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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증오는 어떻게 바뀔 수 있는가 | 시네마카페 2018-04-20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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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몬태나

스콧 쿠퍼
미국 | 2018년 04월

영화     구매하기

(※ 살짝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증오와 혐오가 지배하는 마음이 바뀌는 순간은 어떻게 오는 것일까.


<몬태나>는 그 ‘어떻게’의 한 사례를 보여준다. 증오하는 존재에게 마음을 열고 생의 또 다른 도약을 찾는 과정을 러닝타임 내내 따라간다. 사실 다른 존재에게 마음을 여는 것은 쉽지 않다. 더구나 자신의 동료를 죽였던 이(들)라면 더욱더. 아무 상관없는 누군가를 대가를 바라지 않고 도우려는 마음 갖기도 쉽지 않건만, 어쩌면 복수해야 할 대상과 함께 길을 걷고 그를 고향에 무사 귀환시키라는 명을 받았다면?



조셉 블로커(크리스천 베일) 대위가 처한 상황이 그렇다. 20여 년간 충직한 군인으로 복무하고 전역을 앞둔 그에게 마지막 임무가 떨어진다. 포로로 잡은 아메리카 원주민 샤이엔 족의 추장 옐로 호크(웨스 스투디)와 가족을 고향 몬태나로 호송하라는 명령이다. 침략자(미국)에 맞선 용맹한 전사였던 호크 추장은 암으로 죽음을 앞둔 상태. 조셉은 다분히 정치 이벤트나 다름없는 그 명령이 마뜩잖지만, 어쩔 수가 없다. 군에 복무하는 동안 숱한 원주민을 벤 한편, 동료와 부하를 잃은 그에게 남은 건 피로감뿐. 조셉의 표정과 몸짓에는 그 피로감이 잔뜩 배어 있다.  


증오와 혐오를 품고 나선 호송 길. 영화 오프닝에서 포악한 원주민 부족에게 가족을 잃은 가련한 여인 로잘리(로자먼드 파이크)가 합류하면서 영화는 좀 더 풍성한 결을 갖게 된다.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조셉에 비해 로잘리는 좀 더 섬세하고 풍부한 감정을 보여준 덕분이다. 


어떻게든 도달해야 할 몬태나까지 1000마일의 여정.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감정의 흐름이다. 원주민에게 증오와 적개심을 품은 주인공들이 ‘적과의 동침’을 통해 변화하기 때문이다. 정해진 목표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여정이 마냥 순탄하지 않을 것은 자명하다. 불편한 동행에 우여곡절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다고 극적인 반전이나 큰 사건이 터지는 것은 아니다. 예측 가능한 수준으로 그들의 여정은 저항을 받는다. 



몬태나로 가는 길은 단순한 여정은 아니다. 전쟁이 사람을 어떻게 바꾸고 사람을 얼마나 비참으로 모는지 아는 조셉이지만, 전쟁과 전투가 이어졌다면 아마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그가 길 위에서 삶의 변곡점을 만난다. 예기치 않은 만남과 길이 선사하는 선물이다. 포악한 원주민 부족 등과 같은 공동의 적을 맞닥뜨리자 아이러니하게 적대적이었던 그들은 한 편이 된다. 그리고 길을 통해 믿음과 신뢰를 차곡차곡 쌓아간다. 인간이 아닌 상황을 믿을 수밖에 없는 조건, 철옹성 같던 조셉이 서툴게나마 마음을 여는 장면은 어떤 울림을 안겨준다. 


인간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나는 조셉이 개과천선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는 사실 ‘악’도 아니고, ‘선’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직업과 주어진 임무(일)에 충실한 사람일 뿐이다. 그는 원주민 입장에서 흉포한 살인마이지만, 미국(군대) 입장에서 전쟁 영웅이다. 


내가 <몬태나>에서 조셉을 옹호했던 이유는 그의 (변화하는) 태도 때문이었다. 증오와 혐오를 품고 있지만, 변화하는 상황과 사건 앞에 ‘이성’을 잃지 않는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리고 변화하는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상황에 자신을 맞춘다. 호크 가족을 대하는 태도가 그것을 보여준다. 처참하게 가족을 잃은 로잘리 역시 마찬가지다. 호크 가족의 다정함에 그는 복수나 감정이 아닌 다정함으로 그들을 대한다. 조셉이나 로잘리, 호크 가족 모두 고쳐 쓰고 자시고 하기 전에 사람됨을 사유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영화는 어쩔 수 없이 미국‘적’이다. 영화는 원주민의 시선이 중요하지 않다. 관객이 감정 이입을 하는 대상은 원주민이 아니다. 호크의 이야기와 시선은 거세돼 있다. 그가 당한 고통과 원주민이 백인 침입자에게 당해야 했던 불행한 역사는 찾아볼 수 없다. 만약 그것이 선명하게 드러났다면 조셉은 없어도 될 인물이다. 호크의 서사를 보조하기 위한 MSG에 불과했을 것이다.


미국(이주민)은 화해와 용서를 하는 주체가 될 수 없다. 진짜 용서는 미국 이전 아메리카(라고 불리게 된 대륙)에 살았던 원주민이 해야 할 몫이다. <몬태나>는 원주민을 학살하고 몰아낸 미국 백인이 잘못했고 폭력의 악순환을 불러온 원흉임을 간간이 드러내지만, 딱 그만큼이다. 원주민 편에서 이야기를 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해자 프레임으로 그려냈을 뿐이다. 원주민의 고통을 사서 얻을 수 있는 평화 따위는 없다.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보자. 첫 문단에서 던진 질문은 잘못됐다. 조셉 혹은 미국 입장에서 영화를 봤다는 증명이다. 증오와 혐오는 원주민에게 먼저 닥친 감정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터전을 무력으로 짓밟고 빼앗은 백인 가해자에 대해 가질 수밖에 없는 감정이다. 애초 전쟁을 일으키고 학살에 나선 전범은 조셉으로 상징할 수 있는 백인이다. 


물론 그 한계를 반드시 탓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몬태나>는 미국이 행한 악행과 과거를 반성하는 한편 지금 ‘트럼프’로 대변할 수 있는 인종주의와 차별을 넌지시 건드린다. ‘증오와 혐오, 복수가 능사가 아니’라는 점을 1000마일의 동행을 통해 알려준다.


나는 미국 사회가 과거 선조의 악행(원주민 학살·추방)을 어떻게 얼마나 반성하고 성찰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몬태나>와 같은 영화가 그것을 기억하고 반성하고자 하는 태도라고 여기고 싶다. 우리가 4.16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듯이 말이다. 물론 단순히 기억만 해서는 안 된다. 아울러 성공한 쿠데타(정복)는 처벌받을 수 없다, 는 논리에 순순히 함몰되지 않겠다는 스콧 쿠퍼 감독의 의도라고 믿고 싶다. 스콧 감독은 이 영화와 관련, 존 포드 감독의 <수색자>와 코맥 맥카시의 소설 《핏빛 자오선》과 조셉 콘래드의 소설 《어둠의 심연》 등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수색자>는 백인은 선하고 인디언은 악하다는 고정관념을 허문 작품이며, 《핏빛 자오선》과 《어둠의 심연》은 제국주의와 백인우월주의를 비판한 소설이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쓴 콜롬비아의 대문호이자 4년 전 4.16 세월호 참사 다음날 숨을 거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에게 실제로 벌어진 일이 아니라,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일과 당신이 그것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한편으로 ‘미국적’이라는 말은 한국 관객에게 쉽게 도달하기 힘든 지점이 있음을 의미한다. 또 한 가지. 영화 후반부, 힘겹게 몬태나에 도착해서 벌어진 사건은 다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새로운 가족과 시작을 암시하는 마지막 장면을 위해 그렇게 해야 했다는 혐의(?) 때문이다. 상처받은 이들이 결합한 새로운 시작을 나쁘다고 할 순 없으나, 작위적인 봉합(?)으로 보여서다. 그런 한편으로 크렘린 같은 조셉의 진화가 반갑고 저렇게 맺어진 조합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동시에 했지만 말이다. 


부제를 붙인다면 ‘길 위에서’가 적당할 <몬태나>는 마음(감정)의 행로를 따라가야 제대로 볼 수 있는 영화다. 특히 증오와 혐오를 품은 타인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내가 아닌 타인이 품은 고통에 무뎌지지 않고, 타인을 향해 조금 더 열려 있어야 할 것을 알려주는 영화다. 그래서 동료 키더 중위를 잃은 조셉에게 옐로 호크가 했던 말이 가슴에 남는다. “난 많은 친구를 잃었고 당신도 많이 잃었지. 크나큰 상실이지만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오는 것이잖소.”


<몬태나>는 그렇게 '죽음'을 다룬 영화이기도 하다.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있다. 죽음을 생각해야 생은 더욱 에너지를 가질 수 있다. 죽음에 '적대적'일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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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에 대한 발랄한 고찰 | 시네마카페 2018-04-02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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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레이디 버드

그레타 거윅
미국 | 2018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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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버드>를 만나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전에 만나면 좋을 영화가 있다. <브루클린>. 물론 두 영화 사이의 혈연관계는 없다. 그저, 한 얼굴 때문이다. 시얼샤 로넌. 두 영화 주인공을 맡은 이 명민한 배우는 ‘좋은 배우의 얼굴이 주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말하자면, 영화를 믿고 보게 만든다는 얘기다. 두 영화의 공통점이 있다. 시얼샤는 두 영화 모두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됐다(수상은 못했지만). 주인공은 고향을 떠나 뉴욕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성장영화의 모양새를 띠고 있다. 


무엇보다, 나는 고향을 떠올렸고, 지금의 나를 돌이켜봤다. 

그리고 질문했다. 지금의 나는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그러니 <레이디 버드>의 크리스틴(시얼샤 로넌)을 보면서 <브루클린>의 에일리스(시얼샤 로넌)를 떠올린 건 조건반사였다. 태어나고 자란 아일랜드를 떠나 뉴욕 브루클린에 둥지를 틀었던 에일리스는 ‘고향이란 출생지가 아니라 삶을 지어 올린 곳’(영화기자 김혜리) 임을 알려줬었다. 


그는 고향 아일랜드(의 마을)에선 별 볼 일 없는 ‘듣보잡’이었다. 어떤 조건 때문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떠밀리듯 가야 했던 브루클린에서 그는 꿋꿋하게 자신의 생을 차곡차곡 쌓는다. 언니의 죽음으로 다시 찾은 고향 마을에서 그가 받은 환대는 떠나기 전과 딴판이었다. 그리고 깨닫는다. 브루클린에서 겪고 쌓아 올린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구나! 아일랜드와 브루클린 사이, 자신의 변화를 되돌아본 에일리스의 (클로즈업된) 얼굴은 하나의 스펙터클이었다. 오래전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생을 쌓아온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고향에서 오는 서신만이 유일한 낙이었던 에일리스는 브루클린에서 공부와 사랑, 직업, 관계 등을 통해 한 뼘씩 자신의 공간을 확보해간다. 그것은 익숙했던 공간을 떠나 새로운 곳에 정착할 때까지 불안과 흔들림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무엇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가 끝날 무렵 자신이 쌓아 올린 삶이 자리한 곳에 대한 속 깊은 애정을 드러낸 에일리스의 얼굴. 그 얼굴이 감동으로 다가왔던 이유 중 하나는 그 삶에 대한 긍정이 묻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레이디 버드>가 <브루클린>과 살짝 갈라지는 지점은 이곳이다. 고향 새크라멘토가 지긋지긋한 열일곱 크리스틴. ‘여긴 어딘가, 나는 누군가’라는 뻐꾸기를 날리는 천방지축. 어떻게든 뉴욕으로 떠나고 싶을 뿐이다. 부모가 준 이름 대신 ‘레이디 버드’라고 스스로를 명명한 것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이 현재 있는 곳을 부정하고 싶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지 않는 엄마와 사사건건 부딪힌다. 그러니 느닷없는 변덕도 자연스럽다. 갑자기 베스트 프렌드를 버리고 돈 많은 집안의 예쁜 소녀에게 살갑게 다가가 함께 일탈도 즐긴다.   


그랬던 레이디 버드가 새크라멘토를 떠난 뉴욕에서 과거 자신(과 고향)을 긍정하고, 깨닫는다. 지금의 나를 키운 것은 불만투성이의 폭풍 사춘기 시절이었음을. 좁고 지루하며 지긋지긋했던 새크라멘토의 일상적 풍경임을.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은 엄마의 속 깊은 애정을.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이름을 ‘크리스틴’으로 소개한다. 소녀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 



<레이디 버드>가 <브루클린>과 다시 만나는 지점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크리스틴과 에일리스는 자신을 긍정하는 법을 배운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통찰하는 성장 서사가 둘을 잇는다. <레이디 버드> 감독 그레타 거윅의 말에 긍정할 수밖에 없다. “레이디 버드는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봐주길 기다리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바로 보는 사람이다.” 


크리스틴이나 에일리스 모두 특출하지 않지만 특별하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 시얼샤 로넌의 얼굴이다. 낯선 곳에 도달해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이방인이지만, 자신이 서 있는 풍경에 주눅 들지 않는다.(처음에는 그렇게 보일지라도) 크리스틴이나 에일리스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하지 않는 이유다. 과거든 현재든 자신을 긍정하는 성장을 통해 마음의 근육과 심리적 자산을 충전한 그들이다.


무엇보다 나는 크리스틴이 사랑스러웠다. 첫 장면, 크리스틴은 달리는 차에서 엄마와 티격태격하다가 느닷없이 문을 열고 뛰어내린다. 크리스틴이 어떤 인물인지 소개하는 그 ‘럭비공’ 면모는 시종일관 지속된다. 가난한 집,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없는 처지, 타인에 대한 부러움 등 자신을 둘러싼 것이 온통 불만인 미운 열일곱.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런 질풍노도를 겪었기에 그의 밉상 짓이 마냥 미워 보이지 않는다. 뭘 몰랐었던 그때에만 할 수 있는 무엇이니까. 그런 모습에 고개 끄덕일 수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발랑 까진’ 대신 ‘발랄’이라는 수사를 사용할 것이다. 


특히 <레이디 버드>의 미덕은 그 시절을 미화하지 않는 데 있다.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현실 싱크로율 100%의 에피소드가 촘촘하게 박혀 있다. 얼른 어른이 되고 싶고 새처럼 자유로이 날고 싶은 욕망을 담았을지 모를 ‘레이디 버드(Lady Bird)’라는 명명은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었던 철부지 시절의 우리를 소환한다.



이 성장 서사가 변곡점을 이루는 지점은 찡하다. 크리스틴이 집을 떠나 새처럼 날아오르기 전, 자신의 방을 하얗게 칠한다. 과거를 지우고 새롭게 출발하겠다는 다짐. 새하얀 캔버스에 그가 앞으로 그려낼 가능성에 대한 기대도 품게 만든다. 어른이 되기 전 우리 또한 그랬던 것처럼. 그것과 맞물려 딸을 품에서 떠나보내야 할 엄마의 마음도 애틋하다. 딸에게 줄 편지를 썼다 지웠다, 반복하는 그 마음 깊은 곳.     


소녀는 어떻게 숙녀가 되는가,라고 부제를 붙여도 좋을 <레이디 버드>는 관객의 성별이 중요하진 않다. 이 흐뭇한 성장담을 보면서 “엄마(아빠)처럼 살기 싫었어”라고 외쳤던 질풍노도를 겪은 이에겐 더할 나위 없는 추억 소환 영화가 될 것 같다. 특히 엄마와 딸이 손잡고 함께 보면 좋겠다. <브루클린>의 에일리스에게 도플 갱어가 있다면 <레이디 버드>의 크리스틴이 그 어린 시절이 될 것 같다. 성장은 나이 먹는다고, 경험한다고 오는 것이 아니다. 어른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과거든 현재든 자신이 쌓아온 생을 긍정할 때 성장은 불쑥 우리 앞에 다다른다. 시얼샤 로넌의 얼굴이 내게 알려준 작은 통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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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혼자 빛나는 별은 없다 | 북카페 2017-09-14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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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마을이 일자리를 디자인하다

하토리 시게키 저/김홍기 역
미세움 | 2017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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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경제는 어떻게 조직되고 진화하는가, 에 대한 하나의 좋은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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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연결’이었다. 

하는 일도 제각각, 살아온 배경·환경도 천차만별. 책 초반부, 별달리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은 이들이 ‘지역고용창출’이라는 빤한 목표로 모여 성과를 대충 나열한 작은 백서(白書)이겠거니 생각했었다. 책의 개요도 그리 말하고 있었다. ‘인구 15만 명의 일본 세토내해 최대 섬인 아와지 섬. 이곳에는 고용창출을 목표로 하는 ‘아와지 일하는 형태 연구섬’이 있다. 책은 4년 동안의 활동과 성과를 기록했다.’ 아와지 일하는 형태 연구섬? 익숙하지도 직관적이지도 않은 작명은 또 어떻고. 그런데 책을 넘기면서 제각각 풀어낸 이야기가 하나로 모이기 시작했다. 많은 것들이 연결되면서 그림이 그려졌다.


그러면서 불이 켜졌다. 

아, 이 조각들이 하나로 수렴되는 과정이 아와지 섬의 일자리 만들기, 더 나아가 공동체경제(마을경제)가 진화하는 과정을 드러낸 것 아닐까. 재미있는 연결이었다. 그것은 SNS의 교감 없는 연결과는 다른 무엇이었다. 책에서는 그것을 ‘편집’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별과 별을 연결하여 별자리를 명명하는 것 같은 작업.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재료, 사람과 장소, 물건과 공간 등 모든 것이 연결됐다. 그것은 또 다른 흥미를 낳았다.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았던 상황이 만들어졌고, 아와지 섬의 매력이 드러났다.


일자리 창출 플랫폼 

‘아와지 일하는 형태 연구섬’(아래 아와지)을 ‘디자인’(좁은 의미의 디자인이 아닌 공간과 정보, 사람의 종합적인 조율을 디자인이라고 하자)한 것은 다양함이었다. 수퍼바이저, 지역 어드바이저, 사업추진원, 실천지원자, 지역주민 등 다양한 관점이 모였다. 건축, 기획, 예술, 디자인, 농업, 자영업자 등 다양한 일을 하던 사람들은 제각각의 의도야 어쨌든, 아와지에 새로운 ‘별자리’를 만들었다. 혼자 빛나는 별은 없었다. 사람이 가장 창의적으로 되는 때는 자신이 하는 일이나 생활 형태와 다른 사람을 만날 때라고 했던가. 물론 그것이 되기 위해서 더 중요한 것은 태도다. 다름을 인정하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태도. 다른 사람에게는 없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다른 사람에게는 있고 내게는 없는 것을 알고 함께 머리와 몸을 맞대는 것. 행간에서 그런 과정을 읽을 수 있었다. 4년 동안 숱한 갈등과 어려움을 겪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숱한 실패와 어려움도 겪었을 것이다. 어떤 우정이나 좋은 관계를 확인하더라도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은 피곤이나 피로를 동반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럼에도 그들은 그것을 충분히 즐기고 감내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시간과 관계의 축적은 또 다른 가능성을 낳는다. 무쓸모의 쓸모,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친구나 팔로어를 쌓으면서도 타자를 만나지 못하는 SNS의 연결과 다른 사회적인 연결 덕분이다. 아와지 섬이라는 특정 지역과 공간을 둘러싼 움직임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무엇이었을 것이다. 아와지 섬의 매력을 생각하고 찾으며 의논하는 것이 계속 됐다. ‘어떤 사회에서도 일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연수’ 등과 같이 별의별 이름의 연구회가 만들어졌고 실천했다. 그것을 나는 ‘(일상의)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일(사업 혹은 프로젝트)을 즐기는 기술과 그 과정에서 드러난 어려움을 감내하는 기술. 더불어 아와지 섬이라는 자장 안에서 만들어진 매력이 가세했다. “도와주러 갔다가, 관계 때문에 갔다가, 그들의 천재적인 ‘자리 만드는 방법’에 반했다”는 말이 그것을 방증한다. 


사실, 민간과 행정의 연결(협치)에도 자연스럽게 관심이 갔다. 

한국, 특히 서울의 마을공동체 사업에서도 ‘협치’는 쉽지 않은 과제다. 불협화음은 당연한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푸느냐’(솔루션)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사업 진행은 마냥 쉽지 않았다. 공공사업이니만큼 부담도 컸을 터. 협치는 필수지만 금성과 화성의 언어가 다른 걸 어떡해. 의식차이도 컸다. ‘우리가 지향하는 풍요로운 사회’라는 목표를 놓고도 해석은 제각각. 관공서에 맞춘 사업운영도 어려웠다는 실토도 나온다. 사업 초반부, “아와지 섬에서 사업의 시작은 효고 현의 협력을 어떻게 이루어낼 것인가에 달려 있었다”는 말은 협치가 쉽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나의 사례. 회의에서 NPO멤버 한 사람이 행정을 비판했다. 공무원은 당황했지만 또 다른 민간의 협치 파트너가 행정 비판 발언을 부정했다. 무작정 반대나 진영 논리가 아닌 다양함을 인정하고 합의를 이루자는 접근. 회의 결과는 좋았나 보다. 회의참석자는 이렇게 토로한다. “이런 동료가 있으면 일이 잘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모든 결과는 우연히 나오지 않는다. 

순조롭지 않은 협치의 과정, 다양한 지혜를 모으고 조정을 거쳤을 것이다. 매뉴얼이나 절차가 축적돼도 자동으로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 것이 현실. 어느 곳이든 이런 존재들도 있다. 행정에 의존하여 요구만 하는 주민, 무난한 대책과 성과에만 매달리는 공무원, 생활비 받듯이 보조금에 의존하는 단체. 아와지 섬에도 도와주기 위한 돈(보조금)이 사람과 지역을 망친 사례도 있고, 책에 실리지 않은 지뢰도 잠복해 있을 것이다.  

 

허나 완벽하고 어디에도 적용 가능한 솔루션은 없다. 

사람, 공간, 환경, 에너지 등 모든 것이 다르므로. 아와지 섬의 연결은 협력과 협치로 이어진 경우 같았다. ‘행복한 교통사고’라는 표현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분야의 전문가와 연결했고 협력을 이뤘다. 다양한 관점이 결합했고 협동하는 지혜도 축적됐다. 그것은 이리저리 흩어진 천 조각이 바느질 한 땀 한 땀으로 연결됨으로써 근사하게 탄생한 조각보 같았다. 책 속의 이 말을 믿고 싶어졌다. 


“뜨거운 마음과 열정, 그리고 서로 협력하는 동료가 있으면 이런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해준 멋진 경험이었다. 행정과 민간이라는 장벽을 넘어 함께 사업을 성공시키겠다는 수평관계로 절차탁마했던 것도 대단히 기쁜 경험이었다.”(229쪽) 


이런 연결고리와 마음에 집중하자, 

아와지 섬 특유의 부가가치 상품 개발, 아와지 섬 특유의 관광투어 개발 등으로 이어진 마을경제 혹은 공동체경제의 확장은 당연한 수순으로 여겨졌다. 마을, 사람, 생활, 지역자원, 문화 등이 유기적으로 만나 일자리는 기본, 상품·서비스의 부가가치 향상은 물론 지속가능성을 갖춘 경제 형태와 이것을 지탱하는 일의 행태라는 또 다른 가치를 낳았다. 이는 취업을 위한 교육·기술향상, 지역 회사의 상품개발·마케팅, 사업 확대 등을 목표로 하는 우리 사회(마을경제)의 모습과 대비된다. 경제를 삶(생활)과 따로 떨어진, 돈을 버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건 너무 협소하다. 아와지는 액면 상으로 일하는 형태를 이야기하지만 이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연결된다.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를 고민하고 실천하게 만드는 공동체경제가 필요한 이유다. 인구 79만의 일본 후쿠이현의 사례를 다룬 《이토록 멋진 마을》에 나온 한 마을 상인의 통찰이 방향을 알려준다. “경제 행위란 본디 이타적 행동이 자신에게도 이득이 되는, 서로를 지탱해주는 조화의 힘이다.” 


조화는 연결의 결과다. 

아와지의 탄생전야인 2011년 여름 열렸던, 요리사들은 섬의 식재료를 활용한 요리를 하고, 도예가는 이를 담을 자기를 만들고, 누군가는 술을 들고 오는 등 한 사람 한 사람이 파티를 만드는 능력을 ‘셰어’하면서 시작한 ‘노플랜 파티(No Plan Party)’. 이 파티는 앞으로 변화될 아와지 섬의 모습을 함축했다. 기계적인 나눔(셰어)이 아닌 각자의 능력과 지혜를 모아 다양한 것을 ‘추렴’함으로써 혼자선 일어나지 않았던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낸 것. 이후 조금씩 확장된 관계는 연결을 거듭함으로써 아와지는 물론 아와지의 후생노동성 위탁사업 종료 후 ‘하타라보 섬 협동조합’으로 이어져 새로운 사업을 펼치고 있다. 공동체경제는 이렇게 진화할 수도 있다. 관계 속에서 살고 관계 속에서 가능성을 펼치는 것. 


책은 충분히 친절하지 않다. 

그것이 외려 나았다. 책 읽는 사람이 빈 공간을 상상하고 채울 수 있으니까. 책을 덮으면서 김규항 선생의 말을 곱씹었다. ‘세상은 평범한 사람의 삶에서 작은 가치들이 쌓일 때 조금씩 좋아진다.’ 책을 통해 만난 아와지 섬이라는 세상도 그랬다. 서로의 가치를 존중하고 연결하고, 남과의 비교가치를 따지지 않는 태도. 어떨 때는 태도가 비즈니스를 만든다. 공동체경제는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 아닐까. 돈을 벌기 위해 판매를 하는 것이 아니라, 판매를 통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또 다른 가치를 건네주는 것. 


아와지 설립 준비를 위해 아와지 섬에 이주한 사업운영 구성원이자 주식회사 SHIMATOWORKS(섬과 일) 대표인 도미타 유스케의 말이 그 태도를 대변하고 있었다. “일은 실패하더라도 실패하는 시간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저에게 중요한 것입니다.”(1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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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먹는 밥, 살아가는 힘 | 북카페 2015-09-13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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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저녁 같이 드실래요? 1

박시인 글,그림
예담 | 2015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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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지도 못하게 '커피 만드는 남자'가 된 것에는 그날, 그녀와, 커피를 함께 마셨던 기억도 한몫한다. 그 기억 속 풍경과 함께 묻어나는 커피향의 알싸함이 나를 그리 이끌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 그 시절, 우리가 함께 마셨던 커피(향미)는 내 마음의 방 하나를 영원히 전세냈다. 나는 그 방을 뺄 수가 없다.  


도희와 해경의 함께 밥 먹는 이야기인 《저녁 같이 드실래요?》는 그 방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함께 마시고 같이 먹는다는 것의 의미를 새삼 되새김질했다. 우리는 같이 먹고 마시면서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아갔고 서로를 알아갔다. 서로 연결된다는 감정적 교류가 오간 것도 그런 순간들을 통해서였다. 


혼밥(혼자 먹는 밥)이 쓸쓸했든, 헤어진 연인과 리추얼처럼 나눴던 함밥(함께 먹는 밥)에 대한 관성이었든, 도희와 해경에게도 같이 밥을 먹는 일상의 행위가 꽤나 깊은 함의를 품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 같다. 도희는 '그냥 밥 먹고 이야기만 나누는 사이'라고 표현했지만, 나중에는 달라질 것이다. 그 표현에 담긴 의미가 얼마나 깊을 수 있는지 깨닫게 되리라 생각한다.


밥을 함께 먹는다는 건, 기본적인 신뢰를 깔고 있다는 것이다. 손쉽게 "밥 한 번 하자"고 말하는 것 같지만, 그것에는 분명 함의가 있다. 이미 신뢰를 하고 있는 상태이거나 신뢰를 가지고 관계를 맺고 싶은 혹은 공동의 이해관계를 가지게 될 때에야 그 말은 나올 수 있다. 나도 그렇지만 대부분 사람은 아무에게나 '밥(식사) 한 번 하자'고 말하진 않는다.    


실은 '밥 한 끼'가 주는 신뢰의 공유는 오래된 전통이다. 건배를 하는 서양의 전통에서도 그것을 찾을 수 있다. 서양에서 건배는 술에 독을 타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태도였다. 또한 밥을 같이 먹는다는 건, 함께 한 사람의 삶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행위가 누군가에겐 나처럼,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 될지도 모를 일이 되기도 하며 느낌의 공동체를 만들기도 한다. 책은 그것을 초반부터 말하고 있다. 


맛있는 음식과 더불어

낯선 이들을 친근하게 

만들어주고 

이미 친했던 사이는

더 큰 유대감으로 엮어주는

그 30~40분가량의 

소소한 식사 시간들... 


도희는 그런 소소한 시간을 아주 좋아하는 여자다. 해경도 그런 소소한 시간에 얽힌 추억이 많은 남자다. 두 사람은 그렇게 같이 먹는 소소한 시간이 주는 즐거움을 알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인 것 같다. 단순하게 혼자 먹는 게 외롭고 쪽 팔려서 '같이 밥 먹는' 상대로 서로를 선택한 것 같진 않다. 


요즘 흔히 쓰이는 함께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행위를 뜻하는 '소셜다이닝'도 어원을 따지면 그렇다. 고대 그리스의 '심포지온(Symposion, 향연)'이 그 어원이다. 오늘날, 강연회로 인식되고 있는 심포지엄(심포지온)은 원래 함께 식사와 술을 나누며 이야기하는 문화를 지칭했었다. 그러니,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건 인류의 DNA에 박힌 오래된 전통이자 문화였던 것이다. 


일본의 만화나 영화, 책 등 다양한 작품을 보면서 감탄하는 것 중의 하나가 '같이 먹는' 것에 대한 묘사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인 영화 <카모메 식당>이나 만화《심야식당》도 그랬다. 화려하고 대단한 밥상이 아닌 편안한 마음으로 누군가와 밥상머리에서 담소를 나누고, 시간과 이야기를 공유한다는 것이 좋았다.  지금은 작고한 요네하라 마리는 《미식견문록》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아무튼 엄청난 먹보가 많은 우리 친지들은 맛있는 음식을 발견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먹이고 싶어하는 습성이 있다. 또 그것이 사람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이것을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라고 여긴다. 좋은 음식을 만나면 함께 먹는 것. 미식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와 작지만 내가 품은 세계를 공유하고 상호 교류하는 섭생을 한다면 그 자체로 미식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우리나라 영화에서도 같이 먹는 것의 중요성을 잘 묘사하는 감독이라면 봉준호가 있다. <괴물>이나 <마더> 등에서 그것을 잘 보여줬다.


《저녁 같이 드실래요?》1권에서 음식과 얽힌 에피소드의 기억은 주로 해경의 것이었다. 다양성 측면에서 단연 도희를 압도했다. 도희가 3개월 전 헤어진 8년을 사귀었던 연인과의 기억밖에 없어서였는지는 몰라도. 나는 특히 [한 번의 이별, 두 명의 연인]이 기억에 남았다. 내게도 그런 약간은 비슷한 기억이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도희는 비싼 핸드드립 커피까지 마시면서 이별의 순간을 맞이했다. 어떤 음식은 좋은 기억과 함께이지만 이별의 순간에 만찬을 즐기면서 헤어진다면 그때 먹은 음식은 어떻게 기억될까. 트라우마처럼 남게 되는 것일까. 카페에서 커피를 만들면서 헤어진 연인들을 본 적이 있다. 이별의 순간에 커피는 대부분 남아 있었다. 눈물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도희는 이후에 핸드드립 커피를 마셨는지 궁금해졌다. 


커피 한잔 할래요?  

밥 같이 먹을래요?


참 좋은 말이다. 같이 먹고 마신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다시 생각해봤다. 나는 페이스북에 남들이 무엇을 먹었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뭘 그렇게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에 자신이 먹고 마시는 것을 올려대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맛도 향도 느낄 수가 없다. 


다만 나는 그 먹거리 사진 등에 어떤 이야기들과 사람과 사회를 연결시키는 힘이 있을 때는 눈을 초롱초롱 뜨게 된다. 밥이든 커피든 그것은 때론 누군가를 위로하고 다독이기도 한다. 함께 있는 사람 덕분이다. 나는 그 덕분에 삶을 재배치하고 좀 더 내 삶을 풍성하게 만들었으니까. 무엇보다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다양한 기제가 먹거리를 단순한 끼니 이상으로 만든다. 그것까지 토핑처럼 가미할 수 있다면 《저녁 같이 드실래요?》 더 좋은 작품이 될 수 있겠지. 


이 작품이 단순하게 헤어진 연인들을 위로하려고 만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음식을 소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작가의 의도가 어떻든 이것을 읽고 보는 사람의 해석이 중요하겠지만, 나는 《저녁 같이 드실래요?》가 '함께 먹는 밥'을 생각하고 만들고 행동하게 만들면 좋겠다. 1편만 본 상태라 섣불리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흥미롭고 재밌게 만났다. 


다만 나는 웹툰으로 이 작품을 본 것이 아니기에 결론이나 진행과정은 알지 못하는 상태인데, 도희와 해경이 연인 관계로 발전하는 빤한 길로 걸어가지 않으면 좋겠다. 두 사람의 '러브 모드'로 갈 것 같긴 한데,  내 욕심에는 '그냥 밥 먹고 이야기만 나누는 사이'로 진행되면서 다채로운 이야기를 길어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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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서점 협동조합, 우리도 한 번 해볼까! | 북카페 2015-08-31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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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같이 살자

송호창 저
문학동네 | 2012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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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죽자' 대신 '같이 살자'고 말하고 행동한다면 헬조선에서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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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카. 

미국 뉴욕 주의 작은 도시다. 시민운동가 10년, 인권변호사 10년을 정리하고 국회의원이 되기 전 송호창이 2년 동안 살았던 곳이다. 백수 송호창은 아내가 공부하러 간 사이, 낮에는 빨래를 널고 저녁엔 장을 보면서 이타카 사람들과 관계를 맺었다. 말하자면 마을 주민으로서 이집 기웃 저집 기웃거리면서 이방인이 이웃이 된 것이다. 


한국과 여러모로 달라서 흥미로운 지점이 많은 이 책에서 협동조합에 대한 이야기라고 빠지지 않았다. 마을공동체(지역사회)에서 협동조합을 한 경우인데, 동네서점이다. 버펄로 스트리트 서점. 이 동네서점이 협동조합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이 뭉클하다. 동네서점이 거의 고사하다시피 한 지금의 한국에서 이것은 미션 임파서블이다.


버팔로 스트리트 서점은 30년 이상 이타카의 교양과 정신문화를 함양하고 상징하던 마을의 지적놀이터였다. 동네 깊숙이 주민들과 함께 호흡하던 이 버펄로 스트리트 서점, 무너질 위기에 처한다. 여러 요인들이 복합된 것이지만 인근에 거대 프랜차이즈 서점이 생긴 것도 한 요인이었다. 


버팔로 스트리트 서점이 곧 없어질 것 같다는 소식이 주민들에게 퍼졌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한국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서점을 살리자는 운동이 펼쳐졌다. 그리고 나는 깜짝 놀랐다. 500명의 주민들이 3억 원을 모아 협동조합 형식으로 서점을 인수했다. 요즘 말로 하면 크라우드 펀딩으로 동네서점을 협동조합으로 살린 셈인데, 이 마을서점은 협동조합으로 다시 태어났다. 


주민들이 자신의 호주머니 쌈짓돈을 모아 자신들의 지적 놀이터를 계속 지키기로 한 것이다. 누구의 강요나 윽박도 아닌 자신들의 것을 자신들이 지키기로 한 것이다. 자본(프랜차이즈 대형서점)에 쉽게 투항하지 않기로 했다. 이것은 주민들의 자각과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더구나 그들은 각자 쌈짓돈을 내놨다. 지적이다. 이 사람들. 지적놀이터를 지키는 지적 주민들. 멋있다~


그런 사례는 또 있었다. 지역 소비자와 생산자 공동의 협동조합인 그린스타(GreenStar). 이 협동조합은 1970년대부터 기반을 다졌는데, 주민들이 함께 협동조합을 결성했기에 가능했다. 그린스타는 주변 농장에서 나오는 안전한 곡물과 육류 등을 공급받으면서 다시 이를 주민들에게 제공한다. 생산과 소비가 매우 가깝다. 바람직한 협력 활동이다. 


몸 튼튼 마음 튼튼. 

백수 송호창이 만나고 경험한 이타카를 간접적으로 접한 나는 이 말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이타카 인민들은 신념과 관계로 소비한다. 대기업이나 거대 프랜차이즈의 주머니가 아닌 이웃의 살림살이를 불려주기 위해 그들은 소비할 곳을 스스로 적극 선택한다. 


이들의 협동(관계)이 어떤 정도인가하면 이들은 '블랙 프라이데이'(추수감사절 다음날로 초대형 할인 판매를 하는 날) 폭탄세일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이런 것이 지역 상인을 몰락시켜 언젠가 자신들에게 폭탄으로 돌아올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똑똑한 소비다. 지역 협동조합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송호창의 이타카 체류기를 서울의 어딘가에서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섞여 살기'의 열망이 마을공동체와 협동조합(사회적경제)을 통해 실현될 수 있을까. 이 책이 정답은 아니지만, 헬조선에서 더 이상 지옥불과 함께 살기 싫다면 이 책을 통해 좀 더 과감하게 상상하고 실천할 수 있다는 믿음을 키워갈 수도 있겠다. 꼭 동네서점이 아니더라도 이런 협동조합의 기적은 우리 사는 어딘가에서도 가능한 이야기면 좋겠다. 

 

우리는 흔히 '같이 죽자(너 죽고 나 죽자)'고 말한다. 그야말로 공멸이 심심찮게 일상의 대화에서도 흘러나오는 사회다. 경쟁과 비교 때문이다. 내가 안 되면 너도 안 돼야 한다는, 사촌이 땅 사면 이상하게 배가 아파야 하는 사회. 송호창도 '같이 죽자'가 더 이상 싫었던 게지. 같이 살자. 참 좋은 말이다. 그리고 일상에서도 그런 말이 자연스레 흘러나오고 행동도 그러하면 좋겠다. 입에 담을 수록 참 좋은 말이다. 같이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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