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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모정 - 영화 [마마] 리뷰 | Cinema Voyage 2014-03-27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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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마마 (디지털)

안드레스 무시에티
스페인, 캐나다 | 2013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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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마] 리뷰

검은 모정

 

 

1.

 

 

 침팬지를 오랜 시간 연구한 제인 구달 여사의 이야기. 침팬지는 모성이 굉장히 강한 동물이란다. 아기 침팬지는 어미 침팬지와 정서적으로 오랜 시간동안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는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침팬지 사이에서도 어미 침팬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몇 년 동안 어미에게 사랑을 받던 수컷 침팬지에게 암컷 아기 침팬지, 말하자면 여동생이 생긴다. 오빠 침팬지는 순식간에 질투에 휩싸인다. 어미 침팬지의 모든 관심이 갓 태어난 여동생에게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질투를 이기지 못한 오빠 침팬지는 어미 침팬지가 소홀한 틈을 타서 놀랍게도 여동생을 갖다 버린다! 그렇게 하면 오빠 침팬지는 어미 침팬지의 사랑을 독차지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새끼 침팬지를 잃은 어미 침팬지는 슬픔에 잠겨 식음을 전폐하며 새끼를 찾아다닌다. 안타깝게도 몇 달 후 어미 침팬지는 목숨을 잃는다. 새끼를 잃은 슬픔이 어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하지만 이 침팬지 가족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어미를 잃은 오빠 침팬지 또한 어미를 잃은 슬픔으로 그녀의 곁을 내내 지키다 목숨을 잃는다. 모정이란, 어미와 자식 간의 관계란 정녕 이다지도 지독한 것일까?

 

 

2.

 

 

 공포 만화가 이토 준지의 이야기. 실은 [미미의 괴담]이라는 괴담 집을 이토준지가 작화한 것이다. 이 만화에서도 영화 [마마]와 상당히 흡사한 괴담이 등장한다. 케이라고 불리는 여자아이의 어머니가 어떤 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 분신자살을 한다. 인적이 드문 공원에서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인 것이다. 목격자나 말리는 이가 없었으므로 그녀의 몸은 숯처럼 처참하게 타버렸다. 귀신을 볼 수 있는 미미의 집에 케이라는 여자아이가 잠시 맡겨진다. 하지만 케이라는 여자아이는 한사코 혼자 있기를 거부한다. 두려움에 떨며 칭얼거리는 케이를 진정시키면서 미미가 그 이유를 묻는다. 케이의 대답은 섬뜩하다. 내 곁에 까맣게 타버린 사람이 항상 서성거린다고. 케이에게 아직 알리지 않은 엄마의 죽음과 까맣게 타버린 그녀의 시신. 죽어서도 그녀는 아이를 보살피고 싶었던 것일까? 이 모정 또한 지독하다.

 

 

3

 

 

 영화 [마마]는 제목 그대로 엄마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공포영화이니 이 모정에는 위험함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빅토리아와 릴리를 위험에 몰아넣은 이는 역설적이게도 아이들의 친아버지이다. 비정한 부성의 선택을 필사적으로 막은 이는 누구인가? 관객은 추측으로 아이들의 친어머니를 떠올렸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으니.

 

 

 죽어서도 모정은 이어진다. 이 영화의 핵심을 관통하는 문장이다. 영원한 엄마의 사랑. 하지만 어떠한 모정인지가 중요하다. 이것은 영화 [마마]의 가장 중요한 열쇠이자 반전이므로 밝히지는 않겠다. 야생 상태에 방치된 릴리와 빅토리아는 5년 간 실종되었다가 극적으로 발견된다. 아이들이 생존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깊은 산 속 폐가나 다름없는 오두막에는 아이들을 위해 채집한 것이 분명한 버찌열매 씨앗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누군가 분명 아이들을 돌봤다. 그런데 도대체 누구인가?

 

 

 아버지의 동생이자 아이들의 삼촌인 루카스가 그들을 맡는다. 언니인 빅토리아의 사회화와 적응은 빠른 반면 유아상태로 야생에 방치되었던 동생 릴리는 사회화의 적응이 더디다. 그들을 연구하고 싶어 하는 드레이퍼스 의사와 삼촌 루카스 그리고 그의 약혼녀 에너벨이 실질적으로 그들을 돌볼 보호자이다. 그런데 아이들만 온 것이 아니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검은 존재까지 아이들과 함께 딸려와 버렸다. 5 년 동안 아이들을 돌볼 이가 그 검은 존재인가?

 

 

4

 

 

 나방의 의미. 불길한 검은 통로로부터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나방은 죽음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신기하게도 죽음으로부터 부화하는 검은 나방이 어쩌면 릴리를 살린 양식이었는지 모른다. 빅토리아는 문명화된 사회를 희미하게나마 습득했으나 릴리에게는 검은 모정이 온전한 어머니였을 것이다. 결말의 불만스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릴리의 선택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을까? 친부와 친모의 사랑을 느낄 겨를이 없었던 릴리에게 검은 모정이 온 세상의 전부가 아니었을까?

 

 

5

 

 

 영화 [마마]에서는 놀라운 장면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 장면들 중 많은 부분이 루카스와 에너벨의 꿈의 이미지이다. 특히나 루카스의 꿈의 이미지는 초현실적인 회화의 분위기를 풍긴다. 애너벨의 꿈 또한 기묘한 일인칭 시선을 차용해서 영화의 실마리를 효과적으로 건네준다. 닥터 드레이퍼스와 유령의 만남은 태국영화 [셔터]의 아이디어와 비슷하다. 스트로보의 발작적인 섬광효과로 긴장을 유발시키는 방식은 기시적이지만 여전히 두렵고 인상적이다. 몇몇 장면에서는 제법 놀랄 수밖에 없는 명민한 공포의 타이밍과 효과음이 존재한다. 결말의 아쉬움을 차치하고서라도 여러 가지 의미로 [마마]는 인상적인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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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성장기 - 영화 스토커 리뷰 | Cinema Voyage 2014-03-06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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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스토커(디지털)

박찬욱
미국, 영국 | 2013년 02월

영화     구매하기

 

 

 

 

어떤 성장기

 

영화 <스토커> 리뷰

 

 

 

 

 

 

 이런 성장기가 있다. 암중모색 중에 있었던 자신의 정체성을 서서히 알게 되는. 그런데 이 정체성에는 치

 

명적인 문제가 있다. 차라리 알지 말았으면 하는 악의 낌새를 품고 있는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인디아는

 

그것을 샤워를 하면서 깨닫는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살인의 상상을 떠올리는 인디아는 자

 

위를 하며 그 상상을 한껏 만끽한다. 살인이 즐겁고 무엇보다도 짜릿하다는 사실을 처음 인식하게 되는

 

그녀. 범죄학에서 종종 언급되는 살인 후의 여운을 즐기며 성적인 쾌락과 연관시키는 연쇄살인범들의 심

 

리를 영화는 교과서적으로 보여준다. 그녀의 차가운 낌새가 내내 의심스러웠던 나는 그 장면으로 그녀가

 

‘어린 사이코패스’임을 직감했다. 소설 <나쁜 종자>의 천진하면서도 사악한 로다처럼.

 

 

 

 

 그렇다면 이 영화는 성장통의 영화일 것이다. 물론 평범한 성장 통은 아니다. 영화 <오멘 -데미안>에서

 

의 악마의 수인 표를 확인한 데미안이 자신의 정체성을 괴로워하다 스스로 악마임을 받아들이는 과정의

 

성장 통이라면 좀 비슷할까? 그런데 인디아는 남과 다른 스스로의 끔찍한 정체성에 대해서 그다지 큰 고

 

민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본질을 알려주기 위해서 온 삼촌의 가르침을 조심스럽게 따라가거나 지켜

 

보고 혹은 같이 동참할 뿐이다. 이런 그녀라면 남과 다른 끔찍한 낙인 정도는 스스로 극복하고 삼촌을 뛰

 

어넘는 존재가 되지 않을까? 평범한 인간인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절망스럽고 어두운 길이다.

 

 

 

 감정의 기복이 없는 인디아의 차가운 표정처럼 영화 또한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 장면 하나 하나를 세공

 

품처럼 다듬어 놓은 솜씨 또한 일품이다. 오프닝 크레딧은 봉 준호 감독의 <마더>를 연상시키며 내러티

 

브의 구조 또한 비슷하다. 결말의 장면을 먼저 보여주고 이후에 처음부터 이야기를 채워가는 것. 그런데

 

박 찬욱 감독은 이번 영화에 장면마다 굉장히 공을 들였다. 수공예를 연상시키는 장면들 안에 감독은 심

 

상치 않은 상징들을 정성스럽게 씨앗처럼 심어 놓았다. 사실 어떤 상징들은 바로 읽히고 어떤 상징들은

 

인디아의 마음처럼 의혹에 가득 차 있고 의심스럽다. 하지만 정교하게 배치해 놓은 상징들의 모양새는 확

 

실히 고혹적이면서도 매력적이다.

 

 

 

 아빠와 사냥을 즐기던 인디아. 그녀는 잡은 동물들을 박제하는 독특한 취미를 가졌다. 약육강식이 여지

 

없이 드러나는 다큐멘터리를 보여주었던 것은 인디아의 포식자적인 성향을 상징적인으로 표현하려는 의

 

도였으리라. 삼촌 찰리와의 피아노 협연 중 벌어지는 야릇한 성적인 긴장 또한 인상적인 부분이다. 소극

 

장의 연극처럼 세 명의 인물은 서로에게 긴장과 의혹 그리고 성적인 분위기를 주고받는다. 하지만 그런

 

긴장이 잘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부분에서는 의혹의 밀도가 떨어지기도 한다. 다소 연극적이기도

 

하고 인디아와 찰리와는 달리 이블린의 존재감이 흐려지는 부분도 존재한다. 물론 엄마인 이블린도 인디

 

아의 정체성을 알게 되지만 그 부분에서 영화적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대체로 이블린의

 

존재감은 결말부분에서 모호해진다. 사실 영화에서는 인디아와 삼촌 찰리와의 교감 부분이 가장 크게 부

 

각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제(?)지간이라는 관계를 생각한다면 그 관계가 긴밀해야 함은 어쩔 수 없겠지

 

만)

 

 

 

 인디아의 선택은 다소 의외였다. 먹잇감이 자신의 시야와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기 전에는 절대로 움직이

 

지 않는 맹수처럼 인디아는 침착하게 기다렸고 처음으로 그녀만의 성인식을 치렀다. 그런데 그 성인식의

 

제물이 의외이다. 거미를 보여준 것은 혹 그것 때문일까? 자기가 정성스럽게 키운 새끼거미가 종내에는

 

어미 거미의 몸을 갉아 먹고 어른 거미가 되는 것처럼 인디아도 그런 잔혹한 과정을 거쳤다는 것인가? 그

 

렇다면 엄마 이블린은 차라리 가여운 존재가 아닌가? 사냥할 가치도 없이 시시한 존재였다는 말일까? 엄

 

마 이블린은 낯설어지는 인디아를 경계했다. 신체적 접촉을 피하고 아버지의 죽음에도 반응하지 않는 무

 

감하고 창백한 인디아의 모습을 보면서 은근한 불안을 느꼈을 것이다. 종내에는 고통스럽게 이블린은 인

 

디아를 향해 묻는다.

 

 

 

“넌 도대체 누구야?”

 

 

 

 단화에서 하이힐로 갈아 신는 장면은 명료하면서도 조금 심심하다. 상징이 교과서적이기 때문이다. 그럼

 

뭐 어떠랴? 아름답고 불온한 장면들이 이 영화에서는 차고 넘치는데. 다만 결말에서 긴장의 끈을 유지했

 

던 세 명의 관계에서 조금은 시시하게 탈락되는 이블린의 역할은 여전히 아쉽다. 영상의 아름다움만큼이

 

나 영화적 전개의 매끄러움에는 끝내 아쉽다. 그러나 영화 <스토커>는 여지없이 아름답고 기분 나쁘게

 

불온하다. 좀처럼 볼 수 없는 핏빛 성장기를 불편한 얼굴로 봐야 하니 말이다.

 

 

 

 인디아는 처음과 끝 독백으로 그녀의 옷차림에 대한 언급을 한다. 아빠의 가죽 허리띠, 엄마의 블라우스

 

그리고 삼촌의 신발. 끔찍한 사춘기와 자신만의 성인식을 치르면서도 자신이 누구로부터 피를 물려받았

 

는지에 대한 자의식의 표현일 것이다. 그 세 명 모두에게서 피를 물려받았다고 말하는 인디아에게 나는

 

고개를 젓고 싶다. 그리고 화사하고 무감한 인디아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넌 도대체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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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의미 | Cinema Voyage 2013-01-16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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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아무르(디지털)

미카엘 하네케
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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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하네케 영화 아무르

 

사랑의 의미

 ‘사랑’이라고 하는 이름의 영화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영화의 제목과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장면과 자주 마주치게 된다. 사랑이라는 단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갈등과 고통이 적막한 화면의 기저에 내내 깔려 있다.

 

 

 그런 까닭에 하네케 감독의 유언을 미리 볼 수도 있다는 영화 [아무르]는 감독의 영상화법이 비록 차분해졌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괴롭고 무참한 질문들을 관객들에게 던진다. 사랑이라는 제목을 하고 있지만 실은 고통이라는 단어에 더욱 가까운 영화이다.

 

 

 두 노부부인 조르쥬와 안느의 삶에 병마라는 불청객이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조르쥬의 아내 안느에게 몸의 부분적 마비와 함께 치매의 전조증상이 찾아온 것이다. 안느의 몸과 마음이 서서히 무너져가면서 조르쥬의 삶도 따라 함께 허물어진다. 나이 든 조르쥬에게 안느의 병마는 힘에 부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르쥬는 그에게 놓여 진 현실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안느를 극진히 간호한다.

 

 

 생로병사라는 수순으로 일컬어지는 인간의 삶에서 늙음과 병마 그리고 죽음의 대면은 그 나이에 도달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단지 예측과 상상의 영역이리라. 사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자신의 노추와 죽음 병마와 같은 단어들은 생각하기 꺼려하고 다른 세상의 이야기처럼 여길 것이다. 영화 [아무르]는 누구도 이야기하기 저어하는 부분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감독이 도달한 나이와 궤를 같이 한다. 그렇기에 영화를 보면서도 감독의 무연한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기묘한 편안함이 나를 감쌌다. 하지만 그 편안함은 결국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하네케 감독은 두 노부부가 행하는 사랑의 방식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차라리 고통이라는 단어에 더욱 가까운 사랑이었지만 절망마저도 받아들이려는 조르쥬의 깊은 얼굴에서 나 또한 사랑을 읽었다. 다만 결말부분, 무너져가는 안느의 귀결에 감독은 차가웠다. 불연속적이었고 다소 폭력적이었다. 사랑하는 이의 절망을 제 손으로 거두는 것도 사랑일까? 이 영화는 울음을 삼켜야하는 끔찍한 영화이기도 하다. 사랑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그 안에는 사랑과 대치되는 많은 감정들도 내포되어 있다. 이 영화의 감동적인 부분이고 혜안이 담긴 선택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롱 테이크 샷과 배경음악이 거의 실종된 적요함이 주를 이룬다. 안느의 제자가 쳤던 슈베르트의 곡만이 유령처럼 귓가에서 맴돌 뿐.

 

 

 조르쥬와 안느가 기거하는 아파트는 온전한 그들의 세계가 되어버린다. 카메라가 도통 밖을 벗어나지 않는 이유이다. 안느의 병으로 인해 운신의 폭이 좁아진 그들 노부부에게 아파트는 안식처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아파트는 그들 노부부를 가두고 고립시킨다. 조르쥬는 외부 사람들의 호의조차도 의심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웃사람, 간호사, 간병인등. 회의와 악의를 품고 있는 이들 모두 조르쥬에게는 무의미한 관계들처럼 보인다.

 

 

 조르쥬는 자취를 감췄고 안느는 안식을 얻었다. 그들의 딸이 마지막 들른 아파트는 비어버렸다. 죽음은 개인의 문제이다. 온전히 죽음을 안은 사람이 치러야 할 고통이자 시험이기도 하다. 안느 옆에서 조르쥬의 헌신이 그 죽음마저 나눠가졌다고 생각했지만 결말은 황폐한 내 안의 슬픔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감독은 마지막까지 여전히 무연하고 무서울 정도로 침착했다. 하지만 이런 고통과 슬픔의 여운도 어쩌면 사랑일까? 정말 그렇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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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야기를 조용히 다시 들으며 -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리뷰 | 책,책,책 2011-07-01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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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회 예스24 블로그 축제 - 나를 한 뼘 성장시킨 책, 영화, 음악 참여

[도서]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저/정현종 역
물병자리 | 2002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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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추천하고 싶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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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리뷰


                   제목: 그의 이야기를 조용히 다시 들으며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이름을 안지는 꽤 되었다. 직접 구입을 하지는 않았지만 누이의 책장에서 얇고 낡은 책 한 권을 발견하면서이다. 청하 출판사의 [자유인이 되기 위하여]라는 연작 형식의 문답 집이었다. 그냥 슬쩍 들춰 본다는 것이 질문의 내용에 눈길이 쏠렸다. 삶은 무엇입니까? 사랑은 무엇인가요? 전쟁은 종식될 수 있는 것입니까? 혹은 죽음은 무엇인가요? 사람이라면, 조금 거창한 말로 실존을 고민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궁금해 할 추상어들이 흥미를 유발시켰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듣고 싶어 하는 질문들. 종교나 철학 혹은 문학이나 무수한 학문들이 탐구해 마지않는 대담한 물음들이 이름도 생소한 한 사람에게 빗줄기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순간 나 또한 그런 질문에 동참하고 싶었다. 깊은 이해를 필요로 하는 화두들을 손쉽게 풀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렇게 조바심 섞인 기대로 그의 대답을 읽었을 때 나는 순간 허망해졌다. 그의 대답은 간결했다. 그리고 그의 그런 간결함은 파격을 뛰어넘는 충격적인 울림이 있었다.


 몇 년이 흘러도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대답과 조언 그리고 우리들을 스스로 깨닫게 도와만 주는(그의 말을 빌리자면) 미력한 조력자의 충고는 현재 진행형이다. 단번에 이해하기 힘든 그의 언어는, 하지만 여타의 철학자들이 위의 추상적 단어를 대할 때의 현학적인 어지러움으로 난해한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의 언어가 이해하기 힘든 것은 복잡함에 있지 않고 차라리 간결함에 있다.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의 언어에는 관념적 수식어나 현학의 늪 따위는 없기 때문이다. 확연하게 보이는 그의 조언은 그렇지만 실천적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놀라운 집중력과 용기가 필요하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깊은 단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순식간에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차라리 본능과도 같이 자발적인 내 안의 혁명의 변화를 지적하고 있다. 집에 불이 활활 타오르는데 당신은 내일 이 불을 꺼야지 하겠는가? 불이 났으면 당장 그 불을 꺼야만 한다. 지금 즉시. 혹은 당신은 지금 뜨거운 난로 위에 앉아 있다. 당신의 반응은 어떠하겠는가? 즉각적인 반응으로 난로 위를 벗어날 것이다. 지금 세계의 비탄과 고통 혹은 전쟁의 비참함은 이런 내 안의 심리적인 즉각적인 반응으로 순식간에 바뀌어야 한다고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말하고 있었다.



 그의 조언을 들으면 일순 혼란에 휩싸인다. 지금까지 내가 믿었던 신념이나, 민족성, 문화, 인종, 음식, 예술, 전통, 국가등과 같은 환경과 지식의 총체적인 것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는 시간에 대한 무용함까지 언급한다. 물리적인 시간은 차치하고서라도 마음속에 벌어지는 심리적인 시간은 일소에 소멸시켜야 하는 장애물뿐이라는 그의 가르침은 나를 적지 않게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것뿐인가? 그의 파격은 끝이 없다. 지식과 사고는 시간, 혹은 과거라고 하는 낡은 체계 속에서 우리의 삶을 딱딱하고 둔하게 만드는 허황된 또 다른 장애물이라는 사실을 낮고도 엄중한 목소리로 조언한다. 시간과 사고 혹은 지식을 순식간에 멈추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혁명적이다 못해서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시간, 사고, 지식 혹은 기억이 자아의 반영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그것을 일소에 말소시킬 수 있을까? 그런 일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그것은 처음부터 내가 알고 경험했던 세계의 모든 것들을 점검해야만 하고 의심해야만 하는 어려운 인식이다. 하지만 그런 의문으로 난처하고 괴로우면서도 그의 조언이 마음 깊이 다가오는 이유는 그가 포기하지 않고 인간의 어떤 선함을 지향하는 말과 간결하지만 깊고 아름다운 의미를 알리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따뜻한 말로 조언하고 같이 서로 배우자고 제안한다.


 그의 말처럼 이 책은 철학의 의미를 담고 있지만 철학적인 책도 아니며, 종교적인 깊음을 간직하고 있지만 종교적인 책도 아니다. 그의 인생처럼 그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의심하고, 떠났으며 인간이 완벽하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으로 전 생애를 산 사람이다. 그 안에는 철학에 대한 울타리나 종교의 규율과 같은 제도적 형식적인 분별을 벗어난 그의 자유로운 삶만이 존재한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은 철학과 종교에 속하지 않는 말 그대로 인간이 어떻게 하면 완벽한 자유로움을 경험할 수 있는지에 대한 관심으로 충만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크리슈나무르티가 말하는 공포를 이해하는 방식은 독특하다. 기쁨과 다른 쾌락이나 욕망은 필수적으로 공포를 불러일으킨다고 그는 말한다. 한 몸에 두 개의 머리가 공존하는 쌍두 사 처럼 그것은 절대로 떨어뜨릴 수 없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무엇을 욕망함으로서 불안과 공포를 피하고 행복해지려고 한다. 하지만 욕망하고 쾌락을 원한다는 것은 그에 반한 똑같은 동량의 공포와 불안을 얻는다는 것과 다름이 아니다. 그를 원한다는 욕망의 그림자에는 나는 그를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을 욕망하면 그 무엇을 잃어버리거나 빼앗기는 것 그리고 그 무엇이 나를 실망시켰을 때 절망하는 것과 같은 공포와 불안 절망이 항상 뒤따른다는 것이다. 그럼 욕망하는 나를 자제시키는 것은 어떨까? 그의 완벽한 자유에 대한 관점으로 볼 때 그것 또한 또 다른 욕망으로의 도피라는 것이다. 욕망하는 나로부터 도피하려는 또 다른 욕망. 그러면 또 다른 딜레마가 생긴다는 것이 그의 전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피하지 말아라. 욕망하는 자신이든 공포를 느끼는 자신이든, 그 욕망이나 공포와 같이 있으면서 거부 감 없이 그것들을 그 자리에서 바라 봐라. 욕망하는 자신. 그 추악한 자아를 피하지 않고 도피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바라보고 그것을 이해하는 길만이 도피가 아닌 욕망으로부터 자아를 이해하고 자유로부터 나아갈 수 있는 빛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공포를 이해하는 방식도 공포와 대면하고 그 공포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면 공포는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키는 이미지의 힘을 잃어 공포 스스로 사라지는 계기를 만들게 된다고 그는 언급한다. 내가 그의 조언에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그의 조언이 난해한 것이 아니라 그의 소박한 조언이 너무나 깊기 때문이다. 갖가지 일상적인 욕망의 덫에 사로잡힌 나로서는 그의 혁명적인 말들은 두렵기까지 하다.


 새는 노래하고 먹이를 찾으며 또한 온 삶을 살아가느라고 죽음을 잊고 지낸다고 그는 말한다. 그가 말하는 죽음의 방식은 삶을 완전하게 살아내는 이해의 방식으로 풀어냄으로서 깨달을 수 있다. 삶과 죽음의 이해가 어느 한 부분으로 치우쳐 있다면 그것은 몰이해와 다름  없다고 크리슈나무르티는 전한다. 추상적 의미에 함몰되어 있는 죽음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그의 조언은 비트겐슈타인의 마지막 명제와도 닮아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우리가 왜 추상적 의미들을 찾아 헤매는지 알려 준다. 하지만 그의 조언은 절망적이면서도 우리들의 마음을 뜨끔하게 한다.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동굴의 우상처럼 우리는 어떤 신적 존재를 찾아 헤매지만 크리슈나무르티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의 사고 속에서는 신적 존재와 같은 신성함이나 죽음 혹은 사랑에 대한 의미를 발견할 수는 절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찾아 헤매는 것은 미지의 것으로 이미 기지의 것이면서 낡은 시간의 축적물인 기억과 사고로는 그런 미지의 것들을 원천적으로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의 의무로 철학의 주위에 겹겹이 덫처럼 쳐진 철학적 관념의 형이상학을 제거해야 한다는 파격적 발언처럼 그의 조언도 혁명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확고하다고 믿었던 지식과 사고의 기존체계로는 미지의 단어들을 절대로 발견할 수 없다는 단언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모든 사고가 멈춘 뒤 기지의 모든 것을 종식시킨 다음에 느껴질 미지의 세계에서 사랑의 근원적인 의미를 본능처럼 알 수 있다는 그의 조언은 역시나 낯설고 낯설다. 하지만 그 낯섦이 내 마음에 기묘한 설렘을 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크리슈나무르티는 그의 천재적인 인식의 깨달음으로 그의 전 사고에 대한 기능을 통찰할 수 있었다. 그조차도 그 일은 대단히 집중을 요하는 일이라고 토로했다. 성경에서 말한 바늘귀보다 좁은 천국의 문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선택의 가부가 이미 선험적으로 내려진 천국의 문의 비유와는 다르다. 이것은 스스로 자아를 찾는 노력에 따라 사람마다 발견의 기쁨이 차이가 있을 뿐 크리슈나무르티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그 안에서 자신의 우주를 만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으니. 그는 가르치는 사람이 아닌 우리와 같이 배우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 했다. 장자에서 나오는 장자를 읽은 뒤 이 모든 것을 잊어버리라는 말처럼 그 또한 그가 남긴 저작들이 사다리가 되어서 그 위를 올라가는 보조적인 역할일 뿐 그 곳에 다다르면 그 사다리를 치워버리기를 바랐다. 아니 차라리 크리슈나무르티는 우리들이 사다리가 되어서 자신을 그 곳으로 인도해 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자신은 무엇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며, 자신 스스로도 나 또한 우리와 함께 배우는 사람이라고 칭했다. 그는 끊임없이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좀 더 완벽한 자유로 동행하고 싶어 했다. 책의 도움 없이 혹은 선생이라고 하는 기존의 권위나 지식 관념과 같은 사고 체계의 낡은 방법에 의지하지 않고 홀로 고독하면서 마음속 자아를 탐험하기를. 그의 자아를 탐구하는 강한 자유의지에 대한 태도는 나를 강하게 매료시켰으며 결국은 그를 사랑하게 만들었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책을 읽으면 가끔 시적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의 젊은 시절 키이츠와 셸리의 시를 탐독했다는 문구를 보았을 때 왠지 반가운 느낌이 들었지만 이것은 순전 나만의 개인적인 투사 일뿐이다. 문학을 좋아하는 나의 시선으로 투사된 그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반가웠다. 사고체계 안에 있는 예술 또한 인간에게 도피의 근거를 마련한다는 그의 조언을 듣고서 한동안 혼란스러웠지만 그것은 어쩌면 사실이기도 하다. 만약 그가 바라는 자유를 사람들이 발견한다면 그 자유 속에서는 예술도 음악도 혹은 다른 여러 형태의 학문들도 새롭게 조명이 될 것이다. 혹은 우리가 이때까지 알지 못했던 전대미문의 고양된 형태의 사랑으로 그의 말대로 세계는 똑같지만 전혀 다른 세계를 접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은 그의 책에서 언급했던 자기로부터의 혁명으로 가능한 일이며 또한 그 혁명에서 촉발되는 한없는 즐거움은 사랑의 진정한 의미와 신의 의미 혹은 죽음의 의미와 같은 추상적 단어들에 대한 경험에 다가갈 수 있다는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말이 길어졌다. 그의 조언을 떠올리면 항상 조심스럽다. 그의 이야기는 굉장히 탈일상적이면서도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역에 대한 호기심 또한 자극시킨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한 번도 자아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고민해 봤던 적은 없는 것 같다. 남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이 실은 본인의 안위를 위한 철저한 이기심의 발로라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얼굴이 화끈해진다. 그리고 그런 철저한 이기심의 자아를 얼굴이 부끄럽다고 피하지 말라고 이른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런 인간을 관찰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것이 어려운 일이면서도 노력이 필요한 일이라도. 이 책의 제목처럼 그는 지식으로부터의 자유를 열렬히 조언한다. 그리고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은 결국 사랑하는 일과 죽는 일과 같다는 간결하고 깊은 말을 남긴다. 사실 골치 아픈 화두이다. 그 또한 전 일생을 배우는 사람으로 남았으니 나는 이 책으로 하여금 얼마나 배우면서 나아가야 할 것인가? 나에게 물려 있는 수많은 일상의 덫 하나라도 올곧이 바라보면서 그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오늘도 그의 조언들을 읽으면서 벼려지고 또한 긴장되면서도 그에게 새삼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또 다른 시선을 갖게 해 준 소박한 현자를 위해서 깊은 인사를 드리고도 싶다.  이것이 나를 한뼘이라는 작은 부분이라도 성장하게 해 준 귀중한 보석같은 선물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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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근원과 선택 - 영화 [엑스맨 - 퍼스트 클래스] 리뷰 | Cinema Voyage 2011-06-28 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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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엑스맨: 퍼스트 클래스 (디지털)

매튜 본
미국 | 2011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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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들의 근원과 선택 


영화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 리뷰




 1. 프리퀄



 근원을 찾아가는 길은 흥미롭다. 시작을 알리는 근원은 모든 이야기의 핵심이자, 구심점이기 때문이다. 또한 근원을 찾아가는 길은 험난한 경우가 많다. 특히나 영화에서는 그 근원을 찾아가는 길이 소재의 고갈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소재의 고갈이라고? 울컥하는 마음으로 반박하고 싶은 혹자들도 계실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헐리우드 형식으로 만들어지는 블록버스터들의 한결같은 마지막 비장의 카드의 핵심은 근원이다.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흥행에 대한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보장과 함께 메마른 오아시스였던 이야기의 샘을 다시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풍성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위험 부담을 차치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야기의 뿌리가 생긴다는 것이다. 누구나 근원에 대한 궁금함은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으니까. 엑스 맨 또한 스핀 오프 시리즈였던 울버린 작품을 염두 해 놓은 상태에서 프리퀄을 선택했다. 울버린이라고 하는 단독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 스핀 오프가 의외로 밋밋한 스토리로 실망을 안겨 주었지만 나와 같이 엑스 맨 팬들의 눈은 다시 한 번 커졌다. 물론 그 눈을 키운 가장 유효한 감정은 의심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엑스 맨: 퍼스트 클래스]를 보고 나면 프리퀄에 대한 의심은 적잖게 사라진다. 이 영화의 근원은 성공적으로 안착하며 순조로운 출발을 알렸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성공적인 성과를 이뤄낸 것이다. 브라이언 싱어가 밀도 높게 조율해 놓은 엑스 맨들의 특성과 심리 그리고 그들의 조화를 이 프리퀄은 또 다른 방법으로 이어나가고 있다. 감독은 캐릭터의 면면에 숨겨진 그들의 근원과 이유, 반목과 비밀을 관객들에게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고 있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근원은 매혹적이고 흥미롭다.



 2. 찰스 자비에의 근원



그의 근원은 긍적적이면서도 밝다. 자신과 같은 돌연변이를 염두 하여 유전학에 몸을 담은 그의 이력도 그답다. 하지만 그의 젊은 시절이 재기발랄하고, 여자에게 작업을 거는 유쾌한 기질에는 살짝 놀란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읽고 조종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인간들과의 조화를 꿈꾸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어렸을 때부터 둘도 없는 친구로 지내왔던 미스틱 레이븐이 있다. 어떤 인물로도 변신할 수 있지만 그녀의 본 모습은 파충류를 닮았다. 찰스 자비에의 숨은 능력과는 달리 그녀의 능력은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는 단점이 있다. 그런 본 모습을 감추면서 인간들 속에서 살고 있는 그녀에게 찰스는 본 모습을 감추면서 인간들과의 조화를 강조한다. 레이븐에게 찰스는 자신을 이끄는 선생님이자 친구 또한 연인이다. 하지만 찰스는 레이븐의 그런 마음을 거리를 두고 친구 이상의 호감을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평범한 삶을 살아 온 그들에게 갑작스럽게 비밀한 사람들이 찾아온다. 찰스나 레이븐과 같이 독특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모임을 만들자는 제의를 하면서. 찰스는 흥미를 느낀다. 그 흥미로움이 종내에는 거대한 두 개의 집단을 만들 것이라는 결과는 그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채로




3.  에릭 렌셔의 근원



 


그의 근원은 어둡다. 유태인으로 낙인 찍혀 유태인 수용소로 끌려간 그는 부모님과 헤어진 그날을 잊을 수 없다. 극도의 분노와 슬픔이 자아낸 그의 숨은 엄청난 초능력. 모든 금속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것을 눈치 챈 수용소 내의 세바스찬 쇼우 박사는 그의 잠재능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에릭의 엄마에게 총을 겨눈다. 셋을 셀 동안 동전을 움직이지 못하면 어머니는 죽는다. 에릭의 노력에도 동전은 움직이지 않고 쇼우 박사는 미련 없이 에릭의 어머니를 향해서 총을 쏜다. 에릭은 어머니의 죽음을 눈앞에서 확인하고 참을 수 없는 분노로 괴성을 지른다. 그러자 방안의 모든 금속 체들이 소용돌이치듯이 그의 분노에 조종당해 아수라장으로 만든다. 쇼우 박사는 그의 능력을 확신하고 그를 훈련시킨다. 그런 훈련 탓이었는지 그의 마음은 얼어붙고 상처를 입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 세계로 도망 다니는 독일의 전범을 찾아다니는 에릭은 상처 입은 동물 같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쇼우 박사의 죽음이다. 그리고 격정의 분노와 슬픔으로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시키며 그것은 결국 그의 죽음과 가까이 대면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찰스는 그런 그를 바로 알아차린다. 쇼우박사가 탄 잠수함을 끝까지 따라가는 그를 찰스는 마음의 목소리로 제지시킨다. 그의 영혼이 깊이 상처 입었다는 사실을 안 찰스는 그에게 자신과 같이 손을 잡을 생각이 없냐고 제안한다. 복수만을 꿈꾸며 살았던 에릭 렌셔에게도 또 다른 친구가 생긴 것이다. 찰스 자비에라는 이름의.





4. 새로운 인물들.




 영화 [엑스 맨]의 가장 큰 매력은 우리를 매혹시키는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새로운 능력자들이 아닐까? 이 영화도 그것에는 예외가 없어서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우선은 케빈 베이컨이 분한 악역의 세바스찬 쇼우 박사이다. 그의 능력은 모든 에너지를 흡수한 다음 그것을 다시 역 이용하는 독특한 인물이다. 에너지로 인하여 늙지도 않으며 냉혈한이고 교활하기까지 하다. 그의 가장 측근이면서 애인인 프로스트의 매력도 빼 놓을 수 없다. 위급한 상황에서는 온 몸이 다이아몬드로 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찰스 자비에와 같은 마음을 읽는 능력자에게 본인의 생각을 감출 수 있는 능력까지 있다. 또한 그녀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짐승의 민첩한 초감각을 소유한 비스트, 강력한 초음파로 물건을 부술 수 있는 밴쉬와 순간 이동 능력의 아자젤 등, 엑스 맨의 시작을 알리는 캐릭터로서도 흥미로운 부분이 많다. 그렇게 많은 인물들을 조율하는 감독의 능력은 인상적이며 갈등을 유발시키는 장치를 효율적으로 적용하는 감독의 능력 또한 유효하다. 엑스 맨들이라고 하는 큰 테두리에서 그들이 스스로 어떤 편에 서는지에 대한 진지함이나 이유들 또한 설득력을 얻고 있으며 (미스틱의 의외의 선택이 사실 한동안 나를 괴롭힌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 선택으로 엑스 맨의 시작을 알리는 마지막 부분에서는 프리퀄에서 파생된 또 다른 이야기의 출발점이 확연해지는 것도 같아 혼자 흥분을 하기까지 했다.



5. 어느 편에 서든지, 혹은




 엑스 맨의 가장 주요한 테마는 선택이다. 신념과 정의 혹은 욕망과 본능. 스스로 돌연변이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고 인간들과의 평화를 원하는 선한 엑스 맨들의 선택은 희생적이기까지 하다. 그들을 향해 냉정하게 쏘아 올려진 미사일은 인간의 우월한 자에 대한 두려움과 이기심이 내포되어 있다. 에릭은 자신의 원수인 쇼우의 복수를 꿈꾸지만, 쇼우 박사의 우리가 우월하다는 믿음에 내밀히 동조한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지극한 아이러니이다. 독일의 나치가 주장한 아리아 인종의 우월함을 내세워 유태인을 학살한 비극의 피해자 중 한명인 에릭이 그런 말에 매혹이 되는 것을 본다면. 하지만 엑스 맨을 절멸시키려는 인간의 치졸한 선택이 에릭의 그런 생각에 비난의 화살을 날릴 수 있을까? 영화 속 인간의 선택 또한 그것과 별반 다름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인간과 날을 세우는 그들의 선택이 본능적이면서도 지극한 욕망에 충실한 편이라면 인간과의 공존을 원하는 선한 엑스맨들의 선택은 고귀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들은 이제부터 인간의 편견과 싸워야 하는 동시에 같은 엑스 맨 들과의 동족 싸움으로 피를 흘려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선한 엑스 맨 들의 복합적 갈등의 밑그림은 전작이었던 엑스맨 시리즈에서 꾸준하게 언급되었던 주요한 상징과 테마 중 하나이다. 찰스 자비에 박사가 어떻게 하바신이 마비가 되는지 또한 에릭의 메그니토라면 트레이드마크처럼 떠오르는 강철 투구가 원래 누구의 것이었는지는 이 영화를 통해서 흥미롭게 밝혀진다. 지극한 인간인 나 또한 이 영화를 보면서 고민에 휩싸인다. 그 고민은 다름 아닌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연약함과 치졸함에 다름 아니다. 선한 엑스 맨 들에게는 그들의 선택이 더욱 큰 딜레마로 작용할지도 모르겠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들을 반신반의하는 인간들과의 협력을 얻어내면서 동족과의 치열한 싸움은 쉽지 않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매그니토의 본능과 욕망 그리고 형제애를 기치로 내미는 손이 엑스 맨들에게 유혹적이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매그니토의 욕망은 어둡지만 그의 입장을 생각한다면 설득력이 있다. 인간의 입장으로서 찰스 자비에 박사의 숭고함을 열렬히 응원하지만 정작 인간과 민족으로 돌아서서 인간이 저질러 놓은 숱한 전쟁의 씨앗들은 매그니토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이 영화가 결국 보여주는 선택의 어려움을 상기시킨다. 우리들은 항상 매그니토의 그것에 비추어서 싸우고 서로를 죽였으므로. 찰스 자비에의 선택은 숭고하면서도 또한 굉장히 멀어 보이는 신기루와 같이 흐릿하다.




6. 찰스 자비에의 의문



영화를 본 분은 아시리라. 찰스 자비에의 능력을. 그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읽고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매그니토의 자장능력은 거대한 물리적 파괴력을 일으키지만 어쩌면 자비에의 심리적인 조종능력 파급효과가 더욱 무시무시하지 않을까? 선한 엑스 맨이기도 한 천재 비스트의 작품으로 탄생한 세리브로는 자비에의 그 능력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 시키고 있다. 그의 독심술과 조종능력을 극대화시켜서 다른 능력을 소유한 이들을 찾아낼 수 있으니. 자비에는 그가 원한다면 매그니토를 제외한 악한 엑스 맨들의 마음을 조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엑스맨 들의 선택의 기로에서 그 선택을 억제할 수 있는 원천적인 무서운 능력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찰스 자비에는 그들의 선택에 어떤 개입도 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엑스 맨 각자의 결정을 존중해 주는 것이다. 비록 인간에게는 악의 편으로 보이는 길을 선택한다고 해도. 미스틱의 변심 또한 알고 있었으나 그는 그녀를 잡지 않는다. 그녀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준 것이다. 오랜 시간동안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미스틱의 심경의 변화는 의외였으나 그녀 본연의 모습을 북돋아 준 매그니토의 충고가 더욱 매력적이었으리라. 자비에 박사의 세상 속 조화와 매그니토의 본연의 모습에 대한 당당함. 미스틱에게도 갈등이었을 이 두 갈림길에서 그녀는 자비에를 져버렸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찰스 자비에 박사는 존중해 주었다. 가만 보면 그의 선함은 정말이지 비현실적이면서도 성스럽기까지 하다. 마음의 복잡함과 소란스러움을 미리 알아버린 듯 찰스 자비에 박사는 자신의 능력으로 인해 이미 깊이를 알 수 없는 평정을 얻은 것일까? 그 평정은 이미 바다의 숭고함에 비견되는 잔잔함을 얻었다고 해야만 할까? 그래서 그의 불구가 더욱 그의 비현실적인, 인간성을 뛰어넘어 보이는 고귀한 영역으로 닿은 것일까? 왜 찰스 자비에 박사를 생각하면 구도자가 생각이 나는 것일까? 발랄하고 자유분방한 젊은 그와 말년의 사색하는 진중한 그와 비교한다면 그나마 전자가 나에게는 가까운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말년의 그는 확실히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도자를 닮았다. 인간의 오욕칠정을 마음만 먹으면 알아낼 수 있는 찰스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숭고함과 범접할 수 없는 성스러움에 닿았던 것은 아닐까? 나에게는 안식과 같은 너그러움이면서도 닿을 수 없는 선함이기도 한. 그렇기에 그는 인간답지 않다. 찰스 자비에 박사의 희생정신은 점점 더 멀어져만 간다. 내 마음에서 더 높이.



7. 에릭  렌셔의 욕망


 에릭 렌셔에게 인간은 상처이다. 팔에 새겨진 수용소 포로의 번호는 마음만 먹으면 지울 수 있지만 그는 그것을 몸에 새겨진 화인처럼 간직한다. 살인병기로 키워진 그의 인생에서 가장 또렷한 인식은 인간이 그에게 문신으로 각인시킨 갖은 상처와 어두움들이다. 미안하지만 욕망하는 에릭 렌셔의 분노와 고통은 인간의 그것을 닮아있다. 찰스가 그의 마음속에서 들끓는 분노를 억제하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그의 자장능력의 향상을 터득시키지만 그것은 자칫 쉽게 더럽혀질 수 있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수많은 인간의 마음을 읽고 난 뒤 터득하게 된 찰스 자비에 박사의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을 절망과 고통으로 상처의 화신이 되어버린 에릭 렌셔에게 깊이 공감하게 하는 것은 처음부터 어려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왜 나는 에릭 렌셔, 매그니토인 그에게서 인간의 모습을 더 많이 발견해야만 하는가? 매그니토의 방어기제는 그의 과거를 돌이켜보면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선택된 소수자로서 다수의 세계가 거부하는 편견을 재편하고 싶어 한다. 아리아 민족의 우월함을 내세운 나치의 우생학의 피해자였지만 그는 폭력으로 상처받은 그의 모습을 그대로 자신의 세계에 투영시킨다. 에릭 랜셔에게 상처를 준 인간들의 존재는 그의 탁월한 초능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뛰어난 지능을 가졌던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과의 진화싸움에서 완벽하게 승리한 것처럼.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 지독한 혐오를 불러일으킨 나치의 슬로건을 그는 그대로 물려받는다. 매그니토는 그가 우월하다는 것을 철저하게 믿는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다. 엑스 맨의 능력을 극도로 두려워 해 미사일을 일제히 발사시키는 인간의 치졸한 행동을 보면 그의 인간에 대한 혐오는 공감 할만하다. 그런 에릭 렌셔의 증오와 분노에서 나는 끊임없이 우리 인간의 자화상을 발견한다. 에릭 렌셔의 혐오, 인간의 치졸함, 우월에 대한 경박한 숭배, 터무니없는 전쟁의 광기, 욕망으로 촉발되어 끝없이 번지는 오해와 편협, 이기심과 지극히 인간적인 이익집단의 판단 등...... 아직도 이런 끔찍한 갈등은 해결되지 않았으며 지금도 여러 나라의 전쟁에서 반복되고 있으니 외면할 수도 없다. 셀 수 없는 이런 욕망의 총체의 극점으로 매그니토 그가 서 있다. 그리고 침울한 표현을 빌려 그의 욕망은 일순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정말이지 이건 긴 싸움의 시작인 것이다. 인류가 저지른 기나긴 전쟁의 역사처럼.





8. 프리퀄 그 이후.



영화 한 편으로 너무 많은 생각을 했다고 지적한다면 조금은 부끄럽긴 하겠다. 이 영화는 근원을 알리는 영화이면서도 엑스 맨에서 항상 상징적으로 논의되었던 선택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 선택으로 각자 보는 관점과 입장의 차이를 갈리면서 그 간극을 줄이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는 고민을 던져 주는 영화였기 때문이었다. 브라이언 싱어의 영화에서 강하게 비춰졌던 그런 고민들이 3편이나 스핀 오프에서 많이 희석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 프리퀄로 또 다시 본래의 화두가 관객들에게 툭 던져졌다. 극장에서는 선한 엑스 맨의 편을 마음껏 들면서 응원을 했지만 어쩐지 머쓱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엑스 맨이었다면? 인간의 입장이 아닌 특별한 능력을 소유한 소수의 인정받지 못하는 자라면?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선함과 악함, 그것은 희미해지고 나의 가치관이나 입장에 따른 선택이 가변적으로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그들의 선택처럼. 또한 그들의 선택 모두에 선과 악이라고 하는 개념을 집어넣을 수 없을 정도로 모호한 혼란에 빠져들 것을 알기에 나는 얼른 인간으로 화해서 그 질문은 교묘히 피해 극장을 나와 버렸다. 여운은 가슴 속에 꼭꼭 챙겨 두고. 다음의 엑스 맨을 기다리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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