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블로그 | 랜덤블로그 쪽지
한비씨의 "한국경제신문"도서 이야기
http://blog.yes24.com/hankyungbp
리스트 | RSS
태그 & 테마링 | 방명록
hankyungbp
한국경제신문 출판법인 한경BP의 블로그입니다. &apos프런티어&apos로는 인문 독자들을, &apos마시멜로&apos로는 문학 독자분들을 찾아뵙고 있습니다.
프로필 쪽지 친구추가
댓글알리미 비글 : 사용안함
전체보기
한국경제신문
지기이야기
왜 도덕인가?
스눕
신간소개
이벤트
이벤트발표
경제경영
자기관리
건강/실용
비소설
마시멜로
기억을 잃어버린 앨리스를 부탁해
프런티어
나의 리뷰
기본 카테고리
나의 메모
기본 카테고리
태그
아마존베스트 수상소설 추천문학 리안모리아카 기억을잃어버린앨리스 기억을잃어버린앨리스를부탁해 리안모리아티 기억을잃은앨리스를부탁해 아마존 문학작품
2021 / 06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월별보기
나의 친구
7번 읽기 공부 실천법
최근 댓글
제 책이 미국에 수출.. 
감사합니다! 곧 책을 .. 
모두 축하합니다. 
고맙습니다. 
늦었지만 발빠른 대처.. 
새로운 글
오늘 5 | 전체 138435
2009-01-13 개설

전체보기
기억을 잃어버린 앨리스를 부탁해 미리보기 당첨자 공개! | 기억을 잃어버린 앨리스를 부탁해 2014-07-16 17:19
http://blog.yes24.com/document/7744840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안녕하세요~

한경지기입니다~


길고 긴 10회 연재동안 성실히 댓글 달아주신 모든 블로거 분들게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덕분에 도서에 대한 희망이 완전 업업 되었답니다~:)


그럼 당첨되신 10분 발표하겠습니다!

두구두구두구두구 - 


최따미

아자아자

대수사선

jyk121

괴발개발

나날이

날아올라

toulon

연리지

잔잔한 일상


꺄! 이렇게 10분 정말 축하드리며 앞으로도 한국경제신문 출판사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8) 트랙백(0)
이 포스트를 | 추천 3        
기억을 잃어버린 앨리스를 부탁해 - 10 | 기억을 잃어버린 앨리스를 부탁해 2014-07-02 16:04
http://blog.yes24.com/document/7729839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그러니까 1998년 이후로는 단 한 가지도, 전혀, 완전히 기억나지 않는다는 거야?”

엘리자베스 언니가 플라스틱 의자를 침대 옆으로 끌어당기고, 앨리스 쪽으로 몸을 내밀면서 말했다. 진상을 낱낱이 밝히려는 사람처럼.

전혀? 하나도?”

그게, 우스운 장면이 조금씩 생각나기는 하지만, 전혀 말이 되지 않는 것들이야.”

뭔데, 말해봐.”

엘리자베스 언니가 재촉했다. 그녀는 앨리스 얼굴에 자기 얼굴을 바짝 갖다 댔다. 입가의 주름이 앨리스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었다. 세상에! 앨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 끝으로 자기 입가를 만져보았다. 아직도 거울은 보지 않았다. 앨리스가 말했다.

그게, 처음에 깨어났을 때 꿈을 꾸고 있었어. 그게 그냥 꿈인지, 정말 겪은 일인지는 모르겠더라고. 수영을 하고 있었어. 아주 아름다운 여름 아침이었는데, 발톱마다 모두 다른 색으로 페디큐어를 칠하고 있었어. 내 옆에는 다른 사람도 있었는데, 그 사람도 나처럼 모두 다른 색으로 페디큐어를 칠하고 있었어. 혹시 그 사람이 언니였을까? 그래, 언니였던 것 같아!”

글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또 다른 생각은 안 나?”

앨리스는 회색빛 하늘에 분홍색 풍선 부케가 잔뜩 떠 있던 장면을 떠올렸지만, 엄청난 슬픔을 느꼈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고, 그 장면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앨리스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한 미국 여자가 유감이지만 심장 박동이 들리지 않아요라고 말한 게 떠올라.”

엘리자베스 언니는 앨리스 다리 옆에 있는 흰 담요를 손바닥으로 반듯하게 폈다. 표정이 정말 심각해 보였다. 엘리자베스 언니가 말했다.

미안,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어. 전혀 모르겠어.”

어째서 엘리자베스 언니는 화가 난 것처럼 말할까? 앨리스는 자신이 잘못한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왠지 스스로 바보 같고 어설프게 느껴졌다. 어른들이 말해주지 않는 중요한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애쓰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언니는 앨리스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으며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한 여자가 꽃을 들고 병실로 들어왔다. 환하게 웃던 얼굴이 엘리자베스 언니와 앨리스를 보자마자 조금 거만하게 바뀌더니, 앨리스의 침대 곁을 지나쳐갔다. 옆 침대에서 까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 방금 너 생각하고 있었어.”

나도 꽃을 사올걸.”

엘리자베스 언니가 중얼거렸다. 갑자기 앨리스가 말했다.

결혼했구나?”

뭐라고?”

앨리스가 언니의 왼손을 잡았다.

약혼반지잖아. 진짜 멋지다. 나도 이런 걸 갖고 싶었는데. 내가 골랐다면 이런 걸 샀을 거야. 러브 할머니의 반지는 사랑스럽지 않거든.”

언니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너 그 반지 증오했잖아. 경멸하기도 했고.”

, 내가 말했어? 그런 말 한 기억 없는데.”

몇 년 전에 했어. 아마 너무 취해서 그랬을 거야. 그게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였지만. 아무튼, 했어.”

세상에, 너무 궁금하다. 누구랑 결혼한 거야? 그 귀여운 도시 설계사?”

? 설마. 딘은 아니야. 그 사람하고는 5분 정도 데이트한 게 전부인걸. 게다가 이미 죽었다고. 스쿠버다이빙 하다가 사고로. 안된 일이야. 아무튼, 난 벤하고 결혼했어. 벤 기억해? 지금 너희 아이들이랑 같이 있는데.”

그러니까, 언니랑 결혼한 사람 이름이 벤이야?”

그러고보니 아까 코를 킁킁거리던 아이가 벤 이모부라고 했던 기억이 났다. 왠지 앞뒤 정황이 맞아갈수록 상황은 더욱 악화되는 것 같았다. 앨리스를 제외한 모든 것이 정상인 것처럼 느껴졌다.

재미있다. 아까 내가 아는 벤이라고는 시누이 가게에서 본 거대한 네온사인 디자이너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는데. 잊기 힘든 사람이잖아. 정말 크고 느리고 조용하고. 왠지 커다란 회색 곰이 사람으로 변한 것 같았거든.”

갑자기 엘리자베스 언니가 웃음을 터트렸다. 앨리스가 또다시 재미있는 말을 하고 싶게 만드는, 몸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관대한 웃음이었다.

왜 웃는지 모르겠어.”

앨리스는 충분히 이해할 준비가 된 상태로 말했다.

바로 그 벤이야. 나하고 결혼한 사람이. 벤하고는 도라 개업식 때 만났어. 8년 전에 결혼했고.”

정말?”

엘리자베스 언니가 그 커다란 네온사인 디자이너하고 결혼했다는 말이지? 언니는 앨리스를 바보처럼 느끼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 턱수염이 있잖아?”

엘리자베스 언니가 턱수염이 있는 사람과 결혼할 리 없었다. 언니가 온몸을 떨면서 웃었다.

그래, 지금도 있어.”

지금도 네온사인을 디자인해?”

그래. 정말 예뻐. 킬라라에 있는 롭스의 립스 앤 럼프스 네온사인이 제일 마음에 들어. 작년에 네온사인 디자인 수상식에서 2등을 했다니까.”

앨리스가 미심쩍은 눈길로 엘리자베스 언니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언니는 정말 진지했다.

그러니까, 벤이 내 형부라는 거구나. 그러니까, 내가 잘 아는 사람이겠지? 정말 잘 알겠다. 닉하고는 어때? 잘 지내? 함께 어울린 적 있어?”

벤을 기억하지 못하다니, 정말 놀라워.”

왠지 공격적인 말투였다. 엘리자베스 언니는 아주 대담한 발언을 하는 것처럼 날카로운 눈길로 앨리스를 바라보았다.

너 어제 벤을 만났잖아. 네 차 고쳐주러 갔었는데. 넌 벤이 제일 좋아하는 바나나 머핀을 만들어줬고. 두 사람 모두 엄청 말이 많았는데.”

그러니까…….”

앨리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한테 차가 있다는 말이야?”

으음, 그렇지, 앨리스.”

내가 바나나 머핀을 만들고?”

엘리자베스 언니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저열량이야. 섬유질은 많고. 하지만 정말 놀라울 정도로 맛있어.”

앨리스의 마음이 어지러울 때까지 광폭하게 날뛰었다. 계단에 줄줄이 앉아 있는 이상한 아이들부터 바나나 머핀에 자동차까지(앨리스는 차를 싫어했다. 버스나 페리가 좋았다. 더구나 앨리스는 좋은 운전사가 아니었다), 벤이라는 네온사인 디자이너와 결혼한 엘리자베스 언니까지.

갑자기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 것 같았다.

너무너무…… 모르는 게 많아.”

앨리스?”

엘리자베스 언니가 권투선수나 되는 것처럼 앨리스의 어깨를 조금 거칠게 문지르더니, 도와주려는 것처럼 주위를 재빨리 둘러보았다.

나 좀 가게 해줘. 의사를 만나봐야겠어.”

앨리스는 미끄러지는 담요를 간신히 붙잡아 무릎까지 끌어올렸다.

제발 가지 마. 곧 간호사가 올 거야. 그때 물어보면 되잖아. 그냥 여기서 나랑 이야기해. 그게 나한테 도움이 된다니까.”

엘리자베스 언니가 흘끗 시계를 보면서 대답했다.

정말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언니가 하품을 꿀꺽 삼켰다.

미안. 지루해서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 어젯밤에 몇 시간밖에 못 잤거든.”

!”

앨리스가 대답했다. 굳이 설명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앨리스도, 엘리자베스 언니도 늘 불면증 때문에 힘들어했으니까. 그건 엄마를 닮은 거다. 아빠가 돌아가신 뒤에 앨리스와 엘리자베스 언니는 밤새 엄마와 함께 가운 차림으로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네슬레 마일로를 마시면서 비디오를 보았다. 당연히 다음 날이면 완전히 잠에 빠져, 따사로운 햇살이 어둡고 졸린 집을 포근하게 감싸는 동안 하루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요즘 내 불면증은 어땠어?”

앨리스가 물었다.

자세히는 몰라. 지금도 불면증이 있는지 없는지는.”

언니가 모른다고?”

앨리스는 당혹스러웠다. 엘리자베스 언니와 앨리스는 언제나 불면증 전쟁 기록을 서로 공유했다.

우리가…… 서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물론 이야기는 하지. 하지만 넌 너무 바쁜 것 같아. 아이들 문제나, 여러 가지로. 그래서 우리 대화는 조금 급하게 끝나는 편이야.”

바쁘다고?”

바쁘다고? 앨리스는 다시 말해보았다. 바쁘다는 말, 앨리스는 그 말의 어감이 싫었다. 앨리스는 언제나 바쁜 사람들을 조금은 믿지 못했다. 바쁜 사람들은 늘 완전히 지쳤어, 제정신이 아니라니까같은 말을 달고 살았다. 이 세상에 바쁠 일이 뭐가 있을까? 왜 느긋하게 살지 못하는 걸까? 도대체 정확히 뭐가 그렇게 바쁜 걸까?

그게…….”

앨리스는 설명할 수 없는 어색함을 느꼈다. 엘리자베스 언니와 앨리스 사이에 아주 옳지 않은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왠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한 친구들처럼 어딘가 부자연스럽지만 친숙한 정중함이 느껴졌다.

이건 닉에게 물어봐야겠다. 닉의 정말 좋은 점 중 하나였다.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걸 즐기는 것. 사람들을 자세히 관찰하고 그 사람에 관해 자세히 알아내는 것. 닉은 관계의 복잡성에 관심이 있었다. 더구나 엘리자베스 언니를 사랑했다. 닉이 언니를 놀리거나 언니에 관해 불평을 할 때는(언니는 가끔 정말 짜증날 때가 있다), 공정한 형제처럼 표현하기 때문에 앨리스는 굳이 언니를 방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앨리스는 엘리자베스 언니가 입고 있는, 아름답게 재단한 크림색 정장을 쳐다보면서(앨리스도 엘리자베스 언니도 2008년에 복장을 업그레이드시킨 것 같았다) 말했다.

지금도 카탈로그 회사에서 일해? 트레저 체스트였던가?”

엘리자베스 언니는 한 달에 한 번 발송하는 두툼한 상품 카탈로그 트레저 체스트에 문구를 썼다. 언니는 바나나 맛이 나는 립글로스에서부터 인스턴트 계란 삶는 냄비, 목욕탕에 설치하는 방수 트랜지스터에 이르기까지, 수백, 수천 개 제품에서 기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내용을 이끌어내야 했다. 언니는 근사한 무료 상품을 많이 받았고, 매달 카탈로그가 나오면 가족 모두 보면서 저마다 마음에 드는 글귀를 크게 읽었다. 프래니는 트레저 체스트를 모두 진열해놓고 친구들이 올 때마다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 진짜 오래전 일처럼 느껴진다.”

엘리자베스 언니는 앨리스를 쳐다보다가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마치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무언가를 쳐다보는 것처럼.

너 정말 시간 여행자 같아.”

더 이상 그 일을 안 한다는 거야?”

앨리스는 짜증이 났다. 단순한 질문을 할 때마다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는 사람들을 상대한다는 게 너무 피곤했다. 10년 동안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던 걸까? 왠지 모든 게 변한 것 같았다.

트레저 체스트는 이제 웹사이트만 운영해. 6년 전에 그만뒀고. 4년 동안 에이전시에서 일했고, 2년 전부터 다이렉트 메일(DM) 쓰는 법을 알려주는 강연을 열고 있어. 요즘 사람들은 스팸이라고 부르지만. 강연은 아주 잘돼. 이상해 보일 수도 있지만, 정말 잘되고 있어. 어쨌거나 돈이 돼. 오늘도 강연을 하다가 전화를 받았어. 너 때문에 제인이 전화한 거야.”

그러니까, 언니가 직접 사업을 한다고?”

그래.”

우와, 대단하다. 성공했구나. 언니는 성공할 줄 알았다니까. 나도 그 강연 들어도 되지?”

강연을 듣는다고? 내가 하는 강연을?”

, 벌써 들은 적이 있겠구나, 그렇지?”

아니, 앨리스. 한 번도 없어. 넌 내 강연에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걸.”

엘리자베스 언니의 목소리가 다시 날카로워졌다.

?”

앨리스는 당황했다.

그건, 그러니까…… 왜 관심이 없었어?”

엘리자베스 언니가 한숨을 쉬었다.

그냥 너무 바빴기 때문이야. 너무 바쁘니까, 그러니까 그런 거야.”

또 바쁘다는 말이 나왔다.

게다가, 넌 내 직업을 조금…… 저속하다고 생각하니까.”

저속이라니? 내가 그런 말을 했어? 언니한테? 세상에, 그럴 리가 없잖아.”

앨리스는 경악했다. 10년 사이에 앨리스는 사람을 직업으로 판단하는 끔찍한 인간이 된 걸까? 앨리스는 언제나 엘리자베스 언니가 자랑스러웠다. 언니는 영리했고, 앨리스가 안전하게 한 곳에 머무는 동안 늘 용감하게 모험에 나섰다.

아니, 아니야. 정말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야. 어쩌면 그런 생각도 안 했는지 몰라. 내가 한 말은 그냥 잊어버려.”

어쩌면, 앨리스는 공포에 사로잡혀 생각했다, 10년 동안 앨리스의 인생을 산 다른 앨리스는 좋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었다.

나는, 나는 어때? 난 직업이 있어?”

앨리스는 국세청 지급국 사무보조원이었다. 일은 그저 일일 뿐, 일을 사랑한다거나 미워한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딱히 직업을 갖는 데 흥미가 있지는 않았다.

넌 너무 가정적이야. 1950년대 주부 같다고.”

언젠가 앨리스가 정원을 가꾸고, 부엌에 달 새 커튼을 만들고, 닉에게 줄 초콜릿 케이크를 굽는 날이 가장 행복하다고 했을 때, 엘리자베스 언니는 그렇게 말했다.

아니, 넌 직장에 다니지 않아.”

엘리자베스 언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 다행이야.”

앨리스가 행복하게 말했다.

하지만 넌 정말 바빠.”

이건 또 무슨 소리?

학교 일이 잔뜩이거든.”

학교라니, 무슨 학교?”

아이들 학교.”

, 아이들. 무시무시한 작은 아이들!

침대 옆 서랍장 위에 있던 은색 휴대폰이 갑자기 살아났다.

닉일 거야! 마침내 전화한 거야.”

앨리스가 전화기를 재빨리 집어 들었다. 엘리자베스 언니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내가 받을게.”

아니야. 왜 그러는데?”

앨리스는 엘리자베스 언니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통화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귀에 댔다.

여보세요?”

, 안녕. 나야.”

닉이었다. 브랜디를 단숨에 들이마신 것처럼, 행복한 안도감이 혈관을 타고 앨리스의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닉이 말했다.

무슨 일이야? 아이들한테 무슨 문제 있어?”

왠지 감기라도 걸린 것처럼 낮고 거친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닉도 아이들을 아는 게 분명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아이들에 관해 알았다. 엘리자베스 언니는 안절부절못하고 펄쩍펄쩍 뛰면서 전화를 자기에게 달라는 몸짓을 했다. 앨리스는 그런 언니에게 혀를 쭉 내밀었다.

아니, 나한테 문제가 있어.”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쓰러졌어. 그러니까, 체육관에서. 제인 터너랑 있었는데, 머리를 세게 부딪혔어. 의식을 잃었지 뭐야. 구급차에 실려 왔어. , 들것에 있다가 구급 요원 신발에 토했어.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라. , 나중에 로데오 타는 것처럼 폴짝거리던 여자들 얘기도 해줄게. 정말 웃겼다니까. 근데, 포르투갈이라며? 세상에, 포르투갈이라니. 믿어지지 않아. 거긴 어때?”

정말 할 말이 너무너무 많았다. 왠지 몇 년 동안 닉을 못 본 것 같았다. 닉이 포르투갈에서 돌아오면 멕시코 식당에서 저녁을 먹어야지. 못다 한 이야기를 하고, 또 하고, 또 할 거야. 마르가리타(과일 주스와 데킬라를 섞은 칵테일-옮긴이)를 마시겠지. 이젠 임신한 것도 아니니 마르가리타를 마실 수 있어. 지금 당장 멕시코 식당에 갈 수 있다면. 어두운 구석 식탁에 앉아 내 손바닥을 어루만지는 닉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면.

전화기 너머에서는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닉이 충격을 먹은 것이 분명했다.

근데, 나 괜찮아.”

앨리스가 닉을 안심시키기 위해 말했다.

심각하지는 않아. 괜찮아. 괜찮은 거 같아.”

닉이 말했다.

그럼 도대체 왜 그깟 일로 전화하라고 한 거야?”

앨리스는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고개가 뒤로 홱 젖혀지는 것 같았다. 닉은 결코,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앨리스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싸울 때도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닉은 상황이 나빠지지 않도록 악몽도 바로잡는 사람이었다.

?”

앨리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 문제는 나중에 따질 거야. 앨리스는 닉의 태도에 정말 크게 상처를 받았다.

자기, 무슨 일 있어?”

이건 또 무슨 전략이야? 진짜 이해할 수가 없네. 이럴 시간이 없단 말이야. 주말 계획을 변경하고 싶은 거 아니지? 아니, 그런 거야? 이런 젠장, 또 크리스마스 때문에 이러는 거야?”

왜 그런 식으로 말해?”

앨리스가 말했다.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오늘 있었던 그 어떤 순간보다 끔찍한 순간이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런 젠장. 지금 당신하고 골치 아픈 시소게임 하고 있을 시간 없단 말이야.”

닉이 소리쳤다. 정말로 앨리스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지금, 병원에 있는 앨리스에게.

파프리카

앨리스가 조용히 속삭였다.

자기, 파프리카로 입을 씻어야 할 거 같아.”

엘리자베스 언니가 일어섰다.

전화기, 이리 줘.”

명령이었다.

엘리자베스 언니는 앨리스의 떨리는 손에서 전화기를 뺏어들었다. 전화기를 귀에 대고, 한 손가락으로 다른 쪽 귀를 막았다. 앨리스에게서 얼굴을 돌리고 고개를 숙였다.

, 엘리자베스예요. 상황이 심각해요. 머리를 크게 다쳤는데, 기억을 잃었어요. 1998년 이후로는 전혀 기억하지 못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모두 잃어버렸어요.”

앨리스는 베개에 머리를 기대고 얕은 숨을 내쉬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엘리자베스 언니는 잠시 동안 가만히 듣기만 했다. 잔뜩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알아요, 알아요. 이해해요.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요.”

또 가만히 듣고 있었다.

벤하고 있어요. 벤이 수영 교실에 데려다줄 거예요. 밤에는 우리랑 함께 잘 거고요.”

또 침묵.

알았어요. 그럼 늘 하던 것처럼 사부인 어른한테 데려다줄게요. 일요일 밤 정도면 앨리스도 괜찮아질 거예요.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갈 거예요.”

침묵.

아니, 아직 의사는 못 만났어요. 곧 만날 거예요.”

침묵.

좋아요. 알았어요. 앨리스 바꿔줄까요?”

앨리스가 전화기로 손을 뻗었다. 닉은 분명히 다시 평소의 닉으로 돌아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언니는 , 알았어요. 그래요. 잘 있어요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랑 이야기하기 싫대? 정말 이야기하기 싫다고 했어?”

온몸이 쿡쿡 찔리는 것처럼 아파왔다. 길고 심술궂은 손가락이 온몸을 잔인하게 찔러대는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 언니는 전화기를 닫고, 앨리스의 팔을 잡았다. 언니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곧 기억날 거야. 아무 일 아니야. 그냥, 너하고 닉이 더 이상 같이 살지 않는 것뿐이야.”

뭐라고?”

앨리스가 말했다. 엘리자베스 언니가 다시 대답했다.

너흰 이혼하는 중이야.”

세상에, 그게 무슨 말이야?

(책에서 계속)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5) 트랙백(0)
이 포스트를 | 추천 3        
기억을 잃어버린 앨리스를 부탁해 - 09 | 기억을 잃어버린 앨리스를 부탁해 2014-06-30 10:52
테마링
http://blog.yes24.com/document/7727160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

호지즈 박사에게 제출하는 엘리자베스의 숙제

 

점심 휴식 시간에 벤에게 전화를 했더니, 벤이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너머로 말했어요. 세 명이 아니라 꼭 스무 명은 넘는 것 같았다니까요. 학교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수영 교실에 가 있다고 했어요. 절대로 수영 교실에 빠지면 안 된다고 했대요. 올리비아가 이제 막 악어인가 오리너구리가 됐기 때문이라나. 그 소리를 하자마자 올리비아가 엉터리! 돌고래라니까요!”라고 소리치면서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렸어요. 톰 목소리도 들리더군요. 분명히 조수석에 앉아 있었을 거예요. 진짜 단조로운 목소리로 “5킬로미터 초과, 4킬로미터 초과, 2킬로미터 부족이라고 하는 거예요.

벤은 힘든 것 같았지만, 행복해했어요. 어쨌거나 요 몇 주 동안 제일 행복해하는 것 같았어요. 아이들을 학교에서 데려와서 수영 교실에 데려다주는 건 앨리스가 부탁할 만한 일이 아니에요(정말이에요). 그런 책임을 지게 됐다는 사실에 벤이 얼마나 기뻤을지, 난 알 수 있어요. 신호등 앞에서 넷을 본 사람들은 평범한 아빠(사실 평균보다는 조금 크고 털도 많지만)랑 세 아이들이라고 생각했겠죠. 물론 이런 일을 너무 깊이 생각하면, 정말 마음이 아플 거예요. 그러니 하지 않을래요.

벤의 말로는 톰이 앨리스와 통화했다고 하더군요. 앨리스가 톰에게 체육관에서 쓰러진 얘긴 하지 않았대요. 그저 평소보다 10에서 15퍼센트 정도 기분이 더 나쁜 것만 빼면 그냥 엄마였다나요. 톰이 요즘에 퍼센트를 배우나봐요.

이상하죠? 왜 전화해볼 생각을 못 했을까요? 벤과 통화하고 곧바로 앨리스한테 전화했어요. 앨리스가 전화를 받았는데, 목소리가 이상해서 처음엔 못 알아들었어요. 간호사가 전화를 받은 줄 알았답니다.

, 미안해요. 앨리스 러브한테 전화한 건데.”

그 말을 할 때, 전화를 받은 사람이 앨리스라는 걸 깨달았어요. 앨리스는 흐느끼고 있었어요. “, 리비 언니. 언니구나!”라고 했어요. 두려운 거 같았고, 잔뜩 흥분해 있었어요. 사진 이야기, 공룡 스티커 이야기, 자기한테 맞을 리 없지만 정말 예쁜 빨간 드레스 이야기, 체육관에서 정신이 나갈 정도로 술을 마신 것 같다는 이야기, 닉이 왜 포르투갈에 갔는지 모르겠다는 이야기, 자기가 지금 임신을 한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다는 이야기, 자기는 1998년이라고 생각하는데 모두 2008년이라고 한다는 이야기 등을 정신없이 쏟아냈어요.

전 정말 깜짝 놀랐답니다. 앨리스가 우는 걸 본 지도, 들은 지도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나지 않아요(나한테 리비라고 부른 것도요). 작년엔 아주 많이 울었을 것도 같은데, 내 앞에서 울었던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요즘엔 둘 다 적정선을 넘지 않는 끔찍한 예의를 갖추고 정말 논리적인 목소리로 말하거든요.

앨리스가 우는 소릴 들으니까 왠지 좋았어요. 정말로요. 앨리스가 나를 필요로 했던 건 정말 오래전 일이에요. 예전에는 앨리스를 이 세상에서 보호하는 큰 언니 역할이 내 정체성의 큰 부분이었죠(이럴 바에야 돈을 아끼고 내가 나를 직접 분석할까봐요, 호지즈 박사님).

앨리스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곧바로 갈 테니까, 함께 문제를 해결하자고 했어요. 전화를 끊고 곧바로 무대로 올라갔어요. 지금 가족한테 큰 문제가 생겨서 가봐야 한다고, 나머지 강연은 아주 유능한 비서 라일라가 할 거라고 말했어요.

앨리스가 있는 병실을 찾는 동안 갑자기 기억이 떠올랐어요. 엄마랑 프래니랑 내가 엘리베이터에서 본 가족들처럼 아주 신이 나서 앨리스가 있는 병실을 찾아 복도를 뛰다시피 걸었던 날. 다른 병원이었고, 앨리스가 메디슨을 낳았을 때였어요. 멀리서 앞서 가는 닉이 보였어요. 우리 셋이 동시에 크게 소리쳤답니다. “!” 닉이 돌아보더군요. 우리가 다가갈 때까지 닉은 제자리에서 로키처럼 두 주먹을 번갈아가며 허공을 찔렀어요. 그 모습을 보고 프래니가 사랑스러운 듯이 정말 괴짜야라고 말했어요. 그때 난 잘난 체하는 도시 설계사하고 사귀고 있었는데, 그 순간 그 사람하고 헤어져야겠다고 결심했어요. 프래니가 그 사람을 괴짜라고 부른 적이 없었으니까요.

앨리스가 정말 10년간의 기억을 모두 잃었다면, 그날 일도, 메디슨이 아기였을 때도 기억할 수 없겠구나 싶었어요. 지난 10년간 앨리스에게 있었던 엄청난 일들을 막 떠올리는 동안, 앨리스의 병실에 도착했어요. 문 안을 들여다보니 커튼을 친 첫 번째 침대에 앨리스가 있었어요. 베개를 세워놓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두 손을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어요. 앨리스에게는 아무 빛깔이 없었어요. 흰 환자복을 입고, 흰 붕대를 감은 머리를 흰 베개에 괴고 있는 앨리스의 얼굴은 죽은 사람처럼 하얬어요.

그렇게 가만히 있는 앨리스를 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해졌어요. 앨리스는 언제나 민첩하고 재빠르게 움직여요.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내고, 자동차 열쇠를 짤랑거리면서 아이들 팔을 잡고 근엄하게 꾸짖는 게 앨리스죠. 늘 손톱을 조급하게 두드리면서 바쁘다, 바쁘다 하는 아이였어요. (10년 전에는 절대 그렇지 않았어요. 앨리스와 닉은 일요일이면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누워 있었답니다. 엄마랑 프래니랑 내가 늘 늙은 이모들처럼 그 큰집을 고칠 시간이 과연 있을까?” 하면서 혀를 차곤 했어요.)

처음에 앨리스는 날 보지 못했어요. 내가 가까이 가니까 눈을 깜박였어요. 얼굴이 창백해서 두 눈이 정말 크고 파래 보였어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앨리스가 전혀 다른, 하지만 익숙한 눈길로 절 보았다는 거예요. 뭐라고 설명할 순 없지만, 그 눈길을 보면서 앨리스, 너 돌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호지즈 박사님, 앨리스가 날 보고 제일 먼저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 리비 언니. 무슨 일 있었어?”라고 했어요.

------------------------------------------------------------------------

 

마침내 앨리스는 병실로 옮겼고, 환자복을 받았고, 텔레비전 리모컨과 흰 서랍장이 생겼다. 한 여자가 수레를 끌고 와 앨리스에게 연한 차 한 잔, 작고 세모난 햄치즈 샌드위치 네 조각을 주고 갔다. 간호사 말이 맞았다. 차와 샌드위치를 먹으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기억의 큰 틈은 전혀 메워지지 않았지만.

휴대폰으로 엘리자베스 언니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는, 끔찍했던 유럽 여행 중에 집에 전화를 걸었을 때 느꼈던 바로 그 기분이었다. 열아홉 살이었던 그때, 앨리스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행동했다. 모험심 강하고, 외향적인 사람. 하루 종일 혼자서 성당과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을 사랑하고, 밤이면 유스호스텔에서 브리즈번 출신 청년들과 술을 마시며 이야기 나누는 것을 즐기는 사람처럼 굴었다. 하지만 사실은 지독한 향수병에 걸려 외로워했고, 너무나 자주 지루해했으며, 기차 시간표도 구분하지 못했다. 휴대폰을 통해 지구 반대편에서 크고 선명한 엘리자베스 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앨리스는 언제나 다리에 힘이 풀려 이마를 유리에 기댄 채 안심하곤 했다. ‘그래, 내가 실재하는 사람이 맞구나.’

언니가 곧 온대요.”

전화를 끊고 앨리스는 간호사에게 그렇게 말했다. 찾아올 가족이 있으니, 자기가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입증되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엘리자베스 언니가 다가왔을 때, 사실 앨리스는 언니를 알아보지 못했다. 크림색 정장을 입고 안경을 쓰고 어깨까지 오는 머리카락을 활기차게 흔들며 들어오는 여자는 행정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찾아온 병원 직원처럼 보였다. 하지만 여자의 태도에서는 내가 너를 책임진다라는 분위기가 물씬 풍겨났다. 그러니까 그건 엘리자베스 언니가 늘 뿜어내는 분위기였다.

엘리자베스 언니의 모습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몸이 엄청나게 불어 있었다. 엘리자베스 언니는 언제나 강인하면서도 유연한 운동선수 같은 몸매를 유지했다. 조정과 조깅 같은 운동을 하면서 언제나 몸을 쓰는 일로 바쁜 언니였다. 하지만 지금은 뚱뚱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분명히 커져 있었고, 푹신하고 풍만해 보였다. 누군가 언니 몸에 공기를 잔뜩 불어넣어 부풀린 것처럼 보였다. 언니가 좋아할 몸매가 아닌데? 앨리스는 생각했다.

엘리자베스 언니는 살찌는 음식에 관해서는 재미있는 도덕주의자처럼 굴었다. 파블로바(머랭, 크림, 과일로 만든 디저트-옮긴이)를 먹으라고 주면 마치 크랙 코카인을 받은 것처럼 반응했다. 한번은 닉과 앨리스, 엘리자베스 언니가 주말을 함께 보낸 적이 있었다. 그때 엘리자베스 언니는 아침 식사 시간에 요구르트 병에 붙은 종이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정말 진지한 목소리로 요구르트를 먹을 때는 정말 조심해야 해라고 했다. 그 뒤로 닉과 앨리스는 요구르트를 먹을 때마다 둘 중에 한 명이 조심해!”라고 소리치고는 했다.

엘리자베스 언니가 침대 가까이 다가왔고, 침대 위 전등이 언니의 얼굴을 비추었다. 앨리스는 엘리자베스 언니의 입가와 안경 너머 눈 양옆에 가느다랗게 뻗어나간 거미줄 같은 주름을 볼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 언니도 아빠를 닮아 앨리스처럼 연한 파란색의 커다란 눈에, 속눈썹은 짙었다. 언니의 눈은 늘 사람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지금 언니의 눈은 아주 작아져 있었고, 속눈썹도 희미해져 있었다. 마치 색소가 빠져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색 바랜 눈은 상처를 입고 경계하는 것 같았고 지쳐 보였다. 마치 승리를 예상했던 전투에서 크게 패배한 사람 같았다. 앨리스는 정말 걱정이 되었다. 언니에게 아주 큰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앨리스의 질문에 엘리자베스 언니는 나한테 무슨 일이 있냐니, 그게 무슨 말이야?”라고 대답했다. 아주 밝고 기운찬 대답에 괜한 생각을 했구나 싶었다.

엘리자베스 언니는 플라스틱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앨리스는 언니가 치마를 가운데로 모으는 모습을 흘끗 쳐다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이상하게 울고 싶었다. 엘리자베스 언니가 말했다.

병원에 있는 건 너잖아. 너한테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거니?”

앨리스는 왠지 감당할 수 없이 무능한 앨리스 역할을 맡은 기분이 들었다.

너무 이상해. 마치 꿈을 꾸는 거 같아. 체육관에서 쓰러졌거든. 내가, 체육관에서 말이야! 진짜라니까. 제인 터너 말이 내가 금요 스텝클래스인가 뭔가 하는 데 다니고 있대.”

이제 앨리스는 바보처럼 굴 수 있었다. 분별력을 발휘할 엘리자베스 언니가 왔으니까. 엘리자베스 언니는 암울하면서도 겁먹은 얼굴로 앨리스를 쳐다보았다. 앨리스는 얼굴에서 바보 같은 웃음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손을 뻗어 침대 옆 서랍장에 넣어둔 사진을 꺼냈다. 엘리자베스 언니에게 사진을 건네며 조용히, 공손하게 말했다.

이 아이들이…….”

앨리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이 순간, 가장 지독한 바보가 된 것 같았다.

내 아이들이야?”

엘리자베스 언니가 사진을 받아들었다. 복잡한 감정이 얼굴을 스쳐 지나갔고, 거의 감지할 수 없는 동요가 일었다가 사라졌다. 엘리자베스 언니는 조심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맞아, 앨리스.”

앨리스는 극도로 불안정하게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감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애들이야.”

엘리자베스 언니가 깊이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일시적인 거야. 좀 쉬어야 하나봐. 푹 쉬고 나면…….”

어떤 애들이야?”

앨리스가 눈을 떴다.

얘들 말이야. 좋은…… 아이들이야?”

엘리자베스 언니가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멋진 아이들이야.”

난 좋은 엄마야?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고 있어? 먹을 것도 해주고? 모두 너무 커.”

아이들은 네 인생이야, 앨리스. 곧 생각날 거야. 모두 생각날 거야. 그냥…….”

소시지 요리도 해줬겠지?”

그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아이들은 소시지를 좋아하잖아.”

엘리자베스 언니가 앨리스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니, 넌 아이들한테 소시지는 주지 않아.”

난 임신했다고 생각했는데. 근데, 피검사를 해보더니 절대 아니라잖아. 임신한 것처럼 느껴지진 않지만, 임신하지 않았다니, 못 믿겠어. 믿을 수가 없어.”

아니야. 그러니까, 넌 임신하지 않았을 거야.”

셋이라니! 우린 둘만 낳을 생각이었는데.”

올리비아는 계획에 없었어.”

엘리자베스 언니가 딱딱하게 말했다. 마치 승인할 수 없다는 듯이.

하나도 사실처럼 느껴지는 게 없어. 내가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것 같아. 언니도 알지? 내가 그 책 얼마나 증오했는지? 도대체 말이 되는 게 없었잖아. 언니도 싫어했잖아? 우린 둘 다 말이 되는 걸 좋아했잖아.”

네가 지금 얼마나 이상할지 알 것 같아. 하지만 오래가진 않을 거야. 곧 괜찮아질 거야. 머리를 아주…… 심하게 부딪힌 것 같아.”

맞아, 아주 심하게 부딪혔어.”

앨리스는 다시 사진을 들어올렸다.

그러니까, 이 꼬마가, 이 여자애가 첫째인가봐. 내 첫째가 분명한 거지? 우리 첫째가 딸이었어?”

그래.”

분명히 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 너흰 그렇게 생각했지. 기억나.”

세상에, 진통도 겪었겠네? 세 번이나 진통을 겪은 거야? 세상에, 나 어땠어? 진통 생각만 하면 무서웠는데. 그러니까, 내가…….”

메디슨 때는 수월했어. 올리비아 때는 문제가 있었지만.”

엘리자베스 언니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안절부절못했다.

저기, 앨리스. 의사를 만나봐야겠어. 얼마나 힘든지 알 것 같아. 정말 이상한 일이야. 정말…… 무서운 일이야.”

앨리스가 잔뜩 겁에 질려 엘리자베스 언니의 팔을 움켜잡았다. 더 이상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아니, 안 돼, 절대 가지 마! 곧 사람이 올 거야. 내 상태를 보겠다며 계속 오는걸. 근데 리비 언니. 아까 닉 직장에 전화했거든. 근데 세상에, 포르투갈에 가 있대. 포르투갈이라니. 거기서 뭘 하는 걸까? 아주 끔찍한 비서한테 말했어, 내 말을 닉한테 전해달라고.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니까. 언니가 들었으면 정말 자랑스러워했을 텐데. 내가 근성을 발휘했거든. 내 근성은 강철 같았다구!”

잘했어, 앨리스.”

엘리자베스 언니는 해로운 음식을 먹은 것 같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

호지즈 박사에게 제출하는 엘리자베스의 숙제

 

닉이 포르투갈에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순간 정말 문제가 심각하구나 느꼈어요. 조카들이 괜찮은 아이들이냐고 물었을 때보다 훨씬 충격을 받았답니다.

앨리스는 정말 모든 걸 잊어버린 거예요. 지나까지도요.

------------------------------------------------------------------------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6) 트랙백(0)
이 포스트를 | 추천 3        
기억을 잃어버린 앨리스를 부탁해 - 08 | 기억을 잃어버린 앨리스를 부탁해 2014-06-25 17:02
http://blog.yes24.com/document/7723101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엄마?”

또다시 조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아이인지 남자아이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그저 평범한 아이 목소리였다. 숨을 내쉬고 있었고, 조급했고, 코를 조금 훌쩍거렸다. 사랑스러운 아이 목소리. 가끔 닉의 조카들 생일 때 부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누는 것 말고는 아이와 통화할 기회가 별로 없었지만, 아이들 목소리는 언제나 달콤했다. 실물로 보면 전화하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무섭고 지저분했지만.

손에서 땀이 났다. 앨리스는 전화기를 꼭 쥐고, 입술을 핥으면서,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보세요?”

엄마, 나야!”

어린아이 목소리가 왈칵 튀어나왔다. 마치 앨리스 귀에 직접 대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왜 아빠라고 했어? 아빠가 포르투갈에서 전화했어? , 맞다. 엄마, 아빠한테 전화해서 내가 X박스 사달라고 했다고 전해줘. 이름이 잃어버린 행성(Lost Planet)’이랑 극한 조건(Extreme Condition)’이야. 알았지? 꼭 말해야 돼! 아빠한테 잘못 말한 거 같으니까. 알았지, 엄마? 진짜 중요하단 말이야. 기억 못 하겠으면 꼭 적어놔야 해. 천천히 불러줄까? , , , , 해앵성! , , 조오건이야. 근데 어디야? 수영장에 가야 한단 말이야. 늦는 거 정말 싫어. 멍충이 파도타기 판을 타야 한단 말이야. , 벤 이모부다! 벤 이모부가 오기로 했어? 야호, 신난다. 왜 말 안 했어? 이모부, 안녕! , 갈게요. 끓어, 엄마!”

어딘가 긁히는 소리,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 먼 곳에서 아이들이 소리치는 소리 들이 들려왔다. 한 남자가 안녕, 챔피언이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고 전화가 끊어졌다.

앨리스는 휴대폰을 무릎에 떨어뜨렸다. 열려 있는 병실 문 밖의 복도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한 남자가 머리에 초록색 샤워 모자를 쓰고 재빨리 걸으면서 나 좀 쉬자!” 하고 소리쳤다. 멀리서 갓난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지금, 건포도랑 이야기한 건가?

앨리스는 아기 이름도 몰랐다. 앨리스가 아는 건 아직 아기 이름을 결정하지 못했다는 것. 닉은 톰이라고 짓고 싶어 했다. 남자로서 아주 정직한 좋은 이름이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앨리스는 에단이 좋았다. 섹시하고 성공할 것 같은 이름이니까. 물론 건포도는 여자아이일 수도 있었다. 여자아이라면 앨리스는 마들린이라고 짓고 싶었지만, 닉은 애디슨이라고 짓고 싶어 했다(여자 이름이 아주 정직하고 좋은 이름일 필요는 없으니까).

앨리스는 생각했다. 내가 아이 엄마인데, 아이 이름도 모르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가능한 일이 아니야. 이건 불가능의 영역이라고!

잘못 걸린 전화가 분명했다. 아이는 벤 이모부라고 했다. 가족 중에 벤은 없었다. 벤이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알지 못했다. 벤을 만나 본 적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앨리스는 마음속을 샅샅이 뒤져보았다. 살면서 만나 본 벤이라면 시누이인 도라(괴짜 중에서도 상괴짜)의 심령 예술 가게에 갔을 때 만났던 네온사인 디자이너뿐이었다. 턱수염이 정말 어마어마한 사람이었는데. 하지만 그 사람 이름은 벤이 아니라 빌이나 브래드일 수도 있다.

잠깐, 그런데 그 아이는 앨리스가 닉이라고 하자 왜 아빠라고 했어?” 하지 않았나? 게다가 닉이 포르투갈에 간 것도 알고 있었다.

불가능한 영역이 가능해졌다는 건 다른 말로 하면 결정적인 증거라는 셈이잖아?

앨리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열 살가량 되는 소년을 생각해보려고 했다. 키는 어느 정도나 될까? 눈은, 머리는 어떤 색일까?

앨리스의 일부는 비명을 지르고 싶어 했다. 이 상황이 너무나도 끔찍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다른 일부는 미친 듯이 웃고 싶어 했다. 이 상황이 너무나도 터무니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불가능한 농담이야! 앞으로 오랫동안 말하게 될 웃기는 이야기인 게 분명했다.

그래서 내가 닉한테 전화를 했거든. 그런데 어떤 여자가 받더니, 닉이 포르투갈에 가 있다는 거야. 그래서 생각했지, 포르투갈이라고?’

앨리스는 마치 폭발 장치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누구한테 전화를 할까? 엘리자베스 언니? 엄마? 프래니?

아니,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들이 앨리스가 모르는 이야기를 이상한 목소리로 말하는 걸 듣고 싶지 않았다. 온몸의 기력이 빠지고 묵직하게 느껴졌다. 아무 일도 안 할 거야. 절대로! 결국 무슨 일이 생기겠지. 누군가 찾아올 거야. 의사들이 머리를 고치면 모두 해결될 거야. 앨리스는 배낭에서 꺼낸 물건을 다시 집어넣기 시작했다. 수첩을 집어넣으려는데, 사진이 한 장 떨어졌다.

교복을 입은 세 아이 사진이었다. 계단에 나란히 앉아 손으로 뺨을 감싸고 무릎에 팔을 괴고 있는 것이 설정 샷이 분명했다. 여자아이 둘, 남자아이 하나였다.

남자아이는 가운데 있었다. 밝은 금발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귀는 튀어 나왔고, 코는 약간 들려 있었다.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인 채 조금 기괴하게 입을 찡그리고 있는 것이 웃는 것이 분명했다. 앨리스가 수백 번 보아서 잘 아는 얼굴이었다. 엘리자베스 언니도 사진을 찍을 때 언제나 이런 얼굴을 했다. 자신을 찍은 사진을 볼 때마다 엘리자베스 언니는 슬픈 목소리로 나 왜 이런 거지?”라고 했다.

남자아이 오른쪽에 앉은 여자아이가 더 큰 아이 같았다. 여자아이는 무심하면서도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쭉 뻗은 갈색 머리를 하나로 묶어 한쪽 어깨에 늘어뜨리고 있었다. ‘이렇게 웃긴 자세로 앉아 있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는 듯 앞으로 몸을 쭉 뺀 상태였다. 입술을 앙다물고, 카메라 오른쪽을 보고 있었다. 뭉툭한 무릎이 형편없이 까져 있고, 신발 끈은 양쪽 모두 풀려 있었다. 앨리스에게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자아이 왼쪽에 앉은 작은 여자아이는 풍성한 금발의 곱슬머리를 양 갈래로 따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천사 같은 두 볼에 보조개가 움푹 들어갈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교복 칼라 양쪽에는 무언가가 붙어 있었다. 앨리스는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앨리스의 셔츠에 붙어 있는 것과 똑같은 반짝이는 공룡이었다.

앨리스는 사진을 뒤로 돌려보았다. 타자로 문구를 친 라벨이 붙어 있었다.

 

아이들(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올리비아 러브(K2), 톰 러브(Yr4B), 메디슨 러브(Yr5M)

학부모 이름: 앨리스 러브

4장 주문

 

앨리스는 다시 사진을 돌려 세 아이를 쳐다보았다.

난 너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멀리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앨리스는 자신이 아주 얕고 짧은 숨을 내쉬고 있다는 걸 알았다. 높은 곳에 올라와 있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 진짜 어이없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사진을, 세 아이들 사진을 보고 있다는 말이지? 그러니까 내 아이들 말이야. 세상에, 난 이 아이들이 누군지도 모른다고. 이런 우스운 일이 어디 있어?’

처음 보는 간호사가 병실에 들어오더니, 앨리스를 힐끔 보고는 침대 끝에 있는 클립보드를 집어 들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곧 병실이 나올 거래요. 그때 모셔다드릴게요. 기분은 어떠세요?”

간호사가 말했다. 앨리스가 떨리는 손가락 끝으로 머리를 매만졌다.

문제는 지난 10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앨리스의 목소리가 조금 신경질적으로 떨렸다.

맛있는 차랑 샌드위치를 조금 가져다드릴게요.”

간호사가 앨리스 무릎에 놓인 사진을 보았다.

자녀분들인가봐요.”

그런가봐요.”

앨리스는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웃음은 곧 흐느낌으로 바뀌었고, 입안에 익숙한 눈물 맛이 느껴졌다. 앨리스는 생각했다. 그만해! 우는 건 정말, 정말 신물이 나! 하지만 어렸을 때 이후로 이렇게 울어본 적이 없어서인지, 아무리 멈추려고 해도 멈추어지지 않았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6) 트랙백(0)
이 포스트를 | 추천 7        
기억을 잃어버린 앨리스를 부탁해 - 07 | 기억을 잃어버린 앨리스를 부탁해 2014-06-23 11:27
http://blog.yes24.com/document/7720994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늘 그렇듯이 운전면허증 사진은 희미하게 바래 있었지만, 흰 셔츠를 입고 검은색 긴 목걸이 같은 것을 걸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긴 목걸이라고? 내가 긴 목걸이를 하는 사람이 되었단 말이야? 사진 속 앨리스는 어깨 위로 올라오는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더구나 짙은 금발로 염색한 것 같았다. 머리카락을 잘랐다고?

언젠가 닉은 앨리스에게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지 않겠다고 약속하라고 했었다. 앨리스는 아주 낭만적인 약속이라고 생각했지만, 엘리자베스 언니는 토할 것 같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때 언니는 마흔이 되면 열네 살짜리 헤어스타일을 유지하겠다는 생각은 도저히 못 할걸이라고 말했다.

마흔이 되면.

.

앨리스는 뒤통수를 만져보았다. 어렴풋이 앨리스는 자신이 말꼬리 머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직접 만져보니 실제로는 돼지꼬리 머리에 가까웠다. 고무줄을 풀고 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머리 길이는 운전면허증 사진에서보다도 더 짧은 것 같았다. 닉이 이 머리를 좋아했을까? 지금 당장 용기를 내어 거울을 들여다보아야 할 것 같았다.

물론, 앨리스는 여전히 할 일이 많았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운전면허증을 다시 지갑에 넣고, 계속 지갑을 뒤졌다. 앨리스라는 이름이 적힌 카드가 아주 많았다. 골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도 있었다. 잠깐, 골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는 BMW를 모는 사람이 갖는 사회적 표상 같은 거 아니었나? 지갑에는 도서관 카드도 있었고, 체육관 회원 카드, 건강보험 카드도 있었다.

공인 물리치료사 마이클 보일이 준 평범한 흰색 명함도 있었다. 명함 주소는 멜버른이었다. 뒤쪽에 손글씨가 보였다.

 

앨리스,

우리 모두 안정적으로 정착했고 잘하고 있어.

당신과 보냈던 즐거웠던 시간을 자주 생각해. 언제라도 전화해.

M. xxx

 

앨리스는 무릎에 명함을 떨어뜨렸다. ‘즐거웠던 시간’? 마이클 보일이라는 남자는 어째서 이런 뻔뻔한 메모를 남긴 걸까? 멜버른에서 물리치료사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앨리스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마이클 보일은 왠지 아주 끔찍할 것 같았다. 벗겨지고 있는 머리, 볼록한 배, 퉁퉁한 손, 질퍽한 입술이 떠올랐다.

대체 망할 닉은 어디에 있는 거야?

제인이 전화를 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체육관에서 제인은 정말 이상했다. 아무래도 직접 전화를 해서 이 심각한 상황을 설명해 주어야겠다. 앨리스는 지금 당장 닉이 달려오기를 바랐다. 왜 진작 이 생각을 못 했을까? 일단 생각이 떠오르니 한시라도 빨리 전화를 걸어 닉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왠지 닉의 목소리를 아주 오랫동안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앨리스는 안절부절못하며 작은 병실을 둘러보았다. 당연히 전화는 없었다. 사실 병실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세면대, 거울, 손 씻는 방법이 적힌 안내문뿐이었다.

잠깐, 휴대폰이 있었지. 그래, 그것만 있으면 돼.

최근에 앨리스에게도 휴대폰이 생겼다. 닉의 아버지가 쓰던 낡은 휴대폰이었지만 작동은 잘되었다. 벌어지지 않도록 고무줄로 고정시켜야 했지만. 앨리스의 마음속 어디에선가 지금은 훨씬 비싼 휴대폰이 있을 거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방 앞쪽에 있는 지퍼를 열어 안을 들여다봤다. 예감이 맞았다. 작고, 매끄럽고, 빛나는 은색 휴대폰이 있었다. 앨리스가 예상한 그대로였다(정말 예상을 했었나? 확신할 수는 없었다).

휴대폰 옆에는 가죽 장정을 한 수첩도 있었다. 앨리스는 재빨리 수첩을 열어보았다. 수첩 위에는 분명히 2008년이라고 적혀 있었고, 페이지마다 앨리스 글씨가 틀림없는 글자들이 적혀 있었다. 수첩 내지 위쪽에도 어김없이 2008년이라는 검은 글자가 인쇄되어 있었다. 2008, 2008, 2008. 앨리스는 수첩을 덮고 반짝이는 휴대폰을 집었다. 거칠고 얕은 숨을 몰아쉬었다. 커다란 금속 막대가 느닷없이 가슴을 관통한 것만 같았다.

이 이상한 전화기를 사용할 수 있을까? 앨리스는 기계치라서 새 기계를 살 때마다 늘 애를 먹었다. 하지만 우아하게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가락은 휴대폰 사용에 익숙한 것 같았다. 앨리스의 손가락은 휴대폰 양옆에 있는 은색 버튼을 눌러 휴대폰을 열었다. 닉의 직통 전화번호를 꾹꾹 누르고 휴대폰을 귀에 댔다. 벨이 울렸다. 제발 받아, 제발 받으라고! 닉의 목소리만 들으면 정말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영업부입니다.”

쾌활하고 가벼운 젊은 아가씨 목소리였다. 누군가 전화기 너머에서 큰 소리로 웃고 있었다. 앨리스가 말했다.

거기 닉 있나요? 닉 러브 말이에요.”

잠시 대답이 없었다. 아가씨가 다시 말을 했을 때는 왠지 심한 꾸중을 들은 것 같은 목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러오던 웃음소리도 갑자기 사라졌다.

죄송하지만, 내선 연결이 잘못됐네요. 원하시면 러브 씨의 개인 비서에게 연결해드릴 수 있는데요.”

앨리스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닉의 개인 비서라는 말에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정말 근사했다. 아가씨가 계속 말했다. 왠지 앨리스와 논쟁을 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러브 씨는 사실 이번 주 내내 포르투갈에 계세요. 그러니까 러브 씨 비서에게 연락해보시는 게 좋을 거예요.”

포르투갈?

닉이 포르투갈에 왜 간 거죠?”

국제회의 때문이 아닐까요?”

확신하는 투는 아니었다.

일단 러브 씨 비서와 연결해드릴…….”

포르투갈과 개인 비서라고? 승진했구나. 두 사람이 분명히 샴페인을 터트렸겠지.

앨리스가 말했다(정말 영악하게).

, 그런데 러브 씨 직책이 어떻게 되죠?”

사장님이세요.”

아가씨는 이 세상 사람은 누구나 안다는 투로 말했다.

세상에! 닉이 인간말짜 대신 그 자리에 오른 거야?

그렇다면 한 번 승진한 게 아니네? 승진 사다리를 완전히 올라선 거잖아. 닉이 잔뜩 으스대고 이런저런 지시를 하면서 사무실을 성큼성큼 걸어 다니는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괜히 웃음도 나왔다. 그런데 사람들이 닉을 비웃는 건 아니겠지?

러브 씨 비서에게 연결해드릴게요.”

이번에는 단호한 목소리였다. 전화가 끊기고 다시 벨소리가 흘러나왔다. 곧 부드러운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사장실 애너벨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 난 닉의 아내예요. , 러브 씨의 아내랍니다. 꼭 연락을 해야 하는데, 그게…….”

갑자기 여자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안녕하세요, 앨리스. 건강하시죠?”

그게, 사실…….”

아시겠지만, 사장님께서 시드니에 안 계세요. 일요일 아침에나 오실 거예요. 정말 중요한 일이 있다면 전해드릴 수는 있지만, 사실 사장님을 방해하고 싶지 않네요. 정말 엄청난 일정을 소화하고 계시거든요.”

이 여자는 왜 이렇게 무례한 걸까? 앨리스가 누구인지는 아는 것이 분명했다. 혹시 앨리스가 이 여자한테 엄청 못되게 군 걸까?

그래서, 기다리실 거예요, 앨리스?”

전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미움을 받다니. 머리가 더욱 지끈거렸다. 앨리스는 말하고 싶었다. ‘이봐요, 아가씨. 지금 병원이란 말이에요. 구급차에 실려 왔어요.’

 

엘리자베스 언니는 언제나 앨리스에게 말하곤 했다.

사람들이 널 밟아대는데도 가만히 있는 건 절대 안 돼!”

시간이 많이 흘러 앨리스가 그 불쾌한 사건을 잊어버린 뒤에도 엘리자베스는 가끔 말했다.

그 약사가 너한테 한 말을 밤새 생각해봤어. 어떻게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있어? 진짜 믿을 수가 없다. 넌 근성이 없어도 너무 없어.”

앨리스가 바닥에 누워 젤리처럼 흐무러진 채 얼마나 근성이 없는지를 보여주는 동안, 엘리자베스 언니는 제발 그만하라고 했다.

앨리스는 단호하게 행동하려면 미리 경고를 받아야 했다.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사람들이 정말 무례하게 구는 건지, 아니면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건지 말이다. 혹시 그 사람들이 아침에 말기 환자 진단을 받고 힘들어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니까.

 

앨리스가 조그만 목소리로 닉의 개인 비서에게 사정을 설명하려는데, 앨리스의 몸이 앨리스의 의지와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로서는 익숙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등이 쫙 펴지고, 턱이 올라가고, 배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갑자기 전혀 앨리스 같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신랄하고 냉정하고 단호하고 오만했다.

아니, 기다릴 수 없어요. 아주 급한 일이니까. 사고가 생겼어요. 닉한테 연락해서 되도록 빨리 나한테 전화하라고 하세요.”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다. 공중제비를 세 번 했어도 이렇게 놀랍지는 않을 거였다. 개인 비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요, 앨리스. 방법을 찾아볼게요.”

여전히 앨리스를 무시하는 말투였다.

좋아요, 알겠어요.”

전화를 끊으면서 앨리스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더러운 암캐 같으니라고.”

독성 물질을 뱉어내기라도 하듯 자연스럽게 난폭한 말들이 튀어나왔다. 앨리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문신을 새기고 툭하면 싸움질을 벌이는 소녀처럼 말하다니, 이건 놀라워도 너무나 놀라웠다.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앨리스는 화들짝 놀랐다. 닉이 분명해, 그렇게 생각했다. 안도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이번에도 앨리스의 손가락이 제대로 해냈다. 앨리스는 전화기에 초록색 표시가 된 곳을 누르고 말했다.

?”

전화기 너머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토라진 목소리였다.

엄마?”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6) 트랙백(0)
이 포스트를 | 추천 5        
1 2 3 4 5 6 7 8 9 10
진행중인 이벤트
나의 북마크
이벤트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