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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나는 6.25의 학도병, 그리고 과학자 송창원입니다

송창원 저
율리시즈 | 2021년 10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선생님의 회고록 이후의 인생, 여전히 존경하며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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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6.25의 학도병, 그리고 과학자 송창원입니다"라는 긴 제목의 책은 현재 미네소타대학교 명예교수 송창원님의 회고록이다. 책 제목으로서는 지나치게 길다고 느껴질 수 있으나, 1932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난 선생님의 인생사를 단 한 줄로 요약하기에는 그마저도 짧아 보인다. 이 책에 흥미를 느낀 이유는 제목의 '학도병'이었다. 학도병들은 경험 부족으로 전쟁터에서 제일 먼저 죽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도병으로서 생존했을 뿐만 아니라 네이처지에 한국인 최초로 논문을 싣는 세계적인 과학자로 성공했다고 하니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내가 가진 궁금증부터 해결하자면,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의 한국군은 유엔군과 함께 북상하며 승리를 만끽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전시상태였지만 한차례 고비를 넘긴 상황이라 학도병으로 참여한 미성년자에게 관대할 수 있었다. 당시의 선생님은 한국군과 38선 위쪽으로 이동 중이었으나, 학도병으로 함께한 친구를 따라 친구의 원주 친척 집에 남기로 했고 군에서도 그것을 허락했다고 한다. 원주의 평화로운 나날도 잠깐,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선생님은 원주에서 서울로 피난을 간다. 선생님과는 달리 북으로 올라간 학도병들은 죽거나,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여 훗날 케이비에스의 다큐멘터리로 그 이야기가 제작되었다. 이러한 학도병으로서의 경험은 선생님을 행동하게 만들었다. 만 18세로 입대가 허락되지 않는 나이였지만, 당시의 허술한 상황을 틈타 나이를 속였고 육군종합학교를 25기생으로 졸업, 육군 소위로 임관된다. 전시의 육군종합학교 소위들은 최전선에 배치되어 하루살이 소위, 3일 소위 또는 소모 소위로 불리었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4년에 걸쳐 이루어지는 교육을 전시상황에서 2개월 만에 수료하고 전쟁에 뛰어든 사회 초년생들에게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1951년 4월 10일 만 19세가 되었고, 그로부터 3일 후 소대장으로 임명받아 30명의 부대원들을 통솔하게 된다. 2차 학도병 인생의 시작이었으나, 실전 경험도 없는 만 19세의 소위는 부대원들 앞에서 24살로 나이를 속인다. 선생님이 발령받은 곳, 인제군 기린면 현리는 해발 1000미터가 넘는 산들로 둘러싸인 곳으로 당시 현리에 주둔했던 9사단의 참모장이 박정희 중령이었다 한다. 1951년 5월 16일 공산군의 제6차 총공세 이후 전세가 불리해진 한국군은 5월 18일 방태산 쪽으로 소대를 인솔하여 탈출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해발 1444미터의 험준한 산을 정신없이 오르고 내리며 탈출하던 선생님은 장교가 이미 계급장을 떼버린 것을 보고 자신도 슬그머니 계급장을 떼버린다. 적군에게 포로가 되었을 경우까지 생각해야 했던 것이다. 탈출하는 패잔병들 사이로 자신들을 이끌어줄 장교를 찾는 이들도 있었지만 아무도 나서는 장교는 없었고, 선생님은 자신조차도 나서지 못했던 그날의 비겁함을 평생 후회했다.

 

현리에서의 탈출에 성공한 선생님은 2개월 후 22연대 9중대 3소대장으로 새로 부임한다. 20여 명의 소대원과 한 달여 만의 신병교육을 마친 10명의 신병으로 이루어진 보병부대였다. 1951년 7월 27일 현재 평화 전망대 자리에서 서쪽으로 3,4킬로미터 떨어진 고지로 전진하던 중 적과의 교전이 시작되고 포탄이 터져 허리에 부상을 입게 된다. 당시 옆에 있던 선임하사도 부상을 당했고 선생님이 위생병에게 업혀가는 와중에도 그를 애타게 찾았지만 전투에서 살아남은 전우들 중 그 누구도 선임하사를 본 이는 없었다. 휴전 후 3년이 지나고 일부러 선임하사의 고향에 찾아가 병무 기록을 찾아보니 행방불명으로 처리되어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의 시체는 포탄의 폭발로 산화되어버린 것이리라. 사망 당시 선임하사의 옆에 있던 도리로 그의 사망 소식을 가족에게 알려야 했으나 그의 가족에게 슬픈 소식을 전할 용기가 없었음을 선생님은 고백한다. 20대 젊은이의 용기 없음과 죄책감은 현재까지도 선생님을 괴롭힌다. 선생님은 회고록을 작성하면서 어떤 마음이었을까 감히 생각해 본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자신이 했던 실수들,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스러운 기억들은 다 잊고 싶은 것들인데도 선생님은 꾸역꾸역 기억해 내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긴다. 나라면 결코 해내지 못할 일들이다.

 

학도병으로 선생님이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일찌감치 승리에 도취된 군대의 관용 덕분이었다면 소위로 참전한 1951년의 전쟁통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행운으로 만들 것인지, 불운으로 만들 것인지는 본인에게 달려있다.  큰 수술이 예상되어 부산으로 후송된 선생님은 파편의 위치가 척추 바로 옆이라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는다.  허리에 박힌 파편 때문에 소변 조절도 되지 않고, 허리의 통증으로 걸을 때면 지팡이가 필요했다. 3개월 동안 육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다리를 잃고, 팔을 잃고, 눈을 잃은 청년들을 보며 전쟁의 비참함을 절실히 느낀다. 아마도 전쟁에 직접 참여하면서 느끼지 못했을 감정들을 제3자의 입장으로 바라보면서 통감하게 되었을 테다. 병원 치료 후 완쾌된 부상병들은 다시 발령을 받지만 선생님은 회복되지 못해 재활 치료를 위한 원호 부대에 발령받게 되는데, 그곳은 일명 병신 부대라고 불렸다. 부상한 군인 신분으로 언제 제대할지 기약 없고, 목표 없이 하루하루 보내며 힘들어하던 원호 부대 생활 중 대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기로 마음을 먹고 6개월 동안 600페이지에 가까운 "영어의 종합적 연구"라는 책을 세 번 독파한다. 1952년 봄, 몸은 많이 좋아진 상태였으나 군의관 5명으로 부터 검사를 받고 파편이 박힌 자리가 척추 바로 옆이라 언제든 문제의 소지가 되리라고 판단되어 제대 수속을 통지 받는다. 70년 전 강원도 산골짝에서 몸에 들어온 불청객은 현재까지도 선생님의 몸속에 박혀있다. 공항에서 보안 검색을 할 때마다 X-선대에 파편이 나타나는 바람에 검사관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만드는 이 불청객은 이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선생님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1952년 8월, 제대 명령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만 20세의 청년은 더 이상 예전의 송창원이 아니었다. 학도병으로, 최전방 전투부대의 소대장으로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을 했다. 같은 병실에서 죽어가는 젊은이를 보았고 손 절단 수술을 받고 슬피 울던 젊은이도 보았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힘차게 헤쳐 나가면 해결의 길이 열린다는 것을 체험했다. 오늘의 불행은 내일의 행운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 허리에 박힌 그 불행으로 제대한 선생님은 고향으로 돌아가 이북 피난민들을 위한 국민학교 선생님으로 부임한다. 그곳에서 밤을 새워가며 대학교 입시 준비를 하여 1953년 4월 서울대학교 화학과에 입학한다. 누구나 힘들었던 그 시절, 국민학교 선생님으로 만족하며 안주했다면 어떠했을까를 상상해 본다. 하루하루의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을 그 당시, 무엇이 선생님을 공부하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원호 부대에서 자신에게 했던 약속 때문일 것이라 생각해 본다. 그곳에서 목적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던 부상병들과 자신을 보며 결심한 것을 잊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1959년 국비유학생 선발시험에 합격한 선생님은 9월 1일 미국의 아이오와 대학 방사선연구소에 입학 허가를 받아 1년 동안의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당시의 미국행 왕복 비행기 티켓값은 950불로 한국인 평균 소득의 10년 치에 해당되는 큰돈이었다. 1년 동안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선생님은 자신의 부족함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1년 후 진로를 고민하면서 정부에 문의한 결과, 자비로 유학 생활을 계속한다면 체류를 허락한다는 연락을 받게 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의 정부는 4.19혁명으로 어수선했고, 그 이후의 정부는 이승만 정권과는 달리 원자력에 관심이 많지 않아 관련 부처와 연락도 거의 끊긴 상태였다. 그렇게 선생님은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직장도 구하고, 한국에서 만났던 주재강 여사와 재회하여 가정을 꾸리게 된다. 국비유학생의 자격으로 미국에 와서 한국에 돌아가지 못한 것을 큰 빚으로 여긴 선생님은 물심양면으로 한국인 과학자 양성을 위해 힘쓰셨다. 60여 년간 암의 방사선 치료 효과 증진을 위한 방사선생물학 연구를 하면서 20여 명의 한국의 방사선 전문의들에게 유학의 기회를 제공했다. 미네소타 대학의 선생님 연구실에서는 한국인을 포함한 동양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아 학과장이 인종의 균형을 맞추라는 권고를 내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타국에서 과학자로 산다는 것은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니다. 6,70년대의 인종차별과 한인사회에서의 분열도 직접 겪어냈다. 동양인 과학자로서 백인 과학자에게 무시를 당했지만 그 후 정중한 사과를 받은 적도 있고, 연구 결과를 토대로 제출한 논문이 그와는 다른 이론을 지지하는 과학자의 심의를 거치지 못해 퇴짜를 당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포기하지 않는다. 퇴짜를 놓은 과학자에게 전화하여 항의하는가 하면 연구결과를 뒷받침할 더 탄탄한 증거를 찾기 위해 연구를 거듭한다. 그러면서도 과학자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투명함과 진실함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연구를 통해 알게 된 사실과 그것에 대한 해석을 정리하여 세상과 공유하는 논문을 쓰는 데 조금이라도 사실이 아닌 것이 실리면 그것은 얼마나 큰 범죄인지를 되묻는다.

 

이 책을 끝까지 읽고 나면, 책을 읽기 시작할 무렵 느꼈던 것과는 달리 '사람 송창원'에 대한 인식이 바뀌게 된다. 90년 평생 수많은 시련을 극복하고 성장한 선생님을 존경하게 된다. 그리고 책을 덮기 전 마지막 페이지에서 한 번 더 선생님을 존경하게 만들 문구를 발견했다.

 

언젠가는 나를 강연자로 초청하는 일이 점차 줄어들 것이고,

학회에서 나를 볼 수 없게 될 것이고,

또 내 이름 Chang W Song이 들어간 새 논문을 만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잊혀갈 것이다.

회고록을 마치며, 347p

 

 

과거 학도병으로 나라를 지켰고, 3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며 업적을 세운 과학자 송창원은 조금씩 잊혀갈 상황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자신의 과오조차도 기록한 이 회고록을 남기게 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고, 고집을 부린 채 인생의 말년에 오점을 남겨버린 역사 속 인물이 한 둘이 아님을 우린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위치를 알고 내려올 준비를 하는 사람은 더욱더 아름다워 보일 수밖에 없다. "선생님의 회고록 이후의 인생, 여전히 존경하며 응원하겠습니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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