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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과 사랑의 실천... | 기본 카테고리 2002-12-17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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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폭력에 대항한 양심

슈테판 츠바이크
자작나무 | 1998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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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대한 양심-칼뱅에 맞선 카스텔리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성서가 인류 역사상 가장 존엄한 책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마도 '사랑'의 기록이기 때문일 것이다.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파스는 시론집 [활과 리라]에서 사랑은 곧 타인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했다. 타인을 향한 긍정적 의지, 다름 아닌 관용의 정신이 사랑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것. 자, 여기 신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강요하는 이와 인간에 대한 관용을 실천하는 이가 있다. 역사는 그동안 전자를 지나치게 부풀려 평가해온 반면, 후자는 철저히 외면한 채로 흘러왔었다. 종교개혁을 이끈 칼뱅과 칼뱅의 독선에 맞선 카스텔리오. 전기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수백 년 전 이야기를 마치 눈앞에서 우리 눈앞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인양 폭력과 양심의 맞섬을 서술하고 있다. 더불어 역사가 어떻게 왜곡되는지도.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여러 분파로 나뉘어져 몹시 혼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카톨릭에 반대하여 새로운 교단을 열기는 했지만 체제나 조직은 정비되지 않은 채였다. 이때 젊은 신학자 칼뱅은 [기독교 강요]라는 저서를 통해서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했고 결국 구교에 대항하는 제네바 시의 종교국을 관장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자유로움과 질서 사이에는 갈등이 놓이게 마련이다. 칼뱅은 신교의 체제와 조직을 위해서 인간의 자유로움은 억제되어야 한다고 판단한다. 하나님의 위대함 앞에 폭력을 써서라도 인간을 작게 만들어야만 했던 칼뱅은 인간을 저항 없이 경건하고 순종하는 양떼로 만들고자 했다. 온갖 규칙과 조항으로 시민들의 행동을 제약하고, 그와 해석을 달리하는 몇몇 신학자들을 박해하는 데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의사이자 신학자인 미겔 세르베토를 화형시키는 데에 배후에서 조종하고 이를 반대했던 카스텔리오를 죽음의 문턱에까지 밀어넣는다. 사랑은 사라지고 광신만 남은 종교개혁자 칼뱅.

카스텔리오는 신의 질서보다 인간의 자유를 옹호하는 양심이었다. 그는 구교에 대항하여 칼뱅의 문하에 들어오지만 칼뱅의 독선적인 성격에 제네바시를 떠나고 만다. 이후 바젤 대학에서 그리스어를 가르치던 카스텔리오는 '이단'으로 몰아 변명의 여지도 주지 않은 채 '세르베토'를 살인한 칼뱅을 고발한다. '진리를 구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그것을 말하는 것은 절대로 범죄일 수 없다, 아무도 어떤 신념을 갖도록 강요해서는 안된다. 신념은 자유이다'라고 말했던 카스텔리오는 이단은 상대적인 차이이며, 세계는 단 한 가지가 아니라 수많은 진리들을 위한 공간을 갖고 있다는 주장을 통해 칼뱅의 독선을 당시 유럽의 종교계에 알리게 된다. 누구도 칼뱅의 신정에 맞설 수 없는 시대에 그는 목숨을 걸고 양심을 수호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단을 인정하는 관용, 곧 사랑의 정신.

츠바이크가 이 책을 쓸 무렵은 이탈리아가 이티오피아를 병합하고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강제 합병되기 직전이었다고 한다. 칼뱅의 독선적인 전체주의처럼 독일사회주의당 히틀러 역시 츠바이크의 책들을 국가와 민족을 보호하기 위해서 금서처분을 내린다. 어쩌면 히틀러의 전체주의에 대항하려는 츠바이크의 노력이 수백년 전 카스텔리오의 모습을 나타났을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어가면서 인간에게는 자유가 왜 필요하며 자유를 통해 인간다움이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도 더 분명히 알 것 같다. 더불어 자유에 대한 억압이 때로 가장 선한 모습으로 포장되어 다가온다는 사실도.

[인상깊은구절]
우리의 세계는 단 한 가지가 아니라 수많은 진리들을 위한 공간을 갖고 있다. 사람들이 원하기만 하면 서로 나란히 모여 살 수 있다.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신념을 판결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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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야만의 변증법 | 기본 카테고리 2002-09-02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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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계몽의 변증법

Th. W. 아도르노,M. 호르크하이머 공저/김유동 역
문학과지성사 | 2001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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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초판본이 쓰여진 것은 1944년. 곧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고 인류 역사상 유래 없는 대규모의 전쟁을 수행하며 유태인을 학살하던 시기이다. 합리적 이성과 인류의 보편적 이상을 추구하는 독일이 어쩌다가 가장 야만적인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을까. 또 수백만명의 유태인을 학살하게 되었을까. 과학과 이성이 발달한 시기에 어떻게 이런 야만적인 일들이 행해지게 되었을까. 이 책은 아마도 이와 같은 시대적인 맥락 하에서 출현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들은 현실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계몽의 개념을 치밀하게 파헤친다. 우선 계몽은 '미지의 것, 불안한 것, 설명 불가능한 자연, 공포의 자연'을 '합리적인 것, 설명 가능한 것, 과학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 모든 불확실한 것을 '수학적인 공식'으로 명백하게 밝혀서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곧 계몽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근대적 사유는 수학적 사고와 동일시되며, 모든 존재들은 수학의 대상으로서 물화된다. 곧 다음과 같은 명제, '세계에는 과학이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존재란 없지만 과학이 뚫고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존재가 아니다.'가 성립하게 된다. 모든 것이 주체를 중심으로 설명이 가능한 보편적 현상이 되지 않으면 존재로서 인정받을 수조차 없는 나락에 빠지고 마는 셈이다. 저자들은 이와 같은 '계몽' 개념에는 이미 신화적 사고가 자리잡고 있음을 놓치지 않는다. 신화 역시 인류가 '불완전한 자연, 공포의 자연'을 인간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는가. 따라서 20세기는 '계몽의 신화'의 시대다. '계몽'이든 '신화'이든 물론 그 근저에 가로놓여 있는 메커니즘은 스피노자의 말처럼 '자기를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그것은 유일한, 또는 제 1의 기초가 된다.

저자에 의하면 계몽에는 이미 파시즘의 징후가 노정되어 있는 듯하다. 계몽은 달리 말한다면 일종의 잘못된 미메시스다. 저자들은 올바른 미메시스는 주체가 객체(자연)에 동화 혹은 조화를 이루기 위해 객체를 존중하며 닮아가려는 노력이지만 잘못된 미메시스는 그 반대다. 주체가 객체를 자기 것으로 끌어들여 주체의 성격을 객체에게 주입하려는 행위가 곧 잘못된 미메시스다. 이 과정에서 주체의 반성적 사고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주체는 옳은 것이며, 객체는 변화해야할 대상이다. 깨달음을 얻고 보편성의 기준을 지닌 주체는 독단적인 보편성의 기준(?)을 타자에게 혹은 자연에게 강요한다. 받아들이든지, 말든지는 자유다. 하지만 오늘 이후 그대는 우리들 사이에서 이방인이 될 것이다.

저자들이 꽤 많은 부문을 할애해서 써나갔던 유태인의 항목을 보면, 계몽 자체가 지닌 파시즘의 징후는 확연히 드러난다. 서구 유럽에서 유태인은 골치 아픈 존재였다. 크리스트교의 오랜 전통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전통을 유지시켰고, 자신의 고유한 삶의 질서를 고수하려 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한 곳에 정착하여 농경문화를 이루지 못하고 이곳 저곳을 떠돌며 유통업에 종사하게 된다. 유럽이 자본주의화되면서 상인은 수공업자나 농민들의 정치적 표적으로 변하였고 살아남기 위해 유태인은 정치권력에 빌붙을 수밖에 없었다. 사냥이 끝나고 개를 잡아먹듯, 유태인은 독일의 정치권력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민중의 엄청난 분노를 사기에 충분하였다.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삶의 질서를 버리지 않았으며 그것은 지배질서의 '보편적 가치'를 상징적으로 훼손시키기에 충분했다. 다시 한번,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자유다. 그렇지만 오늘 이후 너는 우리들 사이에서 이방인이 될 것이다. 극단적인 보편성의 추구. 반성되지 않은 자기 유지, 파시즘.

60여년 전에 초판이 나왔음에 불구하고 이 책이 지닌 현대적 의미는 매우 각별하다. 왜냐하면 아무리 포스트 모던한 시대라고 해도 합리적 이성과 보편성의 극단적 추구는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한국사회에 주는 교훈도 크다. 보편성의 추구 및 공공선을 위한 목적으로 유럽에서 '유태인'이 학살되었다면, 아메리카에서는 '인디언'과 '마야족'들이, 이스라엘에서는 '팔레스타인'이, 한국에서는 '빨갱이'들이 학살된 것을 상기해보라. 그것은 반성되지 않은 주체가 객체를 자기화하려는 잘못된 미메시스와 잘못된 계몽의 기획으로부터 시작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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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여행의 재미.. | 기본 카테고리 2002-08-16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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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우리말의 수수께끼

박영준 등저
김영사 | 2002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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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국어를 가르치면서 가장 어려웠던 단원은 국어사와 관련된 지문이었다. 학생들은 불교나 유교의 경전, 혹은 고사 등을 따분하게 생각할 뿐더러 먼저 생소한 우리 옛말에 대한 상식이나 기초지식이 터무니없이 낮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는 아이들이 전반적으로 언어에 대한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교과서 자체의 내용이 흥미 없을 뿐더러 언어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처럼 무조건 외우라는 식의 국어사 교육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만 같다.

이런 와중에 이 책은 다소 위안이 된다. 전공자들에게는 한없이 사소하고 간단한 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비전공자나 고등학생 및 일반인을 대상으로 쉽고 간결하고 흥미있게 책의 체제를 설정했기 때문이다. 문자의 출현부터 시작해서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이두식 표기나 향찰문자, 구결 등에 대해 그 발생 원인과 양상을 비교적 알기 쉽게 풀이한 점도 돋보인다. 대개 언어학 서적의 경우 고답적인 지식 나열에 그칠 수 있는 한계를 상식적인 차원에서 서술한 점은 이 책이 지닌 미덕이다.

책의 저자들은 우선 언어란 '사용하기 편리하고'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데 가장 주된 목적이 있는 점에서 언어관이 통일돈 듯하다. 이를테면 만고불변으로 교과서 한켠을 차지했던 기미독립선언서를 두고서 '오등은 자에~'로 시작되는 글이 어떻게 선언문으로서 기능할 수 있겠느냐는 지적은 속이 시원할 정도다. 소리나는 대로 적는 방법과 풀어쓰는 한글이 오히려 문자를 표기하는 발전된 방법이었다는 사고도 진보적인 평가인 듯 싶다. 문명퇴치의 공로로 유네스코에서 제정 시상하고 있는 상의 이름이 '세종대왕상'이라는 것을 지금에서야 이 책을 보고 안 것도 참 부끄러운 일인 듯싶다.

어렸을 때 가장 존경하는 인물하면 의례 대통령을 떠올리고, 슈바이처를 떠올리고 아인슈타인을 떠올렸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가장 과학적이고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쉽고 간단하며, 음성학과 발음에 관한 철저한 실증으로 만들어진 한글의 창제자 세종대왕을 떠올리지 못했다는 것은 국어선생으로서 더욱 고개를 들지 못할 일이다.

이밖에도 이 책에는 한글 로마자 표기법의 변천과정 및 한글반대상소를 올렸던 최만리의 입장 또 최초로 띄어쓰기한 서재필의 독립신문 등에 관련된 이야기도 흥미있는 읽을거리를 제시해주고 있는 듯하다. 2학기 국어시간 좋은 참고자료가 될만한 내용들을 이 책에서 발견한 것은 무엇보다도 큰 수확인 듯 싶다. 다만 지나치게 수필적인 문체와 약간의 상투적인 비유가 독서의 재미를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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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누에의 교훈 | 기본 카테고리 2002-07-04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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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나무 신부님과 누에 성자

고진하
세계사 | 2001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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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은 음식으로 무엇을 만들어내는가를 알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먹은 음식으로 비계와 똥을 만들고 어떤 사람은 건전한 일과 즐거운 유머에 쓰며, 또 어떤 사람은 하느님 곧 진리를 향해 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의 한 구절이다. 세상을 살면서 무엇을 얻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몸으로 받아들여 꺼내놓을지가 더 중요하다는 작가의 인식이 드러난 구절이다.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자연을 돌아보면 우리는 '구멍만 둘인' 누에가 지닌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뽕잎을 먹고 똥을 싸고, 뽕잎을 먹고 똥을 싸다가 어느 날 문득 누에는 먹은 것을 고운 비단실로 토해낸다. 아무리 잡스럽고 사소한 일상일지라도 소중하게 되새김질해서 신성을 부여하는 성인의 모습이 누에의 일생과 겹쳐 보이다니.

[나무신부님과 누에성자]에서 시인 고진하씨는 원주 치악산 일대에 기거하면서 사소하고 잡스러운 일상의 경험을 성실한 누에처럼 고운 비단실로 토해 내고 있다. 그가 가족들과 치악의 벽촌에 머물면서 겪었던 이야기들은 주목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아내와 함께 시장에 나가서 꽃게를 흥정하다가 결국 상인을 못 믿고 생태만 사온 이야기며, 느닷없이 호수를 거닐며 하늘빛을 보고 싶었다는 것이며, 아내가 도둑괭이에게 일부러 음식을 먹여준다는 속삭임이나, 산불로 다 타버린 숲을 거닐며 안타까워하는 말들은 실은 옆집 사람들의 경험담일 수도 있고 성실한 동네 어른의 입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이 경험들을 그냥 배설하지 않고 가지런한 언어로 비단결처럼 아름답게 써나간다. 그것은 그가 겸손하고 좋은 눈과 귀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눈과 좋은 귀는 무엇일까. 시인은 말한다. 모든 존재는 저마다 신이 들려주는 한 마디씩의 말을 간직하고 있다고. 한 마리 풀쐐기라도 충분한 시간을 갖고 들여다보면 따로 설교 준비를 할 필요가 없을 만큼 신성으로 가득 차 있다고. 숲과 물의 사원에서 돌이나 곤충과 교감이 있는 눈과 귀라면 얼마나 좋은 눈과 귀가 아니겠느냐고. 인간중심, 자아중심의 눈과 귀가 자신의 내면만 응시하는 오만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면 자연과 공존하려는 눈과 귀는 사소한 일상도 성스러운 체험으로 승화시키는 누에성자의 겸손을 실천하고 있는 것. 타인을 돌아보지 못하는 눈과 귀가 아니라 다른 사물과 사람에게 몸을 굽혀 듣고 볼 수 있는 누에성자의 눈과 귀. 이 글을 통해 작가는 스스로 누에가 되어 이야기를 엮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누에성자가 되기 위해 자기성찰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꾸미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닦는 데에 있다는 진실을 비유적으로 제시하면서 그 과정 속에는 상처와 아픔이 뒤따르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옻나무의 체액은 온갖 고통 속에서 흘러나오지만 아름다운 광택과 더불어 모든 물건을 썩지 않도록 보존해주는 혜택을 인간에게 주지 않는가. 사랑이란 곧 아픔과 희생을 통해서,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타인을 높이면서 얻어지는 것. 고름이 흘러나오는 문둥병자를 껴안고 한 밤을 지낼 수 있었던 성 프란체스코를 생각해 보자. 얼마나 더 낮은 곳으로 가야만 하는가를...

작가의 소망은 욕망을 버리는 데에 있다. 한없이 상승하고 싶은 욕망, 한없이 소유하려는 욕망, 한없이 집착하려는 욕망에서 벗어나는 순간을 작가는 상상한다. 숲이 다 타버린 산 위에 서서 더 이상 서글픈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 자신의 신념이나 종교를 절대화하고 신비화하지 않는 것(그런 까닭이었을까, 기독교 신자인 그가 불교와 우파니샤드에 이르기까지 깨달음을 얻고자 했던 것은). 추위를 피하기 위해 목불을 태우고 사리를 찾으려 했다던 탁발승의 이야기는 곧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었는지. 입속에는 말이 적게, 마음속에는 일이 적게, 밥통 속에는 밥이 적게, 밤이면 잠이 적게 해야 한다는 금언. 나무나 풀이 되어 한곳에 고요히 붙박여 하냥 평화를 누리고 싶어하는 작가의 바람이 한결 쉽게 이해가 간다.

더워지고 짜증나는 여름. 고진하의 산문집은 솔숲을 상상하게 하며, 일상에서 깨달음을 얻게 하며, 아이들에게 산문의 맛을 느끼게 해 줄 것 같은 기대를 가지게 해서 글을 읽는 내내 즐거움을 선사해주었다. 오랜만에 쉽고 간결한 산문의 맛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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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숙한 환유 | 기본 카테고리 2000-11-2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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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잘익은 사과 외

고재종,나희덕 등저
문학사상 | 2000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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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공부하면서도 그간 현대시의 사정에 대해서는 너무 몰랐었다. 반성의 계기랄까 올해 소월시 문학상 수상집을 구했다. 김혜순의 [잘익은 사과]. 예전에 그녀의 우리들의 음화가 생각난다. 경쾌하게 읽혀지지는 않았지만 복합적인 은유가 매력이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낯선 듯한 느낌은 떨쳐버릴 수가 없었던 게 사실이다. 뭔가 나의 생활하고는 좀 동떨어진 듯한 느낌. 아니면 그간 사실주의 소설의 문법에 익숙해진 나에게 도시적 감수성이 잘 와닿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처음 김혜순 시인이 소월시 문학상을 받았다는 데에는 적잖이 놀라웠다.

소월이라면 새롭고 도시적인 색채라기보다 전통적이고 토속적인 분위기로 우리의 민요적 선율을 활용해 절창을 일구어낸 시인이 아니던가.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랄지. '잔디 잔디 금잔디'랄지. 그런 소월을 기린 문학상에 김혜순이라니. 조금은 낯설은 느낌이었다. 김혜순이라면 차라리 정지용이나 이상 쪽에 가깝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 것이다.

시집을 막상 펼쳐보고 첫 작품 [잘 익은 사과]를 보고 나서는 그녀가 소월시 문학상을 받은 이유가 이해가 갔다. 그녀가 가진 도시적 환유의 문법이 이제는 그야말로 잘 익은 포도주처럼 완숙해져서 목을 꽉 조이던 낯설음의 무게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쩐지 삶에 기대어 있다. 잘 익은 사과 속에는 '백 마리 여치', '자전거 바퀴', '정미소의 나락'처럼 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고스란히 실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고 있다'는 예리한 관찰력을 통해 삶의 마지막 언저리에서 한가롭고 덧없는 세상살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타이타닉 호]를 비롯하여 [어머니 달이 눈동자 만드시는 밤], [플러그가 빠지면] 등에서는 굳이 환유를 쓰지 않고도 현실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시인을 볼 수 있다. 이제 그녀는 한편으로는 '페미니스트'가 되었다가, 한편으로 '비판적 허무주의자'가 되었다가 한편으로는 문학적인 '상징'을 통해 미이라처럼 자신을 한없이 숨기기도 한다. 김혜순 시인은 '상징과 구체성의 적절한 배합'을 통해 현실비판과 현실에 대한 애정을 몇 개의 단어 속에 꾹꾹 눌러 놓았던 것이다. 시를 읽어가면서 한풀씩 돋아나는 그녀의 예리한 관찰력과 문학적 기법에 다시 한 번 감탄해 본다.

소월시 문학상에는 이밖에도 나희덕, 고재종, 고진하, 송재학, 이문재 등 중견 시인들의 작품이 한데 모여 있어 한국 현대시를 조망하는 데 여러 가지 도움이 되었다. 시를 공부하는 나로서는 더 없이 훌륭한 텍스트였었다. 아쉬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사적인 데에 치중하거나 너무나 사소하고 일상적인 평이한 문법은 기대감을 저버리지 않았나 싶다. 더 다양하고 시원스러운 작품들이 보다 젊은 시인으로부터 한없이 분출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인상깊은구절]
잘 익은 사과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 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사람의 마음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을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마을만큼
큰 사고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믈오믈 잘도 잡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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