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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루나의 예언] - Beyond the Hills | 도서일기 2013-01-14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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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루나의 예언 1

프레데릭 르누아르 저/강만원 역
창해(새우와 고래)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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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의 예언

Beyond the Hills

 

 

아주 먼 옛날에는 어두컴컴한 밤이 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인간의 눈동자 위로 하늘에서 빛을 내는 별들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사람들은 별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고 많은 것을 알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점성술은 그리하여 탄생됐다. 세계 곳곳에서 싹을 틔웠지만 특히 고대 바빌로니아의 점성술은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7개의 행성, 즉 해·달·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으로부터 세계의 운명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자연히 개인의 운명과 결부되어 다양한 형태로 발달했다. 점을 보는 행위는 이토록 유서가 깊은 일이다. 그로부터 과거를 추정하고 미래를 예언하는 점성가가 많이 등장했는데, 그들이 주장한 내용 가운데 상당수는 당시의 세상을 지배하는 관념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불행한 삶을 살기 일쑤였다. 그게 종교와 관련된 것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위험한 일이었다. 가령, 이 땅에 여러 종교가 뿌리를 내린 이후로는 점성가들에게 소위 이단으로 죄를 물어 엄벌에 처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 책의 후기에 언급된 것처럼 현대천문학의 창시자로 손꼽히는 요하네스 케플러 또한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점성술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가 태어난 날짜가 공식적인 기록보다 6년가량 앞선다고 주장했다. 그로 인해 박해를 받았지만, 현대에 이르러 이 가정은 어느 정도 사실로 인정되었다. 그리스도의 탄생이 정확히 언제인지 아는 것이 무에 그리 중요할까마는, 수많은 사람이 제 목숨까지 바쳐가며 굳건히 지켰던 신념의 근원이 실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자각하는 일이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 소설은 오늘날까지도 좀처럼 질문을 허락지 않는 바로 그 종교의 영역에 다분히 인간적인 물음을 던진다. 프랑스에서 최고의 지성으로 불리는 저자 프레데릭 르누아르는 철학자이자 종교사학자로서 특별히 문학을 통해 철학과 종교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 책은 감히 그런 종류의 문학이 지닌 매력의 최고봉이라 할 만하다. 무려 15년간 두 발로 역사의 장소를 오가며 공들여 집필한 작품답게 현재 그는 '프레데릭 르누아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과 배경은 줄거리와 마찬가지로 문학적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방대한 분량의 이야기를 타고 흐르는 거의 모든 사건은 역사적 사실로부터 재구성되었다. 이것이 가장 먼저 놀라움을 안긴다. '다빈치 코드'처럼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소설과 달리 역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 속에 숨어 있는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는 것은 현실의 긴장 위에 선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있다. 이를테면 여기서 검은 복면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일부 종교의 폭력과 위선은 예나 지금이나 심각한 문제다. 오히려 세상이 점점 더 거짓과 타락에 물들면서 신앙의 본질을 망각한 채 믿음 그 자체에 몰두하는 일이 늘고 있는 추세다. 사이비 종교가 횡행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고로 이 작품의 배경에 해당하는 중세의 지중해 연안은 특정한 시공간에 머물지 않는다. 한 편의 소설이 유일신을 믿는 종교들, 예컨대 유대교·카톨릭·개신교·이슬람을 가로질러 당대의 철학적 사조를 두루 통과한다. 그 모든 것에 무지몽매한 나 같은 독자도 충분히 따라갈 만한 테두리 내에서.

 

 

△ 영화 '신의 소녀들(Beyond the Hills)'

 

 

주인공 조반니는 신앙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평범한 인물이었으나 우연히 점성술을 배우게 되면서 비극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마녀로 불리는 루나가 보름달에 비친 토끼의 내장을 보고 조반니의 인생을 예언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 과정에서 소설은 그에게 일어나게 될 중요한 사건들을 일찍이 압축적으로 제시한다. 이 책의 소제목들 또한 두 권에 걸쳐 7개의 행성으로 정해져 있고, 그것의 순서는 조반니의 운명과 연관되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는 이성과 과학에 힘입은 점성술이 세상의 운명까지도 내다볼 수 있다고 믿는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신과 인간이 결코 대립적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삶에 대한 믿음은 언제나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를테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래, 우리는 삶에 열심이지. 그러나 그것에 매달릴 뿐 진정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어. 존재에 집착하는 것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니야. 요컨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산다는 것은 예술이지." 그는 우리가 예술 같은 삶을 갈망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술 같은 삶을 사는 것은, 세계의 거친 물결에 휘둘리지 않고 제 삶을 스스로 조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단순한 생존에서 진정한 인생으로 넘어가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어려운 숙제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얼마 전에 본 크리스티안 문쥬 감독의 영화 '신의 소녀들(Beyond the Hills)'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세상에 내동댕이처진 한 소녀가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오갈 데 없는 세상을 향해 절규하는 모습이 아직도 선연하다. 그것은 비단 특정한 상황에 놓인 자의 비극이 아니다. '존재하는' 자라면 누구나 마주하게 되는 인생 그 자체다. 혹자는 그 영화가 예사로운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들어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데 고개를 기우뚱했지만, 나는 이러한 비극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아니라 신에 매달리는 태도, 삶이 아니라 죽음에 기도하는 자세는 벌거벗은 생명들을 더욱 힘들게 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운명을 움켜쥔 별들을 바라보면서도 지상의 언덕을 넘어서는 일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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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9월은 잔인한 달] - 경영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는 취업 준비생들에게 | 도서일기 2012-10-02 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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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9월은 잔인한 달

이동진 등저
지식공감 | 2012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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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들에게 취업 자체가 꿈이 되어버린 현실은 씁쓸하지만 이제 꽤 오래된 일이다. 피 터지게 공부하고도 점점 더 먹고 살기가 힘든 세상이니 젊은이들은 자나 깨나 내일 할 일을 걱정한다. 그러다 보면 내 앞길은 그저 막막하기만 한데 어인 영문인지 제 꿈을 찾아 잘만 사는 이들이 많은 것 같아 근심이 늘어진다. 그렇다면 그 시기를 똑같이 통과한 선배들은 과연 어떻게 꿈을 펼칠 수 있었는지 궁금한 것이 당연지사. 그래서 이 책은 인터뷰 형식을 빌려 21명의 선배를 만난다. 인터뷰어는 현재의 대학생, 인터뷰이는 과거의 대학생. 후배들이 인터뷰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그리고 이 책이 독자에게 전하려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보인다. 하나(첫 번째 목표)는 '당신은 어떻게 꿈을 찾았는가?'이고, 다른 하나(두 번째 목표)는 '그 꿈을 펼치려면 대학 시절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취업을 위한 구체적인 안내가 아니라 진로에 대한 경험적 조언을 목표로 삼고 있다.

 

아마도 그러한 방향 탓에 엮은이는 취업의 문을 뚫고 당당히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고 있는 인터뷰이들이 주로 어떤 분야에 근무하고 있는지 초반에 명백히 밝히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래서 언뜻 봤을 때는 이 인터뷰집이 누구에게 적합한지 알기가 다소 어려운데, 면밀히 들여다봐야 21명의 사회인이 대부분 경영 분야에 근무하고 있거나 그것을 위한 학업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프롤로그에서 '인문계 졸업생들이 고려할 수 있는 카테고리를 상위 수준에서 선정'했다는 간략한 설명으로 인터뷰이의 직종 유형을 온전히 설명했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무엇보다 경영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는 이들이 읽기에 알맞다. 자신보다 먼저 사회에 발을 내딛은 이들로부터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더구나 이야기가 오가는 상황 속에서 전문 용어가 등장하는 일이 잦은데, 그걸 제대로 흡수하여 진로에 적용하도록 돕는 것이 이 책의 가장 진취적인 목적이라면 자연히 그 분야에 촉수를 뻗고 있는 이들이 접하는 편이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이제 앞서 언급한 두 가지 목표는 얼마나 달성되었는지 물을 때가 됐다. 그것의 성패는 인터뷰의 질적인 측면과 다분히 연결된다. 요컨대 인터뷰가 얼마나 잘 이루어졌느냐 하는 것이 핵심적인 문제가 된다는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첫 번째 목표는 그다지 완수되지 않았고 두 번째 목표는 제법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꿈을 찾게 되었는지는 그다지 드러나지 않는 데 반해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대학 시절에 무엇을 하는 것이 좋은지는 비교적 잘 끄집어냈다. 사실상 성취하기가 몹시 어려운 첫 번째 목표는 이런 종류의 책들이 다 그러하다는 점에서 특별히 이 책만의 단점은 아니다. 왜냐하면 직업을 선택하는 경위는 대개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는 만큼 사회적으로 아주 성공한 사람도 그것을 스스로 분석하거나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 그 일이 좋았다고 설명하는 데 그치는데, 관심을 표하게 된 근원 자체를 밝히는 건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걸 감안하다면 두 번째 목표를 성취한 것만으로 더 높은 점수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21명의 선배에게 질문을 던지는 이가 한 사람이 아닌 까닭에 인터뷰 내용에 대한 편차는 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여럿이 모여 의견을 수렴하며 서로 조언을 주고받았겠지만, 균열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편차의 원인은 인터뷰이를 만나기 전에 미리 준비한 질문의 내용을 상황에 맞게 적절히 변용했는가에 좌우되는 듯하다. 가벼운 질문을 하나 던졌을 뿐인데도 때로는 인터뷰어가 유용한 정보를 술술 일러주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때, 예를 들면 엉뚱한 방향으로 대답을 하거나 은연중에 질문 자체를 회피하거나 자신의 과거를 다소간 포장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보충 질문이 필요한데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너무 전형적인 질문으로만 구성된 대담이 존재한다. 그런 쪽으로 질문을 잘 소화한 인터뷰어로는 이지*, 강모* 등이 눈에 띈다. 이런 점들을 어느 정도 숙지한다면 이 인터뷰집을 어떻게 활용하는 것이 좋을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고로 이 책은 경영을 공부하는 취업 준비생들이 그들보다 먼저 직업 전선에 뛰어든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차원에서 활용하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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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윤리21] - 가라타니 고진, 칸트의 윤리학으로 21세기를 열어젖히다 | 도서일기 2012-05-29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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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윤리21

가라타니 고진 저/송태욱 역
사회평론 | 2002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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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 문학 비평가로서 그 이름이 제법 귀에 익은 것과는 달리 여지껏 그가 쓴 책을 읽은 적이 없었다. 한국 인문학계에 가라타니 고진이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은 각종 비평집에서 확인되는 사실이다. 그는 서양 근현대 사상의 틀을 비서양인의 시선으로 재해석하여 인류 보편의 철학적 문제를 정교하게 탐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동양인으로는 드물게 문학 비평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그가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어떤 이야기를 펼치는지 궁금하여 그나마 내가 평소에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소재를 다룬 책 한 권을 골랐다. <윤리 21>은 기존의 철학자가 펼친 사상적 근거를 내세워 윤리의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망하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일종의 사회 비평이다. 그 영역이 일본 사회 중심이긴 하지만 전쟁과 혁명은 비단 일본만의 문제가 아닌 터라 일반적으로 읽히고 있으며, 특히 식민 행위를 어떻게 반성하는 것이 옳은가를 논하는 만큼 우리로선 흥미로운 담론이 아닐 수 없다. 지난 20세기를 전쟁과 혁명의 세기라고 한다면 2000년에 출간된 이 책의 의미는 남다른데, 저자는 여기서 20세기의 윤리를 돌아보고 21세기의 그것을 내다보고 있다. 양은 적은 편이지만 단락별로 다양한 논의를 담아 정리하기가 만만찮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책에 대한 평을 쓰려는 게 아니고 저자가 말하고 있는 내용을 내가 이해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 구체적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이 책을 독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자 책이 지닌 가치를 설명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범죄자나 깡패가 등장하는 영화를 대하는 관객의 반응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사람에 따라 호오의 정도가 다르긴 하지만 아무리 잔인한 행위가 스크린에 전시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실제 행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연출된 것이므로 누구든 영화를 보면서 적당히 거리를 두게 마련이다. 일상 생활에서는 폭력을 혐오하면서도 영화나 소설에서는 그들을 지지하고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여러 가지로 억울한 일을 당했던 주인공이 꾀하는 복수가 자극적이면 자극적일수록 관객은 더욱 통쾌한 기분을 맛본다. 이것이 이른바 미적 판단이다. 그 근거를 칸트는 '무관심'에서 찾았다. 말하자면 도덕적이고 지적인 관심을 배제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런 영화나 소설을 즐기는 것은 ㅡ 심지어 때로 현실에서도 그러한 시각이 나타나는 것은 문화적으로 훈련된 탓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도덕과 이성의 체계를 뒤흔드는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그로부터 관심을 떼는 훈련을 한다. 잔인한 게임에 자주 노출되는 것도 그것을 부추긴다. 입에 담기조차 힘든 끔찍한 범죄가 점점 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그렇게 관심을 배제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어쨌든 그것은 통상의 관심을 별도로 떼어놓고 보는 것이므로 예술 작품을 대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영화의 호불호를 나누는 결정적 요인이 되기도 한다는 뜻이다. 어떤 영화를 오로지 잔인해서 싫다고 말한다면 관심을 배제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뜻하고, 폭력적 행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그 반대가 되는 셈이다.

 

그렇게 관심을 배제하는 행위, 그러니까 관심을 괄호 안에 넣는 행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괄호를 다시 푸는 행위다. 쉽게 말해서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 문제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만약 영화에 등장한 폭력적 행위가 단순한 오락에 그칠 뿐 충분한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과연 그 영화를 좋은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져야 한다는 뜻이다. 근데 이것은 갈수록 무시되고 있다. 영화가 끝나면, 소설을 읽고 나면 사유를 멈추기 일쑤다. 그런데 영화나 소설을 통해 자꾸만 그런 식으로 폭력에 길들여지면 인간의 윤리 체계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사람이 뭔가를 저질렀다면 그것이 아무리 불가피한 것이라 하더라도 윤리적으로 책임이 있다. 그것은 '자유로워지라'는 당위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인간에게 자유가 없었다 할지라도 자유로웠던 것으로 봐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먼저 위협하는 상황에서 정당한 방어 행위로써 내가 상대를 해쳤을 때조차 내게 책임이 있고, 운전을 하는 도중에 갑자기 누가 도로로 뛰어들어 사고가 났더라도 보행자가 사망을 했다면 운전자에게 일말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칸트의 이야기다. 칸트는 도덕성을 자유라는 관점에서 봤다. 그에 따르면 도덕은 선악이 아니라 자유의 문제다. '자유'는 상황에 따라 주체에게 주어지지 않기도 하지만, '자유로워지라'는 명령만큼은 언제나 인간의 행위와 함께 작동한다.

 

윤리를 선악의 문제로 바라볼 경우엔 모든 문제가 결정론적 인과성을 띤다. 악하면 죄를 짓는다는 식의 논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의 기본 개념과도 맥락이 같은데, 어떤 결과를 야기한 원인이 반드시 있다고 가정하는 식이다. 사회적 범죄가 발생하면 바로 그 원인을 진단하려고 애쓰는 태도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윤리를 자유의 문제로 생각한다면, 의무가 그것을 좌우한다. 이때 의무 또는 지상명령은 국가나 공동체가 강요하는 규범이 아니고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는 명령이다. 그런 의미에서 형이상학적인 개념이다. 이 경우엔 어떤 원인이 반드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A이면 B이다'에서 A는 B를 규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어떤 증상이 있을 때 A라는 원인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결코 A라면 B가 된다는 식의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이것을 구조론적 인과성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원인이 발견되어도 책임은 물을 수 없다. 윤리가 선악의 문제라면 결국 A이면 모두 B가 되어야만 하는데, 알다시피 실제로 그렇지 않다. 가령, 아버지가 폭력적이라고 해서 그 아들도 반드시 폭력적인 것은 아니듯. 따라서 저자는 칸트의 말처럼 윤리는 자유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한국 범죄 영화에서 인물이 저지른 행위마다 그 원인을 딱 규정하는 식의 연출은 문제가 있다. 원인을 구태여 제시할 이유가 없는 상황에서도 짧은 플래시백으로 과거를 파헤치면서 결정론적 인과성에 목을 매는 건 되려 영화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

 

이토록 윤리가 자유의 문제라는 게 명쾌하다면, 왜 우리는 21세기에 들어서도 그것을 새롭게 인식하지 못하는 걸까? 저자는 그것을 가로막는 요소로 종교, 자본주의, 정치를 꼽았다. 인간은 악한 존재이므로 '종교'로 구원을 받아야 하고, 이익을 취하는 건 곧 행복을 도모하는 일이므로 사람 위에 '자본'이 있고, 전쟁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것과 같은 '정치'가 멈추지 않는다. 죽은 자가 산 자의 방편으로 이용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저 세 가지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 도덕적 영역은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에서 나오는데, 그 명령은 죽은 자에서 비롯된다. 개인과 국가의 자유가 지상의 것으로만 이해될 때 윤리적인 문제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가 말한 대로 우리의 자유는 현전하는 타자만이 아니라 부재하는 타자에 대한 책임을 함의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버마스의 공공적 합의 혹은 간주관성은 칸트의 윤리학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성을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항상 목적으로 사용하라는 도덕 법칙이 역사적으로 실현되는 것은 중요하다. 이와 같이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의 윤리학을 전면에 내세워 일본 사회를 비롯한 전 세계가 어떻게 21세기를 윤리적으로 살아 나갈 수 있을지 깊이 고찰한다. 그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칸트론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외려 그 반대에 가깝다. 칸트의 '윤리'가 오해되는 대목을 찾아 참된 의미를 밝히면서 현대 사회에서 그것이 지닌 가치가 얼마나 큰지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저자의 담론은 식민주의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일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재 매우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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