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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디 있는가 -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사탄탱고』 | 문학 2021-02-10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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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사탄탱고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저/조원규 역
알마 | 2018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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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의 마술적 리얼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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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픽션 속 등장인물이 잔인할 정도로 비정하고, 한심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으며, 비정상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 현실의 수많은 사건 사고를 접하다보니 그게 비현실적이지도 않다. 인간은 “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이라는 사전적 정의는 속 시원한 풀이가 아니다. 보르헤스가 들여다본 중국 백과사전의 ‘동물’에 대한 설명을 빗대어, ‘인간’은 이상하게 길들여져 있고, 신을 믿고 신화를 흠모하기도 하고, 어디로든 싸돌아다니길 원하고, 탐욕과 게으름에서 줄타기를 하며 미친 듯이 나부대기도 하며, 수없이 많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그림에 나오기도 하며, 방금 찻주전자를 깨뜨린 존재이기도 하면서 사소한 이유로 서로를 괴롭히고 죽이기도 하고, 멀리서 보면 파리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것도 인간을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이렇게 말하고 보니 소설 속 인물들이 전혀 비정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인간의 수만큼 우리가 보는 만큼 인간의 특성도 미묘하게 다르면서 많고, 소설가는 내러티브와 책이라는 형태 속에 그런 인간의 모습을 담는다.

 

수전 손택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를 “현존하는 묵시록 문학의 최고 거장”이라고 평했다는데, 이 책을 읽고 나면 바로 수긍된다. 나는 벨라 타르 감독의 영화로 이 작품을 먼저 접했는데, 7시간 30분의 러닝 타임보다 영화가 담은 경이로움에 더 놀랐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묵시록적인 영화와 또 다른 보석이었다. 내가 타르코프스키를 떠올린 건 그럴 만했다. 이 소설은 공산주의가 붕괴되어가던 1980년대 헝가리에서 몰락해가는 어느 집단농장 마을 사람들을 그렸다. 번역과 해설을 쓴 조원규 씨 말마따나 이 당시의 몰락은 “정치적 층위보다는 역사적, 심리적, 형이상적 층위”의 몰락이다. 마을에는 일이 없어 타지역에서 벌어야 하고, 가난과 실패와 무력감에 찌든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감시하고 속이고 간통하며, 아이들도 나쁜 짓에 서슴없고, 엄마가 딸이 매춘한 돈을 뺏는 그야말로 작은 소돔과 고모라 같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 나눠야 할 품삯을 슈미트와 크라네르가 챙겨 도망가려는 걸 간파한 후터키가 슈미트를 위협해 음모에 가담하려는 순간 뜻밖의 소식이 날아든다. 마을의 지도자(처럼 굴었지만 실상은 공산당 정부의 정보원)였던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가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있고 마을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희망에 부풀어 한밤 내내 그들을 기다린다. ‘메시아 알레고리’가 대개 그렇듯 마을 사람들은 결코 성공할 수 없으며 더욱 진창에 빠져들 거라는 걸 독자는 금세 눈치채게 되는데,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기분으로 이야기를 따라가야 한다.

 

술집에서 가련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마을 사람들이 춤판에 빠져있는 동안, 소녀 에슈티케는 자신이 죽인 고양이 시체와 함께 천사의 구원을 바라며 자살한다. 소녀의 죽음은 바람과는 다르게 이용된다. 이리미아시는 소녀의 죽음으로 비탄과 혼란에 빠진 마을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이용해 새로운 삶을 꾸려야 한다고 공산당식 일장 연설을 한다. 그는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자금을 내놓도록 만들 뿐 아니라 그들을 자신의 개인 스파이로 만들어 당국에 자신의 입지를 돋보일 계획까지 꾸몄다. 비정한 무신론자이자 사기꾼인 이리미아시에게 여러 계시(도살장에서 도망친 말, 죽은 소녀의 시체)가 나타나도 그는 마음을 되돌리지 않는다. 어리석은 생각과 마음은 도처에 있다. 이 마을을 떠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끝없이 생기는 거미줄과 사투를 벌이며 탐욕을 채울 궁리만 한 술집 주인도, 사람들을 외면하면서도 마을 사람들을 관찰하는 일에 집착했던 알콜중독자 의사도, 뭔가 잘못되어간다는 걸 눈치챘으면서도 각자의 희망과 무력감 때문에 이리미아시의 계획에 빠져든 마을 사람 누구도 사태를 바로잡지 못한다. 이리미아시의 계획을 정확하게 간파하고서도 후터키는 막지 않는다. 교회도 종도 없는 마을에서 종소리를 들었을 때에도 그는 자신의 몰락을 예감한 꿈에 적응하듯 그 종소리를 무시했다. 같은 종소리를 들은 의사는 “종소리의 메시지를 정확히 이해한다면 인간의 삶에 지금껏 알지 못했던 추진력을 부여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종소리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찾아 나섰지만, 환멸만 확인하고 다시 칩거한다. 그가 관찰할 마을 사람들이 이제 없다는 걸 알아도 그는 그의 글쓰기 속에서 몰락할 것이다. 현실과 악랄한 교접자라 할 이리미아시조차도 정부의 보고서에는 그가 혐오하는 실패한 인간 군상과 그는 구분되지 않는다. 약육강식의 울타리에서 그들은 죽음의 선고를 앞둔 가축에 지나지 않다. 적극적으로 찾든 찾지 않든 ‘구원’은 없다는 메시지일까. 관점을 달리해서 봐야 할 것이다. 자신과 서로를 돌보지 않는 인간에게 구원은 공평하게 오지 않는다고 말이다. 구덩이는 더 넓어지고 깊어지기만 할 것이다. 구원, 마법, 글, 인간애 등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1985년에 발표된 이 소설이 36년이 지나서도 지금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겨지는데, 우리가 바라는 ‘신’의 부재가 아니라 우리가 바라는 ‘인간’의 부재 때문인 것 같다.

 

 

 

*

그는 그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농장이 해체되고,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처음 왔을 때처럼 또 미련 없이 떠나가버린 뒤에 의사와 학교 교장을 포함해 오직 그와 몇몇 집들만이 남았는데, 누구도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랐다. 그때부터 그는 음식 맛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죽음은 무엇보다 수프와 고기 접시에, 그리고 담벼락에서부터 스며들어올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음식을 삼키기 전에 오랫동안 입안에 물고 있었고, 물이나 혹은 드물게 식탁에 오르는 와인을 마실 때도 아주 천천히 목구멍으로 넘겼다. 가끔씩 그가 사는 오래된 펌프하우스의 기계실에서 석회 덩어리를 깨 한 조각 맛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는데, 그렇게 향과 입맛의 질서를 무참히 깨트릴 때 어떤 경고를 인식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는 죽음이 절망적이고 영구적인 종말이 아니라 일종의 경고라고 확신했다.

**

후터키는 창유리 너머의 풍경을 더는 볼 수 없었음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벌레 먹은 창틀과 석고가 부스러진 곳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유리창에 갑자기 불분명한 물체가 보이더니 점차 사람의 꼴을 갖춰갔다. 처음엔 그게 누구의 얼굴인지, 놀란 두 눈을 볼 때까지는 알지 못했다. 이윽고 그가 알아본 것은 자신의 초췌한 면상이었고, 순간 놀라고 당황한 것은 비가 창유리 위의 얼굴을 지워내듯이 세월이 그에게도 똑같은 일을 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어서였다. 그 모습엔 무언가 엄청나고 낯선 궁핍이 어려 있었다. 수치와 자부심 그리고 두려움이 겹겹이 층을 이루며 그에게로 다가들었다. 갑자기 혀끝에 다시 신맛이 느껴지고 아침에 들은 종소리가 떠올랐다.

***

소녀는 고양이의 따스한 배와 뛰는 맥박을 느끼고 여기저기 찢긴 상처에서 솟은 피를 보고서야 자기가 한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수치와 후회로 목이 메었다. 소녀는 그 무엇으로도 자신의 승리를 원래대로 복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소녀가 다가가려는 몸짓만으로도 고양이는 도망칠 것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내내 그럴 것이다. 불러도 소용없고 꾀어낼 수도 없으며 껴안지도 못할 것이다. 미추르는 끔찍했던 죽음의 모험을 두 눈에 간직할 것이고, 언제든 도망갈 채비를 갖추고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소녀는 패배만이 견딜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승리도 그렇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잔인한 싸움에서 부끄러운 점은 그녀가 이겼다는 것이 아니라, 질 가능성이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이다.

****

한참 뒤에 이리미아시가 말했다. “좀 전에 이상한 광경을 봤다고 그럴 필요는 없어. 천국? 지옥? 피안彼岸? 다 헛소리야. 난 그런 지어낸 얘기는 다 정신을 홀려놓기 위한 거라고 믿네. 그렇게 환상에 마음을 빼앗기면 진실은 영영 알 수 없는 법이야.” 이제 페트리너는 완전히 마음이 놓여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이리미아시가 자신감을 되찾도록 자기가 무슨 말인가를 해주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고함만은 치지 말게!” 그가 부탁했다. “안 그래도 곤란을 잔뜩 겪지 않았나?” “처진 귀, 신은 문자로는 나타나지 않아. 신은 무엇에도 나타나지 않지. 신은 자신을 보여주지 않아.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봐, 난 신을 믿는 사람이야!” 페트리너가 성을 냈다. “적어도 내 앞에선 조심해주게, 이 무신론자야!” “난 예전엔 잘못 생각했어. 얼마 전에야 깨달았다네. 나와 벌레, 벌레와 강물, 강물과 강을 넘어가는 고함 소리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것을. 모든 건 공허하고 의미가 없는 거야. 뿌리칠 수 없는 구속과 시간을 뛰어넘은 대담한 도약 사이에서, 영원히 실패하는 감각이 아닌 오로지 환상만이 우리로 하여금 비참한 구덩이에서 헤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끔 유혹하지. 하지만 도망칠 길은 없어, 귀 늘어진 양반!” “그 얘길 하필 지금 해야겠나?” 페트리너가 항의했다. “‘지금’이라고 했지? 지금 우리가 본 건, 우리가 본 게 틀림없어!” 이리미아시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래서 난 우리가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다고 한 거야. 왜냐하면 모든 게 너무 완벽하게 그럴듯하거든.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거고, 그다음엔 눈을 믿지 않는 거지. 페트리너, 그건 우리가 언제나 빠지고 마는 덫이야.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지.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이란 게 결국은 자물쇠를 바꿔 다는 일일 뿐이거든. 그렇게 덫은 완벽하다네.”

*****

“하, 하.” 소년이 비웃었다. “농담도 잘하시네요.” 페트리너는 소년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뿜었다. “잘 알아둬라. 인생의 비밀은 농담에 있다는 걸.” 그가 엄숙하게 말했다. “일은 어렵게 시작해서 나쁘게 끝난단다. 중간에 일어나는 일은 다 좋은 법이야. 네가 걱정할 건 마지막 순간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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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읽고 왜 쓰는가 - 《Axt》(2021.1.2, no. 34, | 문학 2021-02-10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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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악스트 Axt Art&Text (격월) : 1/2 [2021]

편집부
은행나무 | 2021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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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소재로 삼는 글이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글쓰기에서 그 과정은 불가피하고, 창작은 자신의 경험과 생각과 상상을 총동원하는 것이니까. 그런데 요즘 경향을 보면 국내외 구분 없이 '글(쓰기)을 위한 글'로 끌고 가는 소재가 너무 많다. 밥벌이도 해야 하고 마감을 어기거나 원고 청탁을 거절하면 다음 청탁이 불투명해지므로 기어코 써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 글을 쓴 작가들 글이 대개 그렇다. 하필 내가 읽는 책만 그런 걸까. 미투 운동 등 페미니즘 열풍으로 이쪽 소재도 한창 몰려 있다. 각종 콘텐츠의 발달, 에세이 붐으로 문학의 소재 빈약은 더 두드러진다. 쓰고 싶다는 열망으로 출발했지만, 뭘 써야 하는지 왜 써야 하는지 공허와 실의에 빠져 있다가 맘을 다잡고 작가는 다시 글을 쓴다. 모든 작가가 염원하는 '대작'의 길은 여전히 멀다. 쓰기 자체가 고역인데 이럴 거면 자신이 즐거우려고 쓴다는 정지돈 작가의 말이 이해도 된다. 그는 독자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써달라는 당부도 들었고(대부분의 청탁), 실험 정신을 마음껏 발휘해 달라는 지지(워크룸프레스 출판사)도 받았다. 세상과 사람을 따뜻하게 이해하려는 작가라는 평보다 전위적인 냉소주의자라는 평이 더 많은 것 같다. 작가도 여러 개성이 있으니, 어떤 점이 더 두드러진 소설만 읽은 사람은 단면만 보고 평가했을 수 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인간에 내재된 어떤 보편적 욕망의 상징적인 표현이라면 『봄에 나는 없었다』는 인간이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어떤 냉혹한 현실과 대면한 의식의 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한 사람의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 자서전과 소설이 함께 필요한 상황에 대해 살펴보았다. 폴 리쾨르의 논의를 빌려 이야기하자면, 한 인간의 정체성의 구성은 역사와 허구가 각자의 기능을 갖고 함께 작용해야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애거사 크리스티가 자신을 이야기하기 위해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자기 속의 다른 존재가 필요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 손정수, <애거사 크리스티의 두 얼굴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에르퀼 푸아로와 『봄에 나는 없었다』의 조앤 스쿠다모어>

 

 

인간의 지각은 매우 예민해서 작가가 고통스럽게 쓰면 독자도 그걸 느끼고, 작가가 즐겁게 쓰면 마찬가지로 느낀다. 잘 모르겠다거나 이상하다거나 불편하다는 평가로 던져버린다면 그는 매우 게으른 독서가이다. 그림도 그러해서는 안 되지만 글은 전시장에서 쓱 훑어보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 소비자의 위상이 커진 만큼 (그 소비자가 바로 독자이므로) 독자의 위상도 커졌다. 어디서든 최소 투자 최대 효용을 요구하는 태도를 자주 본다. 현대의 독자는 자신이 읽기만 하면 글이 알아서 채워주길 바란다. 명작에 동의하든 부정하든 어떤 평가를 하려면 자기만의 타당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정지돈 『영화와 시』 리뷰에서 그의 글의 특성과 왜 어렵게 읽히는지에 대해 쓴 적 있다. 정지돈 소설을 '독자와 싸우려는 작가'라고 재단하고 별점 테러하는 걸로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모든 장르에서 '다양성'은 더 많아야 한다. 한국 문단에서 낯선 정지돈의 글쓰기는 그래서 중요하고 꼭 필요하다. 소설 자체로서 뿐만 아니라 이 시대 이 장소에서 한 인간이 풀어놓는 사유의 한 보고서로서도 들여다볼 만하다. 문학의 특성이 바로 그것이다. 문학이 쓸모없다는 '무용성'론은 일종의 면피이자 끌리는 말이지만 사실이 아니다. 인간이 왜 끝없이 실패하는지 (지금까지는) 문학만큼 잘 보여주는 것도 없었다. 많은 작가가 실패와 고립된 소외자에 흥미를 느끼고 그것을 형상화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반추하는 특성의 반영이면서 작가 자신과 인간의 근원적 마음의 대변이다. 대동소이한 '행복'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야기가 힘을 발휘할 때는 복잡한 불행의 만다라를 그릴 때다.

글쓰기에서 언제나 남는 문제는 하나다. 우리는 왜 읽고 왜 쓰는가. 단지 재미만을 위해서? 읽고 쓰는 행위는 생각하기 위해서다. 왜 저것은 문제이고 이것은 이토록 중요한가에 대해서. 이런 지경임에도 우리는 왜 살아야만 하는가에 대해서. 그러나 예술에서 간편하게 얻는 위안처럼 문학의 힘도 점점 축소되어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런 목적이 있을 수 있지만 예술과 문학의 핵심일 수는 없다.

 

 

베이비샤워에서 다들 선물을 돌려보며 “아, 이거 너무 예뻐요!”라고 할 때 올리브는 너무 끔찍해하고 나중에 잭한테 내 인생 가장 끔찍한 경험이었다고 하죠. 그런 게 너무 웃겨요. 더 나아가서 올리브라는 캐릭터가 그 자체로 이 소설의 큰 특성을 결정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번에 『다시, 올리브』를 읽으면서 소설 장르가 뭔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는데요. 사람들의 삶이 있는데 그중에 우리가 눈으로 봐서 알 수 있는 삶이 있지만, 진짜 삶은 모르잖아요. 가족들만 아는 사연이 있고, 또 가족 안에서도 각기 간직하고 있는 비밀스러운 삶이 있거든요. 그런 비밀스러운 삶까지 읽을 수 있는 게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겉으로 말하는 삶이 아니라, 진짜 내가 느끼는 삶에 대한 이야기. 그런 점이 올리브라는 캐릭터의 특성과도 통하는 듯해요.

 

- 김세희, <table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다시, 올리브』 : 김세희+정연희+이봄이랑 / 백다흠 - 올리브가 차를 몰고 선착장으로 들어왔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만 먹고 자는 게 아니듯 읽고 쓰는 것도 그렇다. 어떻게든 뭔가 써보려는 작가가 아니라 게으른 독자가 해악이다. 그런 독자들이 많을수록 우리가 좋은 글을 마주할 기회는 줄어든다. 자신의 피드에 온갖 책을 진열해 놓아도 교양은 그렇게 쌓이는 것이 아니다. 그가 무엇을 읽었는가가 아니라 어떤 생각을 가지고 행동하는가가 더 중요하니까. 역사 내내 우리가 사회 지도층, 엘리트, 지식인들에게 느끼는 문제도 이것이잖은가. 읽지도 않고 생각도 귀찮아하며 자기주장에 열 올리는 이 시대 분위기는 더욱 난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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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온 적립 감사드립니다(2020년 11월) | yes블로그 세부 활동 2021-01-08 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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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인사를 기록으로 남겼다고 생각했는데 깜빡했더군요^^;;

<반짝이는 밤의 낱말들>도 리뷰를 남겨야 속이 시원할 텐데ㅎㅎ

에드온 적립, 감사 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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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실패 담론은 불가능의 다른 말 – 금정연 『담배와 영화』 | 일기 에세이 여행 2021-01-08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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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담배와 영화

금정연 저
시간의흐름 | 2020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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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암시를 성공 비결로 과대 포장하는 자기 계발서들은 요리조리 끼워 맞추면 뭐라도 하나 맞출 수 있는 오늘의 운세 같다. 그렇다면 서평을 쓰면서 서평을 안 쓴다고 말하는 서평가이고, 실패라고 하면서 계속 글을 발표하고, 문학과 영화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의 글 또한 그게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금정연의 포즈는 뭘까. 그는 ‘현실로 현실을 수선하기’(로베르 브레송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단상』)가 픽션이고, “픽션은 언제나 하나의 현실이고 그것은 현실을 수선”한다고 말한다. 즉 그의 포즈는 픽션이면서 현실이다.

 

“픽션은 ‘사실이 아닌 것untruth’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사실이 아닌 이야기지만 픽션이 아닌 것들이 무수히 많고, 사실에 근거한 명제로만 이루어진 글쓰기도 여전히 픽션이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픽션은 언어의 인식론적인 위상보다는 독자가 그 언어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와 더 상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픽션은 근본적으로 ‘믿어주기make believe’의 문제이며, 우리는 동화 이야기를 ‘믿어주기’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실에 근거한 텍스트를 ‘믿어주기’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허구적인 텍스트를 사실적인 목적으로 인용할 수 있는 것처럼, 사실에 근거한 텍스트를 허구적인 목적에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ㅡ 「89」, 원문은 테리 이글턴 「‘2020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3기 해외석학강좌 제2강 문학의 내면’ 강연자료집」, 25~26쪽

 

저자는 사실에 근거한 텍스트를 허구적으로 사용하고, 독자인 우리는 허구적인 텍스트를 사실처럼 믿어준다. 금정연 텍스트는 장점이 많지만, 그의 문체가 주는 재미의 주요 기반은 바로 그것이다. 픽션의 무대가 넓어질수록 글 쓰는 이는 보다 자유로울 수 있고, 상상의 폭이 넓어지면 독자도 즐겁다. 사실 중심의 보고서 같은 글은 한정된 정보는 차치하더라도 (더럽게) 재미가 없다. “웰즈는 말한다. …… 리얼리티라고요? 그건 집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물컵에 담긴 칫솔 같은 거죠. 버스표나 월급 그리고 무덤 같은 거요.”(「90」) 모든 일이 그렇듯 픽션이 늘 성공적인 건 아니라서 금정연이 시나리오 작업을 한 <나랏말싸미>(2018)의 흥행 참패는 그에게 큰 트라우마를 남겼다. 그는 이 에세이에서 반복해 오열했다. 영화의 상영 및 해외보급 금지 가처분 신청을 해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도 픽션 같은 파장이었다.

 

비평가 데이비 히키는 ‘비평은 글을 가지고 하는 에어기타’라고 했다. 작가가 되지 못한 자들의 직업=비평가라는 평은 조롱 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비평가가 비평 대상에 대한 기억 속에서 공허하고 공감의 제스처가 난무하며 조용한 발광을 하는 에어기타 연주자이기만 할까. 작가나 영화감독처럼 비평가도 무엇을 보고 어디에 배치할지에 대한 고민은 동일하다. 그들은 왜 이것과 저것을 연결하고, 그 속에서 자기만의 α를 말하는가. 튀어 보이려고?(물론 그런 사람도 없지 않다) ‘모든 비평은 일종의 자서전’(데이비드 실즈)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기 때문이다. “낡은 시네필리아는 보수적이고 향수적인 구석이 있고, 시네필적 경험(특히 어린 시절이나 청년 시절의 경험)은 소중히 간직되면서 신성시되고, 한 사람의 생애를 걸쳐 고정된다”(기리쉬 샴부, 「새로운 시네필리아를 위하여」, 영화 평론가 한창욱의 네이버 블로그 인용을 금정연이 인용)라고 하듯이, 우리의 글은 살아오면서 겪은 직간접 경험과 상상과 사유의 배수로를 통과해서 나온다. 비평가는 확대경이 될 수도, 현미경이 될 수도 있고, 그저 관심종자가 될 수도 있다. 비평이 단순히 ‘배설’이나 ‘자기충족’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영화평론가 유운성이 픽션을 정의하듯 ‘크로노스(물리적 시간)를 카이로스(의미화된 시간)로 전환시키는 기술’이 필요하다. 현실의 시간을 견디기 위해 픽션(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지나간 날들을 기억하는 남자가 과거를 돌아보는 픽션)을 만들어내는 <화양연화>와 이미 만들어진 픽션이 현실의 경계를 넘어 현실과 겹치는 이야기(잊고 있던 기억을 누군가 도용해(적어도 본인은 그렇다고 주장하는)를 만들어낸 픽션을 보게 된 남자의 이야기)인 <극장전>을 연결하며 금정연은 ‘담배’가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이런 걸 꼬집을 때 비평가는 얼마나 신나는가. 시간을 공간으로 표현하는 것이 영화의 본질인데, <화양연화>에서 클로즈업된 시계와 담배를 피우는 양조위의 모습이 반복해서 제시되는 것은 영화의 수많은 신들과 조각난 시간들을 한 편의 영화로 매끄럽게 이어주는 비밀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현실과 현실(혹은 픽션과 픽션)을 연결하는 비평은 꾸러기 같은 재미를 준다.

 

우리는 내일 당연히 살아있을 것처럼 예상하고 살아간다. 잠에 빠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게 픽션이 아니면 뭔가. 진실과 허구를 명확히 가를 수 없는 픽션처럼 담배도 많은 해석을 양산한다. 애초에 흡연은 태우는 행위인가 피우는 행위인가(두 표현은 엄밀히 다르다). 2018년 4월, 아내의 임신 소식에 금정연은 담배를 끊었지만, 이 책을 쓰는 동안 담배 한 갑(하필 담배 이름이 HOPE!)을 펴서 금(정이 사라진)연의 세계에서 즉시 제명된다. 다시 담배를 피기 시작했으니 흡연자가 되고, 다시 담배를 안 피우면 비흡연자가 되는 게 아니다. 흡연과 금연 사이에는 보완해야 할 많은 결손, 언제든 변할 수 있든 가변성이 상주한다. 중독과 상술로만 말할 수 없듯이 흡연과 금연의 잣대로 담배가 존재하는 세상을 평가할 수도 없다. 다른 어디에서보다 담배는 영화에서 빛을 발하는 카메오 출연자였다. 담배는 즉시 시선을 잡아끈다. 금정연은 <시네마천국>에 나오는 키스신 모음처럼 흡연 장면만 모았다.

 

“또 다른 기억들: 담배를 피우는 험프리 보가트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뿜으며 등장해 담배 연기를 뱉으며 죽는 장 폴 벨몽도(<네 멋대로 해라>). 턱을 괸 채 훗날 헵번 파이프라고 불리게 될 기다란 담배 홀더를 들고 카메라를 바라보는 오드리 헵번(<티파니에서 아침을>), 정장을 빼입고 침대에 누워 긴 담배 연기를 내뿜는 알랭 들롱 (<고독>), 복제인간 여부를 가리는 테스트를 받으며 불안을 감추기 위해 두꺼운 궐련을 피우는 숀 영(<블레이드 러너>), 100달러짜리 위조지폐로 담배에 불을 붙이는 주윤발(<영웅본색>). 하얀 러닝셔츠에 브리프 차림으로 담배를 피우며 날개 없는 새에 대한 독백을 하다가 뜬금없이 탱고를 추던 장국영(<아비정전>).야구모자를 거꾸로 쓴 채 택시를 몰며 연신 줄담배를 피우는 위노나 라이더(<지상의 밤>). 1966년 포드 썬더버드를 타고 달리며 담배를 피우는 수잔 서랜든과 지나 데이비스(<델마와 루이스>), 담배를 입에 물고 대화를 나누던 개 같은 남자들(<저수지의 개들>), 사람들 가득한 극장 관객석에 앉아 시가를 피우며 큰소리로 웃는 로버트 드니로(<케이프 피어>). 침대에 엎드려 정면을 바라보며 담배 연기를 내뿜던 우마 서먼(<펄프 픽션>). 살인 업무를 앞두고 금색 가발에 선글라스를 쓰고 어두운 복도에 기대어 앉아 긴 담배를 짧게 피우는 임청하(<중경삼림>). 이어폰을 꽂고 오토바이에 기대 눈을 감고 말보로 레드를 피우는 정우성(<비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따로 또 같이 담배를 피우는 장국영과 양조위(<해피 투게더>), 연신 담배를 피우던 양조위와 딱 한 번 담배를 입에 문 장만옥(<화양연화>), 60년대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스파게티웨스턴)와 70년대의 잭 니콜슨(코에 반창고를 붙인 채 담배를 피우며 무섭게 웃는 <차이나 타운>), 80년대의 알 파치노(특히 <스카페이스>)와 90년대의 브루스 윌리스(물론 <다이하드> 시리즈). 함께 출연한 프랜시스 맥도먼드에 따르면 영화에서 한 일이라곤 담배를 피우는 것밖에 없었다던 빌리 밥 손튼(<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정신병동에서 함께 담배를 피우는 위노나 라이더와 안젤리나 졸리(<처음 만나는 자유>), 담배를 피울 때마다 헵번 파이프를 잊지 않던 1940년대풍의 스칼렛 요한슨(<블랙 달리아>), 해변을 바라보며 데킬라와 함께 마지막 담배를 피우는 뇌종양에 걸린 틸 슈바이거(〈노킹온 헤븐스 도어>). 자신이 흘린 피에 마지막 담배를 비벼 끄던 폐암 말기의 키아누 리브스(<콘스탄틴>). 파리의 카페에 앉아 조각난 기억을 더듬으며 담배를 피우는 안더스 다니엘슨 리(<리프라이즈>) 혹은 공원 벤치에 앉아 친구의 충고를 따라 인생을 먼발치에서 돌아보며 담배를 피우는 안더스 다니엘슨 리(<오슬로, 8월 31일>) 담배를 피우며 흑인 가정부들의 이야기를 받아쓰는 엠마 스톤(<헬프>). 침대에 누운 채 한 손으로 지포 라이터를 켜 불을 붙이는 라이언 고슬링과 그의 손에서 담배를 빼앗아 피우는 엠마 스톤(<갱스터 스쿼드>), 2000년대의 공효진(<품행 제로>와 <행복>), 2010년대의 고아성(<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ㅡ 「19」

 

위 문장은 언어로 된 영화 액자를 감상하는 기분이다. 담배의 효과가 그렇듯 라쿠나(Lacuna, 잃어버린 조각들이라는 뜻의 라틴어)를 떠올리게 만든다. 저 이미지들은 우리 기억 속에 있지만 불러내지 않으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언어처럼 영화가 제시하는 이미지들도 라쿠나를 살리는 마술이다. 감독의 취향에 따라 다양한 FAKE가 가미되겠지만 말이다.

 

“인간의 상상력은 이야기를 만들어나감으로써 실존적 공허함에 억지로 질서를 부여하는데, 궁극적으로 무의미할 뿐인 인간의 이야기는 시작, 중간부, 결말을 산뜻하게 지닌 질서 있는 유기체를 기만적으로 엮어낸다. 이렇듯 예술은 형식이 지닌 위안적 힘을 활용한다. 허구의 연금술은 사소한 일상사를 문학 속의 모험으로 변모시키지만, 그 결과 발생하는 이야기는 결코 진실이 아니다. 모든 내러티브는 기표들의 시간적 연속체를 상상된 사건들의 연속체와 동일시함으로써 스콜라 철학자들이 post hoc ergo propter hoc('이 이후에 있는, 따라서 이 때문에)이라고 부른 논리적 오류를 범한다고 롤랑 바르트는 말하기도 하였다. 단순히 연결된 것을 실제 결과로 혼동함으로써 내러티브는 단순한 반복으로 특징지어지는 세계에 대해 인과법칙을 강제로 부여한다. 따라서, 모더니즘적인 예술의 '탈인간화에는 리얼리즘 내러티브의 소망성 - 심지어는 가능성 - 에 대한 단호한 부정이 함축되어 있다. 허구에 대한 세르반테스의 비판을 과격화시켰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모더니스트들은 모든 이야기가 거짓말이라고까지 제안한다.

*더욱이 모든 이야기가 거짓말일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은 거짓말쟁이이기도 한데, 결국 모든 인간은 이야기꾼이기 때문이다.(*로버트 스템, 『자기 반영의 영화와 문학』)”

ㅡ 「70」

 

위작 예술의 거장이었던 엘미르 드 호리를 예술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고, 명작을 만들었지만 장 뤽 고다르의 잔인한 인성과 로만 폴란스키의 아동 성범죄가 그것을 덮어줄 면피는 되지 못한다. 우리는 많은 걸 뭉텅 그려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소문난 골초였던 프로이트는 의사들의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금연을 거부하다 그로 인해 구강암으로 사망했다. 인간 내면을 깊이 탐구했지만 프로이트는 자신을 충실히 돌봤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프로이트의 한 실패담일까. 한 사람의 삶은 이렇듯 많은 이율배반, 이해하기 어려운 불협들도 이뤄진다. 금정연이 절필하고 싶다! 책을 태워버리고 싶다! 노래를 하면서 글을 쓰듯이. 피우고 끊기를 반복하는 담배처럼, 평생 영화를 보지 않을 수 없듯이, 금정연의 실패 담론은 불가능의 다른 말이다. 그에게 글쓰기는 공간이 필요한 담배 같으니까. 연기와 꽁초와 냄새는 나중 문제고 기어코, 쓰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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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보다 창작자에 가까운- 정지돈 『영화와 시』 | 일기 에세이 여행 2021-01-08 0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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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영화와 시

정지돈 저
시간의흐름 | 2020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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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뉘는 작가가 있는데, 정지돈도 그런 것 같다. 작법과 문체가 뚜렷한 작가이기 때문에 독자는 같은 이유로 싫어하고 좋아한다. 그의 소설은 인물의 정서나 인물 간의 갈등 중심인 통상적인 소설과 다른데, 낯선 소재(지명, 인명, 역사적 사건, 예술과 문화 가십 등)들이 쉬지 않고 쏟아져 나온다. 먼저 당부할 것은 독자가 느끼는 당혹과 거부감은 정지돈의 특성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우리 인간의 인지적 특성에 있다. 인간은 정보 과잉의 피로와 해석의 부담을 싫어한다. 정지돈이 그런 것을 감안해 글을 썼다면 지금의 모습은 결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정지돈이 정말 독자나 기성 문단과 싸우자는 걸까. 작가는 영감들을 어떻게 배치할지 골몰할 뿐이다. 언어를 전달 매개로 쓰고 있지만 다분히 영화적 사고 특성도 반영되고 있다. 정지돈은 「건축이냐 혁명이냐」에서 이런 글을 썼다.

 

 

 

“고다르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가고 있다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거리를 가로질러 가는 모습을 나는 절대 보여주지 않겠다. 내가 그 거리를 좋아한다거나, 혹은 빛 때문에, 혹은 인상적인 무엇인가가 있다면 찍을 것이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나는 찍지 않고 그걸 잘라낼 것이다.

(중략)

필립 그랑드리외는 <음지>의 제작노트에 영화를 만들지 마라, 이미지에 의해 벌어지는 일들이 저절로 프린트되도록 하라, 라고 썼다고 동기는 말하며 영화 이미지란 사진 이미지와 어떻게 다르고 저절로 형성되는 이미지는 시간과 인물 사이에서 어떤 운동을 하는지, 그 운동은 시간과 인물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 운동이 시간과 인물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것은 사후에 벌어지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사후에 벌어지는 시간이 역사라면 우리는 역사 없이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며 필립 그랑드리외의 영화는 시간과 인물에 전혀 다른 위치를 부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ㅡ 정지돈 「건축이냐 혁명이냐」

 

 

정지돈은 소설에 요구되는 사건의 인과와 그에 따른 교훈에는 흥미가 없다. 몽타주처럼 인상적인 무엇들의 배치에 흥미가 있고, 시간과 인물을 교직(交織)하면 어떤 일이 펼쳐지는지에 관심이 있다. 그의 글이 에세이 같은 문예 편력기 같은 것도 이 때문인데, 그래서 정지돈은 소설가보다 창작자라는 게 더 적확하다. 소설이 영화화되고 영화가 소설로 옮겨지는 게 다반사인데, 장르 구분은 작법의 차이일 뿐이다. 영화 찍을 돈도 없고 수많은 스텝을 통솔할 능력도 없는 히키코모리라도 블록버스터 영화는 어렵더라도 유튜브에 올린 단편 정도는 혼자 만들 수 있다(과연 히키코모리일까??). 노력의 문제일까, 재능의 문제일까, 운의 문제일까를 따지며 허송세월하지 말고 닥치고 만들어라! 시를 써도 시 같지 않고, 영화관에서 콜라를 보고 미친 듯이 잠을 잘 지라도 정지돈의 소설은 자기 탐닉에 빠진 창작은 아니다. 현실을 벗어난 이상주의자도 아니다. 그가 곧잘 소재로 쓰는 1960년대 뉴욕의 예술과 가십의 세계는 예술에 진지한 자리를 주지 않는다. 그에게 “진지함이란 시를 포함한 예술들이 살아남는 최고의 전략이다.”(「점심을 먹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시」, 65~66쪽) 무엇과 무엇을 잇는 불가분의 관계는 없고 무엇도 필연적이지 않지만, 이미 이루어졌기에 그 무엇도 우연이라고 할 수 없게 되는 ‘삶’은 그에게 끝없는 탐구 거리다. 태국의 영화감독 아피찻뽕 위라세타군의 말처럼 ‘꿈’을 가진 우리는 이미 최고의 영화를 소유하고 있다. 영화는 그런 꿈을 모방하려는 노력 중 하나다. 우리는 영화에서 수다스러운 이미지가 아니라 이미지가 품고 있는 진귀한 무엇을 원한다. 시에서 “가장 시적이지 않은 것은 감정이나 영원성의 결여가 아니라 수다스러운 것”(「좋아하는 것 또는 좋아하지 않는 것」, 21쪽)이듯, 우리는 안개 너머의 진짜를 원한다. 정지돈은 시와 관련해 가장 큰 영향을 준 책 두 권을 꼽았다. 나데쥬다 만델슈탐은 『회상』을 써서ㅡ“예술가에게 세계 탐지 감지는 석공의 손에 들린 망치와 마찬가지로 무기이자 도구다. 그리고 유일하게 실제적인 것은 작품 자체다(아크메이즘의 아침)”ㅡ 남편 오시프 만델슈탐의 작품이 조명되도록 만들었다. 시인 이장욱은 『혁명과 모더니즘』을 써서 20세기 초 러시아의 시인과 이론가들을 소개했는데, 정지돈은 이장욱의 평론을 통해 ‘아름다움과 분석적인 것은 반대 항이 아니고, 객관적인 것과 편파적인 것 역시 반대가 아니다’라고 느꼈다. 서로 다른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의 길항작용을 놓치지 않고 끌고 가는 좋은 글이었다고 평가하며, 말을 하기 위해서 배제와 적대가 가치처럼 쓰인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고, 그 속에서 발생하는 결여나 허물도 인정하는 게 좋은 글이라는 걸 배웠다고 말한다. 이 두 책을 고른 정지돈의 선택은 그가 자신의 글로 말하고자 하는 바와도 상통한다. 묻혀 있는 걸 찾아내고 제자리에 머물지 않는 분주한 세계 탐지와 서로 다른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의 길항작용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그의 글은 다름 아닌 그의 세계관이다. 그것을 통해 그가 원하는 ‘순수한 긍정과 기쁨’을 얼마나 얻었는지는 알 수 없다. 많은 환멸 속에서도 계속 쓰고 있는 건 성공적이란 소리가 아닐까. 마감과 밥벌이에 쫓겨서만 썼다면 몇 년이나 가겠나. 더 두고 보면 알겠지.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라는 말은 사실 거짓말이다. 또는 일부만 진실이다. 언어는 아무리 완벽해도 50퍼센트 부족하며 수사는 100퍼센트 오류다. 언어가 100퍼센트 진실일 때는 오로지 언어가 언어 그 자신으로 작동할 때뿐이다. 이것은 자아가 존재하지 않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느끼는 진실에 대한 감각은 뭘까. 어떤 언어를 접했을 때 정확히 표현했다고 느끼는 순간은 어떻게 도래하는 것일까.”

 

ㅡ 「나는 ~한다, 로고 ~한다. 그러므로 나는 ~의 ~다.」, 43쪽)

 

정지돈은 예술의 진정성에 기대지 않고 신변잡기적이고 가십에 가까운 시를 쓴 프랭크 오하라를 옹호했지만, 위의 문장을 보면 그가 문학의 진정성 딜레마에서 벗어난 것 같지는 않다. 그렇더라도 그는 낡은 시네필리아, 작가주의, 기성세대로서 사고하고 글을 쓰는 게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의 문체는 모로 가는 반항적 글쓰기가 아니라 정형에서 벗어나려는 탐구의 글쓰기다. 그가 소설가든 창작자든 문제 될 건 없다. 마음껏 쓴 뒤에 돌아보면 그가 만든 길이 보일 것이다. 그 길은 한참 전에 시작되었다.

 

 

 

 

ps) 정지돈, 금정연, 이상우, 오한기 등의 작가들이 ‘후장 사실주의’를 기치로 소통하는 게 흥미롭지만, ‘그들만의 리그’로 보이던 기성 문단과 얼마나 다른 변별을 보여주는지는 고민해야 할 것이다. 2000년대 한국 시단에서 이슈가 됐던 ‘미래파’가 자멸한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싫든 좋든 그들도 문단을 이루는 한 흐름이고, 권력도 없는 우리에게 뭘 바라나! 할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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