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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공무원의 세계 | 서평단 책 후기 2022-05-19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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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조선의 공무원은 어떻게 살았을까?

권기환 저
인물과사상사 | 2022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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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이 최고의 장래희망이고, 선망의 대상이었던 시기가 있었다. 요즘은 그 인기가 시들해져 유투버 등의 크리에이터가 더 인기있는 직업으로 변화되었지만, 안정적인 직업으론 여전한 것 같다. 

 

조선시대 공무원하면 워낙 TV사극에서 많이 나와 의정부와 삼정승, 육조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 본다. 그 중에는 출신이 좋아 양반으로 존경받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역모와 반역, 각종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거나 귀양, 심지어 사약을 들이키고 죽거나 참형을 받기도 한다.

 

오늘날처럼 보장된 지위였고, 때론 존경받기도 하지만 말한마디에 죽음이 오락가락했던 그들의 세계. 소수만이 순조롭게 근무하며 명예롭게 은퇴할 수 있었다. 

 

과거제도가 확립됨에 따라 벼슬길에 나서기 위한 공부부터가 그들의 시작이었다. 양반가 아이들은 7,8세가 되면 서당에 들어가서 천자문, 동몽선습을 익혔고 15,16세가 되면 서울의 아이들은 사학에, 지방의 아이들은 향교에 들어가 5,6년간 소학, 효경을 거쳐 사략과 사서삼경을 공부하고 소과에 응시했다. 문과는 예비시험의 소과에 생원시와 진사시가 있었고 잡과와 무과도 있었지만 유학 이념에 따라 문과가 중요시되었다. 시험은 경전에 능할 뿐 아니라 글짓기 실력도 정해진 형식에 따라 지을 수 있는 자질을 갖추어야 했다. 

 

원칙적으로는 양인(평민)이상이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지만 차별이 존재했고, 평민들은 생계를 위해 공부에만 매진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나 드물게 노비 출신으로 형조판서를 지낸 반석평이라는 인물이 있었고, 충무공 정충신이라는 포도대장과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인물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시험을 준비하는 데는 많은 돈이 들어가며, 오늘날과 비교해 2021년 기준 5급 공채시험 합격자들의 평균 나이는 26.8세에 평균 38.5개월의 수험 생활을 보낸다고 한다. 한 달에 드는 수험 비용은 약 180만 원으로 조사되었다.

 

조선시대와 비교해보면 대부분 30대 중반에 50세를 넘긴 경우도 적지 않았고, 최고령으로 90세에 합격한 자도 있었다. 76세에 합격한 김효흥은 이듬해 사망하기도 했다. 시험 준비에는 상속받은 토지를 팔고 전 재산을 탕진하기도 했다. 교통 또한 불편해 숙식을 위한 경비도 만만찮게 들었다고 한다.  무과 또한 실기시험에서 말타기와 활쏘기가 있어 일반 평민들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오늘날처럼 과거시험에도 각종 비리가 연루되어 있었고, 부정행위 또한 있었다. 시간 제한 없이 글을 짓다보니 응시생들은 새벽에 시험장에 들어가 밤늦게까지 답안을 작성했으며, 통행금지 시각인 밤 10시까지 길게 치르기도 했다. 시험관들은 중간중간에 죽이나 술을 제공해주기도 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모든 관직은 5000~6000여 개 였으나, 양반이 진출할 수 있는 관직은 2,200여 개였고, 핵심요직은 300여 개에 불과했다. 모두 청요직인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 들어가고 싶어했고, 그 안에서 소속 부서를 대변해 기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오늘날처럼 과거에 급제하면 신고식인 면신례가 있었으며, 이는 죽음에 이르고 재산이 거덜나기도 할 정도였다. 뇌물수수도 만연해서 우리가 아는 황희 정승도 김영란법을 피해가지 못하고 탄핵을 받았다. 귀양살이에도 빈부격차가 존재했는데 이는 정약용과 김정희의 유배생활에서도 드러난다.

 

이를 봤을 때 조선시대 양반은 시대와 가문을 잘타고나면 운이 좋아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지만, 가문의 영광을 위해 과거에 급제해야 하는 숙명이 있었다. 과거는 관료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 관문이었고, 3년에 한 번씩 치러져, 최종 합격자가 33명에 불과한 어려운 시험이었다. 물론 부정기시험도 있었고, 조선 후기 들어 유명무실해졌지만 개인과 가문의 성공 발판이었다. 당상관까지 오르기 위해서는 한참을 기다렸고, 험난한 신입 신고식까지 있었다. 새벽에 열리는 궁궐 회의를 위해 새벽 일찍 출근하는 그들의 공무원 생활. 봉급은 박봉이었으나 탐관오리도 청빈한 이도 삶을 살아갔다. 워라밸과 철밥통을 떠올리지만, 사명감과 책임감이 있어야 해낼 수 있는 직업. 오늘날 공무원과 비교하며 읽어보는 재미가 있었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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