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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백살 이후의 삶, 귀엽고 유쾌한 할머니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50플러스의 시간 | 전체보기 2016-12-08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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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50플러스의 시간

홍기빈,이승욱,,박성호,기노채,배정원,구자인,최광철,안춘희,최재천,박원순,유인경 공저
서해문집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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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란 연극을 본적이 있었다. 성장한 딸이 독립을 하자, 엄마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자신의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지만, 병에 걸려 죽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슬픈 내용이었지만 박정자씨 특유의 묵직한 저음이 인상적이었고, 난생 처음으로 바다를 보러가는 엄마의 행동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 작품이었는데, '50플러스의 시간' 이 제목을 보자마자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이 작품이 떠올랐다.

 

50이란 나이, 전통 사회에서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로, 세상 이치를 알게되는 완성의 나이로 대접받았지만, 현대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평균 수명도 길어지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라이프 싸이클도 변화했다. 그에 따라서 여생이라고 넘겨 버리기엔 30년 이상 더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 노년이 아닌 제 2의 중년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진지한 모색이 필요한 시기인 것은 분명하다.

 

'50  플러스의 시간'에는 각분야의  전문가 11명이 조언하는 50세이후의 노후 대비에 관한 노하우가 담겨 있는데, 플러스라는 긍정적인 단어나, '제 2중년의 시대 빛나는 인생후반전 설계도'라는 소제목이 마음에 꼭 들었다. 

평소에도 반백 살 이후의 삶에 대해서 자주 생각해왔다. 특히나 엄마가 눈에 띄게 건강이 안 좋아지고 노쇠해지는 걸 눈으로 직접 보면서, 나이 든다는 것이 두려워졌고, 그래서 더욱 준비를 단단히 해야겠다고 걱정을 많이 했는데, 주로 건강과 경제적인 면에 신경이 많이 쓰였다. 

 

이 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소확은 50이후의 삶에 대해 폭넓게 생각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삶의 의미나 사회적 의식, 자식이나 후배세대와의 소통, 성, 경제, 주택, 취미까지. 남은 생을 충실하게 살아가려면 

우선 정신적인 준비부터 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했다. 50을 노년이라고 생각하던 것이나 노화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낸 것이 중요했다. 늙었다고 하기에는 아직은 창창하고, 다른 말로 하면 완숙한 나이라고 받아들였고, 요즘말로 꼰대스럽지 않고 귀여운 할머니가 됐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을 새기기도 하고 또  유쾌하고 생기있는 내 5~60대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이 책에서 일러주는 제안 중에서 구체적인 방법들에 먼저 눈길이 갔다. 조합주택이나, 농촌에서의 삶같은이. 읽는 동안 내 인생의 50플러스의 시간은 지금까지와 얼마나 달라질까 생각해봤는데, 변화를 선호하는 편이 아니니 겉으로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클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농촌이나 조합주택에서 사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게 된다. 삶의 방식에 대한 시야가 넓어진 것이다.

 

'50 플러스의 시간'. 미래를 상상하고, 설계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즐거웠다. 나이 먹는 일이 썩 반가운 일은 아니지만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니, 후회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 상상하고 설계하는 걸 멈추지 않을 것이다. 생각하다보니 조금씩 조금씩 구체적으로 그려지는 방법도 생기니, 하고 싶은 일, 도전해볼만한 일들도 리스트로 작성해 두고, 멋진 할머니가 될 수 있게  계획도  자꾸자꾸 세워보고.

이렇게 미래지향적인 에너지를 충전하면서 50 플러스 인생을 준비해야겠다고 불끈 의욕을 불태워본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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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과 김구의 회중시계에서 영감을 받다- 회중시계 | 전체보기 2016-12-05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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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회중시계

우장균 저
트로이목마 | 2015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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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중시계'는 사실을 바탕으로 글을 쓰는 기자 출신이 쓴 소설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구 암살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삼고 비교적 허구를 자제하고 사실을 바탕으로 김구가 암살당하기 전  닷새간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70년이 다 돼가도록 아직도 김구 암살 사건의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것에 대한 통탄과 과친일파들이 여전히 득세한 당시의 상황에 대한 분노까지, 이 작품은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이 너무나도 분명했다. 메세지가 분명하다는 것은 그만큼 작가의 의욕이 충만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주인공 정현우가 총에 맞아 죽는 것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주인공의 죽음으로 시선을 끌어당긴 시작에 비해 뒤로 갈수록 사건은 부각되지 않았다. 단순한 이야기인데도 흐지부지되고, 급하게 마무리 돼, 선명한 메세지와 작가의 의욕에 압도된 느낌마저 들었다. 작가가 사실을 취재해서 글을 써던 기자의 생리에서, 허구와 상상력을 발휘해서 작품을 완성해야 하는 작가적 생리로 미처 전환되지 못한 모양이다.

누가 왜 김구를 죽이려고 하는지를 추적하며 현우는 김구의 암살을 막으려고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현우가 죽는 순간 현우가 지니고 있던 회중시계 바늘도 12시 반에서 멈춰지고 마는데, 이 12시 반이 운명의 시간이었다. 김구가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던 시간. 현우와 김구는 거의 동일한 시간에 죽어간 것이었다. 이 두 사람을 연결한 또 한가지가 바로 이 회중시계였다.

 

현우가 마지막 순간까지 갖고 있던  시계는 원래 김구가 갖고 있던  시계로, 윤봉길 의사가 남긴 것이었다. 현우가 갖고 있던 회중시계는 항일투쟁하다 죽은 형의 유품이었고, 그 시계를  본 김구가 자신이 갖고 있던 윤봉길의사가 남긴 시계와 교환한 것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 모두 총으로 암살당하는 것으로 생을 마쳤고, 시계 또한 죽어버렸다. 그것은 친일청산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작품에서 회중시계가 이토록 의미있게 묘사되고 있는데, 실제로 작가에게 영감을 준 소재가 바로 김구의 회중시계였던 모양이다. 작가는 경교장에 전시돼있던 백범의 회중시계와 윤봉길의 회중시계가 나란히 전시돼 있던 사진에 크게 감동을 받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작가가 받은 감동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지 않았고,김구의 암살이란 비극을 그려낸 것은 우리의 아픈 현대사를 제대로 들여다보고자 하는 의지의 발로였을 것이다. '회중시계'는 소설로서 부족한 여러 가지가 눈에 띄지만 과거를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는, 역사를 일깨우려는 작가의 사명감만큼은  빛나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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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암살범 안두희 추척자들 김용희, 곽태영, 권중희,박기서-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 전체보기 2016-11-29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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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박도 저
눈빛 | 2013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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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국가에서는 사적인 복수를 엄금하고 법에 의거해 처벌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법으로 범법자를 처벌하는 것으로 사회구성원을 보호하고,정의를 세우는 것은 국가가 지고있는 막중한 책임이다. 만약 국가가 범법자를 비호하며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때는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는 네 발의 총성이 울렸고, 그 총성과 함께 한국 독립운동의 거목 김구 주석이 영원히 쓰러지고 말았다. 백범을 암살한 사람은 현역 육군 장교, 안두희 소위였고 그는 현장에서 바로 체포됐다.

 

6.25가 발발하기 꼭 1년 전에 발생한 김구 암살사건은 전국민들에게 큰 슬픔을 안겨준 한편 안두희가 아무리 단독범임을 주장을 해도 그 배후에 대한 의혹이 가시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재판 뒤 그에 대한 처분을 보면 김구 주석을 암살한 범인에 대해 내려질 수 없는 조치들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종신형을 선고 받고 복역 3개월만에 국방부 장관의 명으로 15년으로 감형, 6,25가 발발하자마자  국방부 장관의 잔형 면제 처분을 받았고, 국방부 특명으로 육군소위로 복귀하게 된다. 이렇게 초법적인 조치들이 이어지니 안두희가 권력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의심이 제기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안두희의 호시절은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면서 막을 내리고, 이내 그에겐 수난시대가 시작되고 만다. 이후 그는 자주 이사 다니고,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숨 죽이며 살았지만 김구 암살사건의 진상을 밝혀 민족의 정기를 올바르게 세우고자하는 인물들의 추적을 피할 수 없었다.

 

백범살해진상 규명투쟁위원의 김용희 간사, 김제 출신의 청년 곽태영,안동 출신  권중희,버스 기사였던 박기서. 이 네사람은 모두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도 아니고, 정의를 부르짖는 정치인도, 그렇다고 부자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소시민들 뿐이지만 이들은 한곁같이 애국지사 김구 선생을 존경했고 안두희가 진상을 밝히지 않은 채 제명대로 살다 죽으면 안된다는 의기 하나로 찾아 나선 것이다. 그들에게 안두희는 반역자고 매국노가 다름없었을 것이다.

 

네 사람 중 권중희씨는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안두희를 공격한 기사며, 그 뒤 재판과정에 부고기사까지본 생각이 났다. 권중희씨는 안두희에게 이민 여권이 나왔다는 기사를 본 82년부터 더 이상 미루어선 안되겠다고 결심하고 생계도 포기한 채 그를 찾아 나선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안두희에게 이승만의 지시로 김구를 암살했다는 자백을 받아냈지만 이튿날 안두희는 고문에 못이겨 허위로 자백한 것이라고 부인하면서 여전히 진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권중희씨는 이후 성금으로 미국 국립문서기록 관리청에까지 찾아갔다. 현지 교포들의 도움을 받으며 김구 암살의 진상을 규명할 수 있는 문서를 찾아 나섰으니 그 결기와 의지가 실로 놀라울 뿐이었다.

이런 분들이 있으니..안두희는 죄 값을 치루며, 불안 속에 떨다 박기서씨의 정의봉에 맞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암살자다운 처참한 말로였다.

그러니까 안두희의 마지막 추격자는 박기서씨인 셈이지만 그는 살인죄로 수감돼 1년 6개월을 복역하다 특사로 풀려났다. 형량을 보면 정상이 참작된 것이다.

 

이 네 사람이 안두희를  사적으로 응징한 것에 대해서는 찬성 일색만은 아닐 것이다. 특히 아무리 죄인이라지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만큼은 비판받을 소지가 있다. 

하지만 문제는 굳이 이들이 자신의 삶을 희생해가면서 안두희 추적에 나서게 만든 현실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권력이 비호하고 암살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주체가 나섰더라면, 진상 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안두희가 제대로 죄 값을 치루었다면 그들도 소시민으로서 평범하게 삶을 꾸려갔을텐데..

안두희의 배후로 떠오르는 사람들은 이민을 떠나거나 자취를 감추거나 죽거나 하면서 추적의 대상에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암살자는 자신이 저지른 암살에 대해 죽는 날까지 보호받을 수 있다고 오판한 건지, 암살자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고려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목숨을 걸고 안두희를 추적했던 사람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숨어 다니다 종내는 추적자에게 죽음을 당한 암살자.

추적자들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고 그 정당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암살자는 그 배후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안두희의 죽음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추적자처럼 암살자 역시나 확신범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추악한 진실이 드러날까봐 끝내 침묵으로써 내막을 감추고 싶었던 것일까.

 

그리고 잊지 말아야 되는 것은 국가는 무거운 책임을 느끼고 반성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안두희가 재판을 받고 복역한 지라, 일재부재리의 원칠에 따라 다시 법정을 그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했다지만, 이렇게 중차대한 사건의 진실을 개인에게 맡겨두고 제대로 추적하지 않음으로써 사적 응징을 자초한 것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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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는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천황을 찬양하고 내선일체를 주장해야 했을까-동포에 告함 | 전체보기 2016-11-25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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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동포에 고함

이광수 저
철학과현실사 | 1997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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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기미 독립선언서를 쓴 사람은 육당 최남선이었다. 그렇다면 그 직전 동경에서 있었던 2.8 독립선언서의 작성자는 누구일까? 춘원 이광수였다. 그의 작품 '무정'은 최초의 현대소설로 평가되며, 지금도 고전으로 읽히고 있다. 하지만 그 뛰어난 필력으로 친일활동에 동참함으로써, 한국 문학에 기여한 한 찬사보다는 지탄을 받는 인물이 되고 말앗다.

 

'동포에서 告함'. 제목만 보면 피히테의 '독일국민에게 고함'이 연상되면서 동포들의 애국심이나 각성을 촉구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이광수가 일본어로 쓴 70여 편의 글을 싣고 있는데, 그가 변절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충격받을 정도로 노골적이고 적나라했다. 아주 수위 높여 내선일체를 주장하고 천황을 숭배하며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에 몸을 바치라는, 이른바 문장보국(文章報國)을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정신에 입각한 국민문학, 내선일체를 지향하는 문학 건설을 외치는 걸 보면 작가정신까지  망각하고 있었다.

 

"천황은 현신인現神人이시다. 십선十善의 천자이시다.일억 국민의 덕의 이상이시다."(75, 건국절의 아침)

 

"이제 조선인의 유일한 진로는 황민화이며,이에 대하여는 정부와 민중 모두가 일치된 생각을 갖고 있

다"(황민화皇民化의 한 길,81)

 

"조선의 백성이여.오래 된 작은 감정을 지금에야말로 청산하라. 그리고 깨끗이 정화된 새롭고 큰 마음으로 살자. 이제 우리의 고향은 작은 조선 반도가 아닌 것이다. 일장기 나부끼는 곳, 그곳은 모두 우리의 고향인 것이다."(기원 2600년,119쪽)

 

"그렇다면 애국심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일본을 내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며,내 몸, 내 생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이 감정은 천황을 내 아버지처럼 사모해 받들고 그 일을 해드리는 것이다. 전선의 병사들이 죽음의 순간에 ' 텐노 하이카 반자이'를 외치는 그 마음인 것이다."(조선 청년의 애국심,213)

 

읽다보면 돌변해도 어떻게 이렇게까지..하는 한탄이 절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이 책 속 글만 보자면 '무정' 아니라 그보다 더한 걸작을 남겼어도, 이광수를 현대소설의 장을 연 작가로 인정하고 싶은 마음이 산산조각 날 것이다. 이렇게 빼어난 필력과 재능을 하필 친일하는데 소진하다니, 그 악마적 재능에 분노를 넘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혹시나 하는 일말의 기대를 품어도 보았다. 뒤에 첨부된 사학가 김원모의 주장을 보면서.

 

이광수는 1940년 2월 가야마 미쓰로우(香山光郞)으로 창씨 개명한 뒤 본격적으로 친일활동에 나서고 있다. 그런데  그전에 이광수는 1937년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도산 안창호와 100여명과 함께 체포된 상태였는데  김원모의 주장에 따르면 1938년 그가 하늘처럼 모시던 도산 안창호가 사망하자, 도산의 자리를 어떻게 채워야 할지,민족지도자들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그 심적 부담에 자신이 친일로 나서는 대신 지도자들을 보호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라는 것이다. 조선어 사용이 금지된 시기에 원효대사를 집필하며  민족 정신을 보존하려고 했고, 겉으로는 친일이었지만 내심에는 조선의 독립에 대한 기원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광수의 친일행적을 변호하는 시각이 있다는 것이 이색적이기도 했고, 사실 이 주장에 살짝 귀가 솔깃해지기도 했다. 민망할 정도로 일본을 찬양하고 있는 점이 오히려 더 친일파로 위장한 건 아닌가하는 역설적인 의심을 품게 한 것이다.

이광수도 자신이 해방 뒤에 쓴 '나의 고백'에서 자신의 친일은 민족을 위해서였다고 기술했지만, 그것은 친일행위에 대한 치졸한 변명일 뿐이라는 비난을 초래했을 뿐이었다.

그의 민족 보존론 주장에 동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은 이정도로 이광수가 망가지진 않았으리라고, 이광수가 저 정도로 조선인으로서 정신을 팔지는 않았을 거라고, 조선인 작가 이광수의 마지막 자존심을  믿어주고 싶은 미련이 손톱만큼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 바람과는 상관없이 어디까지나 이 주장은 소수 견해인 모양이다. 김원모 뒤에 실린 문학평론가 정현기의 글에서는  이광수의 친일이 여지없이 비판당하고 있었다. 이광수는 비겁한 일본 지식 권력자의 하수인이었고 조선인 앞에서는 추악한 지식권력자라며 지식인으로서  수행해야 할 책무와 운명을 거론하고 있다.일본인은 이용가치가 높은 이광수를 이용해 조선인들의 독립의지를 꺾으려 한 것이고, 이광수는 이에 협조한 지식인 부역자라는 것이다.

앞의 사학자의 글이 1997년이라  그 뒤 20여년동안 친일, 혹은 이광수에 대한 연구가 좀더 진행됐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현재로선 이쪽 주장에 더 무게가 실려있지 않을까.

 

내년이 '무정'이 연재된지 100주년, 문인협회에서 춘원 문학상을 제정했다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친일 경력 때문에 상의 제정은 불투명해진 상황이고, 이것은 작가 이광수와 지식인 이광수의 간극을 초래한 이광수의 업보인 것이다. 동시에 개인적인 선택만으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이  일제 침략기라는 역사적 상황과 맞닥뜨려야 했던, 개인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비극이라는 점도 감안해야 할 것이고.

 

그렇다면  문제는 작가 이광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그것이 숙제로 남는다.

친일파라는 이유로 그의 문학적 평가까지 매도돼야 하는것인지. 냉철하고 다각적인 시각과 인식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친일청산이 제대로 됐다면, 작가 이광수에 대해서  조금은 너그러워질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친일청산이 여전히 과제로 남은 상황이라 비판적 시각을 유지해야 되는 점도 있을 것이다.

'무정' 100주년를 계기로 이제 춘원 이광수를  재점검하는 불씨가 지펴졌으면 한다. 친일행적이나 근대적 작가로서의 공적 어느 한쪽으로 매몰되는 일차적인 평가를 지양하고, 작가 이광수의 업적에만 눈길을 두지 않는 작가와 지식인으로서 춘원을 어떻게 비판하고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 문학적으로 역사적으로 다면적이고 총체적인 평가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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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운동가, 민족주의자에서 친일로 변절한 일그러진 근현대 지성인-최남선 평전 | 전체보기 2016-11-22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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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최남선 평전

류시현 저
한겨레출판 | 2011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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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하면 '해에게서 소년에게','3.1독립 선언서','불함문화론'으로 근대화와 민족주의에 강렬한 빛을 남긴 시인이자 역사가이다. 하지만 그뒤에 보여준 친일 행적으로 말미암아 그 빛보다 더 길고 짙은 그림자를 남긴 명암이 확실한 인물이었다. 

 

최남선은 일찍부터 새로운 지식과 정신을 반영하는 신문물의 선구자로 그 이름을 널리 떨쳤다. 최초의 신체시라 할 수 있는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쓴 것이 10대였고, 20대 들어서는 잡지 '청년'을 창간해 서구문물과 근대적 지식을 소개하는 계몽운동가였다. 30대에는 '기미 독립선언서'를 작성하는 등 민족운동가로, 또 역사연구가로 그 누구보다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였던 것이다.

 

그는 일본보다 발전한 조선 문화를 발견하는 것으로 일제에 저항했다.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며 중국에 대항했던 고구려를 역사에 주목하는가 하면, 한민족의 정체성을 찾는 작업의 일환으로 조선심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 무렵의 최남선은 서구근대 문명을 적극수용하며, 또 조선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글을 발표하며 조선의 지성을  주도해나갔다.

3.1운동으로 투옥되는가하면 글과 말로, 대중들에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당대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당당하게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928년 그가 조선사 편수회위원에 위촉된 것은 큰 파문을 일으켰다. 변절의 조짐을 보인 것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찍이 동경에 유학했던 이른바 동경 삼재(三才) 즉 홍명희, 이광수, 최남선이라는 걸출한 지성들 행보가 20년대 들면서 간극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홍명희는 사회주의를  적극  수용하면서 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데 비해 이광수는 민족개조론을 주장하며 민족주의 노선에서 이탈했다. 최남선도 자치주의자들과 가까이하며 친일의 길로  들어선 것이었다.

 

30년대 들어서면서 최남선은 노골적으로 친일활동에 나서며 변절자의 대열에 합류했다. 일선융화론을 주장하는가하면,  화랑도를 조선 청년을 전쟁에 동원하는 논리로 활용하며 학병 권유에 나서는 등  친일의 논리로 방송과 글, 강연에 나섰다. 그가 변절함으로써 물질적으로나 지위면에서는 안정적인 삶을 살았을지는 모르겠지만 잃는 것도 많았다. 그에게 실망한 젊은이들은 그를 조롱하기 시작했고, 지식인으로서의 권위도 실추되고 만 것이다.

 

최남선의 변절은 그 어느시대보다 격변을 겪었던 근현대 지식인의 훼절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그 무렵 신간회가 해체됐고, 조선에서 합법적으로 대중활동을 하기에 불가능해졌다. 그만큼 일제의 탄압적인 지배방식이 완성된 셈인데, 30년대 들어서는 최남선 외에도 수 많은 지식인들이 친일의 길에 나서

일본의 전쟁을 옹호하고 일제의 논리를 전파하는데 앞장섰다.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만 것이었다.

지식인들이 이렇게 대거 변절하게 된 데에는 일제 지배 체제가 강고해지자, 독립에 대한 희망을 잃고, 일제의 지배가 영구히 지속되리라 판단했던 것에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상상해보니,가관이었다. 당대의 내로라 하는 지식인들, 교수, 언론인, 시인, 소설가 등등이 방송이나 신문에다 번지르르하게 전쟁에 지원하자, 국방비를 기부하자고 연설하고 글을 썼을 모습들이. 해방된 뒤 자신이 쏟아놓은 말과 글에 대해 이들은 얼마나 수치스럽고 참담했을까.

해방뒤 일제 부역자들을 색출하는데 있어서 문인들이 많았던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들이 친일활동을 한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됐기 때문이었으니, 최남선의 경우에도  일제를 옹호하며 내세웠던 말과 글을 해방 뒤에는 변명하고 바꾸면서 학자로서 심한 자괴감을 느꼈을 것이다. 아니, 부끄러움이라도 느끼기나 했으면 그래도 양반인 편이 아니었을까. 이광수는 끝까지 자기 변호에 급급했으니.

 

해방 뒤에도 최남선은 여전히 역사학자로서 이름을 지니고 있었고, 그를 찾는 곳은 많았다. 교육계에서나 그의 친일 경력을 들어, 그의 글과 강연을 저지했다니, 그나마 민족적 정기가 남아 있었다고 할까.

1949년 2월 그는 반민특위에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다. 그가 남긴 친일의 족적이 워낙 분명해서 기소를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최남선의 재판은  세간의 이목을 끌었지만, 그는 보석으로 석방됐고, 반민특위의 와해로 재판 자체가 흐지부지되면서 죽는 날까지 여전히 역사학자로  기고하고, 활동할 수 있었다.

 

최남선은 일제에 굴복한 지식인이 어떻게 일그러지게 되는지를 여실하게 보여 주었다. 자신의 말과 글을 일제를 옹호하는 논리로 동원해 보신했다. 그는 지식을 파는 것을 넘어서, 지식을 무기삼아 조선 청년들을 전쟁으로 몰아넣는데 일조했다.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보람있게 죽자' 같은 글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근현대 선구자적 지성인으로서의 명성에 스스로 먹칠하며 일제의 확실한 부역자가 된 것이었다.

그는 반민특위의 재판부에 반성의 뜻을 담아  '자열서'를 제출했지만  무죄를 주장하는 이율배반적 태도를 보였다. 

 

그럼에도 일말의 기대를 갖고 싶었다. 죽음을 앞두고서는 마음이 변하지 않았을까, 전쟁터에서 죽어간 청년들 얼굴을 떠올리며 참회했을 거라고. 이렇게 상상하는 것으로 마음을 달랠 수 밖에 없는 것은 단죄해야 할 죄상을 단죄하지 못했기에 그 후손들이 감수해야 하는 비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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