인을 살해한 이 사건으로 일본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다. 이듬해 오에는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중편소설 『세븐틴』, 『정치소년 죽다』를 발표했다. 이 소설은 열등감에 빠진 고등학생이 일왕 찬양 집회에 참여하면서 자존감을 되찾았다고 착각하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었다. 이 소설로 오에는 일본 극우세력들의 살해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오에 겐자부로의 장편소설 『개인적인 체험』(을유문화사, 2009).

 

이 시기 오에는 또 다른 고통을 겪었다. 1963년에 장남 히카리를 얻었지만, 아이는 두개골에 이상을 안고 있었다. 머리의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으면서 아이는 정상적인 지능을 잃고 말았다. 오에는 이 시기의 경험을 토대로 장편소설 『개인적인 체험』(1964)을 썼다. 그는 기형아의 아버지로서 이 소설을 쓰면서 원폭 후유증으로 태어난 무수한 기형아들을 떠올렸다. 이 시기의 고통을 겪으면서 오에는 원폭 생존자들을 인터뷰한 르포집 『히로시마 노트』(1965)를 출간했다.

 

오에 겐자부로와 아들 히카리. 필자 제공
  오에 겐자부로와 그의 아들 히카리
 

 극심한 불행을 겪었으면서도 그는 자기 연민이라는 늪에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의 고통을 응시하면서 ‘공존’의 의미를 사유하는 계기로 삼았다. ‘공존’이라는 화두는 억압받는 자들과의 연대로 이어졌다. 1974년, 오에는 소련 사회의 경직성을 비판한 소설로 추방당한 소련 작가 솔제니친(1918~2008)의 석방 운동에 참여했고, 1975년에는 김지하 시인 탄압에 항의하여 도쿄의 긴자에서 48시간 단식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1982년에는 유럽 작가들과 연합하여 ‘핵전쟁 위기를 호소하는 문인들의 성명’에 참여했고, 1986년 소련에서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나자 핵전쟁 이후를 다룬 디스토피아 SF소설 『치료탑 행성』(1991)을 발표했다.

 

1994년, 오에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 이후 일본 작가로서는 두 번째였다. 그는 노벨상 시상식장에서 일본이 ‘전쟁 포기 약속’을 했던 ‘헌법 9조’를 언급하면서 한국, 중국 등 이웃 나라에 피해를 준 사실에 유감을 표명했다. 그리고 “일본이 저지른 과오를 기억하는 자신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연설 ‘아름다운 일본과 나’에 목소리를 합할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애매한 일본과 나’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노벨상 수상 직후 일왕이 문화훈장과 문화공로상을 직접 수여하고자 했으나 오에는 이를 거절했다. ‘전후 민주주의자’로서 민주주의에 앞서는 어떤 권위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노년에 접어들어서도 오에는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2004년 동료 작가 가토 슈이치(1919~2008)와 쓰루미 슌스케(1922~2015)와 함께 ‘9조회’를 결성하여 헌법을 개정하려는 일본 정부를 막아섰다. 2011년에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가 일어나자 오에는 탈원전 운동을 주도하면서 ‘사요나라 원전 집회’의 발기인으로 나섰다. 2015년 3월, 한국을 방문한 오에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향해 “일본이 얼마만큼 무서운 범죄를 저질렀는가를 상상조차 못 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일본이 아시아에서 저지른 범죄를 충분히 사죄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오에 겐자부로의 중·단편집(현대문학, 2016).

 

 인간은 자신이 살아갈 시대를 선택하지 못한다. 인간이 감당해야 하는 비극은 모두 여기서 비롯된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감당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한다. 오에 역시 자신의 시대를 선택할 수 없었으나 망각이라는 손쉬운 도피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10대에 자각한 ‘부전(不戰)’과 민주주의 헌법에 근거한 ‘전후의 시대정신’을 잊지 않았다. 장애인 아들을 평생 돌봐야 하는 숙명 속에서도 오에는 삶을 한없이 긍정했다. 인간의 ‘회복’은 어떻게 가능한가. 오에는 ‘상상’과 ‘습관’이라고 말한다.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지 못할 때 인간은 무심하고 잔혹해진다. 그는 ‘쓰는 습관’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짐작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러면서 그는 마침내 자신만의 좌우명을 획득했다. 그것은 마크 트웨인의 소설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 나오는 대사다. 허클베리 핀은 도망친 흑인 노예인 친구 짐을 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외친다. “지옥은 내가 간다.”

 오에는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늘 이 말을 떠올리면서 더 고된 길로 나아갔다고 회고했다. 이 선택들이 그를 위대한 작가로 만들었다. 한편 그의 아들 히카리는 장애를 딛고 작곡가로 성장했다. ‘인간은 회복하는 존재’라는 믿음을 확인하고 싶을 때마다 오에 겐자부로의 책을 펼친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포스트를 | 추천 6        
냉전과 베를린: 상봉 꿈꾸며 뚫은 수많은 탈출구…장벽 무너뜨린 힘 | 문학 칼럼 2022-04-20 00:32
테마링
http://blog.yes24.com/document/16200298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제2차 세계대전 때 힘을 합쳤던 미·소 양국은 종전과 함께 급격히 등을 돌렸다. 소련군의 ‘베를린 봉쇄(1948.6~1949.5)’ 이후 독일의 분단은 고착됐고 6·25전쟁을 계기로 동·서독의 군대가 재건됐다. 소련이 장악한 지역에 위치한 베를린에 주둔한 미·영·프 군대는 동독 정부와 소련에 큰 걸림돌이었다. 더구나 매주 동독 시민 수만 명의 탈출이 이어지자 소련 서기장 흐루쇼프는 베를린을 서구 군대가 없는 ‘자유도시’로 선언하는 것과 베를린의 교통을 동독 정부가 통제하는 것을 골자로 한 ‘베를린 최후통첩’(1958.11.27)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1959년 제네바에서 4대 승전국은 평화회담을 개최했으나 성과가 없었고 베를린에서는 적대적인 첩보전이 가열됐다. 1961년 아이젠하워의 후임자인 케네디 대통령은 빈에서 열린 회담에서 흐루쇼프에게 미국은 베를린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국과 소련 사이에 견제와 암묵적 협상이 오가는 동안 동독 주민들의 탈출이 계속되자 동독의 울브리히트 서기장은 흐루쇼프의 동의를 얻어 서베를린 주변을 장벽으로 봉쇄했다. 베를린은 순식간에 양분되고 말았다.

 강대국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이데올로기 대립과는 달리 일반 시민들의 삶은 갑자기 불편해지고 말았다. 기존에는 4대 강국의 관할 지역만 나뉘었을 뿐 자유로운 통행이 가능했지만, 장벽이 생긴 이후로는 통행과 교류가 완전히 끊겨버렸고 장벽을 넘던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사살됐다. 장벽은 도로 하나, 건물 하나 사이를 관통하면서 세워졌고, 많은 연인과 가족들이 강제로 이별을 겪어야 했다.

 

크리스타 볼프의 소설 『나누어진 하늘』(전영애 옮김, 민음사, 2012) 표지.

 

동독 작가 크리스타 볼프의 소설 『나누어진 하늘(Der Geteilte Himmel)』(1963)은 이 시기가 배경이다. 서독의 과학자 만프레드와 사랑에 빠진 19세 동독 소녀 리타는 베를린 장벽으로 인해 이별하게 된다. 이 소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기에 리타가 공장과 사범학교에서 이상적인 사회주의 국가의 일원으로 성장하면서 이별을 극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크리스타 볼프는 소설 속에서 리타의 입을 빌려 경제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서독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고 있지만, 구호로만 평등을 외치는 동독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어떤 체제든 모순과 부조리가 존재하는 한계와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강요한 상처를 응시한 이 작품은 동·서독에서 모두 화제가 됐고 오늘날까지 독일 분단을 상징하는 대표작으로 남았다.

현실의 ‘리타’와 ‘만프레드’는 단지 서로를 그리워하기만 하지 않았다. 그들은 행동했다. 1964년 베를린으로 유학을 온 대학생 ‘알투르 짐머’는 분단의 비극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지 3년 정도가 지난 그 시기에 많은 동독 시민들이 장벽을 넘다가 목숨을 잃었고, 장벽을 감시하는 동독 군대의 감시탑과 초소는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분단의 상징이었던 베를린의 과거와 현재를 다룬 연구서 『베를린, 베를린』 표지.

 

알투르 짐머는 고향 친구들의 소개로 ‘터널을 파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동독에서 탈출하려는 친구들과 가족, 연인들을 위해 곡괭이와 삽을 들었다. 의기투합한 20대 청년들은 조잡한 장비로 터널을 파기 시작했다. 수직으로 12~15m를 판 다음 직선으로 150m 정도를 뚫고 나가는 이 작업은 밤낮으로 이어졌다. 중장비를 사용할 수 없었기에 작은 삽과 망치, 소형 곡괭이로 작업했고, 터널에서 나온 흙더미를 이웃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지하실에 쌓았다. 산소펌프를 이용해 터널 안으로 산소까지 공급하면서 그들은 마침내 동베를린 지역으로 뚫고 나가는 데 성공했다.

가로 세로 1~2m에 불과한 그 좁은 터널을 이용해서 57명의 동독인들이 서베를린으로 탈출했다. 이 터널은 곧 발각됐고 동독 군대는 터널을 폭파했다. 그러나 알투르 짐머와 같은 사람들은 더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유지된 28년 동안 70개 이상의 터널이 굴착됐고, 이 터널을 이용해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탈출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베를린의 ‘체크포인트찰리 박물관’에는 당시 대학생들이 사용했던 장비들이 전시돼 있다.

 

1970년께 만들어진 동서베를린을 잇는 비밀 지하터널 모습.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앞두고 일반에 공개됐다.  연합뉴스

 

이 터널들은 미국과 영국 정보부가 도청을 목적으로 뚫은 터널과는 전혀 달랐다. 민간인들은 적대국의 정보를 캐기 위해서가 아니라 친구와 연인, 가족을 위해 터널을 뚫었다. 그들을 움직인 것은 냉전질서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오직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 ‘마음’들은 훗날 ‘필연적인 우연’을 낳았다.

냉전 시기에도 동·서독의 교류는 계속 이어졌다. 서독 정부는 동독의 대서방 무역이 어려움에 처하자 스윙(Swing)이라는 무이자 장기차관을 제공했다. 이런 재정 지원을 하면서 동독 내 정치범들을 석방하도록 설득하는 등 동독의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위해 선의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우편이 오가게 되고, 방송교류도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동독 시민들은 여행 자유화를 요구했지만, 동독 정부는 계속 무시했다. 그러다가 1989년 11월 9일 동독 정치국 대변인으로 갓 임명된 귄터 샤보브스키의 유명한 ‘말실수’가 터졌다. 동독인들은 언제쯤 서유럽으로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샤보브스키는 무심코 “지금 당장”이라고 답했다. 동독 정부의 여행자유화 조치는 단지 여권 발급 기간을 단축하는 정도에 불과했고 시행 시기도 다음날부터였다.

그러나 방송을 본 수많은 동독 시민들이 장벽으로 몰려왔다. 국경수비대는 수많은 시민을 통제할 수 없었고 무력 사용을 포기했다. 동독 시민들이 곡괭이와 망치로 장벽을 부수기 시작하자 서베를린의 시민들도 가세했고 그날 밤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다. 터널을 굴착했던 사람들의 마음과 냉전적 논리에 휘둘리지 않은 서독 정부의 일관적인 포용정책이 역사적 우연을 가능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최근 남과 북 사이의 긴장이 다시 고조되면서 적대적 언어가 오가고 있다. 우리에게도 독일과 같은 ‘필연적인 우연’은 가능할까? 물론 독일과 한반도의 상황은 분명 다르다. 하지만 냉전 질서와 이데올로기 대립에 굴하지 않고 터널을 굴착했던 사람들의 마음과 한반도의 평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분단 베를린의 상징이 된 사진. 1961년 자유를 위해 동베를린을 탈출했던 ‘콘라트 슈만(Conrad Schumann)’이 서베를린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다.  필자 제공

분단 베를린의 상징이 된 사진. 1961년 자유를 위해 동베를린을 탈출했던 ‘콘라트 슈만(Conrad Schumann)’이 서베를린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포스트를 | 추천 2        
1 2 3 4 5 6 7 8 9 10
진행중인 이벤트
나의 북마크
이벤트 세상
트랙백이 달린 글
내용이 없습니다.
스크랩이 많은 글
내용이 없습니다.
많이 본 글
오늘 7 | 전체 210351
2007-06-09 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