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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과 실리 | 기본 카테고리 2022-07-30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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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최명길 평전

한명기 저
보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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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김상헌과 최명길을 명분과 실리의 표상으로 여긴다. 나는 최명길의 성향에 가까운 사람이지만 김상헌의 존재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우연한 기회에 최명길 평전이 발간된 것을 알게 되었다. 쉽게 손이 가지 않을 만큼 분량이 많은 책이었지만 그동안 피상적으로 알아왔던 두 사람을 좀 더 깊이 들여다 볼 생각으로 읽기 시작했다. 메모를 해가며 읽다가 몇 장 지나지 않아 도저히 밑줄을 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책을 도서관에 반납하고 서점에 주문을 넣었다.

 

역사서를 읽는 건 언제나 조심스럽다. 한동안 이덕일의 책에 심취해 지낸 일이 있었다. 이덕일로 대표되는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에도 꽤 오랫동안 귀를 기울였다. 훗날 그것이 허황한 것인 줄 알게 되어 그에 쏟았던 시간이 아까웠고 그 정도도 분별하지 못한 자신이 창피했다. 책을 읽어나가다가 문득 여기에 생각이 미치게 되어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찾아보았다.

 

저자 한명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중심으로 한 조선중기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로 현재 명지대학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류 사학자로서 이 책의 주제가 그의 연구 분야라는 말이다. 이 책을 읽겠다고 올려놓은 글에 몇몇 분께서 저자와 이 책에 대한 호평을 달아놓기도 했다. 병자호란과 광해군에 대한 권위자라는 평도 보인다. 물론 그의 주장을 반박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모두 학문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논쟁이니 그렇다는 사실만 염두에 두고 읽으면 크게 오해할 일은 없겠다 싶었다.

 

삼전도 굴욕

 

김상헌과 최명길이 명분과 실리의 표상으로 남게 된 대표적인 사건은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삼전도 굴욕을 당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인조 15년인 1637년 2월 국경을 넘은 청군이 거침없이 한양으로 내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 하지만 청군에 길이 막혀 하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한다. 김상헌을 중심으로 신료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던 척화파는 결사항전을 주장하고 화친파인 최명길과 몇몇 신료는 종묘사직과 백성이 더 이상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의미 없는 항전을 거둘 것을 주장한다. 결국 인조가 삼전도까지 나아와 청 태종에게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한다. 이렇게 되기까지의 상황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이괄의 난’을 치르면서 평안도 방어 병력은 급감했고 인조의 군사력과 재정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그러다 보니 정묘호란 당시 조선군은 후금군보다 어느 것 하나 나은 것이 없었다. 최명길은 반정 이후 호패법과 군적 업무를 주도하면서 경제력과 국방력의 열악한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청의 침략을 감당할 역량도 없으면서 기존의 형제관계를 끊고 대결을 택하는 것은 자멸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당시 조선이 청과 전쟁에 나설 것을 요구하러 왔다가 서울에 머무는 동안 조선이 그럴 역량을 지닌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명의 사신 황손무가 ‘명을 위해서라도 청과의 관계를 끊어 망국의 화를 자초하지 말라’고 권하는 서한을 보낸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이런데도 당시 언관들은 ‘명을 위해 청과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고집한 괴이한 상황이 벌어진다. 그들에게 조선의 현실이나 존망은 고려할 대상이 아니었고, 명과의 의리를 지키는 것은 외교 현안이 아니라 윤리와 도덕의 문제였던 것이다.”

 

최명길이 내다본 것 같이 국경을 넘은 청군은 파죽지세로 내려오고 인조는 허락을 얻어 청군과 담판을 지으러 떠난다. 인조가 군사 스물을 붙여주지만 숭례문을 나서자 모두 도망하고 최명길 혼자 적진을 향한다.

 

“당시는 엄연히 전시였다. 청군 지휘부가 인조의 피신을 위해 시간을 끌려는 그의 의도를 알아챌 경우 최명길은 곧바로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최명길은 적진으로 나아가 청군의 진격을 멈춰 놓음으로써 인조가 그나마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을 버는 데 성공한다.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 놀라운 용기와 책임감을 발휘했던 것이다.”

 

최명길이 목숨을 걸고 시간을 벌어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지만 당시 한양과 지방의 상황은 이를 데 없이 참혹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머무는 동안 여염집은 불타고, 거리 곳곳에 시체가 널브러지고, 도성에 남은 어린아이들과 노인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몰리고, 전쟁고아도 적지 않았다. 청군이 남하한다는 소식에 삼남지방 수령들이 임지를 버리고 도망쳐 백성들이 동요하고, 경상도 현풍에서는 백성들이 모두 피신해 고을이 비어버리고, 수령이 부재중인 고을에서는 백성들이 관곡을 약탈하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 관아에 불을 지른다. 전라도에서는 무뢰배들이 난동을 일으켜 수령을 쫓아내고, 아전을 살해하고, 관아와 창고에 불을 지르고, 무기고를 습격하고, 옥문을 부수어 죄수를 탈출시킨다. 하지만 청과 화친을 맺음으로서 더 이상 피해가 번지지 않도록 막을 수 있었다.

 

“더 이상 저항이 불가능했던 상황에서 조선의 종사는 보전되었고 인조도 왕위를 유지했다. 문명국으로 자부했던 조선의 지존이 오랑캐 추장에게 무릎을 꿇은 것은 분명 커다란 굴욕이었다. 하지만 사실상 무조건 항복이었음에도 청에게 영토를 떼어주지도 않았고 조선 경제를 마비시킬 정도의 부담도 지지 않았다.”

 

저자는 이 모든 일은 발이 닳도록 남한산성과 청군 진영을 왕래하면서, 때로는 두 진영 모두로부터 비난을 받으면서도 화친을 성사시키기 위해 노심초사했던 최명길의 일관성과 뚝심이 얻어낸 결과였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최명길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용기와 책임감, 그리고 희생정신. 최명길을 생각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덕목이다. 인간의 진정한 본심은 위기를 맞이했을 때 드러난다. 평화롭고 안정적일 때는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 하지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순간 자신이 했던 말에 책임을 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최명길은 평소 ‘청과 화친하지 않으면 종사와 백성을 보전할 수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자신이 했던 말을 실천하기 위해 주저 없이 목숨을 걸었다.”

 

굴욕에 매몰되지 않음

 

삼전도 굴욕 후 풀려난 인조가 도성으로 돌아올 때 백관들은 인조의 어의까지 잡아당기며 다투어 배에 오른다. 인조가 남한산성을 떠날 때 신료 대다수는 인조를 수행하지 않거나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인조를 따라가면 차마 못 볼 것을 볼 것이고 인조와 함께 심양으로 끌려갈지도 모른다고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최명길은 항복 의식 내내 사실상 인조의 보호자 역할을 했음에도 이들과 달리 인조가 도성으로 돌아갈 때 배에 오르지 않고 청군 진영에 남아 곧 심양으로 끌려갈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부부를 돌본다. 청군 선봉이 들이닥치던 날 자발적으로 청군 진영으로 달려가 인조가 피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던 그는 전쟁이 끝나 청군이 서울을 떠나기 전날에도 청군 진영에서 밤을 보낸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이 수많은 간난신고를 감내하면서 종사를 살려낸 최명길은 만고의 간신이 되고 항복 직후 인조를 버리고 낙향했던 김상헌은 영원한 사표가 된다. 그런데도 최명길은 척화신들의 애국심과 충정은 높이 평가한다. 그들의 언동이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었지만 의기가 넘쳐 과격한 말을 내뱉었을 뿐이지 본심은 곧고 옳은 것이라고 인정하였으며,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처벌받은 척화신들을 오랫동안 유배지에 두어서는 안 된다며 사면을 촉구한다.

 

최명길은 환도 직후 조선의 가장 시급한 과제를 청의 엄청난 강압을 이겨내고 일단 살아남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청과의 관계를 안정시키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한다. 이를 효율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국왕 인조의 권위를 회복하고 대신들이 국정을 주도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여겨 조정 개혁론을 꺼내든다. 그러면서 정묘호란 때 화친의 효과를 확인한 인조가 척화파의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엄하게 거절하지 못하고 오히려 척화파를 중용해 오늘날 환란을 초래했다며 인조의 책임을 지적한다.

 

반정 공신 최명길

 

최명길은 스무 살에 생원시, 진사시, 증원시에 모두 합격한다. 생원시에서는 장원을 차지하고 증광시에서는 최연소 합격자였다. 광해군이 왕세자로 있을 때 사부였던 부친 최기남은 계축옥사와 폐모 논의 때문에 관직을 삭탈 당하고 최명길도 권력 실세에 밉보여 광해군 조정에서 쫓겨난다. 반정이 성공한 후 반정공신이 된 최명길은 앞으로 닥쳐올 위기에 대비하고자 한다. 그는 광해군의 내정 난맥상은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광해군이 명과 후금에 취했던 외교 정책을 존중했고, 광해군의 동서로 중용되었던 박엽이 나라의 안위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인재로 판단해 그를 구명하려고 애쓴다.

 

나라가 풍전등화의 지경에 놓였을 때 이와 같이 일관성과 뚝심으로 위기를 돌파해 낸 최명길의 행적을 생각하면 최명길은 당당한 체구에 기품까지 갖추었을 것으로 여기기 쉽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최명길 역을 맡았던 배우의 이미지도 그런 생각에 조금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최명길은 체구가 작고 병약해 모든 사람이 위태롭게 여길 정도로 볼품이 없었다고 말한다. 마흔도 되지 않아 이빨이 반이나 빠져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인조의 반정공신이자 병자호란을 최일선에서 수습한 최명길은 그의 충정을 알아본 인조의 신임으로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역임하면서 조정을 사실상 홀로 이끈다. 그러나 김상헌을 비롯한 척화파 신료들은 병자호란 때 청과 화친을 주장한 최명길이 조정을 이끄는 것에 불만을 품고 귀향해 조정에 참여하는 것을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저자는 이와 같이 근본주의자인 척화파들이 넘쳐나던 당시 조선에서 최명길은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한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한다.

 

존명사상, 그리고 파국

 

최명길은 당대 누구보다 시대 상황을 잘 이해했고 수많은 오해에도 불구하고 그를 바탕으로 나라를 이끌어 갔다. 그렇기 때문에 최명길은 청을 선택하고 명을 배격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최명길에게 청은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지나지 않았고, 그래서 선택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존명의식을 머릿속에 새기며 살아오면서 명을 위해 죽겠다는 다짐을 여러 차례 밝혔다. 전략적으로 행동했으나 근본적으로는 척화파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정치 구도에서 벗어날 생각은 하지 않은, 혹은 하지 못한 것이다.

 

그가 청과 화친하기를 선택한 것은 그렇게 해서 살아남아야 명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럴 정도로 최명길은 철저한 존명 의식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다. 청이 동산에 떠오르고 명이 서산으로 지기 때문에 청을 택한 것이 아니요, 당장은 청을 택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살아남아 궁극적으로는 명의 편에 서서 청을 물리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최명길은 이런 배경을 알려 명이 오해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 인조 16년 가을 인조의 재가를 얻어 승려 독보를 명으로 파견한다. 그는 명 황제에게 보내는 편지를 직접 써서 독보에게 맡긴다. 인조가 아뢰는 형식으로 된 편지에는 조선이 청에 항복하여 명의 신하로서 의리를 훼손하게 된 것을 죽을죄라고 사과하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청에게 굴복하여 명의 은혜를 배신한 과오를 거듭 사과하면서 비통한 심정을 드러낸다.

 

불행하게도 청이 독보를 명에 보낸 사실을 알아차리자 인조는 최명길을 영의정에서 삭탈하고 “최명길이 인조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마음대로 독보를 보냈다”는 내용으로 글을 보내 수습하기로 한다. 최명길은 분명 인조에게 계획을 보고하고 재가를 받아 독보를 파견했음에도 인조는 애초부터 몰랐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도 최명길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청으로 떠난다.

 

청 태종을 기만한 것이 발각되어 심양으로 호출을 받았으니 최명길 본인 뿐 아니라 가족과 친척들마저도 그가 필시 죽게 될 것으로 여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최명길은 심양으로 갈 때 장례도구를 지참했고 가족과 친척들도 그가 필시 죽게 될 것으로 여겨 통곡하면서 전송한다.

 

김상헌과 최명길의 화해

 

귀향한 뒤 현안에 침묵했던 김상헌은 인조가 청의 요구대로 원병을 보내려하자 청을 도와 명을 칠 경우 자칫 명으로부터 보복을 당할 수 있다며 만류하는 상소를 올린다. 불행하게도 그 상소가 청의 감시망에 걸려 김상헌은 심양으로 압송되고 그곳에서 먼저 수감되어 있던 최명길과 만난다. 김상헌은 병자호란이 항복으로 끝난 직후 최명길을 ‘오랑캐를 옆에 끼고 임금을 협박한 흉악한 인간이자 나라 팔아먹은 것을 자신의 공으로 여기는 간신’이라고 저주하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그런 그가 최명길이 수감되어 있는 것을 봤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김상헌은 최명길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비로소 최명길의 충정을 이해한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최명길의 아우가 대사헌에 오른 것에 대해 축하를 건네며 김상헌은 최명길을 “진자리 마른자리 피하지 않고 오로지 임금만 위해 마침내 나라를 보존하고 끝내 명나라를 도와 오로지 용감하게 나아가는 절개가 탁월하여 다른 사람이 따라갈 수 없다”며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최명길은 그 만남이 이루어지기 전에 김상헌을 “도량이 편협하고 기개가 강직하여 잘못 들어간 곳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으니 아마도 그의 식견이 모자라기 때문이 듯하다”고 평가한 일이 있다. 조선의 신하는 조선의 종사와 임금을 먼저 살리는 것이 진정한 의리이지 명을 위해 조선이 망하고 임금이 순국하는 것을 요구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최명길이 과연 김상헌이 자신을 그렇게 높이 평가했다고 해서 저자가 이해한대로 마음을 열고 화해했을지 의문이다. 상대가 나와 다르다고 생각한다면 화해의 여지가 있겠지만 상대가 틀렸고 그것은 그의 식견이 모자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화해는 좀처럼 어려운 일이 아닐까. 인조도 “사람들은 김상헌이 조선 조정과 임금을 버리고 영남으로 돌아간 것을 고상하다고 찬양하지만 영남도 조선 땅이다. 김상헌이 죽을 의사가 없으면서도 앉아서 목을 매어 죽으려는 것처럼 가장했다”며 냉소했다지 않은가. 그런 상황에 무슨 화해가 일어나겠나.

 

최명길은 오늘도 유효한가?

 

인조실록에 실린 최명길의 졸기에서 ‘한 시대를 구한 재상’이라고 표현하기는 했으나 전체적인 평가는 부정적 기조가 강하다. 송시열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종사와 함께 죽지 않은 것을 문제 삼으면서 그 책임을 최명길에게 돌린다. 18세기 인물인 안정복은 최명길을 ‘나라 팔아먹은 사람’으로 매도한다. 청군이 무악재까지 들이닥쳤을 때 최명길이 적진으로 달려가 그들의 진격을 늦춘 것을 사람들이 찬양하는 것도 가소롭다고 폄하한다.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가 부정 일변도인 것만은 아니었다. 숙종은 최명길 덕분에 하마터면 끊어질 수도 있었던 조선의 종사가 존속되고 영토가 보전될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정조는 최명길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국가와 사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평가한다.

 

저자는 방송에서 남한산성에서 최명길의 편에 선 신료는 채 5%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절대다수의 신료가 척화론 편에 섰다는 것이다. 그 방송에 참여한 패널들도 그랬지만 지금은 역사와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최명길이 옳았다고 생각한다(고 믿는다). 시간이 좀 오래 걸렸을 뿐 결국 역사는 최명길의 충정과 진의를 인정했다는 말인데,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그 역사를 지켜본 후대에서는 그런 오류가 되풀이 되지 말아야 하지 않겠나.

 

어디든 김상헌과 최명길은 존재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랬고 역사가 그랬던 것과는 달리 이견(異見)의 현장에는 현실은 외면한 채 명분을 앞세워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언제든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그대로 가면 파멸이 분명한데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마치 남한산성에서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신료가 대부분이었던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산성에 도피한 신료들은 최명길이 열어놓은 문으로 나오고, 명분을 앞세워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은 현실을 인정하고 굴욕을 감수해가며 문제를 해결한 이들 때문에 살아남는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문제를 해결한 이들을 향해 비난을 멈추지 않는다. 명분을 지켰으면 더 큰 이익을 거두었을 것을 명분도 잃고 실리도 잃었다는 것이다. 그 큰 대가를 치르고 얻은 역사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셈이다.

 

책을 덮으면서 하나 의아한 것이 있다. 평전 어디에서도 최명길의 오류를 읽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사람이니 오류가 없을 수는 없는데. 평전이라고 밝은 면만 조명하라는 법도 없을 것이고. 기대를 뒤집은 결과를 얻기도 했다. 나와 다르지만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김상헌에 대한 시각이 부정적으로 바뀌었다. 최명길에 대한 저자의 호감이 행간에 너무 크게 담긴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책을 읽는 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부록을 빼고도 600쪽이나 되는 분량도 한 몫을 했지만, 그보다는 최명길에 감정이 이입되어 진도가 읽기가 더뎌진 탓이다. 바쁘게 사는 현대인들에게 일독을 권하기엔 분량이 조금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권할 만하다. 정히 시간 내기 어렵다면 같은 내용을 다룬 jtbc <차이나는 클라스> 149화(2020.03.18 방송)를 보시라. 이 책의 골자를 불과 한 시간으로 압축해 놓았다. 저자 강의를 처음 들었는데, 참 대단한 이야기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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