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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_ 다시 쓰는 신화, 매력적인 여성 서사시의 탄생 | 나의 서재 2021-09-24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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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키르케

매들린 밀러 저/이은선 역
이봄 | 2020년 05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전통 신화의 빈틈을 메워나가되 새로운 해석과 가능성을 열어 보인 새로운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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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정체성을 계속해서 고민하고 극복해나가려는 새로운 유형의 여성 서사시를 발견하다!

전통 신화의 빈틈을 메워나가되 새로운 해석과 가능성을 열어 보인 새로운 신화!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에 따르면, 신화란 세상에 대해 알아가고, 인간에 대해 알아가고, 곧 나에 대해 알아가기 위한 도구라고 한다. 세상의 수많은 상징을 잉태한 신화를 알면 세상이 보이고, 그것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인간을 알면 인간이 보이고, 그 속에 있는 내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오늘날까지도 가장 널리 읽히는 작품이자, 살아 움직이는 이야기로써 여전히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사랑받는 소재로 쓰이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아킬레우스의 노래에 이어 키르케까지, 작가 매들린 밀러가 신화에 주목한 것은 크게 이례적이라고 할 만한 일은 아니다. 신화를 입체적으로 해석하고 현대적으로 각색하는 등의 시도들은 이미 다양하게 이루어져왔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질문을 우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신화인가? 왜 키르케인가?

 

 

 

새로운 여성 서사의 고전, 키르케가 던지는 의미들

 

 

  키르케는 누구일까.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서 내가 키르케라는 이름을 본 적이 있었던가. 익숙한 듯 낯선 이름에 비교적 최근에 읽은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뒤적이며 찾아보았지만 좀처럼 그녀의 이름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나만 못 찾은 것일까). 그나마 오디세이아에서는 오디세우스의 발목을 잡아 그의 귀환을 늦추는 아이아이에의 마녀로 등장하여,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남성들을 돼지로 만들어버리는 능력자 정도로만 묘사되어 있을 뿐이라는데. 수많은 올림포스의 신과 인간들 혹은 그들이 낳은 괴물들의 이야기로 풍성한 신화 속에서 고작해야 이름 몇 번 정도 등장할 법한 아주 작은 배역에 지나지 않는 이 인물에 굳이 주목한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해서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을 수 없었다.

 

 

 

맨 처음 태어났을 때 나에게는 걸맞은 이름이 없었다. / 9p

 

 

 

  태양신인 헬리오스와 샘물과 시냇물의 정령인 님프 페르세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여느 하급 여신들이 그러하듯 키르케 역시 수많은 님프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눈이 노란 게 오줌색이야. 목소리는 올빼미처럼 끽끽거리고. 저렇게 못생겼는데 매가 아니라 염소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하고 두 동생과 어머니로부터 늘 조롱을 당해온 그녀는 아무리 하급 여신이라 하더라도 자신에게 얼마쯤은 아버지가 지닌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해본다. 하지만 대부분의 님프들이 그러하듯, 그녀 역시 가까스로 영생을 유지하며 그나마 뛰어난 미모로 남신과의 결혼을 도모하고 신들의 모임에서 한 자리 꿰차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법이자 운명임을 이내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삼촌 하나가 벌을 받게 됐다는 소문을 듣는다. 그는 오래전에 인간들이 동굴 속에서 벌벌 떨며 움츠리고 지내던 시절에 제우스의 뜻을 거역하고 불을 선물한 프로메테우스다. 저승에 사는 극악무도한 복수의 여신 에리니스 자매 중 하나에게 처벌의 책임이 맡겨지고,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끔찍한 형벌을 받는다. 인간들을 도왔다는 이유로 신의 처벌을 자청한 그를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키르케는 그의 의연함에서 이제껏 알지 못했던 묘한 감정을 느낀다. “모든 신이 똑같을 필요는 없어.” 키르케는 자신이 수천 곱하기 수천의 어린 님프들 가운데 한 명에 불과하지만 그저 그 일부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무엇보다 살아 있는 생명체라는 사실을 프로메테우스와의 짧은 대화를 통해 깨닫게 된다.

 

 

 

모든 신이 똑같을 필요는 없어.

() 나는 그들과 달랐다.

다르다고? 낮고 우렁찬 삼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생각을 해야 한다, 키르케. 그들이라면 어떻게 하지 않겠는지. / 81p

 

 

세상에 그런 능력이 있다 한들 너 같은 애의 눈에 발견될 리 없지 않으냐.”

내 뒤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렸고, 삼촌들은 대놓고 재미있어했다. 하지만 쓰레기 떨구듯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말투가 가장 충격이었다. 너 같은 애. 다른 날 같았으면 나는 몸을 웅크리고 울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아버지의 경멸이 마른 장작 위에 떨어진 불똥과도 같았다. 나는 입을 열었다.

아버지 생각이 틀렸어요.” 내가 말했다. / 84p

 

 

 

  이후 키르케는 인간 남자인 글라우코스를 만나면서 인간의 심연을, 거룩한 힘 대신 손으로 직접 일과를 수행하는 수고로움을, 단순하지만 인간적인 기적을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영겁의 시간이 주어진 자신과 인간인 글라우코스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사는 존재였다. 이에 괴로움을 느낀 키르케는 글라우코스를 영원히 자신의 곁에 두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과 파르마콘을 이용해 그를 신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이 일을 계기로 키르케는 자신에게도 매우 놀라운 능력이 있음을 깨닫게 되지만, 이내 님프인 스킬라가 글라우코스의 마음을 꿰어냈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그녀를 괴물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결국 키르케는 신들의 명예를 욕보였다는 이유로 무인도인 아이아이에 섬으로 유배된다. ‘마녀라는 낙인과 함께.

 

 

 

  키르케는 신들로부터 철저히 내쳐지게 되지만, 마냥 절망하고 있지만은 않는다. 약초가 자라는 곳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시기에 맞춰서 캐고 흙바닥에서 뽑고 추리고 껍질을 벗기고 씻고 다듬으면서 날마다 끈기 있게 오류를 수정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를 반복한다. 어디에 어떤 능력이 있는지, 자신의 능력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을 것인지를 가늠한다. 그렇게 자신의 능력을 갈고 닦아 키르케는 아이아이에를 찾아오는 신들과 인간들을 위해 자신의 힘을 이용하기 시작한다. 자신을 늘 비웃었던 여동생 파시파에가 황소 아이 미노타우로스를 낳는 것을 돕고, 다이달로스가 성난 미노타우로스를 가둬둘 미로를 만들기 전에 모두를 안전하게 보호해 줄 주술을 쓴다. 오디세우스와 그의 전우들을 돕기도 하고, 훗날 세이렌을 피할 방법을 일러주기도 한다. 그러는 사이 신들은 자신들의 기분에 따라 시시때때로 그녀의 평화를 깨뜨리곤 하지만, 그녀는 신의 방식에 의지하지 않고 끊임없이 운명을 거부하면서 자신만의 서사를 만들어나간다. 비록 거기엔 어떤 거대한 힘이나 극적인 요소는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동안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키르케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계속해서 고민하고 극복해나가려는 새로운 유형의 여성 서사시를 발견하게 된다.

 

 

 

이 바보들아.” 내가 말했다. “내가 저 괴물을 만든 자다. 자존심과 허영심에 눈이 멀어 그런 짓을 저질렀다. 그런데 내게 감사한다고? 너희 동료 열두 명이 죽었고 앞으로 몇천 명이 더 목숨을 잃겠느냐? 아까 내가 그녀에게 먹인 약은 가장 강력한 약이었다. 알겠느냐, 인간들아?” / 152p

 

 

이카로스, 다이달로스, 아리아드네. 모두들 손으로는 허공 말고는 아무것도 쥐지 못하고 발로는 더 이상 땅을 딛지 못하는 어두컴컴한 세계로 떠났다. 내가 거기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들 달라졌을까? 헤르메스가 한 말이 맞았다. 인간들은 시시각각으로 죽었다. 난파당하거나 칼에 맞아서, 사나운 짐승이나 사나운 인간에게, 병이나 부주의나 노령으로. 프로메테우스도 얘기했다시피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었고 그들 모두가 공유하는 사연이었다. 살아생전에는 아무리 활기 넘쳤어도, 아무리 눈이 부셨어도, 아무리 경이로운 업적을 남겼어도 결국은 먼지와 연기 신세였다. 반면에 아무리 하찮고 쓸모없더라도 신은 별빛이 꺼질 때까지 계속 환한 공기를 마실 것이다. / 206p

 

 

나는 후회와 세월이 새겨진 거석처럼 너무 오랫동안 칙칙하고 근엄하게 지냈다. 하지만 그건 남들이 나를 억지로 끼워맞춘 틀에 불과했다. 이제 그 안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었다. / 485p

 

 

 

  소설 키르케가 흥미로운 것은 기존의 신화를 그대로 답습하는 게 아닌, 빈틈을 메워나가되 새로운 해석과 가능성을 매우 설득력 있게 제기한다는 점이다. 이를 테면 파시파에는 희대의 손재주꾼 다이달로스를 이용하여 가짜 소를 만들게 해 자신의 욕정을 채우는데,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에 따르면 파시파에의 눈에, 포세이돈의 황소가 바로 잃어버린 반쪽이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냥 보이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황소의 강렬한 짐승스러움과 수컷스러움에 욕정을 느끼는 데까지 이른다로 묘사되어 있다. 파시파에는 왜 가짜 소로 하여금 자신의 욕정을 채운 것일까. 사실 파시파에가 특별히 음란한 여성이었다는 기록도 없고, 언제부터 지아비인 미노스왕이 진정한 자신의 반쪽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에 대한 기록도 없기에 우리로서는 다만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매들린 밀러는 여기에 재미있는 가능성을 제기한다. ‘파시파에가 미노스와 결혼했을 때 크레테는 가장 부유하고 유명한 왕국이었다. 하지만 이후로 날마다 미케네와 트로이아, 아나톨레와 바빌론에서 새로운 왕국이 부상했다. 그리고 남동생 한 명은 죽은 자를 살리고, 다른 한 명은 용을 길들이고, 언니는 스킬라를 변신시켰다. 이제 아무도 파시파에를 화제로 삼지 않았다. 그런데 희미해져가던 그녀의 별이 단박에 다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온 세상에서 인간을 잡아먹는 거대한 황소를 낳은 크레테의 왕비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 매들린 밀러는 파시파에가 일탈적인 변덕으로 황소와 교미한 게 아니라 미노타우르스를 생산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상기시켜줄 용도로 이용했을 것이라는 놀라운 상상력을 부여한다. 여기에 다이달로스, 이아손과 메데이아,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에 이르기까지, 매들린 밀러가 쓴 이 새로운 신화는 전통 신화 너머에 존재하는 그들의 숨겨진 서사를 발굴해냄으로써 신화를 다르게보게 한다는 점에서 무척 특별하다.

 

 

 

하늘에서 별자리가 어둑어둑해지고 자리를 바꾼다. 바닷속으로 추락하기 직전의 마지막 햇살처럼 신의 광휘가 내 안에서 빛을 발한다. 예전에는 신이 죽음의 반대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무엇보다 죽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바뀌지도 않고, 손에 쥘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 500p

 

 

 

  물론 키르케는 그 자체만으로도 재미는 있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와 관련된 도서를 한 번이라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새로운 신화가 얼마나 신선하게 느껴질 수 있을지 의문은 든다. 그래서 이 책을 읽어보지 않은 분들에게 이왕이면 관련 책을 미리 읽어보시기를 추천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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