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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철학의 철학, 『비철학자들을 위한 철학 입문』 | 기본 카테고리 2021-07-28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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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비철학자들을 위한 철학 입문

루이 알튀세르 저/안준범 역/진태원 해제
현실문화연구(현문서가) | 2020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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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는 오인의 형태 아래 있는 인지이고, 미망의 형태 아래에서 어떤 현실을 암시하는 것.(245쪽)

 

철학자. 그들을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고뇌하는 표정이다. 그들은 골방에서 인간과 세계에 골몰한다. 세상의 온갖 근심과 고통이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는 듯, 그들은 사유한다. 세상사와 멀찍이 거리를 두고 논리와 추상의 세계로 나아간다. 렘브란트가 그린 <명상 중인 철학자>는 철학자에 관한 우리의 관념을 명징하게 표상한다. 창밖으로 빛이 들어오는 지하실에서 책상 앞에 앉은 노인이 생각에 잠겨 있다. 나선형으로 회돌아 올라가는 계단은 그가 거처하는 장소의 깊이를 가늠케 한다. 창밖에서 쏟아지는 햇살의 반대편에는 침묵과 같은 어둠이 있다. 그는 빛과 어둠을, 실재계와 현상계를, 선과 악을, 주체와 객체를 성찰한다.

렘브란트, 명상 중인 철학자, 1632, 패널에 유채, 28 x 34 cm, 네이버 미술백과 참조.

망치를 들고 있는 노동자에게, 바코드를 찍는 마트 직원에게 철학에 관심이 있는지 물어보자. 그들은 아마 손사래를 칠 것이다. "철학이요? 그런 걸 왜 해요, 골치 아프게." 실제로 그들에게 주어진 삶의 문제는 철학적 사유와 무관한 실천, 노동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다니는 회사에 대해서, 봉급에 대해서, 여가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그들은 나름대로 눈빛을 반짝이며 대답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무엇인지를 일관성 있게 설명하는 논리가 발견될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는 철학의 전문가들, 철학을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지만, 삶 속에서 철학적 사유를 전개한다. 세계관 혹은 가치관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인간은 각자가 마음에 품으며, 매 순간의 선택 속에서 실천한다.

 

모든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이 철학은 어떤 것일 수 있는가? 그대가 주변에 아는 사람들 그러니까 평범한 사람들에게 질문해본다면, 아마도 그들은 겸손해서 답을 피하다가 결국엔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래, 내겐 내 나름의 철학이 있어”라고. 무엇일까? “사태를 보는 하나의 방식." 그대가 질문을 진전시켜본다면, 그들은 말할 것이다. "삶에는 내가 직접 경험해서 잘 아는 사태들이 있어. 예컨대 내가 하는 노동, 내가 교류하는 사람들, 내가 다녀본 고장들, 내가 학교나 책에서 배운 것. 이런 것을 인식이라 부르자. (중략) 나는 나의 인식들을 상회하는 관념들을 가져. 예컨대, 세계의 기원에 관해, 죽음에 관해, 고통에 관해, 정치에 관해, 예술에 관해, 종교에 관해.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이 있지. 이 관념들은 내게, 좌와 우에서, 분산되어, 무질서하게 왔고, 서로 분리되어 있으며, 총체를 이루지 못했어. 하지만 점차, 그 이유는 모르겠으나, 이 관념들은 통합되었고, 그리하여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어. 내가 나의 인식들을 전부, 혹은 거의 전부, 이와 같은 일반적 관념들 아래, 그것들의 통일성 아래 집결시킨 거야. 그렇게 해서 나는 일종의 철학을, 내가 알지 못하는 사태이든 아는 사태이든 이것들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견해를 만들었어, 나의 철학, 그건 나의 관념들 아래 통합된 나의 인식들이야.” 도대체 이런 철학은 무엇에 쓰는 거냐고 그대가 묻는다면, 그는 “단순해, 내 삶을 이끌어주는 거지, 내게 북쪽을 지시해주는 나침반 같은 거야.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각자는 저마다의 철학을 만들지.”라고 답할 것이다. (51~52쪽)

 

인간은 사태를 나름대로의 인식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관념으로 조직한다. 철학은 관념들을 통일성 있게 집결시킨 총체적 관점이다. 이런 점에서 소위 '개똥 철학'이라는 일반인의 철학하기가 가능하다. 세계 안에서 사회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인간은 그것이 의식되지 않더라도 특정 관점과 전제에 따라서 세상을 인식하고 파악하고 분석하며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존경과 외경의 눈빛으로 숭앙하는 철학사의 영웅들, 소크라테스를 위시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 홉스, 루소, 후설, 하이데거, 푸코, 데리다, 공자, 맹자, 순자, 주희, 왕양명의 사유는 무엇인가? 그들의 사유는 일반인의 사유와 무엇이 다른가? 다를 리가 있겠는가? 사실 그들의 철학하기와 일반인의 철학하기는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보통 사람들은 '철학'이라고 하면 손사래를 친다. 철학이 거창하고 사변적이며 형이상학적인 고담준론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그런 고정관념을 형성하는 자들을 알튀세르는 '철학 교사'라 칭하고 있다. 그들은 유명한 철학자들의 개념을 소유하고 그들이 쓴 책을 읽고 또 읽으면서 소가 되새김질하듯 의미를 반추한다. 그들에게 위대한 철학자들이 쓴 텍스트는 심원하여 무한히 샘솟는 우물과 같다. 과학자들은 특정 현상에 대한 탐구가 끝나면 그 의미를 재차 파헤칠 필요가 없지만, 철학 교사들은 철학자의 텍스트에서 계속 새로운 의미를 발굴한다. 철학은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고, 충만하며 무한하다. 알튀세르는 철학 담론에서 역사성을 제거하고 총체적 의미를 재발굴하는 철학 교사들을 관념론의 편으로 세워둔다. 알튀세르는 관념론이 지금까지 (서양) 철학을 지배해 왔다고 주장한다. 관념론은 필연의 철학이다. 이를 테면, 관념론 철학은 세계의 다양한 계기들과 관념을 체계적으로, 통일성 있게 만들어주는 '부동의 원동자' 혹은 '신'이라는 이념을 설정한다. 신은 인간 인식에서 진리를 보증한다. 중세처럼 신을 확고하게 믿는 시대가 아니라 하더라도 데카르트나 칸트 역시 인간의 인식과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신을 요청했다. 거기에서 억지가 생겨난다. 알튀세르는 '철학'이라는 이름을 독점한 관념론에 '비철학'인 유물론을 세워놓는다.

 

기원에는 신도 없고 무도 없으며, 아니 차라리 기원이 아니라 시작이고, 시작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먼저 실존하는 질료인데, 질료의 요소들의 마주침(우발적이고 임의적인)에 의해 질료는 세계가 된다. 그리고 이 마주침은, 모든 것을 좌우하는 이 마주침은 우발성과 우연성의 형상이지만 세계의 필연성을 생산한다. 우연성은 신의 개입 없이 오로지 단독으로 필연성을 생산한다는 것. 말하자면 세계는 저 홀로 생산된다는 것, 기원에 대한 관념론적 질문을 시작(또는 사건, 도래)에 대한 유물론적 질문으로 교체함으로써, 의미를 갖지 않는 질문들이, 세계의 기원에 대한 질문만이 아니라 거기에 결부된 모든 것,신에 대한 신의 전능함에 대한 신의 불가해성에 대한 시간과 영원에 대한 질문 등등이 청산된다는 것.(62~63쪽)

 

틀림없이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죽음이 세계 안에 실존하며 세계에 군림한다는 관념을, 유물론자들이 옹호하는 이 관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삶은 유한하며 시간 속에서 제한된다는 것을 말하는 일만은 아니다. 이는 세계에는 어떤 의미도 갖지 않으며 아무것에도 봉사하지 않는 숱한 사태가 실존함을 긍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특히, 세상 어느 곳에서도 상보물이나 보상 없이 고통과 아픔이 실존할 수 있음을 긍정하는 일이다. 이는 절대적 상실들(결코 채워질 수 없을), 되돌릴 수 없는 실패들, 어떤 의미도 후과도 없는 사건들, 사막의 모래 속으로 사라지는 거대한 강들이 그러하듯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역사의 무로 사라져 유산되고 마는 기획들과 심지어는 문명들이 실존함을 인정하는 일이다. 이러한 사유가 의지하는 유물론적 테제에 따르면, 세계 자체엔 어떤 의미(사전에 고정된)도 없으며, 세계는 차가운 천체의 무 안으로 사라진 무수히 많은 다른 세계 사이에서 돌출하는 기적적 우연으로만 실존한다. (71쪽)

 

유물론은 철학의 역사에서 한 번도 주류가 된 적이 없었고 늘상 관념론에 의해 억압당했지만 그 명맥을 유지해 왔다.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스피노자, 마키아벨리, 마르크스에 이르는 계보는 우발성을 필연으로 믿는다. 관념론은 그들의 진리를 보증하기 위해 역사를 지우지만, 유물론은 역사를 중요한 계기로 삼는다. 알튀세르는 후기에 마주침의 유물론으로 우발성을 사유한 바 있다. 빗금으로 평행하게 내리는 원자의 세계에서 편위가 발생할 때, 나타는 변화. 그 변화마저도 신의 섭리로 포섭하는 게 관념론이라면, 우발성에서 새로운 계기를 찾는 것이 유물론이다. 알튀세르는 비주류였던 유물론이 실현할 수 있는 정당한 철학적 실천과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해 '거대한 우회'를 감행한다. 이를 위하여 기술적(기본적) 인식, 과학적 인식, 예술, 정치, 종교, 이데올로기, 철학적 층위의 추상과 실천 두 축을 차례로 검토한다.

 

이 짧은 글에서 알튀세르가 선보이는 거대한 우회를 모두 소개하기란 분량과 능력 양 면에서 불가능하다. 여기에서는 독서를 통해 새로이 알게 된 사실들을 짚는 것으로 만족할까 한다. 우선 철학이 사태를 보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앞선 인용문의 문장으로부터 시작해보자. 인간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칸트가 밝혔듯 인간의 인식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감성적 인식틀(시간, 공간)과 오성적 인식틀(12범주)에 의해서 이해된다. 있는 대상은 인간의 인식틀을 거쳐서 표상과 개념을 형성한다. 표상화 작업 자체가 대상의 특정 부분을 가지치듯 쳐낸 산물이다. 알튀세르는 이러한 인식을 '기술적 인식'이라고 했으며, 그러한 인식을 보편성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과학적 인식'이라고 지칭한다. 기술적 인식이나 과학적 인식은 인간이 본디 추상 능력을 지닌 존재임을 드러내준다. 추상은 세계 이해의 전제 조건이다.

 

인간이 추상에 의해 세계를 인식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명백한 근거는 언어이다. 인간은 언어라는 필터를 통해서 세계를 이해하고 타인과 소통한다. 칸트는 각자 주관적인 인간이 대상에 대해서 동일하게 인식할 수 있는 까닭은 선험적인 인식틀이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인간의 사회적 속성을 간과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밝혔듯, 인간은 태어나면서 이미 공적 형식에 참여한다. 아이는 언어를 배울 때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생활 속에서, 구체적인 맥락과 환경 속에서 언어의 쓰임새를 배운다. 언어 사용을 게임에 빗댄 것은 언어를 배우는 과정이 게임의 규칙을 익히는 과정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하는 사물들, 그리고 그 사물에 묻어 있는 우리의 관념들, 정서들은 온전히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다. 사회적인 것은 어느 정도 추상화를 감내한 결과이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첫 분석이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구별이다. 상이한 사용가치를 가진 상품들은 추상화된 사회적 노동시간을 척도로 가치를 지니게 되며, 교환된다.

 

지루하지만 언어를 통해 더 재고해보자. 소쉬르는 언어의 사용 양상을 랑그와 파롤로 구별했다. 랑그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추상적 구조이며, 파롤은 개개인의 구체적 발화를 가리킨다. 불라는 단어를 듣고 한국인은 뜻을 구별해주는 최소 단위로서의 'ㅂ', 'ㅜ', 'ㄹ'을 인식한다. 'ㅂ'을 'ㅍ'으로 바꾸어 소리낸다면 한국인 화자는 '풀'이라는, 의미가 전혀 다른 단어로 인식할 것이다. 그러나 외국인은 '불'과 '풀'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한국인에게는 유의미한 'ㅂ'과 'ㅍ'의 차이가 외국인에게는 무의미한 것이다. 한편, 같은 'ㅂ'을 발음해도 길동이의 'ㅂ' 소리와 춘향이의 'ㅂ'소리는 미세하게 다르다. 한국인 화자라면 그것을 같은 소리로 인식한다. 이 때 한국인 화자의 의식 속에 있는 'ㅂ'은 추상화된 랑그이며, 길동이의 발음과 춘향이의 발음에서 실현되는 'ㅂ'은 파롤이다. 인간이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이 추상화 능력을 공유하고 있어야 한다. 추상의 양상은 사회마다, 나라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그래서 언어는 사회적인 것이며, 추상 자체의 능력은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내재해 있더라도 그 실현 양상은 다르다.

 

인간의 인식이 추상의 산물임에도 우리는 그것을 추상화했음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 우리가 살기 위해 공기를 호흡하는 것이 자연스럽듯, 언어를 배우고 사용하는 것도 자연스럽고, 대상에 대한 인식 역시 자연스럽다. 우리는 특수한 사회적 조건과 특수한 추상의 영향 하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랑그는 인공적 구조이지만 자연스럽게 체득된다. 인간의 이러저러한 인식은 관념을 형성하고 세계에 대한 모종의 관점을 만들어 낸다. 모든 인식의 토대로서 그것을 진리로 인식할 수 있도록 떠받쳐주는 토대는 신념이다. 이를 다른 말로 이데올로기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모든 인식은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알튀세르 식으로 말하면 이데올로기는 주체를 '호명'한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관념들이 인간들의 자유로운 “의식들"에 폭력적으로 스스로를 강제한다. 인간들이 이런 관념들을 진실하다고 자유롭게 재인지할 수밖에 없는 형태들 안에서, 인간들이 진리가 거주하는 곳,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의 관념들 안에서 진리를 재인지할 능력이 있는 자유로운 주체들이라고 스스로를 구성할 수밖에 없는 형태들 안에서, 인간들을 호명함에 의해.

이와 같은 것이, 본질적으로, 이데올로기적 실천에서 작동하는 메커니즘이다. 개인들을 주체들로 변형하는 이데올로기적 호명 메커니즘. 그런데 개인들은 언제나 - 이미 주체들이기에, 다시 말해 "개인들"은 언제나 - 이미 어떤 이데올로기에 예속되어 있기에(인간은 본성상 이데올로기적 동물이다) 일관성을 가지려면, 이데올로기는 주체들을 주체들로 호명함으로써, 말하자면 (이미 주체들인) 구체적 개인들을 어떤 지배이데올로기에서 어떤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옮김으로써 "의식들의 내용" (관념들)을 변형한다고 말해야만 하는데, 저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통해 낡은 이데올로기를 지배하고자 투쟁한다.(215~216쪽)

 

인간은 특정 시대, 특정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영향 하에서 세계를 받아들인다. 인식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이데올로기의 필터를 거치게 된다. 이데올로기가 특정 계급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있으며, 다른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자신의 것인양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될 때, 그것은 허위 의식이 된다. 이를 테면,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게 되면, 그들은 인식의 차원에서 자신이나 부르주아를 왜곡해서 이해한다. 자기를 부정하고 부르주아의 세계를 선망하는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이 그것이다.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암말 몰리가 인간이 선물한 리본을 달고 자기 모습에 감탄하는 장면을 떠올리면 적당할 것이다. 부르주아는 억압적 장치가 아니라 이와 같은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를 통해서 프롤레타리아를 지배해 왔다. 억압적 장치는 반발을 사지만, 이데올로기 장치는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한다. 이데올로기는 오류가 아니라 미망이다. 오류는 그것을 인식한 사람에게 교정해야 한다는 의식을 불러일으키지만 미망은 오류를 품고 있으면서도 잘못인 줄 모르게 한다.

 

철학적 추상이 모든 인식 중에서 가장 총체적이다. 과학적 추상은 인식하려는 구체적인 대상을 갖지만 철학적 추상은 구체적 대상이 없다. 추상의 결과를 다시 추상하는 것이 철학이다. 박이문은 철학의 담론을 2차 담론이라고 했다. 과학이 대상을 포착한 인식을 다시 인식하는 것이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그러한 특성에 주목하여 철학의 대상은 언어라고 단언했다. 철학은 명제를 세우는 수학과 달리 테제를 세운다. 테제는 "입장 정립"이다. 철학은 자신의 관점을 관철하기 위해 반대자들의 논리를 자신의 체계 속에 포섭한다. 예를 들면, 플라톤은 자신의 이데아론을 전개하기 위해서 그들과 대척점에 있었던 상대주의자들, 소피스트들을 대화편에 등장시킨다. 자신이 전개하는 철학의 완전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반대자들의 테제들을 빌리는 것이다. "요컨대 모든 테제는 본성상 안티테제인 것."(305쪽)

 

철학에 목적이란 인식들의 생산이 아니라 적이 지닌 이론적 힘에 맞서는 전략적이고 전술적인 전쟁이며, 이 전쟁에는 모든 전쟁이 그렇듯 판돈이 걸려 있는 것이다. 실제로 철학은 다시 말해 상이한 철학들의 앙상블은, 시대마다 이론적 전장이라고 표상되어야 한다. 칸트는, 그 전장에서 (자기 철학이 승리해 다른 철학들을 전부 무장해제 시키면서) 비판 철학의 “영구 평화"가 군림하게 하고팠던 그는 선행 철학인 “형이상학" (칸트의 표현)을 정확히 “전장"이라 불렀다. 추가해야 하리라. 옛날 전투들의 참호들로 인해 구멍이 뚫린 파란만장한 전장이라고, 포기했다가 점령하고 다시 점령당한 요새들이 늘어선 전장이라고, 유난히 치열했던 전투들의 이름이 붙은 전장이라고, 과거로부터 튀어나오는 새로운 전투부대들의 부활에 좌우되는 전장이라고, 선도적 새로운 세력을 규합하는 전장이라고, 추가해야 하리라, 전장에는 주어진 시대마다 주요 전선이 부차적 전선들과 나란히 나타날 수 있다고. 모든 적대 세력이, 모든 부차적 전선과 마찬가지로, 이 주요 전선 주위에서 결집되고 양극화된다고. 추가해야 하리라, 최초의 역사 철학 이래로 전투들이 지속된 전장이라고. 동일한 전투가, 새로운 임시 이름들 아래 관념론과 유물론의 전투를 이어가는 동일한 전투가 항상 있는 전장이라고.(306쪽)

 

그리하여 철학적 실천들, 철학자가 실현하는 노동은 일종의 진지쟁탈전이 된다. 반대자들이 구축해 놓은 진지를 탈환하면서 새로운 진지를 쌓고, 그것을 다시 반대자들이 탈환하여 재배치하는 과정이 철학의 역사이다. 철학자들은 어째서 쟁탈전에 그토록 진지했는가? 왜 그와 같은 노동을 기꺼이 하려고 하는가? 관념론자들은 주장할 것이다. "우리는 진리를 위해 복무한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그렇지 않다고 폭로한다. "재미삼아 하는 이 전투에는 현실적 판돈들이 [걸려] 있는데, 이 전투에 걸린 진지해 보이는 판돈들이 정작 전장에서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판돈들"이] 이 전장 외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310쪽)

 

철학자는 이데올로기를 대상으로 노동한다. 철학은 이데올로기를 변화시키려고 사유한다. 관념론자들은 대체로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에 복무해 왔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독배를 들게 한 공화주의자들을 증오했다. 그는 대토지를 소유한 귀족들의 지배를 옹호했고, 그의 철인왕 구상부터 이데아에 이르기까지 귀족적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는 거대한 체계를 구상했다. 부르주아 계급이 지배층으로 부상하기 시작하는 근대에 철학자들은 '주체'라는 범주를 사유해 왔다. 주체는 사유재산을 처분하고 양도할 수 있는 법적 자유를 지닌다. 주체는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에서 필수적인 범주로 성립한다. 데카르트를 위시하여 홉스, 칸트 등이 주체의 문제에 천착할 때 그들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복무하고 있었다. 철학마저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진리의 이름으로 진지하게 사유했다. " 까닭인즉 그들 모두가 "저 자신이 가능한 참된 역사적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사태는 이처럼 흥미롭게 진행된다. 말하자면 아무도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 그들은 마치 “저 자신이" 위임을 받은 듯이 행동한다는 것이요, 그들은 저 자신이 지배계급 또는 피지배계급들의 대표자들이라고 느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말하자면 철학적 생산물의 시장에 나와서, 자신들의 이론적 상품을 구매하고자 하는 이에게 그것을 제공하는 것이다."(319쪽)

 

오늘날에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범접할 수 없는 신화로 자리잡고 있다. 이를 테면, 인기를 누리던 연예인이 사업가와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는 기사, 게다가 그 연예인이 임신했거나 출산을 했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는 기사는 현대인이 가져야 하는 행복의 관념을 증언한다. 아름다운 연예인은 사업가가 소유하고 과시할 만한 좋은 상품인데, 대중은 그러한 상품을 소유한 자를 선망하거나 자신도 자발적으로 그러한 상품이 되기를 무의식 중에 소망한다. 출산 이후의 아름다운 몸매는 부유한 계층이 아니라면 실현하기 어렵다. 그녀들은 육아로부터 자유롭거나 자신의 식단을 관리해주는 매니저가 있고, 신체를 관리할 수 있는 물질적 시간적 여력이 충분하다. 저널리즘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담론을 유포하는데, 비판적 거리를 두지 않는다면 필자와 독자는 여지없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당하고 만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철학적 실천을 다시 감행해야 한다. 지배 이데올로기에 복무하고 있는 철학이 '철학'이라는 이름을 가져가버린 시대에, 지배 이데올로기에 충격을 주는 철학이 '철학'으로 불릴 수 있도록 진지를 탈환해야 한다. 관념론 철학은 역사를 제거해 버린다. 역사가 제거되면 우발성과 변화는 배제된다. 그들에게는 지금이 이미 조화롭고 완벽한 세계이다. 알튀세르는 유물론 철학에 의한 실천을 주문한다. 철학적 실천이 이데올로기를 변형하는 것이라면, 지배적 철학이 지금까지 지배 계급을 위해서 복무해 왔다면, 이에 저항하는, 억압받고 무시당한 피지배계급을 위한 철학이 있다. 그들을 대변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담을 이론이. 그것은 철학의 역사에서 떳떳하게 철학이라는 이름을 가지지 못했으므로 '비철학'이라고 부르자. 다시 말해 비철학의 철학이 필요하며, 철학을 대변하던 '철학자', '철학 교사'의 철학이 아니라 '비철학자'가 사유하는 그것을 요구해야 한다. 비철학자가 철학이라는 이름을 탈취해 올 때, '철학'이라고 하면 손사래를 치는 일이 사라지고, 더 인간적인 세계, 억압하고 지배하기보다는 공존하고 배려하는 세계, 갈등이 상존하더라도 합리적으로 개선해 나가는 세계를 만들어가기 위하여 토론하고, 창조적인 사유를 즐기는 철학이 일상화될 것이다. 철학은 그 때 "혁명을 위한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렘브란트가 그린 <명상 중인 철학자>는 철학자의 단편일 뿐이다. 생을 이어가는 모든 현장 안에서 철학은 싹틀 수 있다. 실천 안에서, 이론적으로, 부단히 사유하면서.

 

부르주아가 자신들의 영구적 철학체계들을 생산하기를 단념한 시대에, 부르주아가 관념들에 대한 보장과 전망을 단념하고 자신들의 운명을 컴퓨터와 기술관료의 자동화에 맡기려는 시대에, 부르주아는 사유될 수 있는 가능한 미래를 세상에 제시할 수 없는 시대에, 프롤레타리아가 일어나 도전할 수 있다. 요컨대 철학에 삶을 되돌려줄 수 있으며, 계급 지배로부터 사람들을 해방하기 위해 철학을 “혁명을 위한 무기"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367~3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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