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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비너스에게' 를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 정말 갑사합니다. | ┌ 공지 2010-10-29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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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9일 금요일

권하은 <비너스에게> 블로그 연재가 종료됐습니다.

 

그동안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소년 성훈과 함께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해 고민해보는

뜻깊은 시간이었기를 바랍니다. ^_^

 

아, 그리고

11월 중에 권하은 <비너스에게>가 책으로 출간됩니다!

예쁜 책으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

 

"우리는 사랑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는 거고,

사람은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랑할 테니까."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오늘을 보내시길 바라며...^_^

안녕히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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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에게' 57회 | 비너스에게 2010-10-29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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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감히 소리를 내어 대답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어.

 

  “먼저 엄마에게 연락드리렴.”

 

  나는 그가 보는 앞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고 시간이 늦어 하룻밤 묵겠다고 했어. 엄마는 선선히 그러라고 했지. 최근 양나 씨와 엄마의 관계가 예전의 우정을 회복하는 수준으로 좋아졌기 때문. 엄마는 날더러 양나 씨에게 잘해주라고 한 적도 있었어. 외롭고 힘든 애야, 그러면서. 사실 양나 씨도 엄마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말이야.

  현신은 ‘애미’에서 샤워를 했기 때문에 나만 몸을 씻었어. 그가 무슨 생각으로 나를 불러들인 건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 밤은 사랑의 밤, 분명한 건 내가 그를 원하는 것처럼 그도 날 원한다는 것. 얼마나 많은 우연과 인연이 겹쳐야 이런 순간을 만날 수 있는 거지? 흐르는 시간 안에는 상처뿐만 아니라 이러한 보석 같은 순간도 숨겨져 있다는 사실. 누구 손에서, 어떤 순간에 빛을 발할지 모르니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살펴봐야 해. 함부로 가볍게 여기지 말고, 함부로 무시하지 말고, 함부로 절망하지 말고, 그러면서도 함부로 기대하지는 말자. 현신의 말처럼 영원한 건 없고,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모두 언젠가는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게 되어 있으니까.

 

  “내 첫 경험은 끔찍했어.”

 

  현신이 침대에 걸터앉아 내 양손을 다정하게 잡으며 말했어.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좀 더 좋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항상 있지.”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되지는 않을 거예요.”

 

  현신이 조용히 웃었어.

 

  “그래. 네가 첫 경험을 추억할 때마다 정말 좋았다고 생각하게 해주고 싶어.”

 

  그가 내 양손에 번갈아 입을 맞추었어. 그의 가슴에서 따듯하고 규칙적인 심장 박동소리가 들려왔지. 그 소리가 이 세상 무엇보다 나를 행복하게 했어.

  나는 새벽녘에 잠깐 잠이 깼어. 현신이 바로 옆에서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어. 몸이 밀착된 부분이 더없이 따스했고, 고른 숨소리가 귓가에 감겼어.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이 사랑스러워서 한참을 바라보았어. 비너스. 내가 정말 운이 좋았다는 걸 나도 알아. 앞으로 현신과의 관계가 어떻게 변하든, 나는 이 순간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기억할 테지. 아무리 영원한 건 없다지만 시간이 흘러도 기억은 고이게 마련이니까. 나는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춘 후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어.

 

 

  양나 씨가 공언한 대로 ‘사랑의 밤’을 연 건 그로부터 한 달 뒤. 시끌벅적한 파티가 될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그것은 양나 씨의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모은 조촐하고 화목한 소모임이었어.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나와 같은 성향을 지닌 사람들을 다양하게 만나보았어. 레즈비언 커플 두 쌍이 왔고, 게이 커플도 한 쌍 있었어. 현신과 나도 커플로 참석했으니 게이 커플이 둘인 셈. 그리고 스트레이트 커플 한 쌍, 외로운 싱글 세 명. 그들은 절대로 혼자서는 오지 말라는 양나 씨의 협박 때문에 자신들의 애완동물을 데리고 왔어. 그래서 고양이 한 마리와 개 두 마리까지 참석. 엄마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오지 않았어.

 

  “난 양나의 친구들이 항상 불편했어. 지금도 아마 그럴 테고. 너나 가서 재미있게 놀다 와.”

 

  “그날 엄마는 뭐 할 건데?”

 

  “데이트.”

 

  이번엔 정말 괜찮은 상대인 것 같냐는 내 질문에 엄마는 어깨를 으쓱했어.

 

  “항상 상대가 문제였던 게 아니야. 내가 변함이 없다는 게 문제지. 그리고 난 지금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거든. 그러니까 너무 기대하지 마.”

 

  현신은 어른이야, 비너스. 나는 아직 어른이 아니고. 그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해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하겠지. 나는 그에게 한 말을 잊지 않고 있어. 지금이 아니라면 기다리고, 언젠가는 반드시 당신을 찾아갈 거라고. 나는 현신과 연인이 된 후에도 여전히 그 말을 되뇌고 있어. 아무리 사랑이 대단하다 한들 흘러가는 시간을 잡아 묶을 수는 없기 때문이야. 억지로 멈추려 드는 순간 사랑도 끝이 나겠지.

  양나 씨의 파티에 모인 게이, 레즈비언, 스트레이트, 바이 들은 아무런 편견이나 오해의 소지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사랑을 표현하고, 농담을 던지고, 즐겁게 웃었어. 나는 그 파티에서 나온 많은 말들이 일반적인 사회에서 통용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심지어는 내 가장 친한 친구 영무와도 절대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알아. 나는 아마 앞으로 말할 수 있는 것보다는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 훨씬 많을 것이며 그로 인해 종종 거짓말을 해야 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게 오직 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인 양 징징대지는 말자. 세상 그 누가 자신의 깊이를 모두 말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안에 숨겨진 감정의 소용돌이를 타인에게 이해시킬 수 있겠어. 그것은 나뿐 아니라 모두가 지고 가는 천형의 무게,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한 평생 답해야 하는 삶의 묵직한 질문일 테지. 그렇다 해서 ‘사랑의 밤’이라는 양나 씨의 파티가 무의미하거나 허무한 것도 아니야. 현신과 나는 나란히 앉아 가끔씩 손을 잡으며 서로의 눈을 보고 이야기했어. 그리고 현신은 가끔씩 몸을 기울여 나를 안아주었어. 아마 우리는 길을 걸으며 손조차 마음대로 잡지 못할 테지만, 우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이러한 시간과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하니까. 존재의 의미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면 사는 게 절망적이지만은 않다는 것도 분명히 알게 될 거야. 지금의 내가 서서히 깨달아가듯.

  파티가 끝난 후 우리는 현신의 집에서 사랑을 나누었어. 나는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할 것처럼 그를 안아주고, 그는 마지막 사랑인 양 나를 안아줘. 정말로 그렇게 되는 것은 단지 우연과 시간의 결과물. 하지만 그런 것인 양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은 사랑의 결과물. 모든 현명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듯 사는 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니까, 우리는 우연에 지배당하는 게 아니라 당당히 사랑을 하고 있는 거야.

  엄마는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미성년자 한정이라고 했어. 내가 성년이 되려면 아직 2년하고도 4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남아 있으니 그동안 내가 할 일은 무언가를 정말로 간절히 원하는 것,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거야. 그래서 나는 한 사람을 사랑하듯 내 삶도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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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에게' 56회 | 비너스에게 2010-10-28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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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미’의 거실은 여전히 아늑하고 포근했어. 아이들이 아무렇게나 늘어져서 놀던 커다란 소파와 도라의 지정석(이제 도라도 이곳에 오지 않으니 다른 아이의 차지가 되었을) 흔들의자와 푸른 잎을 드리우고 있는 커다란 나무 화분들 사이에는 현신의 모습이 없었어.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층으로 올라가보았어. 마침 현신이 욕실에서 막 나오고 있었어. 그는 날 보더니 조금 놀랐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았어. 역시 어른.

 

  “여길 떠난다는 게 무슨 소리죠?”

 

  “양나 씨가 얘기하든?”

 

  “네.”

 

  “나도 여길 떠날 준비가 된 것뿐이야.”

 

  “어디로…… 어디로 가죠?”

 

  나는 바보처럼 울먹이고 있었어. 역시 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나, 나는…… 알아야 해요. 내가 갈 테니까, 반드시 당신을 만나러 달려갈 테니까.”

 

  “성훈아.”

 

  “지금은, 지금은 아니라고 당신이 말하니까, 기다릴게요. 그래서, 내가 당신을……”

 

  나는 흐느껴 울었어. 지금 그가 아니면 안 된다는 내 감정이, 왜 언제나 이렇듯 허무하게 부정당하는 거지? 어차피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도 없는 모호하고 이상한 감정에 휘둘려서는, 아프고, 울고, 쓰리고, 그러다가는 잠깐 기쁘고, 다시 아프고, 울고, 쓰리고. 내가 정말 어리고 철이 없어 이렇듯 당신을 사랑하는 거라면, 나는 절대로 어른이 되고 싶지가 않아. 언젠가의 내가 지금의 이런 나를 부끄러워한다면, 그 언젠가의 나도 또 언젠가의 나에게 비웃음 당할 것이고, 결국 나는 언제까지나 내 감정을 부끄러워하기만 한 채 진심을 꽁꽁 숨기고 살아가야 하겠지.

  현신의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어. 안타까운 듯, 조금은 어쩔 줄 몰라 하는 느낌. 그가 내 곁으로 다가와 나를 안아주었어.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달래주는 듯한 포옹이 아니라 연인이 연인을 안아주듯이. 내가 팔을 둘러 그를 끌어안자 우리의 몸이 완전히 밀착되었어. 뜨겁고 흥분되고, 어지러운 느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라지고 다시 밀려들었어. 이상도 하지. 그렇게 불안하면서도 그토록 편안해. 나는 그에게 키스했고 그도 나에게 키스했어. 나는 빨려 들 듯 그에게 달라붙었지만 그는 부드럽게 나를 떼어놓았어. 둘 다 호흡이 거칠었고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어.

 

  “성훈. 나중에 다시 얘기해.”

 

  현신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어. 나는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어. 그래서 입을 굳게 다물고, 팔짱을 낀 채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어. 나는 그 순간 결심했어. 그를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고.

  현신이 무척 피곤해 보여서 나는 그를 억지로 소파에 앉혀놓은 뒤 주방으로 들어갔어. 발이 허공에 붕 떠오르는 듯한 느낌. 냉장고를 열어 계란과 버섯, 토마토, 양파, 피망 같은 것들을 꺼내 오믈렛을 만들면서도 비현실적인 감각이 내내 나를 지배했어.

  막 오븐에서 오믈렛을 꺼내는데 양나 씨가 들어왔어. 그녀는 와인을 한 병 땄고, 현신과 나 둘 사이에 흐르는 달뜬 공기를 철저히 모르는 척했어. 우리 셋은 식탁에 둘러앉아 큼직하게 자른 오믈렛을 앞에 두고 와인 잔을 들어 하나의 출산을 축하했어. 양나 씨는 무엇보다 ‘사랑의 밤’ 파티를 열 수 있게 되어 기쁘다고 했어.

 

  “그날은 무조건 파트너 동반이야. 하다못해 개미 새끼라도 한 마리씩 달고 오라고 할 거야.”

 

  “양나 씨도 아직 싱글이잖아요?”

 

  현신이 웃으며 말했어.

 

  “날 무시하지 말라고.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날까지 파트너를 구해올 테니까.”

 

  “그래요. 기대할게요.”

 

  “소년! 아무리 입시가 바빠도, 꼭 참석할 거지?”

 

  “그럼요.”

 

  “으이구, 이쁜 것. 나도 너 같은 아들이 있음 정말 좋겠다.”

 

  양나 씨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어. 그럴 때의 그녀는 정말 쓸쓸해 보여.

 

  “운수도 오라 그래야지. 걔 요즘 연애중이라며?”

 

  “그렇긴 한데, 한 번도 본 적은 없어요.”

 

  “잘됐네. 이번 기회에 얼굴도 좀 보고 하면 좋지 않겠어?”

 

  “글쎄요. 엄마가 뭐라 그럴지는 저도 잘……”

 

  “하여간에 옛날부터 음흉하기는. 나도 네 아버지를 한 번도 못 봤어. 그래도 당시에는 제일 친한 친구였는데. 그래서, 소년. 애석하지만 네게 말해줄 게 아무것도 없단다.”

 

  “괜찮아요. 별로 알고 싶은 것도 없고.”

 

  “그래.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야. 지금 네 곁에 있는 것들이 가장 중요해.”

 

  양나 씨가 그렇게 말하자 현신은 씁쓸하게 웃었고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와인 잔을 만지작거렸어.

  양나 씨는 시간이 늦었으니 ‘북경’은 여기에 두고 버스를 타고 가라고 했어. 그러고는 현신에게 터미널까지 좀 바래다주라고 했지. 그래서 나는 현신의 자동차에 올라탔고 그와 함께 애미를 나왔어. 현신은 운전을 하면서 음악을 좀 듣겠느냐고 물었어. 나는 괜찮다고 대답했어.

 

  “양나 씨가 정말 그렇게 빨리 새로운 연인을 구할 수 있을까요?”

 

  “글쎄. 우리 같은 사람들은 만남의 기회가 그리 많지를 않아서. 선택의 폭도 좁고. 특히 양나 씨처럼 이런 외진 곳에 있다 보면 더 힘들겠지. 하지만, 누구나 그럴 거야. 정말 인연을 만나는 건 동성애자나 이성애자나 모두 힘들고 어려운 일이야. 양나 씨는 그런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현신의 자동차가 멈춘 곳은 시외버스 터미널이 아닌 그의 진료소 앞. 그는 시동을 끄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어.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가.”

 

  “에?”

 

  그는 변명하듯 덧붙였어.

 

  “많이 늦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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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에게' 55회 | 비너스에게 2010-10-27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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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밤

 

 

  비너스에게.

  양나 씨에게서 문자가 도착한 것은 7월 말의 어느 저녁.

 

  “하나 출산 임박! 달려와, 달!”

 

  그때 나는 수학문제집을 붙든 채 끙끙대고 있었어. 양나 씨에게 하나의 출산을 돕겠다고 약속을 해온 터라 나는 번개처럼 일어나 뛰쳐나갔어.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둔 ‘북경’에 올라타면서 엄마의 병원으로 전화를 걸어 양나 씨에게 간다고 보고를 했어. 나는 액셀러레이터를 전속력(이라고 해야 시속 65킬로미터)으로 당겼어. 긴 여름 해가 저무는 동안 나는 ‘애미’를 향해 열심히 달렸지만 그곳의 친숙한 포플러나무가 보이기 시작할 때쯤 하늘에는 벌써 별들이 떠오르고 있었어. 마당에 나와 있던 양나 씨는 내가 ‘북경’을 몰고 들어서자 달려왔고, 나를 따듯하게 안아주었어.

 

  “달, 늦었어. 하나는 벌써 새끼를 낳았다고.”

 

  “벌써요? 전속력으로 달려온 건데!”

 

  “그래. 현신이 지금 막 송아지를 받아냈어. 아주 건강한 암놈이야. 가서 보렴.”

 

  이곳에 오면 현신을 보게 될 줄 알고 있었으므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는데, 막상 그의 이름을 듣자 날카로운 바늘로 가슴을 찔리는 것 같았어. 양나 씨의 손에 이끌려 우리 곁으로 다가가자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어. 그는 피와 양수로 더러워진 장갑을 벗고 있었어.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분명하게 깨달았어. 그를 전혀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비너스.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어. 그에게 매정하게 차인 뒤, 나는 조금 울고 많이 아프긴 했지만 지나칠 정도로 멀쩡하게 일상을 매끼니 식사처럼 해치우며 배부르게 살아왔거든. 나는 공부도 열심히 했고, 영무와도 잘 지냈으며 엄마하고도 전혀 문제가 없었어. 웃긴 걸 보면 크게 웃고, 슬픈 걸 보면 훌쩍이기도 하고, 화가 나면 화도 내면서 그렇게 살아왔단 말이야. 하지만 7개월 만에 현신을 다시 보는 순간, 그간의 내 일상이 얼마나 공허하게 느껴지던지. 어째서 그는 존재만으로 그런 충족감을 안겨줄 수 있는 걸까?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건 현신의 표정 역시 나만큼이나 복잡해 보였다는 것. 그래서 우리의 인사는 무척 어색할 수밖에 없었어.

 

  “잘 지냈니?”

 

  “네.”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양수로 젖어 있는 송아지를 열심히 핥아주고 있는 하나를 멍하니 바라보았어. 우리 바닥에는 하나와 송아지를 위한 푹신한 건초가 깔려 있었어.

 

  “조금 있으면 일어설 수 있을 거야. 하나가 생각보다 어미노릇을 아주 잘하고 있어. 간혹 새끼를 돌보지 않는 암소들도 있거든.”

 

  “그런가요.”

 

  나도 알아. 내가 어린애처럼 굴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에게 무언가 대답을 하려고 할 때마다 목구멍에서 딱딱한 덩어리 같은 것이 치밀어올라 제대로 입을 여는 것조차 힘들었다고.

 

  “조산이라 걱정했는데, 하나의 유선이 덜 발달되었다는 것 말고는 특별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다른 소의 초유와 영양제를 가져왔으니 우선 송아지에게 먹이고, 하나에게는 비타민 제제와 에스론, 옥시토신을 처방할게요. 이걸로 유량이 증가하면 다행한 일이에요.”

 

  “고마워, 현신.”

 

  “천만에요. 송아지가 영양이 부족하지 않도록 당분간 신경을 많이 써야 해요.”

 

  “알았어. 걱정 마. 어머나!”

 

  하나가 지극정성으로 핥아준 덕인지 송아지의 몸은 그새 보송보송해졌고, 네 다리를 바들바들 떨면서도 일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어. 우리는 놀라운 자연의 신비를 감탄하는 마음으로 지켜보았어. 몇 번이나 쓰러지던 송아지가 마침내 균형을 잡으며 네 다리로 우뚝 서자 하나는 더욱 더 열심히 송아지를 핥아댔으며 우리 셋은 조용히 감탄사를 내뱉었어. 태어난 뒤 삼십 분 안에 먹이를 먹어야 했으므로 현신은 서둘러서 송아지에게 줄 젖을 준비했어. 그는 직접 송아지에게 우유를 먹이면서 양나 씨에게 요령을 설명해주었어. 다행히 송아지는 젖병을 열심히 빨아대면서 생애 첫 식사를 훌륭하게 해내고 있었지. 나는 그동안 하나의 분비물로 더러워진 건초를 걷어내고 우리 한구석에 쌓여 있는 깨끗한 건초를 다시 깔아주었어. 마당에서는 앨리스가 두 눈을 끔뻑이면서 이쪽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어. 앨리스도 자신의 새끼가 태어난 걸 아는 것 같았어.

  현신이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기 위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양나 씨가 나를 불렀어.

 

  “현신과 나는 하나의 출산 때문에 아직 저녁을 먹지 못했어. 냉장고를 적당히 뒤져서 우리를 위해 무언가 만들어줄 수 있겠니?”

 

  “오믈렛 정도라면 만들 수 있어요.”

 

  “고마워.”

 

  양나 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어.

 

  “그와 오랜만에 보지?”

 

  “네.”

 

  “기분은?”

 

  “……아프네요.”

 

  “저런.”

 

  양나 씨는 잠시 생각에 잠겼고 이윽고 말을 꺼냈어.

 

  “현신은 이곳을 곧 떠날 모양이야. 그와 한번 이야기를 해보렴.”

 

  가슴에 커다란 돌덩이가 쿵, 하고 내려앉았어. 그래. 결국.

 

  “어, 어디로……”

 

  “그에게 직접 듣는 게 좋겠구나.”

 

  양나 씨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보며 그렇게 말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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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에게' 54회 | 비너스에게 2010-10-26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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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생전 처음 와 본 도시. 바다에서 불어오는 습기 어린 바람이 느껴지고 오래된 가옥과 건물이 골목골목 늘어서 있는 고도古都. 거리를 지나치는 사람들의 검은 눈동자에는 항상 곁에 있는 검푸른 바다가 어른거리고, 탯줄로 이어받은 오랜 이야기들이 도시의 낡은 벽돌과 벽, 그리고 자갈들과 감응하는 곳. 낯선 도시에 와 본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고 해방감이 느껴지는 건 왜지? 그때 나는 예언과도 같은 확신을 얻었어. 언젠가의 나는 스쿠터를 타고 이렇게 낯선 도시들을 찾아 새롭고도 익숙한 공기냄새를 맡아볼 것이라고. 뉴욕의 마천루들을 기어오르며 줄자로 길이를 재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멋진 꿈이지 않아?

  나는 갓길에 잠깐 스쿠터를 세운 뒤 잡이 보내준 상세지도를 펼쳐서 누룽지의 집으로 가는 길을 살펴보았어. 그애가 살고 있는 곳은 바다와 가까웠어. 집으로 돌아가기 전 나는 인천의 밤바다를 볼 수 있을 거야. 나는 누룽지에게 문자를 보냈어.

 

  “너에게 가고 있어. 이십 분 내로 도착할 거야. 달.”

 

  나는 다시 ‘북경’의 시동을 걸었어. 달려라, 달려, 달!

 

  멀리서부터 누룽지의 모습이 보였어. 저녁놀이 지고 있었고, 오후부터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한 기온으로 바람이 무척이나 차가웠어. 누룽지는 그토록 싸늘한 저녁에 짧은 반바지를 입고, 민소매의 탱크 탑을 걸치고 있었어. 누룽지의 통통한 팔다리가 유난히 강조되는 패션이었지만, 적어도 팬티는 보이지 않았는걸.

  비너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정말로 누룽지에게 달려가는 동안 무척 행복했어. 나를 발견한 누룽지가 기쁨에 넘쳐 폴짝폴짝 뛰고(누룽지. 그러다 다쳐. 네 구두 굽을 좀 봐. 넌 사다리에 올라탄 거나 마찬가지야!) 마구 손을 흔들어주었어. 나는 누군가를 위해 달린다는 것이 이렇게 기쁜 일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어.

  나는 배낭에서 프리지어 꽃다발을 꺼내 들었어. 누룽지의 두 눈이 놀라움으로 더욱 커지고, 내가 헬멧을 벗고 그애에게 다가가는 동안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떨며 두 손을 모으고 있었어.

 

  “내가 왔어, 공주님.”

 

  프리지어 꽃다발을 내밀며 그렇게 말하자 누룽지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어.

 

  “고마워. 정말 고마워.”

 

  누룽지는 떨리는 손으로 꽃다발을 받아들었어. 우리는 시선이 마주치자 함께 웃음을 터뜨렸어.

 

  “행복해?”

 

  “최고로.”

 

  “안 믿겠지만, 오는 내내 나도 행복했어.”

 

  내 말에 누룽지가 고개를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어. 고마워. 정말 고마워.

  우리는 누룽지네 대문 앞에 있는 계단 위에 나란히 앉았어. 누룽지의 맨살에는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닭살이 올라 있어서 나는 가죽재킷을 벗어 그애에게 걸쳐주었어. 누룽지는 다시 고맙다고 인사했어. 우리는 그렇게 앉아 해가 지는 것을 함께 보았어. 누룽지네 마당에서 풍겨오는 이르게 핀 라일락 향기가 저무는 봄빛에 뒤섞인 정말 아름다운 저녁이었어.

 

  “평생 잊지 않을게, 달.”

 

  “엄청 기쁜 일이네, 그거.”

 

  누룽지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어. 나는 당황해서 어깨를 토닥이며 달래주었어.

 

  “어, 모처럼 공들여 한 화장이 다 번지겠다.”

 

  누룽지가 훌쩍거리면서도 웃음을 터뜨렸어.

 

  “미안해.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니야. 괜찮아. 더 울어도 되기는 하는데, 저기, 화장이 번지니까 아까워서.”

 

  “그동안 나한테는 아무도 없었어. 날 위해 와주는 사람이. 그래서……”

 

  “그래.”

 

  누룽지는 코를 킁, 하고 들이마셨어.

 

  “있지, 달. 나는 착각 같은 거 안 하니까 안심해도 돼.”

 

  “그게 무슨 소리야?”

 

  “너처럼 멋진 애가 나를 좋아해 주리라고는 절대로 생각 안 해. 그러니까 행여나 걱정할 필요 없어. 나는 절대 널 귀찮게 하거나 하지 않아. 약속할게.”

 

  나는 가슴이 아파왔어. 그애의 그런 모습이 내 모습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야.

 

  “내가 널 좋아할 수 없는 건 내가 게이이기 때문이야. 만일 네가 남자애였다면 나는 너를 정말 좋아하게 됐을 거야. 왜냐하면 누룽지. 너는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인걸.”

 

  누룽지가 너무 놀라 눈물을 흘리는 것도 잊어버린 채 나를 쳐다보고 있는 동안, 나 역시 자의로 한 첫 번째 커밍아웃에 나름 놀라고 있었어. 엉겁결이긴 했지만, 나는 뭔가 후련한 기분이었어. 누룽지는 정말이냐고 몇 번을 되물었고, 나는 그때마다 정말이라고 대답해주었어. 결국 누룽지는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어.

 

  “저기, 달. 꽃미남은 다들 게이인가봐?”

 

  나는 웃음을 터뜨렸고, 잘은 모르지만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했어. 나는 누룽지의 어깨에 팔을 둘렀어. 그애는 아까보다는 좀 더 편하게 내 팔을 붙들었고.

 

  “내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누룽지가 작은 목소리로 아쉽다는 듯 말했어.

 

  “그래. 만일 네가 남자였다면 지금 너한테 키스했을 거야.”

 

  누룽지는 미소를 지었고 자신의 진짜 이름을 알려주었어. 비너스. 그건 정말 예쁜 이름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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