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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철학의 종말: 리처드 로티의 ‘철학적 전회’ | 기본 카테고리 2020-11-18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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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우연성, 아이러니, 연대

리처드 로티 저/김동식,이유선 역
사월의책 | 2020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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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 @eunkwang.critic.choi

다소 도발적인 이 글의 제목에 대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겠다. 이 제목은 분명 로티(Richard Rorty)의 중후기 사상을 보여주는 데 필요한 요소를 깔끔하게 갖추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의 사상을 완전히 관통할 만큼 충분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불어 ‘분석철학’과 그 ‘종말’이라는 민감한 두 단어가 불필요한 오해를 낳을 소지도 농후해 보인다.

우선 ‘분석철학’의 종말이라 운을 떼기는 했으나, 로티가 논하는 종말은 궁극적으로 전통 철학 전반에 해당한다. 여기서 전통 철학이란 거칠게 말해 플라톤의 전통을 이어받은 철학을 말한다. 이런 식으로 보자면 이천여 년 서양 철학사에서 로티의 비판을 피해갈 수 있는 철학은 사실상 거의 없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구태여 분석철학을 지목한 까닭은 이러한 성향의 철학이 여러모로 로티에게 상징적이기 때문이다. 상당히 역설적이지만 프래그머티스트로 전향하기 이전의 로티는 명망 있는 분석철학자였다. 잘 알려진 표현을 인용하자면, 로티는 바로 분석철학의 세계에서 분석철학을 공격하기 위한 폭탄을 만들어서 들고 나온 셈이다. 철학에 대한 로티의 폭격은 이처럼 분석철학에서 시작되었고, 그만큼 분석철학은 로티가 심중에 둔 반감의 근원을 잘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로티가 말하는 ‘분석철학’이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지 모호하다는 것이지만, 이는 곧 다시 논의하도록 하자.

한편 분석철학의 ‘종말’이란, 정확히 말하자면 로티가 직접적으로 사용한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로티 반대 진영의 어휘이다. 로티를 비판하는 이들은 그가 철학을 끝장내려 한다고 아우성치며 ‘철학 종언론자’라는 이름으로 폄훼했는데, 이후 ‘종말’은 마치 이단 종교에 붙어 다니듯 로티에게도 끈질기게 따라붙는 수식어가 되었다. 로티 사후 오 년이 훨씬 지났음에도 여전히 종말론의 망령이 그를 불명예스럽게 몰아세우고 있는 듯하다. 이런 오해를 낳은 것은 아마도 로티의 독특한 철학 개념 이해에서 비롯하는 것 같다. 그는 하나의 전문분야(ein Fach)로서 ‘철학과에서 다루는’ 좁은 의미의 철학과 ‘정합적 사고 활동’이라는 넓은 의미의 철학을 구분하며, 분명 전자에는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후자가 문화 전반에 널리 퍼지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후자도 분명 어떤 의미에서 철학이다. 철학이 완전히 소멸해버리기를 로티가 원했으리라는 근거는 찾기 어렵다.

물론 ‘분석철학’이 로티에게 대체로 좁은 의미의 철학으로만 이해된다면 여전히 ‘분석철학의 종말’은 의미 있는 표현일 것이다. 한편으로 로티는 분석철학을 분명 그런 식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사망 직전 출판한 선집에서조차 그는 여전히 이전과 별 다름 없는 목소리로 ‘분석적인 경향의 철학’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분석철학이 ‘망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그런 경향의 철학이 프래그머틱한 활로를 찾아 생산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 이미 중기부터 그는 콰인, 데이비슨, 셀라즈, 퍼트남 등에게서 희망을 보고 있었으며, 이런 희망은 이후 브랜덤이 등장하면서 확신으로 굳어졌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희망이다. 프래그머티스트로서, 로티는 분석철학이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고, ‘망하라’고 주문할 수는 더더욱 없다. 올바른 프래그머티스트의 자세는 (설사 자신의 믿음이 진리라 하더라도) 결코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짧지 않은 서론이 제목에서 풍기는 공격적인 암시를 다소나마 잠재우는 데 도움이 되었기를 바란다. 그러나 ‘분석철학’의 진영에 속하는 독자들이라면 앞으로 분명 더욱 강렬한 의구심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경우에 따라 이 글은 문제와 해답을 명확하게 구성하지 않고, 오히려 문제를 더 복잡하게 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렇듯 엄밀하지 않고 모호한(fuzzy) 글쓰기가 바로 전형적인 로티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는 논증(argument)이 아니라 서술(description)하기를 원한다.

여기서부터는 글을 쓰는 나와 독자 모두의 배려와 타협이 필요하다. 나는 최대한 분명한 어조로 논지를 전개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지만, 로티가 논증하려 하지 않은 지점을 내가 논증해내기는 어렵다. 무리하게 논변을 재구성하려다 보면 결국 로티가 본래 말하려 했던 방향에서는 아주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고, 나쁜 종류의 오독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논증을 원하는 독자를 상대함에도 논증을 끝내 피하려다 보면 결국 마지막 어딘가에서 어긋나거나 충돌하는 지점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 모두가 합리적인 과정을 거쳐 설득력 있는 합의에 이를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약간의 강한 오독은 로티도 기쁘게 받아들이리라 믿는다.

* * *

분석철학의 일반적인 서술 방식과는 대조적으로 로티는 아주 큰 그림을 그린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부터 자신의 후대 철학자까지를 모조리 아우르는 그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사상의 전반적인 골격부터 살피는 것이 옳은 순서이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엄밀하고 논리적인 기술 방식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그의 이야기는 분명 다소 예언적이고 심지어는 몽상적으로까지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충분히 예상되는 충격과 반발심을 최소화하기 위해, 가능한 한 독자들에게 익숙한 지점부터 시작해 조금씩 보따리를 풀어보겠다.

이 시점에서 독자들에게 가장 중요하고도 절박한 물음은 대체 로티가 말하는 분석철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일 것이다. ‘로티의 분석철학’의 범주는 무척 불분명하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공유하는 경향의 철학으로 보면 무방할 것 같다. 첫째, 표상주의를 중심으로 한다. 둘째, 토대에 대한 믿음이 있다. 셋째, 보편적인 합리성을 추구한다. 넷째, 논증을 강조한다. 한데 ‘분석철학자’들이 과연 이러한 분석철학의 조건에 동의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거니와, 설사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조건을 모두 갖춘 분석철학이 얼마나 많을지도 의문이다. 즉 이 조건을 강하게 해석하면 분설철학이 로티가 생사를 걸고 맞서 싸워야할 만큼 위협적인 적으로 보이지가 않는다. 그렇다고 이중 일부 조건만을 갖추어도 분석철학이라 부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면 ‘분석철학’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지 심각하게 회의가 일기 시작한다.

답답하지만 로티는 분석철학을 공격하면서도 이것이 무엇인지 더 이상 엄밀하게 정의하지 않는다. 아마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철학인이라면 대체로 분석철학이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이 때문에 로티의 공격은 허수아비 때리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심심찮게 있어 왔다. 그러나 로티가 이처럼 허술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무엇보다 프래그머티스트로 전향 선언을 하기 전의 로티는 분석철학계에 속했던 명망 있는 이론가였기 때문이다. 분석철학자로서 ‘제거적 유물론’ 등 여러 주목받는 이론을 제시했던 그가 분석철학계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믿음이나 해석에 익숙하지 않다는 가정은 그리 설득력이 없다. 나는 앞의 조건을 구체적으로 살펴 ‘분석철학’의 상을 좀 더 뚜렷하게 만들어보도록 하겠다.

첫째, 분석철학은 표상주의를 중심으로 한다. 로티는 분석철학자들이 현상 너머에 있는 실재 혹은 본질에 대한 믿음을 견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상이란 독사(δ?χα)요 우연적인 것이며 일시적이고 덧없는 것인 반면, 본질은 로고스(λ?γο?)이자 필연적이고 절대적이며 영속적인 것이다. 이러한 본질이 바로 ‘진리(TRUTH)’이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참”이나 “진리” 개념을 넓고 약한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렇게 소문자로 표기되는 ‘진리(truth)’는 “문장이나 행위, 혹은 상황의 속성”을 가리킨다. 그러나 대문자 ‘진리’는 “특정한 대상, 즉 사람들이 온 마음과 영혼을 다해 사랑하는 목표나 표준이나 궁극적 관심의 대상”이다. 여기서는 굵은 활자 및 홑따옴표를 사용하여 대문자 진리(TRUTH)를 ‘진리’로, 소문자 진리(truth)를 ‘진리’로 표기한다. 마찬가지로 대문자 철학(PHILOSOPHY)은 ‘철학’, 소문자 철학(philosophy)은 ‘철학’으로 표기한다. 둘을 구분하지 않고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할 때는 맥락에 따라 그대로 표기하거나 “진리”, “철학”처럼 겹따옴표를 사용한다.

현상 세계가 이데아 세계의 ‘진리’를 거울처럼 비춘다는 메타포는 플라톤 세계관의 이분법이다. 로티는 이러한 이분법이 분석철학에 여전히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가령 인식론에서는 주객이나 심신이 분리된다. 언어철학에서는 언어를 매개로 인간과 세계 간의 관계를 설정한다.

둘째, 분석철학은 토대에 대한 믿음을 갖는다. ‘실재를 거울처럼 비출 수 있다는’ 파르메니데스적 메타포가 성립한다고 가정할 때, 우리가 적절한 수단만 찾는다면 영원불변한 본질적 진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를 통해 기존의 모든 지식을 뒤집고 새로 탄탄한 기초를 확립하려 한 것이 바로 이러한 욕구의 산물이다. 데카르트 스스로 그러한 작업을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에 비유한다. 즉 방법적 회의란 모든 지식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지식을 만들어내는 작업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지식의 진리치를 결정해줄 어떤 기초가 있다는 믿음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을 로티는 ‘데카르트적 불안’이라 일소한다. 이 불안은 칸트를 거치면서 더욱 발전해 전문학과로서의 ‘철학’을 낳기에 이르렀다. 이제 ‘철학자’들은 ‘철학’을 만학의 기초로 여기게 된다.

일단은 여기까지 로티의 이해를 받아들여 분석철학이 실제로 표상주의와 토대주의를 중심으로 한다고 인정해보자. 그러나 본질과 토대에 대한 믿음이 대체 왜 그에게 문제가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답은 로티가 강한 역사주의자이자 다윈주의자라는 것이다. 로티는 문화가 “인간의 우연하고도 일시적인 고안물”이며 인간의 역사란 바로 “진부한 고안물이 새롭게 개선된 고안물에 의해 대체되는 것”이라 믿는다.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진화이다. 그러나 진화에는 어떠한 방향성도 없으며, 당연히 더 옳고 더 그른 방향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과 세계는 사실상 모두 우연의 산물이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넘어선 채로는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으며, 인간이 믿는 진리란 역사적인 맥락 아래 ‘만들어졌을’ 뿐이다. 「언어의 우연성」, 「자아의 우연성」, 「공동체의 우연성」으로 시작하는 그의 주저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의 목차는 로티의 이러한 믿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또 다른 대답은 로티가 프래그머티스트라는 것이다. 퍼스(Charles S. Pierce)와 제임스(William James)에서 출발한 프래그머티즘의 전통적인 테제는 철학이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인 논의에만 머물거나 실생활과 동떨어진 진리만 탐구하기보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에 천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형이상학은 어떤 식으로든 플라톤의 메타포를 수용하는 모든 철학적 방법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며, 인간을 넘어서는 어떤 관점으로 사태를 바라보거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일체의 시도를 의미한다. 이런 관점의 세계가 실재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설령 일부를 알 수 있다 하더라도 이런 지식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 프래그머티스트의 믿음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진리”는 ‘믿기에 좋은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다면 사실과 가치 사이에 어떤 형이상학적 차이가 있을 이유도 없으며, 철학적 탐구에 어떠한 제약이 있을 이유도 없다. 그러나 본질과 토대에 대한 믿음은 “철학자”들을 무겁게 제약한다.

이러한 제약이 “철학자”들을 얼마나 짓눌렀는지는 최근의 철학사만 살펴보아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19세기부터의 철학사는 대체로 초월주의와 경험주의의 대립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로티에 따르면 플라톤주의와 실증주의라고도 부를 수 있는 두 진영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플라톤에서 시작해 칸트와 헤겔로 이어지는 초월주의 진영에서는 자연과학적 지식이 맹위를 떨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식이 최종적이지 않으며 더 밝혀낼 진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홉스나 콩트, 마르크스로 대변되는 경험주의 진영에서는 자연과학적 지식, 즉 시공간 내 사물들의 작동 원리에 관한 사실이 곧 진리라고 생각한다. 두 진영은 이렇듯 반목하고 있으나 외부의 절대적인 ‘진리’를 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었다.

이러한 가정에 의심을 품고 니체와 같은 회의주의 철학자들이 등장한다. 로티의 프래그머티즘은 “진리”를 차별적으로 구분해야 한다는 전제 및 초월주의와 경험주의가 내세운 구분법을 의심한다는 점에서 회의주의의 연장선에 있다. 어떤 면에서 반본질주의와 반토대주의는 로티의 독창적 산물은 아닌 셈이다. 그럼에도 로티가 보기에 니체와 같은 전통적인 회의주의자는 여전히 초월적인 어떤 것을 믿고 있다는 점에서 ‘진리’를 믿는 초월주의자나 경험주의자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가령 니체가 철학사의 유산을 극복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이상적 인간상인 ‘위버멘쉬(Ubermensch)’를 제시하는 순간, 여타 철학자들과 같이 ‘진리’의 덫에 걸려들었다고 로티는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로티는 인식적 권위를 얻은 그 어떤 개념에 대해서도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한 권위는 우연히 얻게 된 것인 한 결코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연성에 근거하여 진리를 불신하는 태도는 여기서 더 나아가 학문으로서 철학의 특권적인 위치를 거부하는 데까지 이른다. 로티에게 있어 나무의 비유로 철학의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데카르트의 기획 같은 것은 그저 무의미하다. 그의 진단에 따르자면 철학이 과학의 권위를 등에 업거나 스스로 과학이고자 하는 시도는 시대착오적이다. 물론 그가 단순히 철학이나 과학을 폐기하자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학문의 장점을 로티는 인정한다. 그러나 여하간 특권적인 위치를 누려온 학문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로티의 분석철학’이 갖는 세 번째 특징은 보편적인 합리성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로티가 합리성을 거부하고 비합리성을 옹호한다는 뜻으로 비칠 수 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로티 역시 합리성을 강하게 지지한다. 문제는 ‘합리성’이 아니라 그것이 ‘보편적’이라는 점에 있다. 합리성을 해석하는 한 가지 방식은 이를 환경에 대한 적응 정도, 즉 진화론적 관점으로 보는 것이다. 가령 오징어는 아메바보다 더 복잡하다는 점에서, 현대기술로 무장한 인종은 그렇지 못한 인종보다 환경에 더 복잡하게 대처한다는 점에서 더 합리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합리성은 인간에게 어느 문화권에 속하는 것이 더 나은지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윤리적으로 중립적이며, ‘보편성’을 이야기할 수 있는 종류도 아니다. 합리성을 이해하는 또 다른 방식은 이를 인간과 짐승을 구분해주는 요소로 보는 것이다. 가령 이는 ‘특정 행동을 하느니 죽는 편이 낫다’는 사람들의 생각에서 흔히 드러나듯, 단순한 생존보다 높은 목표를 설정한다. 바로 이것이 로티가 비판하고자 하는 ‘보편적’ 합리성이다.

보편적 합리성은 로티에게 합리주의, 남근중심주의, 존재형이상학, 플라톤주의 등의 이름으로 비판받는다. 그렇다면 로티가 옹호하는 합리성은 이와는 대비되는 성격을 가질 것이라 짐작할 수 있겠다. 로티가 제시하는 합리성의 마지막 해석 방법은 이를 ‘관용’의 동의어로, 혹은 ‘자유’의 준동의어로 보는 것이다. 즉 이는 타인과 조화할 수 있는 능력이며, 타인을 강압하기보다 설득하는 능력이다. 보편적 합리성 아래의 인간 문화는, 모든 인간을 ‘보편적으로’ 인정하거나 존중할만한 어떤 것이며 금수와 같은 성질을 극복한 대상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로티는 표면적인 복잡성(진화론적 합리성)과 내면적인 덕목(로티의 합리성, 혹은 연대적 합리성)을 통해 합리성 문제를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보며, ‘인간에게 보편적이지만 인간에게만 고유한 어떤 것’이라는 합리성을 구태여 도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칸트적 직관, 즉 ‘모든 인간은 공통적인 관념이나 원칙을 갖고 출발한다’는 생각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로티가 분석철학을 비판하는 요지는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조건이 분석철학의 조건이 맞다고 할 때) 상당히 단순하다. 즉 분석철학의 전제는 살아가는 데 “필요하지도 않고, 충분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이 전제가 삶에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본질과 토대, 보편적 합리성이라는 분석철학적 전제가 실생활의 관점에서는 잉여 지식이며 과잉된 지식을 계속해서 낳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런 지식이 없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전제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은, 설사 본질, 토대, 보편적 합리성을 기반으로 한 모종의 합리적 지식을 우리가 마련했다 하더라도 (다윈적 의미에서) 삶을 개선해 나가는 데 이를 어떻게 써먹을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물론 이는 고전적인 몇몇 반박에 부딪힌다. 우선 어떤 보편적인 옳음도 없다는 로티의 견해는 당장 퍼트남(Hilary Putnam)으로부터 상대주의라는 공격을 받는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비판은 정당할 수도 있다. 분명 로티는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는 점에 강하게 동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모든 믿음이 동등한 정도로 좋다’는 뜻은 아니다. 즉 그는 분명 어떤 믿음이 옳고 다른 믿음이 그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한 믿음이 다른 믿음보다 설득력이 있다는 점에서 더 나을 수는 있다고는 생각한다. 한편으로 ‘진리’란 정당화 과정의 수만큼이나 많은 의미를 가진다는 견해도 있을 법하다. 이런 견해는 다원주의 진리론과 가까울 수도 있다. 이는 로티에 상당히 근접한 견해이지만, 강하게 해석 가능한 “진리”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구분된다. 로티에게 “참” 혹은 “진리”란, ‘여기’, ‘저기’, ‘너’, ‘나’, ‘선’, ‘악’ 등 모든 문화에서 공통적인 유연한 용어에 불과하다. 여기서 모든 것이 옳거나 모든 것이 옳지 않다는 상대주의적 시각은 들어 있지 않다. 로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그러한 옳고 그름의 구분 자체를 해소하자는 것이다.

이어지는 반박은 분석철학이 실생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해서 이를 완전히 거부하자는 견해가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해킹(Ian Hacking)이 이런 식의 반론을 제기하는데, 그는 지금까지 사람들이 지식의 토대를 추구했던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토대를 찾는 작업이 무의미하다거나 그런 작업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없다고 말한다. 즉 해킹은 여전히 토대나 진리를 찾는 작업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로티가 ‘아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런 작업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대꾸한다면 이 둘의 접점은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로티는 프래그머티스트이며, 그런 식으로 재반박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의 입장에서 답변을 구성하자면 다음과 같은 비유가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가령 의사 백 명으로 구성된 종합병원을 상상해보자. 그런데 백 명의 의사가 모조리 흉부외과 전문의거나 뇌신경 전문의라 가정해보자. 물론 흉부외과나 뇌신경 전문의는 여러 사람의 목숨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직책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복합 골절 환자를 치료해야 할 수도 있고, 어쩌면 여러 부서의 공조가 필요한 환자가 입원할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는 흉부외과 전문의가 아무리 중요한 일을 맡고 있더라도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며, 이 병원을 더 이상 종합병원이라 부르기도 곤란해질 것이다. 로티는 이런 관점에서 분석적 철학과 대화적 철학(Conversational Philosophy, 혹은 대륙 철학)의 공조를 희망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 *

나는 아직 ‘로티의 분석철학’의 네 번째 특징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로티가 논증적인 성향의 철학에 비판적이라는 것이 바로 네 번째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쯤에서 로티의 전체 사상을 간략히 살펴보는 일이 지금 언급한 네 번째 특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리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다룬 내용이 어느 정도 앞으로 올 내용에 대한 충격 완화 역할을 해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나는 로티가 어떤 철학적 문화를 희망했는지부터 곧바로 시작하겠다.

앞서 보았듯 로티는 특권적인 진리를 거부하고 있다. 진리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는 동시에 대화를 통한 자아 창조의 욕구를 버리지 않는 인물이 로티가 생각하는 새 시대의 인간상이다. 이 인물은 문학(적인 철학)을 통해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는 구별되는 자신만의 어휘를 만들어내려 노력한다. 로티는 이를 ‘마지막 어휘(final vocabulary)’라 부른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방식대로 마지막 어휘를 추구한다는 로티의 견해에 따른다면, ‘위버멘쉬’는 니체의 마지막 어휘이며 ‘차연(Differance)’은 데리다의 마지막 어휘라 할 수 있다. 한데 이 인물은 진리를 끝없이 의심한다는 그 특성 때문에 자신의 마지막 어휘에 대해서도 끝없이 의심을 품어야 할 것이다. 로티가 볼 때 니체와 데리다는 바로 여기서 실수를 했다. 그들은 자신의 마지막 어휘가 정말 ‘마지막’이라고 굳게 믿어버렸다는 것이다. 요컨대 어떤 종류의 인식적 특권에 대해서도 의심하는 이 인물상이 바로 ‘아이러니스트(ironist)’이다.

아이러니스트는 “다양한 지식을 가진 딜레탕트” 혹은 “다방면에 뛰어난 사람”이며, “다양한 담론 사이에서 소크라테스처럼 매개를 담당하는” 구실을 한다. 그러나 그는 “어떤 비밀을 아는 사람도 아니고 진리에 도달한 사람도 아니며 다만 인간다움이라는 관점에서 출중한” 인물일 뿐이다. 이 때문에 아이러니스트에게는 타인의 견해가 옳다거나 그르다는 식으로 평가를 할 권리가 없다. 단지 그들은 다른 아이러니스트의 어휘를 자기 식대로 강하게 오독하여 자아 창조의 밑거름으로 삼을 수 있을 뿐이다. 철학사를 기존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서술하는 로티의 작업에는 어느 정도 의도가 깔렸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티의 세계가 판단의 기준이 완전히 부재한 무법천지라고는 하기 어렵다. 아이러니스트는 기본적으로 모든 견해가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고 판단하지만, ‘잔인성(cruelty)’에 대해서는 예외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다.
잔인성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전에 로티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구분하고 있다는 점을 먼저 확인하고 넘어가자. 사적 영역은 문학과 예술의 영역이자 자아 창조를 위한 영역이며 공적 영역은 실천의 영역이자 정치적인 담론의 영역이다. 예컨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교회에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라는 발언을 가정해 보자. 이 진술의 전건은 사적 영역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후건은 공적 영역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로티는 이 두 영역을 반드시 구분해야만 하며 구분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논리적인 타당성과는 별개로 ‘따라서’라는 접속사로 연결된 위 진술은 잘못된 것이다.

아이러니스트란 기본적으로 철저히 사적 영역에만 국한된 개념이다. 한데 사적 영역의 아이러니스트가 타인의 마지막 어휘에 대해 가부를 판단할 수 없는 것과는 달리 공적 영역의 진술에 대해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다. (물론 이는 아이러니스트의 자격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때 판단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다른 인간에 대해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감각”, 즉 ‘연대성(solidarity)’이다. 연대성의 기초가 되는 특징적인 감각 중 하나가 바로 잔인성에 대한 거부라고 할 수 있다. 공적 영역에서 잔인성을 거부하는 인간상은 ‘자유주의자(liberal)’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로티가 공적 영역의 잔인성을 이야기할 때는 주로 파시즘과 전체주의를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사적 영역까지 고려한다면 ‘인간을 압제하는’ 모든 종류의 시도가 다 잔인성에 포함되는 것이라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실제로 로티가 사적 영역에서 잔인성이 발휘될 수 있음을 암시할 때는 대체로 이러한 의미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사적 영역에서 “진리”와 같은 개념을 도입하는 것도 인식의 굴레로 인간의 자아를 묶어두려는 일종의 잔인한 행위로 분류할 수 있다. 즉 파시즘을 거부하는 쪽이든 진리를 거부하는 쪽이든, 잔인성에 거부감을 갖는다는 측면에서 아이러니스트와 자유주의자는 (태생적으로) 유사하다. ‘우연성’에서 출발한 로티 프래그머티즘은 이런 식으로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liberal ironist)’를 그 종착지로 삼는다.

이제 네 번째 조건을 살펴보겠다. 로티는 왜 논증을 거부하는가? 우선 사적 영역부터 살펴보자. 앞서 밝혔듯 사적 영역의 아이러니스트는 어떤 견해가 옳다거나 그르다는 식으로 말할 수 없다. 아이러니스트에게는 오로지 자신의 내적 정합성만이 문제가 된다. 예컨대 아이러니스트 A가 SA를 마지막 어휘로 추구한다고 하자. 반면 아이러니스트 B는 SA를 강하게 오독하여 SB라고 이해한다. 아이러니스트 C는 SB를 강하게 오독하여 SC라고 이해한다. 이때 SA, SB, SC가 각각 내적으로 완전히 정합적이라 가정하면 이들이 텍스트를 다루는 방식에는 로티의 관점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물론 이런 경우 소통이 불가능하지 않겠느냐고 우려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말했던 대로 이들은 서로의 견해가 옳다고 주장할 수 있고, 서로 논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데 그런 담화 행위가 가능하다고 해도 어느 한 쪽이 더 참에 가깝다는 점을 모두가 인정하지 않는 한 합의에 이르는 일은 요원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로티는 사적 영역에서의 담화일 경우 그런 식의 합의가 결코 필요 없다고 단언한다. 사적 영역은 어디까지나 자아 창조의 영역이며 이 영역에 대해서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고 단지 삶에 유용한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의 관점에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적 영역의 사정이 그렇다면 공적 영역의 형편은 어떠한가? 로티에 따르면 사적 영역과는 달리 공적 영역의 진술은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다. 이때 판단을 내리는 개인은 사적 영역에서는 여전히 특정한 진리를 주장하지 않는 아이러니스트이지만, 공적 영역에서는 적절한 판단을 이끌어내는 자유주의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로티는 이 두 영역을 반드시 구분해야만 하며 구분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즉 로티에게 있어 자유주의자의 공적 영역은 실천의 영역이자 정치적인 담론의 영역인 반면, 아이러니스트의 사적 영역은 문학과 예술의 영역이자 자아 창조를 위한 영역인 것이다.

로티는 미국의 정치가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이러한 생각을 잘 대변해 준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미국은 유일신 신앙에 기반을 둔 국가라 생각되는 까닭에 제퍼슨의 다음과 같은 단언은 매우 놀랍게 들린다. “우리 시민에게 신이 스무 명쯤 있다고 말하거나 아예 없다고 말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분명 미국은 특정 국교(國敎)를 인정하는 한편으로 자유주의라는 기치 역시 내세우고 있다. 여기서 종교적 가치를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면 자유라는 가치를 실현하기가 어려워졌을 것이다. 여기서 로티가 이해한 제퍼슨식 해법이 공사 영역의 구분이다. 즉 제퍼슨은 종교를 사적 영역의 어휘로 인정하되 사회적 합의는 공적 영역에서 수행하도록 분리했다는 것이다. 즉 제퍼슨은 종교를 합의의 기본 원리로 내세우지 않았다. 그리고 로티에 의하면 이는 그렇게 하는 일이 부당하다는 우리의 감각에 호소한다.

로티의 표현을 따를 때, ‘철학자’라면 즉각 이 ‘감각’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느냐고 질문할 것이다. 로티는 그것이 “다른 인간에 대해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감각”, 즉 ‘우리 의식(we-intentions)’이라 설명한다. 이는 ‘공통적인 인간성’과 같은 넓고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더 좁고 구체적인 관계에 의해 발현된다. 가령 내 옆집 사람이 누군가에게 맞아서 죽을 지경이 되었다면 나는 그가 내 옆집 사람이기 때문에, 따라서 그와 나에게 공통적인 어떤 것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그가 나의 관점에서 ‘우리’에 속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기꺼이 도와주려 한다는 것이 로티의 설명이다. 여기서 그가 나와 같은 인간이며 인간의 의무를 지켜야 하므로 그를 돕자고 호소하는 칸트의 시도는 거의 쓸모가 없는 셈이다. 로티는 사람 사이의 연대성이 이런 구체적인 ‘우리 의식’에 기반을 둔다고 생각한다.

‘철학자’는 다시 이런 ‘우리 의식’이나 연대성이 무엇을 기초로 발현되는지 물을 것이다. 로티는 연대성을 성립할 수 있게 해 주는 인간의 특징적인 감각 중 하나가 바로 잔인성(cruelty)이라 본다. 잔인성에 대한 거부를 통해 사람들은 공동으로 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 혹은 다수 세력이 다른 인간에게 잔인성을 발휘할 때는 통상 그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방향으로 나타난다. 공적 영역에서 잔인성을 거부하는 인간은 이와 반대로 자유주의자의 모습을 띤다. 이런 식으로 한 인간은 사적 영역의 아이러니스트이자 공적 영역의 자유주의자일 수 있고, 이로써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가 완성된다.

여기서 ‘철학자’는 다시금 잔인성이 무엇에 기초하는지 되물을 수 있지만, 로티는 더 이상의 문답교환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이는 계속해서 비순환적인 근거를 물어갈 수 없는 ‘감각’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나의 신념은 우연적인 역사적 상황 이상의 심오한 어떤 것에 의해서 야기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그 신념이 행동을 규제할 수 있으며, 그 신념이 그것을 위해 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물론 혹자에게 이런 일은 “통탄할 일이며, 회피해야 할 유혹”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로티는 이러한 감각을 철학에 기초해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이렇게 일축한다. “도덕·정치적 논쟁이 언제나 ‘그 제일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가 합의를 얻으려는 희망에서 공통 근거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일리가 있다. 그러나 자연적인 질서를 전제로 도덕·정치적 결론이 도출된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사적 영역의 아이러니스트에게 논증이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이는 어떤 믿음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는 아이러니스트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 근간은 공적 영역의 기본 가치로 지지 받는다. 자유가 우선인가, 아이러니스트적 활동이 우선인가? 로티는 당연히 자유가 우선이라 답한다. 공적 영역의 자유가 없다면 사적 영역의 아이러니스트도 있을 수가 없다. 한데 이 두 영역이 이런 식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공사 영역을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는 로티의 주장은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나는 이런 주장이, 사적 영역의 활동이 으레 공적 영역으로 침범해 들어가는 까닭에 로티가 미리 주는 경고라 생각한다. 사적 영역에서 수립된 마지막 어휘를 공적 영역으로 가져오고 싶은 욕망이 아주 자연스레 생겨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적 영역의 아이러니를 위협할 뿐 아니라 공적 영역의 자유까지도 흔들 수 있다. 공적 영역은 자유인의 영역이며, 옳고 그름에 대한 강요 대신에 설득과 합의가 있는 영역이다. 그러나 사적 영역에서 넘어온 본질주의는 공적 영역의 인간을 잔인하게 만들며 이는 다시 사적 영역의 아이러니마저 무너뜨린다.

* * *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을 반론을 하나만 고려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겠다. 설령 “철학”이 ‘철학’의 벽을 쌓고 절대 ‘진리’를 추구해온 데 일부 오류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모든 담화가 앞선 담화의 재해석일 뿐이며, 그래서 세상에는 오로지 담화만 존재한다고 하는 견해는 상당히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로티에 따르면 철학적 담화든 문학적 담화든 과학적 담화든 재서술과 재해석하는 담화 형태라는 점에서 하등 차이가 없으며, 따라서 이 셋의 위계 차이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정말 합리성과 진리를 완전히 배척하는 길이 옳은가? 과학적 합리성은 그동안 세상을 충분히 발전시켜 왔으며, 과학적 진리 추구 덕택에 세상이 크게 변화하지 않았는가?

데이비슨과 퍼트남은 로티의 견해에 대체로 동의하지만 진리와 합리성에 대한 견해만큼은 분명히 다른 노선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여기서는 퍼트남의 견해를 간략히 살펴보겠다. 퍼트남의 내재주의는 로티에 의해 사물이나 세계에 대한 ‘신의 관점’을 포기하려는 시도로 이해되었으며, 이런 해석에 의해 당연히 로티는 자신의 프래그머티즘이 퍼트남의 내재주의와 사실상 동일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퍼트남은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한다는 시각을 거부하면서도 규범이 오로지 지역적으로만 작동한다는 로티의 견해 역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가 보기에 절대주의 혹은 실증주의가 한 극단이라면 로티의 견해는 또 다른 극단이다. 앞서 보았듯 퍼트남은 이러한 로티의 견해를 상대주의로 귀결 짓는다. 어느 한 문화의 믿음으로 다른 문화의 믿음을 시험해 보는 것이 로티의 세계라면, 그리고 이것이 다른 방향으로도 적용될 수 있다면 상대주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아가 퍼트남은 이런 식의 담화가 결코 이상적인 종착지를 가질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퍼트남이 보기에 ‘오직 담화만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어떤 기준 담화가 있지 않은 한 상대주의를 피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상적인’ 종착지를 말하는 데서 이미 알 수 있듯, 퍼트남은 여전히 어떤 의미에서 본질주의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로티는 이런 가정을 도입하는 순간 ‘오직 담화만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담화가 (결국) 하나로 수렴된다’는 주장으로 미끄러져 내려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로티는 인간의 활동이 수렴된다기보다 증식된다는 파이어아벤트의 입장을 받아들인다. 기준 담화를 가정한다는 것은, 신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만약 존재한다면 그 관점에서 우리를 볼 때 흡족할 것이라 자위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객관성이 아니라 연대성에 따라 움직인다면 인간은 미리 결정된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더욱 흥미로운 일을 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진리와 합리성은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

로티는 객관적 합리성을 연대성으로 대체하는 편이 프래그머틱한 관점에서 더 낫다고 주장한다. 앞서 말했지만, 안타깝게도 이에 대해 더 나아간 근거를 제시할 수는 없다. 이는 단지 우리가 그러한 감각을, 그리고 유관한 희망을 공유한다는 사실, 그리고 공유한다는 믿음을 가진다는 사실로 뒷받침될 수 있을 뿐이다. 로티의 입장에서 다소 위안이 되는 지점은, 이런 사정은 반대편 진영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객관적 합리성이 연대성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럴듯한 근거는 없다. 여기서부터는 어디까지나 세력 싸움의 문제이다. 로티는 프래그머티즘 진영의 세력이 우세해지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며 실제로 그렇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런 생각이 현 상황에 가장 잘 대처하는 방안이라 믿기 때문에 그리 하는 것이다.

질문과 다소 동떨어진 서술로 에둘러온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으나, 지금까지 내가 한 이야기가 바로 과학적 합리성에 관한 이야기였다. 로티는 기본적으로 경험 과학과 그 결과를 신뢰한다. 그가 다윈주의를 믿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경험 과학이 어떤 객관적 진리를 말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이 시점에서 물리적 세계에 대해 가장 설득력 있는 담화를 제공해준다는 관점에서 신뢰하는 것이다. 한데 진짜 문제는 가장 설득력 있어 보이는 담화가 지금까지 대체로 과학적 담화였다는 지점에서 비로소 생겨나기 시작한다. 문제는 과학이 아니라, 모든 담화 방식을 과학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시도이다.

과학적 객관성에 대한 수사는 우리의 윤리와 정치적 삶을 과학적으로 만들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과학에는 아무 잘못도 없다. 단지 그것을 신성화하려는 시도, 즉 실재론적인 철학으로 만들어내려는 시도가 잘못된 것이다.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유민주주의와 그 범위를 넓히려는 철학자들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다만 다른 대안보다 ‘객관적’인 대안이 더 우월하다는 점을 증명하려는 시도에 문제가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 분석철학의 한 끄트머리가 고개를 내민다. 이제 문제를 열어둔 채로 철학의 진화를 기다리자. 분석철학은, 혹은 전통적인 모든 철학은 종말을 맞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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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후마누스: 역사의 미래 | 기본 카테고리 2020-11-18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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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호모 데우스

유발 하라리 저/김명주 역
김영사 | 2017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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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대한 약간의 해명이 필요하겠다. 이 글의 제목은 당연히도 하라리(Yuval Noah Harari)의 근저 『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의 변형이다. 하라리는 “21세기의 인간은 불멸에 진지하게 도전할 것”이며 “떠오르는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은 분명 세계를 탈바꿈시킬” 방향으로 전개되리라는 예측 아래 이러한 제목을 선정했다. 그러나 나는 설사 그러한 조건이 실제로 성취된다 하더라도, 즉 설사 인류의 다음 단계가 신인(新人, homo deus)이라 하더라도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본질은 남을 것이며, 호모 데우스조차도 그러한 본질적인 인간적 인간(homo humanus)상을 끝내 추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믿음 아래 이 제목을 오마주했다. 나는 이 글에서 흔히 따분하게도 ‘인간성’으로 명명되는 인간의 특질, 혹은 본질을 다시 한번 탐구하고자 시도한다.

생물학적 진화로 대변되지 않는 새로운 종(種)의 출현 및 이들과 인간과의 공존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은 이미 오래전부터 지상을 떠돌고 있던 것이다. “생명공학은 인간이 세균과 바이러스를 격파할 수 있게 해주는 동시에 인간 자체를 전례 없는 위협으로 바꾼다”는 하라리의 진술은 두려워해야 할 두 가지 현대적 사건 중 하나로 “신의 특권으로만 여겨졌던 창조적 힘”의 획득을 들었던 아렌트(Hannah Arendt)의 반세기 이상 묵은 우려를 상기시킨다. 구태여 상아탑을 들여다볼 것도 없이, 이미 대중매체는 보편화한 인공지능 시대의 도래부터 인공지능과의 공존 또는 그들의 반란까지, 인간화한 인공지능이나 인공화한 인간의 사회적 부조리와 개체적 고뇌에 이르기까지, 심지어는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전통적인 휴머니즘을 들고 오거나 인공지능과 일견 차별되는 ‘생물’로서의 감정에 호소하는 등 해볼 수 있을 만한 이야기는 다 해본 상태이다.

이러한 상황에 ‘예측’을 한 마디 더 얹는 일이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대신 나는 ‘인공지능과의 공존’이라는 미래에 대한 모든 기대와 우려를 일단 받아들인 채로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즉 다가올 미래에 인공지능 또는 인공화한 신인류(新人類)가 출현할 것인데(이를 ‘미래인류’라 하자), 이는 그 본성상 반드시 전통적인 인간(이를 ‘현생인류’라 하자)들의 사회에서 그 존재를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경우의 수는 이러할 것이다. 미래인류가 현생인류보다 (힘, 지능, 혹은 다른 모든 또는 어떤 면에서) 강하거나 혹은 약하거나, 전자가 후자에 대해 적대적이거나 혹은 우호적이거나. 그러므로 우리가 검토해 볼 상황은 미래인류가 현생인류에 대하여 강하고 적대적인 경우, 강하지만 우호적인 경우, 약하되 적대적인 경우, 약하며 우호적인 경우로 최소한 네 가지이다.

미래인류가 어떤 면에서든 현생인류보다 충분히 강하고 현생인류에 대해 적대적이기까지 할 때 빚어질 결과는 우리가 이미 익히 예견하고 있는 디스토피아적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설사 미래인류와 현생인류가 주위적으로 소비할 자원의 종류가 달라서 당장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더라도, 이는 배부른 사자 우리에 갇히느냐 배고픈 사자 우리에 갇히느냐 정도의 차이밖에 없는 것이어서 특별히 귀결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이러한 결과는 강한 미래인류가 현생인류에게 우호적인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날 것이다. 미래인류란 결국 현생인류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종이라 할 때, 이러한 우호적 태도가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지는 불분명한 노릇이기 때문이다. 당분간 미래인류의 우호적 태도가 유지될 수 있다 하더라도 현생인류는 자연적으로 도태될 공산이 크고, 두 종의 차이는 “마음의 습관과 존재 방식에 결부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미래인류는 현생인류의 도태를 그저 우호적으로 묵과하고 말 것이다.

한편, 미래인류가 현생인류보다 약해서 현생인류의 종 보존이 그 자체로 위협받지 않는 경우라면 우리 앞에 당면한 규범적 문제가 두드러진다. 그것은 현생인류가 미래인류에 대해 갖는 정체성의 문제이다. 현생인류의 특정 능력을 생물학적으로 혹은 물리적으로 강화(强化)하는 방식이든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 현생인류가 미래인류를 창조하는 방식이든 간에, 궁극적인 형태의 미래인류는 현생인류와 (적어도 기능면에서는) 본질적인 측면에서 차이가 없는 종으로 완성될 공산이 크다. 이 시대의 유전공학이나 인공지능 기술이 의심의 여지 없이 그러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생인류가 미래인류를 (어떤 고차원적인 의미로서의) 본질적인 측면에서 같은 종으로 ‘받아들일’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나는 이 경우 현생인류가 미래인류에 대한 우위를 계속 점하기 위해 스스로의 본질성 내지는 ‘원본성(原本性)’을 강조하고 나올 것이라 강하게 예상한다.

사실 이는 미래인류가 현생인류보다 강한 경우에도 당연히 문제가 되는 것인바, 이때 현생인류에게는 생존이 더 급박하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가 덜 중요하게 여겨질 뿐이다. 미래인류가 현생인류보다 강한 경우에도, 현생인류가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는다면 비록 사실적으로 미래인류가 현생인류를 정복할지라도 현생인류는 적어도 규범적으로는 존속할 당위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래할 미래의 모습이 어떠할지라도 인간성을 탐구하는 일은 현생인류에게 필수불가결한 일이 될 것이다.

인간 본질로서 인간성의 가능한 후보군을 빠르게 탐색해보자. 현생인류의 본질로서 인간성이라 할 때, 인공지능과의 비교에서만 드러나는 인간의 특징은 이러한 인간성의 충분조건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어떤 특징을 찾으려 한다면, 그러한 특징은 일종의 최소한의 공통분모로, 근원에 뿌리 박혀 있어서 모든 사람이 이를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생인류와 ‘본질적으로 다른’ 미래인류를 마치 동물의 새로운 한 종인 마냥 상정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고통과 쾌락의 감각 여부나 그 지수, 감정, 사회성, 그리고 지능지수나 문제해결 능력은 인간성의 후보에서 곧 기각된다. 이러한 특징은 모두 동물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모든 동물이 이러한 능력 모두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반대로 이 중 어느 하나도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아니다. 한편으로는 “오직 인간만이 복잡한 수학 문제를 풀 수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인간이 그것을 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유의지는 어떨까? “지난 세기 과학자들은 사피엔스의 블랙박스를 열어 그 안에 영혼, 자유의지, ‘자아’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안에 있는 것은 다른 모든 실재들과 똑같은 물리적·화학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 유전자, 호르몬, 뉴런뿐이었다.” “‘자유’라는 신성한 단어는 알고 보니 ‘영혼’과 마찬가지로 의미를 밝히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알맹이 없는 용어였다. 자유의지는 앞으로 우리 인간이 지어낸 상상의 이야기 속에만 존재할 것이다.” 이러한 단언에는 분명 다소 성급한 측면이 있지만, 일단 이를 받아들이고 나면 자유의지 역시 후보군에서 탈락한다. “뉴런 하나가 발화해 전하를 내보낼 때, 그것은 외부자극에 대한 결정론적 반응이거나 아니면 방사성 원자의 자발적 붕괴 같은 무작위적 사건의 결과”일 뿐이라면, 이는 동물에게 있어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자유의 문제에서 인간과 동물에게는 결코 작지 않은 차이가 있다. 그것은 일정한 인과관계를 ‘규범적’으로 추상화하는 능력의 보유 여부이다. “어떤 희귀한 돌연변이에 의해, 땅콩 한 알을 먹으면 행복한 감각이 영원히 지속되는 다람쥐가 탄생한다면 어떻게 될까? […] 그랬더라도 그 다람쥐는 지극히 행복할 뿐 아니라 지극히 짧은 생을 살았을 것이고, 그 희귀한 돌연변이는 그냥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행복에 도취해 배우자는 고사하고 땅콩도 더 이상 찾아나서지 않았을 테니까.” 반면 평균적인 인간이라면 이러한 삶이 ‘옳은’ 것인지 반문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다람쥐의 지능이 뛰어나 그러한 삶을 선택하거나 거부할 수는 있겠지만, 그럴 경우에도 이 선택이 다람쥐가 스스로 사는 방식의 옳고 그름을 따져본 결과일 것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그리고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바로 이런 방식일 것이다. 그러한 규범적 판단까지 결정론의 산물로 취급하는 견해는 지나치게 비약적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이러한 능력을 ‘도덕성’이라는 개념으로 좁혀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은, 인간을 동물의 우위에 놓고 그 간극을 증명하려는 잣대로 이 개념을 유용하고자 하는 순간 우리는 곧 다른 능력들을 인간성의 후보에서 기각할 때와 비슷한 문제에 직면케 된다는 것이다. 나는 도덕성으로 인간의 우월성을 확보하려는 선대의 우를 다시 범하지는 않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인과관계를 규범적으로 추상화하는 능력을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진다는 점은 일응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사실로 보인다. 지적 장애가 있는 이들도 미약하게나마 이러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동물에게 있어 도덕적으로 보이는 행동이란 다소 복잡한 형태의 조건반사에 지나지 않거나 인간의 과잉해석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나는 이를 일단 인간에게 고유한 능력으로 받아들이되, 이 글에서 ‘도덕성’을 말할 때는 ‘일정한 인과관계를 규범적으로 추상화하는 능력’으로서의 약한 도덕성을 가리킬 것이다.

이제 이러한 도덕성이 정말로 인간에게 고유한 특성인지 검토해보자. 적어도 사회·문화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생각에 익숙해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제우스에게 “약점, 꼬인 구석, 한계”를 부여하고 그가 인간과 마찬가지로 “사랑하고 증오하고 파괴할 수 있을” 것을 상상하면서도, 그가 이 과정에서 도덕적 갈등을 겪는 것만은 허용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도덕성이란 인간성의 한 표현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과학은 그러한 관념이 아주 틀리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조금씩 보여주고 있다. 현대의 주류 진화윤리학은 도덕성의 기원을 생물적·심리적 이타성에서 비롯한 자율적 반성(autonomous reflection)에서 찾는다. 한데 이 반성이 사전적(事前的)인 것이든 후행적(後行的)인 것이든, 그러한 반성을 위한 합리화 과정이 옳고 그름에 대한 일종의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믿음’을 “무엇인가를 참이거나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라고 거칠게 정의해본다면, 이렇듯 단순한 형태의 믿음은 인공지능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보유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이러한 태도 자체는 ‘결정’을 내리는 데 특화되어 있는 인공지능에 본질적이라고까지 말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인공지능의 믿음은 인간의 믿음보다 훨씬 열위에 있는 것 같다. 가령 이른바 트롤리 문제(trolley problem)에 직면할 때 인간은 인공지능에 모든 결정을 위임한 채 팔짱을 끼고 휘파람만 불 수 있을까? 물론 인공지능은 데이터를 종합하여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옳은’ 결정을 내릴 것이다. 반면 “그럴듯한 해석, 무작위적인 기억들의 공세 속에서 [인간의] 선택은 왜곡될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주의자조차 가장 칸트적인 인공지능보다는 가장 공리주의적인 인간의 결정을 신뢰할 것처럼 보인다. 칸트주의자는 공리주의자의 결정을 한 인간의 결정으로서 존중하고 트롤리에 치어 사망한 인부를 애도할 것이지만, 칸트주의 인공지능의 결정으로 인부가 사망한다면 칸트주의자는 애도에 앞서 그러한 결정을 인공지능에 일임한 인간에게 비난을 퍼부을 것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인간의 믿음이 인공지능의 믿음보다 더 ‘믿을만하기’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인공지능은 데이터에 기반하여 계산은 물론 인간의 욕망을 표현하는 일조차 인간보다 더 정확하게 해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단순히 수학적이거나 과학적인, 혹은 논리적인 참·거짓의 문제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이는 도덕성과 관련한 인간의 ‘믿음’이 인공지능의 믿음보다 더욱 ‘인간적’이거나 ‘본질적’이라는 상위의 또 다른 ‘믿음’에 기초한다.

이것은 “세계를 빈틈없이 설명하고, 우리에게 예정된 목표와 함께 명료한 계약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종교이다. “종교는 인간의 사회구조에 초인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어떤 것이다. 종교는 사회구조에 초인적 법칙이 반영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인간의 규범과 가치를 정당화한다. 종교는 우리가 창조하지 않았으므로 바꿀 수도 없는 어떤 도덕법 체계의 지배를 받는다고 주장한다.” 하라리는 “과학이 부상함에 따라 적어도 몇몇 신화와 종교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강해질 것”이라 예견하는데, 정말로 그러하다. 다만 그는 “권한이 인간에게서 알고리즘으로 옮겨가는 즉시 인본주의 과제들은 폐기될 것”이라는 전제로 주장했지만, 나는 반대로 어떤 종류의 인본주의적 종교는 오히려 부흥할 것이라 주장한다.

한편으로 이 ‘믿음’은 하라리가 생각하는 미래의 종교보다 훨씬 더 종교적이다. 이는 “미신, 영성, 초자연적 힘에 대한 믿음, 또는 신에 대한 믿음”에 더욱 가깝다. “종교를 창조한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고, 종교를 규정하는 것은 신이 있고 없고의 여부가 아니라 사회적 기능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견해에 동의하는 것과 그 때문에 ‘믿음’이 앞으로는 자취를 감출 것이라 믿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과거에 ‘믿음’이 매우 소박한 방식으로 작동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과거에는 신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가 중대한 문제였고, 에우티프론의 딜레마 역시 큰 의미를 가졌다. 그 대상이 반드시 신이 아니더라도 ‘믿음’이 작동하는 방식은 비슷했다. 고정불변하고 인간을 초월하지만 인간만이 추구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믿음’은 이미 언어와 철학의 태동기부터 시작되어 유일신앙에서 몸집을 불리고 소위 존재론적 신 증명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근대 이후로도 ‘믿음’은 다소간 모습을 바꾸기는 했으나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 ‘믿음’에 대한 보다 상위의 “믿음”은 그 ‘믿음’을 인간의 능력으로 ‘알게 될 수 있다’는 데에서 ‘모를 수도 있다’는 쪽으로, 즉 강한 실재론에서 비실재론 또는 불가지론으로 그 범위가 확장되어 오기는 하였으나, 본질적으로 그 성격은 크게 변한 적이 없었다. 우리는 “다만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이제부터 이 ‘믿음’을 본질주의(essentialism)라 부르겠다. “우리가 흔히 신성[神性]의 의미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일 수도 있고, “신성은 모호한 형이상학적 성질이 아니”며 “전능함과 똑같은 말도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본질주의자로서 본질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모호한 형이상학적 성질”이나 “전능함”으로서의 신성을 늘 염두에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생명에 만료일이 없을” 정도로 신성을 획득한 “미래의 초인간”이 모종의 ‘완벽성’에 이르지 못하는 한 여전히 무언가를 추구할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분명해진다. 그 추구의 대상이 “성경에 나오는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이든 “타협 없는 진리 추구의 길”이든 상관없이, 인간에게 ‘믿음’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전술했듯 ‘믿음’에 대한 태도는 인공지능에 본질적이지만, 본질주의는 결코 인공지능에 본질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질주의는 흔히 본질주의와 비(반)본질주의의 대립으로 묘사될 때의 본질주의보다는 가리키는 범위가 넓은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대상이나 개체에 고유한 본질이 있다는 식의 본질주의보다는 본질처럼 보이는 그 같은 요소나 성질이 사실은 해석을 거친 결과라거나 이론적 분할 또는 집합의 결과라는 식으로 이야기되는 구성주의적 비본질주의의 입장을 더 선호한다. 그러나 내가 ‘이러한 입장을 선호한다(믿는다)’고 했을 때 나의 믿음은 분명 더 넓은 의미에서 본질주의적으로 ‘믿음’을 가리키고 있다. 이는 반정초주의자도 결국 반정초주의에 자신의 이론을 정초시킬 수밖에 없다는 정초주의자의 반론과도 맥이 닿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좁은 의미에서 비본질주의자라 하더라도 이 글에서 사용하고 있는 넓은 의미에서는 분명 본질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보자면 좁은 의미의 비본질주의도 결국은 태생적·논리적으로 본질주의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미래인류와 현생인류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가까운 미래의 인류는 “엄밀히 말하면 […] 불사신이라기보다 인간일 것이다. 신과 달리 미래의 초인간은 여전히 전쟁이나 사고로 죽을 수 있고, 사후세계에서 그들을 다시 데려올 방법은 없다. 하지만 때가 되면 죽는 우리와 달리 그들의 생명에는 만료일이 없을 것이다. 폭탄에 맞아 산산조각 나거나 트럭에 깔리지 않는 한, 그들은 무한히 살아갈 수 있다. 이러한 조건은 초인간들을 역사상 가장 불안한 사람들로 만들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실제로는 미래인류와 현생인류의 경계선상에 서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의 미래인류는 내적인 의미로든 외적인 의미로든 완벽성을 획득하여 스스로의 시스템을 유지하면 될 뿐 더 이상 무언가를 추구할 필요가 없는 존재일 것이다. 그쯤 되면 이 존재의 명칭에서 ‘인류’나 ‘인간’이라는 단어를 빼는 편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나는 현생인류의 본질주의에 좀 더 기대를 걸어 보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본질주의는 단순한 믿음에서 그치지 않고 특별한 수행적 귀결로도 이어지는데, 이로써 인간의 행위와 믿음은 서로를 보완하며 더욱 단단하게 인간성을 지탱하는 까닭이다. 하라리는 이러한 수행적 귀결을 “영적 여행”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하면서도 정작 그 함의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데, 그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영적 여행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탐구했다면 『호모 데우스』는 현생인류에게 훨씬 더 희망에 찬 미래를 제시하며 마무리되어야 했을 것이다.

하라리가 말하는 영적 여행이란 무엇인가? “이 여행은 사람들을 미지의 목적지로 향하는 신비의 길로 데려간다. 이런 탐색은 대개 ‘나는 누구인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무엇이 선인가?’ 같은 커다란 질문에서 시작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권위자들이 제시하는 준비된 대답을 그냥 받아들이는 반면, 영성을 찾는 구도자들은 그리 쉽게 만족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여행은 진리와 본질에 대한 플라톤적 탐구보다는 소크라테스적 탐구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



“[소크라테스에게] 세계의 ‘동일성’, 공통성 또는 ‘객관성’은 동일한 세계가 모든 사람에게 열린다는 사실과,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차이들과 세계 속에서 그들의 위치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따라서 그들의 도크사(의견)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나는 모두 인간이다”라는 사실 안에 존립한다. […] 모든 사람은 그들만의 도크사를 가지고 있으며, 세계에 대한 그들의 개방 방식이 있다. 그래서 소크로테스는 항상 질문부터 먼저 했다. 그는 다른 사람이 가진 도케이 모이, 즉 그가 어떻게 보는지를 사전에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공동의 세계에서 타인의 위치를 분명히 알아야 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사전에 알 수 없는 것처럼, 별도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의견 속에 내재한 진리를 알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모든 사람이 잠재적으로 지닌 이 같은 진리를 끄집어내기를 원했다.”



하라리는 묻는다. “당신이 CT를 찍었는데 암이라는 진단이 나왔다면, 그 소식을 배려와 감정이입 능력을 갖춘 인간 의사에게 듣고 싶겠는가, 아니면 기계에게 듣고 싶겠는가? 그것이 문제라면, 당신의 성격 유형에 맞는 단어를 고르는 배려를 할 줄 알고 감정이입 능력도 있는 기계에게 그 소식을 듣는다면 어떨까?” 아마도 그는 이쯤 되면 어떤 사람이라도 기계에게 암 소식을 듣는 것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트롤리 문제와 칸트주의 인공지능의 사례를 다시 상기해보자. 인간이 유기체에 불과하고, 인공지능이 제아무리 그 유기체의 알고리즘을 충실하게 구현한다 한들 기계에게 위안을 구하는 일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직관에 반한다. 사람들이 여기서 찾고자 하는 “인간미”란 비록 불합리해 보일지라도 인간이 종국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심지어 그러한 인간미에서 진리를 찾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적 투표 같은 자유주의적 관행들은 머지않아 낡은 것이 될 텐데, 내 정치적 견해를 표현하는 일조차 구글이 나보다 더 잘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하라리의 예측은 의심스러운 것이 된다. 물론 “알고리즘이 인간을 직업시장에서 몰아내면 전능한 알고리즘을 소유한 소수 엘리트 집단의 손에 부와 권력이 집중될 것이고, 전례 없는 사회적 불평등이 발생할 것이다. 아니면 그 알고리즘들이 스스로 주인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례 없는 사회적 불평등이 일어나고 알고리즘이 인류를 지배한다고 해서 자유주의적 관행이 폐기될 것이라 섣불리 재단할 수는 없다. 지금껏 살폈듯 오늘날의 자유주의는 단순히 근·현대의 산물이 아니라 본질주의에 대한 현생인류의 열망이 집약되어 정제된 형태로 등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육체적·정서적·지적 능력을 가진 초인간이 […] 보통의 사피엔스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경험을 하는 것으로 드러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초인간이 하등한 사피엔스 좀도둑의 경험을 담은 소설을 지루해하고, 평범한 사피엔스는 초인간의 정사에 관한 멜로 드라마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데이터교도들은 ‘만물인터넷(Internet-of-All-Things)’이라 불리는 새롭고 훨씬 더 효율적인 데이터 처리 시스템이 그 산물이 될 거라고 말한다. 이 과업이 완수되면 호모 사피엔스는 사라질 것이다.”

“초인간들은 전대미문의 능력과 전례 없는 창의성을 지닐 것이고, 그런 힘을 이용해 세계적으로 중요한 대다수의 결정들을 계속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시스템의 유지보수를 담당할 것이고, 시스템은 그런 사람들을 이해하고 관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업그레이드되지 않을 것이고, 그 결과 컴퓨터 알고리즘과 새로운 초인간 양쪽의 지배를 받는 열등한 계급이 될 것이다.”



나는 이런 일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류가 생물학적 계급으로 쪼개지는 즉시 자유주의 이념의 근간이 파괴”되고 “부자와 빈자가 단지 부가 아니라 생물학적 차이로 나뉠 때” 자유주의 및 평등주의적 해법은 유효하지 않은 것이 되며 “권한이 인간에게서 알고리즘으로 옮겨가는 즉시 인본주의 과제들은 폐기될 것”이라는 그의 주장에는 쉽사리 동의할 수 없는데, 본질주의의 측면에서 인간은 여전히 객관적인 동일성을 유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히려 다음과 같이 말해야만 한다.

철학, 그리고 다른 모든 분과와 마찬가지로 정치철학은, 있는 그대로의 존재에 대한 경이에 그 기원을 둔다는 사실을 결코 부정할 수 없다. 만일 철학자가 인간사의 일상생활에서 어쩔 수 없이 소외되었더라도 진정한 정치철학에 도달하고자 한다면, 위대하기도 하고 비참하기도 한 모든 영역의 인간사가 일어나는 근거인 인간의 복수성을 경이의 대상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성서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이 우주의, 인간의, 존재의 기적을 말없는 경이 속에서 받아들인 것처럼, 신이 단수의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남자와 여자, 그들을 창조하셨다”는 기적을 그들은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체념과는 다른 의미에서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본질주의에 기반해 있고 또 그렇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한 현생인류는 무난히 그 맥을 이어갈 것이다. 반면 그 스스로가 본질이 되어 더 이상 어떤 본질도 희구하지 않는 미래인류가 출현하는 순간 믿음과 종교는 물론 인간 존재마저도 절멸해버리고 말 것이다. 세계가 점점 비본질적으로 되어갈수록, 역설적이게도 본질주의만이 인간의 희망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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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을 이어가는 또 하나의 이야기 | 기본 카테고리 2020-10-26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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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고양이를 버리다

무라카미 하루키 저/가오 옌 그림/김난주 역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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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버리다: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2020).

무라카미 하루키의 최신간.

하이쿠(俳句)는 별나게 짧은 시 형식이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하이쿠는 "일본의 정형시의 일종"인데, "각 행마다 5, 7, 5음으로 모두 17음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하이쿠는 대충 이런 것이다.

閑さや岩にしみ入る蟬の聲
(しずかさや いわにしみいる せみのこえ)

"시즈까사야 / 이와니 시미이루 / 세미노 코에"라고 읽고, "한적함이여 / 바위에 스며드는 / 매미의 소리" 정도로 번역한다. 요미가나(소릿글자)를 점잖빼듯 느릿느릿 읽으면 된다. 입 안에서 글자가 굴러가는 동안 여름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다, 라고 하는데 외국인 입장에서 잘 와 닿지는 않는다.

짤막하여 별 것도 아닌 듯 싶지만, 일본에서는 상당히 전문적인 영역으로 먹물깨나 들었다는 이들도 쉽사리 논하지 못한다고 한다. 하루키의 아버지는 동경제대 문학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하이쿠를 취미삼아 지었다는 양반이니 꽤나 부담스러운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하루키도 와세다를 나왔으니 학벌이 처지는 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부친의 기대에는 한참 못 미쳤던 모양이다. 그의 여러 작품에서 와세다는 컴플렉스 묻은 "2류 대학"으로 격하된다. 아무래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란 그런 것인가 보다. 나는 문재(文才)라고는 없는 집안에서 좋은 대학을 갔는데도 아버지에게 무시를 당하곤 했으니 하루키야 오죽했을까.

그러나 애증 속에서도 혈연이란 어찌할 수가 없는 것으로,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고, 역사도 이와 마찬가지다. ? 그 내용이 아무리 불쾌하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라 해도,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해서든, 아버지 세대에 대해서든 마찬가지다.

≪태엽 감는 새 (연대기)≫와의 접점이 두드러진다. 그때 못했던 뒷이야기를 이제서야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각자가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하루키의 시간도 그간 속절없이 흘렀다.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이 아버지가 생각나게 마련일까. 그는 내 아버지보다 두 살 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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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마주치고도 너를 먹을 수 있다면 | 기본 카테고리 2020-10-22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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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멜라니 조이 저/노순옥 역
모멘토 | 2011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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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박사님의 이야기 꾸러미 | 기본 카테고리 2020-10-22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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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천년의 수업

김헌 저
다산초당 | 2020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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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 생활을 막 시작했을 무렵, 아주 우연한 기회에 김헌 선생님의 수업을 듣게 되었다. 교환학생 신청 요건을 충족하려 21학점을 반드시 채워야만 하는 처지였는데, 개강한 직후 3학점짜리 강의 하나가 폐강되어 버린 것이다. 부랴부랴 일정에 맞는 강의를 아무렇게나 집어 넣었고 그것이 김헌 선생님의 <희랍어1>이었다.

당시 나는 희랍어라는 이름만 보고 아랍어의 아류라고 생각할 정도로 고전어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상태였다. 그후로도 자랑질이나 일삼아 볼 생각으로 깔짝깔짝 익혔을 뿐, 고전어를 진지하게 배울 마음은 없었다는 것이 솔직한 이야기겠다. 하루 벌이가 힘들었던 생활에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공부였다. 그럼에도 <희랍어2>에 이어 <라틴어1>, <라틴어2>, <법학라틴어>를 수강하고 방학 특강까지 들었으니, 동기가 그런 것 치고는 꽤나 열심이었던 셈이다. 김헌 선생님에 대한 팬심에서 비롯된 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들어서는 집필과 방송 활동에도 여념이 없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요즘은 EBS <보니하니>에서 어린 아이들과 토론하는 "생각박사님"으로 출연하시는 모양이다. 그런 선생님의 신간이 나와 올려본다.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 생각박사님의 이야기 꾸러미다. 워낙에 빼어나신 입담과 끊임없이 공부하시는 지성이 문장에서 철철 흘러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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