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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의 힘, 조선의 문명을 보여주다-직필 | 전체보기 2017-01-16 0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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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직필

주진 저
고즈넉 | 2014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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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다닐 때, 학보 만드는 동아리 활동을 했는데, 그때 선배들에게 자주 들었던 말이 '직필(直筆)은 사람이 죽이고 곡필(曲筆)은 하늘이 죽인다'는 말이었다.  붓을 든 자는 자신의 남긴 기록으로 인해  언제든지 필화를 겪을 수 있다는 것이 붓을 쥔 자의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직필'은 조선시대 사관이 기록한 역모가 담긴 사초의 행방을 찾는 과정이 그려져있는 작품인데, 문제는 작성 당사자인 민수영은 기억 상실증에 걸려 사초를 어디에 숨겼는지를  찾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내용을 보면서 댄 브라운 원작의, 얼마전에 본 영화 '인페르노'가 연상됐다. 그 영화에서도  기호학자인 랭던(톰 행크스)이 기억을 잃어 버린 상태에서 지도 속 암호를 풀어야 하는데, 알고보니 곁에서 그를 도와주던 여의사가 범인이었던 것이다.

 

수영 역시도 무엇이 진실이고 누가 동지인지 진위와 피아 식별이 되지 않아 혼란스럽기만 한데,왕의 형 월산대군, 한명회, 그리고 왕(성종) 또한 사초의 행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대체 사초에 기재된 내용이 무엇이길래 그토록 사초를 찾으려고 하는 것인지, 수영 역시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기며 사초는 물론이고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를 밝혀내려한다.한 마디로 민수영은 직필로 사초를 남긴 죄로 쫓기게 된 인물이었던 것이다.

 

비밀이 담긴 사라진 기록이나  주인공이 기억상실에 걸렸다는 흔한 설정이지만 직필은 흥미롭게 진행이 됐다. 권력욕의 상징처럼 된 훈구파 한명회나, 왕의 형이라는 이유로 몸을 낮춰 살고 있는 월산대군, 그리고 왕은 자신을 조종하려 드는 신하들에게 맞서는 상황에서, 왕의 부친의 죽음과 관계된 사초 내용은 대단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신하임에도 왕을 통제하고 싶어하고, 또 자신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한명회의 탐욕이나, 왕의 형이라는 이유로 언제 역모의 주범으로 몰려 희생자가 될지 모르는 월산대군,

 

 

'직필'은 무엇보다 뒤로 갈수록 내용이 그럴 듯해져서 읽을 맛이 났다. 실명이 등장하는 역사소설의 경우 역사적 상황이나 고증이 너무 무시된 채 과하게 상상력을 발휘한 작품을 보면 불편해진 적도 있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허구적 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서도 결말부분에 이르면 그랬을 수도 있겠다고 슬며시 동의가 되기도 했으니.

 

메세지 또한 울림이 있었다. 붓이 인간의 문명과 이성을 상징한다면 그것과 함께 법이라는 또다른 사회를 작동시키는 원리가 등장하고 있다. '경국대전'의 반포로 조선은 비로소 국가로서 체제가 완성됐는데, 한 사회가 건강하게 운영되기 위해서는 붓의 힘과 함께, 법의 힘 또한 필수적라는 점에서나 또 법으로 통치하는 문명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완성된 '경국대전'을 읽던 왕이 사관에게 하명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데,

"이제부터 사관은 허리를 펴고 나의 행동거지를 살피도록 하라. 나를 어려워하지 말고 내 과실을 지적하여 수시로 바로 잡도록 하라"고. 엎드려 기록하던 사관이 더욱 자신의 말과 행동을 잘 보고 직필로 기록할 수 있게  조치한 것이었다.

성종이 성군으로 평가받게 된 데에는 이렇게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으면서, 한번도 붓을 쥔 자, 기록하는 자를 탄압하지 않았던 덕이 크다.

반면에 한명회는 어떻게 기억되고 평가되고 있는지.이렇듯  기록은 당대 아닌 후대에 그 빛을 발하게 된다. 기록이 있기에 인간은 교만하지 않고, 후대를 염두에 두게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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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속 모범적이고 성실한 모습이 책에서도 느껴졌다 -때로는 길이 아닌 길을 가라 | 전체보기 2017-01-09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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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때로는 길이 아닌 길을 가라

정양호 저
매일경제신문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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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 리뷰를 블로그에서 오랫동안 지켜본 분 책으로 쓰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이었다. 직접 뵌 적은 없지만 블로그를 통해서 해외 출장도 자주 다니시고 바쁘게 일하시는 가운데에도 꾸준하게 리뷰를 올리시는 걸 지켜봤기에 대단히 성실한 분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조달청장이 된 이후에도 변함없이 리뷰를 올리더니  이번에는 책까지 내셨으니 역시 부지런한 분이라는 걸 재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에 낸 '때로는 길이 아닌 길을 가라'에는 그 조직 속에서 기관장에 오르기까지 공직생활 32년의 경험과 생각을 담고 있는데, 프롤로그에서 공무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생긴 것에 대해 자성하는 한편 국민들의 애정어린 이해를 구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공직자답다는 생각이 들었고, 풍부한 경력을 가진 선배의 입장에서 또 기관장의 시각으로 본 변화하는 공무원 조직과 그에 걸맞는 방향성과 자세와 업무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보고서 잘 쓰는 법같은 기본적인 업무에서부터 잘 노는 기술까지..직장인으로서의 마음가짐과 고위직이 되면 보이는 것 등, 오랜 연차동안 겪었던 경험과 기관장이라는 리더로서의 경험까지 한 만큼 직장 내 위치에 따라 갖추어야 할 업무능력이나 안목을 담고 있다는 점이 눈에 들어왔다. 속도보다는 방향이 중요하다는 기본 뿐 아니라 폭 넓고 장기간의 안목에서 직장생활을 영위하는 방법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힘들 때 진솔하게 마음 터놓을 수 있는 선배, 멘토를 통해 힘을 얻고, 직급보다는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는 것, 또 인사에서도 일욕심많고 성공욕구가 강한 구성원에게는 빨리 승진할 수 있는 인사루트, 즉 다채로운 인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인사방식에 대해서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 어느 조직보다 보수적이고 아직도 기수와 서열 문화가 잔존한 조직이 있다보니, 성취욕구가 강한 구성원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으로 침체된 조직문화, 승진 분위기를 불어넣는 것도 괜찮아 보였다.

 

아무래도 조직이다보니 업무능력에 대한 언급이 많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떨림이나 저녁이 있는 풍경처럼 일에 대한 열정과 여유, 휴식을 잊지 않고 거론한 것은 꼭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조직과 업무에 충실할 수 있게 만드는 요인이라는 것 또한. 월화수목금금금이 미덕인 시대는 지났고, 일과 개인생활이 양립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환경과 조직문화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필자의 유학생활, 가족과 함께 했던 저녁있는 생활의 경험이 증명해주고 있는 셈이다.

 

사실 공무원 조직에 대해서는 언론을 통해서 알고 있었던 것이 거의 전부라 이 책에서 나온 필자의 여러 경험담은 꽤 재미있게 받아들여졌다. 평소 블로그를 통해 필자에 대해 가졌던 인상을 책에서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맡겨진 업무를 성실하게 처리하고, 모범적이면서 크게 모나지 않은 성격, 학구적인 면까지.그만큼 조직생활에 적합한 성격과 스타일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그런 느낌을 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후배들에게 일러주는 교훈은 여러 모로 영양가있는 자극이 되고 교훈이 되겠지만, 필자의 이력을 보면 한편으로는 아무나 쉽게 따라가지 못하겠구나 하는 벽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후배들은 긴 안목으로 자신의 길을 발견하기를 바랐다. 열의를 잊지 않고 비젼을 향해 꾸준히 나아가는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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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주도의 재판, 맥아더의 독선에 대한 신랄하게 일침을 가하다-도쿄 대재판 | 전체보기 2016-12-31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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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도쿄 대재판

황허이 저/백은영 옮김
예담 | 1999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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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는 수면 위에서는 우아하고 아름답기 이를데 없는 모습으로 유유히 떠다닌다. 하지만 그렇게 우아하게 떠있기 위해선 잘 보이지 않는 수면 밑에서는  끊임없이 발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도쿄대재판'은 이렇게 수면밑 백조의 발길질을 담은 책이라고 할까. 우리가 보고 알고 있는 도쿄 전범 재판 이 이루어지기까지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이면사까지 밝히고 있다.

 

그동안 미흡하기는 하지만 정의의 심판이다, 세기의 재판이라는 평가가 이루어졌다면 이 책에서는 그 화려한 포장을 벗겨내고  민낯을 보여주고 있다. 맥아더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독주에 대한 비판이 적나라하게 제기되는데, 극동위원회 열 나라는 미국의 들러리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대로 가면 국제재판이 아니라 미국재판이라는 불만의 소리가 터져나왔다.

도쿄재판 역시나  전범 처리를 두고 극동위원회  열한 나라 사이의 이해관계로 갈등이 발생했고, 그에 따른 진통이 적지 않았음을 드러내고 있다.

 

아무래도 필자가 중국인이다보니, 그 어느나라보다 피해가 극심했던 중국의 제안이 반영이 안된데다 하실제로 맥아더의 일방적 결정으로 갈등과 마찰이 빚어진 비사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특히 천황 처리문제, 즉  전범으로 기소하느냐와 천황제 폐지를 놓고서는 심각한 견해차이가 벌어졌다.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천황을 전범으로 기소하고, 천황제를 폐지할 것을 주장했지만, 미국은 이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는데, 천황 문제는 전후 일본의  헌법과 정치,사회구도의 변화와 맞물려있다는 점에서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외에도 B.C급 전범의 재판 이관을 두고도 갈등이 벌어졌다. 각나라는 미국이 재판도 없이 전범 용의자들을 방면한것을 두고서는 다른 나라에서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특히 731부대, 생체실험과 세균을 살포한 것으로 악명높은 이시이 방면에 대해서만큼은 중국으로서는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시이 부대가 주둔했던 곳이 중국인만큼 세균살포와 생체 실험으로 중국인 희생자가 다수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반발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결국 이시이의 방면을 되돌이킬 수 없었고, 이에 대해 미국은 도덕적 책임이나 재판의 취지를 훼손한 것에 대한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도쿄 대재판'에서는 맥아더의 치부를 밝히면서 대한 반감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비서와의 애정행각에 대해 노골적으로 묘사하고 더욱이 그 비서가 금품을 받고 전범용의자들을 방면시켜주는 부정까지 저지르고 말았으니..맥아더가 대통령 선거 당내 경선에 나가 형편없는 성적으로 떨어진 것에 대해서도 조롱기어린 시선을 감추지 않고 있다.

 

'도쿄대재판'에서는 미국이 왜 천황을 전범으로 기소하지 않고 천황제 또한 폐지하지 않았는지, 또 전범처형을 극소화했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결국 냉전체제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소련에 이어 재판 중에 중국 본토마저 공산화되자 이에 위협을 느낀 미국이 일본을 반공기지로 삼은 것이었다.

천황제가 폐지되면 일본공산주의 세력이 게릴라전을 벌이게 될 것을 우려해 A급 전범으로 25명을 기소하고, 그중 7명을 사형하는 데 그쳤던 것이다. 그리고 전범 중 상당수를 방면해 이들이 다시 정계로 복귀함으로써 일본 우익의 본류를 형성하게 된 것이었다.

도쿄재판 1946년 5월 심리를 시작으로 2년 6개월동안 지속됐고, 그동안 전 용의자 9168명을 체포했다. 그중 A급 전범 용의자 46명 B,C급 전범 6676명은 각 피해국으로 인도돼 재판을 받았고, 2846명은 석방됐다.

 

도쿄재판은 전후 국제질서가 냉전체제로 개편되면서 미국은 공산세력을 저지하는데 주의를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의의 실현과 전쟁의 책임을 묻는  재판이라는 구호가 무색하리만큼 일본을 제대로 징벌하지 못했다. 과거의 책임보다는 현실을 택한 것이다.

일본은 전쟁을 주도해서 패배를 자초했던 우파적 가치와 질서가  완전히 청산, 해체되지 않고 유지되면서 전후 일본은 다시 보수적, 우익적 질서로 회귀할 수 있게 됐던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책 제목이 '도쿄재판'이 아닌 '도쿄재판'인 것은 그에 대한 비아냥이 숨어있는 것이 아닌지. 미국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도쿄재판에 대한 신랄한 일침을 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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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류 영합의 달인, 꺼삐딴 리 이인국 -꺼삐딴 리 | 전체보기 2016-12-29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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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꺼삐딴 리

전광용 저
을유문화사 | 2009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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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국 박사는 시류를 읽고 영합하는 데에는 가히 동물적인 감각을 타고난 인물이 아닌가 싶었다. 그는 일제 시대에선 친일파로, 소련군이 진주하자, 러시아에, 월남해서는 미국에  그야말로 시기적절하게 보호색을 주변에 맞춰 변신을 거듭한 카멜레온이었다.

'식민지 백성이 별수 있었냐고, 어느 놈은 일본놈한테 아첨을 안했냐고, 주는 떡을 안 먹는 놈이 바보였다

'는 그의 지론을 보면, 신념이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헌신짝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인국은  다다미방에서 훈도시와 유카다 바람으로 있다 해방을 맞이했지만, 재빨리 국어상용의 가(國語常用의 家)라는 표지를 찢어버렸다. 아이를 일본학교에 보내고, 집안에서도 일본어만 사용하게 해서 얻은 영광이었음에도 망설임없이 바로 없애 버렸다. 그는 언어의 힘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있었다.

그도 그런 것이 원나라 시절 권세를 부렸던 사람들인 원나라 말을 통역하는 역관이었고, 청나라 시절에는 청나라로 언어만 바뀌었지 역시 역관이었고, 미군정하에서는 영어 통역사였다는 사실을 감안해보면, 어려운 시국에 남보다 더 잘 살기 위한 이인국의 선택은 아주 현실적이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하자, 이인국은 초보 러시아 책을 거의 암송하다시피해서 간단한 러시아를 익혔고, 그의 예상은 적중해서,  러시아어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앗줄 역할을 했다. 러시아 소좌의 수술에 성공하면서, 그에게 꺼삐딴 리 칭호를 듣게 됐고, 그와 장교과 돈독한 친분을 맺으면서 친일파 처벌에서 벗어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나아가 아들에게도 러시아를 익혀두라고 귀뜸했고, 소련으로 유학보낸 것도 장기적으로 소련 인맥을 구축해서 출세의 발판으로 삼자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순탄하게 계획한대로 풀려가지만 않는 것이 우리네 인생사. 이인국은  1.4 후퇴때 달랑 청진기가방 하나만 들고 월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전쟁통에 아들은 생사불명이 됐고, 아내는 거제도 수용소에서 세상을 떠나는 불행을 겪어야 했다. 아무리 처세에 능한 그였지만 전쟁의 피해에서만큼은 벗어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일가친척 아는 이 없는 남한에 내려와 가족을 잃는 아픔을 겪었지만 그는 이내 재기했다. 병원을 열어, 반듯한 이층 양옥집 주인이 됐고, 후처에게 얻은 갓 돌 지난 아들까지 있었으니 이젠 의사로서도 병원장이라는 지위를 확고하게 굳혔고, 새가정까지 꾸몄지만 그것으로 안주하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영어였다. 개인교수까지 붙여서 회화를 익히고 있었는데, 별볼일 없다가도 미국에만 다녀오면 별이라도 딴 듯 힘이 들어간 사람들을 여럿 보고나니  미국의 위력을 실감한 셈이다. 거기에 그가 시류에 따라야 한다면 미국 유학을 보낸 딸이 미국인과 결혼하겠다니 미국에 가볼 요량인 것이다.

그는 심란했다. 아무리 미국이 대세라지만 코쟁이 미국인 사위에 흰둥이 손주를 상상하면 징그럽다는 생각도 들고, 남의 이목을 생각하면 속이 답답해졌다. 그러다가 마음을 누그러뜨린 것은 어린 아들을 생각하면 미국에 혼반을 맺어두는 것도 해로울 게 없다는 계산을 하고나서였다.

 

" 흥, 그 사마귀같은 일본놈들 틈에서도 살았고, 각다귀 같은 로스케 속에서도 살아났는데,양키라고 다를까....혁명이 일겠으면 일구, 나라가 바뀌겠으면 바뀌구, 아직 이인국의 살 구멍은 막히지 않았다. 나보다 얼마든지 날뛰던 놈들도 있는데 나쯤이야...."

일제와 분단, 전쟁이란 산전수전을 다 겪어낸 인텔리, 처세에 능한 이인국이 속내는 이랬던 것이다. 일제시대에서도 소련 군정 하에서도  거뜬하게 살아남았던 그의 처세, 그의 감을 믿고 이번에도 그의 방식으로 미국에 출사표를 던진 것이리라. 

이 출사표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하다. 오늘 날에도 영어 권력이 살아있고, 더더욱이 강화되고 있다는 점에서나 미국통이 여전히 각광받는다는 점에서도.

 

몇 번을 읽어도 이인국의 처세와 그의 시류를 읽어내는 촉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남보다 잘먹고 잘살기 위해서 늘 권력의 바람이 부는 곳에 신경 곤두세우고 살아야 했던 인텔리,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지를 알았던 꺼삐딴 리. 해방후, 분단시대를 다룬 작품이 많지만 그 중 에서도 이 '꺼삐딴 리'가 압도적으로 인상에  남았던 것은, 그의  캐릭터가 워낙 강렬한데다 우리네 현대사의 굴절을 현실감있게 포착하고, 그 변화무쌍했던 권력에 접근해 살아남는 방식을 실감나게 그려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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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학살, 비인도적 행위에 대한 책임과 죄를 묻는 세기의 재판-뉘른베르그 | 전체보기 2016-12-28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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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VD]뉘른베르그 Nuremberg

이베스 시모뉴
영상프라자 | 2002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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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우드에서는 법정 영화가 상당히 많이 제작되고, 그 중에는 명작으로 꼽히는 작품도 여러 편이다. 일단 지금 당장 떠오르는 법정영화만 해도 '12인의 노한 사람들','검찰 즉 증인','어 퓨 굿맨','타임 투 킬'이 있는데, 검사와 변호사간의 치열하게 법적 공방을 벌이는 팽팽한 긴장감을 맛볼 수 있고,또 변호사의 활약으로 누명을 쓴 약자에게 무죄를 증명하는 과정은 통쾌하기 이를데 없다. 이것이 법정영화의 매력인데, 추리소설이나 법정 영화가 많이 제작되는 것은 증거를 좇아 수사하고, 재판으로 유무죄를 가리는 즉 법치주의가 그 사회에 자리잡고 있음을 증명하는 징표이기도 하다.

 

법정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2차대전의 전범들의 죄를 가렸던 뉘른베그르 재판은 국제재판이라는 규모에서나 역사적 관점에서나 영화화되지 않을 수 없는 흥미진진한 소재였다.

뉘른베르그는 독일 제 3제국의 실질적인 중심지였다는 점에서 이곳에서 열린 재판은 나치를 심판하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 셈이었다. 공습으로 폐허가 된 뉘른베르그, 그 폐허 속에는 3만명의 시체가 수습되지 못하고 파묻혀있고, 그 시체에서 풍기는 악취는 뉘른베르그를 유령의 도시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뉘른베르그'는 일단 길었다. 세시간 가까운 런닝타임이었지만 길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몰입도가 높았던 작품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재판단이 구성되기까지, 또 재판과정이 모두 실제 기록에 기반하고 실존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검사인 잭슨 로버트와 기소된 21명의 전범 중 독일공군 총사령관 괴링의 창과 방패같은  대결이 이 작품을 끌어가는 주축이었다. 그 재판정의 분위기를  검사역의 알렉 볼드윈과 괴링 역을 브라이언 콕스가 잘 살렸고, 두 사람의 팽팽한 연기대결이 볼만했다.

 

그러고보니 같은 잭판을 소재로했던 다른 영화 '뉘른베르크의 재판'을 본 게 생각이 났다. 그 작품은 재판장의 고심에 초점이 많이 맞춰졌고, 버트 랭커스터나, 리차드 위드마크, 몽고메리 크리프트 같은 호화 캐스팅이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몇장면 나오지 않는 증인역 조차도 대배우들이 출연할 정도였다.

 

'뉘른베르크의 재판'에 비교하자면 이 '뉘른베그르'는 재판에 집중하고 있다. 왜 이 재판을  하는지를 잊을만하면 상기시켜준다. 승자가 됐다고 패자에게 횡포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저지른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행위에 대한 책임과 죄를 묻는 재판이라고 힘주어 말하는데 그렇다고 잭슨 검사만 일방적으로 발언하는 것도 아니었다. 전범 헤르만 괴링을 중심으로 전범을 처벌해야하는 법의 논리와 전시의 불가피성을 설파하는 전범의 논리도 거르지 않고 들려주고 있다.

괴링은 왜 자신이 죄인이 돼 피고인석에 앉아야 하냐며  자신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50년후에는 자신의 말이 독일에 퍼질 것이라면서 호언장담하는 것이 뉘우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승자의 판단은 모두 진실이 되고 패자의 판단은 모두 죄가 되는 법이라는 괴링의 당당한 태도는 다른 전범들에게도 심리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다른 전범들이 마음이 흔들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었다. 알게 모르게 그는 전범의 구심점이 되고 있었다.

 

괴링은 확신범이었다. 다른 전범 중에서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었다는 변명도 나오지만 그만큼은 죄책감은 커녕 시종일관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속으로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재판정에서는 농담까지 하며 여유를 부릴만큼 외면적으로는 당당했다.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법정에서 어울리지 않게 선글라스까지 썼던 괴링, 그런 그가 딸 에다와 부인에게는 자상한 남편이고 아빠라는 사실은 아이러닉한 일이었다.

 

하지만 재판의 분위기가 결정적으로 기운 것은 나치의 끔찍한 대규모 학살을 담은 필름이 공개되면서였다. 유태인 수용소에서 수많은 시체들을 쓰레기처럼 처리하는 장면은 법정을 충격과 분노로 몰아가기 충분했던 것이다.

나도 오래 전에 독일에서 그 필름을 보고는 펑펑 울었는데, 그때 사람 몸같지 않고 장작개비처럼 바짝 마른 시체 그것도 산더미처럼 나오는 시체에 눈을 감아버렸던 기억도 났다.

이렇게 죄상이 드러나고 잔인했던 만행들이 밝혀지면서, 신과 독일이라는 이름 앞에 죄를 지었다며 반성하는 피고들도 나타났다. 나치가 저지른 전쟁은 야만이고 수치였지만 그럼에도 괴링은 요지부동이었다.

 

전에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자신의 신념과 옳음을 믿는 사람들이 위대해보였는데, 요즘엔 그렇지 않다. 오히려 투철한 신념을 지닌 사람들이 두려울 때도 있다. 종교나 신념을 한번도 회의하지도 의심하지도 않는 사람. 이렇게 성찰없이 신념을 맹신하는 사람들이 타인의 목숨을 담보로 테러나 학살을 저지르는 법이라.

 

이 재판이 법리적 논리로 진행됐다는 사실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세 명이나 나왔다는 판결로써도 증명이 될지 모르겠지만 설사 전적으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법적인 논리로 진행된 것이라고 믿고 싶어졌다. 20세기의 야만과 수치를 문명적인 방법으로 벌하였다고.

 

사형을 선고받은 열두명 중  물론 괴링도 포함돼 있었는데, 그는 교수형을 당하지 않았다. 형 집행 전날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끝까지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교수형을 집행하는 장면이 꽤 강렬했다. 장엄한 음악이 배경으로 깔렸고, 얼굴전체에 검은 천을 씌우고 목에 밧줄을 걸고 그리고 발밑의 판자가 치워지며 공중에 매달리는 것까지.

목을 조여오는 밧줄의 감촉을 느끼면서, 죽음의 문턱 앞에서 이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전쟁으로 참혹하게 죽어간 사람들 생각은 잠깐이라도 했을까.

'나는 무고하게 죽는 거요'.'도이칠란트 만세','주여 저의 죄를 용서하소서'' 히틀러 만세' 

죽기 일보전 전범들이 남긴 최후의 일성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많은 대사들이 나왔다. 법적으로 역사적으로 책임을 묻고, 재판의 의미를 새겨주는 말들이 꽤 많았다.

그 중에서 전범들과 함께 했던 정신과 의사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피고들은 동정심이 없었다.타인을 느끼는 능력이 없었다는 것, 그런데 악의 본성이 바로 동정심이 없는 것이다.'

동정심이 없다는 것은 요즘 많이 거론되는 사이코패스의 특징 중 하나인데..아마도 전범중에는 요즘 검사를 받으면 사이코 패스 판정을 받은 사람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만약 전쟁이 아니었다면 연쇄살인마가 됐을지도 모를 일일까. 아니면 단지 전시만 아니었다면 멀쩡하게 살아갔을 인물들이 전쟁으로 광기에 사로잡혔던 것일까.

 

'뉘른베그르'의 마지막은 그 폐허 속에서도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어린이들의 모습으로 채워졌다. 비록 폭격으로 폐허가 됐지만 그럼에도 미래는 희망이 있다고. 아니, 이 어린이들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전범에 대한 처벌은 이루어져야 한다고. 잘못된 과거는 청산하는 것이 제대로 된 미래를 위한 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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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25 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