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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세적 상상력과 쾌락주의, [소울] | 기본 카테고리 2021-11-15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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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살아가는가? 인생에는 목적이 있는가? 인간은 답을 내리기 위해 질문하지만, 어떤 질문에는 답이 없다. 그런 어려운 질문은 주어진 일상을 바쁘게 살다보면 쉬이 잊힌다. 어느 날, 기진맥진하여 집에 돌아와 지친 몸을 뉘였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일상의 리듬이 멈추고 시간이 느려지면서 생에 대한 반성이 시작된다. 그 때 다시금 질문은 봄 날의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나는 누구지? 내 인생의 의미는 뭐지? 불안 속에서, 우리는 답을 내리려고 애쓴다. 그렇게 불면의 밤은 얕은 잠과 더불어 지나고 다시 아침 해가 떠오르면 질문을 뒤로 하고 일상의 쳇바퀴 속으로 몸을 밀어넣는다. 쳇바퀴를 열심히 굴리다보면 질문은 다시 잊힌다. 우리 삶은 물이 너무 차가워서 뜨거운 물 쪽으로 수도꼭지를 틀었다가, 너무 뜨거워서 다시 차가운 물쪽으로 수도꼭지를 틀어대는 사람처럼 일상의 분주함과 실존적 불안 사이를 오고 간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였던가.

영화 <소울>은 인생의 의미를 묻는다. 인간의 목적에 대한 성찰을 유도한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다시금 '잘 산다는 건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물론, 영화는 그 질문에 대한 모종의 대답을 내려놓고 있다. 주어진 생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인생의 모든 순간을 즐기는 것. 이렇게 말로 정리하면 명쾌한 듯하지만, 시시하고 노른자와 흰자가 빠진 달걀껍데기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영화는 말로 정리된 저 결론보다 멋지게 관객을 설득하고 있다. 이 글의 목적은 그 설득 장치들을 살펴보면서 이면에 작동하는 의미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데에 있다.

 

삶에 대한 긍정

학교에서 방과후학교 강사를 하고 있던 조 가드너는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정규직 음악교사로 채용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는다. 그의 어머니는 기뻐하지만, 조는 시큰둥하다. 오히려 조는 자신이 동경하던 도로시아 윌리엄스 밴드에서 피아노 주자로 공연할 수 있게 되자 뛸 듯이 기뻐한다.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맞이하게 될 조는 안타깝게도 맨홀에 빠져 죽는다. '머나먼 저세상'으로 가야 하는 조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다가 '태어나기 전 세상'에 도착한다.

조는 일상인보다는 예술인이 되기를 원한다. 돈을 벌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삶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연주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선사하는 삶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일상/예술, 거짓/진실의 대립쌍 속에서 조는 다수가 쫓는 욕망, 그렇지만 노예의 욕망에 가까운 안정된 삶보다는 불안정하더라도 진정성을 추구하는 예술인이 되고자 한다. 그는 일반인과 달리 예술가의 욕망을 추구한다.

태어나기 전 세상에서 영혼들은 자기만의 불꽃을 발견해야만 지구에서 태어날 수 있다. 불꽃을 찾아주는 것이 멘토들의 역할이며 조는 태어나기 전 영혼인 22의 멘토 역할을 맡게 된다. 22는 지구에서 탄생할 수 있는 자격이 되는 배지를 오랫동안 받지 못하는데 불꽃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22는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말썽을 피우고 주어진 경로를 따르지 않는 전형적인 자기방어형 캐릭터다. 그는 카운셀러나 멘토의 지도를 따르기를 거부하면서 내면의 불꽃을 찾는 과업을 지연시킨다.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확인하기 싫어서, 지구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서 저항한다.

우여곡절 끝에 조는 육체와 영혼 사이의 공간에서 활동하는 문윈드의 도움을 받아 이승으로 되돌아가지만, 자신은 고양이의 몸을 얻고 22가 엉뚱하게 조의 몸 속에 들어가게 된다. 22는 조와 함께 하루를 보내는 동안 걷고 타인과 소통하고 음악을 듣는 사소한 일상에서 기쁨을 느끼며, 산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가 하루를 지내면서 얻었던 사탕이나 먹다 남은 피자, 조 엄마의 실타래와 같은 사소한 것들을 22는 소중하게 간직한다.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단풍나무 씨앗을 그는 경이에 찬 눈으로 바라보며 받는다.

일상을 하찮게 여기는 조는 자신이 잘 하는 일은 걷기가 아닐까라고 말하는 22이에게 그것은 삶의 목적이 아니라 그냥 사는 거라고 말한다. "내 불꽃은 하늘 보기나 걷기일지도 몰라. 나 잘 걷잖아." "그건 목적이 아냐, 22. 그냥 사는 거지." 조가 자신의 불꽃은 음악이고 피아노 연주이며, 그것이 삶의 목적이라고 말할 때, 태어나기 전 세상의 카운셀러 제리는 불꽃은 삶의 목적이 아니라고 말한다. 멘토들이 종종 불꽃이 삶의 목적이라고 착각한다며 한탄한다. "목적, 삶의 의미…. 단순하긴." 제리의 입을 통해 영화는 삶의 목적을 추구하는 태도 자체가 어리석음을 주장한다.

조는 22와 헤어진 후 환생하여 꿈에 그리던 공연 무대에 올라, 자신이 진정한 삶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을 성취했지만 공허함을 느낀다. 22와의 만남으로 일상/예술의 대립쌍은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그는 22가 간직하고 있던 물건을 꺼내 본 후에야 진정한 삶은 일상에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 영화의 백미는 조가 피아노를 치면서 추억을 회상하는 씬이다. 그 추억은 특별하고 대단한 활동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음악을 듣고, 자전거를 타며 바람을 느끼고, 가족과 함께 불꽃놀이를 보고, 음악을 좋아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순간 같은 일상 단편의 몽타주로 그려진다.

자신의 불꽃이라고 생각했던 행동이 무의미하게 '그냥 사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22는 부정적인 기운에 휩싸인다. "나는 목적이 없어."라는 말을 반복하며 방황하는 영혼이 되는데, 삶에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는 담론에 억압당한 것이다. 꿈을 찾으라는 말이 종종 인간에게는 폭력이 되곤 한다. 꿈을 가지라는 말은 목적이 없으면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의미를 은연중에 가정하기 때문이다. 22는 억압적 담론 때문에 증상을 겪고 있는 셈이다. 그의 증상은 조가 단풍나무 씨앗을 보여주자 일순간 해소된다. 단풍나무 씨앗은 사소하지만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매 순간을 상징한다. 동시에 싹을 틔워내고 자라날 무한한 가능성, 생명력을 지닌 존재이다. 그래서 단풍나무 씨앗은 생명이 품은 희망이다. 22는 삶의 목적을 강요하는 담론으로부터 해방되어 '일상의 긍정성'을 깨닫고 지구에서 태어날 결심을 굳히게 된다.

긍정성은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재즈한다'는 말에 함축되어 있다. 재즈함은 재즈 연주처럼 삶의 순간을 즉흥적으로 즐기는 원리를 가리킨다. 영혼의 불꽃은 삶을 충실하게 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며, 인간은 불꽃 너머의 '행복'을 향해야 한다. 인생의 목적이란 없으며, 매순간 주어진 생명을 느끼고 순간을 즐기며 살면 행복해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환생하여 문을 나서며 쉼호흡하는 조의 모습으로 끝난다. 인간의 행복은 인생의 목적을 강박적으로 추구할 때 가려진다. 목적의 무게로부터 벗어나 가벼워지라는 메시지는 가볍지 않은 진실을 일러준다.

 

현세적 상상력과 쾌락주의를 넘어서

영화는 브라운관 바깥에 있는 관객에게 주문한다. 삶의 목적에 짓눌리지 말고 생의 모든 순간에 만족하면서 그 순간을 충실히 감각적으로 느끼고 살아라. 이제 모든 문제는 해결된 것인가?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영화의 모든 과정은 주제의식을 선명하고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요령있게 전달하고 있지만, 인생에는 목적이 따로 없다는 관점, 삶을 즐기라는 주문은 인간의 실존을 억누르는 목적론만큼 일면적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2021년, 지금의 현세적 생활양식을 재현하고 있다. 이를 테면 '태어나기 전 세상'의 카운셀러와 태어나지 않은 영혼의 관계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태어나기 전 영혼들은 순수하고 철 없는 어린이, 유아처럼 행동한다. 조가 '지옥'이라는 듣기에 나쁜 말을 하자 그들은 흥미를 느끼며 '지옥!', '지옥!'을 외치는데 영락없는 말괄량이 유치원생이다. 카운셀러는 친절하고 부드러운 말투를 구사하는 유치원 교사를 연상케 한다. 태어나기 전 영혼은 학생처럼 카운셀러와 멘토의 돌봄 속에서 배지를 얻게 된다. 태어나기 전 세계가 쉽게 이해되는 까닭은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유치원, 근대적 교육체제를 모방했기 때문이다.

또한, 22가 조의 몸을 얻어서 겪는 일상, 아름다운 추억을 제공하는 곳은 현대인의 생활공간인 도시이다. 22가 처음 먹어보고 반해버린 피자, 이발소에서 머리깎기, 양복점에서 입는 수트, 지하철역에서 듣는 가수의 노래는 도시적 공간에서 누리는 것들이다. 지하 통풍구를 통해 불어오는 바람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22의 모습은 다소 비현실적인데, 사소한 도시 체험까지 긍정성으로 채색하려는 제작자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공연장에서 꿈을 이룬 조가 허탈한 마음으로 되돌아와 22가 남긴 물건들을 보고 피아노를 치면서 과거의 편린을 회상하는 아름다운 장면 역시 도시적 공간에 위치한 소시민의 유년과 일상을 재현하고 있다. 식당에서 호두파이를 먹으면서 만족스러워하는 조의 모습은 대단히 비싸지는 않아도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며 행복해하는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이다. 영화의 플롯을 다르게 보자면, 소시민적 일상을 폄하하던 의식이 의미 있는 깨달음 이후에 일상성의 소중함을 인식하는, 돌아온 탕아의 구조를 띠고 있다. 네가 우습게 봤던 일상은 사실 소중한 것이다. 너는 보석을 보고도 돌인 줄 알았던 것. 혹은 흔하게 굴러다니는 돌들이 실은 모두 보석이었던 것. 그러니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고 주어진 생을 즐기라! 이 메시지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현세적 삶의 구조를 긍정해야만 한다. 현대적 삶의 일상성은 본래 행복하다. 인생의 목적을 설정해서 삶을 곡해한 것은 당신이었고, 당신의 잘못된 인식을 고친다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인생의 목적은 없는 것일까? 영화에서는 목적을 추구하는 담론이 자아를 억압하는 부정적 역할을 떠맡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목적론을 내세운다. 인간의 좋음은 추구할 만한 어떤 것(목적)이며, 최고의 좋음은 다른 것에 의존하거나 수단이 되지 않고 그것 자체로 추구할 만한 어떤 것(목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하는 최고의 좋음은 다름 아닌 행복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다. 영화 <소울>에서는 목적과 행복이 대립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양자를 하나로 본다. 이런 차이가 생기는 까닭은 행복의 개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소울>은 행복을 즐거움의 추구로 보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에 따르는 삶으로 보았다.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가 옮음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행복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있음을 언급하고 싶은 것이다. 매순간의 즐거움을 충만하게 누리는 태도만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다. "나는 인생을 즐기겠어."라고 말하는 순간, 결심 다음의 시간들이 우리에게 들이닥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적 존재로서 고립되어 살 수 없으며, 어느 시점에는 타자와 조우하고 어떤 과업을 떠안게 될 것이다. 그 과업은 나를 가만 두지 않는다.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능력을 갖추기를, 그리하여 더 나은 존재로 만들어가도록 요구할 것이다. 그러면 다시금 현재 상태를 부정하는 고통의 상태를 수락해야 한다. 즐기겠다는 다짐은 공허하다. 타자가 도처에서 출현하기 때문이다.

조 가드너는 전형적인 소시민이지만, 그러한 소시민성은 은폐되어 있다. 왜냐하면 영화는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의 문제, 개인의 욕망과 의미 문제에만 몰두하기 때문이다. 기술문명 사회 속에서 인간은 존재 망각에 빠져 있다고 지적한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대인은 일상인으로서 사회가 할당한 배역을 연기하는 일에 만족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오히려 만족은 자기 존재를 망각한 불행하고 부자유한 상황을 반증한다. 긍정성은 오히려 자기 실존을 자각하고 본래적 삶을 회복하는 과업에는 독이 된다.

자신의 실존을 회복하려는 인간은 우선 자신의 불안을 직시해야 한다. 지금 자명해 보이는 사태는 우리가 옳다고 가정하는 이데올로기의 허상 위에 구축되어 있음을 외면하지 않을 때, 불안은 우리를 위태롭게 하고, 이대로는 안 된다는 의식 속에서 우리는 자기를 새로운 상황 속에 던지게 된다. 소시민이 소시민성에 안착할 때, 자기를 실현하려는 본래적 실존과 욕망은 잊힌다. 인간은 자기 욕망을 영도로 만들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욕망의 대상이다.

물론 영화는 예술인이 되려고 한 조 가드너의 욕망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예술이 삶의 목적이 아니고, 삶의 목적은 없음을 말할 뿐이다. 그러나 예술가의 자유는 남들 앞에서 공연하고 박수를 받는 삶에 그치지 않는다. 박수 받는 삶은 세속의 한 부분일 뿐이지 자유와 무관하다. 오히려, 영화에서 삶의 진실을 잘 건드리고 있는 설정은 '육체와 영혼 사이의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날 수 있는데, 한 가지에 몰입하거나 영감에 빠져 있는 인간의 상태가 물아일체 혹은 주일무적의 영역에 진입하여 자기를 잊어버리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 마치 죽음의 체험과 같다는 데에 착안한 흥미로운 아이디어이다. 죽음은 의식의 종말이며, 몰입은 의식을 영도에 이르게 하므로 죽음과 가깝다. 예술적 경지에서 인간은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어째서 예술을, 자유를 추구하는가에 대한 우회적인 해답이다. 다만, 나중에 조는 피아노 연주에 몰입하면서 문윈드처럼 이세상과 저세상을 자유롭게 오고갈 수 있게 되는데, 이는 진실과 관련이 없다. 진실은 자아를 잊은 타자와의 조우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본래적 삶이 되든, 예술가의 자유가 되든, 달인과 성인의 경지에 이른 실존이 되든 간에 말이다.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인간의 행복은 무엇인가? 단 하나뿐인 삶을 진실하게 사는 방법은 무엇인가? 매순간 우리가 느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현세적인 삶은 정녕 괜찮은가? 목적을 추구하는 것은 억압적이기만 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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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서 모른 체하기, 『집중과 영혼』 | 기본 카테고리 2021-11-15 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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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집중과 영혼

김영민 저
글항아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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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를 기억한다. 지금은 텔레비전 광고에 주로 얼굴을 비추지만, 그녀가 선수 시절에 빙상 위에서 펼친 연기를 잊지 못한다. 그녀의 완벽한 동작, 섬세한 표정과 제스처, 한 치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정확성은 피겨 스케이팅에 문외한인 사람에게도 감동을 준다. 트리플 악셀이라는 피겨 스케이팅 용어가 귀에 익게 된 것도 김연아 덕분이었다. 나는 광고 모델 김연아가 아닌 빙상 위의 김연아를 더 기억하고 싶다. 광고에서는 그녀가 상품으로 전시될 뿐이지만 피겨 스케이팅을 할 때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극점에서 실현한 달인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언가에 통달하여 비범성을 획득한 사람에게 경탄한다. 그들의 솜씨를 일컬어 신의 경지라고 칭송한다. 보통 사람의 기량과 비교하여 동뜨게 탁월한 성취를 보이는, 그리고 그 성취가 일회성의 운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계속적으로 나타나는, 기적처럼 보이는 성과가 계속해서 실현되는 사람들. 보통 달인들은 자신의 몸으로, 수행으로 탁월성을 증명해 보인다.

 

『집중과 영혼』은 이처럼 인간적인 존재를 넘어선 인간을 철학적으로 규명하고 있다. 김연아와 이순신과 세종대왕이 도달한 그 경지는 어떻게 가능한가? 저자 김영민은 그 알짬이 인간의 '집중'하는 능력에 있음을 역설한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이런저런 일에 마음을 쏟는 가운데 한 곳에 의식을 모으는 경우가 있다. 학교에서 집중은 흔히 들리는 말이다. 선생이 학생에게 '집중하라'고 말할 때, 그것은 집단을 통제하기 위한 발언이기는 하지만, 동물의 수준 너머에 있는 인간적인 태도를 주문한다. 왜냐하면 지구상의 동물 중에서 오로지 인간만이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중은 인류가 장구한 진화의 역사를 거쳐오는 과정에서 갖게 된 특이한 능력임에 틀림없다. 특이한 까닭은 그것인 생존과는 무관한 의식이자 노력이기 때문이다.

 

집중의 반대편에 '애착'이 있다. 욕망은 바지에 엉겨붙는 껌처럼 대상을 모르고도 그것에 달라붙는다. "인간의 갖은 욕망이 부리는 리비도적 애착은 마치 점성 좋은 껌같이 오직 그 장소, 그 시간, 그 관심만을 고집하며 비켜나지 않는다. 껌은 바지를 모르지만, 필경 파괴적으로 바지를 고집하는 것이다." (12쪽) 리비도는 자기를 분출할 대상을 성급하게 찾는다. 애착의 특성은 참지 못함, 즉흥성에 있다. 인간에게 숙명처럼 주어진 동물적 특성은 과거 동서양의 철학자에게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손에 들고서 죽음을 육체와 영혼의 분리로, 그리하여 신체로 인해 더럽혀진 영혼의 정화라고 주장했다. 달뜬 욕망은 인간의 균형감각을 해치고 동물적 상태로 타락시키기 때문에 야생마를 조련하듯 제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니체가 인간은 약속하는 동물이라고 했듯,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인내와 절제는 인간적인 행동이다. 먹이 앞에서 야단법석을 떠는 고양이에게 "다음에 줄게!"라는 말은 허망하다. 오직 인간에게만 "다음에 줄게!"가 효용을 가지며, 인간은 그 말에 담긴 약속을 믿고 이행할 줄 안다. "내 마음은 “근본적으로 예상하는 존재, 기대를 생산하는 존재”인 것이다."(30~31쪽) 자기를 조절할 줄 아는 '의식'의 발달은 인간 존재의 혁신을 가져온 진화사의 한 결절점이 된다.

 

그런데 집중은 인간이 지닌 의식의 영역을 넘어서는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한 곳에 집중할 때에 유용성에 대한 관심이 표백되고 자기를 잊어버린 채 대상에 몰두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흔히 주일무적, 성성적적의 경지라고 일컫는, 자기를 잊어버리는 망아의 영역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집중의 요체는 의식의 힘을 통해서 의식의 토대가 되는 '나'를 잊음에 있다. "비록 좁은 길이고 짧은 체험이긴 해도 최고의 기량 속에서 잠시나마 번득이는 빛은 대체로 에고를 극복했거나 망아(忘我)에 이른 것처럼 보이며, 그 과정은 집중과 구성적으로 관련된다." (249쪽) 이덕무는 팔뚝이 종이를 잊고, 종이는 먹을 잊는 글쓰기 체험을 증언한다.

 

내 마음은 한 가지 경계에 깃들어 형상과 접촉하여 만약 하는 바가 있게 되면, 갑자기 눈동자가 돌아가고 팔뚝이 움직이며 손가락이 덩달아 붓을 잡는다. (…) 마음은 눈을 잊고, 눈은 팔뚝을 잊고, 팔뚝은 종이를 잊고, 종이는 먹을 잊고, 먹은 벼루를 잊고, 벼루는 붓을 잊고, 붓은 종이를 잊게 되니, 이러한 때에는 팔뚝과 손가락을 마음과 눈이라고 불러도 괜찮고 먹과 벼루를 붓과 종이라고 불러도 괜찮을 것이다. 고요히 마음을 거두고 맑게 눈을 안정시켜 (…) 잠깐 사이에 붓과 종이, 먹과 벼루, 마음과 눈, 팔뚝과 손가락은 서로를 도모하지 않고, 또 앞서 하던 일을 까맣게 잊게 된다(195~196쪽, 정민 2000 재인용)

 

육체를 벗어나는 노력이 의식이라면, 의식을 넘어서려는 노력에 집중이 있다. 자기가 지닌 애초의 그릇의 한계를 넓히려는 노력이 공부일진대, 공부의 중심에는 집중이 있게 마련이다. 김영민은 다양한 각도에서 자기(1)를 잊는 영도의 체험(0) 또는 나(1)와 너(2)가 맞부딪히고 어긋나고 분망해지는 세속을 벗어난 (귀)신의 경지(3)를 언급한다.

 

대개 달인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은 완고한 에고를 잊어버리는 체험을 증언한다. 일본의 마사지사들은 손님의 몸을 마사지하는 상황에서 손님의 몸을 치료하는 때에는 자신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대신 마사지를 해준다고 느낀다. "진짜 달인은 자신이 손님을 고치는 게 아니라 자기와 손님을 둘러싸고 있는 큰 존재의 힘을 빌려, 그걸 손님 몸에 흘려넣어요. 우리 마사지사는 그 힘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아요." (304쪽, 이소마에 2016 재인용)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낌새나 기별과 같은, 오늘날 '미신'으로 간주되는 앎의 영역은 나의 깜냥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그러나 내 몸을 통해서 감지되는 타자를 예감케 한다. 오이겐 헤리겔이라는 신칸트학파의 교수는 일본에서 활쏘기를 배울 때, 길을 잃고 헤매는 심정으로 활을 쏘다가 어느 날 스승인 아와 겐조가 보는 앞에서 무심히 활시위를 당겼다가 놓았더니, 스승이 엎드려 절 하면서 "그가 쏘았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내가 나와 싸우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나를 잊었고, 그렇게 찾아온 '그'는 무심한 몸에 자연스레 들어선 것이다(310~311쪽 참조).

 

차분한 집중의 형식은 에고를 넘어서기 위해 에고를 억압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의식을 임계점까지 밀어붙여야만 의식 아닌 의식의 지점에 도달하고 '그'를 불러들일 수 있다. 불교 식으로 말하자면, 상념이 사라진 상태가 공(空)이지만, 공에 이르기 위해서는 상념을 통하지 않을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출세간의 목적이 출출세간에 있듯, 불립문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통해 언어를 잊어야 한다. 그러니 집중이 성공하기 위한 조건은 반복적인 행동과 그에 가미된 정성이다. 반복되는 행동을, 정성을 다해서, 마음을 다해서 행하게 될 때, 나를 잊으며 내 몸에 없던 새로운 길이 만들어진다. "과연 남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차분하고 견결하게 이루어지는 집중과 정성이야말로 달(達)과 성(聖)으로 가는 좁은 길이다."(360쪽)

 

집중에 의해 터득된 앎은 알고도 모르는 역설적 지경에서 성취된다. 자아를 망각하는 경지는 얼핏 광기나 치매와 겹쳐 보인다. 광기와 치매 둘 다 자아를 잊은 상태라는 점에서는 집중 행위와 동일하다. 천재라고 일컫는 사람들의 기이한 행적과 그에 동반하는 창조성은 집중과 광기의 형식적인 동형성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집중은 형식이되, 내용을 잃은 형식이 된다. 내용은 영도에 이르고 형식만 남은 상태, 그곳에 온고지신, 법고창신의 새로운 창조성이 발생한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다.

 

바로 이 인(仁)하다는 말 속에 집중의 역설성 혹은 집중의 탈세계성이 새겨져 있다. '인하다'는 것은 생이불유(生而不有)하듯 부드럽게 옮겨가는 처신이며 이윽고 '오른손이 한 선행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인데, 이는 응당 불가능한 행위다. 그것은 의식의 바다에서 올라온 집중이 바로 그 의식을 초월하는 지경의 불가능성을 잠시의 무지개처럼 내보이는 형식이다. (439쪽)

 

김영민이 일러주는 달인 또는 성인의 변증법은 결코 자기계발 담론이 아니다. 자기계발이 완고한 에고를 확증하고 사회적 존재로서 자기를 실현시키는 세속적 삶의 적응에 목적을 두고 있다면, 김영민이 강조하는 달인이나 성인이 되기 위한 절차탁마의 과정은 오히려 에고와 세속을 떠난 자리에서 지속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어 가려는 방향성이며, '선비로 시작하여 성인으로 끝마친다'(순자)에서 확인되듯 삶을 조형해가는 의지이다.

 

나는 최근에 글씨쓰기 연습을 하고 있다. 평소 글씨체가 악필이어서 공공기관에서 서류를 작성할 때에도 서류를 읽는 상대방이 글자를 제대로 식별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글씨체를 바꿔보려고 '생각'은 했지만 생각은 아직 공부가 아니다. 생각이 그치면 글자는 이내 예전 모양으로 회귀하였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여 글씨체를 바꿔주는 책, 『나도 손글씨 잘 쓰면 소원이 없겠네』를 샀다. 책에서 제시하는 글씨체를 '본'으로 삼아서 그 본이 보여주는 '틀'에 따라 그대로 따라쓰기 위해서 노력했다. 나는 최근 3주 동안 하루를 제외하고 매일 글씨를 썼다. 글씨체를 눈여겨 보고, 글자에 따른 자음과 모음의 배치를 신경쓰면서. 첫 일 주일 동안은 천천히 쓰면 다른 글씨체가 나왔지만 빠르게 쓰자마자 바로 예전 글씨체로 되돌아왔다. 기존의 버릇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2주가 지나자 신경 쓰지 않는 순간에도 '본'으로 삼은 글씨체의 모습이 나오기 시작했다. 빨리 쓰더라도 약간의 변화가 감지되었다. 가로획을 쓸 때 왼쪽으로 조금 더 뻗은 모양이 되고, 자음 이응이 더 원에 가까워졌다. 그것은 내가 한 것이지만 동시에 내가 한 것이 아니다. 내 의식의 타자인 몸이 움직인 덕이다. 식별이 불가했던 악필은 천천히 쓰면 꽤 균형잡힌 글씨로 보일 만큼 변모했다. 여전히 삐뚤빼뚤한 부분이 있어서 그리 아름답지는 않지만, 계속한다면 더 좋은 버릇이 몸에 깃들 것이다. 늘 그 '꼴'이었던 내 글씨체는 '본'을 만나서 하나의 '틀'을 얻었다. 그 틀에 복종하겠다는 생각이 없었다면 나는 예전 그 꼴 그대로였을 것이다. 자기 변화의 요체는 자기를 성장시키는 틀에 대한 복종에 있으며, 그 과정에 담기는 인간의 집중과 정성에 달려 있다.

 

내가 이 짧은 글에서 언급한 집중의 양상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는 훨씬 방대한 영역에서 집중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일본의 문화에서 나타나는 차분함을 서술하는 데에 한 장을 할애하기도 하였고, 공동체적 삶 속에서의 집중과 공부에 관한 담론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출출세간을 연상하게 하는 그의 공동체론은 타인의 비평에 노출된 가운데 좋은 몸을 얻고, 적절하게 응하며, 현명한 복종과 지배를 실천하는 생활양식을 벼려나가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부처가 세속을 떠나서 중생을 구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성인의 길에 들어서기로 결의한 자는 탈속이 아닌 세속에서, 그렇지만 그 세속과 창조적으로 불화하면서 새로운 생활 양식을 창조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일전에 이이가 성인이 되기로 한 이상 터럭만큼도 물러서서는 아니될 것이라고 단호히 말했듯. 그러나 말이 쉽지 그 일은 얼마나 지난할 것인가! 제대로 이행한다면 메시아에 방불케 할 실존이리라. 김영민의 책을 읽고 나서 『중용』의 다음과 같은 문장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나는 성실함[誠]은 진실[誠]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진실(誠)이란 하늘의 길이고, 진실로 나아가는 것은 사람의 길입니다. 진실이란 힘쓰지 않아도 중에 들어맞고 숙고하지 않아도 원칙과 부합되므로 차분하고 침착하게 도에 맞으니 성인에게 가능합니다. 진실로 나아가는 것은 선을 골라서 굳건하게 잡는 것입니다. (『중용』, 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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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를 풍자하다, 『동물농장』 | 기본 카테고리 2021-08-03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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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동물농장

조지 오웰 저/도정일 역
민음사 | 2001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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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이 쓴 『동물농장』은 전체주의 사회를 우화로 풍자한 소설이다. 워낙에 유명한 작품이어서 책을 소개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도 회자된 바가 있고, 각종 필독 도서 목록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우화가 지닌 장점인, 복잡한 현실을 단순하고 간명하게 보여주거나 역사적인 현실을 의미 있는 플롯으로 엮어서 되비춰주어, 읽는 이로 하여금 세계를 반성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힘이 작품 안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흔히 알고 있듯이, 오웰이 그리고 있는 '동물농장'은 현실 사회주의의 대표 주자였던 소련의 역사를 알레고리하고 있다. 존스 씨가 운영하는 매너 농장은 러시아 혁명 전의 봉건국가를 가리킨다. 존스로 대표되는 지배자(왕과 귀족)는 동물(인민)들을 착취한다. 압제에 시달리던 동물들은 우연한 계기로 존스를 내쫓고 '동물농장'을 세운다. 동물농장은 말 그대로 동물이 주인된 농장이며, 프롤레타리아가 주인된 국가를 연상시킨다. 러시아 혁명기에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이 국가를 이끌었다. 지도자들은 새로 건설된 사회를 구상했고 제도를 정비했고, 강령을 세웠으며, 방향을 설정했다. 그들은 귀족이 아니었지만 몸으로 일하는 계층과 구별되는 노동당의 수장이었다. 노동당원은 지도자 계층이 되었고 인민과 구별되는 특권을 누렸다. 소설에서는 영리하고 합리적인 '돼지'들이 그 역할을 맡는다. 스노볼과 나폴레옹은 동물농장 운영 방향을 두고 부딪치는데, 이는 그들이 권력의 중심에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들의 갈등은 레닌과 스탈린, 트로츠키 사이의 권력 투쟁을 상기시킨다. 오늘날 우리는 혁명의 러시아가 스탈린 독재로 변질되면서 동력을 상실했음을 안다. 소설에서는 나폴레옹이 실권을 쥐면서 폭력과 강압으로 동물을 착취하는 체제가 다시 수립되고 결국 혁명은 변질되며 왜곡되어 버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보면 소설 『동물농장』은 소련이 형성되고 타락하는 양상을 우회적으로 풍자하고 있는 작품처럼 보인다. 어쩌면, 실제로 사회주의 국가가 붕괴하면서 이 소설은 더 유명해졌는지도 모른다. 오웰의 공격처럼 현실 사회주의는 결국 타락하고 실패한 체제였다. 조지 오웰은 사회주의의 몰락을 예견한 선각자였다. 그렇게 서구 자유주의 국가의 비평가와 저널리스트들은 나팔을 불었을 것이다. 이 작품이 괜히 유명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소련과 대립하고 있던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동물농장』이 반가웠으리라. 자유주의는 자본주의와 한패이다. 자본주의의 상부구조에 개인의 자유를 이데올로기로 포장하는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장치들이 보이지 않게 작동한다. 문화적 장치로 오웰의 작품은 호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것은 더 정치한 검증을 요구하는 가설에 불과하다. 허나, 『동물농장』은 사회주의 국가를 비판하는 소설이라는 편협한 해석이 대중화된 오늘의 상황을 보면 가설이 터무니 없지는 않으리라. 적어도 오웰의 작품을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서라고 단정짓는다면 자본주의 사회의 특정 계층은 쾌재를 부를 것이다. 사회주의가 틀렸다면 자본주의는 옳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옳다면 그들이 누리는 특권도 옳다.

 

내가 보기에 『동물농장』의 진정한 주제는 사회주의 풍자가 아니다. 풍자의 대상은 오히려 국가가 아니라 인간이다. 더 정확하게는, 인간의 본성이다. 조금만 더 섬세하게 말하자면, 전체주의를 부르는 인간의 본성을 꼬집는다. 그것은 인간이 문명을 설립한 이래로 끊임없이 반복되어 온 권력의 문제, 지배와 피지배의 모순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까 현실 사회주의 국가만 풍자한 것이 아니라 개체의 자유를 압살하려는 모든 권력을, 타락한 권력을 재생산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공격한 것이다.

 

『동물농장』은 계급이 있던 봉건사회에서 계급을 타파한 혁명이 실은 진정한 혁명이 아니라 지배 계급의 교체에 불과했음을 드러내는 과정으로 플롯이 설계되어 있다. 혁명은 애초에 불평등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동물들이 무력으로 존스 일가를 몰아내고 동물농장의 주인이 되었음을 인식하였을 때, 젖소들이 울부짖는다. 인간을 몰아내자 젖을 짤 인간의 손이 사라진 것이다. 돼지들이 나서서 우유를 짠다. 그런데 짜두었던 우유가 조용히 사라진다. 알고보니 우유는 돼지들이 슬그머니 가로챈 것이었다. 그 사실이 나중에 밝혀지자 스퀼러가 돼지들은 동물농장을 지도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영양소가 필요하므로 돼지들이 그 우유를 차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로 동물들을 설득한다. 노골적으로 권력을 탐하는 나폴레옹과 달리 스노볼은 동물농장 전체의 발전을 위해서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인간에게 대적해서도 용감하게 싸워서 훈장을 받는 등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긍정적인 지도자로 그려지지만, 그조차도 우유를 소유하는 특권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다. 사소하지만 불평등은 그렇게 시작된다. 인간이 모이는 사회 집단에서는 크고 작게 지배-피지배 관계, 주인-노예의 관계가 성립하며, 아주 사소하고 작은 차이로 시작된 힘의 불평등이 나중에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소설은 권력의 작용과 불평등의 심화 과정을 미묘하면서도 명쾌하게 보여준다.

 

돼지들은 인간의 글을 읽을 줄 아는 종으로 지식을 독점한다. 염소 뮤리엘과 당나귀 벤저민도 글을 읽을 줄 알지만 돼지들만이 인간이 쓴 책(고급 지식)을 소유하고 지식에 접근하여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안할 권리를 갖는다. 힘센 말 복서는 알파벳을 외우는 것조차 힘들어서 공부를 포기하고 오로지 육체적인 노동에만 헌신한다. 지식의 불평등은 권력의 불평등을 낳는다. 힘을 가진 쪽이 약자를 기만하고 교묘하게 착취하는 상황을 만들어 간다. 나폴레옹은 스노볼을 쫓아낸 후에 스노볼을 점차 배신자, 악마로 만들어간다. 풍차를 만들려는 계획은 스노볼이 구상한 것이지만 나폴레옹은 스퀼러를 이용해 사실은 나폴레옹이 풍차를 계획한 것이고 스노볼은 풍차를 폭파시킨 주범인 것으로 호도한다. 스노볼이 피를 흘려가며 인간과 용감하게 싸웠던 사실도 나폴레옹이 그랬던 것으로 조작된다. 안타깝게도 동물농장의 대다수 동물은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나폴레옹의 계략에 속아넘어간다. 계명도 바뀐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는 문장은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로 수정된다. 동물들은 그것이 바뀐 것 같다는 느낌만을 갖는다. 나폴레옹의 무력에 유일하게 맞설 수 있는 힘을 가진 복서는 '나폴레옹은 언제나 옳다.'는 잘못된 신념을 죽을 때까지 유지하여 말년에 도살장으로 끌려간다.

 

오웰은 단순히 권력자인 나폴레옹만을 풍자하는 것이 아니다. 지배자에게 지나치게 의존하여 자기 권익을 자신도 모르게 박탈당하는 무지한 대중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동물농장의 동물은 인간의 알레고리로서 서로 같으면서 같지 않다. 동물농장의 오리와 닭과 같은 동물은 선천적으로 학습 능력이 부족하다. 그러나 인간은 그가 인간이라면 선천적인 장애를 가진 소수자를 제외하고 모두가 지적으로 동일한 능력을 지닌다. 누군가 나는 '머리가 나쁘다'라고 단정짓는다면 그는 게으름을 합리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적으로 탁월해 질 기회와 인연을 얻지 못한 것일 뿐, 혹은 의지를 발휘하지 않았을 뿐, 누구나 탁월해질 수 있는 마음의 싹을 지니고 있다. 오웰이 동물을 내세워서 인간 사회의 모순을 폭로할 때에 독자가 느끼는 묘한 부조리는 이러한 알레고리 효과로부터 온다. 동물과 인간은 같으면서 다르다. 독자는 소설 속 세계와 소설 밖 세계를 오고 가면서 서로를 비춰본다. 독자는 진정으로 모두가 행복을 누리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시민 각자가 모두 깨어 있어야 한다는, 준엄한 경고를 듣는다. 앎은 괴롭고 무지는 편하다. 각자가 편안한 무지에 함몰된다면, 탐락(하이데거)의 상태에 빠진다면 악덕은 재생산되게 마련이다. 대중은 권력을 가진 자들을 견제해야 한다. 오웰이 믿었던 민주주의도 이것이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긴장의 끈을 놓으면 부패한다. 돼지들은 처음에는 평등을 주장하지만 이내 매력적인 선망 기표인 인간 기호를 소유한다. 그것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암말 몰리가 댕기를 단 자기 모습에 찬탄하는 나르시시즘은 기호의 사이에도 비대칭적인 권력관계가 있음을 시사한다. 댕기는 인간 문명의 표식이며, 인간성을 드러내는 중심 기표이다. 권력을 가진 상류층의 표식이 매력적으로 보이면서 주체를 현혹하는 것이다. 혁명을 지도할 만큼 나름 합리적인 족속이었던 돼지들은 권력을 차지하자 증오의 대상이 되었던 인간의 기호를 소유하려 든다. 존슨이 살던 본채는 폐쇄되었지만 실권을 확보하자 돼지만이 본채에서 생활한다. 인간처럼 침대에 눕거나 술을 마시는 행위는 금지되었지만 돼지들은 예외적으로 허락되어 안락과 향락을 즐긴다. 돼지들의 자녀들이 다닐 학교가 만들어진다. 특권을 대물림하려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내, 돼지들은 인간처럼 두 발로 선다! 돼지들은 어느새 최초의 압제자였던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대목은 풍자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 권력을 독점한 지배자의 타락은 인간과 돼지를 뒤섞어버린다.

 

열두 개의 화난 목소리들이 서로에게 고함을 치고 있었고, 그 목소리들은 서로 똑같았다. 그래, 맞아, 돼지들의 얼굴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 이제 알 수 있었다. 창 밖의 동물들은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인간에게서 돼지로, 다시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번갈아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 (134~135쪽)

 

권력을 가진 주체가 타락하는 현상은 사회주의 국가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인류사에서 무수하게 반복되었다. 한국사를 조금만 되돌아보면 죽은 사람에게도 세금을 부과해 민중을 수탈했던 잔혹한 시대가 있었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가리기 위해 지금은 유래없이 자유가 보장된 시대라고 선전하는 장치는 없는가? 시민들 모두가 깨어 있기 위해서 지식을 습득하고 기술을 연마하려고 애쓰는가? 그보다는 각자 안락과 쾌락을 추구하며, 자기 부를 불리기에 바쁜 것은 아닌가? 자본주의 국가 역시 자유라는 외피 아래에서 권력은 타락하고 대중은 무지하여 지배와 피지배 계층이 기이한 공생관계 속에서 부조리를 증식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비판은 몰락한 구소련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다. 21세기 자본주의 국가가 승리를 구가하고 있는 오늘날 모든 문명 국가에 유효하다. 권력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 불평등이 존재한다면, 권력을 가진 존재가 피지배자들을 기만하면서 그들을 착취하고 있다면, 허위 의식을 자연적으로 주어진 법칙으로 착각하고 고통스러운 자각보다는 무지 속에서 안락함을 누리려고 하는 인간이 많아진다면, 그곳은 전체주의 국가이다. 자본주의는 전체주의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동물농장』이 독자에게 작용하는 힘이 강력한 까닭은 소설 플롯의 치밀한 구성에 있다. 메이저의 연설로부터 시작하는 혁명 전야에서 메너 농장을 동물농장으로 바꾸는 혁명, 권력투쟁, 독재, 타락, 매너 농장으로의 회귀에 이르는 사건들이 비약 없이 벽돌 쌓듯 차곡차곡 쌓여 결말에 이른다. 오웰은 정확한 문장을 쓰고자 했다. 정확성은 정치적인 힘이 된다. 독자의 마음을 파고들어가 그를 변화시킨다. 작가가 쓴 작품을 읽고 독자가 현실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면 그는 성공한 것이다. 오웰이 어느 산문에서 주창한 정치적 글쓰기의 한 대목이 인상적이다. 그가 쓴 소설의 힘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짐작하게 된다.

 

좋은 산문은 창유리와 같다. 내 경우 어떤 동기가 가장 강하게 작용했는지 확실히 말할 순 없지만, 그 여러 동기들 가운데 어느 것이 따를 만한 가치가 있는지 나는 안다. 내가 쓴 책들을 돌아보니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었을 때일수록 나는 어김없이 생명력 없는 책들을 썼고 분홍색의 화려한 단락과 의미 없는 문장과 수식하는 형용사들 속으로 속아 넘어갔으며, 그래서 대체로 허튼 소리들을 했다는 사실을 알겠다. (「나는 왜 쓰는가」, 1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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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한 글쓰기, 『나는 왜 쓰는가』 | 기본 카테고리 2021-08-03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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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 저/이한중 역
한겨레출판 | 2010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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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의 산문집을 읽었다. 책 자체가 오웰의 중요한 산문을 모아 놓은 것인데, 나는 그 중 자주 언급되는 유명한 산문을 다시 추렸다. 「교수형」, 「코끼리를 쏘다」는 구체적인 일화를 소설처럼 기술해 놓은 글이다. 책에 수록된 초기 산문이 작가의 경험을 생생하게 전달하려는 경향이 있다면, 「정치와 영어」, 「나는 왜 쓰는가」, 「작가와 리바이어던」과 같은 후기의 글들은 작가와 정치, 글쓰기의 관계를 선언하는 사상이 전면에 드러나고 있었다. 글의 결은 다르지만 오웰이 쓴 산문은 전기이든, 후기이든 상관 없이 하나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정직성'이다.

 

시인 김수영은 「공자의 생활난」에서 '바로 봄'을 선언했다.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 김수영, 「공자의 생활난」 일부

 

시인은 어째서 바로 보겠다고 하는 것일까. 바로 보겠다는 선언과 의지가 없이는 사물을 바로 보지 못한다는 절박한 의식 때문이다. 생활에 침윤되면 사물을 정확하게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활인은 공기처럼 당대 이데올로기를 호흡한다. 사회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지배적 담론에 의해 의식을 형성하며 국가 주체로 호명된다. 소위 편견과 고정관념이라고 일컫는 프로그램화된 사고 방식이 주입된다. 그러므로 객관적으로 자명한 대상은 실은 이데올로기의 필터를 거쳐 왜곡된 상으로 인식된다. 들뢰즈가 '다양체'라는 개념으로 물자체의 영역에 있는 대상을 상상한 것도 이러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시인은 대상을 바로 보겠다고 선언한다. 사물 그 자체를, 사물의 생리를, 수량과 한도를, 우매함까지도. 명석하게 보겠다고 한다. 명석판명한 앎은 데카르트를 상기시키지만, 데카르트를 초과한다. 사물을 바로 보게 될 때, 그는 코기토의 확장이 아니라 죽음으로 도약한다. 당대 이데올로기를 진공상태로 만들면 어떻게 되는가. 그는 소통 불가능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이데올로기는 일종의 약호인데, 그 약호를 지우는 순간 시인의 언어는 생활인에게 알 수 없는 기호가 되어 버릴 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이 '시'라고 알고 있다. 오웰은 '죽음'까지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시'가 아니라 '산문'을 쓴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웰은 대상을 탁월하게 묘사할 줄 안다. 한 인도인의 교수형을 참관했던 경험을 담은 「교수형」에서 형장을 향하는 수인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교수대까지는 40야드 정도가 남았다. 나는 바로 앞에 걸어가는 죄수의 갈색 등을 지켜보았다. 그는 팔이 묶여 있어 어색하긴 했으나 저벅저벅 잘 걸었다. 절대 무릎을 펴지 않고 까닥까닥 걷는 인도인 특유의 걸음이었다. 걸을 때마다 근육이 매끈하게 제자리로 미끄러졌고, 두피에 바싹 붙어 있는 짧은 머리털이 아래위로 춤을 추었고, 젖은 자갈땅엔 맨발 자국이 절로 생겨나듯 찍혔다. 그리고 한 번, 어깨를 한쪽씩 붙든 사람들이 있는데도, 그는 도중에 있는 물웅덩이를 피하느라 살짝 옆으로 비켜갔다. (「교수형」, 25~26쪽)

 

독자는 죄수의 뒤를 따르는 글쓴이의 시선으로 죄수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에서 이미 대상을 언어로 묘사하려고 일찍부터 노력해 왔음을 털어 놓은 바 있다. 그런데 묘사력은 단순히 말을 멋지게 부리는 것으로 힘을 얻지 못한다. 대상을 정확히 보려는 주의력과 관찰력이 요구된다. 오웰은 김수영 식으로 말하면 사물을 바로 보려했다. 그가 버마에서 식민지 경찰 생활에 일찍이 환멸을 느꼈던 것도 그에게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초과해 버리는 감각적 촉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국주의 관념에 빠져들지 않았다. 사물을 정확하고, 정직하게 볼 줄 알았다. 그래서 위 인용에 이은 서술은 편견의 고리에서 빠져나와 대상과 정직하게 조우하는 시선을 증언한다.

 

이상한 일이지만, 바로 그 순간까지 나는 건강하고 의식 있는 사람의 목숨을 끊어버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죄수가 웅덩이를 피하느라 몸을 비키는 것을 보는 순간, 한창 물이오른 생명의 숨줄을 뚝 끊어버리는 일의 불가사의함을, 말할 수 없는 부당함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가 살아있듯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모든 신체기관은 미련스러우면서도 장엄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내장은 음식물을 소화하고, 피부는 재생하고, 손톱은 자라고, 조직은 계속 생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교수대 발판에 설 때에도, 10분의 1초 만에 허공을 가르며 아래로 쑥 떨어질 때에도, 그의 손톱은 자라나고 있을 터였다. 그의 눈은 누런 자갈과 잿빛 담장을 보았고, 그의 뇌는 여전히 기억과 예측과 추론을 했다 - 그는 웅덩이에 대해서도 추론을 했던 것이다. 그와 우리는 같은 세상을 함께 걷고, 보고, 듣고, 느끼고, 이해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2분 뒤면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 중 하나가 죽어 없어질 터였다. 그리하여 사람 하나가 사라질 것이고, 세상은 그만큼 누추해질 것이었다. (26쪽)

 

「코끼리를 쏘다」 역시 그의 지적 정직성을 잘 드러낸다. 발정난 코끼리가 마을에 난입하여 사람을 죽이고 집을 부순다. 오웰은 연락을 받고 사건 현장에 가서 총을 구한다. 그런데 일이 커져 오웰의 주변으로 버마인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그들은 오웰이 총으로 코끼리를 쏘아 죽이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천 명이 모여들었다. 이천 명의 눈 앞에서 그는 합리적이고, 강인하며, 과감한 지배자로서 행동해야 했다. 코끼리를 쏘지 않는 것은 압제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이천 명의 시선에 떠밀려, 죽이고 싶지 않았던 코끼리를 총으로 명중시킨다. 어떻게 보면 그는 일종의 영웅이 된 셈이었다. 허나 그는 자신의 실존적 상황에 부조리와 모순을 느낀다. 저 순간 오웰은 제국-식민지의 역학이 작용하는 생활 공간 속에서 '지배자'의 탈을 쓰고 무대에 오른 연기자였다. 지배자이면서 오히려 피지배자에게 조종당하는 꼭두각시가 되는 기묘한 아이러니를 체험한 것이다. 이를 아이러니로 느끼는 자체가 이미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실존을 증명한다. 그의 산문이 투명하고 산뜻하다면, 그것은 관념의 막을 걷어낸 그의 시선 덕택이리라.

 

후기 산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글은 「정치와 영어」였다. 생활이 타락하면 언어가 타락하는 것 못지않게, 언어가 타락해도 생활이 타락한다는 명제는 울림이 크다. 이 글은 저널리즘과 지식인 담론에서 횡행하는 군더더기 표현이나 라틴어로부터 유래하는 젠체하는 언어, 상투적인 표현 등이 사태를 정확하게 묘사하거나 전달하기보다는 애매하게 처리하여 독자의 정확한 이해를 방해하는 현상을 비판한다. 이러한 상투어는 이해하기는 어렵고 사용하기는 편하다는 특징이 있다. 상투어는 고유한 인식을 포기하고 언어를 편하게 부리려는 정신의 마취 상태를 반영한다. 전도서를 소위 타락한 언어로 번역한 다음 대목은 충격적이다.

 

내가 돌아가 해 아래를 보니 경주는 빠른 자의 것이 아니고, 전투는 강한 자의 것이 아니며, 빵은 현명한 자의 것이 아니고, 부는 사려 깊은 자의 것이 아니며, 총애는 기량이 뛰어난 자의 것이 아니니, 이는 시간과 기회가 그들 모두에게 임하는 까닭이더라.

(I returned, and saw under the sun, that the race is not to the swift, nor the battle to the strong, neither yet bread to the wise, nor yet riches to men of understanding, nor yet favour to men of skill; but time and chance happeneth to them all.)

 

다음은 현대식 영어로 고쳐본 것이다.

 

당대 현상에 대한 객관적 고찰에 따르면, 경쟁적인 활동에서의 성공이나 실패가 선천적인 능력에 비례하는 경향성을 표출하지 않으며, 상당한 예측불능의 요소가 변함없이 고려돼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밖에 없다.

(Objective consideration of contemporary phenomena compels the conclusion that success or failure in competitive activities exhibits no tendency to be commensurate with innate capacity, but that a considerable element of the unpredictable must invariably be taken into account.) (「정치와 영어」, 265쪽)

 

오웰이 지적하듯 두 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첫째 글이 구체적인 일상어와 이미지로 되어 있는 반면, 둘째 글은 추상적인 단어와 군더더기 표현으로 뒤덮여 있다는 것에 있다. 오웰은 "우리 시대에 정치적인 말과 글은 주로 변호할 수 없는 것을 변호하는 데 쓰인다."(「정치와 영어」, 270쪽)며 타락한 글쓰기를 야유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를 향한 것이 아닌가! 나 역시 구체적이고 생생한 이미지를 찾기보다는 추상적인 어휘를 선호하는 편이 아니었던가. 글 쓰는 사람은 항상 경계해야 할 것이다. 다음과 같이 글 쓰는 사람은 그 정도가 다를지언정 부조리한 체제를 정당화하거나 견고하게 하는 데에 동조할 것이 틀림 없다. "정치적인 언어는 주로 완곡어법과 논점 회피, 그리고 순전히 아리송한 표현법으로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무방비한 마을이 폭격을 당하고, 주민들이 시골로 내몰리고, 가축들이 기관총 난사를 당하고, 오두막들이 소이탄에 타버리는 것을 '평정平定' 이라 부른다. 수백만의 농민이 농지를 강탈당한 뒤 지고 갈 수 있는 것들만을 가지고 걸어서 길을 떠나도록 내몰리는 것을 '인구 이동' 이나 '전선 조정' 이라 부른다. 사람들이 재판도 못 받고 몇 년 동안 투옥되거나, 뒷덜미에 총을 맞거나, 북극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괴혈병으로 죽는 것을 '의심 분자 제거'라 부른다. 이런 식의 어법은 무언가를 마음속으로 그려보는 법 없이 명명하고자 할 때 필요하다."(「정치와 영어」, 270쪽)

 

'평정'이니 '인구 이동'이니 '의심 분자 제거' 등의 언어는 기호로 장막을 쳐서 사태를 올바르게 바라보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한국 정치인이나 지식인이 남용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수호', '국가와 민족의 발전' 등의 언어가 실은 텅 빈 깡통 같이 느껴지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저런 상투어를 쏟아내는 인간은 경계해야 한다. 사회의 모순을 은폐하는 데에 기여하는 세력임이 틀림 없을 터.

 

오웰이 죽을 때까지 투쟁했던 것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당파성을 앞세워서 사태를 왜곡하는 기만 혹은 거짓이었다. 그는 작가의 생활은 당파적이더라도 글쓰기는 생활과 분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적인 글쓰기를 옹호했던 그가 어째서 정치생활과 글쓰기를 구분하라고 한 것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작가의 글쓰기는 절대적으로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특정 세력의 눈치를 보거나 외압을 느낄 때 글은 변질된다. 정직하지 못한 글쓰기는 독자를 기만한다. 그러므로 창작의 최전선에 있는 작가에게 글쓰기 만큼은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작가가 글을 쓰면서 터럭만큼이라도 자기 표현을 검열하게 될 때, 창조력은 압살되고 마는 것이다. 자유가 온전히 주어진 글쓰기가 오히려 정치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자유가 사물을 바로 보는 정직성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정직한 글쓰기만이 감옥같이 생활인을 둘러싸고 있는 허위의식을 고발하고 탄핵할 수 있다. 햇빛이 안개를 몰아내듯, 정직한 글쓰기는 나쁜 이데올로기를 흩어버린다. 좋은 글을 읽을 때 독자의 눈이 환해질 것이다. 그것이 오웰이 염원했던 세상이다. 그가 죽고 반 세기가 지난 지금, 그가 바라던 세상은 도래한 것일까? 우리는 정직한가? 그리고 제정신으로 사물을 바로 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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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를 호흡하는 철학,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 기본 카테고리 2021-07-31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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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발터 벤야민 저/김영옥,윤미애,최성만 공역
길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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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는 문학이 구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온몸으로 부딪히는 현실은 모순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선량한 자가 핍박받고 악한 자가 득세하는 세계. 그렇지만 문학 속의 이야기는 현실과 닮았으면서도 달랐다. 과거로부터 전래한 신화와 이야기들은 착한 자에게 복을 내려주었다. 선한 자가 몰락하고 약자가 죽음에 이르는 비극적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이야기를 전달하는 형식, 그 비극성 속에 일말의 비판적 전망과 희망이 있었다. 『파우스트』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도 모순은 존재했지만, 작품의 완결된 형식 속에서 질서 있고 아름답게 삶이 직조되어 있었다. 무질서하고 황폐하며 추악한 현실과는 대조적이었다. 나는 그런 아름다움을 사랑했다.

 

철학은 문학에 좀 더 접근할 수 있는 도구였다. 지금도 여전히 철학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지만, 문학으로 접근하는 통로로서 철학은 일종의 세계관에 가까웠다. 문학이 현실과 이질적이었기 때문에 현실에서 통용되는 코드로는 문학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철학은 문학의 이질성을 다른 언어로 해명해 주었다. 플라톤을 위시하여 아리스토텔레스, 공자와 맹자가 들려주는 말들은 모두 도끼가 되어 고정관념을 깨뜨렸다. 알튀세르와 푸코는 인간이 온전한 주체가 아니라 구조에 의해 호명된 형성물이라고 알려주었다. 사르트르는 타자가 나의 자유를 시선으로 강제하는 지옥이라고 했다. 그 모든 철학의 담론들은 텔레비전 광고, 저널리즘이 즐겨 인용하는 통계와는 다른 결로 다가왔다. 나는 철학이 은폐된 진리를 계시해준다고 믿었다. 그림자를 실재로 믿고 살아온 수인은 철학의 은총으로 드디어 동굴에서 빠져 나온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문학과 철학 역시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구원이란 없다. 신의 이름 하에 신음하던 인간이 해방되는 서사 속에 흑인이나 여성이 억압되는 은폐된 구조가 발견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도 약자에 대한 무의식적 배제와 타자화가 나타난다. 문학사에서 칭송 받는 작품이라 하더라도 특정한 관점을 취할 수밖에 없으며, 일정한 한계를 피할 수 없다. 어쩌면 문학 작품에 나타나는 질서와 아름다움은 특정 타자를 배제한 결과물일 수 있기에 환상이며, 잘못 실현되면 기만이 된다. 철학은 그 자신의 담론이 이데올로기가 됨을 감수하고 주장하는 총체적 세계관이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도,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도 인간과 세계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려는 노력이다. 철학자가 만든 철학의 총체성은 구체적인 인간과 세계를 추상해서 얻은 대가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담론 안에서 명제가 참이 되더라도, 담론 바깥에서 무력해진다. 그래서 모든 담론은 이데올로기이다. 인간은 편견과 고정관념, 좋은 말로 선이해를 떠나서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현전의 형이상학을 비판적으로 보려는 자유인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길은 중단없이 비판 작업을 이어가는 것뿐이다. 사회가 주입한 이데올로기를 철학이라는 대항 담론으로 깨부순 후에는, 철학에 대립하는 반철학 또는 비철학을 세움으로써 철학 이데올로기를 허문다. 진정한 해방에는 결말이 있을 수 없다. 한 존재자가 이 세계에서 숨쉬기를 마치는 순간까지 비판을 지속하려는 의지에 자유가 있다.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는 그러한 자유를 실천하는 책이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인식 체계의 모순을 날카롭게 직시하고 자본주의의 모순이 첨예하게 침식되어 있는 도시를 낯설게 바라봤던 철학자의 사유가 펼쳐져 있다. 백 여 년 전에 탄생한 이 책은 오늘날 읽어도 참신한 시선들로 가득하다. 벤야민은 점증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자유주의, 전체주의 기운과 거리를 두고 있다. 비판적 거리는 당연히 내용 상으로도 드러나는 것이지만 독자가 주목하게 되는 지점은 책과 글의 형식이다. 주유소, 확대사진, 골동품, 벽보와 같은 도시에서 만나는 대상이 표제어인데 그것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다른 연상을 펼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주유소

삶을 구성하는 힘은 현재에는 확신(Uberzeugungen)보다는 사실(Fakten, 事實)에 훨씬 더 가까이 있다. 한 번도, 그 어느 곳에서도 어떤 확신을 뒷받침한 적이 없었던 '사실'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진정한 문학적 활동을 위해 문학의 테두리 안에만 머물라는 요구를 할 수 없다. 그러한 요구야말로 문학적 활동이 생산적이지 못함을 보여주는 흔한 표현이다. 문학이 중요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은 오직 실천과 글쓰기가 정확히 일치하는 경우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포괄적 지식을 자처하는 까다로운 책보다, 공동체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더 적합한 형식들, 예컨대 전단, 팸플릿, 잡지 기사, 포스터 등과 같은 형식들이 개발되어야 한다. 그와 같은 신속한 언어만이 순간 포착 능력을 보여준다. 사람들의 견해란 사회생활이라는 거대한 기구에서 윤활유와 같다. 우리가 할 일은 엔진에 다가가서 그 위에 윤활유를 쏟아 붓는 것이 아니다. 숨겨져 있는, 그러나 반드시 그 자리를 알아내야 할 대갈못과 이음새에 기름을 약간 뿌리는 것이다.(69~70쪽)

 

표제어는 '주유소'이지만 글의 내용은 주유소 자체를 다루지 않는다. 연관성이 있다면 주유소-기름-윤활유의 연상에 의한 연결뿐이다. 글은 유물론을 말한다. 확신은 관념론 편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세계를 파악하는 주체의 힘과 권능을 강조한다. 타자는 상위의 인식으로 도달하기 위한 반테제로서 의미를 지닌다. 변증법적 지양은 새로운 진리를 획득하는 방법론이었다. 그러나 벤야민은 변증법과 다른 방향에서 진리를 마주하고자 한다. 확신보다 사실이 삶을 구성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주체의 관념 바깥에 실재하는 타자의 힘과 권능을 중시한다.

 

문학이 문학적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확정된 문학의 범주에 안주하지 말아야 한다. 과거에 진리는 책, 거대한 체계로 인간사와 자연사를 정리한 담론 안에 있었지만, 현대에는 전단, 팸플릿, 포스터가 정보를 실어 나른다. 전단, 팸플릿, 포스터는 자본주의 사회의 물적 토대와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상품을 유통시키는 매개 역할을 담당한다. 이 현대적인 매체들, 자본주의 사회에서 통용되고 소비되는 언어의 형식을 타고 진리가 전파될 수 있다. 왜냐하면 벤야민이 살던 시대에 이미 자본주의와 이를 뒷받침하는 대중사회가 정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시대의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헤겔이 지향했던 절대 정신으로서의 학문 체계, 거대한 학문적 구조가 아니라 파편적이고 단편적인 정보와 사실들이 구성하는 힘을, 관련 없어 보이는 것들이 한순간 의미있게 성좌가 되는 순간을 더 중시했다.

 

벤야민은 '엔진에 다가가서 그 위에 윤활유를 쏟아 붓는 것'이 19세기의 담론이라면 '대갈못과 이음새에 기름을 약간 뿌리는 것'은 20세기의 담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의견은 옳았을까? 이 역시 상징보다 알레고리를 선호하는 특정 관점의 이데올로기임에 틀림 없지만, 그의 의견은 어느 정도 옳았다. 타자를 주체에 동화시키기보다는 타자의 균열에 자기 자신을 거는 철학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런 철학만이 반성적 철학이며, 신화가 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거리를 둘 수 있기 때문이다. 끊임 없이 변화하는 세계와 발을 맞추어 진보하는 인간의 사유이기 때문이다. 문학이 문학다움을 고수할 때, 철학이 철학다움을 주장할 때, 그것들은 급격히 보수화되고 망가진다. 느닷없이 침입하는 바이러스 같은 타자를, 그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직시하는 정직성만이 해방이다. 그는 현대를 호흡하는 철학자였다. 당대를 지배하는 공기와 향기를 미세하게 식별할 줄 아는 탁월한 감식안을 지니고 있었다. 철학이 대중에게 충격을 준다면 그것은 '까다로운 책'보다는 가볍고 날렵한 '팜플렛'과 같을 것이다. 오늘날로 번역한다면 방송과 유튜브를 외면하고 대중에게 충격을 주기 어렵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벤야민의 말이 전적으로 옳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책의 충격 효과는 유튜브보다 훨씬 강력하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다시 엔진에 다가가서 그 위에 윤활유를 쏟아 붓는 것이 필요한 시대가 도래할지도 모르리라.

 

어쨌든 주유소, 차량에 연료를 주입하는 장소는 벤야민에게 새로운 통찰을 가져다준다. 주유소의 일반적인 쓸모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어 있는 자연스러운 인식이라면, 벤야민은 교환가치로 환원되어 버린 특정 공간을 다시 사용가치로 환원시킨다. 그런데 사용가치는 주유소의 기름이 본래 지니고 있던 '연료'로서의 기능이 아니라 '유물론 선언'으로 재배치된다. 주유소는 새로운 신화, 꿈이 된다. 그곳에서 부르주아의 신화를 대체할 새로운 신화가 탄생한다. 그 신화를 벤야민은 자신의 꿈 이야기로, 기계 장치 메커니즘의 세부 묘사로, 책읽기가 비행기를 타고 공중에서 보는 길이라면, 베끼기는 두 발로 걸어가는 길이라는 주관적 은유로, 말리는 충고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삶의 지혜가 담긴 경구로, "천재는 근면함이다."(74쪽)라는 통찰이 담긴 문장으로 내어 보인다.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에 나열되어 있는 글들은 독립적이면서 각자가 새로운 신화를 구성하는 별들로 반짝인다. 글들에서 의미를 찾고 직조하는 몫은 독자에게 달려 있다.

 

벤야민의 탁월함은 사유를 이미지화하는 능력에 있다. 사유는 개념이고, 이미지는 직관이다. 사유는 언어와 논리의 영역이지만 이미지는 세계와 감각의 편이다. 벤야민은 이미지로 사유를 전개하는 독특한 글쓰기를 창안해 내었다. 그것은 상투적인 소통과 진부한 코드를 벗어나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관점과 연결되어 있으며, 무엇보다도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사물을 열린 자세로 수용하는 개방성을 미덕으로 갖는다. "우리가 이미지의 세계에 끌리는 것은 지식에 대한 알 수 없는 어떤 은밀한 반항심 때문이 아닐까?"(223쪽) 아, 철저하게 관념론자인 나로서는 벤야민의 글쓰기가 부러울 따름이다. 나도 세계에 손을 내밀어 본다. 더 감지하고 느끼고 싶다. 더욱 풍요롭게.

 

운율에 맞게 구상되었으면서 나중에 어느 한 구절에서 리듬이 빗나간 글이야말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산문이다. 그것은 마치 장벽의 갈라진 틈새를 통해 연금술사의 방 안으로 흘러든 빛살이 여러 결정체, 구, 삼각형들이 빛나도록 하는 것과 같다.(97~98쪽)

 

사람을 대할 때 일상적 예절을 중시하면서 거짓말을 비난하는 사람은 유행에 맞게 옷을 입으면서 정작 내의는 입고 있지 않은 사람과 같다.(109쪽)

 

상상력이란 무한히 작은 것 속으로 파고들어갈 줄 아는 능력이고, 모든 집약된 것 속으로도 새로운, 압축된 내용을 풍부하게 부여할 줄 아는 능력이다. 요컨대 상상력은 어떤 이미지든 접어놓은 부채로 여길 줄 아는 능력, 그 부채가 펼쳐져야 비로소 숨을 쉬게 되고 또 새로이 펼쳐진 그 폭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특성들을 내부에서 연출해 보이는 그러한 능력이다. (126쪽)

 

내부공사 관계로 임시 휴업!

꿈에서 나는 총으로 목숨을 끊었다. 총을 쏘았을 때 나는 깨어나지 않았다. 잠시 시체로 누워 있는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런 다음 잠에서 깨어났다.(141쪽)

 

내 글에 등장하는 인용문들은 무장을 하고 나타나 한가롭게 지나가는 행인에게서 확신(Uberzeugung)을 강탈하는 도적떼와 같다.

범죄자를 죽이는 것은 윤리적일 수 있다. 그러나 범죄자를 죽이는 것의 합법화는 결코 윤리적일 수 없다.

신은 모든 인간에게 영양을 공급한다. 그리고 국가는 모든 인간을 영양실조에 걸리게 한다. (149쪽)

 

정신의 깨어 있는 상태(정신집약, Geistesgegenwart)야말로 미래의 진액이기 때문이다. 순간에 일어나는 일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저 멀리 놓여 있는 것을 미리 아는 것보다 더 결정적이다. 징표, 예감, 그리고 신호는 낮이고 밤이고 물결처럼 우리의 신체기관을 통과하고 있다. 그것들을 해석할 것이냐 아니면 이용할 것이냐, 이것이 문제다. (153~154쪽)

 

사람이 자신의 강점을 알게 되는 곳

그곳은 그의 실패에서이다. 우리가 우리의 약점 때문에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업신여기고 그 약점을 부끄러워한다. 하지만 우리가 강한 곳에서 우리는 우리의 패배를 업신여기고 우리의 불운을 부끄러워한다.(172~173쪽)

 

충고를 부탁받은 사람이 제대로 충고하기 위해서는 먼저 충고를 부탁하는 사람 자신의 의견을 물어보고 그다음 그 의견을 승인해주는 것이 좋다.(185쪽)

 

첫 번째 꿈

율라(Jula)와 함께 나는 어디를 가고 있었다. 우리의 일정은 산행도 산보도 아닌 어정쩡한 것이었다. 우리는 산 정상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희한하게도 나는 돌출한 암벽을 뚫고 나와 암벽과는 엇갈린 방향으로 하늘을 향해 비스듬히 치솟은 말뚝을 산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그 위에 올라갔을 때 그것은 산 정상이 아니라 오히려 편편한 고원이었고, 그 위에는 양편으로 상당히 높은 고풍스러운 집들이 서 있는 넓은 길이 있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걷지 않고 그 길을 따라 달리는 차에 타서 나란히 뒷좌석에 앉았다. 그런데 우리가 타고가는 동안 그 차가 방향을 틀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내 몸은 율라 쪽으로 기울어졌고 나는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그녀는 내게 입이 아니라 뺨을 갖다 댔다. 그녀에게 키스를 하고 있는 동안 나는 그녀의 뺨이 상아로 되어 있고 그 뺨을 따라 정교하게 까만 줄이 길게 칠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아름다움에 압도당했다.(187쪽)

 

성공은 세상사의 변덕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은 그 성공을 추구하는 의지와는 하등 상관이 없다. 성공의 진정한 본질은 성공을 초래한 원인들이 아니라 성공이 예정된 사람들의 모습에서 드러난다. 성공의 정체는 바로 성공의 총아들에서 밝혀진다. 그 총아들이란 곧 성공의 응석받이들, 성공의 의붓자식들이다. 세상사의 변덕과 짝을 이루는 것은 개별 존재 속의 괴팍함이다. 이 점을 보여주는 것은 예로부터 희극의 특권이었다. 희극에서 관철되는 정의는 하늘의 작품이 아니라무수한 실수들이 모여 이루어낸 작품, 마지막 작은 실수 하나로 마침내 정확한 결과를 산출하게 되는 그런 실수들의 작품이다. (188쪽)

 

재기발랄하게 훈련받은 신체가 펼치는 연기를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사유에 부여하는 것이 바로 훌륭한 작가의 재능이다. 훌륭한 작가는 결코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쓰는 글은 그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만 도움을 준다.(2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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