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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암살범 안두희 추척자들 김용희, 곽태영, 권중희,박기서-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 전체보기 2016-11-29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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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박도 저
눈빛 | 2013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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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국가에서는 사적인 복수를 엄금하고 법에 의거해 처벌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법으로 범법자를 처벌하는 것으로 사회구성원을 보호하고,정의를 세우는 것은 국가가 지고있는 막중한 책임이다. 만약 국가가 범법자를 비호하며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때는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는 네 발의 총성이 울렸고, 그 총성과 함께 한국 독립운동의 거목 김구 주석이 영원히 쓰러지고 말았다. 백범을 암살한 사람은 현역 육군 장교, 안두희 소위였고 그는 현장에서 바로 체포됐다.

 

6.25가 발발하기 꼭 1년 전에 발생한 김구 암살사건은 전국민들에게 큰 슬픔을 안겨준 한편 안두희가 아무리 단독범임을 주장을 해도 그 배후에 대한 의혹이 가시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재판 뒤 그에 대한 처분을 보면 김구 주석을 암살한 범인에 대해 내려질 수 없는 조치들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종신형을 선고 받고 복역 3개월만에 국방부 장관의 명으로 15년으로 감형, 6,25가 발발하자마자  국방부 장관의 잔형 면제 처분을 받았고, 국방부 특명으로 육군소위로 복귀하게 된다. 이렇게 초법적인 조치들이 이어지니 안두희가 권력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의심이 제기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안두희의 호시절은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면서 막을 내리고, 이내 그에겐 수난시대가 시작되고 만다. 이후 그는 자주 이사 다니고,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숨 죽이며 살았지만 김구 암살사건의 진상을 밝혀 민족의 정기를 올바르게 세우고자하는 인물들의 추적을 피할 수 없었다.

 

백범살해진상 규명투쟁위원의 김용희 간사, 김제 출신의 청년 곽태영,안동 출신  권중희,버스 기사였던 박기서. 이 네사람은 모두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도 아니고, 정의를 부르짖는 정치인도, 그렇다고 부자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소시민들 뿐이지만 이들은 한곁같이 애국지사 김구 선생을 존경했고 안두희가 진상을 밝히지 않은 채 제명대로 살다 죽으면 안된다는 의기 하나로 찾아 나선 것이다. 그들에게 안두희는 반역자고 매국노가 다름없었을 것이다.

 

네 사람 중 권중희씨는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안두희를 공격한 기사며, 그 뒤 재판과정에 부고기사까지본 생각이 났다. 권중희씨는 안두희에게 이민 여권이 나왔다는 기사를 본 82년부터 더 이상 미루어선 안되겠다고 결심하고 생계도 포기한 채 그를 찾아 나선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안두희에게 이승만의 지시로 김구를 암살했다는 자백을 받아냈지만 이튿날 안두희는 고문에 못이겨 허위로 자백한 것이라고 부인하면서 여전히 진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권중희씨는 이후 성금으로 미국 국립문서기록 관리청에까지 찾아갔다. 현지 교포들의 도움을 받으며 김구 암살의 진상을 규명할 수 있는 문서를 찾아 나섰으니 그 결기와 의지가 실로 놀라울 뿐이었다.

이런 분들이 있으니..안두희는 죄 값을 치루며, 불안 속에 떨다 박기서씨의 정의봉에 맞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암살자다운 처참한 말로였다.

그러니까 안두희의 마지막 추격자는 박기서씨인 셈이지만 그는 살인죄로 수감돼 1년 6개월을 복역하다 특사로 풀려났다. 형량을 보면 정상이 참작된 것이다.

 

이 네 사람이 안두희를  사적으로 응징한 것에 대해서는 찬성 일색만은 아닐 것이다. 특히 아무리 죄인이라지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만큼은 비판받을 소지가 있다. 

하지만 문제는 굳이 이들이 자신의 삶을 희생해가면서 안두희 추적에 나서게 만든 현실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권력이 비호하고 암살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주체가 나섰더라면, 진상 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안두희가 제대로 죄 값을 치루었다면 그들도 소시민으로서 평범하게 삶을 꾸려갔을텐데..

안두희의 배후로 떠오르는 사람들은 이민을 떠나거나 자취를 감추거나 죽거나 하면서 추적의 대상에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암살자는 자신이 저지른 암살에 대해 죽는 날까지 보호받을 수 있다고 오판한 건지, 암살자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고려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목숨을 걸고 안두희를 추적했던 사람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숨어 다니다 종내는 추적자에게 죽음을 당한 암살자.

추적자들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고 그 정당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암살자는 그 배후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안두희의 죽음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추적자처럼 암살자 역시나 확신범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추악한 진실이 드러날까봐 끝내 침묵으로써 내막을 감추고 싶었던 것일까.

 

그리고 잊지 말아야 되는 것은 국가는 무거운 책임을 느끼고 반성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안두희가 재판을 받고 복역한 지라, 일재부재리의 원칠에 따라 다시 법정을 그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했다지만, 이렇게 중차대한 사건의 진실을 개인에게 맡겨두고 제대로 추적하지 않음으로써 사적 응징을 자초한 것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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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는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천황을 찬양하고 내선일체를 주장해야 했을까-동포에 告함 | 전체보기 2016-11-25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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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동포에 고함

이광수 저
철학과현실사 | 1997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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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기미 독립선언서를 쓴 사람은 육당 최남선이었다. 그렇다면 그 직전 동경에서 있었던 2.8 독립선언서의 작성자는 누구일까? 춘원 이광수였다. 그의 작품 '무정'은 최초의 현대소설로 평가되며, 지금도 고전으로 읽히고 있다. 하지만 그 뛰어난 필력으로 친일활동에 동참함으로써, 한국 문학에 기여한 한 찬사보다는 지탄을 받는 인물이 되고 말앗다.

 

'동포에서 告함'. 제목만 보면 피히테의 '독일국민에게 고함'이 연상되면서 동포들의 애국심이나 각성을 촉구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이광수가 일본어로 쓴 70여 편의 글을 싣고 있는데, 그가 변절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충격받을 정도로 노골적이고 적나라했다. 아주 수위 높여 내선일체를 주장하고 천황을 숭배하며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에 몸을 바치라는, 이른바 문장보국(文章報國)을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정신에 입각한 국민문학, 내선일체를 지향하는 문학 건설을 외치는 걸 보면 작가정신까지  망각하고 있었다.

 

"천황은 현신인現神人이시다. 십선十善의 천자이시다.일억 국민의 덕의 이상이시다."(75, 건국절의 아침)

 

"이제 조선인의 유일한 진로는 황민화이며,이에 대하여는 정부와 민중 모두가 일치된 생각을 갖고 있

다"(황민화皇民化의 한 길,81)

 

"조선의 백성이여.오래 된 작은 감정을 지금에야말로 청산하라. 그리고 깨끗이 정화된 새롭고 큰 마음으로 살자. 이제 우리의 고향은 작은 조선 반도가 아닌 것이다. 일장기 나부끼는 곳, 그곳은 모두 우리의 고향인 것이다."(기원 2600년,119쪽)

 

"그렇다면 애국심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일본을 내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며,내 몸, 내 생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이 감정은 천황을 내 아버지처럼 사모해 받들고 그 일을 해드리는 것이다. 전선의 병사들이 죽음의 순간에 ' 텐노 하이카 반자이'를 외치는 그 마음인 것이다."(조선 청년의 애국심,213)

 

읽다보면 돌변해도 어떻게 이렇게까지..하는 한탄이 절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이 책 속 글만 보자면 '무정' 아니라 그보다 더한 걸작을 남겼어도, 이광수를 현대소설의 장을 연 작가로 인정하고 싶은 마음이 산산조각 날 것이다. 이렇게 빼어난 필력과 재능을 하필 친일하는데 소진하다니, 그 악마적 재능에 분노를 넘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혹시나 하는 일말의 기대를 품어도 보았다. 뒤에 첨부된 사학가 김원모의 주장을 보면서.

 

이광수는 1940년 2월 가야마 미쓰로우(香山光郞)으로 창씨 개명한 뒤 본격적으로 친일활동에 나서고 있다. 그런데  그전에 이광수는 1937년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도산 안창호와 100여명과 함께 체포된 상태였는데  김원모의 주장에 따르면 1938년 그가 하늘처럼 모시던 도산 안창호가 사망하자, 도산의 자리를 어떻게 채워야 할지,민족지도자들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그 심적 부담에 자신이 친일로 나서는 대신 지도자들을 보호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라는 것이다. 조선어 사용이 금지된 시기에 원효대사를 집필하며  민족 정신을 보존하려고 했고, 겉으로는 친일이었지만 내심에는 조선의 독립에 대한 기원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광수의 친일행적을 변호하는 시각이 있다는 것이 이색적이기도 했고, 사실 이 주장에 살짝 귀가 솔깃해지기도 했다. 민망할 정도로 일본을 찬양하고 있는 점이 오히려 더 친일파로 위장한 건 아닌가하는 역설적인 의심을 품게 한 것이다.

이광수도 자신이 해방 뒤에 쓴 '나의 고백'에서 자신의 친일은 민족을 위해서였다고 기술했지만, 그것은 친일행위에 대한 치졸한 변명일 뿐이라는 비난을 초래했을 뿐이었다.

그의 민족 보존론 주장에 동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은 이정도로 이광수가 망가지진 않았으리라고, 이광수가 저 정도로 조선인으로서 정신을 팔지는 않았을 거라고, 조선인 작가 이광수의 마지막 자존심을  믿어주고 싶은 미련이 손톱만큼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 바람과는 상관없이 어디까지나 이 주장은 소수 견해인 모양이다. 김원모 뒤에 실린 문학평론가 정현기의 글에서는  이광수의 친일이 여지없이 비판당하고 있었다. 이광수는 비겁한 일본 지식 권력자의 하수인이었고 조선인 앞에서는 추악한 지식권력자라며 지식인으로서  수행해야 할 책무와 운명을 거론하고 있다.일본인은 이용가치가 높은 이광수를 이용해 조선인들의 독립의지를 꺾으려 한 것이고, 이광수는 이에 협조한 지식인 부역자라는 것이다.

앞의 사학자의 글이 1997년이라  그 뒤 20여년동안 친일, 혹은 이광수에 대한 연구가 좀더 진행됐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현재로선 이쪽 주장에 더 무게가 실려있지 않을까.

 

내년이 '무정'이 연재된지 100주년, 문인협회에서 춘원 문학상을 제정했다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친일 경력 때문에 상의 제정은 불투명해진 상황이고, 이것은 작가 이광수와 지식인 이광수의 간극을 초래한 이광수의 업보인 것이다. 동시에 개인적인 선택만으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이  일제 침략기라는 역사적 상황과 맞닥뜨려야 했던, 개인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비극이라는 점도 감안해야 할 것이고.

 

그렇다면  문제는 작가 이광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그것이 숙제로 남는다.

친일파라는 이유로 그의 문학적 평가까지 매도돼야 하는것인지. 냉철하고 다각적인 시각과 인식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친일청산이 제대로 됐다면, 작가 이광수에 대해서  조금은 너그러워질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친일청산이 여전히 과제로 남은 상황이라 비판적 시각을 유지해야 되는 점도 있을 것이다.

'무정' 100주년를 계기로 이제 춘원 이광수를  재점검하는 불씨가 지펴졌으면 한다. 친일행적이나 근대적 작가로서의 공적 어느 한쪽으로 매몰되는 일차적인 평가를 지양하고, 작가 이광수의 업적에만 눈길을 두지 않는 작가와 지식인으로서 춘원을 어떻게 비판하고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 문학적으로 역사적으로 다면적이고 총체적인 평가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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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운동가, 민족주의자에서 친일로 변절한 일그러진 근현대 지성인-최남선 평전 | 전체보기 2016-11-22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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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최남선 평전

류시현 저
한겨레출판 | 2011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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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하면 '해에게서 소년에게','3.1독립 선언서','불함문화론'으로 근대화와 민족주의에 강렬한 빛을 남긴 시인이자 역사가이다. 하지만 그뒤에 보여준 친일 행적으로 말미암아 그 빛보다 더 길고 짙은 그림자를 남긴 명암이 확실한 인물이었다. 

 

최남선은 일찍부터 새로운 지식과 정신을 반영하는 신문물의 선구자로 그 이름을 널리 떨쳤다. 최초의 신체시라 할 수 있는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쓴 것이 10대였고, 20대 들어서는 잡지 '청년'을 창간해 서구문물과 근대적 지식을 소개하는 계몽운동가였다. 30대에는 '기미 독립선언서'를 작성하는 등 민족운동가로, 또 역사연구가로 그 누구보다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였던 것이다.

 

그는 일본보다 발전한 조선 문화를 발견하는 것으로 일제에 저항했다.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며 중국에 대항했던 고구려를 역사에 주목하는가 하면, 한민족의 정체성을 찾는 작업의 일환으로 조선심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 무렵의 최남선은 서구근대 문명을 적극수용하며, 또 조선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글을 발표하며 조선의 지성을  주도해나갔다.

3.1운동으로 투옥되는가하면 글과 말로, 대중들에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당대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당당하게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928년 그가 조선사 편수회위원에 위촉된 것은 큰 파문을 일으켰다. 변절의 조짐을 보인 것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찍이 동경에 유학했던 이른바 동경 삼재(三才) 즉 홍명희, 이광수, 최남선이라는 걸출한 지성들 행보가 20년대 들면서 간극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홍명희는 사회주의를  적극  수용하면서 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데 비해 이광수는 민족개조론을 주장하며 민족주의 노선에서 이탈했다. 최남선도 자치주의자들과 가까이하며 친일의 길로  들어선 것이었다.

 

30년대 들어서면서 최남선은 노골적으로 친일활동에 나서며 변절자의 대열에 합류했다. 일선융화론을 주장하는가하면,  화랑도를 조선 청년을 전쟁에 동원하는 논리로 활용하며 학병 권유에 나서는 등  친일의 논리로 방송과 글, 강연에 나섰다. 그가 변절함으로써 물질적으로나 지위면에서는 안정적인 삶을 살았을지는 모르겠지만 잃는 것도 많았다. 그에게 실망한 젊은이들은 그를 조롱하기 시작했고, 지식인으로서의 권위도 실추되고 만 것이다.

 

최남선의 변절은 그 어느시대보다 격변을 겪었던 근현대 지식인의 훼절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그 무렵 신간회가 해체됐고, 조선에서 합법적으로 대중활동을 하기에 불가능해졌다. 그만큼 일제의 탄압적인 지배방식이 완성된 셈인데, 30년대 들어서는 최남선 외에도 수 많은 지식인들이 친일의 길에 나서

일본의 전쟁을 옹호하고 일제의 논리를 전파하는데 앞장섰다.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만 것이었다.

지식인들이 이렇게 대거 변절하게 된 데에는 일제 지배 체제가 강고해지자, 독립에 대한 희망을 잃고, 일제의 지배가 영구히 지속되리라 판단했던 것에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상상해보니,가관이었다. 당대의 내로라 하는 지식인들, 교수, 언론인, 시인, 소설가 등등이 방송이나 신문에다 번지르르하게 전쟁에 지원하자, 국방비를 기부하자고 연설하고 글을 썼을 모습들이. 해방된 뒤 자신이 쏟아놓은 말과 글에 대해 이들은 얼마나 수치스럽고 참담했을까.

해방뒤 일제 부역자들을 색출하는데 있어서 문인들이 많았던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들이 친일활동을 한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됐기 때문이었으니, 최남선의 경우에도 최남선의 경우 일제를 옹호하며 내세웠던 말과 글을 해방 뒤에는 변명하고 바꾸면서 학자로서 심한 자괴감을 느꼈을 것이다. 아니, 부끄러움이라도 느끼기나 했으면 그래도 양반인 편이 아니었을까. 이광수는 끝까지 자기 변호에 급급했으니.

 

해방 뒤에도 최남선은 여전히 역사학자로서 이름을 지니고 있었고, 그를 찾는 곳은 많았다. 교육계에서나 그의 친일 경력을 들어, 그의 글과 강연을 저지했다니, 그나마 민족적 정기가 남아 있었다고 할까.

1949년 2월 그는 반민특위에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다. 그가 남긴 친일의 족적이 워낙 분명해서 기소를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최남선의 재판은  세간의 이목을 끌었지만, 그는 보석으로 석방됐고, 반민특위의 와해로 재판 자체가 흐지부지되면서 죽는 날까지 여전히 역사학자로  기고하고, 활동할 수 있었다.

 

최남선은 일제에 굴복한 지식인이 어떻게 일그러지게 되는지를 여실하게 보여 주었다. 자신의 말과 글을 일제를 옹호하는 논리로 동원해 보신했다. 그는 지식을 파는 것을 넘어서, 지식을 무기삼아 조선 청년들을 전쟁으로 몰아넣는데 일조했다.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보람있게 죽자' 같은 글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근현대 선구자적 지성인으로서의 명성에 스스로 먹칠하며 일제의 확실한 부역자가 된 것이었다.

그는 반민특위의 재판부에 반성의 뜻을 담아  '자열서'를 제출했지만  무죄를 주장하는 이율배반적 태도를 보였다. 

 

그럼에도 일말의 기대를 갖고 싶었다. 죽음을 앞두고서는 마음이 변하지 않았을까, 전쟁터에서 죽어간 청년들 얼굴을 떠올리며 참회했을 거라고. 이렇게 상상하는 것으로 마음을 달랠 수 밖에 없는 것은 단죄해야 할 죄상을 단죄하지 못했기에 그 후손들이 감수해야 하는 비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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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에 대한 환기와 고발은 계속돼야 한다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 | 전체보기 2016-11-19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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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친일파의 한국 현대사

정운현 저
인문서원 | 2016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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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한국 현대사'라는 제목보다는 부제 '나라를 팔아먹고 독립운동가를 때려잡은 악질 매국노 44인 이야기'표현 수위가 꽤 셌다. 매국노 즉 나라 팔아먹은 인간이라는 말은 최악의 인간이라는 느낌이라는 점에서  친일파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거기에다 매국노를 굳이 '44'인으로 선정해 실은 것도 그렇고 표지에서부터  저자는 작심을 하고 친일파에 대한 저자 반감과 분노를  격하게 뿜어내고 있는데, 어떤 심정으로 저자가 그런 표현을 사용한건지..설명을 듣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저자 정운현은 30년 가까이 친일파에 관심을 갖고  파고든 언론인으로 친일파 관련한 책도 여러권 저술한 바 있는데, 이렇게 친일파 문제를 수면 위로 끄어올린  故임종국 이후 최근 들어 친일관련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저술가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환영할 만한 일이다.

 

사실 친일파들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존재했다. 정치인, 언론인, 예술인, 경찰, 군인, 경제인에 종교인까지 지도층에 지식인, 명망가들이 수두룩했고, 무엇보다 항일 노선을 걷다가 변절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최린 등 3.1운동 33인대표는 대부분 변절했고 최남선, 이광수 같은 근대 지식인들도 그랬다.

그만큼 일제의 회유나 압박이 심하기도 했거니와 의지를 세우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독립투사들이 그만큼 불굴의 의지와 조국애를 지닌 분이라는 것을 새삼 증명해준다.

 

친일인사들의 행적에 대해서도 할말이 많지만, 내게는 해방 뒤 이들의 행적에 대해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린 시절 이 책에 등장하는 친일파 중 여전히 명예와 지위를 누리며 방송에 출연하던 인사들이 떠올랐고, 생각이 났다.

대표적인 친일 여류문학인 모윤숙은 어린 시절에 펜클럽 회장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자주 TV에 나왔고, 학도병 지원 활동에 앞장섰던 이대 총장 김활란도 교육계 혹은 지식인으로 발언하던 걸 본 기억이 난다. 대를 이어 일제 법조에 협조한 민복기도 대법원장으로, 또 밀정혐의를 받고 있는 3`1 운동 33인중 최연소였던 이갑성도 광복회 회장으로 나왔던 것도 똑똑히 기억한다.

그 때 방송에서 봤던 얼굴도 떠오르는데,해방 한참 뒤에 태어난 내가 방송에서 본 그들 얼굴을 기억하는 걸 보면 친일문제가 먼 과거사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저 사람들이 다 대단하고 사회에 기여한 인물인지 알았다가 90년대 들어서야 친일파였다는 걸 알게 됐고, 그때 충격을 크게 받았다, 믿어지지 않아서 멍해졌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은 더 있었다.조선시대였다면 부관참시당해도 할 말 없었을텐데, 이 책에 실린 상당수가 독립유공자로 국립묘지에 안장돼 국립묘지를 오염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1996년 친일 언론인 서춘을 비롯한 5명이 친일행적이 밝혀지면서,독립유공자 예훈이 박탈되자 서춘의 후손이 묘를 이장해갔다. 서춘이 친일파 이장 최초 사례였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는 친일파들이 여럿 남아있는 것이다.

 

친일파 중에 제대로 참회하거나 반성한 사람도 드물었다. 일제 시대때 군수를 지낸 이항녕 전 홍대 총장정도가 공개적으로 참회했고 해방이 되자 친일활동을 반성하며 반민특위에 자수했던 시인 김동환 정도가 있으려나.

심지어 조상의 친일 행적을 인정하지 않는 후손들도 있다. 이완용 증손자처럼  조상 땅 찾기위한 소송을 제기하거나, '친일반민족 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 행위자 2006명을 최종발표하자 이것을 취소해달라고 소송을 낸 동아일보 김성수 증손자, 조선일보 방응모 손자는 조상의 친일행적을 감추거나 재산을 지키는데 급급했으니..

 

그만큼 역사는 왜곡돼 있고, 친일에 대한 진상이 낱낱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것은 친일문제가 과거사가 아닌 현재사인 이유이고,여전히 민감한 문제라는 말이기도 하다. 일신 상의 안위를 추구하며 나라와 동포를 팔아먹은 반민족행위자들은 역사의 심판과 법의 심판에서 자유롭지 않아야 되고, 응징돼야 마땅한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이 친일문제를 다룬 책들이 계속 나오고 친일파들에 대한 환기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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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잘 몰랐어요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의 역할을요-김상덕 평전 | 전체보기 2016-11-17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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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김상덕 평전

김상웅 저
책보세(책으로 보는 세상) | 2011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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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솔직히 고백하자면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김상덕'하면 몇년 전에 무한도전에서 뜬금없이 찾아나섰던 알래스카의 김상덕이란 이름부터 떠올랐다. 몇달 전까지만 해도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의 존재를 알지 못했고, 김상덕에서 교체된 이인이 처음부터 위원장이었던 걸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만 김상덕님의 존재를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그 역할에 비해 김상덕의 존재가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아닐까.

 

왜 그런가했더니, 아무래도 납북된데다 이승만 정권이 반민특위의 흔적을 열심히 지워버리려 한 것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닐까 짐작되는데 80년대 이후 친일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새삼 반민특위의 좌절이  얼마나 뼈아픈일이었는지를 되새겼고, 독립투사에 대한 예우가 정말 말도 안되게 열악했다는 사실 또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됐다. 그런 안타까움의 중심에 이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이 있었다.

 

김상덕의 일생을 돌아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일단 그에 대한 존경심과 감사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런 가운데 그가 친일파를 청산하기 위해 감당했던  역할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도 그렇지만 독립운동 하느라 그와 그의 가족이 겪어야 했던 고초나, 그와 어린 자녀들에게 제대로  예우해주지 않았던 정부,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에 대해서는 죄송한 마음에 그저 유구무언일 뿐이었다. 독립을 위해 싸운 분들에 대한 예우와 존경은 한 국가로서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인데.

김상덕은 활동 지역이나 소속했던 단체 여러 군데였다. 1919년 일본 토쿄 2.8독립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한 뒤 체포돼 옥고를 치뤘고, 그뒤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것인데, 이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가 만주로  옮겨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그리고  다시 난징에서 충칭으로 갔다 순자화위안에서 정착하는데, 그가 이렇게 여러 지역을 전전해야  했다는 것은 그만큼 활동 상황이 열악했고, 독립 운동가들의 사상적 이견과 이합집산과도 관련이 있었다.

 

하지만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그는 결코 굴하지 않았다. 충징에서 아내와 막내 딸을 잃는 비극을 겪으면서도 그는 아픔을 딛고 활동에 매진했던 것이다. 하지만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들의 고생이 말도 못했다. 오죽하면 남은 1남 1녀를 고아원으로 보낼 결심을 했을까. 그는 활동하느라 어린 자녀를 돌볼 수도 없었고, 지독한 가난 때문에 아이들을 제대로 먹일 수가 없게 되자, 독한 마음을 먹고 고아원에 맡긴 것이다.

부인도 고생만 하다가 약한첩 못쓰고 세상을 떠난 것인데, 김상덕가에게 닥친 불행은 이것이 끝이 아니라 전쟁 뒤까지 쭉 이어졌다.

 

그는 성격이 유해서 대화를 잘 이끌어내는 편이었지만 해방 뒤 친일파를 처벌하는 문제에서만큼은 단호했다. 그 누구보다 친일파와 반민족행위자 처벌에 앞장섰기에 반민특위원장에 선출될 수 있었다. 그리고 암살 위협과 특위 해체를 시도했던 이승만정권에 꿋꿋하게 맞서며 화신백화점 박흥식을 시작으로  친일파들을 차례차례 체포했던 것이다. 독립투사다운 기개와 강단으로 권력에 맞선 것이었다. 반민특위에서 친일파들이 체포할 때에는 통쾌하기 이를데 없었다.

 

하지만 그는 반민특위가 경찰에 습격을 당하자, 정부에 항의하며 위원장 자리를 사임하고 만다. 그의 사임 뒤 특위는 유명무실해졌고, 친일파 처벌에 실패하고 만 것이었다. 특위가 무산되는 것을 본 김상덕의 심정은 어땠을까.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을 것이다.

그뒤 김상덕에겐 고난이 길이 펼쳐졌다. 이승만정권에 집요하게 견제를 받았고, 2대 국회의원 선거에 낙선했고, 전쟁 와중에 납북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아마도 그는 남한에 남아있는 아직 어린 자식 둘 걱정에 북한에서 결코 행복할 수 없었을 것으니, 그는 1956년 65세의 일기로 평양에서 눈을 감았다.

 

그는 독립운동 할 때에도 좌익이 아닌 민족주의적 노선을 유지했는데, 자의가 아니라 연행돼 북한으로 가게됐음에로 그의 납북은 여러 문제를 야기했다. 김상덕 당사자는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해, 남아있는 어린 두자녀들은  유공자 혜택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성인이 된 아들은 반민특위 위원장 아들이라는 점과 북에 있는 아버지로 인한 연좌제 때문에 취직이 되지 않았다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저렇게 풍찬노숙하며 독립을 위해 헌신했지만 남한에서는 반공을 내세우며 북한에 있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반공이 목적이 아닐텐데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삶을 던진 이와 그 가족을 지켜주지 못한다면 국가는 존재할 이유도 없고, 그런 나라라면 오래 지속되지도 못할 것이다.

친일파 후손들은 호의호식하지만 독립운동 후손들은 3대가 고생한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던 셈이다.

 

김상덕씨의 아들 김정륙은 독립운동가 아버지를 둔 덕에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야 했다. 안스러워서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연좌제때문에 취업도 안돼 노동을 해야했던 시절을 겪고, 90년 그의 나이 56세에야 아버지의 공로를 인정받고 독립유공자 유족이 될 수 있었으니..그간에 그가 겪었던 신산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지난 2006년 평양에 있는 아버지 묘소에 참배할 수 있었다는 것인데, 전쟁 이후 무려 56년만에서야  성묘할 수 있었던 아들은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김상덕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바치게 된다. 불굴의 의지로 독립운동을 해나간것에 대해, 또 해방 뒤 반민특위 위원장으로 친일파 청산을 위해 최일선에서 매진하신 것에도. 그는 민족을 위해 기꺼이 몸과 정신을 던졌던 인물이었다.

비록 좌절되기는 했지만 조국과 민족을 배신하며 일신상의 안위와 보상을 추구했던 친일파를 처벌하려고 활발하게 시도했다는 것은 살아있는 정의를 실현하려 한 것이니.

하지만 아내와 딸의 죽음. 말년의 납북행으로 자식과도 생이별한 것을 보면, 해방 뒤에는 조금은 편안하고 여유롭게 살아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해방공간에서도, 마지막까지 그에게는 행복이 허용되지 않았다니..그는 그 가혹한 임무와 운명을 짊어진 채 눈을 감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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