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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은처음인데요_이것은무척현대적이다 | 기본 카테고리 2017-09-22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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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현대미술은 처음인데요

안휘경,제시카 체라시 저/조경실 역
행성B잎새 | 2017년 07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우리는 현대미술 안에서 이미 살고 있습니다. 이제 그걸 확인해 보기 위한 책이 있습니다. 현대미술은 처음인데요 - 직관과 감각을 통한 예술 작품 - 현대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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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은처음인데요_이것은무척현대적이다

** 리뷰를 요약정리하듯 간추려서 써보았다. 그게 더 이해 하기 좋은듯하여. [ ]표시는 책 본문중에서 옮긴 것이고, 표시가 없는 부분은 내 생각을 코멘트 해 놓은 것이다. 쓰다보니 무지 길어졌다. -;-



1.
[현대미술은 처음인데요]책은 현대미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책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면, 오~~그래, 현대미술! 감 잡았어~~ 하게 만드는 책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현대미술의 세계안에서 이미 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책의 내용을 나의 기준에서 요약하고 내 생각을 접목하는 형태로 써내려가 보았다. 책은 새로운 형태를 도입하여, 그 주제와 연관된 주요 내용이 있는 단락으로 손쉽게 이동하도록 알파벳 A~Z까지 쳅터를 나누어 놓았다. 그러나 차례대로 죽죽 읽어가도 큰 무리는 없는거 같다. 아무래도 차례대로 읽는 것에 익숙해서 그런거 같다.

현대미술을 접하는 우리는 항상 '오, 이거 현대적이다! ' 라는 느낌을 받는다. 티노 세갈의 <이것은 무척 현대적이다>라는 표현 문구에 현대미술의 모든 개념이 압축되어 깃들어 있는거 같다.

2.
[ 요즘 사회처럼 현대미술 역시 고정되어 있지 않다. 현대미술은 항상 변화하고 성장한다. 현대미술은 우리의 현재를 정확히 보여준다. 우리는 동시대 예술가와 함께 경험하고, 그들을 통해 세계를 이해할 기회를 얻는다. 사진작가 캐서린 오피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역할을 이렇게 설명했다. " 이 시대를 대표하는 순간을 담아보자는 아이디어는 단순히 그 안의 나를 찾으려던 바람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그건 인류 모두의 크나큰 욕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현상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 바로 그 욕구가 위대한 예술가들을 매혹시키고 영감을 갖게 하는 동력이다. 개인적인 경험이 동기가 되어 작품을 만들었든 좀 더 외부 지향적이고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작품을 만들었든 작품 활동을 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예술작품을 만드는 행위는 결국, 자신의 일부를 세상에 내놓는 일이고 누군가에게 비판받을 위험에 자신을 내모는 일이다. 또 내 생각이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는 일이기도 하다. 예술을 한다는 것은 마치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보상에 대한 기대도 없이 끝이 어디인지 모르는 길을 떠나는 여행과 같다. 그런 일에는 정말 큰 배짱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비범한 예술작품을 접할 수 있는 것은 겁을 상실한 이 예술가들 덕분이다. 미술사학자 E.H. 곰브리치의 말을 한번 되새겨 보아도 좋으리라. " 미술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 ]

예술작품 활동은 마치 철학을 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철학을 하는 이도 자신의 사상을 세상에 내놓기까지는 바로 이와 같은 과정이 적용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러한 연고로 '개념미술'의 등장은 필연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3.
[ 1967년, 미국 작가 솔 르윗은 주요 미술잡지<<아트포럼>>에 글을 기고 했다. ' 개념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이디어와 발상이다. 개념 형태의 작업을 할 때는 전체를 계획하고 결정하는 일이 먼저이고, 이후의 구체적인 제작은 그저 형식적으로 뒤따르는 확인 과정일 뿐이다. ' '개념 미술에 관한 짧은 글 Paragraphs on Conceptual Art ' 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간 후, 이 새로운 형태의 미술 장르는 곧 '개념미술'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개념미술은 주로 1960년대 중반에서 1970년대 중반 사이에 미국, 유럽, 라틴아메리카의 예술가들이 '완성된 오브제는 작품이 담고 있는 의미에 비하여 중요하지 않다 '는 생각을 전제로 실험했던 미술 사조를 일컫는다. 이 사조는 응집력 강한 예술운동이라기보다는 세계 각지에서 유사한 경향이 동시에 전개되는 형태로 나타났다.

사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개념미술의 기본 정신은 어떤 형태도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 마르셀 뒤샹의 위대한 발상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활동하는 많은 예술가는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아이디어에 가장 적합한 형태를 선택하기 위해 한 매체에서 다른 매체로 자유롭게 작업 형태를 바꿔가며 작업을 한다. 어떻게 보면 이 모두가 개념 미술 덕분이다. 우리가 예술로 그것을 받아들이든 아니든 대부분의 사람은 이미 개념미술이 미술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솔 르윗이 " 아이디어만으로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 고 선언한 때가 1967년인데,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그의 말에는 강한 힘이 실려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오늘날 개념미술에 대한 아이디어는 예술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에 고루 스며들었다. 비전문적인 의미로 '개념'이라는 말이 쓰이면, 예술적 솜씨로 다룬 작품처럼 전통적 관념을 따르지 않은 예술을 대신하는 말이 되었다.

개념 미술가들은 쉽게 사고팔 수 없는 작업을 하면서 예술의 상품화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 예술가가 물리적인 작품을 만들어 내놓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작품이 가치가 있는 진품임을 드러내는 데 상징적인 역할을 하던 '예술가의 손'이라는 개념을 뒤집었다. 예술이 반드시 무언가를 만들 필요는 없다는 이런 생각은 음악에서부터 광고에 이르기까지 다른 분야에서도 여러 가능성을 여는 역할을 했으며, 개념미술은 회화나 조각과 동등한 장르로 인정받게 되었다. ]

개념미술은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하다. 초창기 개념미술가들은 예술의 상업성을 막고자 하였으나, 차차로 개념미술형태는 예술이 상업성까지 겸비하는 형태로 가는데에 일조를 했다고도 여긴다. 잭슨 폴록, 앤디워홀, 피에로 만초니 등등의 현대미술작품 가격을 본다면 말이다. 또한 개념미술이 가장 큰 확장을 이루는 영역을 보자면, 설치미술과 퍼포먼스 형태라고 생각된다. 설치미술과 퍼포먼스 형태는 반드시 작가라는 타이틀이 필요한 영역은 아닌거 같다. 설치미술은 어떤 특정하게 공간을 만들어 놓고 거기서 사람이 무엇인가를 하는 행위까지도 포함할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점차로 이러한 예술영역이 일상의 삶에 침투되고 있다고 여긴다.

설치미술과 퍼포먼스는 더 긴 시간을 투여하기도 하고 더 많은 관객과 호응하고 실제로 관객이 작품안에 포함되어 버리는 형태로 변모하고 있다. 작가와 관객이 같이 작품을 만들어 가기도 한다. 공공미술의 영역에서도 설치미술과 퍼포먼스는 그 영역이 확대되어 가는거 같다. 현대미술은 그러니까 그 범위를 제한할 수 없는 상태까지 온거 같다. 현대미술이 이처럼 인간의 인식을 바꾸고 삶을 바꾸는 전위성과 현대성이 없었다면, 문화는 전복됨이 있을 수 없고 변화도 없었을 것이다. 변화에는 언제나 전위성과 현대성이 함께 한다. 그렇다면 현대미술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4.
[ 현대미술의 개념은 근대미술이 처음 등장했던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통과 단절하며 훨씬 전위적이었던 근대미술은 그렇게 고대미술의 범주에서 벗어났다. 그때 이후로 현대미술은 현재에 단단히 기반을 두고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면서 역사를 뒤로 남기는 시간대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현대미술은 과거의 어느 시점과 이어져 있을까? 역사가들은 대체로 팝아트와 미니멀리즘, 퍼포먼스, 미디어 아트가 미술계의 흐름을 주도했던 1960년대와 1970년대를 중요한 구분점이라고 여긴다. 과거에는 예술가들의 일관된 운동이나 특정 집단에 의해 예술이 발전했지만, 이때부터는 더는 한 도시, 한 그룹의 사람들이 선두가 되어 유행을 이끄는 일이 쉽지 않게 되었다. 발전은 늘 세계 여러 곳에서 동시에 일어났으며 '지구촌'이라는 말이 탄생했다. ]

예술은 전위성과 현대성과 동시성을 동반하는거 같다. 생각해보면, 이 세 요소가 없이 예술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예술은 이 세 요소를 충족할때 전방위적으로 증폭이 일어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떤 하나가 무너지고 새로운 하나가 일어설때는 기존의 가치관을 부정하고 일어서게 된다. 그러나 새로운 형태는 과거에서 영감을 받아 일어서게 된다. 그러므로 과거에도 전위성과 현대성과 동시성은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 세 요소의 맥이 이어져 현대미술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그 시대를 반영할 수밖에 없고, 그 시대를 가장 앞선 형태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5.
[ 기존의 틀을 깨려는 현대미술의 성향 때문에 현대미술은 과거의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데서 출발하는, 파괴적이고 유별난 신조만 지녔다고 오해하기 쉽다. 작가나 큐레이터는 항상 과거의 예술가들을 돌아본다. 자신보다 먼저 유사한 문제로 고민했던 예술가를 뒤쫓다 보면, 그들이 내놓았던 창의적인 해답에서 어떤 식으로든 정보를 얻기도 하고 자기 생각을 되짚어볼 기회도 생긴다. 과학과 예술을 별개의 분야로 여기지 않고, 새로운 과학과 공학기술을 연구하는 데 온 마음을 쏟았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스페인의 정치 상황에 대한 작가의 환멸을 그대로 반영하고, 격변하는 시대를 표현적이고 섬세한 기법으로 나타내며 점점 더 커지는 사회에 대한 냉소를 드러내었던 프란시스코 고야 등등이 대표적인 현대미술 이전인 과거의 예술가들이다. 결론적으로 '현대미술'이라는 용어가 이렇게 흔해지기 훨씬 전부터 모든 역사적 순간을 대표하는 '현대적인' 예술가들이 존재해 왔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미술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기준은 단순히 시간이 아니라 작품의 주제가 무엇이냐에 달려 있다. 시간을 기준으로 범위를 구분 짓는 방법이 편리하긴 하지만, 우리는 십중팔구 작품 설명을 보지 않고도 작품을 보는 순간 그것이 현대미술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라는 순간을 해석하는 작업은 좀처럼 쉽지 않고, 현대라는 사회를 이해하는 일 역시 혁신적인 기술과 새로운 접근방식을 요구한다. 예술가들은 자기 생각을 적절하게 묘사할 수만 있다면 그림이든 조각이든 영화든 사진이든 퍼포먼스든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과학기술이든 어떠한 매체라도 이용할 것이다. ]

현대미술이 지향하는 발상의 전환과 표현 욕구에 관한 도구적인 형태는 이미 과거미술에서 시도되어진 현대성에 기반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현대성은 전위성에 기대어 같이 일어서게 되는 것이며, 이러한 형태는 동시다발성인 성격을 띠게 되어 문화의 전복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할진데, 1)그 무엇인가가 예술로 변신하는 순간은 언제부터이지? 라는 질문이 자연스레 대두된다.

6.
[1966년 칼 안드레가 전시장 바닥에 직사각형 모양으로 깔끔하게 쌓아 올린 120개의 벽돌 더미를 전시했을 때 미술관이라는 맥락과 공간이 지닌 권위 덕분에 이 하찮은 물건은 예술작품으로 승화되었다. 그러나 모든게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안드레의 <등가 Vlll>라는 작품을 미술사에서 의미하는 전통적인 조각의 개념을 뒤엎으려는 시도로 본다면, 이 작품은 단순한 벽돌 무더기 이상의 의미를 담는다. 미니멀리스트로 불리는 그들은 동료 화가와 함께 자신의 작품을 기하학적인 모양과 간단한 색채로 단순화하면서 재료에 집중하고 기본적인 형태에 강조점을 두었다. 안드레는 대리석이나 청동으로 만든 조각품을 전시할때 사용하던 받침대에서 작품을 내려 놓았고, 벽돌처럼 평범한 물체를 작품으로 전시해 의식적으로 자신의 작품이 기존의 예술 개념과 대치되도록 했다.

2)나는 이것이 미술이라고 믿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예술작품은 제안이라는 사실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어떤 사물을 예술로 보라고 청하는 초대장과 같다.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 다른 지침에 따라 접근해 보기를 권한다.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이 내포한 강한 의도가 관객에게 어떤 의미를 끌어내는 데 도움을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떤 사물이 예술인지 아닌지 묻고 싶은 충동을 잠시 억누른다면 그런 일련의 질문에 빠져 허우적대는 일은 곧 작품과 관계 맺기를 거부한다는 의미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술에 대한 인식은 사람들의 가치관과 현실이 변하듯 함께 변화한다. 그러니 이제는 식상하고 부적절한 '이거 예술 맞아?' 라는 질문보다, '이게 어떤 점에서 의미가 있지?' 라고 질문해 보면 어떨까? ]

예술을 보는 관점을 전환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자기안에서 솟구치는 거부반응과 못마땅함을 억누르고, 그 자체를 보며 기다려보는 일, 그러면 예술이 다가와 말을 먼저 걸어올지도 모른다.

7.
[ 모든 전시의 뒤편에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큐레이터의 손은 관객과 관객이 경험하는 작품 사이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조심스럽게 통제한다. '큐레이터' 또는 큐레이터쉽'의 기본 개념은 본래 미술관 또는 도서관의 소장품을 관리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17세기에 처음 생겼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사실은 큐레이터는 예술가와 예술, 그리고 대중을 잇는 힘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미술관은 한 명 이상의 컬렉션 큐레이터를 두고 있다. 그들은 소장 작품을 전시할 새로운 방법을 모색할 뿐만 아니라 미술관 영구 소장용으로 구입할 새로운 작품을 제안하기도 하고(작품취득) 관객의 눈높이에 맞춰 작품에 대한 글을 쓰거나 연구하는 일(해석)을 맡기도 한다.

기관이라는 한정된 범위를 넘어서 일하는 큐레이터도 있다. 통찰력이 뛰어난 사상가인 이들은 여러 전문 분야에 걸쳐 다각적이고도 실험적인 접근 방식으로 새로운 전시를 시도하며, 비엔날레나 트리엔날레에 초대받아 아이디어를 구현하기도 한다. 이들은 기존의 전시 포멧을 새롭게 바꾸려는 반체제 운동가이며 동시에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다. 성공한 사람에게는 '슈퍼 큐레이터'라는 별칭이 붙고, 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주목받게 된다. ]

미술계에서 어떤 작가를 in 하고 out 할지를 결정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영향력 순으로는, 슈퍼 큐레이터, 유명 컬렉터, 예술 비평가, 각종 미술상 심사위원과 선정위원회, 갤러리 순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작품 판매, 좋은 리뷰, 명성을 얻는 모든 과정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예술가도 하룻밤 사이에 유명인사가 되는 시대이다보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던 예술 비평가들의 역할이 축소되어 가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비평가들이 있고, 갤러리들 역시 유명 갤러리들은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유명 컬렉터들은 개인 소장 미술관을 지니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8.
[ 현대미술 시장에서 작품의 가격은 대개 생산자(작가)와 소비자(컬렉터) 사이에서 거래를 주선하고 조정하는 중개인이 결정한다. 1차 시장 판매, 즉 새로운 예술작품이 처음 시장에 진입하는 일은 원칙적으로 갤러리를 통해 이루어지며, 갤러리는 작가를 '대표'해 작품의 판매를 담당한다. 갤러리 상업 공간의 한쪽에 마련된 서무실과 개인 관람실에서 작품의 가격을 결정하고 협상하는 일이 이루어진다. 1차 시장의 작품과 책정에 대해 정해진 기준은 없지만 가격을 좌우하는 요소는 분명히 존재한다. 재료와 제작에 드는 비용은 작품가와 별 관계가 없고, 정량화하기 어려운 다른 요소들이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할 때가 많다. 그 중 하나는 작가 브랜드 가치인데, 브랜드 가치는 작가의 작품 중에서 유명한 개인 컬렉터나 공공미술관이 소장한 작품이 있는지, 주요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치른 경력이 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의 네임 밸류가 미치는 영향도 상당하다.

작품 가격이 상승한다고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 갤러리들은 '플립핑' 할 목적으로 작품을 사는 컬렉터를 주의한다. 플립핑은 단기 차익을 목적으로 샀다가 상당히 비싼 가격에 곧바로 팔아버리는 투기 거래를 말한다. 2차 시장, 즉 이전에 최소 한 번이라도 팔린 적이 있는 작품을 거래하는 시장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작가에게 피해를 주고 작품 시장을 불안정하게 한다. 장기적으로 작가의 경력에도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작가가 사람들 관심에서 멀어지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갤러리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투기로부터 작가를 보호하고 신뢰할 수 있는 가치를 정립시켜 작가가 성장함에 따라 작품의 가격도 꾸준히 오를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어울러 잠재 구매자가 작품 수집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디. 컬렉터에 대해 신중하게 판단한 후에 작품을 금세 되팔지 않을만한 사람에게만 작품을 판매해야 한다. ]

#현대미술은처음인데요 책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이다. 작품을 사고 파는데에 있어서 시장을 교란시키지 않고 윤리적인 접근이 필요함을 알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이 점을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 책에 대한 신뢰도가 깊어지는거 같다.

9.
[ 이 수 많은 작품은 누가 사는 걸까? 미술 시장은 미술계를 주도하고 선동하는 극소수의 엘리트들, 즉 미술관과 부자들에게 의존한다. 소장품을 꾸준히 늘리고 보유해야 할 책임이 있는 공동미술관은 직접 작품을 사들이기도 하지만, 기부자에게 파격적인 세금 감면 혜택을 주어 개인 기부를 유도하기도 한다. 거물 컬렉터는 예술품을 사는 행위를 통해 돈으로 매길 수 없는 명성을 얻는다. 그러나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기꺼이 그만큼의 돈을 지불할 의사가 있는가로 설명할 수 있겠다. 그건 그렇고 제프 쿤스의 작품, '오랜지 색<풍선 강아지>는 5,840만 달러(약 655억 원)에 거래됐다. 그렇다면 '미소 짓는 아내의 표정'은? 값으로 매길 수 없다. ]

예술의 세계는 오묘하다. 풍선 강아지는 왜 오랜지 색이며, 그리 비싼 값이 책정된 것일까? 여기에 질문과 답이 있을 것이다. 예술작품 가격에 대한 그럴만한 이유나 원인에 대해서는, 시대와 그시대의 배경과 작가의 의도와 큐레이터의 안목과 컬렉터의 심중과 주머니 사정에 있을 것이다. 현대미술에 담겨야 할 세 요소를 어찌하여 풍선 강아지는 충족하게 된 것일까... 작품 가격을 떠나서 논하기는 다소 어렵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10.
[ 미술 세계에서 쉬운 영어를 찾기란 왜 이렇게 어러울까? 2012년 예술가 데이비드 레빈과 사회학자 알릭스 롤은 '아트스피크'의 형태에 대해 연구했다. 지난 13년간 받은 이메일에서 사용된 어휘, 문법, 문체를 분석해 아트스피크의 사용 패턴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 독특한 언어를 '인터내셔널 아트 잉글리시'라고 이름 붙였다. 여기에서는 새로운 명사가 계속 만들어진다. 가령 '잠재력'이란 의미의 'potential' 대신 'potentiality'를 사용한다. 단어는 길면 길수록 좋으므로 예술가들은 뭔가를 이용할 때 'use' 하지 않고 'utilize'라 한다. 과장법에 강박감이 있어 단순히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라고 하지 않고, 한 기사를 인용하자면, '현실과 가상' , '시간과 장소' , 기억의 속성과 망각에 대한 인식을 흩어놓는다'고 표현한다.

반대 개념을 나열하는 경향도 있다. 뭔가를 한번에 '드러내기도 하고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하는 ' 작품은, ' 내부 심리와 외부 현실' 사이의 ' 경계를 흐리게 하는 ' 작품이라고 말한다. 이런 언어 표현을 미술계만의 특권이라고 주장할 수만은 없다. '서투르게 번역된 프랑스어' 같은 말을 언젠가 한 번은 써본 경험이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책임은 있다. 그렇다고 모든 아트스피크를 간단히 과장되고 번거러운 표현으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세상에는 미술에 대한 좋은 글들이 많고, 때로는 긴 단어가 필요하니까 쓸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정말로 좋은 글은 읽기 힘든 만큼 큰 깨달음을 주는 법이다. ]

어쩌면 아트스피크에서 패션을 설명하는 용어들이나 패션 잡지글도 영향을 받았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한때는 패션 잡지가 그 해의 유행을 알리는 패션 문체들에 대하여 '보그 병신체'라는 수식어가 붙어서 뜨거운 이슈가 된 적도 있었다. 아트스피크는 작가들이나 큐레이터가 주로 사용하는 문체들인거 같다. 좀더 쉽게 써주면 좋겠지만, 작가의 의도이니 그다지 큰 친절은 바라지 않는다. 작품은 자기와의 대면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패션에서 아트스피크 문체는 작품사진에서는 주제 붙이기 나름이니 무방할거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잡지기사는 좀더 독자가 알아듣게 쓰면 좋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패션 잡지 기사는 시즌별 제안에 가까운 것이니, 예술성보다 좀더 문장력에 비중을 두어 균형을 잡아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듯하다. 아트스피크하니...나는 왜? 니체가 떠오르지...그래서 ㅋㅋㅋ 하고 웃어본다.

#안휘경_제시카체라시지음 #조경실옮김 #출판사행성B잎새

*사진은 중국 칭다오 스타벅스에서~~~ 다~~모델 시켰음 - 사실은 자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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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가 된 독자 - 가을에 들어선 이들은 모두 은유하는 인간입니다 | 기본 카테고리 2017-09-21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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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은유가 된 독자

알베르토 망구엘 저/양병찬 역
행성B | 2017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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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들어선 이들은 모두 은유하는 인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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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가된독자_알베르토망구엘_옮긴이양병찬_출판사행성B

 

<더 방랑하지 않도록, 귀환하였다. 글은 쓰면, 글 자체가 가는 길이 있다. 글이 알아서 길을 연다. 그러니 일단 쓰면, 마무리는 이미 된 것과 같다.> 여행은 어쩌면, 이제부터 시작이지 않을까?

 

I .

 

은유가 된 독자를 읽고서, 서두를 꺼내기가 어려웠다. 어떤 무게가 나를 짓눌러 왔기 때문이다. 책에 대한 총체적인 압박감을 느꼈다고 해두자. 그동안 내가 책에 대해 고민하던 부분들이 한꺼번에 '무게'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 무게는 나를 방랑하며 떠돌게 만들었다. 그 방랑은 나를 심히 방황하게 하였다. 은유에 대해서 이렇게 고민해 본 적은 없었다. 은유라는 기표가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에 있어서 나를 관통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기다렸다. 내안에서 이 책에 대한 심상이 만들어질때까지. 그러기 전에는 한 줄도 써지지 않았다. 아니 쳐다도 보기 싫고 괜시리 피곤하게 여겨졌다.

저자의 텍스트는 미리 기본적 베이스를 깔고 시작하고 있다. 저자는 철학서적들의 개념을 그 자신의 글쓰기의 뼈대로 취하고 있다. 그러하니 저자가 예시로 들어놓은 그림들과 종교철학서적들과 문학들 그 이전에 이미 현대철학 개념들이 먼저 정립되어 있어야 이 책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문체는 쉬워 쉬이 읽을 수 있으나 그 이면은 쉽지 않았다. 저자의 독서수준이 어디까지 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를 가지는 것이 중요했다. 이 책은 논문과 같고, 어려운 책에 속한다. 왜냐하면 저자가 이미 기본 베이스로 현대 철학을 깔고 시작했기 때문이다. 철학서적들을 읽는 이유는 아마, 사람들이 자신의 사고와 글쓰기에 철학서들을 개입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기본 개념들을 인정하거나 가져다 쓰기 때문이다. 그러니 읽는 독자도 철학서들을 읽어야 서로 대화가 되는 것이다. 이 책이 그러했다. 이러한 연유로 나는 이 책이 무거웠다. 메타포를 다루는 광대한 서사시였기 때문이다. <길가메시 서사시>가 완성된 형태처럼, 긴 시간동안 형성된 메타포처럼, 이 책 구성도 많은 철학서들과 신학서들이 드러나 있으면서도 감추어진 체로 함께 여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서양철학 근간을 간추려서 <<은유가 된 독자>>를 집필하였다. 지금 이 책에서 접하는 메타포들은 모두 서양인문철학에 기반하고 있다. '여행자. 은둔자. 책벌레'라는 메타포는 서양의 인문지식사를 관통하고 있다. 하나의 메타포가 형성되고 사용되고 진부해지까지의 과정과 새롭게 받아들여지까지는 인간사회의 총체가 압축되고 압축되어 어느 순간 드러나게 된다. 이 책은 인간사회의 현실적 모습과 내면적 모습을 압축해 놓은 것과 같았다.

하여 그리 두껍지 않은 이 책의 무게감에 내가 압도당했던거 같다. 이 한 권에 압축시킨 저자의 깊은 독서의 질과 양도 그렇지만, 이 책을 읽는 독자의 독서에 대한 질과 양을 저울질 당하기 딱 좋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나의 밑바닥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건 무의식의 영역이었던거 같다. 밀쳐 놓았던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와의 대면이기도 하였다. 내 인생의 은유들은 더 많은 다채로운 표현을 요구하고 있었다. 요즘 나는 내 언어의 빈곤을 느끼고 있었다. 뭔가의 갈증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안에서 나는 갇힌 느낌이었다. 여기에서 무엇인가를 가지고 귀환해야 하는데..., 쉽사리 챙겨지지가 않았다.

독서와 독자라는 이 명제를 가지고 처음과 끝을 이어내는 저자의 <<은유가 된 독자>>는 책을 읽는 이에게 넘어야 할 하나의 산과 같았다. 이러하니 여기서 메타포가 파생되었다. 책은 = 방랑이며, 방황이다. 책은 = 넘어야 할 산이다. 책은 = 길을 잃지 않고 되돌아 와야 하는 귀환이다. 저자가 이 책을 저술한 이유들이기도 하다. 여행자 은둔자 책벌레라는 메타포가 나를 찌르며 파고 들었다. 책을 사놓고 읽지 못하는 나를 보며 부끄럽기도 했다. 마치 책자랑만 하고 있는거 같아서 말이다. 그 압박감은 자기모멸을 불러오기도 하였다.

현대의 독자들에게 책은 어떤 존재일까? 현대의 독자들도 자기만의 상아탑을 가지고 싶어한다. 책은 책을 읽을 일정한 공간과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 공간은 피난처이기도 하고 은둔의 장소이기도 하고 휴식의 장소이기도하다. 또한 방랑하는 여행지이기도 하며 방황의 장소이기도 하다. 책을 읽으며 방황을 해보지 않는다면,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 수가 없다. 그 방황을 벗어나 멀리 자기안에서 보이는 불빛을 길라잡이 삼아 귀환하는 장소도 상아탑이다. 귀환을 보고 하는 글을 쓰는 곳도 상아탑이라는 장소다.

현대에 있어서 상아탑은 글을 읽고 글을 쓰는 곳은 모두 상아탑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곳이 어디가 되었든 책속으로 몰입하여 책속으로 여행을 떠나고, 다시 현실로 귀환하면 모두 상아탑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현대에서 상아탑의 개념에 장소적 제한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서재든, 방이든, 거실이든, 카페든, 길거리 벤치든, 잔디밭이든 등등 말이다. 독자는 움직이며 책을 읽는다. 현대의 독자는 특정한 곳만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만큼 제약이 사라졌다. 독자는 = 장소를 이동하며 책을 읽는다. 현대의 독자는 = 유목민이다.

나는 날마다 페북책을 읽는다. 페북 책은 수 많은 사람의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그들 모두가 저자이면서 독자다. 페북책은 저자와 = 독자의 상아탑 구실을 하고 있다. 깊게 몰입을 부르기는 어렵더라도 이것과 저것을 이어 풍부한 세계를 만들어 낸다. 페북책은 한 세계로 들어가는 문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가벼우면 가벼운데로, 무거우면 무거운데로, 서로에게 넘나든다. 페북책은 = 사람이다. 기묘하지 않은가... 독자가 페북에서는 다시 사람으로 회귀하였다. 존재로 귀환한 것이다. 페북책은 = 순간에 존재를 존재하게 한다. 페북책에서 저자와 = 독자는 역할이 같다. 그들 자신이 등장인물이면서 그들 자신이 화자이면서 그들 자신이 독자이기도 하다. 페북책은 수 많은 사람들이 시간차적으로 한 공간에 쓴 거대한 드라마이다. 현실로 귀환할까의 고민도 적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페북책은 어찌보면 현실로 무사귀환한 이들이 쓴 귀환보고서이기도 하다. 그들은 현실과 페북책 사이에 있다. 인간이 현실과 종이책 사이에 있듯이. 종이책이 현실로 돌아와 쓴 귀환보고서 이듯이. 페북책 = 존재라는 파생 메타포를 만들어 보았다.

전자책은 현실과 가상세계를 연결하는 인터넷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전자책이 종이책에서 느낄 수 있는 정서성을 담아낸다면, 그 확장 가능성도 낮지는 않다고 본다. 끄적거리고 밑줄치고 바로 여백에 메모를 남기고, 필요한 자료를 바로 검색해서 참고 자료로 연결이 가능하거나, 그 페이지에 사진이나 캡춰를 이어붙이기가 가능한, 자기만의 책 기능을 갖춘다면, 종이책을 넘어설지도 모른다. 종이가 주는 향수와 정감이 사라지지만, 대신 전자책이 자기만의 책 읽기나 책 편집하기, 책 꾸미기가 가능해진다면, 한 권의 책에 광범위한 정보와 자료를 압축시킬 수 있다. 이리되면 종이책에 하던 방식보다 훨씬 더 다채로운 책읽기와 정보정리가 가능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은유가 된 독자> 책도 많은 양의 정보가 필요한 책이다.

세상의 변화는 긴 흐름에서 보자면 긍정도 부정도 아니다. 단지 변화가 있을 뿐이다. 메타포의 축적이 공간에서 시간의 흐름에 의하여, 시대가 변화해감에 따라 사람들의 지양점이 변화하여 어느때는 긍정적, 어느때는 부정적으로 변화하였으나, 메타포는 언제나 그 두 방향을 다 취하고 있는거 같다. 텍스트의 쓰임이나 해석도 맥락에 따라서 바뀌듯이 전체의 맥락에서 살폈을때, 은유의 쓰임도 방향을 드러낸다. 긍정방향과 부정방향은 대립되기도 하나 서로 대칭되어 전제와 진술의 호응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그리고 방향을 찾아간다. 고정된 해석이란 있을 수 없듯이, 메타포의 쓰임도 그러하다. 메타포는 계속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II .

[ 읽고 쓸 줄 아는 인간 사회는 인간과 우주의 인지된 관계를 언급하기 위한 핵심 메타포를 개발했다. 우주는 특정 법칙에 지배되는 일관된 상징체계로 상징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설사 우리의 이해 범위를 넘어선다 할지라도. 인간은 그 의미를 일별하기 위해, 세상이라는 책을 읽으려 부단히 애쓰게 된다.

그러나 모든 사회가 핵심 이미지를 동일한 방식으로 상정하는 것은 아니다. 여러 사회가 독서 행위를 지칭하기 위해 상이한 어휘들을 개발했다는 것은, 특정 사회가 특정 시기와 특정 장소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고유의 정체성을 규정한다는 의미다. - 프롤로그 중에서 - ]

 하나의 메타포가 만들어지기까지의 여정은 실로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안에는 인간과 인간사회의 희노애락과 생로병사와 인간의 특질들이 모두 함축되어 있다. 메타포는 또다른 파생 메타포를 만들어 낸다.

 인간의 인지능력은 메타포가 형성되었을때 훨씬 더 제대로 호응을 일으킨다. 메타포는 소통기제로서 발달해 왔다. 메타포는 하나의 그 무엇에 대응하는 기제로서 시간이 축적되는 동안 형성된다. 지금 이 순간도 메타포는 형성되고 있다. 현재에서 과거를 통합한 결과가 미래의 메타포가 된다.

 

인간이 사회활동을 하고 정신활동을 하는 결과물은 텍스트로 축적된다. 텍스트는 쓰는 자가 재구성하여 새로운 형태로 드러난다. 읽는자에게 텍스트는 읽는자의 해석이란 재량권이 부여된다. 읽는자의 정도에 따라 텍스트는 달라진다. 그러나 텍스트 해석은 그 텍스트가 지정해 놓은 맥락을 벗어날 수는 없다. 해석은 그 범주를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텍스트가 형성된 후 글쓰기가 가능해졌다. 텍스트의 형성은, 존재하는 것에 대하여, 지칭하는 상징체계인 문자라는 기표가 만들어졌기에 가능해진 것이다. 글쓰기가 가능해진 인간사회는 텍스트에 권위를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 구전되던 말씀을 필경사들이 직접 텍스트로 옮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최초의 권위는 '말씀과 세상'이었다. 말씀은 신의 언어였다. 신의 언어는 곧 성서였다. 성서는 신이 직접 쓴 저서라는 권위를 부여 받았다. 세상은 신이 신의 시종들을 시켜 쓴 자연책이었다. 신은 그러니까 두 권의 책을 집필한 셈이다. 성서와 세상이라는 책이었다. 세상은 책이라는 메타포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신의 뜻을 알고자 하는 인간들이 순례를 하였기 때문이다. 순례를 통하여 인간은 세상에서 신의 뜻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순례자는 '순례를 통하여 세상을 경험(읽는)하는 독자'라는 메타포가 성립 되었다.

 세상은 = 곧 책 이므로, 그 '세상책을 읽는 인간은, 순례자'라는 포지션을 취하게 되었다. 인간은 다시 파생 메타포를 갖게 되었다. 인간은 = 신의 뜻을 알기 위해 순례를 하므로, 이는 곧 세상책을 읽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세상책을 읽는, 인간은 = 독자다.라는 파생메타포가 형성된다. 이 메타포가 종이책에도 적용되었다. 독자는 종이책을 읽는 동안 그 안의 스토리를 여행하므로, 여행자가 되었다. 여기서 독자는 = 여행자라는 파생메타포가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세상책을 읽는 순례자이면서, 독자로서 종이책을 여행하는 여행자다. 이 모든 은유적 표현이 통합되어 최종적으로 '독자 = 여행자'라는 메타포가 만들어졌다.

 독서의 원리와 이해에 대해 예시를 들어 놓은 부분을 옮겨 보았다.

[ 내가 알고 있는 <시편> 한 장을 암송한다고 가정하자. 나는 암송을 시작하기 전에, 예감을 통해 구절 전체에 몰입한다. 그러나 일단 암송을 시작하면, 구절의 상당 부분이 예감의 영역에서 과거의 영역으로 이전되며 기억력이 작동한다. 그리하여 내가 수행하는 행동의 범위는 기억과 예감으로 양분된다. 기억이란 내가 이미 암송한 대목을 돌아보는 것을 의미하고, 예감은 내가 앞으로 암송할 대목을 예상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의 주의력은 여전히 살아 있어, 한때 미래였던 것이 과거로 변하는 과정을 지켜본다. 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예감의 영역이 축소되는 만큼 기억의 영역은 확장되며, 내가 암송을 마치는 순간 나의 예감은 모두 기억의 영역에 편입된다. -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서 -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독서란 '텍스트를 독파하는 여행' 이다. 여행을 통해 탐구된 영역은 기억의 영역에 저장되고, 그 과정에서 미지의 영역은 점차 익숙한 영역으로 편입되면서 흐릿해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시편> 전체에 적용되는 원리는 각 문단과 구절에도 적용된다. 그 원리는 인간의 삶 전체에 적용되며, 인생의 각 부분에도 그러하다. 인류의 역사 전체에 그러하며, 개인의 인생사에도 그러하다. '독서의 경험'과 '삶의 여정에서 겪는 경험'은 거울처럼 서로를 비춘다. P.31 ]

단테의 신곡은 세 개의 사후 세계로 구성되어 있다. 지옥 연옥 천국이다. 단테는 이 세 개의 사후세계를 여행하는데, 이는 편도 여행이 아닌 왕복여행 개념이다. 그러므로 순례는 편도 여행 개념이 아닌 왕복 여행 개념이다. 순례를 떠난 여행자는, 순례를 떠나기전과 순례를 마치고 귀환한 장소는 같으나, 순례 이후의 그는, 그 전의 그가 아니다. 단테 <신곡>의 첫 문장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어두운 숲을 걷는 내 모습을 문득 알았네" 에서, "내 모습은"은 단테의 현재의 모습이고, "알았네"는 깨달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현재의 내 모습은 순례의 첫 발을 내딛는 단테의 모습이고, 깨달음은 순례 후 귀환할 단테의 상태이다. 이 책은 처음부터 제목에서 해피엔딩을 암시하는 희극(comnedia)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 그러므로 단테의 순례길은 처음부터 왕복여행으로 정해진 각본이었다. 귀환하여 여행에 대한 보고서를 쓸 목적으로 쓰여진 책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독자의 책 여행은 왕복여행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도피로서의 책속으로 은둔을 택하다 보면 길을 잃어 버리게 된다. 현실에서 불만을 충족시키기만 하는 대리만족으로 흘러버리면, 욕망을 무한정 충족시키려고 하게 된다. 그 욕망은 충족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이 빈 손으로 귀환하게 되면, 현실은 무기력해진다. 계속 책속으로 도피하여 꿀만 빨며 자기를 망각하면, 현실이 공허해져 갈증만 심해진다. 여행자로서의 목적은 챙길 것을 챙겨 귀환하는 것이다. 길을 잃으면 곧 늪이다. 책에 생명을 불어 넣는 것은 독자의 숨결로부터이다. 글읽기에서 독자는 탄생한다. 독자의 탄생 - 이것이 책의 '그 모든 것'인지도 모른다.

 

* 유럽에서 들어온 '타로카드' 구성도 이러한 '왕복여행'구조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카드안의 그 자신도 여행자로 규정되어 있다. 우리나라 절집에 그려진 '십우도'도 같은 구조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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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행사 낭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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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가만히 끌어안다

게리 홀츠,로비 홀츠 공저/강도은 역
행성B잎새 | 2017년 06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자기를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은 힘들지만, 반드시 건너야 하는 시간인거 같습니다. 가만히 자기를 끌어 안게 되는 시간인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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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끌어안다 - #저자게리홀츠_로비홀츠_옮긴이강도은_출판사행성B잎새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요즘 일상에서 내가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알아가는 느낌이었다. 이 책을 낭독을 통해 절반을 읽을 때에는 여러 목소리들은 저마다 독특함이 있어서 전달되는 느낌들이 보다 더 풍부하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낭독을 통한 책읽기는 무의식을 자극하여 머릿속을 한차례 뒤집어 놓은 것과 같았다. 이리 태풍이 바닷속 뒤집어 순환하게 만들어 놓듯이 낭독으로 뒤집고 엎어 놓은 무의식은 남은 절반의 책을 읽어 가는 도중에도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이미 이 책 내용들이 뜻하고 있는 바를 알고 있다고 여겨졌다. 사람마다 환경이 다르고 상황은 다르지만, 그 작동하는 메커니즘은 같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어가자 잔잔하던 내면에 돌 하나 던져 가라앉아 있던 온갖 부유물들이 떠올라 금새 혼탁해졌다. 무의식의 영역에서도 감정체계들이 건드려진 느낌이었다. 감정체계들이 뒤죽박죽된 느낌이었다. 그러자 의식이 가려졌다. 머리도 무겁고 몸도 잠겨버리는 느낌이었다. 컨디션이 난망해졌다. 그럼에도 무의식은 계속 왕성하게 활동 하였다. 온갖 상념들이 떠올랐다. 지난 시간들의 기억은 그렇게 잠복되어 있었다.

 

어린시절부터 최근까지의 감정의 부산물들이 이젠 내차례야 하듯이 하나씩 솟구쳤다. 그럴때마다 감정은 요동쳐서 분노와 화와 슬픔과 미움과 안쓰러움과 후회와 원망과 회한과 서러운 감정들이 같이 나타났다. 나는 감정의 부산물들이 불러 일으키는 기억들과 동시에 나타나는 대표적 감정들에 같이 흠뻑 놀아 주었다. 그 안에 잠겨서 충분히 그 기분을 만끽하여 주었다. 그래 억울했겠다. 그래 슬펐겠다. 그래 기뻤겠다. 그래 화났겠다. 그래 아팠겠다. 그래 울고 싶었겠다. 그래 후회 되었겠다. 그래 미웠겠다. 그래 안타까웠겠다. 그래 안쓰러웠겠다. 그리 그 감정에 충실하게 따라가 주고 느껴 주었다. 그렇다고 하여 심리안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이었다. 단지 머릿속이 탁해졌고, 몸은 잠긴듯 하였을 뿐이다.

 

나는 내가 평소에 해오던데로, 이건 진짜 내 마음이 아니야... 로 감정의 부산물들을 거둬내어 가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솟아나는 감정의 부산물들과 마주하여 나를 보았다. 하나씩 정리해가듯 하나하나 감정의 부산물들을 벗겨내었다. 오늘은 이 혼탁함에서 벗어날듯도 하여 에어컨을 꺼놓고 차를 마시면서 땀을 배출시켰다. 그러자 바닥에 발이 닿는 느낌이 들었다. 심연에서 드디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러자 의식이 맑아졌다. 무의식은 이제 안정화 되었다.

 

그 무의식을 만난 순간은 어떤 불편한 기제들이 자꾸 꾸물꾸물 거리며 머리속을 가득 채워버리는거 같았다. 무의식의 바다가 요동을 치기 시작하자 의식은 저 뒤로 가리워졌다. 그 상태에서 무의식을 만난 것이다. 나의 감정의 부산물들을 만난 것이다. 이 부산물들과 대면하고 난 후 의식은 다시 주인이 되었다. 의식은 무의식이 전해준 이야기들을 잘 알아 들은듯 하였다. 머릿속은 차분해졌다. 나는 알고 무의식과 만난 것이다. 무의식을 대면할때는 기분이 완전히 가라앉아서 컨디션 성태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쳐내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나는 내가 지금 경험한 내면세계를 바로 지금 알 필요가 있었다. 의식은 그때 자리를 비켜 주었으나 아주 가리워진 것은 아니고 나를 통제하고 있는 상태였다.

 

<가만히 끌어안다>책은, 저자인 게리 자신이 '다발성 증후군'이란 휘귀병으로 온몸이 마비가 되어 가는 증세가 나타나자, 호주 원주민을 찾아가 치료 받는 과정을 그려가고 있다. 그 치료 과정에서 나타나는 형태는 치료 방식이 상당히 프로그램화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치료 프로그램은 과학적이기까지 하다. 반면에 영적인 현상이 나타나서 신비로운 형태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이 살면서 스스로들도 인정하기 어렵고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어떤 알 수 없는 에너지를 사람들은 느끼기도 한다. 단지 인정하기 어려운거 뿐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내가 이 책을 읽는 가운데 나의 무의식은 건드려졌다.

 

다른 심리학 책들을 읽으면서도 무의식이 건드려지는 느낌을 받은 적들이 있다. 다만, 그 내용이 뜻하는 바에 의해서 무의식도 건드려지는 영역들이 조금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이 책의 저자인 게리는 감정체계에 문제가 생겨 '다발성 증후군'을 얻게 된 것이므로, 이 책은 감정체계를 건드리는 형태의 서술이라고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래서 나도 이 책을 읽자 감정체계가 건드려진 것이었다고 여긴다. 덕분에 감정정리여행 시원하게 잘 하고 돌아온 느낌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빅가이'는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하였다. 책에서 빅가이는 '자기 내면의 신'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인간 - 남자의 내면에는 여성성이, 여자의 내면에는 남성성이 있다고 한다. 호주 원주민 치료사도 이 내면의 신적 특질을 지닌 존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즉 사람 각자의 수호천사 형태라고 한다. 이 여성성과 남성성의 신적 특질에 대하여서는 로버트 A 존슨의 책 '내면작업'에 잘 나타나 있다. we, she, he 등등의 저자이기도 하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여성성 남성성은 각 남녀 사람안에 감추어진 잠재적인 특질이기도 하다. 존슨은 일본 다도의 영향도 받았다고 여겨진다. 그는 다도가 가진 특질을 그의 심리학체계에 통합한거 같다고 여겨졌다.

 

겉이 여성형으로 드러나면 내면은 남성성의 잠재특질을 지니게 된다. 자기 내면관리를 통하여 이 특질들을 자기안에서 통합하게 되면, 그 사람의 내면이 안정화 된다. 내면이 안정화 되면 겉도 안정된다. 자기가 자기 통제하에 있으므로 자기 삶이 평안해지게 된다. 우리 조상들이 완전한 인격체를 지향했던 것과도 상통한다. 내면을 조화롭게 만들어 내는 것. 거기에는 예술적 특성들과 자연과의 교감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또한 이 모두를 통제하고 제어할 의식의 고취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했다. 내면을 통제하여 밖으로 꺼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표현형식의 고민은 거기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그건 다시 삶의 양식으로 표면화 되었다. 삶의 양식은 다시 의식을 고양시키고 무의식으로 넘어간다.

 

호주 원주민의 치료 방식의 내용을 보자면, 동양의 초기불교와도 비슷하고, 유식불교와도 흡사하고 선불교적인 측면도 있다. 딴은 보기에 따라서 여러 측면들에서 보는 방식에 따라서 어떠한 것들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호주 원주민의 치유 방식에도 음양이 조화되어 있었다. 어찌보면 동양식이고, 서구의 심리학에서 말하는 여성성 남성성은 원시 신화에 모티브를 두고 있으므로 어찌보면 서양식이다. 그러나 모두 에너지 형태가 그 사람에 맞게 형상화 된 홀로그램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니까 그 사람을 이해시키는 형태로서 나타나는 에너지의 파장이 형상을 가진 홀로그램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마치 잠을 잘때 꿈속에서 펼쳐지는 영상속에서 나타나는 특정한 사람... 즉 자신의 남성성이나 여성성이 나타나는 것처럼 말이다. 호주 원주민의 심리치료 방식에서도 느껴지지만, 현대의 심리학은 그 기원을 원시 무의식까지 거슬러 올라가므로, 동서양의 무의식 기제들이 점차로 통합되는 형태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가만히 끌어안다> 책에서 말하는 치유 프로그램은 이런 순서로 진행되고 있다. 기꺼이 하려는 마음, 알아차리기, 받아들이기, 힘 부여하기, 집중하기이다. 단계별로 진행된다고 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이미 내가 알고 있었다고... 여기게 된 이유가 바로 이 프로그램 순서이었다. 아주 낯이 익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것도 잠재의식인 것일까... 나는 사람이 어떤 일을 해보거나 자기 무의식적 압박에서 벗어날때, 대체로 이러한 방식을 사용하게 된다고 여긴다. 잠재적 무의식적이든, 학습된 형태이든 말이다. 이러한 형태로 내면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이유는, 몸에서 정신에서 마음에서 느끼는 형태로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외의 다른 걸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공통점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여긴다.

 

이 책은 더구나 편집도 훌륭하다. 각 챕터별로 소 제목이 붙어 있는데, '가만히 끌어안다'가 정말로 이 모든 소 제목들을 가만히 따뜻하게 강하게 끌어안고 있다. 자신들의 특질들과 잘 조율되면, 내면은 부드러워져 윤활유가 잘 흘러 경직되지 않고, 의식은 오히려 강해져서 내면세계와 바깥세계를 잘 연결시켜 준다.

 

<가만히 끌어안다> - 한때 알았던 세계와 작별하기 , 상처받은 영혼은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 외면하지 않을 용기, 결국 아무도 없었다, 모난 삶도 보듬다 보면, 내 인생을 책임지는 법, 코끼리 생각하지 않기, 몸이 알고 있는 진실을 찾아, 나에게 달린 일, 영혼의 소리를 듣다, 끝내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면. 각 챕터들은 지극한 사유의 힘을 느끼게 하였다. 언어가 아름답다는 느낌도 들게 하였다.

 

각 챕터로 넘어갈때마다 묘한 흥분과 위안을 느끼게 될 것이다. 책 한권이 주는 힐링이 있다면 아마 이런 느낌일 것이다. 책마다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다르지만, 그 책 한권과 여행을 하며 자신을 거기에 온전히 담구었다가 꺼내면, 그것이 바로 제대로된 책 읽기 힐링이라고 여긴다. 자기를 만나고 나오고 세계를 만나고 나오는 것. 그것이 책읽기가 아닌가 싶다.

 

사람은 자기 자신도 바깥환경으로 여긴다. 그러니까 뇌에게는, 더 정확히는 의식에게는 의식을 제외한 모든 것이 자기 바깥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의식을 확장하여 자기를 더 넓게 인식시키는 것이야말로 자기 환경을 좋게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으로는 내면세계 저 깊숙한 무의식을 끌어안아야 하고, 밖으로는 자기 정신세계가 미치는 범위를 사유하여야 하고, 실제로 사는 현실의 세계를 가꿀 때 자기환경은 좋은 상태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모든 것은 자기 몸을 통하여 일어난다. 그러니 시작도 최종적인 것도 자기 몸을 통한다. 눈,코,입,귀, 몸을 통하여 뇌를 거쳐 의식은 일어난다. 모든 감정체계는 자기안에서 경험된 세계와 이미 축적된 세계를 통하여 일어난다.

 

<가만히 끌어안다>책은 지금 변화하고자 하나 방향이 불분명할때 우리들 삶의 형태에 에너지를 부여하는거 같다. 아름답게 잘 편집되어 더 가슴으로 스며오는 책, 혹여 자신의 감정과 부딪치더라도 끝까지 따라가 보기를 권유해 본다.

1. 좋은 글귀, 마음에 드는 가사 인상 깊은 영화 대사 등을 메모해 주세요.
2. 출처를 넣어주세요. ex) 234page, 4번 트랙<사랑해>, <브리짓존스의 다이어리>에서 브리짓의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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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끌어안다 - #저자게리홀츠_로비홀츠_옮긴이강도은_출판사행성B잎새 | 나의 리뷰 2017-07-15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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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끌어안다 - #저자게리홀츠_로비홀츠_옮긴이강도은_출판사행성B잎새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요즘 일상에서 내가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알아가는 느낌이었다. 이 책을 낭독을 통해 절반을 읽을 때에는 여러 목소리들은 저마다 독특함이 있어서 전달되는 느낌들이 보다 더 풍부하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낭독을 통한 책읽기는 무의식을 자극하여 머릿속을 한차례 뒤집어 놓은 것과 같았다. 이리 태풍이 바닷속 뒤집어 순환하게 만들어 놓듯이 낭독으로 뒤집고 엎어 놓은 무의식은 남은 절반의 책을 읽어 가는 도중에도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이미 이 책 내용들이 뜻하고 있는 바를 알고 있다고 여겨졌다. 사람마다 환경이 다르고 상황은 다르지만, 그 작동하는 메커니즘은 같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어가자 잔잔하던 내면에 돌 하나 던져 가라앉아 있던 온갖 부유물들이 떠올라 금새 혼탁해졌다. 무의식의 영역에서도 감정체계들이 건드려진 느낌이었다. 감정체계들이 뒤죽박죽된 느낌이었다. 그러자 의식이 가려졌다. 머리도 무겁고 몸도 잠겨버리는 느낌이었다. 컨디션이 난망해졌다. 그럼에도 무의식은 계속 왕성하게 활동 하였다. 온갖 상념들이 떠올랐다. 지난 시간들의 기억은 그렇게 잠복되어 있었다.

 

어린시절부터 최근까지의 감정의 부산물들이 이젠 내차례야 하듯이 하나씩 솟구쳤다. 그럴때마다 감정은 요동쳐서 분노와 화와 슬픔과 미움과 안쓰러움과 후회와 원망과 회한과 서러운 감정들이 같이 나타났다. 나는 감정의 부산물들이 불러 일으키는 기억들과 동시에 나타나는 대표적 감정들에 같이 흠뻑 놀아 주었다. 그 안에 잠겨서 충분히 그 기분을 만끽하여 주었다. 그래 억울했겠다. 그래 슬펐겠다. 그래 기뻤겠다. 그래 화났겠다. 그래 아팠겠다. 그래 울고 싶었겠다. 그래 후회 되었겠다. 그래 미웠겠다. 그래 안타까웠겠다. 그래 안쓰러웠겠다. 그리 그 감정에 충실하게 따라가 주고 느껴 주었다. 그렇다고 하여 심리안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이었다. 단지 머릿속이 탁해졌고, 몸은 잠긴듯 하였을 뿐이다.

 

나는 내가 평소에 해오던데로, 이건 진짜 내 마음이 아니야... 로 감정의 부산물들을 거둬내어 가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솟아나는 감정의 부산물들과 마주하여 나를 보았다. 하나씩 정리해가듯 하나하나 감정의 부산물들을 벗겨내었다. 오늘은 이 혼탁함에서 벗어날듯도 하여 에어컨을 꺼놓고 차를 마시면서 땀을 배출시켰다. 그러자 바닥에 발이 닿는 느낌이 들었다. 심연에서 드디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러자 의식이 맑아졌다. 무의식은 이제 안정화 되었다.

 

그 무의식을 만난 순간은 어떤 불편한 기제들이 자꾸 꾸물꾸물 거리며 머리속을 가득 채워버리는거 같았다. 무의식의 바다가 요동을 치기 시작하자 의식은 저 뒤로 가리워졌다. 그 상태에서 무의식을 만난 것이다. 나의 감정의 부산물들을 만난 것이다. 이 부산물들과 대면하고 난 후 의식은 다시 주인이 되었다. 의식은 무의식이 전해준 이야기들을 잘 알아 들은듯 하였다. 머릿속은 차분해졌다. 나는 알고 무의식과 만난 것이다. 무의식을 대면할때는 기분이 완전히 가라앉아서 컨디션 성태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쳐내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나는 내가 지금 경험한 내면세계를 바로 지금 알 필요가 있었다. 의식은 그때 자리를 비켜 주었으나 아주 가리워진 것은 아니고 나를 통제하고 있는 상태였다.

 

<가만히 끌어안다>책은, 저자인 게리 자신이 '다발성 증후군'이란 휘귀병으로 온몸이 마비가 되어 가는 증세가 나타나자, 호주 원주민을 찾아가 치료 받는 과정을 그려가고 있다. 그 치료 과정에서 나타나는 형태는 치료 방식이 상당히 프로그램화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치료 프로그램은 과학적이기까지 하다. 반면에 영적인 현상이 나타나서 신비로운 형태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이 살면서 스스로들도 인정하기 어렵고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어떤 알 수 없는 에너지를 사람들은 느끼기도 한다. 단지 인정하기 어려운거 뿐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내가 이 책을 읽는 가운데 나의 무의식은 건드려졌다.

 

다른 심리학 책들을 읽으면서도 무의식이 건드려지는 느낌을 받은 적들이 있다. 다만, 그 내용이 뜻하는 바에 의해서 무의식도 건드려지는 영역들이 조금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이 책의 저자인 게리는 감정체계에 문제가 생겨 '다발성 증후군'을 얻게 된 것이므로, 이 책은 감정체계를 건드리는 형태의 서술이라고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래서 나도 이 책을 읽자 감정체계가 건드려진 것이었다고 여긴다. 덕분에 감정정리여행 시원하게 잘 하고 돌아온 느낌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빅가이'는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하였다. 책에서 빅가이는 '자기 내면의 신'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인간 - 남자의 내면에는 여성성이, 여자의 내면에는 남성성이 있다고 한다. 호주 원주민 치료사도 이 내면의 신적 특질을 지닌 존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즉 사람 각자의 수호천사 형태라고 한다. 이 여성성과 남성성의 신적 특질에 대하여서는 로버트 A 존슨의 책 '내면작업'에 잘 나타나 있다. we, she, he 등등의 저자이기도 하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여성성 남성성은 각 남녀 사람안에 감추어진 잠재적인 특질이기도 하다. 존슨은 일본 다도의 영향도 받았다고 여겨진다. 그는 다도가 가진 특질을 그의 심리학체계에 통합한거 같다고 여겨졌다.

 

겉이 여성형으로 드러나면 내면은 남성성의 잠재특질을 지니게 된다. 자기 내면관리를 통하여 이 특질들을 자기안에서 통합하게 되면, 그 사람의 내면이 안정화 된다. 내면이 안정화 되면 겉도 안정된다. 자기가 자기 통제하에 있으므로 자기 삶이 평안해지게 된다. 우리 조상들이 완전한 인격체를 지향했던 것과도 상통한다. 내면을 조화롭게 만들어 내는 것. 거기에는 예술적 특성들과 자연과의 교감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또한 이 모두를 통제하고 제어할 의식의 고취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했다. 내면을 통제하여 밖으로 꺼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표현형식의 고민은 거기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그건 다시 삶의 양식으로 표면화 되었다. 삶의 양식은 다시 의식을 고양시키고 무의식으로 넘어간다.

 

호주 원주민의 치료 방식의 내용을 보자면, 동양의 초기불교와도 비슷하고, 유식불교와도 흡사하고 선불교적인 측면도 있다. 딴은 보기에 따라서 여러 측면들에서 보는 방식에 따라서 어떠한 것들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호주 원주민의 치유 방식에도 음양이 조화되어 있었다. 어찌보면 동양식이고, 서구의 심리학에서 말하는 여성성 남성성은 원시 신화에 모티브를 두고 있으므로 어찌보면 서양식이다. 그러나 모두 에너지 형태가 그 사람에 맞게 형상화 된 홀로그램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니까 그 사람을 이해시키는 형태로서 나타나는 에너지의 파장이 형상을 가진 홀로그램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마치 잠을 잘때 꿈속에서 펼쳐지는 영상속에서 나타나는 특정한 사람... 즉 자신의 남성성이나 여성성이 나타나는 것처럼 말이다. 호주 원주민의 심리치료 방식에서도 느껴지지만, 현대의 심리학은 그 기원을 원시 무의식까지 거슬러 올라가므로, 동서양의 무의식 기제들이 점차로 통합되는 형태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가만히 끌어안다> 책에서 말하는 치유 프로그램은 이런 순서로 진행되고 있다. 기꺼이 하려는 마음, 알아차리기, 받아들이기, 힘 부여하기, 집중하기이다. 단계별로 진행된다고 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이미 내가 알고 있었다고... 여기게 된 이유가 바로 이 프로그램 순서이었다. 아주 낯이 익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것도 잠재의식인 것일까... 나는 사람이 어떤 일을 해보거나 자기 무의식적 압박에서 벗어날때, 대체로 이러한 방식을 사용하게 된다고 여긴다. 잠재적 무의식적이든, 학습된 형태이든 말이다. 이러한 형태로 내면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이유는, 몸에서 정신에서 마음에서 느끼는 형태로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외의 다른 걸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공통점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여긴다.

 

이 책은 더구나 편집도 훌륭하다. 각 챕터별로 소 제목이 붙어 있는데, '가만히 끌어안다'가 정말로 이 모든 소 제목들을 가만히 따뜻하게 강하게 끌어안고 있다. 자신들의 특질들과 잘 조율되면, 내면은 부드러워져 윤활유가 잘 흘러 경직되지 않고, 의식은 오히려 강해져서 내면세계와 바깥세계를 잘 연결시켜 준다.

 

<가만히 끌어안다> - 한때 알았던 세계와 작별하기 , 상처받은 영혼은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 외면하지 않을 용기, 결국 아무도 없었다, 모난 삶도 보듬다 보면, 내 인생을 책임지는 법, 코끼리 생각하지 않기, 몸이 알고 있는 진실을 찾아, 나에게 달린 일, 영혼의 소리를 듣다, 끝내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면. 각 챕터들은 지극한 사유의 힘을 느끼게 하였다. 언어가 아름답다는 느낌도 들게 하였다.

 

각 챕터로 넘어갈때마다 묘한 흥분과 위안을 느끼게 될 것이다. 책 한권이 주는 힐링이 있다면 아마 이런 느낌일 것이다. 책마다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다르지만, 그 책 한권과 여행을 하며 자신을 거기에 온전히 담구었다가 꺼내면, 그것이 바로 제대로된 책 읽기 힐링이라고 여긴다. 자기를 만나고 나오고 세계를 만나고 나오는 것. 그것이 책읽기가 아닌가 싶다.

 

사람은 자기 자신도 바깥환경으로 여긴다. 그러니까 뇌에게는, 더 정확히는 의식에게는 의식을 제외한 모든 것이 자기 바깥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의식을 확장하여 자기를 더 넓게 인식시키는 것이야말로 자기 환경을 좋게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으로는 내면세계 저 깊숙한 무의식을 끌어안아야 하고, 밖으로는 자기 정신세계가 미치는 범위를 사유하여야 하고, 실제로 사는 현실의 세계를 가꿀 때 자기환경은 좋은 상태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모든 것은 자기 몸을 통하여 일어난다. 그러니 시작도 최종적인 것도 자기 몸을 통한다. 눈,코,입,귀, 몸을 통하여 뇌를 거쳐 의식은 일어난다. 모든 감정체계는 자기안에서 경험된 세계와 이미 축적된 세계를 통하여 일어난다.

 

<가만히 끌어안다>책은 지금 변화하고자 하나 방향이 불분명할때 우리들 삶의 형태에 에너지를 부여하는거 같다. 아름답게 잘 편집되어 더 가슴으로 스며오는 책, 혹여 자신의 감정과 부딪치더라도 끝까지 따라가 보기를 권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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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어 오는 곳 - 어쿠스틱 뮤지컬 | 나의 리뷰 2013-07-25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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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어오는 곳'
김광석의 감성과 기억이 넘실대는 어쿠스틱 뮤지컬.

보는내내 이십대부터 지금까지의 기억들이 파도 타기를 하였다.

이 극본을 쓰고 기획한 이금구님은 기억에 대해 얘기 했는데, 추억과 기억은 다르다는 의견에 공감했다.
기억은 곧 현실이다. 기억하고 싶거나 기억하고 싶지 않거나 이 둘은 여전히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이 둘이 추억이 될때 우리는 편안해질 수 있다.

기억하고 싶어서 망각하지 못하고 계속 살려내는 것과 기억하기 고통스러워도 계속 기억을 상기시키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기억을 놓지 않는다는 것은 그 무엇인가가 자신의 삶에 계속 관통되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순간들이 계속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기억하기 고통스러워도 계속 기억이 되살아나는 이유는 넘어서야만 하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이 두가지의 기억되는 방식에서 보자면, 이 둘은 대칭되어 있다. 뒤섞여 있다. 어쩌면 이런 두 가지 기억의 방식으로 삶이 이끌어 내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거기서 더 능동적인 대처를 하는가? 수동적인 대처를 하는가? 에 따라서 기억은 예술이 되기도 하고 망각의 저편으로 봉인되기도 한다.

(김광석을 기억한다)와 (김광석을 추억한다)의 차이는 실로 크다. 기억하는 이와 추억하는 이의 삶의 태도가 달라진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또 무엇은 추억해야 하는 것일까?
기억은 리얼이고 추억은 낭만이다. 기억하기 때문에 삶에서 그 기억된 요소들은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그 기억이 한 개인에게, 혹은 한 세대에게, 혹은 그 사회에 추억으로 아련해질때 그 하나의 사건은 일단락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기억이 순탄하게 추억으로 넘어가는 일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강제 봉인이라는 형태가 더 많다고 여겨진다.

아직은 기억하고 기억해줘야 되는 많은 세상의 일들에서 그 세상의 일이 나의 일이 되기도 하는 순간들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곳'은 그런 상념들과 어떤 한 세대와 세대가 만나고 넘나드는 묘한 에너지 작용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주 일요일이 마지막 공연이라서 캐스트들이 다르다고 하니, 한 번 더 보기로 했다.
그날은 '너무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 파이널송 이라고 한다.

대구에서 시작해서 앵콜공연으로 대학로에서 진행된 공연인데, 조명도 특별히 좋았고..ㅋ~
특별케스트 오만석님도 등장해서 재미 있었다. 특별 게스트들은 신선한 바람과도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ㅎ~ 표창원님도 봤다.

이번 공연이 마무리 되면 대구로 다시 앵콜공연 간다고 하는데, 이 공연이 장기적으로 진행되려면 캐스트들이 잘 섭외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아무래도 관객들이 인지도나 검증이 된 배우들을 선호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배역과 특별캐스트들이라도 무리없이 잘 진행되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속사정은 잘 모르겠으므로, 지속적으로 더 완성도가 쌓여가서 장기공연이 차질없이 잘 진행되기를 바래본다.

김광석역의 더블 캐스팅된 풍세역 박창근님은 김광석 노래를 자기만의 색깔을 입혀 부르는데 전율이 인다고 한다. 그래서 일요일이 기대된다.

또 한 분의 풍세역은 최승열님인데 김광석의 노래를 가장 잘 소화한다고 한다. 직접 들어보고, 중간에 눈을 감고 감상해보았는데, 정말 김광석 삘이 물씬 풍겼다.

멀티맨의 활약은 웃음요소와, 극의 진행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요소였다. 선영과 상준과 소현 그리고 종화....이들의 삶의 흐름은 90년대를 관통하며 흘러온 그 세대들의 자화상 같기도 하다.

선영아! 사랑해!
버스마다 새겨진 광고문구...시대의 키워드로 작용하고 있는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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