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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57 내 사랑 모드 | 영화읽기 2018-12-1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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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내 사랑 모드

랜스 울러버,밥 브룩스,모드 루이스 공저/박상현 역
남해의봄날 | 2018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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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57


《내 사랑 모드》

 랜스 울러버

 박상현 옮김

 남해의봄날

 2018.9.15.



그의 그림은 극도로 단순해 보였다. 물감을 칠한 모습이 물결처럼 그대로 남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건 아이들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12쪽)


행복했던 어린 시절은 모드에게 깊은 인상으로 남았으며, 훗날 평생 동안 만든 작품들의 바탕이 되었다. (34쪽)


“나는 여기가 좋아요. 어차피 여행을 좋아하지도 않으니까요. 내 앞에 붓만 하나 있으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70쪽)


에버릿은 어쩌다가 선박용 페인트 통이 바튼 해안에 떠다니는 걸 발견하면 냉큼 건져다가 모드에게 가져다줬고, 모드는 그것으로 그림을 그렸다. (89쪽)


그녀는 단지 자신이 좋아해서 계절에 맞지 않는 그림을 그렸다. 잎이 많고 색이 풍부한 숲을 좋아했기 때문에 겨울 풍경에도 잎을 그대로 남겨두었고, 새들도 마찬가지였다. (93쪽)



  어른인 사람이 으레 깔보거나 얕보면서 하는 말씨로 “뭐, 애들도 쓰겠구만”이나 “쳇, 애들도 그리겠네”가 있습니다. 아이들 같은 글이나 그림이라면 깔보거나 얕보는 흐름이 있는데, 어른이 쓴 글이나 그림 그림이어야 훌륭하거나 아름답거나 볼 만할까요?


  어른이기에 쓰는 글이나 그리는 그림이 따로 있기 마련이고, 이러한 글이나 그림은 그런 글이나 그림대로 값이나 뜻이 있어요. 그리고 아이들이 쓸 수 있는 글이나 그릴 수 있는 그림은 이러한 글하고 그림대로 값이나 뜻이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가 더 있는데, 어른이란 몸으로 바뀌어도 아이다운 마음으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어요. 이때에 ‘아이다움’이란 ‘맑음’입니다. ‘맑은 사랑’이지요.


  《내 사랑 모드》(랜스 울러버/박상현 옮김, 남해의봄날, 2018)를 읽으면서 ‘모드’라는 분이 빚은 그림이란 무엇일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다만, 이 책은 그림님 모드가 손수 쓴 글로 엮은 책이 아닙니다. 모드라는 그림님하고 이웃으로 지내던 사람이 옆에서 구경하던 눈길로 쓴 글을 엮은 책입니다. 그래서 모드라고 하는 그림님이 어떤 마음이나 손길이나 넋으로 그림을 빚어서 이웃하고 나누려 했는가를 속깊이 들여다볼 수는 없습니다.


  이러면서 한 가지를 엿볼 수 있어요. 그림을 그려서 먹고사는 길을 찾은 사람은 입에 풀을 발랐고, 그림님한테서 그림을 값싸게 사들여서 샛돈을 떼고서 팔아치우는 사람은 손에 목돈을 쥐었으며, 그림님 둘레에서 구경하던 사람은 ‘구경한 일’을 하나씩 떠올려 글을 남기며 새삼스레 책도 쓰고 돈도 더 버는구나 하고요.


  구경하는 눈길로 쓰는 글이니 “(모드 스스로) 좋아해서 계절에 맞지 않는 그림을 그렸다”처럼 씁니다. 그림님이 손수 글을 썼다면 어떻게 말할까요? 아마 ‘내 마음은 언제나 봄이고 여름이고 가을이라서, 달력으로는 겨울이라 하더라도 봄을 그리고 여름을 그리고 가을을 그려요.’쯤 되지 싶습니다.


  모드란 분이 이름을 떨치고 그림도 널리 팔리는 모습을 지켜보고서야 눈여겨본 사람이 쓴 글이라 그런지, 《내 사랑 모드》를 읽으며 왜 ‘내 사랑’이란 책이름을 붙였는지 아리송하고 꽤 거북합니다. ‘내가 본’이라고 붙여야 어울릴 텐데요. 옮김말도 썩 좋지 않습니다. 번역 말씨나 일본 말씨는 좀 털어내기를 빕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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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삶읽기 366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 영화읽기 2018-10-27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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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목수정 글/희완 트호뫼흐 사진
레디앙 | 2008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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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삶읽기 366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목수정

 레디앙

 2008.8.11.



나는 ‘민중’이 평범한 시민들을 대상화하는 직업 운동가들의 용어임을 눈치챘다. 일상적인 대화나 글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다가 오로지 정치적인 선동을 위한 비장한 어조의 문장에만 장식처럼 등장하는 이 단어를… (71쪽)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목수정, 레디앙, 2008)을 다 읽은 지 한 달 남짓 된다. 생각보다 그리 대단한 이야기가 없다. 어쩌면 나로서는 웬만한 이야기는 다 알았으니 새삼스럽지 않았을 텐데, 이쪽에서든 저쪽에서든 울타리를 높게 쌓아서 밥그릇을 챙기는 무리가 버젓이 있다. 삶을 홀가분하게 이끌도록 가르치는 학교는 한국에서 찾아보기 매우 어렵고, 삶을 참사랑으로 가꾸도록 북돋우는 마을이나 집안도 한국에서는 좀처럼 뿌리내리기 힘들다. 그러나 틀림없이 씨앗이 있고, 생각이 자라며, 하나둘 가지를 뻗겠지. 글쓴이는 프랑스를 아주 좋아해서 프랑스 이야기를 자주 꺼내는데, 문득 생각해 본다. 글쓴이가 프랑스하고 서울에서만 뛰어다니지 말고, ‘전남 고흥’에서도 좀 뛰어다니기를 말이다. 글쓴이가 나고 자란 고흥이란 시골이 엉터리 군수들하고 공무원들 때문에 얼마나 망가지는가를 좀 눈여겨보고 목소리를 내라고 말이다. 큰 목소리야 누구나 낼 수 있지 않나? 작은 목소리를, 작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민중’이 아닌 ‘사람들’이 살아가는 작은 마을을, 이제부터라도 바라볼 수 있기를 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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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같은 사람들로 숲을 이룹니다 (들꽃, 공단에 피다) | 영화읽기 2017-07-12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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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들꽃, 공단에 피다

아사히 비정규직지회 저
한티재 | 2017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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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312



들꽃 같은 사람들로 숲을 이룹니다
― 들꽃, 공단에 피다
 아사히 비정규직지회 글·사진
 한티재 펴냄, 2017.5.29. 15000원


  들풀이 돋고 들꽃이 피는 자리에는 비가 아무리 드세게 퍼부어도 흙이 좀처럼 쓸리지 않습니다. 작은 풀꽃이지만 작은 풀뿌리로 흙을 단단히 움켜쥐거든요. 나무만 서고 들풀이 없으면 제아무리 우람한 나무라 하더라도 빗줄기에 흙이 쓸려서 굵은 뿌리가 앙상하게 드러나곤 해요. 우람한 나무 둘레에 돋는 풀을 샅샅이 뽑거나 죽인다면 나무는 흙을 제대로 붙들지 못하면서 그만 시름시름 앓다가 쓰러질 수 있습니다.

  들풀 한 포기는 매우 작고, 들꽃 한 송이는 무척 작습니다. 얼핏 스치면 안 보이기 마련이고, 짬을 내어 가만히 바라보지 않는다면 느끼기조차 어려워요. 그러나 작은 들풀하고 들꽃이 있기에 들을 이루고 숲을 이룹니다. 작은 들풀하고 들꽃이 어우러지면서 아름다운 들이며 숲이 깨어납니다.


비정규직 노동자 16명에 대한 권고사직 강요를 계기로 노동조합을 만드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 원청에도 없는 노동조합을 하청 비정규직이 만들 수 있을까? 우리 스스로도 의심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10쪽)

일 년 반 동안 구미 전역을 들쑤시며 투쟁했고, 지역에서는 우리 문제가 많이 알려졌다. 하지만 아사히글라스는 꿈쩍하지 않았고 그 배훙에는 법률자문 김앤장이 있었다. (18쪽)


  경상도 구미에 아사히글라스라고 하는 다국적 유리제조 기업이 있다고 합니다. 이 기업이 꾸리는 공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고된 일과 여러 푸대접을 바꾸어 보고자 ‘비정규직 노동조합’을 열었다고 하는데, 비정규직 노동자가 노동조합을 여니, 손전화 쪽글로 아주 가볍게 해고 통보를 했대요.

  멀쩡히 일을 잘 하던 사람들은 노동조합을 열려고 했다는 까닭 하나로 일터에서 쫓겨나야 했다는데, 노동조합은 불법이 아닙니다. 노동조합은 일하는 사람이 스스로 권리를 지키려는 아주 자그마한 몸짓입니다. 헌법에서도 노동3권을 누려야 한다고 똑똑히 밝혀요.

  그렇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정규직뿐 아니라 비정규직까지 노동조합을 마음 놓고 열지 못합니다. 온갖 불법과 부정과 비리를 일삼은 대통령을 촛불 한 자루 힘으로 사람들이 끌어내려 새 대통령을 뽑았는데, 새롭게 대통령 자리에 선 분도 아직 비정규직 노동자한테 눈길을 맞추지 않습니다.


(입사) 3개월 후부터는 쉬는 날이 없어졌다. 연차도 마음대로 쓰지 못했다. 그래도 참아야 했다. 가족을 더 이상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회사는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실수한 사람에게 징벌용 조끼를 길게는 한 달 이상 입혔다. (29쪽)

현재 나는 20개월째 아사히글라스와 싸우고 있다. 20개월 동안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였다. 몇 년 동안 비정규직으로 살아 보니까, “비정규직은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는 답이 나왔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꼭 없어져야 한다. (39쪽)


  《들꽃, 공단에 피다》(한티재,2017)를 읽습니다. 이 책은 얼결에 길바닥에 나앉아야 하던 작은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책을 쓴 이들은 여태 아주 조용히 공장 노동자로 지내던 우리 이웃입니다. 글재주나 말솜씨가 있는 이들이 아닙니다. 엄청난 운동가나 활동가도 아닙니다. 바로 옆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수하거나 투박한 아저씨입니다.

  일하는 사람으로서 일할 권리를 지키고 싶어서 비정규직이어도 노동조합을 열려고 했을 뿐입니다. 이들 스스로뿐 아니라 공장에서 함께 일하는 수많은 비정규직 이웃 노동자 누구나 일할 권리가 짓밟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노동조합을 이루려 할 뿐입니다.

  한국 정부에 노동부가 있고 노동청이 있습니다. 이곳은 바로 일하는 사람을 지켜야 할 공공기관입니다. 커다란 공장이든 작은 공장이든 노동조합이 제대로 서도록 도울 구실을 할 공공기관이지요. 그러나 노동부도 노동청도, 또 시청이나 군청도, 공장 노동자가 정규직인지 비정규직인지 제대로 안 살피지 싶습니다. 일하는 사람 스스로 노동조합을 열려고 할 적에 아사히글라스 같은 기업에서 손전화 쪽글로 어처구니없이 해고 통보를 해도, 이를 바로잡거나 나무라는 구실을 못 합니다.


몇 개월에서 보통 5∼6년 넘게 일해 온 동료들의 얼굴을, 노동조합 만들고 제대로 처음 마주했다. 이 모든 사람들이 일하고 있었다는 게 신기하고 반가웠다. 오랜 시간 같은 공간에서 일하면서도 서로 이름조차 알 기회가 없었다. 삶에도 관계에도 여유가 없었고 생산 물량에 치여 일만 해온 게 우리 현실이었다. (91쪽)


  한국은 어떤 나라일까요? 한국은 어떤 나라로 나아가야 아름다울까요? 이 나라는 ‘기업을 하기 좋은 나라’인가요? 이 나라와 이 나라 지자체는 ‘기업을 하기 좋은 도시’가 되면 아름다울까요?

  그렇다면 기업이란 어떤 곳인가요? 기업주 몇 사람만 돈을 잘 벌면 될까요? 기업을 이루는 수많은 사람이 다 같이 즐겁고 넉넉하게 일하고 살림을 가꿀 때에 아름다울까요?

  우리는 언제쯤 ‘기업을 하기 좋은 나라·도시’라는 허울을 벗어던질 수 있을까요? 이 나라에서 대통령 자리에 서는 ‘일꾼’은 언제쯤 공장 노동자하고 어깨동무를 하면서 대통령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나 똑같은 일꾼이면서 똑같은 사람이고 똑같은 시민이요 똑같은 이웃이라는 대목을 당차게 밝힐 만할까요? 정규직하고 비정규직 사이에 놓인 높다란 금을 이 나라 지도자나 기업인은 언제쯤 스스로 떨쳐내어 다 함께 손을 맞잡아 활짝 웃는 아름다운 길로 거듭날 만할까요?


법에서는 분명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는데 현실에서는 왜 보장되지 않는가. 아사히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은 이런 상식적인 질문에서 출발하고, 이들이 밟고 있는 법적 구제 절차는 그 답을 듣기 위한 과정이다. (220쪽)


  들풀하고 들꽃이 흐드러지면서 나무가 우거진 숲은 제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쳐도 숲흙이 쓸리지 않습니다. 들풀 한 포기 없고 들꽃 한 송이 없이 나무 몇 그루만 오도카니 선 곳은 도시이든 시골이든 숲이든 작은 비바람에도 흙이 쓸려서 흙물이 흘러내립니다.

  높고 낮은 멧봉우리가 오랜 나날 비바람을 맞아도 높이가 낮아지지 않는 까닭을 생각해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나무뿐 아니라 숱한 풀꽃이 함께 살기에 높고 낮은 멧봉우리는 오랜 나날 씩씩하면서 튼튼합니다. 앞으로 한국이라는 나라가 튼튼하려면 어떠한 길을 걸어야 아름다운가를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나라에서 대통령 자리에 서서 일하는 분은 누구하고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섞을 적에 아름답게 일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면 좋겠어요.


노동조합만 만들면 잘될 것이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자본은 우리보다 한 수 위였다. 우리를 잘 분석했다. 자본은 무리수를 두면서 노동조합이 만들어진 하청업체 하나를 통째로 날리는 방식을 선택했다. (199쪽)


  아주 조그마한 사람인 이웃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라요. 아주 자그마한 사람인 이웃 노동자를 들여다볼 수 있기를 바라요. 대통령은 청와대 앞에서 작은 목소리를 내는 사람 곁에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를 바라요. 시장과 군수는 시청이나 군청 앞에서 작은 목소리를 들려주는 사람하고 어깨동무를 하면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를 바라요.

  들풀을 짓밟거나 들꽃에 등돌리는 길에는 민주나 평화나 자유나 평등이란 자라지 못합니다. 들풀을 쓰다듬고 들꽃을 아끼는 길에서 비로소 민주나 평화나 자유나 평등이 자랄 수 있습니다. 길거리에서 작은 목소리를 내는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 노동자가 이녁 일터를 되찾을 뿐 아니라, 앞으로는 ‘비정규직’이라는 딱지가 말끔히 사라질 수 있기를 빕니다. 2017.7.12.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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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아트 오브 트롤

안나 켄드릭,제리 슈미츠 공저/최세희 역
윌북(willbook) | 2017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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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곧 살 텐데...

영화 디브이디는 안 뜨기에 

어쩔 수 없이 이 책에

영화평을 붙입니다.


..


밝음에 어둠을 더해 무지개꽃 피는 노래

[영화 읽는 시골 아재 1] 트롤 Trolls, 2016 


  옛말에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했어요. 저는 어릴 적에 이 말을 못 알아들었어요. 너무 마땅할까요? 아이가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말을 어찌 알아듣겠어요. 나이가 들고 아이를 낳아 돌보면서 가끔 이 말을 떠올립니다. 오래 살고 보면 슬프거나 안타까운 일을 몽땅 지켜보아야 하는 때도 있을 테지만, 아름답거나 기쁜 일을 환한 웃음으로 마주하는 때도 있어요. 기쁜 오늘이 되기를 기다리면서 슬픈 어제를 삭힐 수 있다고 할까요. 그리고 하루하루 새롭게 살아내면서 어제는 미처 못 깨달은 대목을 새삼스레 깨달으면서 거듭날 수 있기도 해요.

  영화 〈트롤 Trolls〉이 나왔습니다. 이 영화가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 꽤 되었습니다. 언제 나오려나 하고 손가락을 물며 기다렸어요.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지요. 2017년 2월에 한국에서도 극장에 걸리며 드디어 볼 수 있기에 참으로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참으로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말처럼,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기쁘게 영화를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 예고편을 볼 적부터 아이들하고 새롭게 배우는 길에 슬기로운 실마리가 될 이야기를 잔잔히 들려주기에 좋겠다고 느꼈어요. 이 영화는 우리 삶을 이루는 두 가지 큰 기둥을 알맞게 어우르지요. 이러면서 두 가지 큰 기둥을 가꾸는 숨결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부드러우면서 재미있게 밝혀요.

  두 가지 큰 기둥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는 기쁨입니다. 다른 하나는 슬픔입니다. 기쁨은 밝음이나 빛으로 나타내고, 슬픔은 어둠이나 고요로 나타내곤 해요. 둘은 얼핏 보면 아주 동떨어진 듯 여길 수 있지만, 참말로는 그렇지 않아요. 둘은 늘 하나예요. 한몸이지요. 한몸에서 나란히 태어나서 자라는 기쁨하고 슬픔이에요.

  밝음하고 어둠도 따로 떨어진 둘이 아니라 하나예요. 빛하고 고요도 서로 다른 둘이 아니라 하나이고요. 그렇지만 정작 둘은 서로 아주 다른 자리에 있는 듯 여기면서 갈라서곤 해요. 게다가 둘은 서로 하나인 줄 헤아릴 마음이 없다 보니 서로서로 살가이 다가서지 못하기까지 해요.

  영화 〈트롤〉을 보면 기쁨덩어리 ‘파피’는 슬픔덩이리 ‘브랜치’ 마음을 조금도 못 헤아립니다. 거꾸로 어둠덩어리 브랜치는 ‘밝음덩어리’ 파피를 하나도 못 헤아리지요. 둘은 동떨어진 남이 아니라 ‘우리’인데 이를 제대로 바라보려 하지 않아요.

Hello darkness, my old friend
I've come to talk with you again
Because a vision softly creeping
Left its seeds While I was sleeping
And the vision That was planted in my brain
Still remains
Within the sound of silence
(반가워 어둠, 내 오랜 벗
 난 너랑 다시 얘기하러 왔어
 보드랍고 천천히 찾아온 꿈이
 내가 자는 동안 씨앗을 남겼거든
 그 꿈은 내 머리에 씨앗을 심었고
 그대로 있어
 고요라는 소리 곁에)

  서로 못 헤아리는 둘인 파피랑 프랜치인데, 이 둘은 곧잘 부딪혀요. 파피는 프랜치가 꽁꽁 감싼 어둠을 벗겨 주고 싶습니다. 프랜치는 파피가 친친 두른 밝음을 벗겨 주고 싶어요. 파피나 프랜치는 스스로 감싸거나 두른 것은 하나도 내려놓지 않으려고 하면서 서로 ‘제 눈에 보이는 것’만 바꾸어 주어야 한다고 여겨요.

  그러나 파피하고 브랜치는 여느 동무나 트롤하고는 다릅니다. 비록 서로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는 못하지만 서로 어딘가 끌리면서 마음을 기울여 주어요. 여느 트롤은 파피한테서 기쁨·밝음·빛만 보려 하고, 브랜치를 볼 적에는 슬픔·어둠·고요가 싫다고 말할 뿐이거든요. 여느 트롤은 두 트롤(파피, 브랜치)이 서로 어떻게 거듭나야 비로소 아름다움에 눈을 뜨는가를 생각조차 하지 못해요. 그저 ‘트롤을 잡아먹으려 하는 버겐’한테서 벗어나 기쁨잔치만 벌이면 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트롤 나라 공주인 파피가 버겐한테 사로잡힌 동무를 살리려고 먼 길을 나설 적에 브랜치는 파피를 못 본 척할 수 없기 때문에 따라나서요. 이때에 브랜치는 늘 곤두선 마음으로 버겐이 있는가 없는가를 살피느라 ‘아주 고요한 채’ 잠이 들고 싶어요. 파피는 아무리 고되거나 무시무시한 곳에서라도 ‘노래를 부르며 마음을 달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둘 모두 틀리지 않았어요.

  다만, 브랜치는 파피가 얼빠져 보일 뿐이고, 파피는 브랜치가 딱해 보일 뿐이에요. 그리고 이런 둘 사이에서 ‘sound of silence’라는 노래가 새롭게 태어납니다. 이 대목에서 영화를 보는 한 사람으로서 ‘이야!’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어요. 어쩜 이렇게 잘 들어맞는 노래를 기쁨에 가득 차서 부를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 엄청난 노래를 들은 브랜치는 어쩜 그렇게 기타를 모닥불에 집어던져 불사를 수 있을까요?

Get Back Up Again
(또 다시 일어서겠어)

  기쁨덩어리 파피는 늘 노래합니다. ‘Get Back Up Again’이라는 말처럼 이 노래를 부르면서 온갖 고빗사위를 넘어서요. 비록 이렇게 고빗사위를 넘어서다가도 열매를 잘못 먹어서 몸이 퉁퉁 붓고 거미줄에 묶여 죽음을 앞두지만, 이런 판에도 ‘Get Back Up Again’을 외쳐요. ‘Get Back Up’만으로도 “다시 일어서겠어!”인데 여기에 ‘Again’을 붙여서 외치지요.

  어쩌면 이 씩씩함을 바탕으로 트롤 나라를 이끄는 공주 노릇을 하는구나 싶어요. 이리하여 파피 공주는 ‘갈무리(scrap)’을 할 수 있어요. 기쁜 일이건 궂은 일이건 모두 갈무리해서 ‘책’으로 새로 엮어요. 이 대목이 아주 남다르지요. 다른 트롤은 그냥 춤추고 노래하고 서로 안을 뿐이지만, 파피 공주는 모든 일을 갈무리해서 책으로 엮고, 이를 어린 트롤한테 가르쳐요. 곧 파피 공주는 ‘브랜치한테서 트롤 나라를 지킬 슬기를 배울 수 있다’면 이 대목도 잘 갈무리해서 다른 트롤한테 알려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브랜치는 파피 공주를 조금은 바라보지만 깊이 마음으로 바라보지 못하니 ‘파피 공주도 여느 트롤하고 똑같이 바보스럽다’고만 여겨요. 나중에 파피 공주가 ‘처음으로 슬픔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서 시커멓게 바뀌고 나서’야 브랜치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알아차리지요. 그래도 너무 늦게 알아차리지 않았기에 브랜치는 저 스스로 뒤집어쓴 시커먼 허물을 그때서야 벗습니다. 브랜치네 할머니가 브랜치를 버겐한테 잡아먹히지 않도록 살려낸 까닭은 ‘브랜치가 노래를 스스로 버리고 어둠에 파묻혀 버리라’는 뜻이 아닌 줄을, 브랜치네 할머니는 브랜치가 더욱 기쁘게 노래할 수 있으려면 ‘한 가지를 더 배워서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대목을 목숨을 바치면서 손자한테 남겨 주었다는 대목을 깨달아요.

No!
I can't think that way cause I know 
That I'm really really gonna be
okay
Hey!
I'm not giving up today
There's nothing getting in my way
And if you knock knock me over
I will get back up again
(아야!
 난 그리 생각할 수 없어
 난 알거든
 참말 참말 난 괜찮은 줄
 봐!
 난 오늘 두 손 들지 않아
 내 앞을 막을 건 아무것도 없어
 네가 날 때리고 또 때려눕혀도
 난 또 다시 일어설 테야)
 

  영화 〈트롤〉은 밝음에 어둠을 더해 무지개꽃 피는 길을 보여주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밝음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아니 밝음만으로 이루는 것은 반토막이요, 어둠만으로도 그저 반토막을 이룰 뿐이라는 대목을 알려주지 싶어요. 밝음에 어둠을 더해 한결 눈부시게 피어나면서 서로 손을 맞잡습니다. 고요한 어둠에 환한 노래를 입히면서 더욱 차분하면서 사랑스레 깨어납니다.

  버겐은 왜 트롤을 잡아먹어야 기쁘다고 여길까요? 어느 날 문득 트롤을 잡아먹고 말았는데, 미처 트롤한테 미안하다고 말할 겨를조차 없이 ‘기쁨덩어리가 몸에 들어왔으니 나도 기쁨이 되겠네’ 하고 생각을 굳혀 버렸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한 해에 고작 한 번 트롤을 먹을 적에만 ‘기쁨을 누리’고 한 해 가운데 삼백예순나흘은 ‘슬픔에 어둠에 짜증에 괴롭힘투성이’인 채 나뒹굴고 말아요.

  트롤은 그동안 버겐하고 손을 맞잡으면서 서로 북돋우는 길을 몰랐어요. 버겐도 서로 마찬가지였고요. 그러나 버겐 나라를 물려받은 그리스틀은 달랐어요. 버겐 나라에서 부엌데기 일을 하는 브리짓도 달랐지요. 여느 버겐은 ‘기쁨’을 비롯해 아무런 ‘느낌’이나 ‘생각’을 하지 않으며 ‘주어진 틀’하고 ‘시키는 일’만 했다면, 이 둘은 스스로 무언가 새로 짓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다만 버겐 나라에서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 오래오래 길든 틀이 단단하다 보니, 틀을 깨는 일은 스스로 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깨어나지 못했어요. 파피 공주가 버겐 나라 부엌데기 브리짓을 도우면서 브리짓 스스로 일어나서 스스로 사랑을 찾도록 이끌어도 브리짓은 자꾸 옛날로 돌아가서 ‘나는 안 돼’ 하고 물러서지요.

  그런데 가만히 살피면, 버겐 나라에서 그리스틀 임금하고 브리짓 부엌데기 둘만 이런 마음이나 생각이나 느낌이 있어요. 다른 버겐은 ‘나는 안 돼’조차 생각하지 않아요. 두 숨결만 ‘나는 안 돼’를 생각하고 ‘내 마음속에서, 바로 가까이에서 기쁨을 찾고 싶어’하고도 생각하기에 두 버겐은 버겐으로서는 처음으로 새로운 길인 사랑을 찾아서 누리는 길로 나아갈 수 있어요.

And I see your
true clolrs 
shining through

I see your
true clolrs 
And that's why 
I love you

So don't
be afraid
To let them show
your true clolrs
true clolrs
Are beautiful
(그리고 난 네
 참다운 빛깔을 봐
 너한테서 빛나는

 네 참다운 
 빛깔을 봐
 그게 바로 널
 사랑하는 까닭이야

 그래 
 두려워 마
 그 빛깔을 보여줘
 네 참다운 빛깔을
 참다운 빛깔은
 아름다워) 

  한 가지 모습이나 빛깔로는 참다운 모습이나 빛깔로 서지 못합니다. 한 손으로는 종이 한 장을 맞잡지 못합니다. 아무렴 그렇지요. ‘맞잡’으려면 두 손이 있어야 해요. 손뼉을 치려면 왼손 오른손이 나란히 있어야 해요. 괭이를 쥐어 밭을 갈려면, 밥상을 들어서 나르려면, 우리는 두 손이 있어야 합니다. 서로서로 한 손을 내밀어 잡을 적에 비로소 하나로 이루어집니다. 처음부터 하나였기에 둘로 나뉘어 더 커다란 하나가 될 수 있는 숨결입니다. 더 커다란 하나가 되면서 새롭게 둘로 뻗으면서 모두 아우르는 하나로 다시 태어납니다.

  해가 내내 뜨기만 하는 낮일 적에는 풀도 나무도 말라 죽어요. 달만 내내 뜨는 밤일 적에는 풀도 나무도 자라지 못하고 죽어요. 해가 뜨는 낮에 기쁘게 깨어나고, 달이 뜨는 밤에 고요히 잠들어요. 우리한테는 기쁨잔치 못지 않게 고요한 밤이 있어야 해요. 한 가지 생각이나 마음이나 느낌만 붙잡지 말고, 하나에서 비롯한 두 갈래 생각이나 마음이나 느낌을 크게 아우르며 사랑하는 길로 갈 적에 아름답게 피어나는 무지개로 참다운 살림을 지을 수 있는 줄 바라보아야지 싶어요.

  북유럽을 바탕으로 내려오는 ‘트롤’ 이야기에 나오는 ‘트롤’은 우악스럽다고도 하고 무시무시하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북유럽 옛이야기에 나오는 트롤은 어쩌면 우리가 ‘한 가지로만 바라본’ 탓에 그 모습으로 굳혀 버렸다고도 할 수 있어요. 영화 〈트롤〉에서 기쁨이랑 어둠이가 남남이 아닌 ‘더 커다라면서 너른 한사랑’이듯이, 껍데기나 겉모습이 아니라 속마음과 속살을 바라볼 수 있다면 참다운 빛깔로 깨어날 만하다고 느껴요. 어느 모로 본다면 영화 〈트롤〉은 ‘트롤 다시읽기’를 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우리 모두 스스로 삶을 새롭게 읽고 사랑하는 길을 찾아보자고 북돋운다고 할 만해요.

  그리고 이처럼 참다운 빛깔로 깨어나는 길에는 늘 노래가 있어요. 부드러이 흐르는 노래, 고요히 감기는 노래, 눈부시게 춤추는 노래, 새봄에 움트는 싹처럼 깨어나는 노래, 환한 웃음을 짓는 노래, 그리고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눈물짓는 사랑으로 이어지는 노래가 있어요. 노래를 부르기에 깨어나요. 노래를 부르기에 밝음하고 어둠이 만나서 무지개로 피어나요. 2017.2.21.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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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블랑섹은 새길을 걷지 (블랑섹의 기이한 모험) | 영화읽기 2016-07-26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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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VD]블랑섹의 기이한 모험 (1disc)


미디어 허브 | 2013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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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섹은 새길을 걷지 (블랑섹의 기이한 모험)
Les Aventures Extraordinaires D'Adele Blanc-Sec, The Extraordinary Adventures


  뤽 베송 감독이 찍었다고 하는 영화 〈블랑섹은 새길을 걷지(블랑섹의 기이한 모험)〉를 문득 봅니다. 이 영화를 아이들하고 함께 볼 수 있기를 기다립니다. 왜냐하면 아직 아이들하고는 함께 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우리 집 아이들이 삶을 배우는 길을 꾸준히 걸으면 이 영화를 함께 보면서 서로 즐겁게 이야기꽃을 피울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블랑섹이라고 하는 스물다섯 살 아가씨가 걷는 ‘새로운 길’을 보여주거든요. 스스로 품는 마음에 따라서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스스로 짓는 생각에 따라서 새로워지는 살림을 보여줍니다.

  영화에 나오는 할아버지 과학자는 ‘마음을 다스려서 새로운 숨결이 깨어나도록 북돋우는 길’을 알아챕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더더구나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아요. 이와 달리 블랑섹은 이 할아버지 과학자를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블랑섹은 이녁 동생이 그만 스무 살 나이에서 삶을 멈추었고, 이 동생이 다시 깨어나도록 하려고 ‘새로운 배움길(새 공부)’에 나섰거든요. 사랑하는 동생이 다시 깨어나기를 바라면서 어마어마하게 새로 배웠지요. 그래서 ‘미이라 깨우기’를 하려고 들어요.

  미이라를 깨워서 동생을 깨우려고 한다는 블랑섹이 벌이는 길(모험)은 바보스러울까요? 고지식할까요? 어리석을까요?

  바라보는 눈에 따라서 다르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온마음을 기울여서 동생을 사랑할 뿐 아니라, 지난 다섯 해 동안 웃음을 한 번도 짓지 못하고 날마다 울음을 지을 뿐이었다고 하는 블랑섹은 더는 눈물을 짓고 싶은 마음이 아닙니다. 웃음을 짓고 싶어요. 그래서 블랑섹은 스스로 배웁니다. 스스로 배운 대로 온몸을 바쳐서 뛰어듭니다. 낙타를 타고 익룡을 타지요. 미이라를 깨우고, 미이라와 이야기를 나누지요. 그리고 마침내 파라오까지 깨울 뿐 아니라, 파라오 곁에 있는 의사한테 동생이 다시 깨어날 수 있기를 바라는 뜻을 밝혀요.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서 그저 ‘판타지’로만 여길 수 있습니다. 영화는 언제나 우리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기에 이 대목을 곰곰이 헤아리면서 우리가 스스로 우리 삶을 어떻게 바꾸거나 깨울 수 있는가 하는 대목을 읽는 실마리를 엿볼 수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영화를 바라보든 ‘영화를 보는 사람’이 품는 마음에 따라 다르지요. 내가 짓는 삶은 바로 내 길이고, 내가 가꾸는 살림은 바로 내 넋입니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배우지 못하고, 배우지 못하는 사람은 새길(모험)을 나서지 못합니다. 새길을 나서는 사람은 늘 새롭게 배우고, 늘 새롭게 배우는 대로 다시금 새로운 생각으로 마음을 그득 채울 만합니다.

  무엇을 하고 싶은가 하는 대목은 늘 스스로 수수께끼를 내어 스스로 풉니다. 남이 내 수수께끼를 풀어 주지 않습니다. 스무 살에서 삶이 멈춘 동생을 깨우는 몫은 바로 내가 스스로 합니다. 남이 해 주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내 손이, 내 사랑이, 내 꿈이, 바로 내 모든 넋이 내 삶을 엽니다. 이 같은 이야기를 여러모로 재미나면서도 알뜰히 빚은 영화를 봅니다. 블랑섹이라고 하는 아가씨는 ‘모험’을 했을 수 있고 ‘새길’을 스스로 열었을 수 있습니다. 2016.7.26.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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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호튼 (Horton Hears A Who!) | 영화읽기 2016-07-09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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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튼

Horton Hears A Who!, 2008


  작은 나라를 보셨나요? 아니면, 아주 커다란 나라를 보셨나요? 지구 바깥에 있는 수많은 별을 보셨나요? 아니면, 우리 몸을 이룬 아주 조그마한 별을 보셨나요?

  닥터 수스 님이 빚은 그림책을 바탕으로 새롭게 짠 영화 〈호튼 Horton Hears A Who!〉은 어린이 눈높이에 맞추어 이 두 가지 ‘나라(누리·세계·세상)’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오늘 선 이곳만이 ‘나라’나 ‘누리’가 아니라, 우리 눈에 아예 안 보인다고 할 수 있을 만한 조그마한 ‘나라’나 ‘누리’가 있을 뿐 아니라, 너무 커다랗기 때문에 아예 우리가 쳐다볼 수 없을 만한 커다란 ‘나라’나 ‘누리’가 있다는 이야기를 다루어요.

  호튼은 어느 숲에 사는 코끼리입니다. 숲에 사는 코끼리이니 화장실이란 모르지요. 호튼은 어느 날 문득 아주 조그마한 소리를 들었는데, 이 소리는 ‘토끼풀꽃’에 앉은 ‘티끌’에서 들렸다고 해요. 이런 말을 둘레에 하니, 둘레에서는 코끼리 호튼이 “미쳤다!”고 딱 잘라서 대꾸합니다. 어떻게 저 조그마한 티끌에서 소리가 나느냐 하고 되묻지요. 코끼리 호튼은 이런 대꾸에 아무런 말도 해 줄 수 없어요. 다만, 한 마디를 해요. 코끼리 호튼은 틀림없이 티끌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이지요.

  우리가 사는 이 지구라는 별은 넓으면서도 작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라는 별은 이 지구 하나로 ‘온누리’입니다만, 해가 있는 해누리(태양계)에서는 매우 작고, 해누리가 있는 다른 별누리(은하)하고 대면 티끌만큼 작거나 티끌보다 더 작다고 여길 만합니다.

  내 곁에는 누가 있을까요? 내 곁에서는 누가 소리를 낼까요? 나는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나요? 나는 개미 몸에 깃든 아주 작은 세포에서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나요? 땅속에서 지렁이가 기는 소리를 듣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진딧물이 풀줄기에 매달려서 풀물을 마시는 소리를 듣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나비가 알을 낳는 소리를 듣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이 같은 소리를 못 듣는다고 해서 ‘이 같은 나라·누리·세계·세상’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어마어마한 별누리마다 엄청난 소리를 낼 텐데, 이 소리는 너무 엄청나기 때문에 우리 귀로는 들을 수 없는 물결(주파수·파장)이라고 하지요. 그러면 우리 귀에 안 들리도록 너무 커다란 물결이나 소리라 한다면, 이 또한 “없잖아!” 하고 딱 잘라서 말할 수 있을까요?

  영화 〈호튼〉은 제 귀를 믿습니다. 이러면서 티끌나라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믿었기 때문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아요. 깨달았고 느꼈기에 몸을 움직여서 함께 하려고 마음을 품습니다. 깨달으며 느끼는 동안 새롭게 배워서 받아들이려고 하는 마음이요 몸짓이 되기에 즐겁게 거듭납니다. 이제까지 ‘숲만 알던 코끼리’였다면, 이제는 ‘하늘과 땅을 새로 아는 코끼리’가 되고, ‘티끌과 별을 새로 아는 코끼리’가 될 뿐 아니라, 코끼리인 호튼 스스로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한 두 모습’인 숨결인 줄 배웁니다. 여기에 하나 더 있어요. 모든 숨결은 저마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줄 알아차리지요. 이리하여 이 즐거운 배움을 혼자 품지 않고 동무랑 이웃하고 나누려 해요. 혼자만 알기에는 더없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지식’이기 때문에, 숲마을 이웃하고 동무 모두 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받아들여서 새롭게 깨어날 수 있기를 바라지요.

  영화를 보면서 문득 돌아봅니다. 나는 나 스스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새롭게 깨달아서 배운 뒤에 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저마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새롭게 배웠기에 나한테도 그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한다면, ‘나로서는 처음 들을’ 그 이야기를 얼마나 마음 깊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마음을 열기에 듣습니다. 마음을 열기에 배웁니다. 마음을 열기에 봅니다. 마음을 열기에 가르칩니다. 마음을 열기에 살림을 짓고 삶을 지으며 사랑을 짓습니다. 2016.7.9.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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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숲책 (정글북 The Jungle Book) | 영화읽기 2016-06-22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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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VD]정글북 40주년 기념 플래티넘 에디션 (1Disc)


브에나 비스타 | 2009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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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책 (정글북)

The Jungle Book, 2016



  디즈니 만화영화를 바탕으로 새로 나온 영화 〈정글북〉을 아이들하고 보다가 문득 깨달았습니다. 나는 이 영화를 ‘글(책)’로 제대로 본 적이 없구나 하고요. 어릴 적에 디즈니 만화영화를 퍽 자주 텔레비전에서 보기는 했으되 그무렵에도 이 이야기를 책으로 읽을 생각은 거의 못했다고 깨닫습니다. 내가 어릴 적에는 마땅한 동화책이 없기도 했고, 그무렵 나온 해적판 같은 어린이책은 디즈니 만화영화를 간추린 책이기 일쑤였습니다. 이제서야 《정글북》이라는 이야기를 오롯이 옮긴 책을 찾아서 읽으니, 책하고 영화는 꽤 다릅니다. 모글리가 사람 사는 마을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대목도 크게 다를 뿐 아니라, 모글리가 범을 어떻게 죽이는가 하는 대목도 너무 크게 다릅니다. 이밖에 암늑대가 범한테 어떤 말로 윽박지르면서 모글리(‘새끼 개구리’라는 뜻으로 암늑대가 붙여 준 이름)를 지키고 보살폈는가 하는 이야기도 영화에는 안 나옵니다.


  2016년 새 영화 〈정글북〉을 보고 나서 ‘책을 쓴 사람들이 이녁 책이 영화로 나오는 일을 무척 안 좋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새삼스레 했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이기 때문에 책을 고스란히 옮길 수 없는 노릇이에요. 영화는 영화대로 새롭게 살려서 들려줄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디즈니 영화 〈정글북〉을 보면 이 영화에 나오는 여러 짐승이 곧잘 춤노래를 즐깁니다. 모글리라는 아이 앞에서 춤노래를 보여주지요. 어릴 적에는 이런 대목이 퍽 시큰둥했는데, 이제 어른이 되어 아이들하고 이런 영화를 보면서 마주하는 춤노래를 다시 보니, 영화에서 흐르는 춤노래는 영화를 더욱 재미나거나 맛깔스럽게 해 주는 추임새로구나 싶습니다. 이러면서 이야기에 더 깊이 빠져들도록 돕지요.


  아무튼 2016년에 새로 나온 영화 〈정글북〉을 보는 내내 예전 디즈니 만화영화가 새록새록 떠올라서 예전 만화영화도 찾아서 함께 보았습니다. 두 가지를 보면서, 아니 2016년 영화를 보면서, 이 영화에 나오는 짐승들 몸짓이나 움직임이나 발걸음이 무척 어설프다고 느꼈습니다. 모글리도 ‘숲에서 걷는 걸음걸이’가 몹시 엉성하다고 느꼈어요. 맨손에 맨발인데 어쩐지 홀가분하지(자유롭지) 않다고 할까요. 무엇보다도 ‘늑대’와 ‘늑대 무리’ 살림을 더 잘 살리지 못했구나 싶어서 이런 대목을 아쉽다고 느낍니다. 참말로 사람들은 들짐승이나 숲짐승도 잘 모르지만, 이 가운데 늑대는 더더욱 잘 모르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나도 늑대 이야기를 ‘책’으로밖에 알 길이 없습니다만, 아무 연장이 없이 오직 맨몸으로 숲에서 지내는 살림이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며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내가 참말 숲에서 혼자 살며 짐승들 말을 알아듣는다’면 무엇을 할까 하고 되돌아보았어요. 나는 곰이나 늑대 말만 알아들을까요? 나무나 벌레나 꽃하고는 말을 섞지 못할까요? 숲에서 살며 숲을 배우고 숲을 사랑할 수 있는 살림이 된다면, 나는 숲에서 어떻게 삶을 지을 만할까요?


  빼어난 화면을 보여주려고 애쓰는 일도 틀림없이 뜻이 있을 테지만, ‘화면’에 마음을 쓰듯이 ‘화면으로 담으려는 이야기’에 조금 더 마음을 쓸 수 있다면 〈정글북〉은 더욱 훌륭한 영화가 될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이른바 ‘원작’이 밝히는 속뜻 가운데 빠뜨릴 수 없는 이야기를 새롭게 살려 준다면 더욱 눈부실 테지요.


  ‘숲아이’는 ‘숲책(숲이라는 책)’을 늘 온몸으로 배우는 ‘숲살림’으로 하루하루 자라면서 ‘숲사랑’을 배웁니다. 숲아이가 ‘숲사람’으로 거듭나는 이야기가 바로 《정글북》이라는 책이 다루는 줄거리요, 이 줄거리를 놓친다면, 2016년 디즈니 영화는 그저 ‘화면’ 놀음 얼거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느낍니다. 2016.6.22.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영화읽기/영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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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바이센테니얼 맨 (Bicentennial Man) | 영화읽기 2016-03-29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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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센테니얼 맨
Bicentennial Man, 1999


  나는 200이라는 숫자가 꽤 마음에 듭니다. 아니, 마음에 든다기보다 문득문득 200이라는 숫자를 떠올립니다. 누가 200이라는 숫자를 말하기 때문에 내 마음에 남는다기보다는, 어느 때에 불현듯이 떠올라서 오래도록 마음에 남습니다. 100이라는 숫자를 ‘온’으로 여겨서 빈틈이 없는 모습을 빗대곤 하는데, 나는 ‘한 온(100)’보다는 ‘두 온(200)’이라는 숫자가 마음이 끌려요.

  로빈 윌리암스 님이 훌륭하게 연기를 선보이는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Bicentennial Man〉을 보면서 처음에는 ‘바이센테니얼’이 무엇을 뜻하는지 딱히 살피지 않았습니다. 사람과 같은 느낌이나 생각을 품고 싶은 로봇이 나오는 영화로만 여겼거든요. 이러다가 ‘Bicentennial’이라는 영어가 “200년을 잇는”을 뜻하는 줄 깨닫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영화를 다시 들여다보니, 아하, 영화에 나오는 로봇은 바로 ‘200살 나이’를 살아요. 200살에 걸쳐서 사람살이를 지켜보는 동안 이 로봇은 이 사람살이에서 스스로 무엇을 품을 때에 ‘즐겁게 살림을 지을’ 만한가 하는 대목을 깨닫습니다.

  로봇은 부품을 제때에 갈면 목숨이 끊어질 일이 없습니다. 로봇한테는 죽음이 찾아올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이 없는’ 로봇으로서는 두려움이나 무서움이 없어요. 로봇으로서는 ‘할 일’만 있으면 됩니다. 놀이도 아닌 일만 주어지면 됩니다. 로봇한테 가장 두렵다고 해야 할 대목은 ‘할 일이 없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셔요. 200해가 아니라 2000해도 살 수 있는 로봇인데, 2000해에 걸쳐서 ‘할 일이 없다’면 얼마나 괴로울까요? 아마 미쳐서 날뛰다가 전쟁병기가 될 수 있어요.

  그래서 어느 모로 본다면, ‘할 일을 모르는’ 채 사는 사람은 살림을 짓거나 사랑을 짓는 길이 아니라 전쟁무기로 전쟁을 일삼으면서 끝없이 배를 채우려고 하는 데에 매달리기 일쑤입니다. 전쟁무기로는 전쟁무기밖에 끌어들이지 못합니다만, 수많은 정치권력은 전쟁무기에만 매달려요. 평화나 사랑이나 살림에 마음을 기울이지 못하는 수많은 정치권력입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정치권력을 손에 거머쥔 이들은 이 정치권력을 놓치지 않으려는 데에만 마음을 쓸 뿐, 어떤 삶이나 사랑이나 살림을 지을 적에 즐거운가 하는 대목에는 마음을 쓰지 않거든요.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에 나오는 로봇은 ‘주어진 일’에 온힘을 쏟습니다. 게다가 온힘을 쏟던 어느 날 ‘생각하는 힘’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생각을 지어서 눈부신 길을 갈고닦을 수 있으며,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돈을 법니다. 다만, 돈을 아무리 벌어도 이 로봇은 ‘돈을 쓸 곳’이 없을 뿐이에요. 돈을 쓸 일이 없고, 돈을 쓸 생각이 없으니 엄청난 돈이 있어도 부질없을 뿐입니다. 그래서 로봇은 오랫동안 여행을 하지요. 여행을 하는 동안 비로소 스스로 깨달아요. 로봇이든 사람이든 꼭 한 가지 빠지거나 모자란 대목은 ‘사랑·삶·살림’인 줄, 따로따로 있는 사랑이나 삶이나 살림이 아니라, 이 세 가지가 하나로 엮은 꿈일 때에 비로소 ‘보람’이 있어서 ‘일을 할 뜻’이 있는 줄 깨닫습니다.

  죽을 까닭이 없는 로봇이지만, 사람들하고 어울려 사는 동안 이 로봇은 ‘사람들처럼 살기’를 바라면서 ‘죽음(늙음·노화)’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몸을 바랍니다. 웃고 울 뿐 아니라 아프고 괴로운 느낌을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라요. 바야흐로 ‘사람보다 사람다운 숨결’로 거듭나는 길을 걷습니다.

  나는 이 영화에 나오는 로봇이 아니기에 사람입니다. 나는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로봇하고 다른 사람으로서 하루를 짓습니다. 새봄을 맞이하고, 씨앗을 심고, 아이들을 돌보고,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살림을 가꾸고, 또 이 일 저 일을 하면서 가만히 돌아봅니다. 내가 바라는 200이라는 숫자는 한낱 200이 아닙니다. ‘내 온(내 모든 숨결)’이 ‘네 온(네 모든 숨결)’하고 만나서 어우러지기를 바라는 ‘두 온(200)’입니다. 200살을 사는 로봇인 ‘바이센테니얼 맨’은 ‘혼자서만 살 수 없다’는 대목을 깨달아서 ‘죽음으로 가지만, 막상 죽음이 아닌 삶으로 가는 길’로 씩씩하게 나아가려 합니다. 오롯이 사람이 되고, 옹글게 삶이 되며, 오순도순 살림이 되는 자리에서 빙그레 웃으면서 고요히 눈을 감습니다. 2016.3.29.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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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몰리 문, 놀라운 최면술 책 (Molly Moon) | 영화읽기 2016-03-24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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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 문의 놀라운 최면술 책
Molly Moon: The Incredible Hypnotist, 2014


  갓난쟁이일 무렵부터 고아원에서 사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 아이들은 여러 가지 까닭 때문에 고아원에서 사는데, 제법 나이가 들 때까지 새 어버이를 만나지 못합니다. ‘입양’을 바라는 어버이는 좀처럼 이 아이들이 지내는 고아원으로 찾아오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거의 꿈을 잃다시피 하면서 자라고, 이 고아원을 지키는 원장은 아이들을 괴롭히는 재미로 하루하루 산다고 할 만한 모습입니다.

  어쩌면 이럴 수 있을까 싶지만 이 너른 지구별에는 그야말로 수많은 사람과 삶과 살림이 있습니다. 응달진 곳에서 그림자에 가려진 채 하루하루 보내는 사람이 있고, 햇볕이 듬뿍 내리쬐는 곳에서 밝은 빛을 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저마다 왜 다 다른 나날을 보낼까요? 저지른 잘못이 커서? 짊어진 굴레가 커서? 갓난쟁이조차? 어린이조차? 어릴 적부터 사랑받지 못한 채 큰 어른까지?

  ‘몰리 문’이라는 아이는 고아원에서 함께 자란 아이를 ‘동무’로 둡니다. 고아원에서 어떤 아이들은 ‘문’하고 ‘로키’를 ‘남자친구·여자친구’라고 가리키지만 ‘문’하고 ‘로키’는 서로 ‘동무(친구)’로만 여깁니다. ‘이성친구’가 아닌 ‘마음을 나누는 사이’로 여겨요.

  영화 〈몰리 문〉에 나오는 아이 ‘몰리 문’은 책읽기를 무척 좋아합니다. 여러 까닭이 있을 텐데, 고아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나 놀이가 없고, 책은 깊은 밤에도 빨래방(세탁실)에 몰래 들어가서 조용히 즐길 수 있기도 합니다. 고아원 원장은 책조차 좋아하지 않아서 고아원에는 책마저 없지만, 문은 마을도서관에서 몰래 책을 빌려서 밤새 빨래방에서 읽어요.

  이러던 어느 날 몰리 문은 ‘최면술’을 다루는 책을 만납니다. 책을 좋아하던 몰리 문은 ‘최면술’ 책도 찬찬히 읽었고, 이 책을 읽는 동안 ‘눈결(눈에서 흐르는 기운과 빛)’로 다른 사람을 ‘내 마음에 따라 움직이는’ 길을 익힙니다. 눈힘을 키우는 셈인데, 이 최면술은 그리 어렵지 않으면서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이 영화에서 나오는 최면술은 ‘다른 사람을 내 마음에 맞추어 움직이도록 이끌’려면, ‘나부터 다른 사람이 어떤 마음인가를 똑바로 읽어서 내 마음에 담아야’ 하거든요. 다시 말하자면, 최면술을 걸려면 나는 너하고 ‘서로 다른 마음인 줄 먼저 알아’야 하고, 이 다음에는 ‘서로 다른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데에 온힘을 쏟아’야 합니다. 두 마음이 하나가 되고, 한 마음이 다시 두 마음으로서 다른 두 사람 몸에서 움직일 수 있도록 놓아 주어야 해요.

  곰곰이 따지자면 최면술하고 ‘동무로 사귀기’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두 가지 모두 ‘마음읽기’로 이루는 삶이니까요. 다만, 최면술은 내 마음대로 너를 움직이기만 할 뿐이요, 동무로 사귀는 삶이란 서로서로 홀가분하면서 사랑스럽고 즐거이 마음이 흐릅니다.

  영화에 나오는 아이 ‘몰리 문’은 최면술을 익힌 뒤에 맨 먼저 ‘고아원 개’를 동무로 삼고, 다음으로는 ‘고아원 밥차림’을 맛있게 바꾸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무엇을 할까요? 바로 고아원 원장 마음을 ‘착한 사람’이 되도록 ‘고아원 원장이 어릴 적에 따스하게 사랑받은 일을 떠올리기’를 바라는 마음을 심어 주어요.

  영화를 보다가 문득 놀랐어요. 그래요, 고아원 아이는 다 알아요. 고아원 원장이 ‘처음부터 나쁜’ 사람이 아닌 줄 알아요. 어쩌면 어릴 적에 크게 마음이 다친 적이 있어서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자꾸 괴롭힐는지 모르지요. 우리 사회에서도 짓궂거나 거친 짓을 일삼는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사랑 아닌 생채기를 받았을 수 있어요.

  고아원 아이 ‘로키’는 늘 노래를 부릅니다. 동무인 문이 ‘웃음’이라든지 ‘고아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노래를 부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같은 노래를 불러요. 그리고 이 영화에는 ‘나를 믿어요(believe in myself)’라든지 ‘그들 스스로를 볼 수 있다면’ 같은 노래가 늘 흐릅니다. 영화에 나오는 ‘인기연예인(star)’이 부르는 노래에서도 똑같이 ‘나를 믿어요’가 되풀이돼요. “maybe, this time I'll be fine. maybe, this time will be mine.”이라는 주제노래를 가만히 곱씹어 봅니다. 이 삶은 나한테 괜찮아. 이 삶은 내 것이 돼. 2016.3.24.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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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밤 박물관 (박물관이 살아 있다 3) | 영화읽기 2016-02-18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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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VD]박물관이 살아있다 : 비밀의 무덤 (1Di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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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이 살아 있다 : 비밀의 무덤

Night at the Museum : Secret of the Tomb, 2014



  한국에 〈박물관이 살아 있다〉라는 이름으로 극장에 걸린 영화이지만, 이 영화를 찍은 미국에서 붙인 이름은 〈밤 박물관(Night at the Museum)〉입니다. 2014년에 나온 셋째 이야기는 “수수께끼 무덤”이지요. 밤에 살아나는 박물관이니 “박물관이 살아 있다” 같은 이름을 붙일 만해요. 또 이렇게 고친 이름이 한국 관객한테 조금 더 깊거나 넓게 파고들 만할 수 있습니다. 다만, 어떤 영화이든 이 영화를 찍은 이들이 이름을 어떻게 왜 붙였는가를 잘 살펴야지 싶어요.


  〈밤 박물관〉은 말 그대로 밤에 새로운 이야기가 흐르는 박물관입니다. 낮에는 수수한 박물관이지만, 밤에는 새로운 박물관이에요. 낮에는 밀랍이나 고무로 만든 인형이라 하더라도, 밤에는 숨결이 새로 깃들어서 깨어나는 목숨이에요. 다시 말하자면, 밀랍이나 고무 같은 몸뚱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옷(몸뚱이)’을 입은 모든 님들은 ‘넋’이 깃들면서 새로운 숨결로 살아요.


  자, 우리를 한번 돌아봐요. 우리 몸은 살덩이랑 뼈랑 피와 물과 털로 이루어졌어요. 이러한 몸이 ‘우리’일까요? 아니면, 이 몸뚱이에 깃든 넋이 ‘우리’일까요? 우리는 머리카락을 놓고 우리라고 할 만한가요, 아니면 살점이나 얼굴 생김새나 뼈다귀나 손발톱을 놓고 우리라고 할 만한가요?


  조그맣거나 커다랗거나 돌이거나 쇠이거나, 그냥 이러한 껍데기(옷)일 적에는 그저 껍데기입니다. 이때에는 인형이라고도 하고 동상이나 석상이라고도 하지요. 그렇지만, 이 인형이나 동상이나 석상에 ‘넋’이 깃들어 새로운 숨결로 깨어나면, 이때에는 인형이 아니에요. 모두한테 이름이 새로 붙어요. ‘옥타’라든지 ‘렉시’ 같은 이름이 다 달리 있지요.


  우리 모습을 다시 헤아려 봐요. 우리는 ‘몸이라는 옷’을 입은 사람이에요. 〈밤 박물관〉에 있는 아이들은 밤에 깨어나면서 새로운 ‘이웃님’이 되지요. 서로 ‘몸을 이루는 틀’은 다르지만 ‘마음을 이루는 넋’은 같아요.


  〈밤 박물관〉 셋째 이야기를 보면, 이러한 바탕에서 ‘파란 숨결로 하늘을 가르면서 나는 별자리’가 첫머리에 나와요. 밤마다 모든 ‘죽은 것’을 ‘산 목숨’으로 바꾸어 주는 ‘금빛 수수께끼판’이 나오지요. 이 금빛 수수께끼판은 그저 달빛을 받으면 제 힘을 내요. 숨겨진 다른 것은 없어요.


  〈밤 박물관〉에서 ‘밤 경비원’으로 일하는 아저씨는 돈 때문에 이 일을 하지 않아요. 이 밤 경비원 아저씨는 ‘즐겁고 사랑스러운 꿈을 기쁘게 나누는 이웃님’이 있는 “밤 박물관”이 더없이 아름답다고 여겨서 다른 일을 하지 않고 밤 경비원 노릇을 하지요. 이 아저씨한테 대수로운 것은 대학교 졸업장이나 큰돈이 아니에요. 이 아저씨한테는 아름다운 이웃님이 대수롭고, 사랑스러운 동무님이 대단하며, 즐거운 ‘한집 사람(아들)’이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 영화를 끝으로 더는 연기를 선보이지 못하는 로빈 윌리암스 님은 마지막에 우리한테 활짝 웃는 낯으로 해님을 바라보라는 말을 남깁니다. 이 말마따나 우리는 활짝 웃으면서 하루를 열고 하루를 살며 하루를 지을 노릇이에요. 웃음꽃일 때에 삶을 짓고 살림을 가꾸어요. 웃음꽃이기에 온누리에 아름다운 꿈을 심어요. 새롭게 뜨는 해님을 바라보면서 기쁨으로 아침을 열지요. 고요히 지는 해님을 바라보면서 느긋하게 몸을 쉬고 마음을 달래지요.


  밤 경비원 아저씨는 ‘밤 경비원 아가씨’한테 이 경비원 일이 얼마나 재미있고 보람차면서 즐거운가 하는 살림짓기를 물려주었어요. 그리고, 영국에서 밤 경비원 아가씨로 일하는 그분은 미국으로 건너와서 ‘박물관 관장’을 하는 아저씨한테 ‘사는 기쁨’을 제대로 보여주지요.


  우리 함께 춤을 추어요. 삶은 춤이에요. 우리 함께 노래를 불러요. 삶은 노래이거든요. 웃고 노래하는 사람한테는 삶이 있을 뿐, 죽음이 깃들지 않아요. 웃고 노래하는 사람은 천 년도 삼천 년도 얼마든지 기다려요. 삶으로 깨어날 날을 언제까지나 기다려요. 2016.2.18.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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