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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4월, 껍데기는 가라 | 창비주간논평 2009-05-0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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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이 산하에 어김없이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1960년 4월, 독재에 맞선 젊은이들의 함성, 총탄에 뚫린 그들의 순결한 피를 기억한다. 그리고 신동엽 시인의 해묵은 싯구를 다시 떠올린다. 1967년 세상에 나온 뒤 군부독재 아래서 불온시된 이 작품은 6월항쟁 직후인 1988년 MBC <명작의 무대> 씨리즈에서  처음 방송했다. 21년 만이었다. 그후 다시 21년이 흐른 2009년 봄의 방송계를 보면 이 시는 놀라울 정도의 ‘현재성’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방송계를 억누르는 껍데기 군상

4월 15일 저녁 <PD수첩> 김보슬 PD가 검찰에 연행됐다. 결혼을 나흘 앞둔 시점이었다. 김보슬 PD의 죄는? “단 1%라도 광우병 위험이 있으면 이를 알리는 게 언론의 의무”라는 소박한 사명감뿐이었다. 국민건강을 지키고 검역주권을 세우라고 촉구한 것뿐이었다. 송일준, 조능희, 이춘근 PD 모두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고, 다른 어느 PD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사소한 실수를 빌미로 정당한 언론행위를 수사하고 PD를 연행하고 압수수색을 시도하는 검찰, 그들이야말로 껍데기다.

껍데기는 또 있다. 다음날 조선일보에는 “김보슬 PD, 결혼 앞두고 의도적으로 자진 체포?”라는 제목의 야릇한 기사가 실렸다. '김 PD가 자신의 체포 장면을 캠코더에 담아 언론탄압 이미지를 알리려 한 것 아니냐’는 검찰 일부의 시각을 확대해서 쓴 것. 제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체포될 위험을 무릅쓰고 결혼 준비를 위해 부득이 나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옳지 않을까. 이 신문은 노무현정권 당시 미국 쇠고기 광우병 위험을 앞장서서 보도하다가 이명박정권 들어서 180도 논조를 바꾸었다. 부당한 언론 탄압을 비판하기는커녕 사안마다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며 강경 대응을 주문하는 이 신문도 껍데기에 불과하다.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이 공직자 개인의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외국의 사례도, 촬영 원본에 대한 압수수색이 취재원 보호에 위배된다는 설득도, 검찰 수사에 응할 경우 정부를 비판하는 보도가 위축되고 민주주의가 후퇴하리라는 지적도 그들에게는 ‘소귀에 경 읽기’였다. <PD수첩>의 광우병 보도는 지극히 상식적이었고, 검찰 수사를 거부한 것 또한 당연했다. 상식도 염치도 인륜도 없이 권력의 주구를 자임한 검찰, 그리고 앞장서서 강경 수사를 주문한 일부 신문, 그들은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껍데기다. 

KBS와 YTN의 경우

KBS 장악과정을 일일이 돌이켜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장에 대한 대통령의 임명권을 ‘임면권’이라고 우겨서 정연주 사장을 강제 해임한 주역들, 이 껍데기의 이름은 방송통신위원장 최시중과 그에 빌붙은 기회주의 군상들이다. 이들은 특별감사는 물론, 국정원이 참여한 ‘KBS 대책회의’까지 가동했다. KBS 이사진을 친여 인사 위주로 물갈이한 과정을 보면 이들의 파렴치를 엿볼 수 있다. 예컨대 이들은 당시 KBS 이사 신태섭이 ‘교수직에 소홀하다’는 이유로 동의대에 압력을 넣어 교수직을 박탈했다. 이어서 ‘교수직이 없다’는 이유로 KBS 이사직마저 박탈했다. 놀부 뺨치는 행태다. 이들도 좀 켕기기는 했는지 8월, 올림픽 열기를 틈타 ‘국민 몰래’ 정연주 사장을 해임했다.

정권의 낙점을 받은 이병순은 ‘사원행동’을 주도한 인물들을 중징계하고, 적극 가담한 기자와 PD들을 한직으로 보내고, 눈엣가시였던 프로그램들을 폐지하고, 주요 진행자들을 교체하고,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노조는 어정쩡한 스탠스로 이렇다 할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사원행동’은 열심히 노력했지만 임의단체라는 한계 때문에 큰 힘을 쓰지 못했다. 관제사장이 현실적으로 KBS를 평정한 셈이다. 켜켜이 쌓인 껍데기의 무게 아래 KBS 구성원들이 가야 할 길은 멀고도 험하다.
        
YTN도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 작년 7월 17일 구본홍이 날치기 주총으로 사장에 임명된 뒤 만 9개월이다. 당선자의 특보였던 사람이 언론기관의 수장이 될 경우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했고, YTN 기자들의 ‘낙하산 거부’는 그래서 당연한 것이었다. 평범한 언론인들의 최소한의 양심과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구본홍은 6명 해고, 33명 중징계 등 초강수로 맞섰다. 올 3월에는 노종면 위원장을 구속까지 했다. 구본홍은 해고자들을 인질 삼아 사장 자리를 유지하는 데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악취를 풍기는 껍데기들

KBS와 YTN 구성원들이 패배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승리’나 ‘패배’는 이들의 기준이 아닐 것이다. 옳은 방송을 위한 노력이 모든 뉴스와 프로그램을 통해 배어나도록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극한투쟁을 잠시 유보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껍데기들은 ‘승리’했다는 착각에 취해 있다.

그들의 가장 큰 해악은 ‘옳든 그르든 무조건 우기면 된다’는 시정잡배의 논리, ‘힘으로 밀어붙이면 안되는 게 없다’는 정글의 논리를 퍼뜨리고 있다는 점이다. YTN과 KBS의 경우, 껍데기는 내부에도 자리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외부에서 날아온 껍데기에 영합하여 후배들을 탄압하는 데 앞장선 일부 선배들, 이들 또한 썩은 냄새를 풍기는 껍데기의 오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MBC, 일단 갈등은 봉합했지만

얼마 전 일부 진행자 교체 문제와 봄 개편 공영성 훼손 논란으로 인한 MBC 내부 갈등은 심각한 우려를 낳았다.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의 진행자 김미화의 교체는 라디오 PD들의 제작거부 끝에 백지화됐지만 MBC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뉴스데스크> 신경민 앵커는 결국 교체됐고, 젊은 기자들은 이에 항의하여 일주일이나 제작거부를 벌였다. 엄기영 사장은 “뉴스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 앵커를 교체한다”고 밝혔지만 대다수 사원들은 “권력 눈치보기 아니냐”고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봄 개편안도 논란을 낳았다. <W> <불만제로> 등 주요 교양 프로그램들을 변방으로 밀어내는 개편안에 교양 PD들이 분개한 것. 불경기와 광고 격감으로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는 건 충분히 공감할 수 있지만, 일부 교양 프로그램을 ‘고비용 저효율’로 낙인찍어 홀대하는 것은 MBC의 공영성을 스스로 훼손하여 재벌과 신문의 방송 장악을 불러들이는 꼴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생존을 위해 권력에 유화 제스처를 보내고 품위와 원칙을 훼손한다면 재벌, 조중동 방송을 막아내기는커녕 스스로 ‘민영화’를 앞당기지 않겠느냐는 우려였다.
.       
향그러운 흙가슴, 알맹이는 살아 있다

언론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족벌 신문이 권력화되고 KBS와 YTN이 낙하산 사장에게 일시 장악된 지금, MBC마저 무너지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질식사할지도 모른다. 4월에 MBC를 뒤흔든 내부 갈등은 보도국장 사퇴로 일단 봉합됐다. MBC의 대주주 방송문화진흥회는 외압에 흔들린 사장과 부사장의 해임안을 제기했지만 ‘회초리를 들었다’는 효과를 거두었으므로 이내 취하했다. 앞으로 닥칠 시련에서 방송의 독립성을 꿋꿋이 지킬 것을 주문한 것. PD와 기자들은 방송을 통해 공영방송의 위상을 지킬 것을 거듭 다짐했다.

그러나 탄압은 계속되고 있다. <PD수첩>의 27일 제작 복귀를 선언하고 퇴근한 송일준, 조능희 PD와 김은희, 이연희 작가가 체포됐다. 프리랜써 작가를  체포하여 수사하는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다. <PD수첩> 수사의 부당성을 인정하고 사퇴한 임수빈 검사의 말처럼, 이번 수사는 “헌법에 보장된 언론 자유를 검찰 권력이 얼마나 침해할 수 있느냐”의 문제로, 프리랜써 작가들마저 ‘노트북을 버리고 거리로 나서게 하는’ 황당한 공권력 남용이다.

몰상식, 파렴치가 판치는 이 씨스템이 돌아간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누가 보더라도 부패한 인물이지만 단지 ‘최고 권력자’이기 때문에 그 주위에 빌붙는 인간 군상이 많다는 게 새삼 기가 막힌다. 지금, 껍데기의 무게를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희망이 아주 없지는 않다. 지금은 숨죽이고 있지만 알맹이의 숨결, 향그러운 흙가슴의 힘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4월 29일은 <PD수첩> 광우병 편이 방송된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다. 그 1년은 알맹이와 껍데기가, 상식과 몰상식이 힘을 겨룬 나날이었다. 4·19혁명은 껍데기를 물리친 알맹이의 승리였다. 껍데기가 아무리 두꺼워도 언론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질식시킬 수는 법이다. 민주주의의 초석을 지키기 위해 방송인들이 제대로 노력할 때, 국민이 이를 외면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PD수첩> 광우병 보도 1년을 맞아

이채훈 / MBC 시사교양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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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국민위, 힘들지만 전진하고 있다 | 창비주간논평 2009-04-11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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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국민위, 힘들지만 전진하고 있다  

양문석 /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이하 국민위)는 고투의 산물이다. 지난해 12월부터, 청와대와 한나라당이 도발한 '입법전쟁'을 두차례나 치르고 난 결과로서 이끌어낸 사회적 합의기구이다. 그런데 이렇게 만들어진 국민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다. 그중 몇가지 짚어봐야 할 대목이 있다.

먼저, 일부 언론에서 말하는 '정당 대리전' 운운이다. 한나라당 추천 위원들에 대해서는 정당 대리전의 용병인지 아닌지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민주당과 창조한국당, 즉 야당 추천 위원들에 대해 정당의 용병쯤으로 매도하는 언론의 '제목뽑기'는 용납할 수 없다. 정당 대리전, 야당의 용병이라는 개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신문법, 방송법 등 이른바 '언론악법'에서 야당의 당리당략을 일방적으로 관철시키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과연 그런가?

'MBC와 네티즌에 정치보복' '조중동TV 재벌방송'이라는 성격을 분명히하고 출현한 한나라당의 언론관련법안을 국민의 70%가 반대하는 상황에서 야당이 추천한 위원들을 용병으로 매도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언론악법을 저지하는 것이 민주당과 창조한국당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 한국 민주주의 전반에 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일부 언론사들이 뽑은 제목이 '정당 대리전'이고 그 내용이 '야당의 용병'이라면, 이는 심각한 왜곡이다.    

미디어국민위, 기대할 것 없다?

또 짚어봐야 할 문제는 '기대할 것 없다'는 지레짐작을 '사실'처럼 말하며 전문가 행세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기대할 것 없다는 이야기는 최소한 '운동의 법칙'에 대해서 아주 무지한 발언이다. 운동이 무엇인가? 끊임없이 움직이며 고정된 사물, 고정된 관념, 고정된 입장을 바꾸어나가는 것이다. 적어도 국민위 위원들은 바로 운동의 과정에 들어서 있다.

지난 한달간 국민위는 회의를 공개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했다. 사회적 합의기구의 회의 운영방식은 공개적이고 투명해야 한다는 것이 세상의 상식이다. 하지만 일부 몰상식한 위원들의 반대에 부딪혀 국민위 전체회의를 세차례나 진행한 끝에 겨우 '공개원칙'에 합의했다. 보기에 따라서 '아주 하찮은 합의' '100일 중 20여일을 소모하면서 해낸 보잘것없는 합의'쯤으로 비판할 수 있겠으나, 이는 대단한 진전이라는 평가도 있다.

몰상식에 대응하여 최초의 상식적인 합의를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애초에 한나라당의 법안 자체가 몰상식 비합리의 산물이었고, 이들의 추천을 받은 일부 위원들은 운영원칙마저 '비공개 밀실회의'를 주장함으로써 '시간 끌기와 국민위 무력화'를 시도했다. 이에 대응해 "국민위 운영과 관련하여 비공개·비조사·비협조로 일관하고 있는 여당 쪽의 태도를 보고 있노라면 정말 성의도 없고, 예의도 없고, 정의롭지도 않다"고 개탄한 야당 쪽 공동위원장 강상현 교수의 신문 기고문을 두고 한나라당 추천 일부 위원들은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겠다느니 하면서 또 열흘 이상의 시간을 소모했던 것이다.

출발은 미미하다. 하지만 몰상식을 상식으로, 비합리를 합리로 하나씩 바꾸어가는 이 운동은 느리지만 뚜벅뚜벅 나아가고 있다. 국민위의 합의 결과 하나하나가 지난한 논의의 결과물로 나타나고 있다. 법안의 쟁점에 대해서도 차례로 기조발제가 이뤄지고 있고, 이에 대해서 최소한의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국민위에 여전히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저래서 도대체 어떤 결과물을 도출한단 말인가' 하고 불만을 터뜨릴 수도 있다. 100일이라는 한정된 시간에서 한달씩 걸려 겨우 회의공개 원칙에 합의한 것에 무슨 의미 부여냐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애초 교집합 자체가 거의 없었던 회의체였다. 그런데 서서히 그것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은 향후 아주 빠른 속도로 합의점을 도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기도 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20인위원회에서 여당 추천 위원 중 그나마 몇명의 '합리적인 인사'가 포진해 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며, 몰상식하고 비합리적인 인사도 회의가 공개되면서 '어거지 논쟁'을 피해가려고 할 것이라는 점도 중시해야 한다는 의미다.

야당 추천 위원이 먼저 판을 깬다?

마지막으로 짚어봐야 할 점은 '과연 끝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다. 민주당 등 야당 추천위원들이 판을 먼저 깨고 나올 것이라는 예측이 많다. 하지만 이는 한나라당이 원하는 바이기도 하다. 언론악법을 통과시키려고 하는 쪽이 쓸 수 있는 두가지 전술이 있다. 그중 하나가 시간을 끌어 국민위를 무력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가 야당 추천 위원들을 자극해서 판을 깨는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야당 추천 위원 9명은 '명분 없는 판 깨기'를 할 가능성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미디어국민위'는 앞으로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의 전망을 내놓아야 할 의무가 있다. 단순히 한나라당이 제출한 신문법, 방송법 등 언론관련 법안에 논의를 구속시킬 이유가 없다. 한나라당 법안에 대한 '찬반논쟁'이라는 프레임 속에 갇혀서는 안된다. 그래서 충분한 논의와 풍성한 자료, 의미있는 합의를 도출해야만 한다. 야당 추천 위원들이 단순히 자기 당의 논리에 따라 꼭두각시처럼 움직일 가능성은 낮으며, 적어도 지금까지는 당리당략에 따른  요구사항을 제출한 적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위는 끝까지 갈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자극적인 돌발변수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겠지만 야당 추천 위원들은 충분히 대비하고 있을 것이다. 또한 비록 100일이라는 한시성이 있으나, 국민위의 논의에 따라 연장될 수도 있다. 국민위 활동에 대한 국민적 평가에 따라 전혀 다른 양상이 빚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국민적 관심과 감시가 필요한 미디어국민위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중요한 것은 4주간의 시간을 소모하면서까지 '회의공개 원칙'을 합의했다는 점이다. 앞으로 회의는 공개됨으로써, 최소한의 상식과 합리에 따른 논의가 가능해졌다. 판을 깨기 위해 상대방을 자극하고, 시간을 끌기 위해 '어거지' 논리를 들이대는 식의 행위는 곧바로 국민에게 전달될 것이고, 그러면 국민은 갖가지 형태로 이에 대한 엄중 경고를 보낼 것이다. 그 경고는 여론조사 결과로 나타날 것이고, 인터넷의 댓글로 표현될 것이며, 거리의 촛불로 전달될 것이다.

이런 점을 볼 때 국민위가 조기 침몰한다든지, 성과 없이 문을 닫는다든지, 정당의 대리전에 동원된 용병 행세에 그칠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시작은 미미하나 그 끝은 창대해야 할 미디어국민위는 뚜벅뚜벅 앞으로 가고 있다. 그리고 국민은 이 '국민위'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집중적인 관심과 의견을 전달해야 한다. 이메일로 전화로 댓글로 공개되는 회의 하나하나에 입장을 개진함으로써 의미있는 활동을 강제해야 한다. 운동은 변화다. 그러는 과정에서 일부의 몰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인 위원들도 변할 것이고, 변하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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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버넌스 개편과 시민사회 역량강화, 대립하지 않는다 | 창비주간논평 2009-04-03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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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버넌스 개편과 시민사회 역량강화, 대립하지 않는다  
지난호 창비주간논평 '거버넌스론' 비판을 읽고

이남주 /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 정치학
 
 
백낙청 교수는 지난해 말 발표한 <거버넌스에 관하여>(창비주간논평 2008.12.30)에서 "(현재의 난국을 타개하는) 유일한 해답은 남은 4년 동안 대통령으로서 꼭 해야 하는 일과 잘할 수 있는 일을 대통령에게 남겨주면서 나머지는 내각과 입법부, 사법부, 언론, 시민사회 등의 몫으로 배분하는 정교한 사회적 장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나라의 거버넌스 체계를 다시 짜는 일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2월 18일 관훈토론회 강연에서 새로운 거버넌스의 필요성과 방안에 대해 다시 상세하게 설명했다.
 
권력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제안에 대해 지지와 반대가 엇갈리는 것은 어느정도 예견된 일이다. 이 제안을 출범한 지 얼마 안된 정부를 흔드는 행위로 받아들이는 보수세력의 입장은 차치하더라도 진보개혁세력에서도 뭔가 흔쾌하지 않은 느낌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지난호 ≪창비주간논평≫에 발표된 정상호 교수의 <대안은 거버넌스가 아니라 생활정치다>라는 글은 진보개혁세력의 거버넌스론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나름대로 일목요연하게 제시했다. 이 글에서 현재 진보개혁세력이 처한 상황에 대한 진단과 향후 방향에 관한 제안에는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 적지 않지만, 거버넌스론에 대한 비판은 이 제안이 제출된 배경과 의미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면이 있어 몇가지 반론을 제기하고자 한다.    
 
위기 극복을 위한 제안, 새로운 거버넌스
 
우선 거버넌스 개편론에 대한 비판적 입장은 이명박정부의 용산참사에 대한 대응 등을 볼 때 "MB정부에 시민사회와의 소통과 협력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거의 불가능한 기대"라는 판단에서 시작된다. 진보개혁진영에서는 이명박정부와 새로운 거버넌스를 만들자는 주장에 거부감을 갖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거버넌스론은 현정부에 대한 어떤 기대에서 제기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국이 특정 정치세력의 힘만으로는 문제해결이 어려운 방향으로 전개될 경우 진보개혁세력이 이에 어떤 대안을 내놓을 것인가에 대한 답으로 제시된 것이다.
 
경제위기는 진행형인 상황이고 남북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는데, 이런 문제들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할 경우 국가와 민족의 원기가 크게 훼손당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역량을 결집시키는 것이 필요하며, 그 노력에 정부, 그것도 임기가 4년 가까이 남은 정부를 배제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기 때문에 정부의 참여를 전제로 하는 새로운 거버넌스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다. 만약 이명박정부가 이 제안에 진지한 태도로 대응한다면 환영할 일이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진보개혁세력이 국민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진정성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더 중요한 비판이자 쟁점은 "거버넌스를 논하기 앞서 연대를 통한 시민사회 내부의 역량강화와 뼈를 깎는 자기혁신이 선행되는 것이 바람직한 순서"라는 주장이다. 진보개혁세력, 시민사회의 역량이 강화되지 않고서는 거버넌스가 실질적 의미를 갖기 어렵고 실현될 가능성도 낮다는 점은 올바른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진보개혁세력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과 새로운 거버넌스에 대한 논의가 상호충돌하는 것인지 아니면 보완적인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검토 없이 거버넌스 논의를 기각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거버넌스는 생활정치의 발전을 촉진하려는 실천
 
정상호 교수는 일자리(비정규직입법), 교육(3불정책), 개방(한미FTA), 경제(수출주도 재벌경제의 극복) 등과 관련한 합의가 생활정치를 발전시키고 진보개혁세력의 힘을 강화하는 데 관건이 된다고 주장한다. 생활정치의 중요성은 동의할 수 있는 주장이지만 어떻게 생활정치가 발전될 수 있는가는 더 논의가 필요하다. 특히 그동안 이 의제들에 대한 논의가 없었던 게 아닌데, 그간의 논의가 국민들의 지지와 관심을 받는 데 왜 실패했는지 더 진지한 검토가 필요하다. 여기에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자신의 정파적 이익을 토대로 앞의 의제들에 접근한 탓에 그 논의가 생산적인 결과를 낳기보다 분열의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각 세력이 단순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답'을 내놓는 방식으로는 논의를 오래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그 논의의 지평이 변화할 때, 정책연합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 즉 정책적 논의가 진보개혁진영의 자족적 논의에 그쳐서는 안되며, 국민적 요구를 반영하고 국민적 역량을 결집할 수 있는 논의를 바탕으로 정책협약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새로운 거버넌스에 대한 논의는 그러한 논의의 지평을 제시하는 것이다. 지난 시기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 국민들이 진보적 의제에 많은 기대를 함에도 그 의제를 실천하려 노력한다는 진보개혁세력에 실망하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논지에서 보궐선거 등과 관련한 정세적 개입의 중요성을 강조하나 생활정치에 대한 논의가 정세변화에 대한 대응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가 불분명하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하고 싶다. 일자리 창출 등 장기적인 생활정치의 의제는 매우 중요하지만 최근의 용산사태, 언론탄압 등 급박하게 전개되는 정치현안에 대해 소홀할 경우 생활정치라는 구호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리고 경제상황이나 남북관계가 더 나쁜 방향으로 발전될 경우에는 생활정치에 대한 주장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은 더욱 커질 가능성이 높다. 현재 위험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정국의 흐름을 차단하기 위한 적극적 실천이 필요하고, 그 중요성이 앞으로 더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거버넌스론은 상황을 대응하는 데 가장 현실적인 방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거버넌스에 대한 논의를 생활정치와 대립하는 것으로 간주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이처럼 진보개혁세력이 다양한 수준에서 실천을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내적인 정비작업을 국민적 지지와 신뢰 회복으로 이어지게 하는 데 더 필요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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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은 거버넌스가 아니라 생활정치다 | 창비주간논평 2009-03-25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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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은 거버넌스가 아니라 생활정치다  

정상호 / 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연구교수, 정치학

2009년 한국사회의 최대 화두는 위기이다. 금년에 발표된 많은 사회경제 지표들은 한국경제는 물론이고 세계경제조차 정부의 공식통계가 작성된 이래 최악의 상황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위기의 객관적 요소라면, 실수를 인정하는 데 옹색한 정부의 일방적 독주와 야당을 비롯한 대안세력의 지리멸렬함은 위기의 주체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4.29 재보선이 다가오면서 현재의 위기 타개를 위한 다양한 처방들이 제시되고 있다. 야당에서의 개혁공천, 선거연합이나 집권여당의 거국내각 등이 그러하다. 그렇지만 가장 주목할 논의는 백낙청 교수가 제시한 거버넌스론('나라 다스리기'론)이다. 우선 백교수의 거버넌스론은 두가지 이유로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하나는 모든 것을 MB 탓으로 돌리며 정부 비판과 질책에만 몰두해온 야당과 시민사회의 관성을 질타하며 좀더 창의적인 역할과 적극적인 책임감을 촉구했다는 것이다. 또다른 하나는 큰 틀의 정치비전으로서 새로운 거버넌스 체계, 즉 합리적인 보수와 책임있는 진보가 주도하고 시민사회가 적극 동참하는 중도 거국체제를 제시했다는 점이다.

백낙청 교수의 제안에는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통일에 관해 탁월한 이론가이자 실천가로 헌신해온 원로지식인의 지혜와 고민이 깊게 담겨 있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정치비전 치고는 다소 모호하거나 정치학 연구자로서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거버넌스의 전제: 성찰과 혁신

거버넌스 개념의 본질적 요소는 정부이든 지자체이든 시민사회와의 수평적 협력이다. MB정부에 이르러 사라진 정치용어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시민사회와 거버넌스를 들 수 있다. 청와대가 나서서 살인사건을 여론조작에 악용하고, 용산사태를 도시테러집단의 자폭행위로 규정하는 MB정부에 시민사회와의 소통과 협력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거의 불가능한 기대이다.

백교수의 거버넌스 주장이 다소 생뚱맞게 들리는 또다른 이유는 MB정부가 아니라 우리 시민사회 자체의 취약함에 있다. 세계적 학자 펑과 라이트(A. Fung and E. O. Wright)가 그들의 저서(Deepening Democracy)에서 잘 간파했듯이 시민사회의 견제력과 조직화가 미약한 사회에서 자칫 거버넌스는 현실의 문제를 은폐하거나 정권의 치적을 과장하는 겉치레나 '분식회계'로 전락할 수 있다. 거버넌스를 논하기 앞서 연대를 통한 시민사회 내부의 역량강화와 뼈를 깎는 자기혁신이 선행되는 것이 바람직한 순서이다.

타자와의 적대보다 내부의 연대가 우선이다

저명한 정치학자 셰보르스키(A. Przeworski)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자본가와의 계급투쟁(between) 이전에 노동자계급의 형성(among)에 관한 투쟁이다. 우리 현실에 적용하자면, 오늘 한국의 진보개혁세력은 단기적으로는 MB정부에 대항하고 장기적으로는 집권할 수 있는 공동의 대안과 정책, 통일된 전략과 리더십을 갖고 있지 못하다.

4.29 재보선과 내년 지방선거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개혁공천과 선거연합은 의석확보라는 단기적 수지타산이 아니라 대안세력이 하나의 '역사적 블록'을 형성하는 과정, 즉 '과정으로서의 정치'를 실천하는 것이라는 점에 그 의미를 두어야 한다. 국민이 눈여겨보는 것 또한 바로 이 지점이다. 많은 유권자가 말 많고 잘난 진보개혁진영이 대선과 총선 패배 이후 얼마나 뼈저리게 반성했고 진짜로 변화하고 있는지를 지켜보고 있다. 시민사회와 야당이 사회적 현안에 대한 범국민적 합의를 주도하자는 백교수의 주장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도 이는 시급한 과제이다.

연대와 혁신의 생활정치

현재의 시점에서 안으로부터의 혁신과 연대를 가능하게 할 비전과 화두는 생활정치이다. 이를 실천하려면 진보개혁진영은 우선 민주화 이후 분열의 근인(根因)으로 작용하고 있는 일자리(비정규직입법), 교육(3불정책), 개방(한미FTA), 경제(수출주도 재벌경제의 극복) 등 4대현안에 대해 공동코뮤니케를 작성해야 한다. 그 형태는 진보개혁진영의 다양한 싱크탱크와 지식인들이 폭넓게 참여해 초안을 작성하고 정치세력들이 합의하는 정책협약 방식이 바람직하다.

다음으로, 지방선거가 있는 2010년을 생활정치의 원년으로 선언하고 지금부터 하나하나 준비해야 한다. 정당공천제, 지역정당의 허용, 지구당제 부활, 중대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의 확대, 지역별 후보연합 등 진보개혁진영이 함께 준비하고 공동으로 대응해야 할 사안들은 차고 넘친다. 특히 386세대와 시민운동이 지역에서 새롭게 도전하는 '풀뿌리로의 하방운동'이 절실하다. 하방운동의 조직화 과정은 수도권에서 명망가 중심으로 활동했던 386 출신 정치인들과 시민운동의 거품을 빼고 정당의 토대인 지역을 강화하고 신진정치인을 충원하는 긍정적 효과를 낳을 것이다.

4.29 재보선은 이러한 제안들이 실험될 수 있는 호재다. 울산에서 두 진보정당과 민주당이 큰 틀의 선거연합을 마련하고 주민참여 경선제로써 단일후보를 만들어내는 정치력을 발휘한다면, 승리는 물론이고 신뢰회복의 기반이 마련될 것이다. 또한 정동영 전 장관의 갑작스런 복귀는 무쟁점, 무관심의 보궐선거 지형을 크게 전환시키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민주당으로서는 전주와 부평에서 이견 없는 개혁공천을 단행해 성과를 거둔다면 향후 정국 주도권을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 진보개혁진영은 정치담론 투쟁에서 계속 밀려왔다. 그 결과 공동체, 자유주의, 선진화, 녹색성장 등 나름대로 의미있는 개념들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 채 보수의 수사로 전락하고 있다. 연대와 혁신의 생활정치의 비전과 전략은 이러한 보수화 추세에 반전과 돌파를 가져올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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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득권 정부, 희망은 있는가 | 창비주간논평 2009-03-11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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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득권 정부, 희망은 있는가  

김영명 /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나는 이명박정부를 '기득권 정부'로 규정한다. 추진하는 주요 정책들이 모두 기득권 강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정부가 스스로 기득권 정부임을 내세울 리는 없다. 그들은 한국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 필요한 일을 할 뿐이라고 강변한다. 경쟁력 강화가 국가의 최대 목표가 되는 것도 논쟁거리이고 '경제 살리기'가 국가경쟁력 강화의 핵심인가 하는 문제도 논란거리이지만, 일단 그런 논의는 제쳐두자. 이런 가치관에 관한 문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이 정부가 기득권 정부라는 점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하여 자유시장과 경쟁을 핵심원리로 내세운다. 더 쉽게 말해, 한마디로 '자유경쟁'이다. 정부규제를 줄이고 시장에서 각 행위자들이 자유롭게 경쟁해야 그 행위자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더 나은 결과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열등한 행위자는 제거하고 우등한 행위자를 강화시켜야 사회 전체의 경쟁력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자유롭게 경쟁하면 힘센 자가 이기고 약한 자가 지게 되어 있다. 약한 자가 죽고 힘센 자들이 남아야 바깥의 다른 힘센 자와 대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장의 자유경쟁을 강화하면 필연코 강자가 득세하고 약자는 더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고등학교 교과서만 열심히 보면 알 수 있는 간단한 원리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약자들의 아우성이 일어나니 대놓고 힘센 자가 득세해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자유시장이니 큰 정부의 폐해니 선택과 집중이니 경쟁이니 하는 이데올로기를 내세우게 되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경제규모가 빨리 커져서 약자들도 그 혜택을 볼 수 있으면 사회양극화의 폐해를 참을 수도 있지만, 경제가 어려워지면 약자들이 생사의 기로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현실이다.

기득권 강화정책의 결정판, 교육정책

이명박정부는 취임하기도 전에 인수위원회에서 영어 몰입교육이니 뭐니 해서 혼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정말로 한국인의 영어실력이 형편없는 게 국가적인 문제이고 초중등학교에서 몰입교육을 하면 영어실력 향상효과가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이 가져올 사교육 광풍 같은 것은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그들 눈에는 영어 때문에 나라를 떠나는 어린 학생들과 혼자 남는 '기러기 아빠'들의 애환이 더 가슴 아팠고, 영어로 나가는 나랏돈이 무척 아까웠을 것이다. 가상한 애국심이기는 하다. 하지만 사교육 경쟁이 치열해야 기득권을 더 강화할 수 있는 그들의 처지가 알게 모르게 이런 애국심에 스며들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영어교육뿐 아니라 정부의 교육정책은 국제중 설립, 자사고 100개 설립, 대입전형 자율화, 초중고생 일제평가 등 모조리 사교육을 부추기는 것들이다. 한마디로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들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공교육 정상화 정책은 결국 '사교육 진흥책'일 뿐이다. 그 결과 사교육비, 특히 영어 사교육비는 지난 1년간 11.8%나 상승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대통령은 틈만 나면 사교육비 삭감이 자신의 목표라고 공언하고 사교육 없이도 일류대학에 갈 수 있도록 만들겠다고 큰소리를 친다. 정말 몰라서 그러는 것인지 알고도 그러는 것인지 헷갈리지만, 나는 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는 정말 뭘 잘 모르는 것이다. 개인적 성향이나 주변 인사들이나 사적인 이익이나 모두 기득권 강화 쪽이지만, 그래도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사회문제들을 개선해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교육을 줄여야 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는지는 알 능력이 없고, 그저 옆에서 또 밑에서 조언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다. 그런데 측근들은 대통령보다 더 사회적 책무의식이 부족하고 기득권 이익을 지키려는 세력들이라 그럴듯한 세계화논리, 경쟁논리, 시장논리를 대통령에게 주입하고 국민에게 호도하면서 기득권 강화 시장주의 정책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재벌이 원하는 대로, 기득권층이 원하는 대로

교육정책이 가장 분명하게 기득권 강화 방향을 띠고는 있지만, 다른 정책들이라고 해서 별다를 것은 없다. 실제로 민영화, 금산분리 완화, 법인세 인하, 재벌의 출자총액제한 완화 등의 경제정책들은 모두 재벌들이 원하는 것들이다. 그들에게 돈과 힘을 더더욱 많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부동산값이 겨우 잡히는 듯하자 정부는 건설경기를 진작하겠다며 여러 규제들을 풀고 있다. 다시 부동산값이 꿈틀거린다. 여기서 이익 보는 사람이 집 없는 서민일 리가 없다. 누가 이익 볼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이 정부는 강남 사람들의 아우성에 못 이겨 (아니면 앞장서서?) 종부세도 많이 깎아주었다.

요사이 국회에서 벌어지는 싸움판의 원인이 된 미디어통합법도 돈 많고 힘센 재벌언론사들에 유리하게 되어 있다. 시장규제가 풀리면 거대 언론재벌들이 활개치게 된다. 정부여당은 방송을 민영화하고 그것을 신문재벌이 소유할 수 있게 만들어야 세계 미디어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언론이 언론 같지 않게 될 터인데 세계 미디어시장에서 돈 벌기로 경쟁해서 무엇을 얻겠다는 것인가? 언론재벌의 거대화다. 한나라당이 이 법에 매달리고 민주당이 한사코 반대하는 것은 모두 자기 이익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정부여당은 자기에게 비판적인 일부 방송사들의 힘을 빼기 위해 보수적인 언론재벌과 거대기업들을 방송에 진출시켜 자신에게 유리한 환경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공정한 언론'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더 시급히 고쳐야 할 것은 방송시장의 독과점이 아니라 오히려 신문시장의 독과점일 텐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는 것을 보면 이 정부는 역시 기득권 정부임에 틀림없다.

정부는 또 수도권 규제를 완화해서 수도권으로의 집중을 가속화하겠다고 한다. 세계에서 수도권 집중도가 가장 높은 대한민국! 그 집중도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이제 심각한 국가문제가 되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수도권 규제완화를 추진한다. 이 또한 명백한 기득권 강화책이다. 이에 대해 지방 사람들이 떠들어봐야 힘 빠진 하소연밖에 되지 않는다. 수도권 사람들 가운데도 자기 지역의 과밀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많지만, 땅값·아파트값이 오른다니 대놓고 반대하지는 않는다. 수도권에 거주하는 지식인들 가운데 지방균형발전을 공개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을 찾기 어렵다. 도덕적인 양 행세하는 각종 시민단체들이나 지식인집단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들 또한 자기 이익을 엄수하려는 똑같은 사람들일 뿐인가. 수도권의 힘은 점점 거대해져서, 이제 지방균형발전이란 말은 권력투쟁에서 졌을 뿐 아니라 그나마 옛날에 가지던 도덕적 힘마저 잃었다. 수도권으로 집중해야 국가경쟁력이 커진단다. 그 말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래야 수도권 기득권이 더 확실히 커진다는 점이다.

비기득권·비주류 세력이 집권한 동안 역사해석이 참 빨개졌나 보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 뒤 교과부는 서둘러 근현대사 교과서를 수정하라고 엄포를 놓았고 실현에 성공했다. 기득권층의 과거 친일행각과 독재행각을 들추어내면 안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을 긍정적으로 보자는 취지다. 좋은 취지다. 그러나 친일과 사대, 독재행각까지 정당화할 수는 없다. 이 모두 기득권층의 이익에 봉사하기 때문에 정부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섰다.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과거 정부가 이룬 남북합의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국제사회에서 상대방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다. 더구나 남북화해와 통일여건 조성에 역행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는 기득권층의 정서적인 북한 혐오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그들의 정서적인 만족 말고 북한과 대결해서 우리가 얻는 것이 무엇일까? 아무것도 없다. 잃은 것만 많다. 하지만 기득권층에게는 그런 정서적인 만족이 더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이명박정부 1년, 인수위 시절과 얼마나 달라졌나

이렇듯이, 이명박정부의 주요 정책들은 거의 모두 기득권 강화책이다. 일자리 나누기라든가 빈곤층 돕기라든가 하는 것들을 들먹이면서 내 주장을 반박하려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일시적이거나 시혜적인 정책들은 그야말로 거대한 몸통에 가냘프게 붙어 칼바람에 휘날리는 곁가지에 불과하다. 구조적으로 기득권 강화정책을 펼치면서 거기서 희생되는 일부 사람들을 일시적으로 구제하겠다는 조치들은, 물론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정말 미봉책에 불과하다.

인수위 시절 정말 불쌍할 정도로 아마추어적이고 미숙하고 그러면서 분명하게 기득권 정부임을 드러냈던 이 정부가 이제는 조금 더 세련되고 덜 기득권 옹호적이 되었을까? 글쎄, 이제 '고소영'이니 '강부자'니 하는 비아냥은 면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본질이 변하지 않는 한 기득권 정부라는 꼬리표를 떼기는 힘들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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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정부 1년과 인권의 실종 | 창비주간논평 2009-02-20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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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정부 1년과 인권의 실종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겸 NGO대학원 교수

며칠 전 외부강연 자리에서 이런 질문이 나왔다. 이명박정부의 인권성적을 몇점이라고 생각하는가? 아직 학기말이 되지 않아 전체 성적을 매길 수는 없지만, 요즘 하는 행동을 보면 F학점이 아니면 다행이겠다고 대답했다. 촛불집회에서부터 드러난 대로 시민적·정치적 권리는 대폭 축소되었고, 상위 1%에 치중된 정책은 경제적·사회적 권리를 무색하게 만들었으며, 공교육과 모국어에 대한 무지한 공격으로 인해 문화적 권리 역시 땅에 떨어진 상태다. 여기까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요즘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의제가 '인권'이라는 열쇳말 주위에 모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집회와 시위, 비정규직, 언론정비, 철거민, 연쇄살인범 얼굴공개, 사형집행 논란 등 대다수 사회·정치문제가 넓은 뜻의 인권의제 속에서 제기되고 있다. 왜 그럴까? 과거에는 인권을 정치의 일개 분야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어째서 인권이 정치의 전 분야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   

이명박정부의 인권점수는 F학점

정치현상을 해석하는 데에는 구조, 제도, 사상, 심리 등 네가지 방식의 설명이 가능하다. 우리의 경우 민주화투쟁을 벌이던 시대에는 정치를 주로 '구조적'으로 설명하곤 했다. 그러나 제도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은 후부터는 다른 방식의 설명도 나름대로 유효성을 지니게 되었다. 즉, 민주화 단계 이후의 시대 특성상 정치를 설명하는 다양한 방식들이 통하게 되었는데 그런 흐름 속에서 인권이라는 종합적 성격의 주제어가 모든 정치·사회적 이슈들을 대변하는 경향이 생긴 것이다. 앞으로 이같은 경향은 더 심해질 것으로 봐야 한다.

그렇다면 현정권 들어 너무나 악화된 인권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두가지 직접적인 설명을 들 수 있겠다. 첫째, 이명박정부의 '사상적' 성격을 이해해야 한다. 현정부는 소위 실용주의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사상의 나침반이 없는 상태에서 출발했다. 아니, '여의도 정치' 자체를 싫어하는 탈정치적 성향이 농후한 상태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정권도 탈정치에 기대어 정치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그러한 공백을 뉴라이트 같은 설익은 신보수 '정치이론'으로 메워야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도 정치수사의 차원에서 흉내낸 것에 불과했고, 현정권의 본질은 여전히 탈정치―정치냉소주의라고 보는 게 옳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진지한 정치담론이 나올 수 없다. 이명박정부가 정치적 사안의 고비마다 거짓말, 발뺌, 왜곡, 이중어법, 자기기만으로 대응해온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현정권의 특징은 모든 것을 '부인하는' 권력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진실을 부인하는 것이 자신의 사상이자 철학이 돼버린 정권이다.

부도덕한 권력이 인권을 유린하는 세가지 방식

정치에서 부인 기제를 중요한 인권침해 요인으로 간주하는 스탠리 코언 같은 사회학자는 언어적 도덕성이 없는 권력이 세가지 부인 방식에 의존해 정치를 농단하고 인권을 유린한다고 지적한다. 우리 현실에도 정확히 들어맞는 분석이다. 최근 용산사태의 확산에 대응하기 위해 청와대가 군포 연쇄살인사건을 적극 홍보하라고 지침을 내렸던 사건을 예로 들어보자. 처음에는 "그런 공문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문자적 부인'을 시도했다. 그다음에는 "그런 이메일을 보낸 사실은 있으나 개인 아이디어를 전달한 것에 불과하다"는 '해석적 부인'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개인의 단독행동이므로 청와대가 책임질 일은 아니다"라는 '함축적 부인'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이런 식의 언어적 부도덕성 그리고 엄연한 현실의 부인은 대운하에서도, 경제정책에서도, 촛불집회에서도, 용산사태에서도 똑같이 되풀이되었고, 앞으로도 판박이처럼 되풀이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권침해는 계속 일어나고, 그런 사실은 계속 부인되며, 인권의 요구는 정권에 반대하기 위한 좌파의 정치공세쯤으로 치부될 것이다. 부인하는 권력을 선출한 우리 국민의 비극이다.

둘째, 최근 들어 이명박정권은 사적 일탈행위인 범죄와 공적 통치행위인 정치를 '제도적' 차원에서 연결하려는 유혹을 많이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뜬금없이 흉악범죄자의 얼굴사진 공개 여부가 사회의 주요 의제로 떠오르고, 사형수의 처형을 통해 범죄에 대처하겠다는 즉흥적 발상을 내놓고 있다. 그 명분은 강력범죄에 대해 억지력을 높이겠다는 것이지만 극약처방을 통해 전 사회에 위협을 가하고 시민들의 심리를 위축시키겠다는 속내가 들여다 보인다. 정권 초기에 법질서를 강조할 때부터 이런 위험은 예고되었지만 정치적 자원이 일찌감치 바닥을 드러낸 상태에서 이런 추세가 더 악화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현정부의 경쟁논리와 약자경시 '철학'에 비추어보면, 아무리 얼굴을 공개한들, 아무리 사형수를 처형한들, 범죄가 빈발할 조건이 더 늘어나면 늘어나지 줄지는 않게 되어 있다. 오히려 정치가 범죄발생의 배경조건을 형성하고, 범죄가 발생한 후에는 그것을 다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악순환이 일어날 개연성이 커진 것이다. 더구나 응보를 요구하는 인간의 원초적 심리를 자극하여 정치영역으로부터 대중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리는 선전기법을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할 개연성도 커졌다. 최근 새롭게 떠오르는 학문분야인 정치범죄학에서는 이런 식의 사회통제술이 시민들의 인권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고 경고한다. 하나 덧붙일 점은 이러한 사회통제 기법이 정치적으로 성공한 경우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법질서에 대한 기본전제가 잘못됐으므로 길게 보아 대중의 혐오만 키우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고통에 대응하는 인권투쟁

하지만 좀더 근본적으로 보자면 시장만능주의를 국정운영의 기본으로 선언한 순간부터 인권의 파국적 험로가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용산참사가 대표적인 경우다. '구조적' 설명에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장만능주의의 폐해는 시장경쟁에서 도태되는 수많은 피해자들을 양산한다는 점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피해자들로 하여금 시장만능주의의 전제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도록 하고, 자기들이 운 나쁘게 시장 활동의 유탄을 맞았다고 생각하게끔 만든다. 인권은 인간을 억누르는 모든 억압권력에 대해 본질적인 의문을 던지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는 그러한 의문제기 자체가 점점 줄어들고 어려워지는 암울한 시기로 접어들고 있다.

인권이 무차별적으로 공격당할 때 개인의 권리만 피해를 보는 게 아니다. 넓은 의미에서 우리 사회 전반의 안전, 즉 '인간안보' 자체가 흔들리게 된다. 1990년대 중반 유엔에서 처음 등장한 인간안보 개념은 전통적인 안보와 평화 개념을 초월하여 인간중심적인 사회안녕을 지향한다. 즉, "국민국가의 영토보존만이 안보가 아니다" 그리고 "전쟁의 부재만이 평화가 아니다"라는 명제에서 출발하여, 인권이 인간안보의 큰 틀 내에 포함되어야 하고, 인간안보가 사회공동체 내외의 평화유지에 직결된다고 본다. 요컨대 인권이 땅에 떨어지면 사회 전체의 인간안보가 흔들리고, 그것과 함께 평화도 위협받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현시점에서 한가지는 확실해 보인다. 이명박정권하에서 두고두고 정치의 주요 이슈들이 인권문제로 프레임되고, 우리 사회의 인간고통에 대응하는 모든 움직임이 인권투쟁의 형식으로 표출될 것이다. 또한 그것이 우리에게 인간안보와 평화에 대해 발본적인 모색을 요구할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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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 창비주간논평 2009-01-28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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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 / 시인
경찰은 그들을 적으로 생각하였다. 20일 오전 5시 30분, 한강로 일대 5차선 도로의 교통이 전면 통제되었다. 경찰 병력 20개 중대 1600명과 서울지방경찰청 소속 대테러 담당 경찰특공대 49명, 그리고 살수차 4대가 배치되었다. 경찰은 처음부터 철거민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한강로 2가 재개발 지역의 철거 예정 5층 상가 건물 옥상에 컨테이너 박스 등으로 망루를 설치하고 농성중인 세입자 철거민 50여명도 경찰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최후의 자위책으로 화염병과 염산병 그리고 시너 60여통을 옥상에 확보했다. 6시 5분, 경찰이 건물 1층으로 진입을 시도하자 곧바로 화염병이 투척되었다. 6시 10분, 살수차가 건물 옥상을 향해 거센 물대포를 쏘았다. 경찰은 쥐처럼 물에 흠뻑 젖은 시민을 중요 범죄자나 테러범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6시 45분, 경찰특공대원 13명이 기중기로 끌어올려진 컨테이너를 타고 옥상에 투입되었다. 이때 컨테이너가 망루에 거세게 부딪쳤고 철거민들이 던진 화염병이 물대포를 갈랐다. 7시 10분, 망루에서 첫 화재가 발생했다. 7시 20분, 특공대원 10명이 추가로 옥상에 투입되었다. 7시 26분, 특공대원들이 망루 1단에 진입하자 농성자들이 위층으로 올라가 격렬히 저항했고 이때 내부에서 벌건 불길이 새어나오기 시작했으며 큰 폭발음과 함께 망루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다. 물대포로 인해 옥상 바닥엔 발목까지 빠질 정도로 물이 흥건했고 그 위를 가벼운 시너가 떠다니고 있었다. 이때 불길 속에서 뛰쳐나온 농성자 3, 4명이 연기를 피해 옥상 난간에 매달려 살려달라고 외쳤으나 아무도 그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매트리스도 없는 차가운 길바닥 위로 떨어졌다. 이날의 투입 작전은 경찰 한명을 포함, 여섯구의 숯처럼 까맣게 탄 시신을 망루 안에 남긴 채 끝났으나 애초에 경찰은 철거민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철거민 또한 그들을 전혀 자신의 경찰로 여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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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도구, 기득권 옹호장치로 전락하는 법 | 창비주간논평 2009-01-21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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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도구, 기득권 옹호장치로 전락하는 법  
하태훈/ 고려대 법대 교수

똑같은 내용의 법도 누구는 악법(惡法)이라 부르고 누구는 약법(藥法)이라고 맞받아친다. 이러저러한 개정 법률안들이 입법전쟁터에서 일전불사의 태세로 대기중이다. 언제부터 법을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지켜왔는지 법에 매달려 사생결단이다. 마치 법대로 살아온 것처럼. 싸움 끝에도 법대로 하자며 고소고발전으로 이어진다. 정치는 사라지고 법만능주의만 살아 있다. 일이 터질 때마다 특별법을 만든다고 난리다. 필시 여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알고 보니 집권여당 안에 법률가 출신이 무려 20%다. 전체 국회의원 중에도 다섯에 하나가 법조인 출신이다. 그러니 법대로 하잘 수밖에. 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입법부의 할 일은 당연히 법을 만들고 고치는 것이다. 새로 출범한 정권도 공약을 실현하고 정책을 펴기 위해 많은 법제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한 해에도 수없이 많은 법들이 탄생하고 개정된다. 법안 심사와 처리가 마치 공장의 컨베이어 위에서 쉼없이 만들어지는 공산품처럼 일사천리다. 그러나 법률이라고 다 올바르고 정의로운 법인 것은 아니다. 법률이라는 외투를 뒤집어썼다고 다 정의의 법이 되는 것이 아니다. 국민의 공감을 얻는 법률이어야 법다워진다. 만들어놓고 얼마나 많은 법률들이 죽은 법이 되어가는지 셀 수도 없다. 물론 법률이 아무리 반인권적이고 비민주적이라고 하더라도 다수당의 입법의사와 형식적인 합법절차에 따라 제정되었다면 정의로운 법이며 시민이 지켜야 할 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법대로'를 외치는 정부, 불복종하는 민주시민들

그러나 입법자가 다수의 힘으로만 법을 제정하고 개정하고 그에 근거하여 공권력이 행사될 때에는 반드시 시민의 법적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국민의 입법의사를 무시하고 다수당의 입법의지에 의해 실정법이 제정되거나 개정된다면 민주법치국가의 시민들은 실정법에 복종할 의무보다는 자신들의 쌓아온 정치적 자유와 기본권을 방어할 의무와 부정의에 저항할 의무를 선택한다. 이것이 과거 독재시대부터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민주화 이후 20여년간 우리가 경험한 바다. 일시적으로는 질서와 안정을 찾는 것 같지만 국민을 무시하는 것 자체가 무질서이므로 시민불복종에 부딪치게 된다. 무질서와 부정의에 저항하여 촛불이 들불처럼 번지게 되는 것이다.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이다. 우리의 법현실에서 권위주의를 청산하고 법이 정치적 지배의 도구나 기득권 옹호장치로 쓰였던 시대를 한참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마치 움츠리고 있던 용수철처럼 순식간에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 공권력 강화, 공안, 집회시위의 과도한 제한, 의사표현의 자유 제한, 감시와 통제의 강화 등 민주화 이전의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느낌이다. 그동안 정치적 투쟁의 산물이며 피와 눈물로 쌓아온 헌법적 가치인 인권, 인간의 존엄, 법치, 민주, 자유, 정의, 평화 등등의 개념이 뒷전으로 밀려날 위기다. 민주시민에게 돌려주었던 정치, 문화, 사회, 경제와 법이 일부 계층의 소유물로 되돌려질 판이다. 법과 공권력이 정권유지의 도구로 전락할 위기다. 국가와 사회의 안전과 질서를 위해 개인의 인권쯤이야 희생되어도 좋다는 전체주의적 사고가 망령처럼 되살아나고 있다. 대통령이나 법무부장관이 외치는 '법대로', '법치'가 위압수단으로 들린다. 정치세계의 전면에 등장한 시민을 자꾸 법이라는 이름으로 광장에서 쫓아내려는 상황이다. 다시 법이 지배의 도구로 재편되고 시민의 지배자로 군림하려 한다. 정의와 자유를 추구 보장하는 법보다는 질서와 안정을 추구하는 법이 우선시되는 분위기다. 법이념의 양 날개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후자만 강조되면 추락하는 법이다. 법과 질서만 외치다 보면 과도한 공권력 행사는 필수적이고, 용산 철거민 참사 같은 비극은 필연적이다. 무고한 희생 앞에서도 법과 원칙을 운운하며 과격 불법시위 책임으로 돌린다. 그런 법 앞에서 사회적 약자는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더이상 대한민국 국민은 과거 권위주의적 독재국가에 의해 길들여진 복종하는 국민이 아니다. 정치적 목소리도 높일 줄 알고 국가에 대해 불복종의 반기도 들 줄 아는 민주국가의 민주시민으로 성장했다.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뛰쳐나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아고라에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성숙한 시민이 되었다. 헌법 제1조 2항에 적혀 있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아는 민주시민이다.

국민의 입법의사는 국회 다수결보다 우선되어야

국가권력의 정당성의 연원은 국민의사다. 지금 정부의 오류는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은 대통령과 국민 다수에 의해 만들어진 집권여당이므로 정부와 집권여당이 곧 국민의사라고 의제해버린 데 있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반대했거나 선거에 불참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거나 무시한 채. 국민의 선택으로 다수당의 지위를 얻었다고 해서 4년 동안 마음대로 하라는 무조건적 권력부여가 아니다. 설사 지금도 1년 전처럼 여전히 다수의 지지를 받는 집권여당이라고 하더라도 밀어붙이기식 입법은 민주주의 원리에 어긋난다.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고 야당을 설득하고 대화하는 절차가 있어야 입법의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 다수당의 입법의사와 의지가 아니라 국민의 입법의사가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집권여당은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법도 다수결이라면 제정 못할 바 없다는 오만이다. 집회시위를 제한하려는 집시법 개정안도 그렇고 싸이버모욕죄 신설도 마찬가지다.

국가권력은 남용하고 부패하고 부정의를 범하기 쉽다. 그래서 끊임없이 도덕성과 정당성의 연원인 국민의사를 확인하며 지지받고 승인을 얻어야 한다. 민주시민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그들의 견해를 존중할 줄 아는 것이 민주국가의 통치자의 자세다. 다른 이념과 목소리를 관용하고 대화의 상대방으로 여겨 소통하려는 태도가 민주주의의 정치의 기본이다. 그러지 않으면 통치자는 항상 시민불복종의 저항에 부딪치게 된다. 다른 목소리를 '국론분열'이니 '사회혼란세력'으로 낙인찍어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 확립을 명분으로 눌러버린다면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갈등만 커져갈 것이다. 법치국가의 법은 통제와 억압의 도구가 아니라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장치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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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봄 대규모 군중시위 막기 어려울 것" | 창비주간논평 2009-01-05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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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 거버넌스(governance)와 거번먼트(government)는 원래 '다스림(政)'을 뜻하는 동의어다. 다만 후자가 공권력을 갖고 다스리는 '정부'라는 뜻으로 자주 쓰임에 따라 더 넓은 의미의 이런저런 다스림을 가리킬 때 '거버넌스'라는 낱말을 택하기도 한다. 그래서 국가가 아닌 기업(business corporation)이 다스려지는 방식을 corporate governance라 하며 우리말로는 '기업의 지배구조'라고 (약간 부정확하게) 번역한다. 또한, 정부가 일방적으로 통치하지 않고 시민사회의 여러 세력과 협동하고 합의해서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행태를 거버넌스라 칭하면서 더러 '협치(協治)'로 옮기곤 한다.

 

그러나 완전한 전제정치가 아닌 한에는 정부권력의 행사 자체가 여러 세력의 협동을 통해 이뤄지게 마련이다. 예컨대 입헌군주제만 해도 군주가 의회 등 헌법기관들과 '더불어 다스리는' 체제이며, 여기에 정당정치가 가세하면 민·관 사이에 '정치권'이라는 독특한 국정참여집단이 형성된다. 삼권분립은 국가의 입법·행정·사법부가 일정하게 분리돼서 협동하며 통치하는 체제요, 언론을 '제4부'라 일컬을 때는 언론도 국가 거버넌스의 한몫을 담당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셈이다. 정경유착은 정치권과 재계가 서로 상대방의 다스림에 간여하는 나쁜 체제지만 그 또한 거버넌스의 한 형태다. 이 모든 것을 '협치'라는 새 낱말을 만들어 지칭하는 데에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을지라도, 그것은 '거버넌스'의 특정 용법에 대한 해석이지 정확한 번역은 아닐 터이다.  

 

나라 다스리기가 고장난 대한민국

 

2009년 새해를 맞으며 이런 낱말풀이를 해보는 것은 대한민국의 나라 다스리기(=거버넌스)에 심각한 고장이 난 징후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이는 일차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거번먼트)의 고장 사태이기도 하다. 정상적인 의회 기능이 실종되고 독립된 사법부 권력이 위축되는 등 삼권분립이 무너져가는 가운데, 정부권한을 온통 틀어쥔 행정부는 행정부대로 스스로 내건 목표를 달성할 능력이 태무함을 드러내고 있다. 이에 더하여 언론이 자신의 탐욕 때문이건 정부의 탄압 때문이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시민사회의 운동들도 국정의 방향설정에 참여할 능력을 결한 상황이라면, 나라의 거버넌스가 총체적인 위기에 들어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명박정부의 난조는 다분히 예견 가능한 것이었다. 2007년 대선에서 후보의 도덕성 문제는 '경제 살리기' 구호 속에 묻혀버렸지만, 지도자의 도덕성을 개인윤리 차원에서보다 그의 통치능력과 연관시켜 판단할 것을 촉구하는 발언이 당시에도 없지 않았다. "국민 앞에서 거짓말을 너무 거침없이 한다는 것은 주권자인 국민을 무시하는 짓이요, 시민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부패를 척결하며 서민생활을 안정시킬 능력을 원천적으로 내팽개치는 길입니다."(각계인사 33인 시국성명, 2007.12.17)

 

신뢰의 결여가 통치능력의 결함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은 경제위기 국면에서 거듭 확인되고 있다. 그런데 신뢰만 해주면 문제를 풀어갈 다른 능력은 있는 걸까? 함부로 단정할 일은 아니지만, 지금 세간의 불신이 '능력'에 대한 불신을 포함하게 된 것만은 분명하다. 'CEO 대통령'의 신화는 어느새 무너졌고, 정주영 회장 휘하에서 진짜 CEO(최고경영자)가 배출될 여지가 없었으리라는 깨달음이 뒤늦게 확산되고 있다. 더구나 지금은 정주영식 거버넌스가 통하는 시대도 아니지 않는가.

 

이명박정부의 신뢰성은 2008년 촛불시위 과정에서 일차적으로 심하게 손상되었다. 끝없이 꼬리를 문 촛불행렬을 청와대 뒷산에서 내려다보며 즐겨부르던 '아침이슬'을 들었다던 눈물겨운(?) 발언 이후에 곧 대대적인 촛불탄압이 자행되었다. 그러다가 경제위기에 대응하는 모습에서 정부의 권위는 거의 완전한 파탄에 빠졌다. 정치지도자가 국민 앞에서의 말바꾸기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바람에 설혹 좋은 정책을 내놓아도 실효를 보기 어렵게 되었거니와, 세계적인 경제위기를 빙자해서 미국을 포함한 세계의 흐름에 역행하는 규제완화와 부자들의 특권강화에 몰두하는 행태는 도덕성의 문제를 넘어 초보적인 통치능력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현재 정부와 여당은 자신들의 입법현안을 국회의 정상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달성할 것을 공언하며 '전쟁'을 선포하고 '속도전'을 다짐한 상태다. 비록 국회의장의 입장표명 이후 원내대표들의 회담이 열림으로써 한 박자 늦춰지기는 했으나 다수 국민의 반대와 야당의 저항을 물리력으로 진압하고 방송법 개악 등 세칭 'MB악법'을 통과시킬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다만 그럴 경우 대통령과 여당은 승리를 해도 이른바 '피루스의 승리

(Pyrrhic victory)', 즉 전투에는 이겼으나 너무나 많은 사상자를 낸 끝에 결국 멸망하고 만 고대 그리스 피루스왕의 전례를 고스란히 재연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명박정부가 스스로 운명을 재촉할 때 나라는 어찌되는가? 경제위기의 한복판에 헌정위기마저 겹친다면 민생이 완전히 망가질 것은 물론, 극도로 심란해진 국민이 또 한번 불행한 선택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고 막연히 4년 뒤에 보자고 벼르는 것은 4년을 어찌 견딜 거냐고 한숨짓고 앉아 있는 것만큼이나 한가한 짓거리다.

 

그러니 어찌할 건가?

 

유일한 해답은 남은 4년 동안 대통령으로서 꼭 해야 하는 일과 잘할 수 있는 일을 대통령에게 남겨주면서 나머지는 내각과 입법부·사법부·언론·시민사회 등의 몫으로 배분하는 정교한 사회적 장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나라의 거버넌스 체계를 다시 짜는 일이다.

 

이것이 말처럼 쉬울 수는 없다. 대통령의 '대오각성'으로 될 일이라면 애초에 사태가 이 지경에 오지도 않았을 테지만, 실은 이명박 대통령 아닌 그 어느 대통령이라 해도 자기가 획득한 권력을 그런 식으로 선선히 나눠줄 사람은 없다. '참여정부'를 표방한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도, 정부 내에서 책임있게 행사할 권력을 상당부분 자진해서 방기한 전례를 남기기는 했으나 정부와 비정부 분야의 진정한 파트너십을 설계할 의지도 경륜도 갖고 있지 않았다.

 

다른 한편 민주정부 아래서는 시민사회도 거버넌스 혁신을 위해 총력전을 펼칠 동기가 약하다. 죽기살기로 달려들어도 될까 말까 한 일이건만 정부가 알아서 해주기를 촉구하거나 안해줄 때 질책하는 역할에 안주하기 일쑤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명박시대야말로 획기적인 시민참여 확대를 위한 절호의 기회다. 지금은 나라 다스리기의 새로운 체계를 만들지 못하면 국가 전체가 일대 혼란에 빠지고 민주화 20년의 성취, 아니 대한민국 60년의 성취마저 물거품이 될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시민사회가 다양한 분야에서 국가 거버넌스의 일부를 담당할 만한 책임성과 전문성을 함양하면서, 정당·사회단체·노동조합·종교계들이 연대하여 입법부의 활성화, 사법부의 독립, 언론의 건전성 등을 확보할 범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이는 현재로서는 요원해 보이는 일이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른 발상과 열성으로 연대를 추구해야 된다는 성찰이 여기저기서 이미 시작된 것 또한 사실이다.

 

시민참여를 획기적으로 늘리는 '거버넌스'의 개편까지 안 가고 '거번먼트' 차원에서 국정위기에 대처하는 전통적인 방법은 거국내각이다. 그러나 이따금 거론되는 박근혜 전 대표나 그 어떤 인물이 총리가 되더라도 대통령의 역할에 대한 일종의 범국민적 협약이 없는 상태라면 실제로 얼마나 힘을 쓸 것이며 도대체 그 자리를 맡으려고나 할 것인가? 이처럼 거국내각도 거당내각도 안되다 보면 한국의 이른바 보수세력에도 분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자신들의 단기적 잇속 챙기기에만 급급한 세력으로서의 정체가 만천하에 드러난 무리들과, 대한민국의 정당한 성취를 간직하고 지키려는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이 갈라설 때가 온다는 것이다. 당장에는 후자가 비록 소수일지라도 그들이 가세함으로써 대한민국 거버넌스의 쇄신은 큰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어차피 선택은 파국 아니면 새로운 거버넌스다. 내년 봄에 대규모 군중시위가 벌어지는 일은 그 누구도 막기는 어려울 듯하며, 정권이 하기에 따라 겨울이 채 가기 전에 그런 사태가 도래할 수도 있다. 그 주력부대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노래하는 촛불군중일지 아니면 횃불 들기도 마다 않는 배고프고 성난 군중일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아마도 양자의 결합으로 시작되기 십상인데, 정부로서는 후자의 '불법 폭력시위'를 오히려 선호할 가능성도 크지만 그것이 정부에 꼭 유리한 씨나리오가 되리라는 보장도 없다(졸고 ''선진화 원년'과 '잃어버린 10년'' <월간중앙> 2009년 1월호 참조). 어느 경우든 2008년 초여름의 별처럼 아름다운 축제마당이 그대로 재연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관건은 '촛불소녀'로 상징되는 발랄함과 유쾌함이 한층 절박해진 군중과의 결합을 통해 또 한번 새로운 시위문화를 창출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대중의 토론과 합의를 이어받아 언론과 여러 전문집단, 권익집단을 포함한 시민사회가 정당들과 함께 건설적으로 국정에 기여하는 ―단순한 시위참여가 아니라 국가 거버넌스에 참여하는― 길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자면 길을 닦는 작업이 상당정도 미리 진척되어 있어야 하며, 그랬을 때 한국사회에서 국민주권과 민중자치, 그리고 한반도 분단체제의 극복이 2009년의 새로운 촛불과 함께 큼직한 발걸음을 내디딜 것이다.

 

물론 2009년이 종착점은 아니다. 도중의 가장 눈부신 이정표가 못 되어도 좋다. 그러나 전진이 계속됨을 실감할 때 어떤 경제위기도, 정치혼란도 견뎌낼 만해지고 이겨낼 수 있게 될 것이다.

 
 

백낙청. <창작과비평> 편집인,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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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불정책을 옹호함 | 창비주간논평 2008-12-11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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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불정책을 옹호함  
김종엽 /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이명박정부의 성격이, 낡은 성장주의와 미국발 금융위기와 더불어 마찬가지로 낡아버린 신자유주의의 결합이라는 것은 이제 대중적 상식이다. 안팎에서 닥쳐오는 경제위기 속에서 이명박정부는 아주 '실용적으로' 이 두가지 정책 레퍼토리를 구사하고 있다. 시장에 대한 국가개입 요청에 대해서는 터무니없는 분양가와 과잉공급의 주체인 건설사 구제나 변형된 한반도운하 사업 같은 성장주의적 대응을 하고, 경기부양 요구에 대해서는 부자에 대한 감세 같은 신자유주의로 응대한다. 엄중한 경제위기에 대한 이명박정부의 이런 정책적 동문서답을 관류하는 핵심은 아주 좁게 설정된 지지층과 더불어 "상황이 어떻든 챙길 건 다 챙기겠다"는 탐욕에 다름아니다.

이런 후안무치에 대한 사회적 저항의 조직화를 막기 위해 이명박정부는 사정기관들을 동원하고, 숱한 정책연구기관장과 방송사 사장에 더해 정치와 무관한 문화·예술 관련 공공기관장들마저 내쫓고 있다. 그리고 방송에 대한 통제를 항구화하기 위해 지상파 방송사업에 재벌과 보수신문사가 진출할 길을 열고자 하고 있다. 속내가 뻔한 정치산술과 이권추구가 판을 치고 있는 셈이다.    

교육제도 개편의 핵심은 국제중 설립과 3불정책 폐지

그런 중에 이른바 국가 백년대계라는 교육에 대해서도 정부와 여러 관변단체들이 손발을 맞추어 판을 새로 짜겠다며 덤비고 있는데, 이에 대한 공세는 다른 정책영역에서의 이권추구를 한층 넘어서는 야심이 내비치고 있다. 오랫동안 평등주의적 기조 아래 운영된 교육영역을 위계적인 체제로 재편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이 재편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국제중학교 설립과 3불정책 폐지이다.

뉴라이트의 역사관과 다르다는 이유로 근현대사 교과서를 막무가내로 강제 수정하려 드는 작태나 4·19혁명을 데모로 격하하는 경악스러운 역사인식을 좌시할 수는 없지만, 굳이 경중을 두어 말한다면 이런 문제는 국제중학교 허용이나 교육 3불정책 폐지 시도에 비하면 덜 중요하다. 그리고 '반국가교육척결국민연합'이라는 해괴한 명칭의 단체가 서울의 전교조 교사명단을 공개함으로써 일으키고 있는 논란도 숨은 의도가 있든 없든 간에 그 핵심효과는 이런 더 중요한 문제에 대한 전교조의 저항을 약화시키는 데 있다고 생각된다.

국제중학교와 3불정책이 매우 중요한 문제인만큼 이런저런 토론들이 조직되기도 했다. 그때마다 논의의 중심에 등장하는 것은 사교육비 문제였다. 하지만 국제중학교 설립과 3불정책 폐지가 중심 문제인 이유는 사교육비 증대 때문이 아니다. 사태를 사교육비 증감의 견지에서만 조명한다면, 우리 사회 성원들은 문제의 심각성에 오히려 둔감해질 것이다. 사교육비는 지난 몇십년간 꾸준히 증가해왔다. 사교육비 증가를 막는 데 적극적인 정치세력이 집권한 시기에도 그랬고, 사교육비 증가를 막겠다는 입시개혁이 도리어 사교육비를 증대시킨 경우도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어떤 정책이 사교육비를 증가시키느냐 억제하느냐 하는 논란에 냉소적이 되거나 무관심해졌다.

국제중―특목고―명문대로 이어지는 특권적 경로

국제중학교 설립과 3불정책 폐지의 요점은 사교육비 증대보다는 교육을 통한 계급재생산의 특권적 경로가 완성된다는 점에 있다. 국제중학교는 예전 특목고가 그랬듯이 계속해서 팽창해나갈 것이다. 생각해보라. 서울에 국제중학교가 2개나 생겼는데, 부산과 광주와 대구 같은 도시들에 그것을 금지해야 할 어떤 이유가 있겠는가? 2010년에 있을 지방선거와 교육감선거에서 국제중학교 설립은 핵심의제로 떠오를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진보적인 정당들조차 이 문제를 비껴가고서 선거에서 승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국제중학교는 전국적으로 확립된 진학경로로 발전해갈 것이다. 그리고 특목고와 연결되는 하나의 통로를 형성해나갈 것이다.

이런 통로를 다시 명문대학들과 연결하기 위해서는 3불정책 폐지가 요청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굳이 3불정책의 공식적인 폐지가 요구되는가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특목고의 팽창으로 인해 평준화가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대학들은 사실상 고교등급제를 시도하고 있다. 연·고대가 수능성적만으로 정시의 50%를 뽑는 전형을 채택한 데서 보듯이, 본고사 금지 또한 그렇게 중요한 의제가 아니다. 본고사 폐지는 대학이 언제나 쓸 수 있는 카드 한장을 손에 넣는 것일 뿐이다. 지뢰밭이나 다름없는 기여입학제 문제도 현재 국면에서는 논의의 장을 형성하는 것 이상은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3불정책 폐지는 편법적 관행을 법적 상태로 전환하는 데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립대학총장협의회나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이 끈기있게 이런 주장을 해온 것에서 보듯이, 이런 전환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일이다. 이 전환이 없다면 2009년 고대 수시 2-2 일반전형에서처럼 대학은 계속해서 a와 k 값을 가지고 '장난'을 쳐야 하고, 그만큼 많은 지원자들에게 분노와 원한감정을 심는 동시에 그 자신은 권위의 실추를 경험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특권은 조잡한 협잡의 산물로 의심받게 된다. 그래서는 특권이 제 값어치를 하기 어렵다. 특권은 항상 그것을 정당한 성취로 전환하는 마법을 필요로 하며, 그 일차적 과제는 위법의 낙인을 벗고 합법성을 획득하는 일이다.

3불정책마저 폐지된다면…

그렇기 때문에 허울만 남았다고 해서, 그저 상징적 이름으로만 남았다고 해서 3불정책을 손쉽게 보수층과 상류층에 넘겨주어서는 안된다. 실제를 빼앗긴 것보다 이름을 넘겨주는 것이 더 큰 것을 양보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름이 남았을 뿐이라면 더욱 그 이름을 지켜야 하며, 그것이 이름에 걸맞은 실제를 회복할 디딤돌을 잃지 않는 길이다. 뿐만 아니라 3불은 우리 사회가 스스로 그어왔던 선이다. 이 선 이외에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교육제도에 대해 합의한 것이 무엇이 있었는가? 그 선이 자주 침범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그 선을 지워야 하는가? 아무런 다른 합의선이 형성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선을 지우는 것이 수상한 협잡과 사회적 배제로 얼룩진 특권의 경로를 매끈하게 다듬는 데 봉사하는 것인데 말이다.

물론 3불정책을 고수하는 것으로는 전혀 충분치 않다. 애먼 전봇대를 뽑으며 시작한 정권이 3불정책을 전봇대마냥 뚝딱 뽑고자 덤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대지에 뿌리를 내린 나무가 못 되었기 때문이다. 3불을 지켜야 하지만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것이 더 넓게 뿌리내리게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뿌리는 더 나은 교육적 비전과 그것을 제도화하려는 실천임을 마음에 새기고 그것에 진력하자.

김종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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