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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책읽기
.. 예스24 갑질 .. | 시골에서 책읽기 2022-06-23 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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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24블로그는 "글쓰기 장애"를 얼추

일고여덟 해째 안 고친다.

지난 2022년 6월 20일 저녁부터 글쓰기가 안 되다가

6월 23일 새벽에 비로소 글쓰기가 된다.

 

붙임사진 같은 일을 하루에 100번 즈음 본다.

예스24에 이 말썽을 풀어야 하지 않느냐고

여러 판 물어보았으나

여태 아무 대꾸조차 없다.

 

일부러 그러더라도

하루이틀이나

한두 달이나

한두 해도 아닌

일고여덟 해를 이처럼 한다면

 

참 재미나다.

익살짓은 그만 해도 되지 않겠는가?

예스24여?

이런 익살짓을 하는 예스24에서

굳이 책을 사고 싶겠는가?

 

마땅한 얘기인데

예스24 블로그에서

날마다 '글쓰기 말썽'에 부딪혀

헛짓을 하기를 100번 즈음 다시 해야 하는 나날을

일고여덟 해를 보내면서

어느덧 예스24에서는 아무 책도 안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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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책읽기 ― 평화로 어깨동무를 | 시골에서 책읽기 2016-11-03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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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평화로 어깨동무를



  대통령 곁에서 무시무시한 짓을 저지른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들은 퍽 오랫동안 온갖 곳에서 이녁 밥그릇을 챙기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늘을 찌르는 듯하던 그들 몸짓도 하나씩 속살을 드러냅니다.


  다만 아직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들이 얼마나 많은 돈을 얼마나 오래 빼돌렸는지는 다 알아내기 어려울 수 있어요. 이들 말고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권력자 자리나 둘레에 서면서 나랏돈을 몰래 빼냈는가까지 찾아내기는 힘들 수 있어요.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 권력은 사람들을 짓밟거나 억누르면서 이녁 밥그릇을 챙기라고 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사람들을 보살필 줄 아는 따사롭고 아름다운 마음이 되라고 하는 자리가 대통령이나 정치 권력 자리예요.


  이 권력자 자리나 둘레에 서면서 얄궂고 바보스러우면서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른 사람들 이야기를 듣다가 책 한 권이 떠오릅니다. 하승수 님이 쓴 《나는 국가로부터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한티재,2015)입니다. 이 책은 온 나라 사람들이 ‘기본소득’을 받으면서 ‘기본살림’을 할 수 있을 때에 나라가 평화로우면서 아름답게 거듭날 수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떤 일자리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원전을 많이 지어 그곳에서 나오는 방사성폐기물이 늘어나면, 그것을 처리할 일자리도 늘어날 것이다. 대량살상 무기를 더 만들어도 일자리는 늘어난다. 사회가 더 불평등해져서 범죄율이 늘어나도 일자리는 늘어난다. 교도소도 더 지어야 하고 교도소를 지킬 사람들도 더 뽑아야 하기 때문이다. (79쪽)


  하승수 님은 ‘일자리 만들기’나 ‘일자리 늘리기’는 부질없는 몸짓이 되기 일쑤라고 이야기합니다.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핵발전소를 자꾸 지어서 ‘핵발전소 일자리’를 늘리는 일은 이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아요. 참다운 일자리를 늘리려 한다면 ‘일자리 갯수’가 아니라 ‘즐겁게 일하면서 즐겁게 돈을 벌어 즐겁게 살림을 짓도록 북돋우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똑같은 돈을 들이더라도 핵발전소나 화력발전소가 아니라 ‘마을 자가발전’을 이룰 수 있는 길에 돈을 들이면 훨씬 더 많은 ‘일자리 늘리기’를 이룰 수 있습니다. 깨끗한 전기를 마을마다 스스로 지어서 쓰도록 하면 먼 앞날을 내다보아도 훨씬 돈을 아끼면서 즐거운 나라가 될 만합니다.


  토목건축을 자꾸 일삼으면서 토목건축 일자리를 늘리는 몸짓도 썩 도움이 되지 않겠지요. 시멘트로 뭔가를 뚝딱거리는 일자리가 아니라, 사람들이 손으로 마을과 나라를 더욱 아름답고 튼튼하며 알차게 가꾸도록 하는 일자리가 되어야지 싶어요.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면, 낭비되는 공적인 재원들이 너무 많다. 대한민국의 경우에는 불필요한 도로를 닦고, 건물을 짓고, 댐을 건설하고, 온갖 부패로 찌든 공공사업을 추진하는 데 낭비되는 돈이 너무 많다. 이 돈만 줄여도 기본소득을 지급할 상당한 재원을 확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각종 토건사업에 쓰는 예산이 1년에 40조 원 정도 된다. (117쪽)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정치’가 아닌 ‘권력’으로 여겨서 ‘사람들이 피땀 흘려 모은 돈(세금)’을 제 밥그릇을 채우는 데에 쓴 사람들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돈을 빼돌립니다. 이뿐 아니라 엉뚱한 곳에 엄청난 돈을 쏟아붓도록 이끌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흐름을 살펴본다면 ‘나라(정부)에 돈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나라에 돈이 없다기보다 ‘나라에 있는 돈을 제대로 된 곳에 슬기롭게 못 쓴다’고 해야 옳구나 싶어요.


  하승수 님이 《나는 국가로부터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라는 작은 책에서 밝히는 기본소득은 꿈 같은 이야기라고 느끼지 않아요. 틀림없이 이룰 만하리라 느껴요. 하승수 님은 처음에는 ‘시골사람(농부와 귀촌인)’한테 먼저 기본소득을 펼치고, 이윽고 온 나라 누구한테나 기본소득을 펼치자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사회를 헤아려 보면 아직도 크게 줄어드는 농어민 인구예요. 이러다가는 머잖아 시골사람은 거의 다 사라질 수 있어요. 그래서 이 책은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이들이 보람을 느끼도록 하고, 시골로 돌아가서 흙을 만지려는 이들이 제대로 뿌리를 내리도록 누구보다 먼저 이들한테 기본소득을 펼쳐야 한다고 밝힙니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조건 없이 65세 이상에게 매월 기초연금 20만 원을 지급하겠다”는 공약을 들고 나왔다. 일종의 노인기본소득이었다. 이처럼 대한민국에서도 기본소득은 언제든지 기득권 정치세력의 의제가 될 수 있다. 물론 기득권을 가진 정치세력은 진정성 없이 문제에 접근하기 때문에 믿을 수는 없다. 박근혜 대통령도 결국 공약을 스스로 어겼다. (20쪽)


  기본소득을 더 살펴본다면, 온 나라 사람이 다달이 40만 원쯤 기본소득을 받는다면, 이 돈은 그리 큰 돈은 아니지만, 이 돈은 틀림없이 기본살림에 크게 도움이 되리라 느껴요. 두 집 식구라면 80만 원, 세 집 식구라면 120만 원이 되겠지요. 기본소득을 받는 사람들은 기본살림을 ‘한국에서 이 돈으로 살림을 이루려고 쓸’ 테니 저절로 ‘내수시장을 살리는 길’이 됩니다. 기본소득을 받는 사람이 외국으로 나가서 돈을 쓸 일이란 거의 없을 테니까요.


  더구나 기본소득을 받아서 살림에 보태는 이들은 ‘먼 곳으로 가서 돈을 쓰지’ 않아요. 바로 ‘우리 마을에서 우리 이웃 가게’에 돈을 써요. 저절로 ‘내수(나라살림)’뿐 아니라 마을살림을 북돋우겠지요. 그리고 이렇게 기본소득으로 쓴 돈은 다시 나라살림(세금)으로 돌아갈 테고요.


  간추려 본다면, 기본소득은 정치권력이 나랏돈을 엉뚱한 데에 퍼붓지 않도록 막는 구실을 한다고 할 만합니다. 나라살림을 복지와 평화와 민주와 평등에 기울이도록 이끄는 몫을 맡는 기본소득이라고 할 만하겠지요. 이 기본소득을 하루빨리 나라정책으로 펼친다면, ‘사람들이 일을 안 하려고’ 할 까닭이 없어요. 사람들이 기본소득을 받는다면 ‘터무니없는 저임금과 차별이 판치는 곳’이 바뀔 수 있어요. 기본소득이 없는 터라 적잖은 이들은 터무니없는 저임금과 차별을 말없이 참거든요. 기본소득이 이루어질 때에 비로소 한숨을 놓을 만하고, 이때에 기업이나 사업장이나 공장에서도 ‘노동자 기본권리를 제대로 지켜야’ 하는 줄 깨달으리라 봅니다.


우리는 가사노동, 돌봄노동 같은 말을 쓴다. 가사노동이나 돌봄노동도 임금을 받고 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여전히 많다. 자기 집의 가사노동을 하는 사람, 자기 가족을 돌보는 일을 하는 사람은 ‘임금’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일’을 하고 있다. (78쪽)


  기본소득은 ‘집에서 조용히 집안일’을 하던 이들한테 ‘집안일을 하는 보람’을 느끼도록 이끌기도 합니다. 틀림없이 늘 일을 하지만 ‘일하는 사람 대접’을 제대로 못 누리는 ‘집지기’도 당차고 의젓한 일꾼이라는 대목을 잊지 말아야 해요.


  평화로 어깨동무하고, 평등으로 손을 잡기를 빕니다. 사람들 손에서 비롯한 나랏돈이 사람들 손으로 돌아와서 마을을 두루 돌 때에 아름다운 평화와 평등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2016.11.3.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나는 국가로부터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

하승수 저
한티재 | 2015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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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책읽기 ― 맛있게 먹는 밥 한 그릇 | 시골에서 책읽기 2015-12-13 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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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맛있게 먹는 밥 한 그릇



  밥을 맛있게 먹으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밥을 맛있게 먹으면 맛있습니다. 삶을 즐겁게 누리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삶을 즐겁게 누리면 즐겁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이웃을 사랑하려 하면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얼핏 보면 말장난 같으나, 참말 이와 같은 삶 얼거리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지?’ 하고 묻기만 해서는 실마리를 못 찾아요. ‘어떻게 하면 될까?’ 하고 스스로 수수께끼를 내고는 이 실마리를 따라서 나아가야 비로소 실마리를 엽니다.


  삶이 따분하거나 고단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스스로 따분한 삶하고 고단한 삶을 끌어들인다고 할 만합니다. 삶이 재미있거나 아름답다고 여기는 사람은 재미와 아름다움을 늘 스스로 끌어들인다고 할 만합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스스로 생각하는 대로 스스로 삶을 짓기 때문입니다. 환경이 어떻고 터전이 어떻고 하는 얘기는 나중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웃는 사람은 어디에서나 웃고, 우는 사람은 어디에서나 울거든요. 돈이 많은 어버이를 두어야 아이들이 웃지 않아요. 웃는 어버이를 둔 아이들이 웃어요. 돈이 없는 어버이를 둔 아이들이 울지 않아요. 우는 어버이를 둔 아이들이 울어요.


  밥을 맛있게 먹으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자, 이제는 우리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스스로 밥을 맛있게 짓고, 맛있게 차리며, 맛있게 수저를 들면, 우리 밥상은 언제나 맛있습니다. 남이 차려 주기에 맛있는 밥이 아닙니다. 비싼 밥을 바깥에서 사다가 먹으니 맛있는 밥이 아닙니다. 스스로 삶을 즐겁게 다스리면서 기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하루가 될 때에 비로소 맛있는 밥을 먹어요. 편의점 도시락이든 집밥이든 호텔 밥이든 모두 같아요. 어떤 마음인가에 따라 밥맛이 바뀌어요.


  아침저녁으로 밥상을 차리며 사는 틈틈이 《치킨로드》(책과함께,2015)라는 책을 읽습니다. 이 책을 쓴 앤드루 롤러 님은 ‘닭’ 아닌 ‘닭고기’가 어떻게 수백 억 마리나 우글거리면서 지구별 곳곳을 넘나드는가 하는 수수께끼를 풀려고 합니다. 오늘날 지구별에서 사람들은 닭을 얼마나 괴롭히면서 고기하고 알을 얻는가 같은 뒷얘기도 파헤치고, 먼먼 옛날부터 지구별 여러 나라와 겨레에서 닭이라는 짐승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하는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닭은 고대 이집트에서 희귀하고 신분 높은 새였는데, 이 사실은 192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54쪽).”고 하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만히 돌아봅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요즈음 들어서야 비로소 알려졌을까요? 아마 그러할는지 모릅니다. 다만, 이집트라는 나라에서는 예부터 닭이 ‘희귀하고 신분 높은 새’인 줄 잘 알았을 테지요.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잘 몰랐어도 말입니다. 곰곰이 따지면, 한국이나 중국이나 일본도 닭을 함부로 다루지 않았어요. 아시아 여러 나라도 닭을 아무렇게나 다루지 않았지요. 평화를 사랑하는 수수한 사람들은 오랜 옛날부터 닭을 비롯해 돼지도 소도 말도 다른 모든 짐승도 함부로 다루거나 아무렇게나 부리지 않았습니다. 시골에서 조촐히 살림을 지으면서 수수하게 삶을 가꾸던 사람들은 닭을 비롯한 모든 짐승을 알뜰히 보살피고 고이 돌보았어요.


  닭이 낳는 알 하나를 고맙게 받아들였고, 닭 한 마리를 오래오래 키웠습니다. 어미 닭이 알을 품어서 병아리가 까도록 했습니다. 어미 닭이 지낼 둥우리를 사람들이 정갈하게 엮어 주었고, 살림집하고 닭우리는 한울타리에 깃들었어요. 추운 겨울에는 사람하고 닭이 한지붕 밑에서 잠을 잤다고 했습니다.


  “이 섬(이스터 섬)의 원주민들은 거대한 석상을 조각하지 않을 때에는 곡식을 재배하고 닭을 돌보는 정교한 방식에 따라 닭장을 지은 듯하다. 수백 개에 달하는 닭장이 섬 전체에 퍼져 있다. 이 닭장은 빈틈없이 쌓아올린 돌무더기인데, 닭장마다 돌문이 달린 자그마한 입구가 있다(109쪽).”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닭을 알뜰히 돌보던 겨레는 모두 평화롭습니다. 닭을 고이 보살피던 수수한 사람들은 전쟁무기 따위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이와 달리, 오늘날 산업 사회에서는 닭을 공장이나 감옥 같은 곳에 잔뜩 가두어서 달포도 채 안 되는 동안에 ‘고기닭’으로 살찌워서 내다 팔아요. ‘공장 축산’이 널리 퍼진 오늘날 산업 선진국마다 군대와 전쟁무기가 어마어마하며, 산업 선진국(과 산업 후진국) 어디나 군대와 전쟁무기를 없앨 뜻이 없어 보입니다. 평화로 나아가지 않는 모든 나라는 고기닭도 고기돼지도 고기소도 아주 끔찍한 곳에서 무시무시하게 ‘뽑아’냅니다.


  닭 한 마리를 알뜰히 아끼면서 돌보던 지난날에는 닭 한 마리가 열 해도 살고 스무 해도 살았습니다. 이무렵에는 고기 한 점을 함부로 먹지 않았어요. 고기 한 점을 아주 고맙게 먹었을 뿐 아니라, 기쁘게 먹었지요. 오늘날에는 수수한 평화가 가뭇없이 사라지면서 ‘고기를 날마다 먹어’도 고마움이나 기쁨을 느끼거나 누리는 사람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지 싶습니다.


  그러니까, 고기를 먹느냐 안 먹느냐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이른바 채식이냐 육식이냐는 대수롭지 않아요. 아시아를 이룬 수수한 시골마을 시골사람이 키운 짐승은 모두 ‘풀을 먹고 자랐’습니다. 풀을 먹고 자란 짐승 살점은 ‘고기’라 하지만, 막상 이 집짐승 살점은 ‘풀로 이루어졌’어요. 수수한 시골마을 시골사람이 고기를 먹을 적에는 그냥 풀을 먹는 삶하고 같습니다. 이와 달리 오늘날 산업 사회에서는 ‘닭도 돼지도 소도’ 풀을 못 먹어요. 오직 사료와 항생제와 촉진제만 먹는 오늘날 ‘고기짐승’입니다. 고이 사랑스레 가꾸어 고맙고 반가운 밥(풀이든 고기이든)을 누리는 삶이 사라지면서, 오직 돈으로 재거나 따지는 문명과 문화예요.


  “오늘날의 양계 산업은 예전에 전혀 시도하지 않았던 규모와 범위로 실험을 하고 있다. 오염된 수로, 노동자에게 위험한 환경, 식품 안전에 관한 우려, 형편없는 동물 복지 문제 등은 활기찬 국제무역의 그림자 속에 대부분 은폐되어 있다(399쪽).” 같은 이야기는 미국과 유럽과 한국 모두 똑같다고 할 만합니다. 아름다움이 사라지면서 산업이 되고, 사랑스러움이 사라지면서 문명이 됩니다. 기쁨이 사라지면서 경제발전이 되고, 즐거움이 사라지면서 현대사회가 됩니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손수 밥을 차려서 곁님하고 아이들하고 밥상을 누리는 자리에서 늘 스스로 묻습니다. 오늘 하루도 맛있는 밥인가? 오늘 하루도 기쁜 밥인가? 오늘 하루도 노래하는 밥인가? 오늘 하루도 웃음잔치 같은 밥인가? 이 물음에 스스로 고개를 끄덕이면 언제나 맛있는 밥입니다. 이 물음에 스스로 고개를 젓는다면 아무래도 맛없는 밥이 되고 맙니다. 언제나 나 하기에 달린 일입니다. 언제나 내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지는 삶이요 하루입니다. 4348.12.13.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치킨로드

앤드루 롤러 저/이종인 역
책과함께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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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책읽기 ― 마음속에 빚은 그림처럼 사랑해 | 시골에서 책읽기 2015-12-13 0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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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마음속에 빚은 그림처럼 사랑해



  언젠가 ‘우리는 모두 잊혀진 하느님이다’ 하고 외치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말을 들으며 속으로 피식 웃었어요. 더없이 마땅한 말 아닌가 하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뭔가 아리송했어요. 아니, 이 말대로 우리가 모두 잊혀진 하느님인 줄 알았다면, 이 말을 예전부터 알았다면, 나는 왜 스스로 ‘아름다운 하느님’으로서 ‘아름다운 하느님’답게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잇달았어요. 골을 부리거나 짜증을 내거나 시샘을 하거나 거친 말을 한다면, 이때에 나는 스스로 ‘하느님 아닌 바보스러운 몸짓’을 하는 셈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잊혀진 하느님이다’ 하고 외치는 말을 들을 적까지 나는 이 말을 제대로 몰랐을 뿐 아니라 제대로 헤아린 일조차 없는 셈입니다. 너하고 내가 다른 목숨이 아니요, 너만 아름답거나 나만 아름답지 않은 줄 안다고 말하기는 했어도 정작 삶이 어떻게 흐르고 사랑이 어떻게 피어나는가를 조금도 모른 셈이지요.


  가을이 저물며 새삼스레 겨울이 찾아옵니다. 새삼스레 겨울이 찾아오면 마당 한쪽 동백나무는 새삼스레 꽃봉오리를 터뜨리려고 합니다. 이무렵 마당 한복판 후박나무도 봉오리를 야물게 맺어요. 다만. 동백나무는 겨울 한복판에 꽃송이를 하나씩 터뜨린 뒤에 봄에 흐드러지고, 후박나무는 봄에도 봉오리를 단단히 웅크리다가 여름으로 접어들려고 할 즈음부터 한꺼번에 꽃하고 새 잎을 터뜨리지요. 오늘은 터질까 모레에는 맺힐까 하고 두근두근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비로소 새 꽃하고 잎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맞아요. 바로 이 얼굴. 코는 킁 하고 바짝 치켜 올라가고, 눈은 반짝반짝 빛나며, 엷은 주근깨로 뒤덮인 장난기 가득한 얼굴! 이 얼굴을 보면 기쁨이 몰려와요. 왜냐하면 이제부터 평소와 다른 새로운 날들이 시작되는 기분이 들거든요(10쪽).” 하고 첫머리를 여는 《달라도 친구잖아!》(개암나무,2012)라는 어린이문학을 읽으며 새로운 철을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이 책을 쓴 다카도노 호코 님은 그림을 그리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살며시 풀어냅니다. 그림쟁이는 빈둥빈둥 노는 게으름뱅이일까요? 그림쟁이처럼 글쟁이나 사진쟁이는 ‘먹고사는 일’에는 어수룩한 어리보기일까요?


  가만히 돌아보면 어린이는 어른하고 여러모로 다릅니다. 어린이는 어른처럼 바깥일을 해서 돈을 벌지 않습니다. 어린이가 하는 일은 놀이예요. 어른이 보기에 아무것이 아니라 할 만한 것을 장난감으로 삼고, 어른이 보기에 아무것도 안 하는 듯하더라도 모두 놀이로 누립니다.


  어른은 빨래나 걸레질이나 설거지나 밥하기 같은 집안일을 모두 일로 여깁니다. 어른은 논일이나 밭일이나 바깥일(회사나 공장이나 일터에서 일삯을 받고 하는 일)을 모두 일로만 여깁니다. 참말 어른은 늘 ‘일’투성이예요. 이와 달리 어린이는 늘 ‘소꿉’투성이입니다. 어린이는 모든 삶을 놀이로 바꾸기에 소꿉이 되고, 어른은 모든 삶을 일로 바꾸기에 그냥 일일 뿐입니다. 그러면 어린이는 어리보기일까요? 어린이는 게이름뱅이일까요? 어린이는 철부지일까요?


  “누군가가 그림 속으로 숨어 들어가는 일이 때때로 있어. 정말 들어가 보고 싶은 멋진 그림인 경우에만 그렇겠지만 말이야(26쪽).” 같은 이야기를 되새깁니다. 참으로 아름답게 그린 그림이 있으면 그만 이 그림에 빨려듭니다. 영화 〈메리 포핀스〉를 보면 길바닥에 빚은 그림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대목이 나와요. 그림이 더없이 아름답다고 여길 만하니 이 그림으로 신나게 들어가서 실컷 논 뒤에 다시 밖으로 나옵니다.


  스스로 아름다이 생각하면서 스스로 아름다이 빚은 그림이기에, 이 그림에 나부터 스스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스스로 사랑스레 생각하면서 스스로 사랑스레 이룬 그림이기에, 그 그림에 너랑 내가 손을 맞잡고 함께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내가 지은 아름다운 꿈에는 나부터 기쁘게 들어갑니다. 내가 지은 아름다운 꿈에 너를 불러서 함께 들어가서 웃습니다. 네가 지은 아름다운 사랑에는 너부터 기쁘게 들어갈 테지요. 네가 지은 아름다운 사랑에 함께 들어가자고 네가 나를 부르니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들어가서 노래합니다.


  삶이란 웃음하고 노래가 어우러진 잔치라고 느낍니다. 삶에서 웃음하고 노래를 뺀다면 재미도 보람도 없으리라 느낍니다. 삶에 웃음하고 노래가 고이 어우러지면서 춤이 태어나니, 이러한 삶을 누리는 사람들은 저마다 남달리 웃음꽃을 터뜨리고 웃음바다를 펼치리라 느껴요. 웃으면서 춤추고 노래하며 춤추기에 우리 스스로 사랑을 새롭게 지어서 온누리에 아름다운 꿈을 퍼뜨릴 만하다고 느껴요.


  “창문으로 들어온 산들바람과 빛의 타래 속에서 아주 작은 먼지들이 반짝반짝 춤을 추고 있었어요. 정말 말할 수 없이 즐거워 보였어요(61쪽).” 같은 이야기가 흐르면서 《달라도 친구잖아!》라는 어린이문학은 천천히 끝을 맺으려 합니다. 그야말로 티끌이나 먼지라고도 여길 수 있는 조그마한 이야기를 차곡차곡 여미는 이 작은 책에는 산들바람하고 빛타래 같은 노래가 잔잔히 흐릅니다. 물결치거나 너울치는 이야기는 없습니다만, 산들바람을 타고 하늘을 날거나 구름하고 동무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어버이가 아이하고 나누는 사랑은 늘 조그맣다고 여길 만합니다. 대수롭지 않다 싶은 조그마한 사랑을 나누는 어버이와 아이입니다. 작은 사랑에서 작은 꿈을 길어올리고, 작은 꿈에서 작은 삶을 지으면서, 작은 삶으로 작은 웃음을 나누는 작은 살림이라고 할 만해요.


  마음속에 빚은 그림처럼 사랑합니다. 마음속에 지은 그림처럼 노래합니다. 마음속에 아로새긴 그림처럼 꿈꿉니다. 마음속에 씨앗 한 톨로 심은 그림처럼 웃습니다. 마음속에 고요히 깃들어 잠자는 하느님처럼 살아갑니다.


  먼 옛날부터 누구나 그림을 그렸고, 먼 옛날부터 누구나 삶을 지었습니다. 먼 옛날부터 여느 어버이 누구나 아이한테 사랑스레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먼 옛날부터 여느 아이 누구나 여느 어버이한테서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물려받으면서 삶을 새롭게 지었습니다. 책도 없고 인터넷이나 컴퓨터도 없고 사전이나 도서관이 없었어도, 여느 보금자리에서 여느 어버이와 여느 아이는 늘 새로우면서 아기자기한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아마 먼 옛날부터 누구나 마음속에 꿈을 씨앗으로 심었기 때문이리라 느껴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는 모두 고운 숨결로 거듭나면서 손을 맞잡거나 어깨동무를 할 수 있으니, 이러한 넋으로 마음자리에 새로운 생각을 그렸으리라 느껴요. 4348.12.13.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달라도 친구잖아!

다카도노 호코 글, 그림/이서용 역
개암나무 | 2012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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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책읽기 ― 삶에 숨결을 베푸는 말 한 마디 | 시골에서 책읽기 2015-05-10 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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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삶에 숨결을 베푸는 말 한 마디



  봄에는 봄노래를 듣습니다. 봄노래란 무엇인가 하면 봄에 듣는 노래로, 봄에 찾아오는 제비가 들려주는 노래라든지, 새봄에 새로 깨어난 개구리가 우렁차게 부르는 노래입니다. 봄에 부는 바람도 봄노래를 들려줍니다. 겨울과 다른 바람결이기에 느낌과 결과 무늬가 모두 다른 봄바람입니다. 봄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리도 봄노래입니다. 새봄에 깨어나는 겨울눈과 봄꽃을 봄바람이 살랑살랑 간질이는 소리도 봄노래예요.


  철마다 새로운 노래를 듣습니다. 철마다 새로운 목숨이 깨어나니, 언제나 새로우면서 맑은 노래를 들을 수 있습니다. 다만, 도시에서는 새로운 철에 새로운 노래를 듣기에 만만하지 않다고 할 만합니다. 언제나 똑같이 흐르는 자동차 소리라든지, 텔레비전이나 손전화 소리라든지, 온갖 기계가 내는 소리에 휩싸이다 보면, 철 따라 다른 ‘철소리’나 ‘철노래’하고 멀어질 만합니다.


  시골에서는 밤하늘 별빛을 철마다 새롭게 누릴 수 있습니다. 낮하늘 구름결도 철마다 새롭구나 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골에서 살더라도 밤하늘이나 낮하늘을 느긋하게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흙을 쪼면서 들일을 하지 않고, 비닐이나 농약을 만지면서 일을 해야 하면 하늘을 볼 겨를이 없습니다. 기계를 부려서 흙을 갈거나 엎거나 닦자면, 하늘뿐 아니라 밭둑에 돋는 풀꽃을 볼 틈이 없습니다.


  아무리 배기가스나 매연으로 매캐한 도시라 하더라도, 내 마음이 곱게 눈을 뜰 수 있다면, 손바닥만 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별빛과 구름빛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바람은 시골에만 불거나 도시에는 안 불지 않습니다. 바람은 지구별을 골고루 어루만집니다. 그러니, 먼 데에서 울리는 봄바람 노랫소리를 도시 한복판에서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비록 제비가 서울 시내로 찾아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서울 한복판에서 개구리 노랫소리나 풀벌레 노랫소리를 듣기 어렵다 하더라도, 서울을 둘러싼 숲과 들과 바다와 냇물에서 퍼지는 곱고 보드라운 봄노래에 귀를 기울인다면, 마음 가득 넉넉하고 짙푸를 수 있습니다.


  미우치 스즈에 님이 빚은 만화책 《유리가면》(학산문화사,2010) 가운데 열둘째 권을 읽으면, ‘헬렌 켈러’를 다룬 연극 무대에서 배우가 외치는 말이 있습니다. 연극이기에 무대에 설 때마다 말(대사)이 조금씩 바뀌기도 하는데, 설리번 님이 헬렌 켈러한테 ‘말’을 가르치려고 하면서 외치는 이야기가 있어요.


  만화책에 나오는 연극 무대에서 한 번은 “난 너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거야! 이 땅의 모든 것을! 언어란 빛에 비추면 오천 년이나 옛날의 것도 볼 수 있단다! 우리들이 느끼고, 생각하고, 알고 있는, 그것을 전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이 언어 속에 있는 거란다! 단 한 마디의 말로써 넌 그 손으로 세계를 움켜잡을 수 있게 되는 거야(126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이 대목을 보다가 한참 멎었습니다. 다음 쪽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이 이야기를 오래도록 되읽었습니다. ‘말이라고 하는 빛(말빛)’으로 비추면 어제와 오늘이 하나라고 이야기하는 대목을 곰곰이 헤아립니다. 우리가 알 뿐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을 ‘말 한 마디’로 갈무리해서 지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찬찬히 돌아봅니다. 말 한 마디를 터뜨릴 때에 온누리(세계)를 두 손으로 움켜쥘 수 있다는 이야기를 가만히 되씹습니다.


  만화책을 조금 더 읽으면, “우리들이 느끼고 생각하고 알고 있는 것, 그것을 주고받을 수 있는 방법이 언어 속에 있는 거야. 언어만 있으면 인간은 암흑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어. 무덤 속에 남아 있지 않아도 되는 거란다. 단 한 마디의 언어로, 넌 그 손에 세상을 움켜잡게 되는 거야(152쪽).” 같은 이야기도 흐릅니다. 설리번 님이 헬렌 켈러한테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하는데, 앞 대목하고 몇 군데가 다르지만 줄거리는 같다고 할 만합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는 ‘느낌과 생각과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길을 여는 실마리’가 ‘말 한 마디’에 있다고 밝힙니다. 이러면서, ‘말을 손에 쥔’ 사람은 ‘무덤에 갇히지 않는다’고 덧붙입니다. 다시 이야기하자면, ‘말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싱그럽게 삶을 누린다’는 뜻이 됩니다. 말을 하기에 살고, 말을 못 하기에 죽는다고 하겠습니다.


  바람이 불어서 바람을 마십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람을 마십니다. 들짐승과 바닷짐승도 바람을 마십니다. 깊은 바닷속에서도 바람을 마십니다. 바닷물에 녹아든 바람을 마시지요. 바람이 없으면 뭍짐승뿐 아니라 물짐승 모두 죽습니다. 더욱이 풀과 꽃과 나무도 바람을 마셔야 삽니다. 바람이 없으면 풀과 꽃과 나무도 몽땅 죽습니다.


  바람이 있기에 지구별이 푸르다고 할 만합니다. 바람이 있으니 하늘과 바다가 파랗다고 할 만합니다. 바람은 이 지구별에 푸르면서 파란 숨결로 흐릅니다. 사람을 비롯한 뭇목숨은 바람을 맞아들이면서 온몸을 푸르면서 파란 넋으로 가꿉니다.


  몸을 살리는 숨결이 바람이라고 한다면, 마음을 살리는 숨결은 말이라고 할 수 있다고 느낍니다. 바람을 마시면서 몸이 새롭게 거듭난다면, 말을 먹고 나누면서 마음이 새롭게 거듭난다고 느낍니다.


  말이 있기에 생각을 짓습니다. 말이 있어서 생각을 마음에 심습니다. 말이 있으니 생각을 마음에 심어서 삶을 이룹니다. 말이 있기 때문에 생각을 마음에 심어 삶을 이룬 사람이 사랑을 꽃피워 아름답게 하루를 누립니다.


  만화책 《유리가면》은 연극을 하는 삶길을 걷는 두 아이가 나오는 줄거리를 보여줍니다. 두 아이 가운데 한 아이(마야)는 ‘보랏빛 장미로 찾아오는 사람’을 마음으로 깊이 사랑하고, ‘보랏빛 장미로 찾아오는 사람’도 마야라고 하는 수수한 아이를 마음으로 넓게 사랑합니다. 연극을 이루는 바탕은 ‘말’과 ‘말로 지은 몸짓’입니다. 사랑을 잇는 끈은 ‘마음’과 ‘마음을 담은 말’입니다.


  우리가 읽는 책은 ‘글을 종이에 얹어서 빚’습니다. 글이란 ‘말을 옮긴 그릇’입니다. 그러니, 책을 읽는다고 할 적에는 ‘말을 읽는다’는 셈이요, 말을 읽는다고 할 적에는 ‘삶을 갈무리하고 아우른 이야기’를 ‘말빛’으로 비추어서 스스로 받아먹는 셈입니다. 책읽기는 글읽기이면서 말읽기요, 말읽기는 삶읽기입니다. 삶읽기는 생각읽기나 마음읽기나 사랑읽기입니다.


  바람이 있기에 모든 목숨이 숨을 쉬면서 새롭게 하루를 맞이합니다. 말이 있기에 모든 사람이 눈을 뜨면서 귀를 열고 머리를 가꿉니다. 말 한 마디로 생각을 지어서 온누리에 아름다운 삶이 드리우도록 북돋웁니다. 바람 한 줄기가 흐르는 봄날에, 말 한 마디를 새삼스레 읊습니다. 4348.5.10.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유리가면 12

미우치 스즈에 글그림
대원 | 2010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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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책읽기 ― 동이 트는 새벽에 | 시골에서 책읽기 2015-04-2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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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동이 트는 새벽에



  요즈막에 우리 집 작은아이가 새벽 다섯 시부터 잠에서 깹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서 노는 아이라서 이처럼 시골스럽게 새벽 일찍 일어나는가 하고 헤아려 봅니다. 겨울에는 새벽 여섯 시나 아침 일곱 시에도 일어났고, 때로는 아침 여덟 시 즈음에 일어나기도 한 다섯 살 작은아이인데, 나날이 동이 일찍 트니, 이러한 결에 맞추어 아주 일찍 잠을 깨는구나 싶습니다.


  일찌감치 잠이 깨는 아이를 다시 재우지 못합니다. 다섯 살 아이한테 ‘너무 일찍 일어났구나. 쑥쑥 크고 튼튼하게 자라려면 잠을 더 자야지’ 하고 이야기를 한들, 이 아이는 이 말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아니, 곰곰이 따지면, 시골스러운 아이는 동이 트는 새벽에 일찌감치 일어나서 놀고, 낮에 한두 시간 즈음 실컷 낮잠을 누린 뒤, 저녁밥을 먹고 별빛과 함께 잠들면 될 만하구나 싶습니다. 새벽 일찍 깨는 만큼 저녁 일찍 잠들 테니까요.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님이 쓴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포이에마,2014)라는 책을 읽습니다. 책이름처럼 아이들은 누구나 ‘오늘’을 삽니다. 아이들은 먼 ‘앞날’을 바라보면서 자란다고 말하지만, 아이들이 앞날(모레)로 나아가려면 바로 이곳에서 오늘 즐겁게 뛰놀고 기쁘게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곳에서 오늘 맛난 밥을 먹고 개구지게 뒹굴면서 하하호호 노래잔치와 웃음꽃을 누려야 합니다.


  “1000년에 걸쳐 아이들은 마을 어른들 곁에 앉아 인생을 배웠다. 노인들의 말을 듣다가도 어디론가 뛰어가 흥미로운 걸 찾아 놀곤 했다(43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빙그레 웃음짓습니다. 이 말은 거의 옳지만, 한 군데에서 안 옳습니다. 어느 대목이 안 옳은가 하면, 아이들은 ‘1000년에 걸쳐’ 마을 어른들 곁에서 삶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1000년이 아니라 10만 해나 100만 해, 아니 맨 처음부터 늘 마을 어른들 곁에서 삶을 배웠어요. 고작 1000년이라는 틀로 묶을 수 없습니다. 아이를 낳은 어버이가 아이를 지켜봅니다. ‘아이를 낳은 어버이’한테도 이 사람을 낳은 어버이가 있습니다. 아주 마땅히 둘레에 옹기종기 마을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지구별에서 사람들이 저마다 뿔뿔이 흩어져서 ‘작은 집안(핵가족)’을 이룬 지 얼마 안 됩니다. 지구별 곳곳에서 사람들이 ‘작은 집안’을 이룰 즈음부터 마을이 무너졌다고 할 만합니다. 도시가 커지는 곳마다 ‘작은 집안’이 되면서 ‘마을 이야기’가 사라집니다. ‘작은 집안’이 되면서 예술가와 작가와 전문가와 교사 같은 사람들이 따로 생깁니다. ‘큰 집안’이었고 ‘오순도순 복작거리는 마을’이 있을 적에는 따로 예술가나 작가나 전문가나 교사가 없었어도, 모든 어른이 다 함께 예술가였고 작가였으며 전문가인데다가 교사였습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모든 어버이는 예술가이면서 교사요, 작가이면서 전문가입니다.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더라도 아이들은 언제나 집에서 먹고 자면서 놉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만 배우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어디에서나 늘 배웁니다. 학교에서는 교사라고 하는 어른 곁에서 배우고, 집에서는 어버이라고 하는 어른 곁에서 배우지요. 마을에서는 마을 이웃이라고 하는 어른 둘레에서 배워요.


  교사자격증이 있는 사람도 교사이지만, 여느 어른도 누구나 교사입니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이녁 삶을 아이들한테 보여주면서 낱낱이 가르치는 셈입니다. 그러니,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지 않는 어른들 누구나 아이 앞에서는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해서는 안 될’ 노릇이요, ‘아무 짓이나 섣불리 해서는 안 될’ 노릇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하루를 짓고 누리는 착하고 참다운 사람으로 설 노릇이에요.


  “아이들이 보이는 문제 행동을 일종의 질병으로 간주하고 잠재적으로 위험성이 있는 약을 주는 것은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일한 길을 선택하는 것에 불과하다(140쪽).” 같은 이야기처럼, 오늘날 사회와 학교에서는 ‘주의력 결핍’이라든지 ‘선천성 장애’ 같은 이름을 아이들한테 함부로 붙입니다. 아이들이 왜 떠돌거나 아프거나 힘겨운가를 살펴서, 아이들이 웃음을 되찾고 기쁘게 놀 수 있는 터전으로 사회와 학교를 바로세우기보다는 자꾸 땜질 같은 처방만 합니다.


  제도나 정책이 없어서 아이들이 아프지 않습니다. 지원금이나 복지기금이 모자라서 아이들이 힘들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아프거나 힘들다면, 사랑을 못 받기 때문입니다. 나라에서는 마땅히 보육정책을 세워야 하겠습니다만, 아이들을 참답게 사랑하려는 슬기로운 숨결이 없이 정책만 바라본다면, 아이들은 외롭습니다.


  어떤 아이도 제 어버이가 저한테 값비싼 옷이나 밥이나 집을 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어떤 아이도 제 어버이가 저한테 값진 장난감이나 놀잇감을 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모든 아이는 저마다 제 어버이한테 오직 하나, ‘사랑’을 바랍니다. 모든 아이는 언제나 ‘사랑’을 받아서 ‘꿈’을 스스로 키워서 가꾸고 싶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효과적인 육아법을 안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교육적인 통찰이나 이론, 사상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이들에게 주는 사랑이다(193쪽).” 같은 이야기를 곰곰이 돌아봅니다. 육아법을 잘 안대서 아이를 잘 돌보지 않습니다. 교수법을 잘 안대서 아이를 잘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랑이어야 아이를 돌봅니다. 사랑이어야 아이를 가르칩니다. 사랑이어야 밥을 맛있게 짓습니다. 사랑이어야 글을 아름답게 씁니다. 사랑이어야 장사를 기쁘게 합니다. 사랑이어야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마을살림을 멋지게 가꿉니다.


  천천히 날이 밝아 아침입니다. 밤새 벼락을 이끌고 퍼붓던 비가 그칩니다. 비와 바람과 벼락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쿵쿵 울릴 때마다 우리 집도 쩌렁쩌렁 흔들렸습니다. 마을 가까이 어딘가에 벼락이 떨어졌구나 싶습니다. 땅에 벼락이 떨어지면 가까운 곳도 땅이 흔들흔들 울리는구나 하고 새롭게 느낍니다. 마당에는 밤새 떨어진 나뭇잎이 수북합니다. 네 철 언제나 푸른 후박나무는 봄마다 가랑잎을 떨구면서 새 잎이 돋습니다. 날마다 쓸고 또 쓸어도 여름이 될 때까지 다시 쓸고 거듭 쓸어야 합니다. 사랑스럽게 자라는 아이들도 날마다 사랑을 받고 거듭 받으면서 이튿날에 또 새롭게 사랑을 기다리리라 느낍니다. 어버이는 날마다 사랑을 길어올리는 사람이요, 아이는 날마다 사랑을 찾는 사람이라고 할 만합니다.


  밝은 햇살이 차츰 퍼집니다. 따사로운 햇볕이 천천히 드리웁니다. 처마 밑에서 제비가 노래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아침을 짓습니다. 아침을 함께 먹고 오늘 하루도 새로운 웃음으로 신나게 놀자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어제 놀이’를 잊고 ‘오늘 놀이’를 야무지게 누립니다. 4348.4.29.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저
포이에마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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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책읽기 ― 네 손을 펼치렴 | 시골에서 책읽기 2015-03-16 05:12
테마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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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네 손을 펼치렴



  네가 손을 펼쳐야 네 손을 내가 잡습니다. 내가 손을 펼쳐야 내 손을 내 이웃이 잡습니다. 너와 내가 서로 손을 펼치지 않으면, 우리는 손을 잡을 수 없습니다. 너와 내가 서로 손을 펼칠 때에, 우리는 손을 잡기도 하고 손바닥을 맞대기도 하면서 빙그레 웃습니다.


  너와 내가 춤을 추려면 손을 활짝 펴고 만나야 합니다. 너와 내가 춤을 추듯이 삶을 지으려면 마음을 활짝 열고 함께 살아야 합니다. 손을 펼치고, 마음을 펼치면서, 사랑을 펼칩니다. 삶을 펼치고, 꿈을 펼치면서, 이야기를 펼칩니다.


  우리는 저마다 한 걸음씩 나아갑니다. 한꺼번에 두어 걸음이나 서너 걸음을 나아가지 않습니다. 한달음에 열이나 스무 걸음씩 건너뛰지 않습니다. 차근차근 걷습니다. 씩씩하게 걷습니다. 기쁘게 걷습니다.


  가시밭길이기에 더 고단하지 않습니다. 어느 길을 걷든 스스로 고단하다고 여기니 고단합니다. 꽃길이기에 더 싱그럽지 않습니다. 어느 길을 걷든 스스로 싱그럽다고 여기니 싱그럽습니다. 그러니까, 남이 보기에는 가시밭길이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여느 길입니다. 남이 보기에는 꽃길이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따분한 길입니다.


  내 삶은 늘 내가 손수 일굽니다. 내 밭은 늘 내가 손수 짓습니다. 내 말은 늘 내가 손수 가꿉니다. 내 이야기는 늘 내가 손수 들려줍니다. 내 밥은 늘 내가 손수 차려서 먹습니다. 어느 것이든 언제나 내 마음이 움직이면서 이루는 삶입니다. 좋거나 나쁜 것이 없습니다. 오로지 삶이 있습니다. 반갑거나 서운한 것은 없습니다. 오로지 사랑이 있습니다.


  신지아 님이 쓴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다》(샨티,2014)라는 책이 있습니다. 살결이 빠알간 빛깔로 물든 몸으로 태어났다고 하는 신지아 님은 어릴 적에 ‘마음으로 사귀는 동무’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 어린 날을 돌아봅니다. 나한테는 마음으로 사귀는 동무가 있었을까요? 나한테는 여러 놀이동무와 이야기동무가 있었는데, 이들은 나한테 마음동무였을까요? 그리고, 나는 다른 아이들한테 마음동무나 이야기동무가 될 만했을까요?


  신지아 님은 어릴 적에 정신병원에 다녀온 적이 있다고 합니다. 정신병원에서 얼굴을 마주한 의사 아저씨한테 “엄마가 날 왜 여기 데리고 왔는지 이해가 안 가요. 내가 돌았대요. 학교에서 조퇴하면 인왕산으로 달려갔고, 꽃을 보고 풀 냄새를 맡고, 하늘을 가슴에 안고 낮잠을 자면 너무나 좋아요. 학교 가기 싫은 것이 돈 건가요? 어른들은 정말 이상해요. 저는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재미없어요(85쪽).”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서울에서 태어나 학교를 다니면서도 인왕산을 오르내렸군요. 인왕산에서 꽃과 풀과 나무를 만났군요. 하늘과 비와 바람과 벼락을 사귀었군요.


  학교에서 보는 어른이나 아이 모두 재미없을밖에 없었겠군요. 풀내음 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른이 없고, 꽃송이 같은 웃음을 보여주는 동무가 없으며, 하늘바람 같은 사랑을 나누는 이웃이 없으면, 삶이 재미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만히 보면, 오늘날 아이들은 무척 재미없는 하루를 보냅니다. 풀도 꽃도 나무도 없는 채 하루를 보내야 해요. 하늘도 못 보고 구름이나 비나 눈이나 바람을 못 느끼는 채 하루가 지나가요. 햇볕 한 줌 제대로 쬐면서 하루를 보내는 아이나 어른은 얼마나 될까요. 바람 한 줄기가 온몸을 감싸는 기운을 느끼지 못하는 채 하루를 지나가는 사람은 얼마나 많을까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이 팔다리를 뒤흔드는 몸짓을 지켜보면서, 이런 몸짓이 마치 ‘춤’이라도 되는 양 따라하는 아이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노래하거나 춤추고 싶다는 꿈을 키우는 아이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이나 ‘가수’가 되어서 ‘돈을 많이 벌겠노라’ 외치는 아이만 잔뜩 찾아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 언제 어디에서나 늘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는 아이는 드물고, 텔레비전에서 떠도는 춤과 노래를 똑같은 몸짓으로 되풀이하는 아이만 많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지껄이는 갖가지 거칠거나 막된 말을 아무렇지 않게 주워담는 아이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가만히 보면 어른도 똑같은걸요. 어른도 여느 때에 참으로 거칠거나 막된 말을 아무렇지 않게 주워담아요. 아이들은 어른 곁에서 이런 거친 말과 막된 말을 고스란히 지켜보면서 배워요.


  사랑을 배우는 아이가 드뭅니다. 꿈을 물려받는 아이가 드뭅니다. “내 삶을 통해서 내 몸과 마음 그 자체가 다이아몬드가 되는 것, 그것이 내가 갖고 싶은 다이아몬드였다(178쪽).” 같은 생각을 마음에 씨앗 한 톨로 심으면서 하루를 오롯이 누리려고 하는 아이가 몹시 드뭅니다. 아이들은 교과서와 시험공부에 파묻힙니다. 어른들은 아이를 교과서와 시험공부에 파묻습니다.


  삼월이 무르익는 시골에는 쑥내음이 고루 퍼집니다. 다만, 모든 시골자락에 쑥내음이 퍼지지는 않습니다. 마늘밭을 건사하는 마을 어르신은 바야흐로 경운기 몰고 농약을 치느라 부산합니다. 군청에서는 ‘불조심’을 외치면서 아침 낮 저녁에 걸쳐 ‘불 피우지 말자’라든지 ‘논둑과 밭둑 태우지 말자’ 같은 이야기를 마을방송으로 끊임없이 날마다 시끄럽게 떠듭니다.


  나는 우리 집 큰아이와 뒤꼍에서 쑥을 뜯습니다. 쑥을 뜯는 동안 우리 집에서 쑥내음을 듬뿍 들이켜고, 우리 몸과 옷에 쑥내가 가득 뱁니다. 그런데, 마을 한쪽에서는 농약이 퍼지고, 우리 마을뿐 아니라 이웃 여러 마을은 군청에서 떠드는 ‘녹음테이프 마을방송’ 소리로 귀가 아픕니다.


  신지아 님은 “내가 없으면 그 무엇도 의미가 없다는 것, 나를 사랑하지 않거나 내가 자연의 일부임을 깨닫지 못하면 사랑을 안다고 말할 자격이 없다는 것도 이해하게 되었다(344쪽).” 하고 말합니다. 내가 나를 아낄 때에 지구별이 나를 아껴 줍니다. 내가 나를 보살필 때에 지구별이 나를 보살펴 줍니다. 내가 나를 사랑할 때에 지구별을 감도는 바람이 나를 사랑해 줍니다.


  봄은 달력 숫자로 오지 않습니다. 봄은 사람들 옷차림에서 오지 않습니다. 봄은 짧은치마라든지 새빨갛거나 샛노란 옷에서 오지 않습니다. 봄은 저잣거리 쑥떡에서 오지 않습니다. 봄은 따스하면서 너그러운 내 마음에서 옵니다. 봄은 따스한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에서 오고, 봄은 너그러운 몸짓으로 홀가분하게 함께하는 춤사위에서 옵니다.


  우리 가슴에서 봄이 자랍니다. 우리 가슴에서 여름과 가을이 자랍니다. 우리 가슴에서 겨울이 찾아와 고요하고 고즈넉하게 쉽니다. 우리는 서로 손을 펼쳐서 기쁨과 꿈과 사랑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내 가슴을 열어서 손을 펼칩니다. 4348.3.16.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신지아 저
샨티 | 2014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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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책읽기 ― 차돌 같은 아이들 | 시골에서 책읽기 2015-01-13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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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차돌 같은 아이들



  한겨울에도 아이들은 맨발로 놀기를 즐깁니다. 맨발로 얼음장을 밟고 싶습니다. 맨손을 찬물에 담가 놀고 싶습니다. 한겨울에 맨발과 맨손으로 놀다가 어느새 아이들은 손발이 꽁꽁 업니다. 빨갛고 차갑지요. 그런데 이런 손발로도 놀이를 그치지 않습니다.


  아주 먼 옛날부터 아이들은 때와 철을 가리지 않고 놉니다. 마냥 놉니다. 더워도 놀고 추워도 놀아요. 더운 철에는 온몸을 땀으로 적시면서 놉니다. 추운 철에는 온몸이 꽁꽁 얼어도 놉니다. 어른이 된 사람도 어릴 적에는 이렇게 놀았고, 오늘날 아이도 이렇게 놀며, 앞으로 태어날 새로운 아이도 이렇게 놀리라 생각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아이들은 온몸으로 바람과 햇볕과 물과 바람과 흙과 풀을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지식이나 말로 알려주어서 알거나 배우기보다는, 아이가 스스로 몸을 움직여서 찬바람도 쐬고 땡볕도 받으면서 새롭게 배우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이들은 언제나 놀아야 합니다. 추운 날에는 콧물이 얼어붙도록 놀고, 더운 날에는 땀에 젖은 옷을 하루에도 여러 벌 갈아입을 만큼 놀아야 합니다.


  전북 익산에서 조용히 삶을 짓는 문영이 할머님이 쓴 산문책 《내 뜰 가득 숨탄것들》(지식산업사,2014)을 읽습니다. 흰머리 할머니가 되어 지난날을 찬찬히 돌이키면서 쓴 글이 정갈합니다. 할머니는 “신접살이 어느 해였던가 그 집장 맛을 못 잊어 메주 한 덩이로 담그기 쉬운 찌엄장을 소꿉놀이하듯 담가 놓고, 고만고만한 아이들 손 잡고 봄마중 나물 찾으러 들에 나갔다. 옆집 아주머니는 우리 아이들은 고뿔 한 번 앓지 않는데서 ‘차돌’이라 불렀다(80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문득 그리운 낱말 ‘차돌’입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요즈음에는 아이들을 가리켜 ‘차돌’이라 부르는 어른은 매우 드뭅니다. 아이들한테 ‘장군’이나 ‘공주’라고는 말해도, ‘차돌’이라 말하는 어른은 찾아볼 길이 없어요.


  도시이든 시골이든 길바닥에 구르는 돌멩이 하나 보기 어려운 탓일까요. 이제는 흙으로 된 골목이나 고샅이 없어서, 그저 시멘트나 아스팔트만 있기 때문일까요. 아이들이 어디에서나 돌을 주워서 돌치기(비석치기)도 하고, 땅바닥에 돌멩이로 금을 긋도 온갖 놀이를 하던 즐거움이 사라졌기 때문일까요. 이쁘장한 돌은 주머니에 넣고 하루 내내 기쁘게 웃는 아이들이 사라졌기 때문일까요. 바닷가에 가야 비로소 조약돌을 구경할 수 있는 메마른 도시 문명 사회가 되었기 때문일까요.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수수합니다. 할머니는 이런 학문이나 저런 이론을 들먹이지 않습니다. 할머니는 오직 이녁 삶을 헤아리면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나이든 어른이 젊은이와 어린이한테 이녁 슬기를 물려주고 싶은 마음이 글줄마다 알뜰합니다. “어느 해 산기슭에 박 한 붓을 놓고 늦가을에 가 보니 풀한테 잡혀 겨우 박 한 덩이가 열린 채 덩굴까지 말랐다. 그 박을 삶아 보니 예전에 보던 박처럼 결이 곱고 단단했다. ‘아하! 국수나무가 청정지역 지표수이듯, 바가지가 맑은 공기를 좋아하나 보다!’ 그래서 요즘 박은 겉은 고운데 속이 거칠어, 누구를 선뜻 부를 수가 없어 몇 해째 박 농사가 시들해졌다(91쪽).”


  할머니 이야기에 나오는 ‘박 한 붓’을 가만히 떠올립니다. 아주 어릴 적에 이 말마디를 얼핏 들은 듯합니다. 그렇지만 한국말사전에는 ‘붓’을 가리키는 낱말이 없습니다. 글씨를 쓰는 연장을 가리키는 붓은 있으나, 박씨를 땅에 묻는 일을 가리키는 붓은 안 나옵니다. ‘박 한 붓’을 아는 할머니가 흙으로 돌아가면, 앞으로 이런 말을 쓰는 사람도 사라질 테고, 이러한 한국말이 있는지 떠올릴 수 있는 사람도 없겠구나 싶습니다. 무엇보다 박씨를 심어서 바가지를 얻을 수 있는 사람도 사라질 테지요. 바가지를 얻고 싶어서 박씨를 심을 사람도 사라질 테지요. 공장에서 찍는 플라스틱 조각만 바가지인 줄 아는 사람만 있을 테지요.


  할머니 이야기는 수수하면서 투박합니다. 흔하면서 너른 이야기입니다. 다만, 오늘날에는 더 흔하지 않은 이야기요, 이제는 그리 너르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손수 들이나 숲에 가서 꽃다지를 캐서 나물로 삼는 사람은 손가락에 꼽을 만큼 아주 드물기 때문입니다. “꽃다지가 노래에만 있는 나물이 된 것처럼 이제 엉겅퀴마저 자취를 감추는가 싶어 애답다. 독일은 들에 난 풀 한 포기도 마음대로 손대지 못하도록 법으로 막는다고 한다. 우리 나라도 보호할 나무와 풀을 정하고 지킬 일이라고 생각한다(175쪽).” 독일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는 갯벌도 냇물도 바다도 땅도 숲도 나무도 모두 살뜰히 건사하려고 몹시 애씁니다. 이와 달리 한국에서는 ‘일자리 만들기’와 ‘경제개발’만 된다면 무엇이든 모조리 망가뜨리거나 무너뜨립니다. 4대강사업 한 가지를 들자면, 이런 뻘짓을 하느라 수십 조 원에 이르는 돈을 퍼부었는데, 이를 다시 바로잡자면 또 수십 조 원에 이르는 돈을 퍼부을 테지요. 오직 토목공사에만 이 같은 돈을 퍼붓습니다.


  돈을 바라보니까 오직 돈만 따지는 셈일 텐데, 돈을 바라본대서 돈이 우리한테 오지 않습니다. 삶을 알차게 가꾸면서 곱게 일굴 때에 비로소 삶이 살아나면서 돈은 돈대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공장을 잔뜩 지어서 다른 나라에 수십억 원어치 상품을 내다 팔면 언뜻 보기에는 경제성장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공장을 짓느라 숲과 들을 망가뜨리고, 공장을 돌리느라 매연과 폐수가 쏟아지며, 공장으로 원재료를 실어나르고 공장에서 물건을 옮기느라 찻길을 닦고 비행기를 띄울 테니, 다시금 들과 숲이 망가지면서 매연과 폐수가 쏟아집니다. 수십억 원어치 상품을 파는 동안 우리가 잃거나 잊거나 무너지는 삶터는 돈으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와 달리, 다른 나라에 아무것도 팔지 않으면서 모든 밥과 옷과 집을 손수 지어서 누릴 때를 생각해 봅니다. 이때에는 경제성장은 없으나 수입도 수출도 없을 뿐 아니라, 무역에 기댈 까닭이 없는데다가, 맑은 물과 바람을 늘 마십니다. 몸이 아플 일이 없고, 우리 삶터는 아주 깨끗합니다. 주머니에 들어오는 돈은 없으나 튼튼한 몸과 아름다운 마음이 되어 언제나 즐겁지요. 튼튼한 몸과 아름다운 마음에서는 노래가 절로 샘솟고, 노래가 샘솟는 삶에서는 이야기를 기쁘게 지어요. 이 이야기는 문학이 될 수 있고 춤이나 연극이나 영화가 될 수 있습니다.


  공장을 지어 경제성장을 하고 토목사업으로 일자리를 만든다고 할 적에는 아무런 문학도 문화도 삶도 사랑도 꿈도 없습니다. 그저 돈만 있습니다. 돈만 있는 나라에서는 매캐한 바람과 지저분한 물이 흐릅니다. 아이도 어른도 몸이 망가질 테고 병원에 기대야 할 테며 삶에서 웃음과 노래가 사그라질 테지요.


  삶을 짓는 어른이 차돌 같은 아이를 낳아서 돌봅니다. 삶을 사랑으로 가꾸는 어른이 차돌 같은 아이를 키우면서 웃습니다. 삶을 꿈으로 일구는 어른이 차돌 같은 아이한테 맑고 밝은 이야기를 물려줍니다. 4348.1.13.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지는 꽃도 아름답다

문영이 저
달팽이출판 | 2007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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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책읽기 ― 마당에 심는 나무 | 시골에서 책읽기 2015-01-07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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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경제신문에 싣는 책이야기입니다 ..


..


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마당에 심는 나무



  우리 집 마당에는 후박나무가 퍽 크게 섭니다. 우리 집 뒤꼍에는 감나무도 퍽 크게 섭니다. 우리 집이 깃든 마을에서 마당에 나무가 우람하게 자라도록 두는 다른 집은 없습니다. 옆마을에도 이런 집은 거의 없고, 다른 마을에서도 마당에 나무를 우람하게 키우는 집은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우람하게 자라던 나무가 있어도 베에서 넘깁니다. 나무가 잘 큰다 싶어도 어느 만큼 자라면 목아지를 칩니다. 집에서도 마을에서도 이렇게 하지만, 학교와 길거리에서도 이렇게 합니다. 이리하여,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어디를 가든 ‘아름드리 나무’를 구경하기가 어렵습니다.


  나무가 우람하게 자라기 어려운 한국입니다. 마을뿐 아니라 숲에서도 이와 비슷합니다. 숲에서 조용히 씩씩하게 자라던 나무는 산림청에서 솎아내기를 한다면서 벱니다. 이웃 일본만 하더라도 즈믄 해를 넘게 살아낸 나무를 곳곳에서 만날 만하지만, 한국에서는 즈믄 해를 살아낸 나무를 찾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즈믄 해를 살아낸 절집이 몇 군데에 있다고 하지만, ‘집 한 채가 즈믄 해를 살아내’는 까닭을 제대로 읽거나 헤아려서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집 한 채가 즈믄 해를 살아내려면 ‘즈믄 해를 살아낸 나무’를 베어서 기둥으로 삼고 서까래를 올립니다. 아무렴, 그렇지요. 집 한 채가 오백 해를 살아내려면 ‘오백 해를 살아낸 나무’를 베어서 기둥으로 받치고 도리를 지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에서 짓는 집은 즈믄 해를 살거나 오백 해를 버티도록 마음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어떤 집도 백 해조차 버티도록 짓지 않습니다. 빨리 지으려 할 뿐이고, 돈이 되도록 올리려 할 뿐입니다.


  야나기 무네요시 님이 쓴 글을 갈무리한 《수집 이야기》(산처럼,2008)라는 책을 읽습니다. 이 책은 야나기 무네요시라고 하는 일본사람이 일본에서 마련한 ‘민예관’에 둔 ‘아름다운 일본 보물’을 어떻게 그러모을 수 있었나 하는 이야기를 담습니다.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사람은 ‘민예’라는 낱말을 지었습니다. “백성 예술”이라는 소리요, ‘수수한 사람이 일군 삶이 그대로 예술’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수집 이야기》에 나오는 ‘민예관 소장품’은 여느 시골마을에 있는 여느 시골집에서 여느 시골사람이 수수하게 쓰던 투박한 살림살이입니다.


  “‘아는 것은 곧 보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잘못이다. 물건을 보기 전에 지식을 움직이면, 대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이 방해받게 된다는 사실을 왜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70쪽).”와 같은 이야기를 되새깁니다. 참말 그렇지요. 섣부른 지식을 앞세우면 어떤 것을 보든 ‘섣부른 지식’이 가로막습니다. 올바로 바라보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도록 가로막아요. 아름다운 것을 보더라도 아름다움이 아닌 겉모습에 얽매입니다. 사랑스러운 것을 보더라도 사랑스러움이 아닌 겉치레에 휘둘립니다.


  무화과나무에서 맺는 무화과알을 눈으로 보면서 먹으면 눈으로 헤아리는 맛이 더 달콤할 수 있지만, 무화과알을 낯설게 여기거나 달갑잖게 바라본다면 이 열매가 얼마나 달콤한지 알 수 없습니다. 굴이나 조개도 이와 같습니다. 고기를 먹을 적에도 이와 같아요. 눈으로 보며 더 맛나게 즐기기도 하지만, 눈으로 보기 때문에 아예 손을 안 대기도 합니다.


  한편, 이름난 어느 사람이 만들었다고 해서 아주 높은 값을 치러야 하는 작품이 있어요. 이와 달리 이름이 안 난 어느 사람이 만들었다고 해서 아주 싸디싼 값만 내도 되는 작품이 있어요. 두 작품은 무엇이 다를까요.


  “직관이 고마운 까닭은 망설임을 동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떤 명성 따위에 의지할 필요가 사라진다(152쪽).”와 같은 이야기를 되읽습니다. 사람을 마주할 적이든 물건을 마주할 적이든 늘 같습니다. 돈이 많거나 이름이 높거나 힘이 센 사람을 마주하기에 이녁을 더 섬기거나 우러러야 하지 않습니다. 돈이 없거나 이름이 낮거나 힘이 여린 사람을 마주하기에 이녁을 업신여기거나 낮보거나 깔보아야 하지 않습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시장이나 군수 같은 사람과 만나는 자리가 대수로울 일은 없습니다. 아이들과 놀거나 아이들한테 동시를 읊어 주거나 아이들한테 밥 한 그릇 차려 주는 일이 안 대수로울 수 없습니다.


  어떤 책을 읽으면 내 마음을 살찌울 만할까요? 이름난 작가나 명사가 추천한 책을 읽으면 내 마음을 살찌울 만할까요? 많이 팔린 책을 읽으면 내 마음을 살찌울 만할까요? 신문이나 잡지나 방송이나 인터넷에서 크게 알리는 책을 읽으면 내 마음을 살찌울 만할까요?


  어느 책을 읽든 내 마음을 살찌울 수 있습니다. 다만, 나 스스로 내 마음을 살찌우려고 생각하면서 찬찬히 살피고 고른 책을 읽을 때에만 내 마음을 살찌웁니다.


  “더할 나위 없는 최상의 다기라고도 불리는 각발은, 발견됐을 당시만 하더라도 일반 농민 집에서 닭 모이를 담아 두는 그릇이었다고 나카니시 씨한테서 직접 그 사연을 들었다(256쪽).”와 같은 이야기를 날마다 아이들과 나눕니다.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아이들한테 읽어 주지는 않습니다. 그저 아이들과 이러한 마음을 함께 나눕니다. 나뭇가지 하나를 오랫동안 놀잇감으로 삼으면서 함께 놉니다. 하얀 종이에 함께 그림을 그려서 벽에 붙인 뒤 두고두고 즐깁니다. 아이들과 부대끼는 하루를 사진으로 찍어서 함께 바라보며 웃습니다. 노랫말을 아이들과 함께 지어서 우리 삶을 우리 손으로 그리는 이야기를 기쁘게 노래로 부릅니다.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어버이가 아이한테 거짓말을 가르친다면 아이도 거짓말을 하지만, 어버이가 아이한테 참말을 들려주고 보여주면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값비싼’ 수저나 밥그릇을 딱히 좋아하거나 반기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내 것’으로 삼을 만하도록 마음에 드는 수저나 밥그릇이면 다 좋습니다. 아이들은 어버이가 사랑으로 차려서 주는 밥이면 다 맛납니다. 비싼 과자나 초콜릿이라고 해서 아이들이 좋아하지 않아요. 빙그레 웃으면서 함께 먹는 과자나 초콜릿이면 다 좋아합니다.


  마당에 심는 나무는 대단해야 하지 않습니다. 몇 천만 원짜리 나무를 심거나 몇 억 원짜리 나무를 심어야 하지 않습니다. 씨앗 한 톨을 심어서 싹을 틔우고 찬찬히 가꾸어도 됩니다. 어린나무 한 그루를 삼천 원에 장만해서 심어도 됩니다. 나무 한 그루를 심어서 서른 해를 지켜보고 쉰 해를 사랑하면 됩니다. 일흔 해를 지켜보고 백 해를 아끼다가 아이들한테 나무를 물려주면 됩니다. 아이들은 또 이녁 아이한테 나무를 물려줄 테지요. 수수한 삶이 가장 빛나는 삶입니다. 4348.1.7.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수집이야기

야나기 무네요시 저/이목 역
산처럼 | 2008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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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책읽기 ― 착한 마음으로 살다 | 시골에서 책읽기 2014-12-24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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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착한 마음으로 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어른들은 아이들더러 ‘착하’게 살면 돈이나 이름이나 힘을 얻지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착하게 살면서 돈을 얻는 길이나, 착하게 일하면서 이름을 펴는 길이나, 착하게 어깨동무하면서 힘을 쓰는 길은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어른들 스스로 착한 삶을 모르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착하게 살기에 돈을 못 벌지 않습니다. 돈을 벌 뜻이 없을 때에 돈을 못 벌 뿐입니다. 그러니까, 착하게 살면서 돈을 벌고 싶다면, 마음과 몸과 넋과 삶이 모두 착한 숨결이 되도록 다스리면서 돈을 벌면 됩니다.


  ‘싼값’을 흔히 ‘착한 값’으로 잘못 생각하곤 합니다. 다른 가게보다 눅은 값으로 팔아야 ‘착한 값’이 아닙니다. 에누리를 더 한다면, 그저 에누리를 더 할 뿐이요, 값을 후려칠 뿐입니다. 남보다 싸게 물건을 판다면 착한 일이 될까요?


  남보다 싸게 물건을 팔면 아마 남보다 물건을 잘 팔는지 모릅니다. 제값을 깨고 싼값으로 후려치면 남보다 장사가 잘되거나 벌이가 나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제값을 깨는 짓이 착하다고 할 만할까요? 다른 사람은 장사가 안 되도록 제값을 깨는 짓은 참말 착하다고 할 만할까요? 다른 사람은 돈을 못 벌도록 하면서 싼값을 내세우는 일이 그야말로 ‘착한 값’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한국말사전을 보면 ‘착하다’를 “말씨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로 풀이합니다. 그러니까, 싸게 후려치는 값은 ‘착한 값’이 될 수 없습니다. 장사를 하는 모든 사람이 서로 살림을 북돋울 수 있도록 이끄는 제값이 될 때에 비로소 ‘착한 값’이 됩니다. 과자 한 봉지이든 능금 한 알이든 책 한 권이든 모두 매한가지입니다. 올바른 길을 아름답게 걸을 때에 비로소 ‘착하다’고 합니다. 이른바 ‘공정무역’은 ‘착한 무역’이 될 텐데, 왜 착한 무역이 되느냐 하면, 땀흘려 일하는 사람한테 제몫을 찾아 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옳고 바르면서 아름다울 때에 비로소 착합니다. 옳고 바르기만 해서는 착하지 않고, 옳고 바름에 아름다움이 더해야 착하다고 할 수 있어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이 빚은 어린이문학 《마디타》(문학과지성사,2005)를 읽으면, “마디타도 자기가 착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착한 마음일 때의 느낌이 참 좋았다(99쪽).”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아이는 언제 스스로 착하다고 느꼈을까요. 아이는 착하다고 느낄 적에 어떤 마음이 되었을까요. 스스로 착하구나 하고 말하면서 어떤 얼굴을 지었을까요.


  회사에서 일하거나 학교에서 가르치는 우리 어른들은 날마다 어떤 몸짓과 얼굴짓으로 이웃을 마주하는지 궁금합니다. 다달이 받는 일삯을 제대로 챙길 수 있으면 된다는 마음일까요, 아니면 언제나 환하게 웃는 마음일까요. ‘감정노동’이라고 하는 고된 일에 짓눌리는 삶일까요, 아니면 스스럼없이 노래하며 일하는 삶일까요.


  내 삶은 남이 지어 주지 않습니다. 내 삶은 늘 내가 스스로 짓습니다. 내 일은 남이 시켜야 하지 않습니다. 내 일은 늘 내가 스스로 찾아서 합니다. 배고픔은 내가 스스로 느끼지, 시계가 알려주지 않습니다. 배고파서 차리는 밥은 손수 지어서 손수 수저를 들어 입에 넣어 먹지, 기계가 모든 얼거리를 맡아 주지 않습니다. 남이 내 입에 밥술을 떠넣어 준다 하더라도, 내 몸이 스스로 움직여서 밥을 삭여야 기운을 얻습니다.


  다른 사람이 책을 읽어 줄 수 있을 테지요. 그렇지만, 언제나 내가 스스로 귀여겨들어 마음으로 삭여야 합니다. 나 스스로 삭이지 않으면 어느 책을 골라서 읽거나 듣더라도 내 것이 안 됩니다. 추천도서나 명작도서를 읽어야 내 마음이 살찌지 않아요. 어느 책을 읽든 나 스스로 마음을 움직여서 삭여야 합니다. 어느 책을 손에 쥐어 읽더라도 내 마음을 내가 스스로 움직여서 이야기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붕 위에서 보니 강물이 저 멀리 굽이를 도는 데까지 보이고, 물 위로 가지를 축 늘어뜨린 수양버들도 보였다. 또 강기슭을 따라 죽 늘어선 집들과 정원들이 다 보였다. 울긋불긋 물든 가을 나뭇잎들이 참 아름답고, 가을 하늘은 한없이 맑고 푸르렀다(71∼72쪽).” 같은 대목을 가만히 되새깁니다. 냇물을 바라보는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수양버들을 보는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가을 나뭇잎과 이웃집과 뜰을 바라보는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내가 내 눈으로 바라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내가 내 살갗으로 가을바람을 느끼고 겨울바람을 느낍니다. 겨울에는 차가움을 느끼고, 봄에는 따스함을 느끼며, 여름에는 시원함을 느끼고, 가을에는 푸근함을 느낍니다. 달력이나 시계가 알려주는 철이 아니라, 해가 흐르고 달이 흐르면서 바뀌는 날을 우리가 몸소 느끼면서 헤아립니다.


  그러니까, 착한 삶이 되자면 내가 오늘 하루를 착하게 가꾸어야 합니다. 고운 마음이 되고 고운 말을 들려줍니다. 바른 몸짓을 하고 바른 눈짓과 손짓을 합니다. 상냥한 몸가짐이 되면서 상냥한 목소리가 됩니다. 이쁘장하다는 아가씨를 뽑는다고 하는 자리에서 흔히 ‘참(진)·착함(선)·고움(미)’ 세 가지를 살핀다고 하는데, 참답고 착하며 고운 숨결일 때에 비로소 사람다운 모습입니다. 얼굴이나 몸매가 이쁘장할 때에 사람다운 모습이 아니라, 삶을 참답고 착하면서 곱게 가꿀 때에 사람다운 모습입니다.


  어린이와 푸름이가 학교를 다닐 적에도 참과 착함과 고움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어른이 일터에서 일을 할 적에도 참과 착함과 고움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학교에서 교사는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참과 착함과 고움을 가르치면서 몸소 보여주어야 합니다. 공공기관이든 공장이든 회사이든 어디이든, 우리 어른은 저마다 참과 착함과 고움을 몸으로 맞아들이고 마음으로 삭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린이문학 《마디타》에 나오는 마디타라는 아이는 “오늘 날씨가 참 아름답다고, 꼭 노래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이런 날씨에는 누구나 아주 착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될 것 같았다(196쪽).” 하고 혼잣말을 하고 혼잣생각을 합니다. 스스로 느낀 착함과 사랑스러움이 밑거름이 되어 스스로 노래를 부릅니다. 학교에서 음악 시간이 되기에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저절로 샘솟는 노래입니다. 길을 가면서 노래를 하고, 밥을 짓거나 심부름을 하면서 노래를 합니다. 동생이나 언니와 놀면서 노래를 하고, 소꿉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노래를 합니다. 편지를 쓰면서 노래를 하고, 잠자리에 들면서 노래를 합니다. 삶이 온통 노래일 적에는 삶이 온통 사랑입니다. 삶이 온통 사랑이라면 서로 아끼고 보살피는 마음일 테지요. 내 이웃들 누구나 오늘 하루를 착한 마음으로 맞이하면서 가꿀 수 있기를 빕니다. 4347.12.2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마디타와 리사벳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저
문학과지성사 | 2006년 01월

 

마디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글/일론 비클란트 그림
문학과지성사 | 2005년 03월

 

저거 봐, 마디타, 눈이 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저/김서정 역/일론 비클란트 그림
바람의아이들 | 2011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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