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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는'것이다. | 문성준 2015-11-14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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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내가 사는 세상 내가 하는 인문학

문성준 저/하얀가루 그림
새잎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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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 삶과 분리되지 않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했을 때, 여기서 삶이란 무엇일까. 만약 철학이 세계를 해석하는 인식론적 차원에 중요하다면, 그것과 분리되지 않는 ‘삶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볼 만하다. 사실, 이 책의 핵심은 ‘인문학’이 아니라 ‘삶’에 있다. 그렇기에 “내가 ‘사는’ 세상”, “내가 ‘하는’ 인문학”인 것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1부(1~3장)는 우리를 힘겹게 하는 것들로서 선별의 문제, 즉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에 대한 부분이다. 2부는 선별된 기준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구로서 니체를 다룬다.

1부에서 고찰된 문제의식은 예전부터 거론되어 왔었는데, 특히나 3장(이방인)의 내용은 흥미롭다. 조금은 다른 맥락이지만, 예전에 어떤 수업에서 ‘월드컵의 파시즘적 경향’에 대해서 토론한 적이 있다. 적과 아를 구분하는 것처럼, ‘우리’와 ‘타자’를 구분함으로써 모종의 연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 폭력적 연대의 발현이 민족주의, 그리고 조금 완곡한 표현으로 애국심이라고 주장을 했었다. 교수는 물론 학생들에게 많은 공감을 얻지 못했지만 그때의 생각은 아직도 유효하게 자리 잡고 있다. 저자가 ‘함께 읽으면 좋을 책’(이 책의 또하나의 장점으로, 병행독서할 목록을 제공해서 지적욕구를 자극시킨다)에서 르네 지라르의 책을 소개한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외부를 상정함으로써 내부를 영토화 하는 것이다.

문제는 ‘파시즘’이라는 것이 타자를 완벽하게 포섭하기 위한 하나의 기획이었다는 점에 있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1부의 핵심은 3장(이방인)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뒤이어 오는 2부의 역할은 앞서 배타적으로 구획된 ‘세상’을 내리치는 망치이다. ‘삶’과 분리되지 않는 인문학이란, 바로 균열인 셈이다. 2부에서 ‘동사적 주체’를 말하곤 있지만 그 길이 쉽지만은 않은 듯하다. 우리의 언어구조도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우


리 인식은 ‘대상화’를 전제로 한다. 이 인식의 구조에 구멍을 뚫고, 흔드는 것이 니체의 방법론이자 2부의 핵심이다.

결국 인문학은 삶에 균열을 내는 ‘도구’로서 가치를 지니고, 삶과 분리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문학 입문서로 이 책이 출간되었지만, 인문학에 그 방점이 있진 않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독서했을 때, <내가 사는 세상 내가 하는 인문학>이란 제목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저자가 서문에서 충분히 설명하고 있지만, 저 제목이야 말로 이 책의 전부이다.

처음 철학을 접했을 때가 생각난다. 진입장벽이 높다보니, 참으로 많은 고생을 했다. 사실 지금도 거의 까막눈에 가깝지만, 예전보다 조금 나아졌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일을 하든 무조건 재미있어야한다고 생각하는 내게, 하나의 입문서를 추천하라고 한다면 이 책을 권해보고 싶다. 물론,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하지만 서문은 꼭 읽어보시길(저자는 서문을 샴푸 뒷면의 주의사항 같은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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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문화 속 홀로코스트 : 된장녀, 김치녀 신드롬 | 개인적 콤플랙스 2014-01-05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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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문화 속 홀로코스트 : 된장녀, 김치녀 신드롬

 

최근 우리나라 인터넷 문화 속 여성혐오주의가 꿈틀대고 있다. 된장녀, 김치녀 같은 인터넷 신조어는 한국 여성들을 비하하는 데에 사용되고 있다. 이들이 내세우는 논리구조는 마치 나치스 독일이 유대인을 학살 했을 때와 비슷하다. 인터넷 문화 속 김치녀신드롬에서 홀로코스트의 그림자가 보인다.

된장녀는 2006년 야후코리아가 조사한 인터넷 신조어 1위에 오른 단어다. 인터넷 담론에서 성장한 된장녀는 루저녀, 무릎녀, 국물녀 같이 특정 행동이나 현상에 맞게 계속해서 복제되었다.

문제는 신조어가 변해가는 경향이다. 된장녀, 루저녀는 특정한 사례를 통해 만들어진 단어들이다. 문제제기 된 여성에 대한 집중적 비난, 이것이 초기 모습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등장한 보슬아치’, ‘김치녀는 지금까지 나타났던 모든 여성비하 단어를 흡수하고 하나의 개념으로 만들었다. 즉 어떤 현상에 대한 비난이 아닌 우리나라 여성 전체를 비하하는 단어인 것이다.

이 신조어의 묻지마식 변화과정은 나치즘과 유사하다. 사회 불만해소와 전쟁의 당위성 확보를 위해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 외환위기 이후 무너지기 시작한 가부장적 권위주의사회의 전반적인 불안이 여성혐오 현상으로 나타나는 우리나라의 모습에서 아우슈비츠가 보이는 것은 우연일까?

여성 전체에 대한 비난은 더 이상 논리 따위는 필요치 않는다. ‘내가하면 로맨스, 남이하면 불륜이라는 식이다. 권위주의는 이렇게 돌아오려고 한다. 인터넷 공간의 김치녀 신드롬은 단순히 남녀 간의 갈등이 아닌, 홀로코스트의 그림자가 드리운 현대판 유대인 학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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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인 앨르스씨 : 갤럭시적 관점, 그리고 소외 | 황정은 2014-01-04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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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야만적인 앨리스씨

황정은 저
문학동네 | 2013년 10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외로운 것이다. 사람들은 외로운 것이다. 이제 모든 영역에는 개인만 존재할 뿐이다. 사람들은 모이고 또 모여서 살아간다. 하지만 같이 있기 위해 혼자가 되고 혼자 있기 위해 같이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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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것이다. 사람들은 외로운 것이다. 이제 모든 영역에는 개인만 존재할 뿐이다. 사람들은 모이고 또 모여서 살아간다. 하지만 같이 있기 위해 혼자가 되고 혼자 있기 위해 같이 살아간다. 세상은 풍요로워지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높아지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외로운 것일까.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매정할 걸까? 아니, 이제는 관심조차 없다. 저마다 살아남기 바쁘고 살기 위해 허우적거린다. 모두가 뒤처지지 않기 위해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발버둥 칠뿐이다.

 

 

팽창하고 팽창해서 별들 간 간격이 엄청나게 멀어져버린 갤럭시에서 앨리시어는 한 점도 되자 않을 것이다. 한 점 먼지도 되지 않는 앨리시어의 고통 역시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런 갤럭시는 좆같다.

앨리시어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게 될 갤럭시란 앨리시어에게도 아무것도 아니다. (63)

 

 

거대해져 가는 사회에서 한낱 먼지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인간. 그 별은 결국 소외되고 그 빛을 잃어간다. “별도 뭣도 없는 갤럭시의 공간(62)은 인간다운 삶을 담는 그릇으로써 사회가 아닌, 자기증식 적으로 불어나 막을 수 없는 자본의 공간이다. 사회가 만들어낸 경쟁주의 신화는 인간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는 앨리시어를 대하는 공공기관의 행정주의 적 모습과 일치한다. 구청 광고전단에 적혀있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100)를 읽고 그곳으로 향하는 앨리시어는 세상에 맞지 않게 너무나도 순진할 뿐이었다. 마치 병신같이 말이다. 그 전단 속 무엇이든은 세속적인 어른들의 이속관계만 대변할 뿐이다.

구청에 도착한 앨리시어는 안내에 따라 이리 저리 옮겨 다닌다. 어린아이가 가정폭력에 관해서 찾아왔는데도 거기는 한 달 전에 임시 청사로 이전했어요. 그리로 가서 담당자를 찾아봐요.”(102)라고 어린 아이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여기엔 담당자가 없다고 말한다. 여기는상담하는 곳이 아니고 행정업무를 보는 곳이라서(104) 해결해 줄 수 없다며 아이들에게 상담사의 연락처를 적어준다.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더 이상 해매지 않게 도와줄 따뜻함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행정적으로 처리하는 이 공무원들에게 진정으로 공공의 복지와 인간다운 삶의 실현이란 것을 찾아 볼 수 있을까? 그렇게 어린아이를 밖으로 내모는 그들은 갤럭시의 시점에서 아이들의 고통을 바라보고 있다.

가정폭력을 상담하는 상담사의 태도에서는 갤럭시의 소외가 보인다. 멀찌감치 떨어져 현상만 바라보고 형식만 따지며 진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앨리시어에게 세속적인 언어와 형식적인 행동으로 대하는 그들은 애초에 말이 통하지 않는다. 말귀가 없다. 못 알아듣는다.”(100) 대화에는 진전이 없고 성과도 없었던 구청방문은 뭐가 하나 제대로 되어 있는 게 없는 것 같다.”(100)며 실망감을 나타낸다. 앨리시어에게상담은 뭐 똥을 싸고불을 질러라. 야 차라리 불을 질러버리자 씨발. 다 좆같다.”이다. (100)

고모리에서 나와 도시에 있는 구청으로 도움을 청하러 간 들, 들어주는 이는 하나 없고 그저 형식적일 뿐이다. 사람은 많지만 앨리시어의 말을 들어줄 사람은 없는 것이다.

 

 

더 나은 보상금을 바라고 지었으므로 결국은 허물기 위해 지은 집이지만 너무 막 지었다고 노인은 불평한다. …… 첫째 아들과 딸에게 전화를 건다. 내일이라도 짐을 간단하게 꾸려서 새집으로 들어오라고 말하지만 그들은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며 거절한다. 노인은 낙심해서 전화를 끊은 뒤 그들이 새집에 들어오지 않고 집을 비워둬서 결로가 생겼다고 말한다. 또 어느 날엔 결로가 생겨서 그들이 들어오지 않는 거라고 불평한다. (89)

 

 

우리 사회에 있어 집이가지는 의미는 특별하다. 재산을 평가할 때 가장 먼저 꼽는 것도 집이고, 신혼집 살림이 가장 먼저 고민하는 것도 집이다. 집이라는 것은 아늑함과 편안함 그리고 꿈이 숨 쉬는 공간이다. 앨리시어의 아버지에게 있어 집은 신분상승의 공간이자 화해(융합)의 공간이다. 재개발로 인해 오르는 땅값과 보상금으로 머슴살이 했던 자신의 과거를 청산하고 3층으로 구성된 집에 자신의 또 다른 자녀 내외를 두려고 한다. 머슴살이로 멸시를 받았던 과거를 청산하고 찢길 대로 찢긴 가족을 한 지붕 아래로 통합시키려 한다. 그야말로 앨리시어의 아버지에게 집이란 자신의 인생이 담긴 건축물, 안식과 따뜻함이 자리 잡은 꿈의 공간인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집은 필연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집이라는 것이다. 보상 받기 위해, 허물기 위해 지은(89) 집은 무너지길 기다리고 있다. 노인의 꿈만 반영된 이 집은 철저히 이기심이라는 철근으로 세워진 집이다. 술을 마시고 한 밤중에 찾아온 첫째는자꾸 여기가 내 집이라고 그래요 아버지여기가 왜 내 집이냐보상 마무리 되면 나는 내 몫 받고 아버지도 아버지 몫을 받고그러면 좋은 거고요 그러면 되는 거예요(133/134)라며 노인과 첫째 아들 사이의 유대는 철저히 이속관계라는 것을 강조한다. 뉴질랜드 유학을 돈지랄(134)이라며 지원을 거부한 아버지는 평생 돈 모으고 집 짓고 젊은 부인 들여서 애새끼 낳는 것에나 힘쓰는 머슴새끼(137)로 비유하며 노인에 대한 원망을 드러낸다. 결국 허물기 위해 지은집은 본질상 존재할 수 없었고 노인의 꿈도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질식사였다. 기도에 끈적끈적한 모래가 가득해 오니토 속에 묻힌 뒤로도 얼마간 숨쉬려고 노력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하수처리장 사고 이후 사흘이나 지난 시점에서 발견된, 구타 흔적으로 가득한 미성년의 사체에 관해 세상은 할말이 많은 듯 보였다. 그는 왜 그곳에 있었을까?(154)

세상의 관심은 비로소 모든 것이 끝나고 나서야 시작된다. 사흘이나 지난 후에야 발견이 되고 싸늘한 주검이 돼서야 세상은 관심을 가진다. ‘라는 갤럭시의 관점으로 아무 감정 없이 관심을 가진다. 텔레비전 인터뷰 속의 고모리 사람들은 몰랐다그 집하고 간격이 멀어 우리집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다 알았는데 남의 집 사정이라서 개입할 수 없었다라고 무관심이 미덕인양 떠들어 대거나 그 정도 체벌은 부모 입장에서 솔직히 있을 수도 있는 것 아니냐라고 폭력사태의 심각성을 부정하거나 학대이 마을엔 그런 거 없다며 현실도피형 안하무인으로 대처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한 순간이었다. 끔찍한 모성, 상습적인 구타, 가족의 무관심, 비정한 이웃, 우리 사회의 단면, 기타 기타의 평가와 비난이 앨리시어의 집을 중심으로 고모리 일대를 쏟아졌으나 소낙비처럼 한순간이었다.”(155) 텔레비전의 가십거리로 잠시 나왔다가 사건의 심각성을 질겅질겅씹고 단물이 빠지면 하고 뱉어버리면 그만이었다. 모두들 고상한 인간처럼, 상식을 갖춘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그 이중성에는 고모리를 뒤덮고 있는 하수처러장의 냄새처럼 구역질이 난다.

 

어쩌면 앨리시어의 어머니야말로 극단적인 인간다움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다. “씨발년이라고 불리는 그녀는 날것 그대로 표현할 줄 안다. “시발이라는 것이 가슴 속에 응어리진 어떤 질곡의 표현, 원초적인 본능과도 같은 것이니깐 말이다. 어쩌면 너무나 깨끗하기에 쉽게 더렵혀지고 오염되는지도 모른다. 섬유가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집요하게 얼룩을 세탁하는 모습(97) 그리고 앨리시어는 그런 그녀에게서 순백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지금 그녀는 가장 그녀답다” “그리고 그녀는 고통스러워 보인다. 그 고통은 가짜일까. 가짜라고 말할 수 있나.”(156)

 

소설에서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는 폭력은 단순히 가정푝력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앨리시어와 그의 동생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한 어머니도 가정폭력의 피해자였다. 피해자는 피해자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뻔히 가정폭력이 이뤄지고 있는데도 나 몰라라 하고 있는 고모리의 이웃들은 따뜻한 관심으로, 형식적인 상담이 아닌 적극적으로 아이의 아픔을 치유하려는 자세의 상담사그리고 포스트 씨발 년을 탄생시킨씨발년(앨리시어의 외할머니)(43)의 책임감 있는 태도가 있었다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았을까?

 

동생에게 마지막으로 들려준 앨리스 이야기는 계속해서 전해진다. 이것을 기록할 단 한 사람인 그대(162)를 찾아 우리는 살아간다. 고독하게 혼자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그것은 천천히 올 것이고, 그대와 나는 고통스러울 것이다.”(162) 하지만 고독하게 떨어지는 앨리스 씨의 이야기는 혼자지만 모든 사람에게 전해질 것이다.

사람들은 모이고 또 모여서 살아간다. 하지만 같이 있기 위해 혼자가 되고 혼자 있기 위해 같이 살아간다.

 

내 이야기를 들어줄 그대,

그대 어디까지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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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프레임 | 이택광 2013-10-19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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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마녀 프레임

이택광 저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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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의 <마녀 프레임>은 마녀사냥 그 자체를 분석하는 게 아니라, 그 광기의 작동원리를 고찰하였다. 그 결과 마녀사냥은 미신에 따른 인간의 광기가 아닌, 근대성이 낳은 합리주의의 한계인 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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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배우고 알고 있는 마녀사냥은 인간의 무지몽매함에서 나온 참극에 불과하다. 합리적이지 못한 시대의 인간, 유럽의 암흑기라고 불리는 중세의 폐해라고 생각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의 마녀사냥이 단지 무지몽매한 인간의 실수였을까? 이택광의 <마녀 프레임>은 마녀사냥 그 자체를 분석하는 게 아니라, 그 광기의 작동원리를 고찰하였다. 그 결과 마녀사냥은 미신에 따른 인간의 광기가 아닌, 근대성이 낳은 합리주의의 한계인 샘이다.

실제로 마녀사냥이 절정이 다다른 시기에는 중세의 봉권제도가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어느 때보다 교회의 권위는 떨어져 있었을 때다. 그리고 특기할 만한 점은 교회의 권력이 높았을 때에는 오히려 마녀=악마라는 공식이 성립되지 않았다. 그 당시의 종교재판에서는 마녀는 회개의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회개했을 때의 카타르시스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자신이 마녀임을 밝혔다고 한다. 단순히 마녀사냥을 상위의 권력이 하위의 군중에게 가하는 폭력이란 개념이 아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곳은 중세 세계관의 붕괴이다. 그 붕괴의 중심에는 오늘날의 사회를 이끈 몇 가지 주요 사건이 있다. 하나는 인쇄술(금속활자)의 발달과 과학혁명이다. 이는 중세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계몽시대로 접어들게 한 요인들이다. 마녀사냥은 이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인쇄술의 발달은 <마녀의 해머>라는 책이 급속도록 일반 대중에게 퍼지는 것을 야기했다. 계몽의 첫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인쇄술의 발달은 지식의 보편화,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지금으로 따지면 판타지 소설과 같은 <마녀의 해머>라는 책은 일반 대중들에게 마녀에 대한 부정적 시선, 판별, 처벌방식을 믿게 만들었다. 그리고 태동하기 시작했던 근대과학의 합리주의는 자연적 현상과 초자연적 현상 사이의 부재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 전 시대에서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자연적 현상은 바로 불가해한 신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합리주의에 입각한 과학은 흑사병, 자연재해 등과 같은 재난에 대응하지 못했다. 결국 합리주의는 다시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에 의존하게 된다. 이때 생겨난 것이 마녀=악마라는 공식이다. 어린 아이의 죽음, 흑사병, 자연재해 같이 우리에게 큰 피해를 주는 것은 근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으므로 초월적 존재의 소행 즉, 마녀의 짓이라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녀가 그 재난을 일으켰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여부가 아니다. <마녀의 해머>에서 마녀의 소행이라고 열거된 자연재해들이 대중들에게 퍼져 나가면서 현상자체만으로 마녀의 짓이라는 것이 성립된다. 마녀의 존재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자연재해는 곧 마녀의 존재를 입증해주는 격이다. 이렇게 시대가 급변함에 따라 구시대와 새로운 시대의 가치관이 서로 뒤엉키기 시작했다. 이때 사회적 가치관의 혼란이 야기되고 그 혼란의 틈에서는 윤리와 도덕의 부재가 피어난다.

 

하지만 17세기까지 마녀사냥이 자행 되었다는 점은 이상하다. 그 빈도는 줄었지만 계몽주의 시대라고 불리는 17세기까지 마녀사냥이 행해 졌다는 얘기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 글의 첫 부분에서 합리주의의 한계성에 대해서 잠깐 언급했었다. 바로 마녀 프레임이라는 인식의 구조가 근대의 산물이라는 것이 여기서 알 수 있다.

근대의 탄생에는 사법체계의 탄생과 함께한다. 합리주의의 대표 격이라 말 할 수 있는 사법제도는 그 태생에서 모순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사법체계는 명명된 것을 판별하는 제도이다. 명명되지 않은 것은 비존재의 위치, 즉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당시 사법체계에서는 마녀는 존재했지만 규정하는 존재의 영역에서 이탈해 버린 비존재인 것이다. 책에 나온 사례로 사법체계는 오스본 부인을 마녀로 선동해 죽게 한 콜리는 사형을 선고 받았지만, 오스본 부인은 구해낼 수가 없었다. 마녀는 비존재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과학이란 것은 그 시대의 지식체계라고 할 수 있다. 합리주의에 입각한 과학은 결국 그 시대의 낡은 유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합리주의의 함정을 나타낸다. 우리는 시대의 프레임(생각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에 합리라는 말을 맹신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마녀사냥이라는 단어를 교과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듣는다. 흔히 잘 알고 있는 인터넷으로 시작하여 크게는 정치까지 말이다. 최근 큰 문제로 떠오른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도 같은 관점에서 조사되고 있다. 최근 읽었던 <시사in>이라는 주간지에서도 프레임에 대한 기사를 냈다. 그 안의 내용은 국정원의 인터넷 댓글 활동이 어떤 프레임을 형성하게 됐는지를 파해 치고 있다. 이 글에서는 그 내용까지는 기술하지 않겠지만 많은 분들이 한 번쯤은 읽어 봤으면 한다. 마녀사냥은 중세를 떠나 20세기 대 참극이었던 홀로코스트’, ‘매카시즘그리고 현재 우리나라의 색깔론. 기존의 질서와 다른 문제를 제기 했을 때 그 문제에 정오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문제 제기 그 자체로 부정되고 배제되어 버리는 이 사회, 그 생각의 프레임을 우리는 다시 한 번 고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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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과 기만, 그것이 권력이다 | 프란츠 카프카 2013-10-09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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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송

프란츠 카프카 저/권혁준 역
문학동네 | 2010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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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법칙을 지배한다, 아니 지배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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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우리의 삶과 게임을 비교하곤 한다. 특정한 법칙이 존재하며 살아가는 우리들. 개인 속에 캐릭터는 질서에 따라 성장하며 게임을 지배해 나간다. 우리도 제도에 맞춰 살아가며 사회를 지배하고 구성한다. 우리는 체스게임을 하는 게이머이다. 우린 법칙을 지배한다, 아니 지배당한다.

 

현대 사법제도에서 시민의 권리는 보장되어 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가 자기변호이다. ‘피고인의 입장에서 고소를 당한다 해도 스스로 변호할 수 있는 기본권이 주어진다. 우린 이런 사회를 법치사회라고 부르고 민주주의, 공정사회라고 한다. 하지만 화려한 단어는 우리의 눈과 귀를 멀게 하고 앞을 보지 못하게 한다. 진정 법치사회가 민주주의이고 공정사회일까?

카프카의 소설 소송에서는 그런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요제프K는 소송에 휘말리지만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권리는 있지만 권리를 행사 할 수가 없다. 변호사를 고용하지만 그는 피고의 권리를 대변하지 않는다. 그저 법원고위 판사에게 아부할 따름이다. 그리고 변호사 또한 피고인을 자기 하수인처럼 부린다. 애초부터 권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수직적인 권력만 존재한 것처럼 말이다. 모든 사람에게 열려져 있다는 법원의 문은 사람들을 기만한다. 법은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그저 개인을 심판할 뿐이다.

보이지 않는 권력의 층은 우리를 항시 지배한다. 다다를 수 없는 그곳, 전혀 볼 수 없는 게 바로 권력이다. 권력의 구조는 근대를 넘어오기 시작하면서 그 성질이 변한다. 예전에는 권력은 과시의 상징이며 두려움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시민권과 법치국가가 자리 잡으면서 과시적인 권력은 힘을 잃고 만다. 그렇게 권력은 사라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권력은 자신의 음폐 할 수 있는 수단을 강구했으며 실제로 성공했다. 대의민주주의는 대표적인 예이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며 권력은 그들 손에 있다허울 좋은 말을 늘어놓고 언론을 통해 권력은 뒤로 숨은 채 우리를 조종한다. 권력은 보이지 않는 비실채이다.

허위가 세계질서가 되어 있으니까요(277)’ 진실은 진리처럼 잡히지가 않으며 세상은 허위가 지배하고 있다. 숨은 권력은 사회의 질서를 구성하고 있다. 우리는 주체의식을 가지고 삶을 영위해 나간다. 마치 게임에서 살아가는 캐릭터처럼 말이다. 결국 게임의 물리적인 시스템에 벗어날 수가 없이, 그저 그 속에서 제한된 범위에서만 자유를 만끽한다. 자유라는 것이 이젠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허용이 된다. 우리는 게임 시스템에 종속된 상태에서 게임의 부조리를 말한다.

 

종속된 자유에서 아우성치는 우리의 목소리는 멀리 뻗어 나가지 못 한다. 체스게임이 잘못되었다면, 우리가 체스를 두는 주체적인 게이머라면, 어떤 식으로 말을 움직일지 고민해선 안 된다. 우린 잘못된 체스 판을 엎어야 한다.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체스 말로는 해결할 수가 없다. 고름이 생긴 상처는 메스로 잘라 내듯이 우리는 체스 판을 엎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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