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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에게 바치는 주석서 | 도서 2020-02-2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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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살고 싶어 몽테뉴를 또 읽었습니다

이승연 저
초록비책공방 | 2020년 01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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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연 작가에게 몽테뉴는 사숙하는 스승이다. 아니 혼자서 흠모하며 배우는 정도를 넘어 성인처럼 공경하는 대상이다. 은연 중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와 동급 반열에 올리고 우러러보기도 한다. 이 글은 그런 구름 위의 스승에게 바치는 지극한 헌사이다. 그 스승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자신의 삶을 얼마나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는지 경탄하며 고백하고 있다.


작가는 어떻게 몽테뉴를 만나게 되었는지부터 밝히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육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모든 게 무너져내린 때였다고 한다. 자기 붕괴와 남은 자 특유의 회한 때문에 차라리 죽음을 맞는 게 낫겠다고, 그게 오히려 고통을 더는 길이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그때 운명처럼 몽테뷰가 다가왔다. 그런데 [에세]에서 몽테뉴는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갑자기 뜨끔해진 작가는 정신을 가다듬고 몽테뉴를 영접한다. 하나씩 짚어나가며 자신의 삶에 대입해보다 결국은 가뿐하게 일어서게 된다. 이 책은 그런 경험과 사유의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에세]를 인용하고 거기에 작가의 상념을 덧붙였다. 스승에게 바치는 나름의 주석서인 것이다. 처음 작가의 심경은 이랬다.


내 귀에 닿기도 전에 허공으로 흩어지기 일쑤인 틀에 박힌 위로, 끝도 없이 이어지는 '힘내'라는 말이 당시 나에겐 일종의 폭력 같았다. 도저히, 어떻게 해도 힘이 날 수 없는 상황인데, 그나마 죽을힘을 다해 힘을 내는 게 그 정도인데 사람들은 왜 모르지? 대체 여기서 어떻게 더 힘을 내라는 거지? 힘내라는 말을 했는데도 내가 끝까지 힘을 못 내면 나는 그들에게 잘못하는 건가? '힘내'라는 말 대신 정말로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걸까? 나는 그 말이 듣고 싶은 게 아닌데. 나라고 힘내고 싶지 않은 게 아닌데. 가끔은 침묵이 그 어떤 말보다 강할 때가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너무 쉽게 말로써 위로의 방법을 찾는 듯하다. 내가 위로를 간청한 적도 없는데도 말이다. 그들이 말하는 '내가 살아야 할 당위'가 나에겐 참으로 부질없이 느껴졌다. 그 당위는 내 심장에 뿌리박히지 못하고 작은 실바람에도 뽑히고 흔들리기 일쑤였다. 나도 엄마를 따라 그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자주 나를 지배해버렸다. (54~55)


[에세]에서 몽테뉴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한 행동하며, 인생의 사업을 길게 연장시키고, 죽음은 내가 양배추를 심는 동안에 와주되, 죽음이 왔다고 거리낄 것 없고, 정원이 완성되지 않은 것은 더욱 염두에도 두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지금 이 시각에 인생에 애착이 없는 것은 아니며, 죽는다는 것이 쓰라리기는 하지만,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좋으실 때, 아무 때 불러 가셔도 아무 아까울 것 없는 사정에 있다. 나는 아무데도 매인 곳이 없다.' [에세] 인용 (36쪽)


이 대목이 어떻게 자신을 일으켰는지 작가는 말한다. 주변의 지인들에게서 일상적으로 들었던 모든 무의미하고 무력했던 말들과는 무게감부터 달랐다. 진정성이 배어 있었다. 흔들리던 심경이 서서히 정리되는 것을 느끼며 작가는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나는 자연이 순리대로 다 알아서 해줄 것이라는 몽테뉴의 말이 진짜라는 것을 안다.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하는 그의 진심이 나에게 고스란히 전달되면서 죽음에 대한 불안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나에게 설정된 운명이 언제 어떻게 닥치더라도 걱정하지 말고 그냥 오늘을 살면 된다는 생각이 내 안에서 제대로 움트기 시작했다. 나 역시 얼마나 걱정으로 인생을 탕진했는가. (38쪽)


살기 싫은 순간 우연히 읽었던 몽테뉴를, 살고 싶어 다시 찾아 읽게 되는 극적인 변화가 이제 나타난 것이다.


몽테뉴의 말처럼 삶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집중의 속도를 올릴 수밖에 없다. 순간의 경험과 생각과 느낌을 솔직하게 기록하는 것으로 몽테뉴는 자신의 삶을 멋지게 살아냈다. 나도 그렇게 살 것이다. 오로지 집중의 속도를 높여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살아보았다는 만족이 내 삶의 원천이 되도록 하는 것! '삶은 아름다운 거짓말, 죽음은 고통스러운 진실'이라고 했지만 삶도 죽음도 아름다운 진실이 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39~40쪽)


[에세]를 받아들인 작가는 몽테뉴가 제시한 해법이 자신을 향한 맞춤형 제언이라 여기며 하나 하나 음미하게 된다. 몽테뉴의 첫 번째 권고는 슬플 땐 울어버리라는 것이었다.


비참한 일을 당했을 때 슬픔이 극도에 달하면 사람의 정신은 뒤집히고, 그 어떤 행동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대단히 언짢은 소식을 듣고 놀랐을 때, 몸이 얼어붙듯 하다가 눈물과 통곡으로 토해내면 설움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얽매였던 마음도 풀리고 몸도 편해지게 된다. 마침내 고통은 간신히 울음에 길을 터준다.(베르길리우스) (50쪽)


몽테뉴의 처방은 결이 달랐다. 감성적이면서도 실제적이었다. 두 번째 제언은 계산적이기까지 했다. [에세]에서는 몽테뉴 자신의 사적인 연애담까지 곁들이며 더욱 사실감을 더한다.


어떤 괴로운 생각에 사로잡혔을 때는 그것을 억제하기보다는 바꾸는 편이 간단하다고 본다. 다른 어떤 것을 괴로운 생각 대신 넣는 것이다. 변화는 언제든 괴로움을 덜어주고 풀어주고 흩어준다. 싸워서 괴로움을 이길 수 없다면, 나는 빠져나가며 그것을 피하려고 비켜선다. 나는 계략을 쓴다. 장소와 일과 친구를 바꾸고, 다른 일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무리 속으로 달아난다. 그러면 그 속에 휩쓸려서 나는 내 자취를 잃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57~58쪽)


[에세]에 기대어 고통을 이긴, 고통에서 벗어난 작가는 뒤늦게 그 고통마저 다르게 느끼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몽테뉴를 사숙한 작가의 진일보가 두드러지게 다가오는 대목이다. '고통의 방'을 마련해 놓았다니.


가끔 생각해본다. 나에게 고통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하고. "우리가 건강을 가벼운 병만큼도 느끼지 못하고 사는 것을 볼 때, 극도의 탐락은 가벼운 고통만큼도 느껴지지 않게 되어 있다."는 몽테뉴의 말은 진실이다. 즉 행복은 불행 없이 그 자체로 느끼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죽음 없이 삶을 들여다볼 수 없듯 불행 없이 행복을 논할 수 없는 것은 같은 이치이다. 그러니 지금의 내가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오만방자하고 안하무인이 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온전히 내게 닥친 고통의 덕이다.  (중략)  나는 내 삶 곳곳에 지뢰처럼 박아놓은 크고 작은 고통을 마주할 때마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냐', '나한테 이러시는 이유가 대체 뭐냐'고 신을 향해 따져 물으며 살 것이다. 오만함은 모든 죄악의 근원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부족한 나 자신을 탓하지는 않으련다. 내가 고통에 몸부림치다 내 마음을 죄다 할퀴고 망가뜨리는 대신 마음 한 곳에 '고통의 방'을 마련해놓은 것만으로도 나는 내가 기특하니까. 죽을 때까지 그 공간의 이름은 계속해서 '고통의 방'이겠지만 그 방이 언제나 어둡지만은 않게 불을 켰다 껐다 할 수 있으니 이만 하면 됐다. (65~66쪽)


작가는 마지막으로 몽테뉴 사상의 핵심을 정리하고 그에게서 비롯된 에세이라는 장르의 특성에 대한 소회도 밝힌다.


몽테뉴는 은퇴 2년 뒤부터 본격적으로 [에세]를 쓰기 시작했다. 집필의 목적이 한가함을 극복하고, 자신의 몽상을 자세히 들여다보아 나중에 그것으로 자신을 탓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엉뚱하고 우습기까지 하다. 그러나 시작의 의도와는 달리 몽테뉴는 집필 과정을 통해 자신과 세상을 더욱 깊이 들여다보는 힘을 키우게 된다. 자기 생각, 느낌, 모든 자연현상, 사람들의 행동과 말, 숨겨진 심리 등 몽테뉴의 눈에 가볍거나 무의미한 것들은 없었다. 주의를 집중해 살펴볼수록 세상은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다고 여기면서도 그 안에 담긴 진리는 단순하다고 깨닫게 되는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105~106쪽)


복잡다단한 사물과 현상을 관통하는 진리의 핵심을 알아보는 눈을 가지게 된 몽테뉴. 그가 바라본 진리는 단순했다. 너스레 떨지 않아도, 현란한 수사를 동원하지 않고도 고요히 그 세계를 그려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몽테뉴 사상의 거대 맥락이라 하겠다.


"여러 가지 반대되는 사상들도 부드럽게 보아주며 판단은 내리지 않는다고 해도 그 말에 쉽사리 귀를 기울여 준다."는 몽테뉴의 태도가 나에게 큰 의미를 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나아가 말과 글이 넘쳐나는 지금 이 시대의 우리 모두가 갖춰야 할 자세가 아닐까 싶다. (177쪽)


몽테뉴 사상의 또 다른 흐름은 관용과 상대주의였다. 30년 전쟁 전후에 벌어진 신구교도 간 피비린내 나는 살육, 보복의 악순환 속에서 이런 견해를 일관되게 지니고 있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더구나 이는 오늘 여기, 우리 현실에 적용해도 될 살아 있는 원리라 하겠다. 몽테뉴의 사상은 반짝 하다 사라진 게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우리를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에세]에서 에세이 장르가 비롯되었다. 그런 만큼 에세이의 기본 원칙이 [에세]에 담겨 있다 하겠다. 작가는 몽테뉴의 원칙을 충실히 따르려 노력했다고 밝힌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되 자기 평가는 신중하게, 표현은 양심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몽테뉴가 에세이를 쓰는 원칙이었다. 그는 겸손이 반드시 미덕이라 할 수 없으며, 나르시시즘과 교만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악덕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도 일갈한다. (184쪽)


몽테뉴의 원칙에 비추어 혹 자신의 글이 본령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는지 작가는 늘 돌아보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낸 게 부끄럽기도 한듯 하다. 한편 더 진솔하게 고백할 걸 하는 아쉬운 마음도 내비친다. 몽테뉴와 [에세]를 준거로 삼아 자기 삶과 글에 대한 진단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에세이는 자신을 깊이 관찰한 뒤 자기표현은 양심적으로 하고, 더도 덜도 말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주는 글이다. 그래서 에세이는 그 어떤 글보다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솔직히 무모하게 도전한 것은 아닌지 겁이 날 때도 많았다. 그런데도 결국 여기까지 오고야 말았다. 부끄럽고 민망하지만 글의 품격은 진실에서만 나온다는 사실에 의지해 더 진솔하지 못한 부분은 없는지만 돌아보려 한다. (281~282쪽)


하여 작가는 인간 몽테뉴와, 대 저작 [에세]와의 운명적 만남과 끈끈한 인연이 자신을 살리고 더 좋은 글을 쓰도록 추동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슬몃 자신을 몽테뉴와 동일시하기도 한다. 스승에 대한 외람된 도전이 아니라 친근하고 다정한 사람과 정서적으로 교감하듯 말이다. 그러니 스승의 대 저작에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솔한 주석을 덧붙일 수 있었던 것일 테다.


솔직하고 짧게 쓰려고 노력했다. 구구절절 말할 수도 없었다. '운명'과 '인연'이라는 두 단어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나는 운명처럼 [에세]를 만났고 [에세]를 통해 몽테뉴와 인연을 맺었다. 혹시 내 전생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은 만큼 그에게서 나를 찾는 일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어떻게 그가 16세기 사람일 수 있는지 의아스럽기만 하다. 아니면 내가 21세기 사람이 아닌 걸까. (183쪽)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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