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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 흐르는 동주의 시가 OST보다 더 긴 여운을 준다-동주 | 전체보기 2016-04-30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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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동주

이준익
한국 | 2016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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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는 흑백영화다. 사진이나 영화나 모두 흑백이 주는 담백함이나 차분함이 마음에 들었는데, '동주'도 이런 흑백의 매력을 잘 살린 작품이었다. 화면 가득히 채워진 식민지 치하의 두 청춘의 삶과 죽음. 어떻게 살 것인지 무엇을 할 것인지를 내내 고민했던 윤동주와 송몽규, 두 비범했던 청년들이 어떤 길을 선택했고, 죽어갔는지가 극적인 장치를 통해 표현되기보다는 지난 날을  돌아보는 듯 담담하게 담겨져 있다.

중간 중간 삽입되는 동주가 나레이션 한 몇몇 시가  마치 OST 같았다. 내내 귀에 맴돌고 영화 전편을 감도는 듯 했는데 그 덕분에 치솟아 오르던 일제에 분노를 가라앉히게 되었다. 아무래도 감독은 관객들의 분노를 유도하기보다는 관객들에게 전쟁과 전체주의 그리고 개인의 삶을 성찰하는 여지를  준 느낌이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윤동주가 일본 경찰의 취조를 받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동주의 가슴에는 수인번호 475가 큼직하게 박혀있다. 일제의 죄인이 된 동주.

윤동주와 송몽규는 사촌이면서도 둘도 없는 절친이었지만 성격은 대조적이었다. 윤동주가 내성적이고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문학청년이었다면 송몽규는 거침없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리더 스타일이라고 할까. 송몽규는 여러 분야에서 빼어난 준재였다. 동주는 이 동갑내기 사촌의 남다른 존재감을 인정하고, 부러워도 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이 택한 길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윤동주는 시인의 길을, 송몽규는 항일, 혁명의 길을 향해 걸어갔다. 그렇다고 윤동주가 일제에 순종한 것은 아니었다. 교련을 거부했고 송몽규와의 관계때문에 요시찰 인물이었는데, 결국에 두 사람은 한 곳에서 만나..죽음의 길에 이르게 됐다.

 

이 작품 속 윤동주가 누군가를 바라보던 눈길과 가끔 나오는 시가 잊혀지지 않았다. 특히 후쿠오카 감옥 창살 사이로 보이는 밤하늘의 별, 그 위로 흘러나왔던 '별 헤이는 밤' 과 송몽규를 선망 담긴 곁눈질로 바라보던 눈빛, 그리고 수줍어서인지 호감을 품은 여학생을 제대로 응시하지 못하고 긴장과 설렘이 섞여있던  눈빛으로 바라보던 것도.

그 눈빛은 후쿠오카 감옥에서 영원히 볼 수 없게 돼버렸다. 그는 감옥에서 매일 주사를 맞는 실험용 쥐가 됐고, 그것은 개인의 존재를 말살하는 전체주의가 보여준 인간에 대한 폭력이었다. 아무 것도 선택할 수 없는 삶,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희생. 그렇게 윤동주는 서서히 죽어갔고, 송몽규 역시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일본 경찰과 내내 일본어로 대화하던 동주는 마지막 대답은 조선어로 한다.적극적으로 일본에  저항하지 못하고 뒤에서 따라다니기만 한 것이 너무 부끄러워서 조서에 서명할 수 없다고.

마지막에  흘러나오는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소망했던 이 젊은 시인은 그래서 자신의 부끄러움 앞에서, 서명을 거부함으로써 부끄럽지 않은 죽음을 택한 것일까. 하얀 시트에 덮여져 있던 동주의 감긴 눈, 이 작품의 절정인데도 이상하리만큼 차분하게 받아들여졌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겠다는 서시의 구절 때문인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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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1923년! 김원봉, 김상옥, 황옥, 김시현 그리고.... -1923년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 | 전체보기 2016-04-29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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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

김동진 저
서해문집 | 2010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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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1923년!  스펙타클한 첩보영화같은 이 내용들이 실제 우리 역사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들이라니.현실이 영화나 소설보다 더 극적이고, 드라마틱하다는 말은 이럴 때 두고 하는 말인가보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많은 말들을 속으로 삼켜야했다. 사실이 아니었다면 흥미진진한 소설 읽는 기분에 빠져들 수 있었을텐데 실제로 벌어진 일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그것도 거사에 실패하고 많은 열사들이 죽음 혹은 체포된 사건이라 흥미롭다는 생각을 갖는 것조차 왠지 죄스러웠다.

 

'1923년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의 중심에는 의열단이 있었다.1923년에는 1919년 삼일운동 후 몇 년이 흐른 뒤  독립운동이 침체기에 접어들자, 의열단이 분연히 나선 것이다. 단원이 경성에 잠입해 암살과 폭탄 투쟁을 시도했고, 이는 사그라들어가는 국내 분위기를 일신하고, 독립운동의 의지를 재점화하고자 한 것이었다. 또 직접적으로 일제에 타격을 가하기 위한  폭력활동이었다.

종로 경찰서 폭탄투하 사건,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의 거사였지만 독립운동사상 유례없는 다발적 폭탄투척, 만약 이 계획이 제대로 성공했다면 삼일운동 이후 소강상태였던 독립운동에 새로운  전기가 되지 않았을까. 일제를 혼란에 빠트리며, 결코 굴복하지 않는 조선인의 기개를 만천하게 드러내 보였을 것이다.

 

때는 1923년 1월 12일 금요일 저녁 7시 반.  종로사거리에서 느닷없이 거리를 뒤흔들만큼 큰 폭발음이 들렸다. 한 사나이가 종로경찰서의 서쪽 창문으로 느닷없이 사제폭탄을 투척하고 유유히 빠져나간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사망자는 없었고 몇명의 부상자만 발생했지만, 이 사건으로  종로 뿐 아니라 경성의 경찰은 발칵 뒤집혔고 비상이 걸렸다. 범인 잡기에 혈안이 됐다. 경성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종로, 그것도 일제의 첨병이고 삼일운동 때 33인의 민족 대표를  비롯해 수많은 항일투사들을 잔혹하게 고문한 종로경찰서. 그곳에 폭탄이 투하된 것은 조선인들에게는 쾌거였지만 일제로선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본진에 구멍이 뚫린 것이나 다름 없었으니.

이 사건은 보도 통제로 기사화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소식이 퍼지는 걸 막을 길이 없었다. 소문은 방방곡곡으로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조선인들 사이에선 묘한 긴장감과 생기가 감돌았지만, 반대로 일본은 이런 조선인들의 민심반향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경성의 중심부,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투하한 이 담대한 이는 김상옥이었다. 고생 끝에 '영덕철물상회'라는 공장을 가질만큼 기반을 다졌지만 미련없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인물이었다.

김상옥이 일제의 집요한 추적을 받게 된 것은 불문가지였는데,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보면 실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체력적으로도 뛰어났지만 그만큼 정신력 또한 남다른 인물이었던 것이다.

체포 직전 포위망을 뚫고 도망쳐 나왔던 그는, 일제의 추격을 피해 은신했지만 결국 다시 일본의 포위망에 걸려들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투항하라는 일본의 권유를 마다하고 죽음을 택했다. 그 많은 일본경찰과 대치하면서, 마지막 세 발의 총알을 남기고 자결하는 순간까지도 총격전을 벌였던 것이다.

 

단신으로 그 많은 경찰과 대치했을 그..경성 효제동 일대에 퍼져갔던 총성. 서른 넷 짧은 생애를 장렬하게 마감한 김상옥의 최후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죽은 뒤에도 둘째 손가락으로 권총의 방아쇠를 쥐고 놓치지 않았을만큼 결사항전한 모습은 강인한 인간 김상옥의  마지막 투혼이었을 것이다.

 

김상옥은 자결했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의열단에서는 또다른 거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대규모, 다발적인 폭탄공격을.

이 작전의 중추는 의열단 단장 김원봉이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안그래도 비범해보였던 그를 몇배는 더 평가하게 되었다. 그는 일제입장에선 조선인으로 최고의 현상금을 내걸만큼 흉악범이었고, 베일에 가려진 사나이였다. 어찌나 보안에 철저했는지 얼굴이나 이력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는 걸 보면 그만큼 주도 면밀했고 신중했던 것이다.

 

폭력을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확실하게 활용한 그다웠다. 대규모 다발적 폭탄 공격의 위력은 상상해보면 알 것이다. 고성능 폭탄을 비밀리에 국내로 반입해서 조선총독부,동양척식회사,조선은행,경성우편국,경성전기회사 등 주요시설에 타격을 가하고, 암살을 한다면...일제가 받을 충격이 얼마나 엄청날 것인지.

최근에 일어난 유럽의 폭발사건들을 떠올리게 된다.

의열단은 고려공산당의 자금 지원을 받아 이 작전에 만전을 기했다. 문제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폭탄을 국내로 들여오는 것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일제 경찰이었던 황옥이 협조하게 된다. 그는 비록 일본 경찰에 몸담고 있었지만 평소 독립운동에 참여하고자 했던 의지가 있었던 인물이었기에 기꺼이 참여했건 것이다.

 

이 계획의 성사 여부는 폭탄을 성공적으로 반입하느냐와 사전에 계획이 누설되지 않게, 보안을 유지하는 것에 달려있다고 과언이 아니었다. 내가 다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국경에서 검문에 걸릴까, 국내에선 경찰에 발각될까, 일촉즉발의 순간들.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긴 한숨이 나왔다. 마지막단계에서 폭탄이 일제에 발각되면서, 모든 수고가 물거품이 되고 말았으니. 그리고 황옥을 비롯해서 작전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체포되고 말았다.

 

거사 직전 단계에서 하필 밀정에게 폭탄을 보관해달라고 부탁한 것에서 경찰에 꼬투리를 잡혔고,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많이 허무했다. 수많은 고비를 넘긴 끝에 겨우 폭탄을 국내로 들여왔는데..마지막 단계에서 부주의로 작전을 그르치고 만 것이었다. 거기에 황옥, 김시현 등 계획에 참여했던 열혈 독립활동가들마처 체포되고 말았으니..그 인적 손실과 그동안 들어갔던 경비며..의열단의 출혈이 막심했다.

 

앞의 김상옥도 밀정이 경찰에게 제공한 단서로 체포된 것인데, 이번에도 밀정의 염탐으로 인해 몇년동안 준비했던 계획이 모두 헛수고가 돼버린 것이다. 이 순간 왜 하늘은 조선을 돕지 않은 것일까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저 고비만 넘겼다면,폭탄을 옮기지만 않았어도.. 장기간 작전을 준비했던 김원봉은 얼마나 맥이 빠졌을까. 실패한 안타까움 때문에 만약에, 만약에 하는 가정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조선이나 독립군 활동지에는 밀정이 많았다. 자나깨나 밀정 조심을 외치고 싶을만큼 그만큼 일제의 감시망이 촘촘하게 짜여져있었다는 말인데, 밀정들의 암약은 독립군의 활동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에서는 한세기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스펙타클한 활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실패했지만, 실패라고 말하고 싶지않은 시도였다. 단발적인 폭력투쟁이 한계가 있다고는 하지만 가라앉은 국내 분위기를 일신하고, 조국 독립에 위한 투쟁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는 효과는 있었을 것이다.

이 거사가 발각된 것에서 그만큼 일제의 감시망이나 조직이 치밀해서, 철저하게 항일 운동이 막혀있던 당시 조선 사정을 파악하게도 된다.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 신문 보도나 논문 등을 바탕으로 저술된 것인데, 소설처럼 긴박하고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들'에  방점이 찍혀있다. 김원봉은 물론이고, 김상옥, 황옥, 김시현 등 목숨을 걸고 이 거사에 직접 참여했던 인물들의 동선을 좇아가면서 거사 과정을 풀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체포된 이들은 어떻게 됐을까. 황옥이나 김시현은 잔혹한 고문을 견뎌야 했고, 1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들 말고 체포된 이 중에는 고문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동지를 자백한 죄책감을 못이기고 자살한 이도 있었다. 실제로 김상옥의 체포에 협조해야만 했던 인물도 있었던 것을 보면 식민지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그 이상의 의지와 인내심이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더 안타까운 일은 이런 엄혹한 식민지를 거치고 살아남아 독립이 된 뒤였다. 김원봉은 친일파 경찰의 대명사 노덕술에게 취조를 받는 모멸감과 환멸에 북한으로 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북한에서도 6.25를 반대하는 등 김일성 노선에 전적으로 동조하지 않자 돌아온건 숙청이었다. 장개석 중국 국민당 스파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죄명으로 숙청되면서 북한 역사에서도 그의 존재는 삭제되고 말았다.

황옥은 내내 병마에 시달리다, 밀정인지 투사인지 논란을 남긴 채 한국전쟁이후에는 그의 행적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김시현은 더욱 파란만장했다. 김구 암살 사건에 격분한 나머지 이승만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전력으로 인해 그는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저 뜨거운 심장으로  일제에 맞섰던 이들이라 시류에 영합하지 못하고 돈과 권력과는 상관없는 길을 선택했던 것일까.  해방 뒤 그들의 삶에 그저 가슴이 아플 뿐이었다. 분단과 외세에 의존해야 했던 한반도의 비극은 이렇게 1923년 뜨겁게 일본에 저항했던 독립투사들의 말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워게 했다. 아마 그들에게도 분단이나 친일파 득세는 청천벽력이었을 것이다. 1923년 부분을 읽으면서 뜨거워졌던 내 가슴이 해방 뒤에 와서는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1923년 펼쳐졌던 작전을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것이 죄스럽다고 여겼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존경과 예우를 받아 마땅한  독립투사들의 해방 뒤 삶에서 또, 이분들도.. 하는 생각에 통과의례처럼 슬픔을 느꼈지만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1923년의 거사, 그 치열했던 과정과 조국 독립을 향한 간절한 심정으로 그 작전에 뛰어들었던 투사들이 있었음을, 죽음을 당하고 체포되고..그 고난조차 감내했던 투사들의 삶을 제대로 조명해야 한다고 외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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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이 남지 않은 유적지가 너무 많다-항일유적답사기 | 전체보기 2016-04-28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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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항일 유적 답사기

박도 저
눈빛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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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나 원하는 목적지를 둘러볼 수 있다면 그에 비해 목적을 갖고 현장을 둘러봐야하는 답사는 편안한 마음으로 가게 되지 않는다. 특히 이렇게 중국 곳곳에 흩어져있는 항일 유적지를 찾는 답사라면 소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전 준비나 공부해야 할 것도 많거니와  십중 팔구 유적지 찾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전편에 걸쳐 필자는 강행군을 해야했고, 답사 일정과 목적지를 보면 사명감에 충분히 그럴만했다.

 

책을 펼치기 전부터 걱정이 들었다. 시간도 오래 지난데다 남의 나라 땅인데 항일 유적지가 얼마나 남아있을지, 그런데 역시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고, 남아있는 유적지보다는 그 모습을 찾을 수 없는 곳에 먼저 눈길이 쏠렸다.

독립투사 배출로 유명한 신흥무관학교 자리는 옛터에 표지석 하나 없는 옥수수밭이었고,  심지어 상하이 임시 정부 청사도 무려 임시정부인데도 최초 청사는 찾을 수가 없었다. 수십년이 지나는 동안 동네 이름과 번지도 바뀌었고 증언해줄 사람도 없어서. 상하이 시절 마지막 청사를 겨우 지킬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다 싶을 정도였는데 그것도 한국 기업에서 매입한 뒤 새단장을 하고 입장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안중근열사가 이토오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하얼빈 역 플랫폼에는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기념표식 조차 없었다. 필자를 안내한 이가 걸음 걸음으로 재서 저격한 지점을 확인하는 대목에서는 독립운동가나 열사들의 투지를 느끼기보다는 알수 없는 애잔함이 먼저 밀려왔다. 

 

하긴 중국이야 남의 나라 독립운동가들 사정이 안중에 있었을까. 항일 유적지를 제대로 보존하지 못한 것 그 비애감은 나라를 빼앗긴 백성의 몫인 것을.

그렇게 안타까움을 느끼다가 나 자신을 돌아봤다. 나는 서울에 있는 서대문 형무소에도 안갔으면서..말로만 항일 유적지 운운하고 분노하지 실제로는 얼마나 관심을 가졌던가. 뜨끔해졌다. 필자가 '과거를 잊는 것은 반역이다'란 말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일개 국민인 나도 반성하지만 정부에서도 더욱 적극적으로 항일 유적지를 보전하고 지켜야할 책임을 느껴야 할 것이다.

 

마루타 생체실험으로 악명이 높은 731부대, 그곳에 남아있는 보일러실과 굴뚝이나, 독립군들을 잔인하게 고문한 곳으로 유명한 옛 일본 총영사관이 허름한 여인숙으로 변해버린 현장 사진을 보고서는 보존해야 할 것은 비단 항일 투쟁의 역사만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경계하고 비판하고 분노를 기억하는 것도 사회 구성원의 소임인 것이다.

 

이 책은 필자가 세차례에 걸쳐 중국, 항일 유적지가 많은 동북삼성,상하이, 하얼빈 항일 유적지를 답사하고 쓴 책이다. 필자는 이념을 내세우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차분하게 소감을 말하고 있다. 무엇보다 독립운동가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잘 묻어 나왔고, 분단으로 인해 북한을 둘러보지 못하는 아쉬움도 토로하지만, 현지에서 독립운동가나 그 후손들과 함께 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이상룡 선생과 함께 활동한 구순 노구의 이태형 선생이  당부하는 말씀이나 무장투쟁을 하기 위해 망명한 석주 이상룡선생의 증손, 무장투쟁을 하다 체포돼 사형당한 김동삼 선생 손자 등의 일침은 귀담아 들어야 할 말들이었다. 지금은 중국에서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남북한 모두 뿌리라는 것을 잊지 않고, 그 쓴소리조차 모국에 대한 애정의 발로에서 나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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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 옥사, 투사 강우규, 김동삼이 사형당한 그곳-서대문 형무소 근현대사 | 전체보기 2016-04-25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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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서대문형무소 근현대사

김삼웅
나남 | 2000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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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서대문 독립공원,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그곳에는 1980년대 말까지 서대문 형무소가 있었다.

(이름이 여러번 바뀌었지만 편의상 서대문 형무소로 명칭을 통일)

서대문 형무소가 신축된 것이 1908년, 일본은 병합 전부터 일제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수용할 현대식 감옥부터 짓기 시작한 것이었다. 500명 수용 규모의 형무소는 외형부터 그 전의 감옥과는 달랐다. 높다란 담에 망루에  건물은 압도적이고 근대적인 위용을 자랑했지만 그 역할 상 이내 조선인의 원성이 자자한 곳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일제는 본격적으로 조선을 병합하기전 경찰,사법권부터 확보하고, 조선인들의 항일 투쟁을 막았다. 이미  보안법, 출판법,치안 유지법 등 조선인을 통제하는 법률과 일본인이 재판하는 사법을 통해 조선인의 독립 운동을 탄압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는데, 그 일환으로 건축된 것이 서대문 형무소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조선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사전 작업을 다진 것이었다.

법에 의거한 재판 뒤 죄인들을 교정하는 기관으로, 근대적인 시스템처럼 보이게 외피를 씌웠지만 서대문 형무소의 실상은 조선인들에게 압박를 가하고, 독립활동가들을 격리하고, 고문하고, 처형하며 조선인들의 독립의지를 꺾는 역할을 담당했다.

애시당초 서대문 형무소가 세워진 위치만 해도 일본의 속내가 드러났다. 하필 조선이 자주국이고, 독립의지를 국내외에 과시하기 위해 세문 독립문 근처였으니. 그리고  서대문 형무소 뿐 아니라 인천, 광주 등 전국 8군데에 분감을 설치했다. 1916년에는  여성을 수용하는  여사(女舍) 도 신축해야 했다. 그만큼 의병과 항일 투사들이 넘쳐났던 것이다.

 

김구, 이승만을 비롯해서105인 사건, 3.1 민족 대표,신간회 사건, 안창호, 여운형, 함석헌  등 수많은 항일운동 활동가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수감자들은 전향 회유와 고문, 열악한 처우 등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서대문 형무소는 독립투사들의 원혼이 서려있는 곳이다. 옥중에서 사망한 유관순 열사를 비롯해서 의병장 이인영, 조선총독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쳤던 강우규, 서로군정서의 김동삼 등 수많은 투사들이 옥사하거나 사형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러고보니 다른 감옥 한군데가 생각났다.이회영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투옥됐던 곳, 단채 신채호가 옥사하고 안중근 의사가 처형당했던 곳,  중국 대련의 뤼순감옥이 바로 그곳이다.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만주로 떠나거나 망명했던 독립투사들 역시나 체포의 위험에 시달리긴 마찬가지였다.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태평양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면서 일본의 만행이 극에 달했다는 것이다. 요시찰인물들을 검거해 이들을 각 경찰서와 서대문 형무소에 분산 수용했는데, 일제는 퇴각하기 전 항일인사들을 학살할 계획을 세워두었다고 한다. 이 계획은 일본이 갑작스레 항복하면서  대량학살 일보직전에서 무산됐다고 하니, 하늘이 도와준 것이었다. 만약 일본의 계획대로 됐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이 계획만 보더라도  그 어느 제국주의보다 식민지 국민에게 집요했고,잔인하게 굴었는지, 일본 제국주의 민낯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일제는 '내선일체'를 외치며 조선인의 생활과 내면까지 전적으로 통제하려 들었던 것이다.패전을 앞두고는 형무소 관련한 다량의 자료를 파기하면서 자신들의 죄상을 은폐할 정도로  치밀했고 주도면밀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가슴이 찔렸다. 조선 역사에 관심있다고 표방하고 있으면서도 서대문 형무소를 한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그러다 깨알같이 자잘한 활자로 인쇄된 독립운동 관련 서대문 형무소 수감자명단 부록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 목록을 보면 살인, 소요혐의로 수감되거나 사형에 처해진 독립투사도 여럿이었지만 대다수가 치안유지법, 보안법, 국가총동원법 등 죄목을 어긴 혐의로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일제가 왜 저런 악법을 만들고, 형무소까지 새롭게 만들었을까. 그 이유가 충분히 설명됐다. 일제는 조선인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법치란 이름으로 태연하게 자행했던 것이다.

 

그리고 서대문 형무소의 악역은 일제시대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비극은 계속되고 있었다. 광복 뒤, 의왕으로 이전됐던 1980년대 말까지 여전히 숱한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감당해야했던 것이다. 친일 혐의의 최남선이 수감됐는가하면, 진보당 조봉암이 처형됐고, 독재 정권 하에서는 다수의 민주인사들이 투옥됐다. 김재규가 처형된 곳도 이곳이었다.

제국주의가 조선을 용이하게 지배하기 위해 만들었던 악법, 사법부 운용과 감옥,  그리고 독재 정권아래에서  벌어졌던 그것이 묘하게 닮아 있었다는 것을 서대문 형무소는 묵묵히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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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전선에 뛰어 든 24인의 여전사들-조선의 딸, 총을 들다 | 전체보기 2016-04-18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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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조선의 딸, 총을 들다

정운현 저
인문서원 | 2016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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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딸, 총을 들다' 책 제목을 보자마자 영화 '암살'의 안윤옥이 떠올랐다. 실제로 안윤옥의 모델이라고 하는 남자현을 비롯해서 모두 스물 네명의 여성독립운동가의 활동을 담고 있다. 시대도 그렇고 여성이라 활동 폭이 제한적일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순전히 내 단견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는 여성이라고 봐주지 않았다. 해방을 보지 못하고 총살당하고, 고문치사, 옥사, 그리고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눈을 감은 투사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여성들의 항일투쟁참여는 국채보상운동이나, 계몽운동으로 시작했는데, 여성 의병장도 있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윤희순이 그 주인공이었는데, 그녀는 국내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의병장이었다.

그리고  3.1운동을 계기로 여성들의 항일투쟁이 본격화됐다. 동풍신같은 학생, 김향화 같은 기생은 지역의 만세운동 시위를 선도했다. 동풍신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했다고 하니, 유관순과 비슷한 행보를 걸었다. 

3.1운동 이후에는 여성들의 참여방식이 훨씬 다양해졌다. 교육을 받는 여성들이, 취업을 한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여성들이 활동 공간이 점점  넓어져 간 것이다. 학생의 동맹휴학, 노동자의 파업, 첩보활동, 의거, 군대 조직 등..

 

남자현 외에도 무장, 폭력 투쟁에 적극 나선 여전사들이 눈에 띄였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무력, 폭력투쟁 참여하는 여성은 극소수이고 뒷선에 있었을 것이라는 선입견은 여지없이 깨졌다.

임산부의 몸으로 평남 도청에 폭탄을 던진 안경신, 조종사로 항일의지를 불태웠던 권기옥, 무장투쟁 제일선에서 여장군으로 불리웠던 김명시 등 생각보다  여럿이었다. 그녀들은 남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항일 활동을 펼쳐갔다. 특히 권기옥은 조선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일본왕궁을 폭격하겠다고 결심할 만큼 진취적이었다.

 

이들 여성들은 대부분 남편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는데,

신채호의 아내 박자혜, 주세죽의 남편은 박헌영이었고,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박차정은 의열단 김원봉과 부부였는데, 일제와 전투할 때 입은 총상과 그 후유증에 시달리다 해방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부창부수의 이들.

그러나 이들 대부분 가정생활이 순탄치 못했다. 남편이나 본인의 투옥, 고문과 감시, 또 항일 투쟁으로 인한 위험성도 그렇고.

 

독립운동을 하면 삼대가 가난하다는 말이 왜 생겨난건지 이해가 갔다.

박자혜만 해도 남편 신채호가 여순감옥에 투옥되자 아들과 함께 귀국했지만,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려야했다.

친일파 후손들은 호의호식하며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지만 독립군은 궁핍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여파로 자녀를 교육시킬 여건이 되지 않았다.

 

해방 뒤 미군정이 실시됐고, 친일파 청산과 독립투사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친일파들이 단죄되기는 커녕 여전히 떵떵거리는 상황을 목도해야 했던 독립투사들과 후손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피가 거꾸로 솟는 듯 했을 것이다.

공산주의자였던 여성투사는 자신의 이념때문에 자식들에게 피해가 될까봐, 독립투쟁 경력을 아예 감추기도 했다니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무엇을 위한 독립운동이었을까, 보상을 바라고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도 인간인지라 조국에 서운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몇번 놀랐다. 그 첫 번째가 아는 이름이 드물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가 엘리트에서 기생까지 다양한 계층의 여성이 참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번 째는 종적을 알수 없는 사람이 꽤 된다는 것이었다. 후손이 없어서 훈포상을 받지 못하는 투사도 있고.

 

2015년 12월말 현재  그러니까 해방  70년동안 정부로부터 포상받은 여성독립유공자 수는 모두 270명. 2016년 1월 현재까지 전체 유공자수 만 4,262명이라니 여성투사의 비율은  2%에 불과하다고 하니, 그만큼 여성투사는 소수이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라는 생각도 들었다. 무관심했으니. 이름조차 알수 없고, 종적을 알 수 없게 된 여성투사들이 적지 않았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책은 내용 면에서 완성도가 높은 것은 아니다. 스물 네명을 다루다보니 또 당사자에 대한 자료가 부족해서 심도있게 담아내지 못하고 보완해야 할 점도 많다.

그럼에도 대중들에게 여성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을 알려주고 관심을 촉발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더 많은 여성투사들을 환기시켜주고, 그들의 존재를 각인시켜줬다는 점에서 점수를 후하게 주게 된다.

 

여성독립투사들은 여성은 공적인 역할에 참혀할 기회와 권리가 봉쇄됐던 조선의 낡은 틀을 깨버린 것이었다. 특히 3.1 운동이후에는 엘리트, 학생, 기생, 노동자, 해녀 등..신분과 계층을 망라한 여성들이 항일 투쟁에 참여하면서 여성들의 의식은 성장했고, 두각을 나타내는 여성들이 등장하면서, 그동안 성리학의 이데올로기에 갇혀 잠자고 있었던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활발하게 이루어 질 것임을 알리는 예고가 됐다.

거기에  남성과 함께 여성 또한 한 나라의 구성원이고, 주인이라는 점, 따라서 나라를 지킬 책임도 함께 질 수 있다는 백성으로서의 권리이자 의무를 확실하게 깨우치게 된 것이다.

 

끝으로 이 책에 실려 있는 스물 네명의 여성 독립운동가 이름을 불러 보고자한다. 아마 아는 이름이 채 다섯 명도 안될 사람이 대부분이지 않을까.

이렇게 꼭 기억해야 하는 사람을 잊거나 무명으로 남겨두는 사회, 그런 사회라면 언젠가 그 망각이나 외면이 업보가 돼 되돌아온다는 것, 그 점을 새겨둬야 할 것이다.

 

한국 독립운동 명가의 잊혀진 주역 김락,

백범의 비서로 조선의용대 대원으로 활약한 이화림,

무명지 자르고 조선총독 암살에 가담한 남자현,

자금 조달에서 살림까지, 임정의 전천후 안주인 정정화,

함경북도 명천에서 만세 시위하다 옥에서 순국한 동풍신,

엘리트 신여성출신 항일투사 김마리아,

간호사 출신 항일 투사이자 신채호 아내였던 박자혜,
조선의용대 대원으로 활약한 박차정,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임신한 몸으로 평남도청에 폭탄을 던진 안경신,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

일제의 수탈에 맞서 일경 파출소를 습격한 제주 해녀 부춘화

수원 3,1운동 주도한 기생 김향화,

사상 첫 고공 농성을 벌인 강주룡,

국내 최초, 국내 유일의 의병장 윤희순,

저항시인 이육사의 시신을 인수한 항일투사 이병희,

대한독립청년단 총참모 조신성,

사유를 위해 싸우다 일제에 총살당한 김알렉산드리아,

항일무장 투쟁가 오광심,

항일무장 투쟁의 최전선에서 싸운 투사 김명시,

사상기생 정칠성,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최후의 여성의원 방순희,

이역만리에서 분투한 하와이 이민1세 이희경,

박헌영의 아내이자 독립운동 동지였던 주세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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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25 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