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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허태임의 식물탐색] 나와 팽나무를 연결해주는 59번 국도를 따라서 | 지식 정보 모음 2023-02-01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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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숲을 탐사하고 식물의 흔적을 기록하는 '초록 노동자' 허태임.
식물 분류학자인 그가 식물을 탐색하는 일상을 전합니다.


경남 하동군 섬진강 변 팽나무. 꽃이 피는 4월의 모습이다.

전남 광양에서 강원도 양양까지 내륙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59번 국도가 있다. 목포에서 신의주까지를 잇는 1번 국도와 동해안을 끼고 부산부터 강원도 고성까지 오갈 수 있는 7번 국도의 명성에 비하면 59번 국도는 좀 낯설지도 모르겠다. 주로 산간 지방의 소도시들을 연결하는 구불구불한 길이다. 그 도로가 가야산국립공원을 통과하는 구간인 경남 합천과 경북 성주의 경계에 내 고향 마을이 있다. 어릴 적 나는 엄마를 따라 59번 국도를 타고 어떤 날은 경남으로, 어떤 날은 경북으로 장을 보러 갔다. 59번 국도는 경북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나와 경남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옆 동네 친구를 이어주는 길이기도 했다. 옛길에 아스팔트를 입힌 그 국도를 들어서면 예나 지금이나 이리저리 구부러져 있어서 좀처럼 속도를 낼 수가 없다. 심지어 아직 포장이 덜 된 구간도 있다. 

생물학과 대학원생으로 식물 분류학을 전공하면서 나는 본격적으로 식물을 찾아 전국을 누비게 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차량용 내비게이션이 일반적이지 않았다. 25만분의 1로 축소한 전국 도로 지도가 식물 탐사의 필수품이었다. 그 지도를 짚어가며 전국의 정말 많은 길을 짚고 다녔다. 그때의 나는 학위 주제였던 팽나무속(屬)에 해당하는 종들을 어떻게든 다 만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결연했다. 아직 찾지 못한 한국의 팽나무속 식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선배 학자들이 남긴 기록에만 등장할 뿐 생존하는 학자들 앞에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던 노랑팽나무. "노랑팽나무 찾아 삼만리"를 입버릇처럼 되뇌면서 나는 뭔가 비장미 넘치는 식물학도이기를 바랐던 것도 같다. 한반도를 세로로 연결하는 1번과 3번과 5번과 7번 국도를 수없이 타고 다녔다. 그 길들을 축으로 내륙의 깊은 곳으로 진입할 때는 더 많은 국도와 지방도를 이용했다. 

그러면서 나는 59번 국도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 어릴 때 내가 고향에서 버스를 타고 다녔던 길보다 구불텅한 구간이 훨씬 더 많다는 것, 전라남도에서 강원도까지 거의 500km를 연결하는 그 길을 마음 먹고 한 번에 건너가려면 보통 10시간 정도가 걸린다는 것, 갑자기 나타나는 비경 때문에 갓길에 차를 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너무 자주 발생하므로, 예상 소요 시간 안에 절대 도착할 수 없다는 것.

실제로 59번 국도는 나와 팽나무를 연결해주는 길이다. 그 길은 나 혼자 명명해 놓은 '팽나뭇길'이다. 전남 광양에서 출발한 국도가 섬진강을 따라 경남 하동을 지나는 구간에 팽나무가 많이 산다. 예부터 사람 살기 좋다고 마을이 형성된 곳에는 어김없이 아름드리 팽나무 고목이 있다. 좀 더 북진해서 지리산의 동쪽을 돌고 돌아 경남 산청으로 진입한 길은 합천 해인사를 지나간다. 그러고는 행정 구역이 경북으로 바뀌면서 통일 신라 시대의 절 법수사의 터가 길의 우측에 등장한다. 해인사에 버금가는 규모였을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지금은 보물 1656호로 지정된 법수사지 삼층석탑과 당간지주만이 남아 있다. 그 풍경은 내게 익숙하다. 어릴 때 나와 내 고향 친구들은 당간 지주를 '젓가락바위'라고 불렀다.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면 두 개의 돌기둥에 '당'이라는 깃발을 걸어둔다고 어른들에게 들었던 것도 같다.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알려진 당간 지주와 그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석탑을 근거로 절의 규모가 거대했을 것이라고 법수사지 발굴단은 추측한다. 법수사지 당간 지주는 팽나무 고목과 한 몸처럼 붙어 있다. 내 고향 사람들은 그 팽나무를 신처럼 여겼다.


경북 성주군 수륜면 법수사지 당간 지주와 팽나무 고목

길은 성주군 수륜면에서 김천 방면으로 북진해서 선산을 통과하여 상주 낙동강 구간에 이른다. 강처럼 S자를 여러 번 그리면서 예천 삼강주막을 지나고 용궁면에 닿는다. 거기에는 일찍이 1998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500살을 훌쩍 넘긴 팽나무가 있다. 봄에 꽃 필 때 보면 나무 전체가 노랗다고, 한 곳에 뿌리내려 수백 년을 잇는 근본이 있는 나무라고 마을 주민들이 붙인 이름이 '황목근(黃木根)'이다.

문경시 산양읍을 지나면서 도로는 높은 산들 사이로 들어가 더 좁아지는 느낌이 든다. 월악산 구간이 시작되고 행정 구역은 충청북도로 바뀐다. 그러면 따뜻한 남부 지방을 선호하는 팽나무는 자취를 감추고, 그보다 북쪽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다른 팽나무속 종들이 나타난다. 왕팽나무와 풍게나무가 월악산 동쪽으로 이어지는 59번 국도에 띄엄띄엄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남한강 상류를 만나고 길은 도담삼봉을 지나 소백산 북서쪽 자락을 끼고 협곡처럼 휘어진다.

그 깊은 곳에서 왕팽나무 같기도 하고 풍게나무 같기도 한, 가늠이 잘되지 않는 팽나무 한 그루를 운명처럼 만났다. 바로 노랑팽나무였다. 그 친구를 찾아 나선 지 정확히 10년 되던 해의 일이다. 처음에는 왕팽나무와 풍게나무의 교잡종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겉모습으로 구분하기 어려울 때 팽나무속 식물은 열매를 까서 그 안에 든 씨앗의 표면을 보면 정확해진다. 우리가 복숭아나 살구의 씨앗으로 알고 있는 딱딱한 그 부분은 씨앗을 보호하고 있는 갑옷과도 같은 부위, 내과피다. 팽나무속 종들은 그걸 자세히 들여다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팽나무속 식물의 내과피는 광물질 '아라고나이트'로 이루어져 있다. 달팽이 껍데기의 성분이기도 하다.
팽나무속 식물은 겉모습으로 구분하기 어려울 때 내과피를 관찰하면 좀 더 명확해진다.
모양과 색깔과 질감이 종마다 차이를 보인다.

보통 식물의 내과피는 나무 재질이지만 팽나무는 특별하게도 '아라고나이트'라고 하는 광물질이다. 달팽이 껍데기과 같은 성분. 그러니까 팽나무속 식물은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으로 스스로 광물질을 만들어서 씨앗을 엄호하고 종족 번식에 성공했다. 그래서 내과피 표면 모양이 종마다 다르다. 풍게나무와 왕팽나무는 특히 차이가 확 난다. 노랑팽나무가 그 두 나무의 교잡종이라면 내과피의 형태도 그 둘을 섞어 놓은 모습이어야 한다. 하지만 노랑팽나무는 영락없이 왕팽나무를 닮은 게 아닌가. 여러 종류의 현미경으로 내과피의 안팎을 재차 확인했다. 다시 살펴본 잎과 열매와 꽃의 구조도 왕팽나무와 가장 가까웠다. DNA 염기 서열을 나열해서 유전자 분석까지 더한 후에야 왕팽나무의 변종(변이 개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노랑팽나무를 처음 발견한 후로 꼬박 2년이 지났다. 그러는 동안에 나의 포부는 팽나무에 대한 경외심으로 바뀌었다. 그들의 무언가를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어쭙잖은 식견보다는 조금 다른 형태의 꿈이 생긴 것도 같다. 같은 행성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로서 한참이나 대선배인 그들의 말귀를 좀 더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지혜를 얻고 싶은 것이다.

충북 단양에서 소백산을 다 통과한 59번 국도는 영월의 남부로 들어간다. 간이역인 연당역을 지나면서 좀풍게나무가 나타난다. 한반도 중부이북부터 중국 동북부 지방까지 넓게 사는 좀풍게나무. 영월 읍내를 통과하고 동강을 건너서 정선으로 이어지는 그 길은 과거 광산으로 흥했던 역들이 놓인 구간이자 지금도 석회 채광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곳이다. 석회암 지대를 선호하는 좀풍게나무가 그래서 많이 살기도 하고, 또 안타깝게도 많이 뽑혀 나가기도 하는 구간이다. 

길은 산간 지방을 돌고 돌아서 정선의 읍내로 이어지는데, 정말이지 너무 예뻐서 단번에 통과할 수가 없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 보면 조양강을 만나고 그 상류인 오대천에 닿는다. 오대천 구간은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다워서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린 채 지나게 된다. 그러다가 정선 가리왕산 알파인 경기장 앞을 지날 때에는 입이 쩍하고 벌어진다. 스키장을 만든다고 산을 파헤쳐 놓은 모습이 흉해서, 주변 산들과 너무 동떨어진 모습이 꼭 다른 세상 두 개를 붙여놓은 것 같아서다. 

가리왕산을 다 지나면 평창군 진부면이다. 오대천과 59번국도가 철길처럼 나란히 오대산 월정사까지 이어진다. 전나무 숲을 지나면 길은 오대산국립공원 진고개 정상휴게소를 넘고 강릉시로 접어든다. 여기서부터 연곡천을 따라 그야말로 오지 산길이 지독하게 꼬불꼬불 이어진다. 59번 국도는 연곡천과 함께 양양 남대천에 닿고 마침내 양양대교에 이르러 7번 국도를 만나면서 끝이 난다. 59번 국도가 연결해준 7번 국도를 타고 북으로 올라가면 좀풍게나무가, 남으로 내려가면 팽나무가 동해안을 따라 줄줄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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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갈까.

출근 준비를 하던 윤이 그렇게 말했다. 

우리 거기에 갈까.

월차를 쓸 생각에 들떠 있던 모는 그 말을 듣고 마음이 툭 떨어졌다. 모와 윤에게 거기에 가자는 말은 일종의 신호와 같았다. 나 좀 힘들어, 안정이 필요해, 처럼 심정을 에둘러 표현하는 암호이자 구조 요청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윤이 거기에 갈까, 라고 했을 때 모는 무슨 일이 있구나 싶어, 걱정이 되었다.

확실히 최근 며칠 사이의 윤은 멍한 표정으로 식탁에 앉아 있는 일이 많았다. 휴대폰을 보다가 미간에 힘을 주거나 입술을 꾹 깨문 채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다. 모는 윤이 부엌의 작은 창을 보며 창이 더 크면 좋을 텐데, 라고 중얼거리다가 멈추고, 갑자기 아니지, 아니야, 하며 고개를 여러 번 젓는 모습도 보았다. 그럴 때 윤의 얼굴 위로는 여러 표정들이 맥락 없이 지나갔다.

윤은 괜찮아지면 그제야 속을 털어놓는 타입이라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도 별일 없어, 좀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같이 사는 동안 모는 윤이 말이 없을 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게 좋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그치면 윤은 어딘가로 숨어버리거나 입을 다물어 버렸다. 윤이 거기에 가자는 말을 하는 건 나아지기를 바란다는 뜻이니 아주 심한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사실 말이야, 하면서 윤이 말을 꺼내면 모는 안도하며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 이번 주에 갈까. 

모는 서두른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 명랑하게 대꾸했다.

가방을 멘 윤이 괜찮아? 다른 약속 없어? 하며 운동화를 신었다.

나도 가고 싶었어. 토요일 아침에 출발하자.

모가 한쪽 손을 들고 잘 다녀오라고 하자 윤이 손을 흔들며 좋은 시간 보내라고 했다.

도어 록이 잠기는 소리를 들으며 모는 식탁 의자에 앉았다. 조조 영화를 보러 가려고 했는데 어쩐지 울적해졌다. 창문을 여니 아침 같고 암막 커튼을 치니 밤 같았다. 모는 어둠 속에서 눈을 깜박거렸다.

모와 윤에게는 각각 그곳에서 보낸 시간 덕분에 회복된 경험이 있었다. 그곳은 북 카페인데 한쪽 창으로는 호수가 보이고 반대쪽 창으로는 초록의 숲이 보였다. 풍경이 근사한 것 외에는 평범했다. 책이 많거나 큐레이팅이 특별한 것도 아니고 커피 맛이 훌륭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 것마저 뛰어났다면 입소문이 났을 테고 두 사람이 조용히 앉아서 밖을 내다보는 여유를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모와 윤은 그 카페의 평범한 커피 맛과 적당한 규모의 서가를 사랑했다.

처음 그 카페에 가게 된 건 모의 멀미 때문이었다.

2년 전 주말에 두 사람은 조금 먼 도시로 드라이브 겸 꽃구경을 가기로 했고, 윤이 맛집을 예약하고 유명하다는 카페도 찾아두었다. 모와 윤 모두 회사 생활에 지친 상태라 먼 곳에 가서 맛있는 것을 먹고 바람을 쐬면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하며 떠났다.

사람들이 보내고 싶은 주말의 형태란 대체로 비슷한지 식당 안은 포화 상태였다. 테이블에는 빈자리가 없고 주문하고 사람을 부르고 먹고 웃고 말하는 소리와 다양한 음식의 냄새로 식당 안이 꽉 찼다. 윤은 그런 음식점을 예약한 걸 미안해했고 모는 마음에 안 드는 티를 내서 미안했다. 맛집답게 밑반찬과 메인 메뉴 모두 맛있고 푸짐했다. 평소였다면 다음에 다시 오고 싶은 곳 리스트에 올렸겠지만 그날 모와 윤은 좀 버겁다는 느낌을 받았다.

꽃이 흐드러진 길에도 사람들이 많아 줄을 서서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두 사람은 조용한 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싶었고 실내를 정원처럼 꾸며놓은 카페의 사진을 보며 기대에 부풀었다.

천장이 높고 초록의 식물들 사이에 테이블이 놓인 카페는 웨이팅이 길었다. 윤이 급하게 다른 곳을 알아보는 동안 모는 포토 스폿에서 사진 찍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팔을 올려 하트를 만들거나 웃는 얼굴로 포즈를 취하는 걸 보며 주말이 끝난 뒤 만나게 될 회사 사람들을 떠올렸다.

모의 연봉은 삼 년째 동결이었고 처음에는 열심히 일해도 오르지 않는다는 것에 화가 났지만 어느 순간 문제는 연봉이 아닌 다른 쪽으로 번져 나갔다.

모가 연봉을 올려달라고 소심하게 요구했을 때 팀장은 경기도 안 좋고 다들 힘드니 올해까지만 참아달라고 했다.

올린 사람 아무도 없어. 나도 그대로라고. 

팀장은 모를 원망하듯 덧붙였다. 모는 작년에도 그렇게 말했잖아요, 라고 덧붙이지 않았다. 팀원들 모두 개인적으로 찾아와 불만을 표현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팀장이 안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더 높은 직책을 맡은 사람들의 지시를 따르다 보니 그렇게 결정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 모의 입장에서도 연봉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팀장뿐이었다.

그날 친한 동료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몇 사람이 모였고 모는 오래간만에 술을 많이 마셨다. 취한 김에 거지 같은 회사, 물가는 계속 오르는데 말이야, 하고 연봉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생일을 맞은 동료도 동조했다.

진짜 조금 올려주더라. 그렇게 조금씩 올려서 언제 카드 빚 갚냐고. 

모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서 동료를 쳐다보았다. 동료는 아차 싶었는지 말을 돌렸다.

연봉 안 올려주면 그만둘 거라고 했더니 올려줬어. 그대로나 마찬가지야. 

모는 팀장에게 배신감을 느꼈고 순순히 물러섰던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술김에 말해 버린 동료의 실수가 아니라 팀장의 말을 믿을 수 없게 되어서, 앞으로 그런 사람과 어떻게 같이 일해야 하나 싶어서 기운이 빠졌다.

다음 날 팀 회의가 끝난 뒤, 팀장이 모에게 일을 추가로 부탁했을 때 모는 천천히 심호흡을 한 다음 연봉 얘기를 확인했다. 처음에 팀장은 모가 잘못 안 거라며 시치미를 떼더니 동료 얘기를 꺼내자 얼굴이 굳었다. 그 자리에서는 모에게 양해를 구하더니 나중에 동료를 불러 비밀을 지키지 않았다며 주의를 줬다. 동료는 모 때문에 자신이 곤란해졌다며 언짢아했다. 모는 자신이 잘못한 것과 자신에게 잘못한 것들이 엉뚱한 방향으로 굴러가는 것을 보았다. 모가 원한 건 팀장의 솔직한 말과 사과였는데 오히려 모가 말을 옮기는 사람,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팀장을 대하는 것이 껄끄럽고 동료를 보는 것도 편하지 않았다. 사람들과 같이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고 표면적으로 달라진 건 없는데, 사무실에 돌아오면 아랫배가 싸르르 하다가 끊어질 것처럼 아팠다. 모는 화장실을 들락거렸고 밥을 먹는 게 두려워졌다. 병원에서는 장염이라고 했는데 약을 먹으면 괜찮아졌다가 스트레스를 받거나 신경 쓰면 금세 재발했다.

일주일 정도 지속된 장염이 괜찮아졌을 때 윤이 맛있는 것도 먹고 꽃도 구경하자고 해서 떠난 나들이였다. 그런데 모와 윤은 인파에 시달렸다는 느낌을 받았다. 애써 괜찮은 척하며 걷고 감탄하고 사진을 찍었지만, 서로의 얼굴을 보며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집에 가는 길은 윤이 운전하기로 했다. 도로에 차가 많아서 가다 서기를 반복했고 다음 날 출근할 생각에 모는 속이 불편해졌다. 국도 쪽을 달릴 때 모가 멀미가 난다고 하자 윤이 근처의 카페를 검색해서 찾았다.

길도 막히는데 한숨 돌리고 가자. 

두 사람은 창가 테이블에 앉아 따뜻한 허브티를 주문했다. 카페는 양쪽에 커다란 창이 있고 한쪽 창으로 호수가, 반대편 창으로 숲이 보였다. 그때 호수와 숲은 좀 어둑했지만 그것대로 운치가 있었다. 모와 윤은 따뜻한 차를 마시며 창밖이 검게 변해 가는 것을 보았다. 인파와 멀미에 시달렸던 속이 천천히 내려갔다. 하루를 통틀어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모가 스트레스성 장염을 앓는다면, 윤의 경우는 힘들면 위경련에 시달렸다. 소화가 잘 안되고 속이 답답하고 쓰리다가 어느 순간 쥐어짜는 것처럼 아프다고 했다. 소파에 앉아 있다가 배를 감싼 채 몸을 둥글게 말거나 침대에 누워 끙끙거렸다. 윤은 누군가 힘센 사람이 위의 이쪽과 저쪽을 양손으로 잡고 비트는 것 같다고 했다. 모는 그 고통에 대해 짐작도 하기 어려웠다.

그날 숲과 호수 사이에 놓인 북 카페에서 한숨 돌리고 온 뒤로 두 사람은 계절마다 그곳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창가의 테이블에 앉아 봄에 꽃이 핀 숲과 여름의 초록이 우거진 숲, 가을의 울긋불긋한 숲을 보았다. 거기에는 계절과 함께 변하는 숲과 그대로인 호수가 있었다. 모와 윤은 그날의 기분에 따라 창가에 앉아 같이 호수를 바라보기도 하고 윤이 호수를 볼 때 모는 숲을 보기도 했다.

나무와 뻗어 나간 나뭇가지들과 촘촘히, 혹은 듬성듬성하게 달린 나뭇잎들을 보고 있으면 모는 나무가 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온몸으로 기운이 번져 나갔다. 나뭇잎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도, 색이 변해 바람에 천천히 흔들리거나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리는 것도 대견했다. 호수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졌다. 윤은 주로 호수를 보며 '물멍'을 즐겼다. 넓고 많은 물을 보며 어떤 기분과 감정을 흘려보낸다고 했다.

의도하거나 약속했던 건 아닌데, 모와 윤은 마음을 다치거나 지칠 때마다 그곳에 갔다. 그 카페의 창을 통해 사계절의 풍경을 보았다는 건 계절마다 마음을 다치는 일들이 생겼다는 뜻이기도 하고 거기 앉아 있던 시간을 통해 일상으로 돌아올 힘을 얻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토요일 아침에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윤은 말없이 앉아 있다가 모에게 눈 좀 붙일게, 라고 했다. 모는 운전을 하면서 카스테레오의 볼륨을 줄였고 가끔씩 윤의 얼굴을 살폈다. 눈을 감았지만 자지 않는 윤의 미간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거기에 가면 단풍이 들어서 숲이 멋질 거야, 모는 조용히 속삭였다.

오전의 카페에 손님은 모와 윤뿐이었다. 호수를 한참 바라본 뒤에도 윤은 말이 없었고, 모가 무슨 생각해, 라고 묻자 죽음에 대해 생각해, 라고 했다. 모는 모멸 정도를 떠올렸는데 죽음이라는 말에 멍해졌다.

모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자, 얼마 전에 회사에서 말이야, 하며 윤이 쓰레기로 꽉 찬 봉투를 내다 버리듯 말을 꺼냈다. 같이 일하던 사람이 출장을 갔다 죽었는데 회사는 어영부영 처리하고 싶어 하고 유족들에게 사과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고에는 여러 가지 상황과 사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회사의 간부들은 책임을 미루고 서로 발을 빼려 했다. 그들은 유감이라느니,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었다느니, 안됐지만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반응했고 자꾸만 죽은 사람의 사소한 실수를 들먹였다. 보상은 하겠지만 자신들이 잘못한 건 없다는 입장이었다.

윤은 자신이 갈 수도 있는 출장이었다고 했다. 

사고를 못 막았으면 사과는 해야 하잖아. 

윤은 동료의 죽음도 고통스럽지만, 자신이 사과의 언어가 없는, 다른 사람을 헤아리지 않는 무례한 사람들하고 같이 일해야 하는 상황을 견디기 힘들다고 했다. 그런 데서 일하는 것도 고역인데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시간이 흐르니 같이 일하는 사람들끼리 이 편 저 편으로 나뉘어 싸우게 된다고 했다.

왜 이 죽음에 대해 사과하고 책임지지 않아? 

사과에 왜 그렇게 집착해. 사과한다고 뭐가 달라져.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고 같이 점심을 먹고 회의를 하고 회식을 하는 동료인데 입장과 마음이 다르다는 걸 확인하는 게, 그래서 자꾸 미워지는 게 힘들다고 했다.

내가 죽어도 그렇게 지나가겠지. 

윤은 울먹이다가 웃었다. 

나 좀 미친 것 같지. 

모는 고개를 저으며 윤의 손을 잡았다. 

누가 그러더라. 하나만 하라고. 

윤은 다시 웃음을 거두고 울먹거렸다. 이곳이 없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밖의 생활은 나쁜 것과 더 나쁜 것 사이에 끼어 있지만 숲과 호수 사이에 놓인 곳은 계속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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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15 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