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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손길을 내민 이들 | 도서 2020-01-11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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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데미안

헤르만 헤세 저/전영애 역
민음사 | 2000년 12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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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요즘책방>의 [데미안]편을 보다가 처음 읽던 때의 기억이 뭉클 돋아났다. 그 시절, 모든 것이 불확실해 보여 나 자신이나 세계, 미래를 차분하게 헤아려볼 엄두를 못 냈던 것 같다. 그냥 허무에 휩싸여 하루하루를 소비하며 더러 극단적 생각을 떨치느라 진저리를 치기도 했다. 이런 나를 잡아주고 마음을 달래준 벗이 그나마 있었기에 어떻든 긴 터널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사회성 부족하고 소심했던 내게 책은 길잡이였다. 내 마음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나를 알아봐주는 몇 권의 책 가운데서도 헤세의 [데미안]은 베스트 오브 베스트였다. 자아를 발견하는 여정, 신비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고상한 정신세계를 담고 있는 그 책을 잡자말자 단번에 빨려들었다. 그래서 나에게도 막스나 피스토리우스 같은 길눈이가 찾아오지 않을까, 아니 찾을 수 없을까 기대를 품기도 했다. 결국은 오지 않았지만. 물론 그런 존재가 다가왔지만 알아보지 못했던 나의 안목을 탓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어른이 되어도 한참 된 지금 다시 읽어봐도 [데미안]의 흡인력은 여전했다. 아직도 설렌다. 뭔가를 부추긴다. 왜 주저앉아 있냐고, 일어나라고 권고한다. 세속에 찌든 삶 그냥 그렇게 이어갈 거냐고 묻고 있다. 안일함에 젖어 달콤한 현실만 탐닉할 거냐고 질책한다. 다시 어린 싱클레어가 되어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게 어떻겠냐고 속삭이고 있었다.

 

내 인생에서 나에게 흥미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에 이르기 위하여 내가 내디뎠던 걸음들뿐이다. 그 모든 아리따운 휴식의 지점들, 행복의 섬들과 낙원들의 마력을 나도 모르지 않지만, 그 모든 것들을 나는 먼 곳의 광채 속에 싸인 채로 두고자 한다. (중략) 오직, 어떤 새로운 것이 나에게로 닥쳤는지, 무엇이 나를 앞으로 몰아갔는지, 나를 찢어내었는지, 그런 것에 대한 것뿐이다. (64~65쪽)

 

영상 매체의 다양한 채널을 탐욕과 게걸스러움이 뒤덮고 있다. 어쩜 무례하고 불쾌해보이는 일까지 부끄러움이 아닌 재치와 미덕으로 여겨지며, 칭송받고 있는 지경이다. 이런 시대에 싱클레어의 고민과 지향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냉정히 돌아본다. 잊고 있던 우리, 다시 인간을 생각하게 한다. 아니 나 자신부터 점검하게 만든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고 있다.

 

고비고비마다 싱클레어를 잡아준 손길이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그는 행운아다. 구원자가 없었다면, 탕자처럼 방황하다가 돌아갈 곳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만약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다면 그처럼 멀리까지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돌아갈 데가 있고 인도해 줄 사람이 있었으니 방황도 가능했을 것이다. 낭떠러지에 간신히 메달린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이들이 여럿 있었다. 싱클레어의 의문에 나름의 답을 제시하며 안전하고 성숙한 지혜의 세계로 이끈다.

 

막스 데미안, 신비로운 표식을 지닌 이 친구는 어느 날 다른 세계에서 뚝 떨어진 듯 싱클레어에게 다가와 크로머와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준다. 그러면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보이는데 그게 완전 판도라의 상자였다. 싱클레어는 매료되면서도 불안하여 그를 경원하게 된다. 두려움과 양심의 가책을 수반하는 시도를 서슴지 않는 데미안을 의도적으로 피한다. 하지만 무의식에선 늘 그를 향하고 있었다. 알폰스 벡의 꾐에 빠져 유혹과 충동의 세계를 탐닉하던 싱클레어는 이상적인 여인을 만나 베아트리체로 이름을 붙이고 초상을 그리는데 그게......방황하던 싱클레어가 보낸 암호같은 그림에 데미안은 답장을 보낸다. 그 유명한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였다. 암호를 푸는 과정에서 예술혼에 불타는 이단적 종교해석자 피스토리우스를 만나게 된다. 그와도 결별한 싱클레어는 다시 데미안을 만나고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부인을 알게 된다. 진정한 구원의 여인상이 거기 있었던 것이다. 에바부인을 통해 사랑과 세상의 지혜를 하나씩 깨우치게 된다.

 

전쟁과 이별을 겪고 방황을 극복한 싱클레어, 그는 이제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하더라도 더 이상 데미안을 부르지 않는다. 다른 이들의 인도에 의지하지 않는다.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이며 스스로 답을 찾게 되었다. 그렇게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한 것이다.

 

지금 다시 나를 생각한다. 내 속에 데미안 같은 초자아가 있을까, 내가 그걸 길러 왔을까 되짚어본다. 뇌구조를 그려본다면 아마 한 점 정도일 것 같다. 그러면서 잘도 살아가는구나 싶다. 그때의 고민을, 성장하면서 절절히 깨달았던 일들을 어느새 까맣게 잊어버리고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듯하다. 어쩜 프란츠 크로머가 되어 교묘하게 다른 이를 조종하기도 하고 알폰스 벡이 되어 충동에 휘둘기도 할 것이다. 부지불식 간에 말이다. 피스토리우스처럼 사변적이고 자기합리화에 능숙한 자가 되기도 한 것 같다. 현학적인 지식 과시에 몰두하다 문득 지금 뭘 하고 있나 자문하며 섬뜩해지기도 한다.

 

[데미안]은 그렇게 나의 나됨을 점검하고, 내 안의 데미안을 발견하고 회복하는 알람이었다. 그 시절의 막막함과 간절함을 되새겨 잊지 않게 해주었다. 고상한 세계가 있음을, 그걸 떠벌리지 않고 고요히 간직하며 지켜나가기 위해 애써야 함을 일깨워주었다. 어른이 된 내게 여전히 유효한 길잡이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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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15 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