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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11 : 서남전쟁과 위구르 봉기 - 굽시니스트 글, 그림 | 본격 한중일 세계사 2021-08-22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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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본격 한중일 세계사 11

굽시니스트 저
위즈덤하우스 | 2021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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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족이라는 구시대의 잔재를 청산하려는 일본과 옛 정복지를 다시 제국을 유지하려는 청.

 근대화의 길목에서 '일국'을 건설하기 위한 두 국가의 승부수에 동아시아가 들썩인다!

 - 책 표지 내용 中에서 -


 [본격 한중일 세계사 11]은 일본의 서남전쟁과 중국의 위구르 봉기에 관하여 다루고 있다. 이 사건들은 사실 우리에게 너무나 생소한 그들의 역사이다. 지금까지 교과서(내가 배웠을 당시의 기준)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은 내용이기 때문에 정식 역사로서 접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두 사건은 어떻게 보면 우리와는 별개의 국지적인 그들 내부의 사정이라고 볼 수 있지만, 알게 모르게 현재 동아시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1876년 3월, 일본은 '폐도령(廢刀令)'을 발령한다. 이름 그대로 허리에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다. 이어서 1876년 10월, '질록처분'을 발표하는데 이는 그동안 사족에게 지급되던 녹봉을 채권화한 금록공채로 나눠준다는 것이다.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등장한 이 두 가지의 조치는 사족을 겨냥한 것이었다. 애초 막부를 몰아내고 메이지 유신을 가능케 한 것은 사쓰마와 조슈를 비롯한 각 번의 사족(사무라이)의 봉기로 인한 것이었다. 이들은 그 목표를 달성하였지만, 1871년에 단행된 '폐번치현'과 신분제도 철폐에 의하여 사족이 설 자리와 특권이 대폭 축소되었다. 그러니 수백만에 달하는 사족의 불만은 커져만 갔고 10권에서는 그러한 불만을 달래기 위하여 '정한론'과 같은 대외 정벌이 주장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폐도령'과 '질록처분'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것이었다. '폐도령'은 사족(사무라이)의 상징인 검을 휴대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아예 사족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었고, '질록처분'은 사족의 경제력을 무너뜨리는 조치였기 때문이다. 오랜기간 지배층으로 군림하고 더구나 막부를 몰아내고 현재 정부의 근간을 형성하는 데 공을 세웠다고 생각한 사족들에게는 이러한 정부의 조치에 대한 분노는 증폭되었으며 급기야 곳곳에서 사족의 반란이 터져나오게 된다.

 

 여기에서 생각해 볼 부분은 개혁으로 인하여 소외되거나 특권을 빼앗기게 된 계층의 반응이다. 조선의 지배 계층은 소위 양반으로 불리우는 사대부였으며 일본은 바로 사무라이였다. 1895년 조선 역시 개혁의 일환으로 '단발령'을 실시한다. 상투를 자르라는 지시인데, 이는 일본의 '폐도령'과 같은 의미이다. 조선에서 상투는 유교질서에 대한 부정으로 간주되어 양반의 반발을 야기하였고, 일본은 칼의 휴대를 금지함으로써 사족이 들고 일어서게 된 것이었다. 다만 조선은 두 차례로 시행된 '단발령'이 반란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지배층인 양반 또는 사대부는 칼이 아닌 으로 상징되는 세력이었고 또한 유교적인 질서에서 반란은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단발령'에 분노한 조선의 민중들이 당시 총리대신인 김홍집을 거리에서 몽둥이로 벌집을 만들어 죽이는 과격한 사건도 있었지만, 그 불만이 정부에 대한 반란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불만이 을미의병을 통한 항일 운동의 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이는 '단발령'이 친일 내각에 의하여 추진되었기에 그 배후 세력을 일본으로 보고 그들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폭발한 결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의 반발 세력은 로 상징되는 사족들이었다. 당시 메이지 유신의 내각의 주요 인물들인 기도 다카요시(조슈 출신), 오쿠보 도시미치(사쓰마 출신)도 사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사족들의 반발을 예상하였음에도 그들은 사족의 신분 철폐와 경제적 지원을 끊어버린 것이었다. 조선의 양반과 사대부가 반발은 하되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던 것에 반하여 일본의 사족들은 그들의 상징인 칼을 뽑아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질록처분'이 발표되자마자 구마모토에서는 사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구마모토 진대 사령관과 현령(도지사)을 살해하였고, 정부 역시(정부의 요인들 역시 사족 출신이니) 무력으로 그들을 제압한다. 이러한 반란은 이후 일본 곳곳에서 발생하는데, 조슈와 사쓰마에서 일어난 두 반란 사건은 각각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꽤 상세히 다루게 된다.

 

 먼저 조슈에서 발생한 '하기의 난'마에바라 잇세이가 주동이 된다. 그는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 출신으로서 인의를 중시하는 인물이었고, 참의로서 메이지 정권의 주요 멤버로 자리하게 된다. 그는 일본의 근대화 정책 중 하나인 징병제에 반대하였으며 이 와중에 벌어진 조슈 기병대 해산이 결정되자 기병대는 소요를 일으켰지만, 같은 조슈 출신인 기도 다카요시는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주모자 93명을 모두 처형한다. 평소 인의를 중시하던 마에바라 잇세이는 그러한 기도의 처사에 항의하는 뜻으로 모든 관직을 사직하고 조슈로 귀향한다. 유신의 거물이자 쇼카손주쿠의 대선배였던 마에바라는 조슈의 지역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결국 그는 규슈의 사족 반란에 동참하여 '순국군'을 조직하여 거병하게 된다. 1876년 이들의 거병은 결국 정부군에 의하여 제압되고 12월 3일 마에바라는 사형을 선고받고 결국 참수당하게 된다. 또한 쇼카손주쿠 학생 다수와 요시다 쇼인 가문 사람들이 반란에 연루된 데 책임을 지고 교장이었던 다마키 분노신이 할복하게 된다.

 

 '하기의 난'의 주동자인 마에바라 잇세이가 쇼카손주쿠 출신이었다는 점과 이 사건으로 인한 쇼카손주쿠의 몰락은 현재 일본의 메이지 유신의 산파 역할을 했던 요시다 쇼인과 그가 세운 쇼카손주쿠의 실체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다. 저자 역시 쇼카손주쿠가 작은 동네 서당이며 요시다 쇼인 역시 거기에서 제자들을 가르친 기간도 얼마 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현재 '쇼카손주쿠'가 메이지 유신의 태동에 크게 기여한 것처럼 비춰지지만 사실 마에바라 잇세이 역시 이곳에서 교육을 받은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고, 이곳 출신이라는 유신의 인물들 역시 어떻게 보면 깊은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쇼카손주쿠는 이후 내내 작은 서당과 같은 규모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하기의 난' 이후에는 아예 폐교하게 된다. 하지만 이토와 야마가타로 대변되는 조슈 출신의 권력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미화로 '쇼카손주쿠'를 사적지로 지정하였으며 이후 작은 시골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일본 우익 정치의 본가라는 위상을 견지하게 된다. 현재 이곳은 일본의 야마구치현에 위치하는데, 현대 일본의 우익 정치가들은 이곳을 성역화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일본의 총리였던 아베 신조 역시 바로 이곳 야마구치현 출신이었고, 2015년에 '쇼카손주쿠'를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되면서 더욱 일본 우익의 상징으로 거듭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쇼카손주쿠'를 마치 근대화의 대명사로 긍정적으로 다루는 것에 대해서는 좀 더 분별력을 갖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하기의 난'도 사족의 반란 중 제법 규모가 있었지만, 이 책의 부제인 '서남전쟁'은 사쓰마에서 일어난 사족의 반란이다. 이름에서 이미 '난(亂)'이 아닌 '전쟁'을 쓰고 있는 것에서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사쓰마 지역이 사이고 다카모리를 주축으로 사족들이 굳건히 단결하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1873년 10월, 정한론파는 결국 내각에서 축출되며 사이고 다카모리 역시 고향인 사쓰마로 귀향하게 된다. 사이고의 영향력 때문인지 그가 낙향하자 600여 명의 사쓰마 출신 정부 관리와 장교 역시 사직하고 그를 따랐으며, 근위대 사령관과 근위대의 절반 병력 역시 함께 사직하게 된다. 가고시마로 귀향한 사이고는 사쓰마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사쓰마에서 영향력을 확대한다. 같은 사쓰마 출신인 오쿠보 도시미치는 조슈와 타협하여 사족을 압박한다고 평가를 받는 것에 반하여 사이고는 진정한 애국자로 평가 받았기 때문이다. 사이고 일파는 사쓰마 곳곳에 사학을 설립하여 세력을 확대하였으며 정부에서 파견된 가고시마 현령마저 사이고에 동조하게 된다. 점점 세력을 규합하던 사이고는 사족들의 마지막 희망으로 자리하게 된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는 이러한 사이고 다카모리를 영웅처럼 묘사하고 있는데, 적어도 당시 사쓰마와 사족들에게는 그렇게 비춰졌을 것이다.(반대로 같은 사쓰마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오쿠보 도시미치는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1877년 2월 사이고는 거병을 하며 '서남전쟁'이 시작된다. 이들의 병력은 무려 1만 2천이었으니 그동안 발발한 사족의 반란과는 그 결이 달랐다. 이들은 가고시마에서 출병하여 구마모토를 점령하고 후쿠오카를 공략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적극적인 공세로 임하게 된다. 하지만 구마모토는 끝내 사이고에게 점령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하여 사이고는 배후에 구마모토를 두고 후쿠오카에서 내려온 정부군과 결전을 벌이게 된다. 꽤 대등하게 싸웠지만, 결국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에 재정비를 마친 정부군에게 사쓰마군은 그대로 밀려나고 1877년 9월 사이고 다카모리는 할복하게 되고 그를 지지하던 많은 사족들이 전사 또는 자결로 그의 뒤를 따르면서 결국 1877년 9월 24일 '서남전쟁'은 종료된다. 이로써 사족들의 반란은 잦아들면서 일본은 좀 더 본격적으로 근대화에 몰두하게 된다. (물론 전쟁이 끝난 이후 1878년 내무경이었던 오쿠보 도시미치나 가가번의 사족들에게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였으니 사족들의 반란의 완벽한 종식은 좀 더 시간이 걸린 셈이다.) 

 

 '서남전쟁'으로 대변되는 사족들의 반란은 개혁이라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일본은 지배층이 사족이었고, 메이지 유신이라는 개혁을 이룬 것도 사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배제하는 과정에서 치열한 내분이 일어났으니 개혁은 어느 정도 희생을 감수해야 가능함을 잘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폐지하고 몇몇 혁신적인 정책을 추진하였지만, 그것은 진정한 개혁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세도정치 세력과 일정 부분 연대하면서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는 데 급급하였고, 그로 인하여 조선의 체제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꼭 피를 불러야만 개혁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지만 기득권층과 타협하면서 기존의 테두리 안에서 작은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결코 개혁이 아니다. 혁신과 개혁을 내세우면서 기존 정권을 비판하고 새롭게 정권을 장악하지만 별반 나아지지 않는 현재 우리의 역사를 보면 개혁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볼 픽요가 있다. 그러고보면 과거에서 현재까지 우리의 역사에서 과연 '성공한 개혁'이라 불리울만한 것이 있었던가?

 

 현재 '신장 위구르 자치구'라 불리우는 지역은 청나라 말기 혼란한 상황이었다. 청의 지배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수의 이슬람 민족과 세력들에 의하여 분할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청나라의 좌종당은 이홍장과 '해방새방(海防塞防) 논쟁'을 벌이면서 이 지역에 대한 청나라의 지배권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좌종당은 신강지역을 수복하여 육로로 유입되는 열강의 세력, 특히 러시아의 진출을 막아야 한다는 '새방(塞防)'을 주장하였고, 이홍장은 과거 열강이 강력한 함대로 중국에 진출하였으며 떠오르는 강국인 일본을 막기 위해서라도 해군을 증강해야 한다는 '해방(海防)'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결국 좌종당의 의견이 받아들여지면서 좌종당은 막대한 지원을 통하여 재무장을 할 수 있었으며, 반대로 이홍장은 해군 증강에 차질을 빚게 된다. 아닌게 아니라 이홍장의 입장에서 좌종당에 지원되는 자금이라면 당시 일본 해군의 3배에 해당되는 함선을 확보할 수 있었기에 그의 아쉬움은 클 수밖에 없었고, 이는 훗날 청일전쟁에서 청나라의 북양함대가 일본에게 뼈아픈 패배를 당하는 결과로 나오게 된다. 

 

 어쨌든 좌종당은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1875년부터 1876년까지 신강 원정 준비에만 몰두하게 된다. 당시 신강은 야쿱 벡이라는 인물이 이슬람 세력을 규합하여 정권을 수립한 상태였는데, 그는 국제적인 감각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권모술수로 신간 지역의 이슬람 세력을 차례로 정복한 상황에서 그는 러시아와 영국, 심지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정권을 인정받는 수완을 발휘하였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이 책에서는 러시아와 영국의 '그레이트 게임'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당시의 역사를 보다 폭넓게 살펴볼 수 있게 해주고 있다. 1885년부터 1887년까지 영국은 조선의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였다. 당시 이 사건은 조선과 영국의 무력 분쟁으로 치닫지 않았고, 점령이라기 보다는 불법 주둔의 형태였으며 당시 영국은 의외로(?) 거문도 주민들에게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였고 의료 혜택도 제공하였으니 섬 주민과 영국 해군 사이에 원만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사실 영국이 거문도를 점유한 이유는 그 타겟이 조선이 아니라 러시아였기 때문이다. 즉, 러시아가 한반도로 진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아예 거문도를 점령하여 경고하고자 하였던 것이었다. 이처럼 19~20세기 초에 영국과 러시아는 전세계 곳곳에서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는데, 중앙아시아의 내륙 지배권을 놓고 다툰 것을 '그레이트 게임'이라 부른다. 

 

 영국은 러시아가 점점 중앙아시아로 진출하는 것을 경계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영국의 주요 식민지였던 인도를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를 통하여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분석 때문이었다. 반대로 러시아 역시 인도에서 영국이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로 접근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 지역에서 두 국가의 세력 다툼은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아프간이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았던 것도 이들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기 때문이었는데, 야쿱 벡의 신강 역시 그러한 위치에 있었다. 영국령 인도에서 신강을 차지하자니 파미르 고원과 카라코람산맥 등 험난한 자연 지형 때문에 공격이 쉽지 않았고, 러시아 역시 청나라와 영국의 눈치 때문에 신강을 간단히 차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야쿱 벡은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영국과 러시아에 등거리 외교를 제안하여 정권을 인정받았으며, 또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정권을 인정 받으면서 내부의 이슬람 세력 역시 단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청나라의 좌종당은 야쿱 벡의 정권을 인정할 수 없었다. 원래 그곳은 청나라의 지배를 받던 지역이었으며,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이홍장과 논쟁까지 벌이면서 추진한 원정이었기에 그로서는 꼭 신강 지역을 차지해야 했다. 

 

 야쿱 벡은 청의 좌종당에 맞서 싸우면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청나라 정부에 화친을 요청한다. 즉, 청의 한 지방으로 복속하겠다는 것이었다. 청나라 역시 그러한 요청에 대하여 호의적이었지만, 좌종당은 중간에서 이러한 시도를 차단하며 무력으로 진압하게 된다. 효율이라는 측면에서 따진다면 야쿱 벡의 제안을 수용하는 것이 최선이었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좌종당은 개인적인 야심 때문에 결국 무력으로 신강을 수복하게 된 것이다. 좌종당의 이러한 정벌은 신강 지역을 수복하면서 동시에 위구르 세력을 복속시켰지만, 문제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는 점이다. 애초 야쿱 벡 정권을 인정해 주었다면 러시아와 영국이 그 지역을 공략하지 않기로 한 이상 그곳으로 러시아가 청나라로 진출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비용을 이홍장의 주장대로 해군에 투자했다면 청일전쟁에서 북양함대가 그리 간단히 전멸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 청일전쟁 당시 북양함대에는 '정원호'와 '진원호'라는 거함이 있었고, 일본은 끝내 이들 전함을 격침시킬 수 없었다. 하지만 청나라는 예산 문제로 인하여 이들 두 거함에 재대로 된 탄약조차 탑재하지 못하여 해전에서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좌종당의 선택이 오히려 중국의 입장에서는 유리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이 지역에 매장된 엄청난 양의 자원은 현재 중국이 이곳의 이슬람 세력에 대한 강력한 탄압이 이루어질 정도로 눈독을 들일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추진하는 '일대일로' 사업에 있어서 꼭 필요한 지역이며 최근 미군이 철수한 아프간과도 맞닿아 있는 곳이니 좌종당이 이런 점까지 감안하였다면 혜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로 인한 여파로 인하여 이후 중국이 일본과 치룬 전쟁에서 무수한 희생을 감내해야 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여전히 논란의 여지는 있는 셈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일본의 '서남전쟁'과 중국의 '위구르 봉기'는 그 시대는 물론 현재의 시점에서 살펴보아도 많은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낯선 역사이기에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본격 한중일 세계사] 시리즈 특유의 만화로 이해하기 쉽게 다루면서 동시에 저자의 예리한 해석이 곁들어져 있기 때문에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그동안 우리가 배우거나 접하는 역사에서는 쉽게 살펴볼 수 없는 주제이기 때문에 이 주제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은 분명 유요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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