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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조는 저자가, 밑줄은 독자가' | My Story 2004-02-26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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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Italics are mine' . 

 

 '이탤릭 강조는 내가.'

 

 

상황1.

 

 번역서, 특히 연구서나 이론서의 번역책일 경우, 위와 같이 본문이 시작하기 전 옆 페이지에 조그마한 글씨로 '일러두기' 목록들이 적혀있곤 한다. 

 

 '본문의 역주는 모두 번역자가, 저자의 원주일 경우 (원주)로 구분함.

  원문에서 저자가 강조한 부분은 일괄적으로 고딕체로 표기하고, 그 외에 본문에서 괄호에 의한 강조나 중요 용어 혹은 인용어구는 < >로 묶음. ' ... 등등...

 

상황2.

 

 라틴문자 계열의 활자체계에 있어, 보통 이탤릭 체는 강조나, 외래어, 특정 작품이나 잡지명이나 상표명을 표기할 때 쓰이곤 한다. .

 

 

 

 '이탤릭 체 강조는 내가'.

 이 문장은 위 두 가지 상황이 결합된 평범하면서도 기묘한 문장이다.

 게다가 이 문장이 그냥 어느 책 한 부분에 나오는 구절이 아니라, 어느 작가의 자서전 제목이라면... 

  

 상황을 더 미궁으로 빠뜨리기 전에, 일단 진실을 밝혀보기로 한다.

 이 블로그의 제목이자,  요즘 나의 독서 태도 모토이기도 한, 이 문장은.

 러시아 태생으로 프랑스 망명해 러시아어와 프랑스어로 소설과 시와 문학평론을 쓴 20세기 초 여류 작가, 니나 베르베로바 의 자서전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이 작가를 설명하려면, 러시아 혁명사는 물론, 러시아 문학사, 나아가 20세기 초 문학사까지 나와야 할 판이니,..

 

20세기 초 기묘한 장르의 단편 소설을 많이 남긴 소설가,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로 블록에 대한 뛰어난 평론가로, 그리고 문제의 문장을 제목으로 한 자서전의 작가로서..세계 문학사에 이름이 거론되는 여류작가라고만 언급하고 여기선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자신의 자서전 제목을 '이탤릭 강조는 나' 라고 지은 그녀는 고국 러시아를 떠나 프랑스에서 자신의 인생과 문학을 이어가야 했던 수많은 망명작가들 중에 하나였다. 그녀의 단편 소설들을 읽어보면, 어느정도 그녀의 인생을 짐작하게 하는 러시아 망명객들의 실상, 그중에서도 비참한 경제적, 정신적 공황을 겪어야 하는 러시아 여성들이 주인공으로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런 그녀의 인생에 있어, 타국, 외래어, 외국어의 문제는 가장 정점에 놓여 있던 가장 절실한 문제가 아니었을까. 이방인일 뿐 아니라, '언어'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문학가로서, 낯선 땅, 낯선 이웃들, 낯선 언어는 그녀의 존재 조건, 예술관 까지 뒤바꾸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절대적인 문제였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일종의 외래어, 즉 평범한 활자체 속의 낯선 이탤릭체로 인식했을 가능성을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언어가, 즉 문자와 말이 곧 인생 그 자체인 작가가, 자신의 인생 그자체라 할 수 있는 자서전을 쓰면서, -즉 언어로 자신을 표현해 내면서- '이탤릭 체는 나' 라고 제목을 붙인 배경에는 아마, 이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 그렇다면, 나는 왜 이 제목을 블로그 제목으로 달았을까.

   그건 일종의 내 독서 태도와 관련이 있다 할 수 있다.

   

예전 나의 책읽기는, 그저 감탄, 무조건적인 숭배, 책 물신주의..에 가까웠다.

    그래서,, 책을 읽고 리뷰나 감상을 쓴다는 것 자체에도 그냥 회의적이었고, 그저 내가 책을 읽는 그 순간 감탄하고, 느끼면 그만이지, .. 또 이 엄청난 감동을 과연 내가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자괴감마저 있었다.

  

  일단, 책에 펜을 들어 밑줄을 치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 다음엔 책 한 귀퉁이를 접어 보았고,

  그 다음엔 여러 표시와 감상들을 적어보았다.

  책은 좀 너덜너덜해졌지만, 다음에 펼칠 때 묘한 즐거움이 있었다.

  익숙한 책장의 느낌, 손 떼가 묻어 녹록해진 책등과 책장들에 정이 가기 시작했?

  그 다음엔 읽다가 문득 우연히 만나게 된 멋진 그림이나, 누군가에게 받은 쪽지, 책을 읽다 덮고 보러나간 영화의 영화표 등을 중간중간에 껴놓기 까지 되었다.

 

 그렇게 차츰.. 각각의 책은.. 나의 일상사의 기록이 되어갔고, 나의 작고 하찮지만,, 즐거운 문학소사의 박물지들이 되어갔다.

 

 아직도, 비싼 원서나.. 너무 좋아하는 작가의 책인 경우.. 손 대기가 꺼려지기도 하지만,

 더 애무하고, 더 많이 들여다보고, 사랑을 표현하고.. 그러는 게 연인과의 애정을 나날이 즐겁게 부풀어가는 하나의 방법이 되듯.. 책에게도 그럴 것이라. 책도 나에게 그래줄 것이라.. 생각한다.

 

 

 '예브게니 오네긴' 에서의 따찌아나도.. 오네긴의 서가를 매일 찾아가 그가 읽은 책들을 읽고, 그의 흔적들을 들여다보고, 그가 어느부분에서 고민을 하고, 그가 어느 부분에 분개했는지를 유심히 살피며, 그를 비로소 이해하게 되고, 더 사랑하게 되고, 나아가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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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보석함 | 나의 리뷰 2004-02-25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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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가난한 사람들

모리츠 지그몬드 등저
문학과지성사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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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레 케르테스가 노벨상을 탄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이 조그만 '헝가리 단편선' 선집에서 만난 많은 헝가리 작가들을 떠올렸다. 9.11의 여파다, 유태계 입김의 결과다 어쩌다 말이 많았지만, 나는 그가 이 단편선의 작가들의 후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케르테스의 수상을 마음 속으로 응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헝가리 문학이 늦게 나마 전세계적으로 읽히게 될 것이고, 무슨 수상작 출간을 돗대기 시장처럼 해대는 우리나라에서도 더많은 헝가리 작품들이 번역될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던 것이다.

 

 손 안에 들어오는 작은 책으로 이국의 아름다운 단편들을 읽는다는 것. 그것은 대단한 매혹이였다. 이 작고 아름다운 책을 손에 끼고 등하교 길에 읽던 나는 무슨 보석함을 품고 있는 듯, 그렇게 내내 가슴이 뛰고 입가는 미소로 무늬가 지고 있었다.

 

 이 보석함에 든 17개의 단편 조각들 중에 과연 어느 작품을 뽑아 소개를 해야할까?

 

 이건 마치 '가난한 아버지가 9명의 귀여운 아이들 중에 누구를, 9개 방을 가지고 홀로 윗층에 살고 있는 노인에게 보내야 하는 지 고르는 것(요커이 모르, <아홉 명 중에 누구를?>)' 만큼이나 난처하고, 어려운 문제이다. ('야노시는 아빠와 이름이 같으니 안되고, 요지는 죽은 엄마를 닮았으니 안되고, 펄리커는 제 어미가 제일 아끼던 아이니까 안되고..')

 

 과연, 어떻게 각각 다른 결정과 빛을 가지고 빛나고 있는 이 단편들을 잘 설명해 낼 수 있을까. 

'신들은 가난한 사람들도 깔깔 웃을 수 있도록 (세상을) 잘 만들어 놓으셨다.' (모리츠 지그몬드, <7푼>).

 이 책에 소개된 작가들은, 마음과 손에 하찮은 것만 쥐고 있던 사람들의 손에도 그 누구도 쉽게 뺏을 수 없는 작은 보석함을 쥐어줄 만큼 뛰어난 보석 세공가들이다.

 

 이 단편집에는 전쟁도, 가난도, 슬픔도, 거짓도 많이 담겨 있지만, '오막살이에서는 울음 소리와 탄식 소리만 흘러나오는 게 아니라, 가슴속에서 터져나오는 웃음 소리도 자주 들리(<7푼>)'듯, 세상에는 아름답고, 행복하고,달콤한 것들도 많이 숨어 있다는 것을 조근조근 속삭여준다.

 

'비겁하면서도 달콤한 공상' ,'누군가의 따귀를 아무 이유 없이 갈귀고 싶은 욕망', '오만하고, 무자비하고, 장난스런 그들의 젊음이 만들어낸 괴상한' (코스톨라니 데죄, <따뀌>) 생각... 이런 것들로 똘똘 뭉친 채 전투를 하듯 뾰루뚱한 얼굴로 앉아 있던 지하철에서, '겨울의 이른 아침이나, 여름의 늦은 저녁에', 문득 포도를 주워 먹던 손가락 마냥 물이 든 노을을 발견할 때, 내 앞에 서서 흔들리던 사람의 작은 한숨에 내 머리카락이 날릴 때 같은.. 그런 아주 사소하면서도 뭉클한 감정의 삼투랄까. 이렇게 삼투된 감정들은 그 가벼운 밀도에도 불구하고, 오래오래 마음에 물들어 쉽게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남긴다.

 

 '성당도 없고, 신부님도 없는' 숲 속의 가난한 도둑들에게는 숲이 곧 성당이고, 하느님 자신이 곧 신부님이 되어주는(터마시 아론, '교회 안의 솔개')' 그런 공평한 마법이 이렇게 소소한 나에게도 언젠가 찾아오리라는 주문.

 

'그들이 착한 아이들이 된다면, 언젠가 그가 와서 커튼을 올려줄 것이다. 아마도 그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쉿! (머이테니 미하이, '특별한 선물')' 그때까지 나도 나의 이 작은 헝가리 보석함이 내게 보여준 세계를 다 말해 주지 못하리라. 여러분이 그 보석함을 손수 열때까지, 쉿!  [2003-07-25]

 

 



 

인용: '아이들이 벽에 낙서를 한다. 오후가 되자 그들 속으로 스멀스멀 악마가 스며들고, 아이들은 온통 덜거덕거리는 해골의 수염이 난 모습을 그려댔다. 제일 어린 아이가 가장 열심히 여기저기로 다니며 그림을 덧칠했다. 수염 난 말들의 입과 사자의 입에도 담배 파이프를 그려주었다. 파이프의 어지러운 담배 연기가 청회색 벽 위에 맴돌고 있었다. 방의 한구석이 기이하고 불쾌한 꿈처럼 되었다.'
인용출처: --- '특멸한 선물' 중에서, p. 209

염색공예가이자 박제 전문가이며 시체 전문 분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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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홉 풍의 전쟁 푸가 | 나의 리뷰 2004-02-25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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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백위군

미하일 불가꼬프
열린책들 | 1996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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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짐작이 가는 대로 이 소설은 소위 말해 역사 소설, 그것도 전쟁을 다룬 역사 소설이다. 그것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별 관심없어 하는 러시아 혁명 전후 한 시기에 러시아 내에서 일어난 내전이 배경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좀 이상하다. 분명 주인공들은 직간접적으로 전쟁과 관련되어 있고, 그들 중 남자는 거의 다 내전에 참전 중이고, 전쟁 장면도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마치 체홉의 희곡을 읽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좀더 정확히 얘기하면, 스따니슬랍스끼 풍으로 연출된 체홉 원작의 연극을 보고 있는 듯하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그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매력적인 인물들이 나른한 어느 여름날, 시골의 여름 별장에 모여들어 서로 농담하고, 애정을 나누다가 어느 순간 서로의 옛 기억과 현재의 열정이 부딪쳐 갈등하고 토라지고 울먹이는 그 체홉 말이다. 여름 한낮의 일사병 같은 그런, 짧은 순간이지만 치명적이고 처연한 아픔. 결국 그 아픔을 상대방도 똑같이 갖고 있음을 발견하고, 위로인지 슬픔인지 모를 마음으로 다시 서로의 어깨에 기대 결코 길지 않을 남은 인생을 살겠노라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막이 내리는 그 체홉 말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 속 인물들은 비록 전쟁에 안팎으로 휘말려 있지만, 우리가 쉽게 짐작하듯 ''투사''내지는 비참한 희생자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들 하나하나는 놀랄 만큼 복잡미묘한 내면을 가졌고, 때때로 사랑스런 악당이고 풋내기였다가 어느 순간엔 깊은 사색과 지적인 대화를 나누는 그야말로 너무나 매력적인 인물들이다.

 

 이야기는 뚜르빈 가의 남매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며 주요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는 뚜르빈 가의 저택이다. 마치 연극 무대처럼 뚜르빈 가의 형제들과 그 동료들은 번갈아 가며 전쟁터에서 이 저택으로 돌아오거나 다니러 온다. 그 중심에는 뚜르빈 가의 여주인이자, 주인공 알렉쎄이 뚜르빈의 여동생 엘레나가 마치 구원의 상징처럼 자리하고, 전쟁과 그 전쟁으로 파괴되는 가치를 상징하는 여러 배경들이 마치 푸가 악보처럼 반복해서 묘사되며 리듬을 만든다.

 

 사실 이 작품은 러시아 내전의 배경과 여러 민족들의 역사, 러시아 문화에서 여러 이미지가 상징하는 바를 잘 알고 있어야 이해가 가능한 부분들이 많은 듯하다. 그러나, 문학이 역사와 다른 점은 사실관계나 지식보다는 개인의 감수성과 상상력이 이해의 폭을 보다 확장시킨다는 점일 것이다.

 역사책으로 1페이지 이내로 요약되는 역사의 한 토막이 이렇게 아름답고 풍부한 내면을 가진 인물들이 가득한 소설 한 편으로 다시 살아나는 걸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역사보다 문학이, 역사가보다 소설가가 더 시대를 정확히 보여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그 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정신세계, 시대를 받아들이는 감수성이나 시대가 인생에 미치는 파급들은 사람마다 얼마나 다채로운 파장으로 각기 다른 빛깔이었을까. 역사가는 한 사람의 일관된 시선으로 가감법적인 서술을 해나간다. 소설가는 수많은 내면과 정신세계를 상상력으로 창조해 각각의 예 속에서 각기 다른 결론과 인생을 중첩해 보여준다. A, B, C, 그리고 기타 등등...지금 이 소설을 읽고 있는 당신이라면 어땠을까? 이런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이도 소설가 뿐이다. 시대를 해석하는 데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을 수 있음을 우리는 소설을 읽으며 깨닫게 되는 것이다. 역사가와 소설가, 과연 누가 더 객관적인 것일까?

 리뷰가 괜히 무겁게 흘러 책선전을 별로 못한 듯하다. :-) 전쟁소설 좋아하시는 분들, 이 소설 전쟁 소설 맞다. 전쟁 장면은 정말 손에 땀이 날 정도로 조마조마 흥訣平幣求? 포탄이 터지는 껌껌한 도시에서 적과 추격전을 펼치는 장면이라든지, 장군들이 어린 학사장교들에게 계급장을 뜯고 후퇴를 명하는 장면 등등은 정말 압권이며, 배신자들이나 첩자들과의 두뇌싸움 또한 가슴을 졸이게 만든다.

 

 언뜻 소설의 분위기가 와닿지 않으면, <닥터 지바고>를 떠올려 보면 될 것이다. <닥터 지바고> 처럼 이 소설도 아름다운(?) 장례식 장면으로 시작하고, 또 그렇게 거창하지는 않지만 슬프고 사랑스런 로맨스도 등장한다. 문체는 다르지만, 문장이 아름답기는 이 작가도 빠스떼르낙 못지 않다. 거칠게 얘기해서 '빠스떼르낙을 체홉식으로 각색한 장편소설' 정도가 되려나?

 

 이 소설은 또한 곳곳에 여러 반복되는 상징과 인물들이 숨어 있거나, 갑자기 ''쓱 지나가고, 튀어나왔다 사라지고'' 그러니, 꼼꼼하게 표시해가면서 읽으면, 마치 무슨 숨은그림 찾기나 퍼즐맞추기 놀이 내지는 스파이 맞추기 게임을 하는 듯한 재미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주인공들 주변 군상들의 광대짓을 주목하시라! 마치 퍼펫 쇼의 인형들처럼 묘사되는 그 그로테스크한 인물들의 매력은 정말이지 디킨즈 소설 속 광대들 저리가라니.. :)

 이 소설은 처음 손에 잡기까지가 망설여지지, 첫 문단을 읽는 순간 자세를 고쳐 안고 손가락엔 펜을  쥐고 밤새고 가슴 떨려하며 읽게 되는 그런 소설이다. 꼬박 밤을 새다가 문득 새벽 빛에 비춰본 당신의 책은 수많은 밑줄과 손톱 자국, 여러 모양의 감탄 부호들, 뜻모를 기호들, 홀린 듯 베껴 쓴 시적인 구절들, 그리고 당신의 탄식과 웃음, 눈물 자국들로 많이 낡고 두꺼워져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만 책을 덮어, 위로인지 슬픔인지 모를 마음으로 서로의 어깨에 기대 결코 길지 않을 남은 인생을 살겠노라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그들의 막을 그만 내려주면 될 것이다.  
[2003-07-26]

 


 

인용: ''어둠침침한 하늘 어딘가의 틈바구니로 날아가 버린 신은 아무 말이 없었고, 니꼴까 자신은 과연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항상 그런대로 필요한 것들이며, 또 항상 최선이기만 한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

 

'그러나 그 칼은 그렇게 무섭지 않았다. 모든 것이 -고난, 고통, 피, 굶주림과 전염병 - 지나갔다. 그 칼도 역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별들은 우리의 존재와 우리 행위의 그림자가 이 땅에서 사라질 때에도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별을 향해 눈을 돌리지 않는 것일까? 왜? ''

인용출처: --- 첫부분과 맨마지막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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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홉 풍의 전쟁 푸가 | 기본 카테고리 2003-07-26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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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백위군

미하일 불가꼬프
열린책들 | 1996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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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짐작이 가는 대로 이 소설은 소위 말해 역사 소설, 그것도 전쟁을 다룬 역사 소설이다. 그것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별 관심없어 하는 러시아 혁명 전후 한 시기에 러시아 내에서 일어난 내전이 배경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좀 이상하다. 분명 주인공들은 직간접적으로 전쟁과 관련되어 있고, 그들 중 남자는 거의 다 내전에 참전 중이고, 전쟁 장면도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마치 체홉의 희곡을 읽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좀더 정확히 얘기하면, 스따니슬랍스끼 풍으로 연출된 체홉 원작의 연극을 보고 있는 듯하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그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매력적인 인물들이 나른한 어느 여름날, 시골의 여름 별장에 모여들어 서로 농담하고, 애정을 나누다가 어느 순간 서로의 옛 기억과 현재의 열정이 부딪쳐 갈등하고 토라지고 울먹이는 그 체홉 말이다. 여름 한낮의 일사병 같은 그런, 짧은 순간이지만 치명적이고 처연한 아픔. 결국 그 아픔을 상대방도 똑같이 갖고 있음을 발견하고, 위로인지 슬픔인지 모를 마음으로 다시 서로의 어깨에 기대 결코 길지 않을 남은 인생을 살겠노라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막이 내리는 그 체홉 말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 속 인물들은 비록 전쟁에 안팎으로 휘말려 있지만, 우리가 쉽게 짐작하듯 ''투사''내지는 비참한 희생자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들 하나하나는 놀랄 만큼 복잡미묘한 내면을 가졌고, 때때로 사랑스런 악당이고 풋내기였다가 어느 순간엔 깊은 사색과 지적인 대화를 나누는 그야말로 너무나 매력적인 인물들이다. 이야기는 뚜르빈 가의 남매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며 주요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는 뚜르빈 가의 저택이다. 마치 연극 무대처럼 뚜르빈 가의 형제들과 그 동료들은 번갈아 가며 전쟁터에서 이 저택으로 돌아오거나 다니러 온다. 그 중심에는 뚜르빈 가의 여주인이자, 주인공 알렉쎄이 뚜르빈의 여동생 엘레나가 마치 구원의 상징처럼 자리하고, 전쟁과 그 전쟁으로 파괴되는 가치를 상징하는 여러 배경들이 마치 푸가 악보처럼 반복해서 묘사되며 리듬을 만든다. 사실 이 작품은 러시아 내전의 배경과 여러 민족들의 역사, 러시아 문화에서 여러 이미지가 상징하는 바를 잘 알고 있어야 이해가 가능한 부분들이 많은 듯하다. 그러나, 문학이 역사와 다른 점은 사실관계나 지식보다는 개인의 감수성과 상상력이 이해의 폭을 보다 확장시킨다는 점일 것이다.

역사책으로 1페이지 이내로 요약되는 역사의 한 토막이 이렇게 아름답고 풍부한 내면을 가진 인물들이 가득한 소설 한 편으로 다시 살아나는 걸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역사보다 문학이, 역사가보다 소설가가 더 시대를 정확히 보여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그 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정신세계, 시대를 받아들이는 감수성이나 시대가 인생에 미치는 파급들은 사람마다 얼마나 다채로운 파장으로 각기 다른 빛깔이었을까. 역사가는 한 사람의 일관된 시선으로 가감법적인 서술을 해나간다. 소설가는 수많은 내면과 정신세계를 상상력으로 창조해 각각의 예 속에서 각기 다른 결론과 인생을 중첩해 보여준다. A, B, C, 그리고 기타 등등...지금 이 소설을 읽고 있는 당신이라면 어땠을까? 이런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이도 소설가 뿐이다. 시대를 해석하는 데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을 수 있음을 우리는 소설을 읽으며 깨닫게 되는 것이다. 역사가와 소설가, 과연 누가 더 객관적인 것일까?

리뷰가 괜히 무겁게 흘러 책선전을 별로 못한 듯하다. :-) 전쟁소설 좋아하시는 분들, 이 소설 전쟁 소설 맞다. 전쟁 장면은 정말 손에 땀이 날 정도로 조마조마 흥미진진하다. 포탄이 터지는 껌껌한 도시에서 적과 추격전을 펼치는 장면이라든지, 장군들이 어린 학사장교들에게 계급장을 뜯고 후퇴를 명하는 장면 등등은 정말 압권이며, 배신자들이나 첩자들과의 두뇌싸움 또한 가슴을 졸이게 만든다. 언뜻 소설의 분위기가 와닿지 않으면, <닥터 지바고>를 떠올려 보면 될 것이다. <닥터 지바고> 처럼 이 소설도 아름다운(?) 장례식 장면으로 시작하고, 또 그렇게 거창하지는 않지만 슬프로 사랑스런 로맨스도 등장한다. 문체는 다르지만, 문장이 아름답기는 이 작가도 빠스떼르낙 못지 않다. 거칠게 얘기해서 '빠스떼르낙을 체홉식으로 각색한 장편소설' 정도가 되려나? -_-;;; 이 소설은 또한 곳곳에 여러 반복되는 상징과 인물들이 숨어 있거나, 갑자기 ''쓱 지나가고, 튀어나왔다 사라지고'' 그러니, 꼼꼼하게 표시해가면서 읽으면, 마치 무슨 숨은그림 찾기나 퍼즐맞추기 놀이 내지는 스파이 맞추기 게임을 하는 듯한 재미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주인공들 주변 군상들의 광대짓을 주목하시라! 마치 퍼펫 쇼의 인형들처럼 묘사되는 그 그로테스크한 인물들의 매력은 정말이지 디킨즈 소설 속 광대들 저리가라니.. :)

이 소설은 처음 손에 잡기까지가 망설여지지, 첫 문단을 읽는 순간 자세를 고쳐 안고 손가락엔 펜을 쥐고 밤새고 가슴 떨려하며 읽게 되는 그런 소설이다. 꼬박 밤을 새다가 문득 새벽 빛에 비춰본 당신의 책은 수많은 밑줄과 손톱 자국, 여러 모양의 감탄 부호들, 뜻모를 기호들, 홀린 듯 베껴 쓴 시적인 구절들, 그리고 당신의 탄식과 웃음, 눈물 자국들로 많이 낡고 두꺼워져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만 책을 덮어, 위로인지 슬픔인지 모를 마음으로 서로의 어깨에 기대 결코 길지 않을 남은 인생을 살겠노라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그들의 막을 그만 내려주면 될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어둠침침한 하늘 어딘가의 틈바구니로 날아가 버린 신은 아무 말이 없었고, 니꼴까 자신은 과연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항상 그런대로 필요한 것들이며, 또 항상 최선이기만 한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칼은 그렇게 무섭지 않았다. 모든 것이 -고난, 고통, 피, 굶주림과 전염병 - 지나갔다. 그 칼도 역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별들은 우리의 존재와 우리 행위의 그림자가 이 땅에서 사라질 때에도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별을 향해 눈을 돌리지 않는 것일까? 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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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보석함 | 기본 카테고리 2003-07-25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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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가난한 사람들

모리츠 지그몬드 등저
문학과지성사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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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레 케르테스가 노벨상을 탄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이 조그만 '헝가리 단편선' 선집에서 만난 많은 헝가리 작가들을 떠올렸다. 9.11의 여파다, 유태계 입김의 결과다 어쩌다 말이 많았지만, 나는 그가 이 단편선의 작가들의 후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케르테스의 수상을 마음 속으로 응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헝가리 문학이 늦게 나마 전세계적으로 읽히게 될 것이고, 무슨 수상작 출간을 돗대기 시장처럼 해대는 우리나라에서도 더많은 헝가리 작품들이 번역될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던 것이다. 손 안에 들어오는 작은 책으로 이국의 아름다운 단편들을 읽는다는 것. 그것은 대단한 매혹이였다. 이 작고 아름다운 책을 손에 끼고 등하교 길에 읽던 나는 무슨 보석함을 품고 있는 듯, 그렇게 내내 가슴이 뛰고 입가는 미소로 무늬가 지고 있었다. 이 보석함에 든 17개의 단편 조각들 중에 과연 어느 작품을 뽑아 소개를 해야할까? 이건 마치 '가난한 아버지가 9명의 귀여운 아이들 중에 누구를, 9개 방을 가지고 홀로 윗층에 살고 있는 노인에게 보내야 하는 지 고르는 것(요커이 모르, <아홉 명 중에 누구를?>)' 만큼이나 난처하고, 어려운 문제이다. '야노시는 아빠와 이름이 같으니 안되고, 요지는 죽은 엄마를 닮았으니 안되고, 펄리커는 제 어미가 제일 아끼던 아이니까 안되고..' 과연, 어떻게 각각 다른 결정과 빛을 가지고 빛나고 있는 이 단편들을 잘 설명해 낼 수 있을까. '신들은 가난한 사람들도 깔깔 웃을 수 있도록 (세상을) 잘 만들어 놓으셨다.' (모리츠 지그몬드, <7푼>).

이 책에 소개된 작가들은, 마음과 손에 하찮은 것만 쥐고 있던 사람들의 손에도 그 누구도 쉽게 뺏을 수 없는 작은 보석함을 쥐어줄 만큼 뛰어난 보석 세공가들이다. 이 단편집에는 전쟁도, 가난도, 슬픔도, 거짓도 많이 담겨 있지만, '오막살이에서는 울음 소리와 탄식 소리만 흘러나오는 게 아니라, 가슴속에서 터져나오는 웃음 소리도 자주 들리(<7푼>)'듯, 세상에는 아름답고, 행복하고,달콤한 것들도 많이 숨어 있다는 것을 조근조근 속삭여준다. '비겁하면서도 달콤한 공상' ,'누군가의 따귀를 아무 이유 없이 갈귀고 싶은 욕망', '오만하고, 무자비하고, 장난스런 그들의 젊음이 만들어낸 괴상한' (코스톨라니 데죄, <따뀌>) 생각... 이런 것들로 똘똘 뭉친 채 전투를 하듯 뾰루뚱한 얼굴로 앉아 있던 지하철에서, '겨울의 이른 아침이나, 여름의 늦은 저녁에', 문득 포도를 주워 먹던 손가락 마냥 물이 든 노을을 발견할 때, 내 앞에 서서 흔들리던 사람의 작은 한숨에 내 머리카락이 날릴 때 같은.. 그런 아주 사소하면서도 뭉클한 감정의 삼투랄까. 이렇게 삼투된 감정들은 그 가벼운 밀도에도 불구하고, 오래오래 마음에 물들어 쉽게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남긴다. '성당도 없고, 신부님도 없는' 숲 속의 가난한 도둑들에게는 숲이 곧 성당이고, 하느님 자신이 곧 신부님이 되어주는(터마시 아론, '교회 안의 솔개')' 그런 공평한 마법이 이렇게 소소한 나에게도 언젠가 찾아오리라는 주문. '그들이 착한 아이들이 된다면, 언젠가 그가 와서 커튼을 올려줄 것이다. 아마도 그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쉿! (머이테니 미하이, '특별한 선물')' 그때까지 나도 나의 이 작은 헝가리 보석함이 내게 보여준 세계를 다 말해 주지 못하리라. 여러분이 그 보석함을 손수 열때까지, 쉿!

[인상깊은구절]
'아이들이 벽에 낙서를 한다. 오후가 되자 그들 속으로 스멀스멀 악마가 스며들고, 아이들은 온통 덜거덕거리는 해골의 수염이 난 모습을 그려댔다. 제일 어린 아이가 가장 열심히 여기저기로 다니며 그림을 덧칠했다. 수염 난 말들의 입과 사자의 입에도 담배 파이프를 그려주었다. 파이프의 어지러운 담배 연기가 청회색 벽 위에 맴돌고 있었다. 방의 한구석이 기이하고 불쾌한 꿈처럼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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