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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수집_ 독서노트(에 다 담지 못한 문장)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 문장수집_ 독서노트(에 다 담지 못한 문장) 2022-11-24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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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메리 앤 섀퍼,애니 배로스 공저/신선해 역
이덴슬리벨(EAT&SLEEPWELL) | 2018년 07월

 

 

저에 대해 알고 싶다고 하셔서 서포크의 베리세인트에드먼즈 근처 세인트힐다 사이먼 심플리스 목사님께 추천서를 부탁해두었습니다. 제가 꼬마일 때부터 알던 분이고 절 좋아하세요. 레이디 벨라 톤턴에게도 추천서를 부탁했어요. 독일군 대공습 때 소방 감시원으로 같이 일한 동료인데, 진심으로 저를 싫어하죠. 이 두 분이 하는 말을 종합해보면 제가 어떤 사람인지 객관적인 그림을 그리실 수 있을 거에요.

제가 쓴 앤 브론테 전기를 함께 보냅니다. 제가 다른 종류의 글도 쓸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어서요. 그리 잘 팔리진 않은 책입니다. 사실 전혀 안 팔렸죠. 그래도 저는 <<이지 비커스태프, 전장에 가다>>보다 이 책이 훨씬 자랑스러워요.

제 의도에 확신을 심어드리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주저 말고 말씀해주세요.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64쪽, 줄리엣이 아멜리아에게)

 


 

줄리엣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의 눈이 참새를 지키시네'라는 가사를 쓰지 말았어야 해요. 그게 무슨 소용이에요? 그래서 하느님은 새가 떨어져 죽는걸 막아주셨나요? 그냥 '아이쿠!'하고 놀라시고는 끝 아니에요? 가사를 보면 하느님은 참새를 보러 가고 없잖아요, 정작 사람들은 하느님을 찾고 있는데."

이 문제에선 저도 줄리엣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진작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요? 그 후 성가대는 '그의 눈이 참새를 지키시네'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줄리엣의 부모는 그녀가 열두 살때 돌아가셨습니다.

(74쪽, 사이먼 심플리스 목사가 아멜리아에게)

 


 

우리 문학회 이름에 '감자껍질파이'가 들어간 건 윌 시스비 때문이에요. 그는 먹을게 없는 모임에는 결코 가지 않아요. 독일군이 오라고 해도 거절할걸요! 그래서 우리 모임에 다과가 추가 되었지요. 당시 건지섬에는 버터와 밀가루가 부족하고 설탕은 아예 없었기 때문에 윌이 감자껍질파이를 만들었어요.

(82쪽, 아멜리아가 줄리엣에게 )

 


 

어쨋든 책이 제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고 싶어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아까도 밝혔듯이 저에게 책은 단 한권입니다. 세네카 말입니다. 그를 아십니까? 가상의 친구들에게 편지를 써서 여생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를 설파한 로마 시대의 철학자입니다. 역시 지루할 것 같지요? 하지만 그의 편지는 결코 지루하지 않습니다. 재기 발랄하지요. 글을 읽으며 웃을 수 있다면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139쪽, 존 부커가 줄리엣에게)

저는 문학회 모임을 무척 아낍니다. 점령기 시절을 견딜 힘을 그곳에서 얻었으니까요. 모임에서 안 몇몇 책도 괜찮은것 같았지만 저는 늘 세네카에게만 충실했습니다. 마치 그가 저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어요. 특유의 재치있고 신랄한 말투로요. 오직 저에게만 말하는 듯했지요. 세네카의 편지들 덕에 저는 훗날 겪어야 한 모든 일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요즘도 문학회 모임은 빠지지 않고 나갑니다. 모두 세네카라면 진저리를 치고 저더러 제발 다른 걸 읽으라고 애원하지만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저는 아마추어 극단에서 연기도 합니다. 토비어스 경 행세를 하면서 연기의 맛을 알았지요. (...) 전쟁이 끝나서 정말 행복합니다. 이제 저는 다시 존 부커로 돌아왔습니다. 

(144쪽, 존 부커가 줄리엣에게)

 


 

"그 사람은 어떻게 생겼죠?"

그 모습을 속으로 그려보고 싶어서 물어보긴 했지만 대답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어요. 남자들은 다른 남자를 묘사하는데 영 꽝이잖아요. 하지만 도시는 달랐어요.

"당신이 상상하는 독일인과 비슷할 거예요. 키가 크고 금발이고 눈동자는 푸른색인. 다만 그는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었지요."

(256쪽, 줄리엣이 시드니에게)

 

 


 

엘리자베스는 소년을 간호했어. 약을 구할 순 없었지만 대신 암시장에서 국거리용 뼈와 진짜 빵을 구해 왔어. 나에겐 달걀이 있었고. 매일매일 조금씩, 그 애는 기력을 회복했어. 잠을 많이 자더군. 가끔 엘리자베스가 밤에, 하지만 통금시간 전에 찾아왔어. 누그든 그녀가 우리 집에 너무 자주 들른다는 걸 눈치 채면 안되니까. 아무리 이웃이라도 밀고할 일이 있으면 밀고하던 시절이었어. 왜 있잖나, 독일군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아니면 먹을 것이라도 얻을까 싶어서.

그렇게 조심했는데도 누군가가 눈치를 챘고, 밀고도 했지. 누군지는 몰라.

(...) 우리는 재판도 없이 바로 다음 날 생말로로 향하는 배에 올라타야했어. 거기서 마지막으로 엘리자베스를 봤어. 간수 한명이 그녀를 끌고 배에 태우더라고. 엘리자베스는 몹시 추워 보였어.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보이지 않았어. 어디로 보내졌는지도 알 수 없었지.

(332-333쪽, 줄리엣이 시드니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어요. 그저 속으로만 엘리자베스가 몇 주만 더 버텼더라면 이곳으로 돌아와 킷을 만날 수 있었을 텐데, 라고 생각했죠. 어째서, 도대체 어째서, 전쟁의 종말이 그토록 가까이 있었는데 왜 그때 감시관에게 덤볐을까요?

레미는 바다가 파도를 들이마시고 내쉬는 걸 바라보았어요. 그리고 말했어요.

"그런 용기가 없는 편이 엘리자베스에겐 더 나았을 텐데."

그래요, 하지만 우리 모두에겐 더 나쁜 일이었겠죠.

그때 파도가 밀려왔어요. 환호와 비명, 그리고 모래성은 사라졌어요.

(339쪽, 줄리엣이 시드니에게)

 


 

놀랐어요? 아마 아니겠죠. 하지만 나는 놀랐어요. 요즘은 끊임없는 놀라움의 연속이에요. 약혼한 지 딱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내 삶 전체가 그 스물네 시간 안에 녹아든 것 같아요. 생각해봐요! 우리는 서로를 원하면서도 '영원히' 서로 눈치 채지 못한 척 세월만 흘려보냈을지도 모르잖아요. 체면에 대한 강박증에 사로잡혀 있다가는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다고요.

(426쪽, 줄리엣이 시드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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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순간 흔들려도 매일 우아하게] | 문장수집_ 독서노트(에 다 담지 못한 문장) 2021-10-04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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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4. 월

 

매 순간 흔들려도 매일 우아하게

곽아람 저/우지현 그림
이봄 | 2021년 06월

 

도서관에서 대출한지 3주째, 내일 반납일이다. 9월달에 빌려와도 다른 책들 땜에 급하게 읽었다. 좀더 머무르고 싶은 문장들이 많은데, 내일 떠나보내야 한다.

아쉬운 마음에 플래그 표시해둔 몇 군데 문장만 옮겨본다.

 

 

 


 

왕녀의 품격, 소공녀세라

 

자아의 일부분이 된 소공녀를 한 해를 거의 마무리하는 시점, 고요하고 거룩한 성탄 전야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으며 다시 읽어보았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원서와 대조해가며 읽는데 눈물이 툭, 떨어졌다.

다이아몬드 광산 개발에 성공한 아버지 친구를 만나 부를 되찾은 세라에게 민친 선생이 "이젠 넌 다시 공주가 된 기분이겠구나"라고 빈정대자 세라는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저는 다른 어떤 것이 되지 않으려고 애썼을 뿐이에요. 가장 춥고 배고플 때조차 다른게 되지 않으려고 애썼다고요."

(32쪽)

 


 

우아함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빙점』 요코

 

힘껏 살아보려 애써보지만 내 마음에도 역시나 빙점이 있다. 질투와 원망과 미움과 욕망으로 놀랄 만큼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의 어떤 지점들. 나이가 들수록, 자신감이 없어질수록 더 빈번하게 생기는 마음의 매듭, 얼어붙은 마음이 일그러지는 상태가 괴롭기 때문에, 그 얼음을 녹이는 걸 평생의 과제로 생각한다.

빙점의 결말이 궁금한 독자들을 위해 덧붙이자면, 요코는 사실 살인범의 딸이 아니다. 소설은 오래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요코가 주삿바늘에 얼굴을 찡그리며 깨어날 것을 암시하며 이런 문장으로 끝맺는다.

유리창이 덜거덕거렸다. 알고 보니 숲이 바람에 윙윙거리고 있었다. 또 눈보라가 칠 모양이었다.

(46쪽)

 


 

내 독립성의 원천, 『유리가면』 마야

 

기자 생활 5년 차였던 스물아홉 살 가을, 회사 블로그에 쓴 글이 인기가 있어 출판사에서 책을 쓰자는 제안이 왔을 때 그래서 좋았다. 내 힘으로 일궈낸 세계여서다. 12년 차 직장인이었던 서른여섯 살 봄, 서울에 내 집을 장만했을 때도 좋았다. 고달픈 서울살이 끝에 내 힘으로 절어 저축해 마련한 자산이었으니까. 누군가는 자수성가하는 것보다 부모에게 물려받는 것이 많은 편이 낫다 하겠지만 나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정정당당하게, 노력을 기울여, 차근차근 하나씩 자기 힘으로 일궈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자존감과 자신감은 제 손에서 나온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독립적인 여자가 되겠다고 결심했던 건 팔 할이 유리가면 덕이다. 

(76쪽)

 


 

영혼의 단짝, 빨강머리 앤

 

내가 수업을 등한시하면서까지 편지 쓰기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것 같다. 어쨌든 나는 계속해서 편지를 썼다. 고등학교 때도, 재수할 때도, 대학에 가서도. 그녀가 들어주길 바란 이야기였지만 어떤 면에서는 나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했다. 내가 글쓰기를 좋아하고, 그 행위를 통해 치유받는다는 걸 처음 깨달은 건 아마도 그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

"우린 빨강 머리 앤 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은 거 같아. 앤이랑 다이애너가 손잡고 맹새하는 그 장면 있잖아. '영혼의 친구'가 되겠다며."

"야. 내가 너한테 그렇게 많은 편지를 쓴 것도 다  빨강 머리 앤 때문이잖아. 난 너를 '영혼의 단짝'이라고 생각했거든."

"앗, 그런 거였어?"

"설마 모랐던 거야?"

우리는 소리 높여 함께 웃었다.

 

이제껏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는데라는 책을 읽었다. 출판 담당 기자에게 매주 쏟아지는 수십 권의 신간 중 굳이 그 책을 집어 든 것은 제목에 끌려서였다. (...) 책은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며 안심시키다. 더이상 '호구'노릇 하지 말고 죄책감 가질 필요 없이 친구 관계를 재정립하라는 조언이 주된 내용이다.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이 책 내용중 사람들이 가장 공감하는게 뭔가요?"하고 물어봤다. '빨강 머리 앤과 다이애너는 없다'라는 챕터라는 답이 돌아왔다. '모태 친구에 대한 환상'이라는 부가 설명이 붙은 이 챕터에서 저자는 말한다.

오래 만나왔다고 해서, 많은 것을 공유해왔다고 해서 모두 친구인건 아니다. 진짜 관계인 것도 아니다.(...) 빨강 머리 앤과 다이애너와 같은 운명의 친구, 영원히 함께 하는 단짝이란 존재가 현실에 항상 존재하는 건 아니다. 친구 또한 내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존재일 뿐이다.

(이제껏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성유미 지음, 인플루엔셜, 2019, 133-134쪽)

 (98-100쪽)

 


 

공적인 나와 사적인 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혜린

 

서른두 살에 생을 버린 여자의 글을 마흔두 살의 첫 일요일에 읽으면서 미국 융 심리학 전문가 제임스 홀리스의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의 몇몇 구절을 떠올렸다.

흔히들 '중년의 위기'라고 하는 이 시기를 나는 '중간항로'라 부르고 싶다. 이 시기에 우리는 삶을 재평가하고, 때로는 무섭지만 언제나 해방감을 주는 한 가지 질문 앞에 설 기회를 갖는다.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과 맡아온 역할들을 빼고 나면, 나는 대체 누구인가?

(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 제임스 홀리스 지음, 김현철 옮김, 더퀘스트, 2018, 8쪽)

40대에 접어든 사람들이 겪는 심리적 위기감에 대해 홀리스가 융의 견해를 빌려 정리한 것을 요약하자면, 한마디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던 페르소나, 즉 공적 자아의 유통기한이 다했다는 이야기다. 인생이란 딸로서의 나, 학생으로서의 나, 직장인으로서의 나 등 수많은 공적 자아르 ㄹ구축해가는 과정인데, 태어난 지 40년쯤 되면 이미 충분히 개성을 억누르고 있는 상태라 분노를 포함해 지금까지 억제하며 살았던 감정이 소위 '중간항로'를 거치는 동안 끊임없이 폭발한다는 것이다.

(141-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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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로하는 그림] | 문장수집_ 독서노트(에 다 담지 못한 문장) 2021-09-27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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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7.월

 

[나를 위로하는 그림] 속 문장

문장수집을 위한 카테고리를 만들어 놓은건데..

옮기다 보니 문장이 아니라 문단이네요.

글 하나하나가 너무나 좋았던 그래서 읽고 또 읽어도, 읽을때마다 내 맘을 살살 건드려 주는 작가의 글이 너무 좋다.

 

리뷰에 담지 못하고 독서노트에도 다 옮겨적을 수 없어서... 내가 보려고 옮긴거니까..

욕하지 마세욥~!!!

 

나를 위로하는 그림

우지현 저
책이있는풍경 | 2015년 04월

 

 


 

슬픔을 세탁하다.

 

웃을 수 없는 날의 연속이다. 그렇다고 눈물도 나지 않으니 그저 아플뿐이다. 사람의 슬픔이란 깊고도 혼곤하여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슬픔의 흕거을 지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도 잘 지워지지 않는다. 그럴 때 내가 습관적으로 하는 것이 빨래다. 슬픔을 털어내는 행위로 빨래만한 게 없는 것 같다. 마구 뒤엉켜 있는 빨래더미에서 옷을 하나씩 솎아내 종류별로 분리하듯 내 안에 복잡한 갑정들을 유심히 살피며 슬픔의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하려 애써본다. (...) 몇 차례 깨끗이 헹구고 물기를 꽉 짜내 탁탁 털어낸 후 빨래를 하나씩 널다 보면 삽상한 감정이 느껴진다. 따스한 햇볕에 빨래가 말라가듯 내 안의 슬픔도 이내 마르기를 바라본다.(33쪽)

그녀에게 빨래는 냉혹한 현실에 치여 지치고 닳아버린 마음을 환기시키고 정화하는 매개체다. 답답하고 옥죄는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옥상에서 빨래를 널며 오랫동안 뒤집어 쓰고 있던 일상의 매캐한 먼지들을 탈탈 털어버린다. 조금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이 우울한 기분을 날려주고, 마음과 몸에 달라붙어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삶의 고단함과 마음속 슬픔들을 쉬이 날려버린다.

(38쪽)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

 

마음이 에스프레소 맛이다.

그런 날이 있다. 농축된 쓴맛이 입안에 계속 맴도는 날. 느닷없이 찾아오는 불안에는 항상 속수무책이다. 알 수 없는 마음이 괴롭힐 때마다 찾는 것은 언제나 커피다. 커피는 우리가 더 이상 고립되거나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책이다.(...) 커피가 사람에게 힘이 되고 위안이 되는 존재임은 분명한 것 같다.(47쪽)

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 불안한 마음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그윽한 커피 향이 고요가 되어 혀끝에 닿는다. 기분 좋은 쓴맛이 나면서도 상큼한 신맛이 받쳐주고 여기에 단맛의 여운까지 감도니 마음이 평온해진다. 마음에서 들리는 평화로운 소리를 들으며 느긋함을 즐기는 이 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다.

향긋한 커피 향에 취해 있던 그때, 느닷없이 창밖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커피는 어떤 날씨, 어떤 공기, 어떤 마음과도 잘 어울리지만 비 오는 날에는 거의 필수적으로 간절하게 커피 생각이 난다. 커피 한잔의 따스한 기운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커피향이 그윽하게 다가오는 비 오는 날이면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빈센초 이로리(1860-1949)의 <창가에서>이다. 이탈리아 화가 빈센초 이로리가 비 오는 날에 커피 마시는 여인을 그린 것으로, 고요하면서도 생기 넘치는 분위기가 느껴지는 작품이다.(48쪽)

 


 


 

책이 주는 달콤한 평온

 

그렇게 미친듯이 책에 빠져 지냈던 이유는 아마 세상에 대한 답을 책속에서 구하려 했던 것 같다. 너무나도 복잡한 시간이었기에 조용히 보내는 시간이 필요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생각의 양은 줄이고 생각의 질은 높이는 과정이었다.(76쪽)

 


 

소파에 앉아 밤새 책을 읽다 보니 어느새 새벽이 되었다. 하얀 커튼 사이로 스며든 코발트블루 색이 그윽하게 빛나고, 세상이 온통 푸른 빛깔로 물들어 있다. 턱을 괴고 오롯이 책에 집중한 여인이 독서의 심연으로 빠져들고, 은은한 등불이 방 안의 온기를 가득 메운다. 살짝 고개를 숙이고 책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는 여인의 눈빛이 진중하고 진지하다. 어떤 페이지는 가볍게 넘어가고 또 어떤 페이지는 아주 오랫동안 시선이 머문다.(77쪽)

 


 

푸른 베일로 마음을 덮다

 

"너무 착하게 살지 마. 착하게 사는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아."

상처로 뒤엉킨 슬픈 얼굴로 그녀가 말했다. 채 벌리지 못한 입술로 나지막하게 읊조리던 목소리, 그것은 서글픈 확신이었다.

(...)

쇼펜하우어도 말하지 않았던가. 떨어져 있을 때의 추위와 붙으면 가시에 찔리는 아픔 사이를 반복하다가 결국 우리는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고, 인간은 상처로 연결되어 있고 세상은 상처로 얼룩져 있다. (89-90쪽)

 


 

 

베일 쓴 여인을 통해 얼굴 이면에 감춰진 내면의 상처를 담담하게 표현한 타벨의 이 그림은 상처받은 이들에게 바치는 우아한 헌사 같다.

이 그림을 보고 '상처'라는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여인의 눈빛은 분명 상처였다. 그녀의 표정은 상흔으로 가득했고, 그녀의 몸은 흉터투성이처럼 보였다. 누군가 내게 어찌하여 거렇게 확신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녀가 나이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명석한 감정보다 분명한 의미는 없으니 말이다.

(92쪽)

 


 

좌절과 소나기는 곧 그칠 것이다

 

세상이라는 영겁의 정글에서 나의 목적은 생존이었다. 살아남는 일에 매진했고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러나 좌절은 실타래처럼 이어졌고 고질적인 불안이 자꾸 고개를 들었다. 절망으로 주저앉을 것 같은 날들이 반복되었고 삶이 이대로 끝날 것만 같았다. 깊은 절망은 결국 모든 것을 체념하게 했고, 절망이 켜켜이 쌓인 그곳에는 나를 지배하던 무기력만이 짙게 배어 있었다.

세상에 다치고 거듭 절만한 탓에 여기에 왔다. 영문도 모르고 겪어야 했던 숱한 좌절들이 나를 이곳으로 오게 했다. 여행을 통해 무엇을 얻을지는 모르겠지만, 무엇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알 수 있을 것 같다.(165쪽)

 


 

변화가 많은 시간이었다. 갑작스런 소나기는 지속되는 장마보다 견디기 힘들었다. 온몸이 함씬함씬 젖어 마음이 축축 늘어졌다. 좌절은 끝이 없었고 희망은 부질없었다. 그러나 자연 앞에서 좌절은 모두 덧없이 사라지고 진정으로 중요한 것만 남았다.

(...)

그 자체로 매순간 완성이지만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을 자연, 자연이 들려주는 좌절 속 희망이 거기에 있었다.

우리의 삶은 좌절을 이겨내려는 미숙한 희망으로 허덕인다. 세상을 산다는 것은 늘 이렇게 즐겁고 또 버거운 일이다. 알고 있었지만 외면했던 사실 하나, 좌절과 소나기는 곧 그칠 것이다.(170-171쪽)

 


 

갑자기 피는 꽃은 없다

 

어떤 추억은 향기로 기억된다. 깊은 곳에 잠재된 기억을 떠올려 완벽한 추억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향기는 때로 사진으로 돌아보는 기억보다 생생하다.

(...)

약간은 비릿하면서도 청량함이 느껴지는 이른 새벽의 비 내음은 낯선 여행지에서의 추억의 장소로 우리를 이끈다. 향기로 인해 불러일으켜지는 기억의 조각들이다.(222쪽)

 


 

드레이퍼의 그림에는 드레이퍼만의 향기가 있다. 누구도 흉내 내거나 따라 할 수 없는 고유한 향기가 난다.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아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여전히 향기로움을 간직하고 있는 그의 그림은 평소 스쳐 보내거나 보고도 이름을 알 수 없던 야생화 같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추운 땅 속에서 헤매고 견디며 자란 싹에 매일 물을 주고 거름을 갈고 햇볕을 쐐주어야 꽃이 피어날 수 있듯이. 드레이퍼의 끝없는 열의와 고립스러운 노력이 있었기에 그의 그림이 뒤늦게 꽃필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갑자기 피는 꽃은 없다. 다만 갑자기 그 꽃을 발견할 뿐이다. 간절함으로 마침내 희망을 꽃피운 드레이퍼의 열정과 끈기에 가슴 뻐근한 감동이 전해진다.

(227-228쪽)

 


 

너를 막으려 나를 가두다

 

여러 시련을 간신히 견뎌낸 어느 날, 해방은 우연히 찾아왔다.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젖히고 조심스레 베란다 창문을 열어 보니, 이름 모를 들꽃이 피어 있었다. 따스한 햇살 때문인지 노란 꽃이 더 화사하게 빛났다. 이리저리 한참을 구경하다가, 조용히 내 방에 가서 탁상달력을 넘겨 5월에 맞추었다. 봄이었다. 나는 비로소 은신하기를 그치고 동굴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때를 떨올리면 아서 해커의 <갇혀버린 봄>이 생각난다.

(250쪽)

 


여인의 몸은 그늘에 숨어 있지만 그 시선은 빛을 향해 있다. 지독하게 어두운 자신만의 공간에 갇힌 채 한 발도 나갈 수 없는 스스로의 처치를 비관하면서도, 제발 나를 이곳에서 꺼내달라고 누군가에게 간절히 외치는 듯 하다. 금방이라도 찬란한 태양 속으로 뛰어들고 싶지만 도저히 나갈 수가 없다. 멈춘 시간과 함께 그녀의 마음도 갇혀버렸다.

언제쯤 그녀의 마음에도 봄이 찾아올까. 그녀의 눈빛에 삶에 대한 열망이 남아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이기심인지도 모르겠다.

(252쪽)

 


 

흔들리는 것의 아름다움

 

어느새 여름의 푸름은 사라지고 숙고하고 반추하는 계절, 가을이 왔다.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바람에 밀려오고 낙엽 떨어지는 소리가 바람에 흩어진다. 흔들리는 것은 왜 이토록 아름다울까. 나무가 그렇고 청춘이 그렇다. 지는 것은 왜 이토록 슬플까. 잎이 그렇게 생이 그렇다. 결국 흔들리고 지는 것 모두 삶이었음을 깨닫는다. 이맘때쯤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바람 부는 날 나무 아래에 앉아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있으면 죽음이 연상된다는 말을 자주 했다.(281쪽)

괜찮으니 걱정 말라며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에서 어떤 결락감 같은 게 느껴졌다. 차마 감쳐지지 않는 그림자랄까. 슬프도록 밝던 그를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왠지 편하지만은 않았따. 아리고 미안했다. 그리고 다음날, 그가 죽었다.(283쪽)

 


 

바람 앞에 가차 없이 흔들리며 쓰러질 듯 위태로운 사이프러스 나무는 갖은 풍파에 시달리는 인간의 삶과 매우 닮았다. 그러나 흔들리기만 할 뿐 결코 부러지지 않는 모습에서 힘든 고난을 버티며 살아가는 우리의 또다른 모습을 발견한다.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고흐가 열과 성을 다해 그린 사이프러스 나무는 그의 캔버스에서 쉼 없이 흔들리며 살아 꿈틀거린다. 흔들리기에 삶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진지하고 조용하게 말을 건넨다.

기어이 흔들리며 살아야 하는 것, 그래서 생은 기적이고 감동이며 슬픔이다.

(286-287쪽)

 


 

에필로그

갸날픈 희망의 끈일지라도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화가 조지 프레더릭 워츠(1817-1904)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그려냈다. 그가 이 그림을 그린 19세기 말에는 세기말적인 비관주의가 성행하고있었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도시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지면서 인권유린이 대두되기 시작했고, 여러 가지 사건 사고들이 발생하며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알 수 없는 불안감, 그리고 삶의 허망함에 물들어 갔따. 또 화가 개인으로서도 자신의 딸이 사망하는 비극적인 일을 겪으면서 아픔의 시간을 보냈다.

(...)

그는 "이 그림에서 희망은 남아 있는 한 줄의 현을 통해 흘러나올 수 있는 음악을 암시한다."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고 한 가닥 남은 희망에도 끝까지 살아가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보았다. 그의 이런 생각은 당시 여자 친구 퍼시 윈드햄에게 보낸 편지에도 드러난다.

"나는 두 눈이 가린 채 지구 위에 앉아, 모든 현이 끊어지고 하나의 현만이 남아 있는 수금으로, 가능한 한 많은 소리를 내도록 노력하고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그런 희망의 그림을 그리는 화가다."

(290-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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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구트 꿈 백화점 2] | 문장수집_ 독서노트(에 다 담지 못한 문장) 2021-09-27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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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7. 월

 

 

달러구트 꿈 백화점 2

이미예 저
팩토리나인 | 2021년 07월

 

[달러구트 꿈 백화점 2] 문장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책을 아직 읽지 않으셨거나 읽으실 예정인 분들은 본 포스트는 읽지 마셔요.

 

 


 

하지만 그날따라 예전의 그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시력만 뺏긴게 아니라 자신다움도 함께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그를 집어삼키고 말았다. 더불어 그간 늘 친절하고 상냥하다고 생각했던 동네 사람들의 '젊은 사람이 딱해서 어떡하냐.' 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다시 머릿속에서 재생되면서 부지불식간에 심사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내가 딱하다는 건 나 자신이 가장 많이 느꼈어요. 그걸 겪어 내고 이렇게 나와 있는 거라고요!'

(92-93쪽)

 


 

"모든 힘은 제가 가진 행복에서 나오고, 의욕도 행복해지고 싶다는 열망에서 나와요. 저는 이곳에서 저처럼 몸이 불편한 사람의 희망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요. 기쁜 일이죠. 하지만 제가 하는 행동은 대부분 그저 내가 행복하기 위함이에요. 다른 사람의 희망이 되기 위해 평생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처음 만든 꿈도 마찬가지예요. 그 꿈은 해안에서 멀어지는 범고래의 시점으로 진행돼요. 그건 저 자신을 나타낸 거였어요. 제가 살아가기에 너무나 제약이 많은 이 세상을 벗어나고 싶었어요. 다리 한쪽이 없는 삶이 아니라, 두 다리를 아예 쓰지 않아도 더 큰 세상을 보는 범고래가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됐어요. 바다에 빠지면 죽는 줄 알았는데, 그 아래에 더 큰 세상이 있더라고요. 지금은 참 다행이다 싶어요.(...)

(101쪽)

 


 

"태경 씨, 우리를 나타내는 어떤 수식어도 우리 자신보다 앞에 나올 순 없어요. 그리고 우리 같은 제작자가 있고 꿈을 사러 오는 당신이 있는 한, 아무도 당신에게서 잠자는 시간과 꿈꾸는 시간을 뺏어갈 순 없어요. 당신에게 어떤 꿈을 드릴 수 있을지는 우리 제작자들이 고민할 몫이에요. 당신은 자기 전에 아무 걱정 없이 눈을 감고 편안히 있으면 돼요."

(104쪽)

 


 

"여긴 알고 싶은 것들이 가득한걸요. 제가 사는 세계보다 훨씬 흥미롭고 멋져요. 혹시 제가 멋대로 헤집고 다니는 일이 잘못 된 건가요?"

"잘못은 아니지요. 잠든 시간은 손님 거예요."

"그 말을 들으니 안심돼요. 이렇게 신나는 세계가 있는데 깨어나면 모조리 잊는다는 건 너무 아까운 일이에요. 제가 루시드 드리머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여기서 태어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다못해 이곳에 제 흔적이라도 남길 수 있다면 좋겠어요."

(129쪽)

 


 

"정말 신기해요. 어떻게 손끝이 닿는 감각 하나만으로 서로 다른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거죠?"

모태일은 키스 그루어를 우러러보게 된 것 같았다.

"당신 안에 멋진 추억들이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죠. 실제로 경험한 것이든 영화나 드라마로 간접 체험한 것이든 상관없어요. 무궁무진한 추억들은 언제든지 근사한 꿈의 개경이 되어줄 거예요. 어떤 자극만 적절하게 주어진다면 말이에요. 지금처럼 손끝을 스친다든가, 특정한 냄새를 맡는다든가, 소리를 듣는다든가 하는 방식으로요."

(177쪽)

 


 

"어디 보자. 여기서는 '개운한 박하' 12개, '확 넘어가는 무게 중심' 2세트를 사야겠네."

페니는 퀴퀴한 냄새가 나는 바구니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드럼통이 실린 수레를 지나서 겨우겨우 필요한 물건을 찾을 수 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상쾌함이 드는 '개운한 박하'는 30분 미만의 낮잠용 꿈에만 사용하라고 되어 있었고, '확 넘어가는 무게 중심'은 주의 사항이 몇 페이지나 쓰여 있었다.

깜빡 잠이 든 상태에서 무게 중심을 확 뒤로 넘겨 졸음을 단숨에 쫓아낼수 있지만, 깜짝 놀라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내거나 의자에 앉아 있었을 경우 타박상 및 기타 중대한 상해에 노출될 수 있으므로 노약자에게 사용을 금합니다. 또한, 권장량을 반드시 지켜주십시오.....

(181쪽)

 


 

"아시다시피 저는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꿈'으로 작년에 데뷔했어요. 그런데 살면서 한 번쯤은 거쳐야 하는 힘든 시간이 아니라, 굳이 겪지 않아도 될 힘겨운 기억을 가진 사람들도 많더라고요. 저는 스스로가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애초에 그럴 필요가 없다면 더 좋겠죠.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한 상황이라면 더더욱이요. 저는 피해자가 뭘 더 노력하지 않아도 되면 좋겠어요. 노력은 가해자만 했으면 좋겠어요. 이기적이고 경솔하고 폭력적인 사람들이 실수로라도 이 포춘쿠키를 가져갔으면 좋겠어요."

"막심, 세상일이 그렇게 절묘하게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게 아니라네. 아무 죄 없는 사람이 이걸 먹게 될지도 몰라."

(206-207쪽)

 


 

 

'컴퓨터의 잔고장처럼 껐다 켜면 싹 나았으면 좋겠어.'

그는 자신을 껐다 켜는 것처럼 잠들고 일어나길 반복했다. 잠드는 건 쉽고, 일어나는 데는 의지가 필요했다. 무기력은 어느새 그의 힘만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남자는 우울에 잠식될까 두려워 함부로 우울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지도 않았다. 그러니 누구도 남자의 상태를 알 수 없었다. 이제 그만 꿈에서 빠져나와 열심히 살고 싶다는 마음은 굴뚝 같은데 몸이 자꾸 늘어졌다. 잠이 오지 않는데도 자꾸만 잠을 청하고 방의 불을 껐다. 가만히 누워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갔다.

(252쪽)

 


 

남편은 여자보다 더 신나서 얘기를 이어갔다.

"참 별걸 다 기억한다. 그러고 보면 큰맘 먹고 값비싼 호텔에서 묵었던 날은 조식이 맛있다는 것 외엔 아무것도 기억이 안나는데, 아무 날도 아닌 평범한 날에 우리 애들이랑 김밥 만들어 먹고 호박전 부쳐 먹었던 건 왜 이렇게 생생할까? 아유, 얘기하다 보니까 우리 참 재미나게도 살았다."

(277-278쪽)

 


 

"손님들도 우리도 전부 마찬가지야. 현재에 충실하게 살아갈 때가 있고, 과거에 연연하게 될 때가 있고, 앞만 보며 달려나갈 때도 있지. 다들 그런 때가 있는 법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기다려야 한단다. 사람들이 지금 당장 꿈을 꾸러 오지 않더라도, 살다 보면 꿈이 필요할 때가 생기기 마련이거든."

(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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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집 2] 문장수집 | 문장수집_ 독서노트(에 다 담지 못한 문장) 2021-08-31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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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31. 화

 

[영혼의 집 2]을 읽으며 플래그를 붙여놓은 부분을 다시 읽었다.

다시 읽어도 이 문장들을 다 담아 두고 싶었다.

나중에 다시 한번 이 소설을 읽게 될 수있을테고 어떤 감정으로 읽어내려가게 될지도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2권짜리에 총 700여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소설이었지만 꼭 한번 더 읽어보고 싶은 소설이다.

 

 

 

영혼의 집 2

이사벨 아옌데 저/권미선 역
민음사 | 2003년 07월

 

 

 


 

8. 백작

 

에스테반 트루에바는 끔직하게도 싫어하고 인정할 수 없는 존재인 소작인의 아들 페드로와의 사이에서 임신을 하게 된 딸 블랑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태어날 자신의 손자에게 제대로 된 가문을 주는 대가로,   장 드 사티니에게 엄청난 결혼 지참금과 엄청난 상속금을 약속하며 프랑스 백작과의 결혼을 통해 자신의 가문이 더러워지는 것을 정화시킨다.

 

블랑카는 남편과 사이좋게 지냈다. 그러다가 블랑카가 재정 상태에 대해 알아보려고 할 때만 유일하게 말다툼이 일어났다. 블랑카는 장이 잡화점의 중국인에게 밀린 외상 값도 제대로 갚지 못하고, 그 많은 하인들에게 월급도 주지 못하면서 어떻게 도자기들을 사들이고 고급차를 굴릴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블랑카는 장 드 사티니가 자기 아버지와 타협해서 무제한으로 돈을 받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장과는 어떤 합일점에도 이르는 게 불가능해 보이자 블랑카도 결국 모른척 하게 되었다.

(18-19쪽)

 

그녀의 욕정은 잠들어 있었다. 자신의 불행한 운명에 대해 어쩌다 한번씩 생각할 때도, 블랑카는 유일한 동반자로 딸 하나만을 데리고 잔인한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절망도 기쁨도 없이 성운 사이에 훨훨 떠돌아다니는 상상을 하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블랑카는 자기가 사랑하는 능력을 영원히 상실했으며, 타오르던 육체적 갈망도 완전히 가라앉았다고 믿게 되었다.

(19-20쪽)

 


 

9. 알바

 

클라라와 트루에바의 손녀딸 알바, 인정받지 못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알바의 삶이 그리도 고통스러웠어야 했을까 행각하게 된다.

 

 

알바는 다리가 먼저 나왔는데, 그것을 길운의 표시였다. 클라라는 알바의 등을 살펴, 진정한 행복을 타고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작은 별 모양의 얼룩을 찾아냈다.

"이 아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걱정할게 없다. 이 아이는 운도 좋고 행복할 거야. 그리고 피부도 좋을 거다. 그건 유전이니까. 나도 이 나이에 아직 주름살 하나 없잖니. 게다가 나는 여드름 난 적도 없단다."

아이가 태어난 지 이틀 후에 클라라가 단언했다. 이미 별들이 다 알아서 알바에게 너무나도 많은 선물을 내려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아이에게 따로 인생 준비를 시키기 위한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따. 알바의 별자리는 사자자리였다.

(33쪽)

 

알바한테는 아버지가 지적이고 훌륭한 귀족이었으며, 불행히도 북부 지방의 사막에서 열병으로 죽었다고 얘기해주었다. 그것은 알바가 어린 시절에 참아내야 했던 몇 안되는 거짓말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그 외에는 삶의 무미건조한 진실과 직접 맞닥뜨리게 했다.

(38쪽) 

 

평생 자신의 애정을 제대로 표현할 줄 몰랐으며, 클라라와의 부부 관계가 악화된 이후로는 아무런 정도 느껴보지 못했던 에스테반 트루에바는 알바아게 모든 애정을 쏟아 부었다. 에스테반에게는 손녀딸이 자식들보다 훨씬 더 귀하고 수중했다. 매일 아침 알바는 잠옷을 입은 채로 외할아버지의 방에 갔다. 알바는 노크도 하지 않고 들어가 외할아버지의 침대 속으로 쏙 기어 들어갔다. 사실 에스테반은 알바를 기다리고 있으면서도 깜짝 놀라 깨어난 체하면서 알바에게 자는 걸 방해하지 말고 네 방으로 돌아가라고 퉁명스럽게 얘기했다. 알바는 외할아버지가 결국 항복하고, 자기를 위해 숨겨둔 초콜릿을 찾아도 된다고 허락할 때까지 외할아버지에게 계속 간지럼을 태웠다.

(54-55쪽)

 

"거의 집집마다 바보나 미친 사람이 한 명씩은 있단다. 얘야."

외할머니는 그렇게 많은 세월이 지났는데도 눈을 떼면 바늘을 놀릴 줄 몰라 뜨개질에 열중하면서 손녀에게 말했다.

"그렇지만 그들을 무슨 집안 망신쯤이라 생각해서 늘 숨기려 하기 때문에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거다. 손님들이 와도 볼 수 없도록 아주 깊숙한 골방에다가 가둬놓기 일쑤지. 하지만 사실, 그 아이들도 신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란다."

"하지만 외할머니, 우리 집안에는 그런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요."

알바가 대답했다.

"없지. 우리 집안에서는 사람들이 공평하게 골고루 미쳐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미치광이가 나오기 힘들지."

(66-67쪽)

 

"이름이 뭐예요?

아이가 물었다.

"에스테반 가르시아."

그가 말했다.

"나는 알바 트루에바예요. 내 이름 기억하세요."

"그럴게."

알바와 에스테반 가르시아는 서로 한참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알바가 경계를 풀고 그이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 청년은 아이의 목덜미에 코를 갇가 대고서, 난챙처음으로 맡는 깨뜻하면서도 행복이 가득한 향을 깊이 들이마셨다. 까닭도 없이 그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는 자기가 이 어린아이를 늙은 트루에바 못지않게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는 자기가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을, 자기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것을 모두 누리고 있었다. 그는 아이에게 상처를 주고, 아이를 파괴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계속 아이의 냄새를 맡고, 갓난아이처럼 여린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아이의 부드러운 살갗을 계속 느끼고 싶었다.

(74-75쪽)

 

알바가 그 집안에서 침착함을 잃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 또 외할머니가 가끔 죽음의 상황과 의식에 대해 그녀에게 설명해 준 덕분이기도 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날 때와 마찬가지로 죽을 때도 미지의 세계를 두려워한단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우리 마음안에 있는 것일 뿐, 현실과는 아무 상관도 없어. 죽음은 탄생과 같은 거야. 그냥 옮겨가는 것일 뿐이지."

(82쪽)

 

 

 


 

10. 쇠락의 시대

 

블랑카는 함께 살면서 판에 박힌 일상에 젖는 것보다는, 호텔에서 잠깐씩 애인고 몰래 만나는 게 더 좋았다. 결혼 생활에 권태를 느끼고, 월말에 생활비가 모자라 쪼들리며 마음고생하면서 함께 늙는 것보다는 (...) 블랑카는 어쩔수 없는 낭만주의자였다. 블랑카는 가끔 그 촌스러운 가방과 양말에 남아 있는 보석을 집어 들고 집을 나와서, 딸과 함께 페드로 테르세로와 같이 살고 싶다는 유혹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늘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 많은 시련을 이겨낸 위대한 사랑이, 함께 산다는 가장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시험을 이겨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알바는 아주 빨리 성장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딸을 돌봐야 한다는 핑꼐로 계속 연인의 요구를 미룰 수도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렇지만 그 결정은 항상 나중으로 미루었다.

(119-120쪽)

 

 


 

12. 음모

 

점성도를 대조해 본 결과, 지금 이 역사적인 순간에 피와 고통과 죽음을 불러일으킬 무시무시한 사태가 벌어질 거라는 예언이 나왔다고 했다.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에스테반."

루이사 모라가 결론지었다.

"곧 끔찍한 시간이 닥칠 거예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죽을 거예요. 당신은 승자의 편에 서겠지만, 승리는 당신에게 더 큰 고통과 외로움만 안겨줄 뿐이에요."

에스테반 트로에바는 서재의 평화를 깨뜨리고 괜히 이상한 예언으로 자신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건방진 예언가 때문에 기분이 상당히 언짢았다. 그렇지만 한쪽 구석에서 흘깃흘깃 자기를 훔쳐보고 있는 클라라 때문에 대놓고 그녀에게 나가라고 할 용기도 나지 않았다.

(211쪽)

 

"너에게 조심하라는 말을 전하러 왔단다, 얘야."

루이사 모라가 알바를 보고 반가워서 흘린 눈물을 훔쳐내며 말했다.

"죽음이 네 주변에 도사리고 있단다. 클라라 외할머니가 저세상에서부터 너를 보호하고 있다. 하지만 큰 재난이 있을 때에는 영적인 보호자들도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 달라고 네 외할머니가 나를 보냈단다. 너는 여행을 떠나는게 현명할 것 같다. 바다를 건너가거라. 거기라면 안전할 거다."

(...) 그러나 열 달 하고도 열하루 뒤에, 통행금지 시간인 한밤중에 알바가 잡혀가던 날, 에스테반은 루이사 모라의 예언을 떠올리게 되었다.

(212쪽) 

 


 

13. 공포의 시대 

 

사회주의 대통령이 선출되었으나 군사 쿠테타로 인해 군사독재가로 많은 사람이 죽음에 이르게 된다. 실제 칠레의 역사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아이들도 대사관 담너머로 던지거나 창살 사이로 밀어 넣어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사관마다 가시 철망과 기관총으로 무장했기 때문에 그 일을 계속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알바는 다른 일들로 여전히 바빴다.

(...)

"죄수나 행방불명된 사람들, 사망자들의 가족은 먹을 게 없어. 실업자들도 마찬가지고. 하루 걸러 겨우 옥수수 한접시나 먹을까 말까야. 아이들은 너무 배가 고파서 수업시간에 잠들기 일쓰야."

(236쪽)

 

알바는 클라라 외할머니가 빈민가에 가서 정의 대신 자비를 베풀고자 했던 그 옛날로 되돌아갔다고 생각했다. 다만 지금은 자선을 베푸는 일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좋지 않게 비쳤다.

(237쪽)

 

중산층 대부분은 군사 쿠테타에 동조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법과 질서, 여자는 치마를 입고 남자는 짧은 머리를 하고 다니는 미풍양속으로의 복귀를 의미했다. 그러나 곧 그들은 높은 인플레와 일자리 부족으로 끔찍한 고통을 겪기 시작했다. 월급으로는 먹을 것을 사기에도 턱없이 부족했다. 어느 집이든 슬픔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한 명씩은 꼭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누군가 감옥에 잡혀 들어갔거나 죽었거나 망명을 갔어도 예전처럼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랬겠지라고 말하지 못했다. 고문이 자행되고 있다는 소문도 더는 부인하지 못했다.

(245쪽)

 

"미겔, 무서워."

알바가 말했다.

"우리는 이제 절대로 평범하게 살 수 없는 걸까? 우리 외국으로 가자. 아직은 가능하니까 우리 지금 도망치자!"

미겔이 아이들을 가리키자 알바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그럼, 나도 데려가 줘!"

이전에도 여러번 그랬듯이 알바가 애원하며 매달렸다.

"지금은 제대로 훈련받지도 않은 사람을 받아들일 수 없어. 더군다나 사랑에 빠진 여자는 더 안 되고."

미겔이 미소 지었다.

"자기는 지금 자기 일이나 열심히 하는게 좋아. 좋은 시절이 올 때까지 이 불쌍한 아이들을 도와줘야 해!"

"그러면 적어도 자기를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나 가르쳐줘."

"나중에 혹시라도 경찰에 체포된다면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편이 더 나을 거야."

(267-268쪽)

 


 

14. 진실의 시간

 

가르시아는 정신없이 바빴지만 하루라도 알바를 보지 않고 지나치는 날이 없었다. 그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게 굴다가도, 자기가 알바의 좋은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연극하기도 했다. (...) 알바가 구역질을 하며 기절할 때까지 오물로 가득 찬 양동이에 그녀의 머리를 처박던 날, 알바는 가르시아가 미켈의 행방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게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당해 온 상처를 복수하려는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알바가 무엇을 고백하건 간에, 가르시아 대령의 개인 죄수로 잡혀 있는 자신의 운명에는 변함이 없을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290쪽)

 

어느 날 가르시아 대령은 알바를 연인처럼 어루만지며, 시골에서의 어린 시절을 얘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때 그는 초록색 댕기 머리에 풀 먹인 나시옷을 입고, 외할아버지와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는 알바를 멀리서 바라보았다. 그때 그는 맨발로 진흙탕 속에 서서, 언젠가는 그녀의 거만함과 사생아로 태어난 자신의 고약한 운명에 복수하리라 맹세했다. (...) 가르시아 대령은 알바에게 온갖 고통을 주고 싶다는 열망에 균열이 생기자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마음에 경종을 울렸다. 그는 알바를 개집에 처넣으라고 명령하고는, 괜히 혼자 화를 내며 그녀를 잊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293쪽)

 

클라라 외할머니는 정신을 집중시켜 개집에서 살아 나갈 수 있도록, 종이나 연필 없이도 생각만으로 글을 써보라며 알바에게 권했다. 그러고는 한술 더 떠서 알바가 지금 아무도 모르게 겪고 있는 그 끔찍한 고통을 언젠가 세상에 알릴 수 있도록,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는 글을 써보라며 권했다. 아무것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의 평온하고 정돈된 삶 한편으로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만방에 알려야 한다고 했다.

(294-295쪽)

 


 

15. 에필로그

 

다음 날 아침 그녀가 말과 짐마차를 가진 사람에게 나를 데려다 주었다. 그녀가 나를 집까지 바대다 주라고 그녀에게 부탁했고, 그렇게 해서 나는 집까지 오게 되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나는 모든 것이 끔찍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도시를 바라보았다. 지저분한 잿빛 난민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 위해 임시로 벽을 쌓아 아예 덮어씌워버린 갑갑한 오두막집들과, 영국식 정원과 공원에 유리벽으로 된 고층 건물이 들어서 있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금발의 어린아이들이 있는 부촌이 끔찍한 대조를 이루었다. 잘사는 동네에는 심지어 개들까지도 행복해 보였다. 모든 것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고 조용했다. 건망증이 심한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굳건한 평화를 이루며 사는 곳이었다. 이곳은 완전히 다른 나라 같았다.

(322-323쪽)

 

외할머니는 삶을 증언하는 노트를 오십 년 동안 써왔다. 공범이 되어준 몇몇 영혼들이 빼돌린 덕분에, 그 노트들은 식구들의 다른 글을 모두 사라지게 한 그 치욕스러운 불길을 기적적으로 피할 수 있었다. 노트들은 클라라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배열해 놓은 그대로, 연대순이 아닌 사건별로 분류되어 색색깔의 리본에 묶여 지금 내 발치에 놓여 있다. 클라라 외할머니는 내가 과거를 되살리고, 스스로 공포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그 노트들을 기록한 것이엇다. 첫 번째 노트는 어린아이의 섬세한 필체로 쓰여진 평범한 스무 장짜리 학교 노트였다. 그 글을 이렇게 시작된다.

"바리바스가 바다를 건너 우리에게 왔다......"

(3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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